[책/2001 문학 뉴웨이브]김운하 '137개의 미로카드'

  • 입력 2001년 12월 23일 17시 30분


김운하는 최근작 ‘137개의 미로카드’에서 자신의 지식을 몽땅 쏟아 부었다.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소설의 광주리에 넘쳐 난 것은 박식의 잡동사니들이 아니다. 이 소설은 차라리 용광로이고, 그 안에는 수십 년에 걸친 한국 지식사의 핵심을 관통하겠다는 의지가 끓어 넘치고 있다. 그 의지는 한국 사회가 직면해 있고 내가 처해 있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최상의 인식을 향해 이글거린다.

그러나 최상의 인식을 야금(冶金)해내는 일은 실상 이 용광로의 몫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저 최상의 인식을 향한 의지를 절망의 화염 속에서 무참히 녹여버리고 있다. 그 최상의 인식 자체가 바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텍스트를 철학으로부터 소설로 이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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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이 소설은 지식들의 싸움이 전개되는 경기장이고 그 싸움에서 최종의 승리자를 선언하는 법정이다. 137개의 미로카드를 남기고 잠적한 ‘그’를 둘러 싼 애인, 친구, 평론가들의 추측과 해석 그리고 ‘그’가 남긴 미발표 원고들은 두루 승리자의 금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 소설은 최신 버전의 ‘정통 종합철학’이랄 수도 있다.

그러나 승리의 ‘선고문’을 손에 쥔 자가 왜 잠적을 했는가. 그는 또 왜 소설 속에서 이름이 없는가.

이 승리의 ‘논고(論告)’ 자체가 스스로를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낡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면 그 새로운 생각을 드러내는 몸통, 즉 글쓰기 자체도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잠적한 ‘그’를 둘러싼 온갖 기사와 평론들은 낡은 글쓰기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남긴 미발표 원고들도 그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글쓰기를 최대치의 혼란 속으로 끌고 가지만, 그것은 생각과 글쓰기의 근원적인 불일치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고뇌의 유출에 불과할 뿐이다.

그점에서, ‘그’는 누구인가로 시작해, 그가 남긴 카드들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를 거쳐, 세계는 어떠한가에 대한 판결로 이어지는 평론가들의 해석은 새로운 생각의 출현을,다채롭지만 여전히 낡은 상투적 글쓰기들로 덧칠하고 땜질해서 망각 속으로 유폐시키고 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로 시작해, 세계는 어떠한가에 대한 해석을 거쳐, 나는 어떠한가로 이어지는 ‘그’의 미발표 원고(이 미발표 원고에 대해 누가 순서를 매겼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의미심장한 부분이다)는 결국 낡은 글쓰기로 귀착하고야 마는 데 대한 극도의 절망으로 부글거리고 있는 것이다.

실종이라는 형식으로 폭발한 그 절망의 파편들로 남은 게 바로 137개의 미로 카드이다. 이 미로 카드는 바로 생각과 글쓰기의 근본적인 모순을 지시하는, 엄연히 지금·여기에 놓인 사태이다. 이 사태의 현존성이 결코 끝날 수 없는 질문으로 독자를 몰고 간다. 낡은 생각과 새로운 생각의 저울질로, 또한, 새로운 생각의 낡은 글쓰기로의 되풀이되는 회귀로. 불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으로.

김운하의 소설은 최인훈 이청준 이인성… 으로 이어져 온 소위 ‘지식인 소설’의 한 갈래의 극점에 가 닿아 있다. 다른 갈래에서 독자는 김영하의 ‘아랑은 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영하가 연 길이 지식의 유쾌한 놀이를 향해 있다면 김운하가 뛰어든 불밭은 지식이 파열되는 장소이다. 둘 모두 썩 야들야들해진 오늘의 한국 소설에 대한 중요한 도전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지식은 관념의 자리가 아니라 세계와 정면 대결하는 자리인 것이다.

정과리(문학평론가·연세대 교수)

▼김운하는 누구?

1964년 경북 영천 출생.

1988년 서울대 신문학과 졸업.

1995년 단편 ‘죽은 자의 회상’으로 등단,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

1996년 장편 ‘사랑과 존재의 피타고라스’

1998년 장편 ‘언더그라운더’

1999년 소설집 ‘그녀는 문밖에 서 있었다’

2000년 제1회 동아인산재단 문학창작지원 펠로쉽 선정.

2001년 장편 ‘137개의 미로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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