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누명 수지 金’ 올케 악몽같은 10여년 회고

  • 입력 2001년 11월 14일 23시 39분


“14년 만에 진실이 밝혀져 기쁘긴 하지만 그동안 우리 가족이 겪은 아픔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나요.”

1987년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발표한 ‘북한 공작원에 의한 홍콩교민 윤태식(尹泰植)씨 납북 미수사건’이 부인 김옥분(金玉分·일명 수지 김)씨를 살해한 남편 윤씨의 자작극으로 밝혀지자 수지 김의 올케 이명수(李明水·52)씨는 그동안 가족들이 겪었던 서러움에 치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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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충주시 풍동에 살고 있는 이씨는 14일 기자가 찾아가자 악몽과도 같았던 10여년의 세월을 떠올리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시누이가 간첩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동네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더군요. 빨갱이 집안이라고. 슈퍼마켓에도 못 가고 집안에만 있어야 했어요.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아들은 학교에서 놀림 당하고 구타까지 당해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어요. 충주 시내에서 교외로 이사했지만 빨갱이 집안이란 딱지는 계속 붙어 다니더군요.”

결국 수지 김의 언니는 그 다음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 변사체로 발견됐고 시어머니는 화병으로 실어증까지 걸려 시름시름 앓다 97년 사망했다. 화물차 운전을 하던 이씨의 남편은 동생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이리 저리 뛰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거의 매일 술로 살다 결국 지난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수지 김의 가족은 모두 1남 6녀. 현재 동생 4명이 살고 있다. 이씨는 86년 10월 말 홍콩에 살던 시누이가 한 남자와 아홉살짜리 여자애를 데리고 와서는 그 남자와 결혼하겠다며 허락해 달라고 졸랐다고 회상했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무척 똑똑하다며 그 남자에 대해 자랑하더군요. 달갑지는 않았지만 제 남편은 반승낙을 했고 시누이는 사흘 뒤 다시 홍콩으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그 해 11월 초 느닷없이 돈 300만원이 급하게 필요하다는 전화가 왔는데 그게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은 몰랐어요.”

이씨는 그 후 시누이에 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다 87년 1월 윤씨가 기자회견하는 것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우린 그 때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시누이가 절대 간첩일 리가 없었거든요.”

하지만 수지 김의 가족들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지난해 1월 주간동아의 ‘수지 김 살해사건 의혹 보도’를 보고 동생이 간첩이 아니라는 확신이 선 이씨의 남편은 국정원 청와대 검찰 등에 탄원서를 보내 동생의 사망사건을 재조사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기다려 보라’는 대답밖에 들을 수 없었다.

“그동안 간첩 집안이라는 누명을 쓰고 서럽게 살아온 우리에게 남은 것은 진실뿐이에요. 그래야 저세상에서라도 시누이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지 않겠어요.”

언니가 간첩이라는 이유로 이혼까지 당했던 셋째동생 옥림씨(40·충북 충주시)는 2주 후 홍콩의 한 공원묘지에 한줌의 재로 묻혀 있는 언니를 14년 만에 찾아갈 예정이다.

<박민혁기자·충주〓장기우기자>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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