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언론법 '대한제국 신문지 조례'제정 배경

  • 입력 2001년 9월 18일 18시 38분


대한제국이 국내 최초의 언론법인 ‘신문지 조례’를 만든 것은 언론의 폭로와 여론형성 기능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료를 발견한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교수로부터 ‘신문지 조례’의 제정 경위, 사료적 가치 등을 들었다.

-‘신문지 조례’가 만들어진 배경은….

“‘신문지 조례’가 만들어지기 한해 전인 1898년 격일간이던 ‘독립신문’(1896년 창간)이 일간으로 전환했고 ‘매일신문’(4월) ‘뎨국신문’(8월) ‘황성신문’(9월)이 잇따라 창간됐다. 이들 신문은 열강들이 대한제국을 상대로 비밀리에 추진하던 이권 탈취를 폭로하고 무능한 정부를 질책했다. 보도 이후 독립협회는 정부에 사실확인을 요구했고 대책을 따졌다. 이 해 10월 고종이 신문조례를 만들라는 조칙을 내렸다.”

대표적인 이권탈취 폭로사례는 1898년 2월 독립신문이 보도한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요구. 당시 러시아는 조차지로 예정된 땅 3분의 1을 러시아에 넘기라고 강권했다.

한편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은 외교문서가 유출된데 항의하며 신문규제법을 만들라고 대한제국을 압박했다.

-위암 장지연 선생의 편지묶음에서 이 문서가 발견된 이유는 무엇인가.

“위암 선생은 당시 시사총보 주필로서 ‘신문지 조례’가 어떤 식으로 언론을 통제할지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황성신문 사장이자 중추원 의관이었던 남궁억선생이 이 법을 심의하게 되자 평소 친분이 있던 위암에게 그 내용을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

법 입안을 맡은 행정기관이었던 내부(內部)는 일본에서 1891년(명치23년)경 시행되던 신문지 조례를 본떠 법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내부의 안을 검토한 중추원은 규제가 가혹하다며 법 수정을 위해 남궁억 당시 황성신문 사장 등 세 사람을 수정위원으로 선출해 3개항을 삭제했다. 당시 신문들은 “조례가 시행되면 신문은 세력있는 사람에게 아첨이나 하든지 글자랑이나 할 뿐 인민의 억울한 일, 관리의 탐학, 정부의 실책에 대해 한마디도 못할 터이니 신문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독립신문 1월 27일자 사설)라고 비판했다.

-‘신문지 조례’는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언론 역사에서 주목되는 이유는….

“이번 자료를 통해 그동안 최초의 언론법으로 인정되어온 광무신문지법(1907년)이 결국 이 조례의 계승일 뿐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신문발행 허가제, 보증금제, 사전검열 등 일제시대 언론자유를 탄압했던 광무신문지법의 조항들이 ‘신문지조례’에서 똑같이 발견된다. 법을 통해 언론을 통제하겠다는 ‘신문지 조례’의 제정 취지는 ‘언론은 통제 대상’이라는 한국현대사에서의 굴절된 전통의 시발점이다.”

정 교수는 ‘신문지 조례’와 광무신문지법의 전문을 분석한 논문을 곧 전문 언론&잡지에 발표할 계획이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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