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

  • 입력 2000년 12월 22일 18시 44분


◇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 / 송우혜 은희경 박자경 외 지음 / 376쪽 8000원 생각의나무

벌써 겨울이다. 나는 남루한 서른여섯 번째 페이지를 힘겹게 넘기고 있는데, 문득 앞에 와 툭 떨어지는 것이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소설집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가운데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모임이 있는데 벌써 5년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실상 동인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인데, 다섯 해를 거듭 만나고 있다면 어떤 공유점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는 본디 명실상부한 동인 모임보다는 이처럼 느슨하고 여유로운 모임을 좋아한다. 문학인이라는 것이 애시당초 비슷할 수가 없는 사람들인데 동인이라니. 그보다는 각자의 세계를 추구하면서 문학하는 태도나 가다듬는 자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나 역시 지인(知人)들끼리 이런 사치스러운 문집을 내고 싶었던 참이니, 소설집의 면면이 궁금치 않을 수 없다.

책장을 여니, 동인 가운데 한 사람 송혜근씨가 붙인 서문이 눈에 들어온다. 느림을 그리워하며 이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문학의 매력은 느림에 있다”는 것이다. “한 템포 느린 것은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숨통을 죄는 규칙을 깨는 것은 파격이요, 자유이며, 인간선언이다. 문학은 느림을 지향하여 순수로 돌아가야만 파격이 될 수 있고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별다른 마음의 동요는 일지 않는다. 느림이라는 이름을 빈 상표가 많았던 탓이다.

나 역시 느리게 살고 싶으나 원고더미에 묻혀 월마다, 계절마다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내년에는 꼭 그렇게 살지 않을 작정이다. 그러면서도 도대체 어느 작가들이 그리움이 된 느림을 찾아 책을 꾸몄는지 살펴보게 된다.

은희경, 박자경, 송혜근, 송우혜, 김지수, 전경린, 한정희, 윤명제, 조민희씨. 이름들이 쟁쟁하다. 은희경씨, 이야기 끌어가는 솜씨가 여전한데 이번에는 더 여운이 있다. 또 한 해 넘기느라고 그러나? 전경린씨,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세상의 일탈자로 살고 싶은 마음이 다가온다. 진해에서 만났었는데, 잘 있는지? 김지수씨의 ‘패랭이꽃 한 송이’ 참 좋다. 부도 잦은 세상 끌어안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렇지. 다 기형인데 그것을 더 넓게 보지 않으면 어떻게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살아넘기나. 송혜근씨 ‘거울이 놓인 방’, 시선이 참 깔끔하고 세련되어 있다. 남편 그리워하는 엄마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하다….

겨울이 성큼 다가와 몸살이다. 망년회도 스케줄인가? 저녁에는 꼼짝 말고 책이나 읽어야겠다.

방민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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