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연의 문학리뷰]문학속에서만 가능한 황량한 독백

  • 입력 2000년 12월 13일 19시 02분


◇하일지作 '진술'

하일지의 ‘진술’은 처남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한 대학교수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그는 십여년 전 여고생 제자와 사랑에 빠져 프랑스로 함께 유학을 떠났다. 고생스러운 공부를 마치고 박사학위를 딴 그는 귀국하여 국립대학 철학과 교수로 임용된다. 생활이 안정되어 아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점점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아내는 분명히 그의 곁에 있는데 처남을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은 아내가 팔년전에 이미 죽었으며 그 충격으로 그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살인과 망각이라는 흥미로운 모티프를 거머쥔 ‘진술’은 일인칭 화자의 목소리를 통한 범죄 진술이라는 서술 기법을 쓰고 있다. 살인 용의자를 통해 모든 사건의 정황이 전달되는 서술 방식은 추리 소설과 할리우드 스릴러 영화에서 간간이 사용되는 트릭이다. 작중 인물의 내면을 통해 치밀하게 구성되는 단계적인 스토리 진행 덕분에 이 소설은 매우 쉽고 흥미롭게 읽힌다.

◇지식인 자기성찰 빠져

추리 소설의 대중적 형식을 갖추긴 했지만 하일지의 ‘진술’은 그의 이전 작품들과 내용적으로 매우 흡사한 면모를 갖고 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작품인 ‘경마장 가는 길’을 비롯하여 일련의 ‘경마장’ 연작들 속에서 증명된 바 있듯이 하일지 소설이 거듭 문제삼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메타적인 성찰이다. 메타적 글쓰기는 관습적 사회의 허위성을 조롱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의 소설이 표방하는 언어 유희는 실험성의 측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한때 문단을 떠들썩하게 한 포스트모더니즘론과 신세대 문학 논쟁의 중심에 하일지 소설이 놓여 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하일지 소설의 애독자라면 ‘진술’의 주인공들이 일련의 문학적 상징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쉽게 눈치챌 것이다. 작가는 사랑과 죽음, 살인과 망각의 상징 뒤에 ‘문학’의 성채를 숨겨두고 있다. 남편이 하이데거에 버금가는 철학자라고 믿는 예쁘고 귀여운 ‘아내’는 작가가 꿈꾸는 열광적인 ‘독자’의 모습과 기묘하게 닮아 있다. 주인공들의 사랑을 가로막는 무식하고 폭력적인 가족들은 작가의 진심을 왜곡하는 엉터리 독자로 패러디된다.

주인공이 형사들을 향해 자신의 진실성을 주장하는 장면 역시 심상치 않은 은유를 담고 있다. 그것은 ‘경마장의 오리나무’라는 심오한(!) 상징의 의미를 모르는 무심한 독자들을 향한 작가의 격렬한 항변에 다름 아니다.

◇새로운 시각 찾기 힘들어

한동안 하일지의 작품은 소설 장르의 위기와 혁신을 진단하는 사례로 가장 많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진술’에서 일상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시각의 새로움을 읽어내기는 힘들 것 같다. 지식인적 정체성에 대한 자기모멸과 풍자가 사라진 내면 고백은 불온한 독자의 틈입을 일찌감치 봉쇄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타인에 대한 절실한 사랑의 고통이나 망각의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것도 아니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살인자의 고독은 자기의 내부로만 향하는 완강한 나르시시즘의 수사로 독자에게 전달된다. ‘진술’은 문학이라는 너울 속에서만 가능한, 진정으로 고독하고 황량한 모놀로그의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 보이고 있다.

백지연(문학평론가·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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