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박물관 프레시움 개관]117년 신문사 집대성 '자료 寶庫'

  • 입력 2000년 12월 11일 19시 34분


1883년 10월 30일 창간된 근대적인 의미의 한국의 첫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부터 2000년의 인터넷 신문까지.

15일 개관을 앞둔 신문박물관(Presseum·프레시움) 은 117년 한국 언론사 자료의 보고(寶庫)로 주목받고 있다. 600여점의 전시품을 포함해 모두 5000여종 수만점의 유물을 소장한 신문박물관은 한국 언론사를 집대성하는 국내 처음이자 유일의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PRESSEUM 신문박물관

- 한국의 언론 어제오늘 한자리에
- 117년 신문사 집대성 '자료 寶庫'
- 최첨단 영상통해 콘텐츠 '감동체험'
- "어! 기생들도 신문광고 냈었네"
- 아이와 함께 나누는 산 역사 체험
- 21세기 '광화문의 문화명소' 막올라

우선 일제시대의 자료는 한성순보 창간호에 실린 지구 전도, 영국인 기자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의 편집국 모습(1907년), 을사보호조약을 통탄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1905년1월20일) 을 실은 황성신문을 비롯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창간호(1910년8월30일), 동아일보 창간호(1920년4월1일)와 조선일보 창간기념호(1920년3월9일), 1940년8월30일 총독부의 강권으로 폐간된 조선일보 편집국 모습과 같은날 동아일보의 폐간사 등이 전시되어 있다.

50년대 대구매일신문과 경향신문의 필화 사건, 72년말 신문 사진의 크기 논조 등을 일일이 지시한 계엄군의 검열판,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문(74년10월24일)과 독자들의 격려광고, 80년대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국제신문 종간호(80년11월25일) 등 해방이후 언론사 격동의 현장을 담은 자료도 즐비하다.

국내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최초의 민간지인 독립신문, 만세보, 중외일보, 경성일보, 조선인민보, 전우신문 등 그동안 국내에서 발행된 신문의 진본을 소장하고 있어 당시 신문제작방식이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호외도 일제시대 이후 최근 것까지 4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또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이 1909년 사망했을 때 국내 언론인들의 추도문을 모은 만사집(輓詞集)과 대한매일신보사에 걸려 있던 태극기, 국내 첫 언론학 박사 김동성이 쓴 신문학 교재 신문학 (1924), 일제시대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국민 계몽을 위해 제작 배부한 달력이나 전국 지도, 80년 신군부의 계엄시 동아일보사에 진주한 장세동 대령 (전 안기부장)이 철수하면서 남긴 육필 편지 등도 언론사적 가치가 큰 전시품이다.

신문박물관에는 이밖에 고속 인쇄와 자동 접지를 가능케 한 마리노식 윤전기를 비롯해 납활자 주조기와 지형 연판 등을 공정 순서대로 진열해 20세기 신문 제작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주동황 광운대 교수(신문방송학)는 "한국 언론의 변천을 당시 실물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연구 및 교육적 가치가 크다 며 정치 사회사를 배경으로 한 언론사의 흐름을 알수 있어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고 말했다.

신문박물관 전시 및 소장 품목은 인터넷(www.presseum.org)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소장품은 어떻게 수집했나▼

동아일보사는 고 일민 김상만(一民 金相万)전 회장이 생전에 "신문박물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강조함에 따라 해방이후 대부분의 신문관련 자료를 보관해왔다. 마라톤대회 기념품으로 나눠준 수건도 보관해왔으며 폐기된 제작기계에도 절대 버리지 말 것 이라는 지침 을 붙여 놓았다. 한국 언론사 연구의 대가인 정진석 교수(한국외국어대)는 황성신문 등 300여점을 기증하거나 만사집과 대한매일신보의 태극기 등 귀중한 자료를 영구 임대해줬다. 김형선(온양 뉴코리아관광호텔 식음료과장), 김성근(한국정신문화연구원 위원), 조우성(인천 광성고 교사)씨 등 수집가들도 어렵사리 구한 소장 자료를 흔쾌히 내놓았다.

<허엽기자>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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