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신간]'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편 '향수'

  • 입력 2000년 12월 1일 19시 54분


■ 향수 /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204쪽 8000원 민음사

5월 스페인에서 첫 선을 보인 후, 이번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한국에서 출간된 밀란 쿤데라(71)의 ‘향수’는 80년대 세계문단을 석권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의 속편이자 완결편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참을 수 없는…’이 체코의 68사태를 배경으로 정치적 격변과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유하는 개인의 삶을 그렸다면, ‘향수’는 89년 동구권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망명객들이 느꼈던 향수와 귀환, 그리고 삶의 근원에 대한 그들의 존재론적 고뇌를 다루고 있다.

체코 망명객들이 타지에 나가 있었던 바로 그 20년의 간극을 쿤데라는 오디세이의 방랑과 귀향에 비유한다. 오디세이는 20년 동안 오직 향수 속에서 귀향만을 생각한다. 심지어는 아름다운 칼립소와 사랑을 나눌 때조차도 그는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는다. 그러나 막상 이타카로 돌아오자, 그는 자신의 삶의 정수가 사실은 지난 20년 동안의 방랑에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낯설고 나이든 페넬로피 보다는 젊고 다정한 칼립소와의 생활이 더 낭만적이었던 것이다.

체코에서 프랑스와 덴마크로 망명한 ‘향수’의 두 남녀 주인공 조제프와 이레나도 고국에 대한 향수에 시달리다가 공산주의가 붕괴하자 20년만에 고향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20년의 진공상태가 초래한 무관심과 단절뿐이다. 즉 망명객들은 향수만 있었지 지난 20년의 공백에 대한 기억이 없었고, 고향사람들은 망명객들에 대한 기억만 있었지 그들에 대한 향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향친지들은 조제프와 이레느의 망명생활에 대해 관심이 없고, 두 사람 역시 변해버린 고향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한다. 향수와 환멸, 또는 그리움과 상실은 인간의 운명이자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향수‘에서 쿤데라는 다시 한번 예속과 속박보다는 망명과 방랑을 긍정하는 문학의 본질을 확인해주고 있으며, 중력의 무거움을 벗어나는 존재의 가벼움을 찬양하고 있다. 이 작품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두 쌍의 섹스 장면도 각각 고상함과 무거움을 벗어 던진 가벼움의 상징적 제스처로서 상처입은 주인공들을 심리적으로 치유한다. ‘향수’에서도 쿤데라는 정치적 무거움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하는 개인의 삶에 대한 고뇌와 사유를 유려한 문체로 풀어나가고 있다.

‘향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마지막에 해외로 망명한 주인공들이 그동안 살아 있다가 20년 후 다시 체코로 귀환했을 때의 문제점을 다룬 소설이다.

그것은 어쩌면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쿤데라 자신의 망명생활에 대한 성찰인지도 모른다.

작품의 원제가 ‘무지(L’ignorance)’인 이유는, 어원상으로 향수는 “소식을 알지 못하는 고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역사는 수많은 망명객을 산출했다. 망명과 향수의 갈등 속에서 고뇌하는 지상의 모든 망명객들에게 쿤데라의 ’향수‘는 삶의 근원과 본질에 대한 값진 성찰을 제공해주는 좋은 문학작품으로 다가온다.

김성곤(문학평론가·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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