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신간]"취하신 님이 찢어놓은 비단적삼…"

  • 입력 2000년 10월 27일 18시 47분


□'기생시집' / 황진이 외 지음/ 문정희 엮음/ 해냄/ 225쪽/ 1만2000원

‘취하신 님 사정없이 날 끌어단/ 끝내는 비단적삼 찢어놓았지/ 적삼 하날 아껴서 그러는 게 아니어/ 맺힌 정(情) 끊어질까 두려워 그렇지’

술에 취한 님이 찢어버린 비단 적삼에 조선 기생의 슬픈 운명이었을까. ‘취하신 님께(贈醉客)’를 남긴 부안 기생 매창(梅窓)은 38세로 불우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허균의 문우(文友)로 빼어난 시조와 한시를 여러 편 남겼다.

황진이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조선의 기생은 탁월한 예술인이기도 했다. 사대부의 한시에 화답할 만큼 문학적 조예가 깊어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해어화(解語花)’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뭇 남정네의 품에서 미소와 가무를 팔아 연명하는 한 서린 꽃들은 시들면 잊혀질 운명이었다.

중견 여류시인 문정희씨가 여러해 동안 자료를 뒤져서 덧없이 사라져가는 보석 같은 기생 한시들을 한데 모았다. 황진이 매창 운초 매화 송이 뿐 아니라 생몰 연대나 출신지를 알길 없는 무명씨의 작품을 아울렀다. 정지상 이규보 이율곡 정약용 임제 등 당대 최고의 문필가들이 바친 헌시(獻詩)도 찾아 실었다.

기생시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김안서(필명 김억) 신석정 이은상의 명 번역문이 이들의 고운 시심의 결을 온전하게 살리고 있다. 그리운 님에 대한 상사(相思)를 다룬 시편이 많지만 비운의 한을 꾹꾹 삭힌 작품도 여러편 눈에 띤다. 기생이란 비극적 신분에서 오는 현실의 불행이 시의 생성에 더할 수 없이 절실한 본질적 모티브를 제공했을 터.

엮은이는 “남성 중심의 왜곡된 시간의 바위 속에서 작희(作戱)의 대상이었던 기생들을 꺼내어 우리 문학사의 소중한 페이지에다 완전한 시인으로 인양시키고 싶다”는 바램을 밝혔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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