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경북 문경 봉암사 조실 추대 계기 통제풀어

  • 입력 2000년 10월 12일 19시 38분


신라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로 천여년의 선맥(禪脈)을 이어온 경북 문경 희양산 자락의 봉암사.

일반인의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고 경내에는 TV 라디오 신문 자동차 등 일체의 세속적 이기(利器)가 들어올 수 없는 청정도량. 12일 진제(眞際)스님을 이곳 태고선원 조실자리에 맞아들이면서 모처럼 산문을 활짝 열었다.

봉암사에 근대적인 선원이 처음 개원한 것은 1947년. 성철(性徹)스님을 필두로 청담(靑潭) 자운(慈雲) 우봉(愚峰)스님 등 4명이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을 고쳐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곳이 봉암사였다. 이후 향곡(香谷) 월산(月山) 종수(宗秀) 보경(寶境) 법전(法傳) 성수(性壽) 혜암(慧菴) 도우(道雨) 등 모두 20명이 결사에 참여했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다.

이 ‘봉암사 결사’는 사찰 운영과 승가 생활을 혁명적으로 바꿨다. 법당에 부처와 부처 제자만 모시기로 하고 칠성탱화 신장탱화 등을 없앴다. 오늘날 사용되는 것과 같은 가사 장삼 발우도 새로 만들었다. 부목과 공양주까지 내보낸 채 스님들이 손수 나무를 해 밥하는 포살(布薩)도 해방이후 처음 시작됐다. 신도도 부처의 제자인 스님에게 3배를 하도록 함으로써 조선조 억불정책으로 천민취급을 받던 스님들의 위상을 바꿨다. 신도들이 스님에게 베푸는 개인적인 공양도 모두 없애고 오로지 대중공양만 받았다.

당시 결사에 참여했던 스님 가운데 총무원장이 6명, 종정이 4명 나왔으니 봉암사는 현대 불교 조계종의 종풍 형성의 직접적인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4년 서암(西庵)스님이 물러나 빈 조실자리를 97년 범룡스님이 맡았으나 1년반 남짓 소임을 보다가 연로해 사임한 이후 지금까지 자리가 비어있었다.

이 시대 수행도량으로서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는 봉암사는 모든 것이 공부하는 수좌들을 위해 존재한다. 일체의 문중파벌 의식을 배제해 주인과 객이 따로 없다. ‘객이 주인처럼 살고 주인이 객처럼 사는 곳’이 바로 봉암사다.

낙락장송과 산죽이 어우러진 오솔길을 따라가면 마애보살상이 나그네를 반기는 곳. 개울가 바위벽에 ‘고산유수 명월청풍(高山流水 明月淸風)’이란 최치원의 글귀가 아직도 선명한 희양산 자락의 닫힌 산문.

<문경〓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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