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유미리 에세이집]'훔치다 도망치다 타다'

  • 입력 2000년 4월 21일 21시 18분


재일교포 작가인 유미리(32)의 에세이집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김난주 번역·민음사)가 내주초 출간된다. 96년 아사히신문에 연재됐던 것으로 같은 해 일본에서 ‘사어사전(私語辭典)’이란 제목으로 묶여나온 것이다. 연대기적으로는 가족해체에 대한 서늘한 묘사로 일본 문단의 주목을 받은 ‘풀 하우스’와 ‘가족시네마’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원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에세이집은 사전의 몸을 빌려 언어에 의해 연상되는 개인적 체험을 모은 글이다. ‘보조열쇠’부터 ‘헤어짐’까지 47개 단어를 등장시켜 간단치 않은 자신의 ‘인생사전’을 펼쳐 보이고 있다. 작품의 미덕이라면 솔직함 그 자체다. 집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 헤어진 남자친구의 연락을 받기 싫어서(‘전화’)라던가, 외출복은 모두 브랜드 제품(‘속물근성’)이란 고백은 애교스럽다. 하지만 자기 가슴이 유두함몰(‘유방’)이라던가 초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오줌을 쌌던(‘비밀’) 치부마저 공개한 데서는 당혹감마저 생겨난다.

게중에는 솔직함이 과하다 싶은 대목도 없지 않다. 결손가정, 이지메, 가출, 혼외정사 같은 익히 알려진 드라마틱한 개인사를 감안해도 그렇다. 초등학교 때 버스 옆자리 남자의 추행(‘성욕’)과 수학교사의 성희롱(‘거짓말, 소문’)을 애써 거부하지 않았던 일, 중학교 때 동성 친구를 사랑했던 경험(‘동성애’) 등 ‘성욕의 발아기’에 대한 도발적인 진술이 이에 해당된다. ‘지금까지 사귄 남자들은 모두 40대 중반이 넘은 유부남들’(‘여자·남자’)이라는 고백도 당당하다.

개인사외에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가족사도 평범하지 않다. 쉰 살이 넘어 실리콘으로 가슴을 부풀린 할머니, 버는 데로 써버리기 일쑤였던 겉멋 든 아버지, 술만 마시면 스트립쇼를 벌였던 악다구니 어머니, 가녀린 몸매로 에로배우로 나선 여동생 등등. 미워하면서 사랑하는 이들이 이야기가 ‘가족시네마’의 원형이 됐음은 짐작하는 바다.

대수롭지 않게 적고 있지만 유미리 내면의 상처는 넓고 깊어 보인다. ‘누군가 인간의 최대의 병은 희망이라고 말했는데, 희망이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면회’). 점쟁이의 입을 빌어 ‘만년은 고독하고 비참하다’(‘점쟁이’)고 단언하기도 한다.

이런 비관적인 인식조차 위트 넘치는 문체와 함축적인 잠언으로 풀어내고 있어 울림의 진폭이 소설보다 크게 느껴진다. 그는 여기서 ‘나는 여자와 작가를 양립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엄마나 아내 역할까지 하라면 도저히 불가능하다’(‘아내’)고 잘라 말하고 있다. 자신이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앙앙거리는 갓난 아이를 들어 베란다에서 아래로 내던지는’ 오래된 상상 때문이라고 썼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뒤인 지난 2월17일 유미리는 아버지가 밝혀지지 않은 남자 아이를 낳아 별 탈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