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로드' 직장]남은 者의 비애

  • 입력 2000년 4월 3일 19시 22분


G광고대행사의 K차장(33)은 최근 광고수주에서 탈락하자 휴직계를 던졌다. 남들처럼 벤처로 가려는 것도, 일이 싫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좀 쉬어야겠기에.

“팀원이 절반으로 줄고나니 각 광고주에 대해 정성을 다 할 수가 없어요.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이지만 성과물이 점차 ‘일상적’이 되고….”

‘오버로드(Overlord)’의 시대.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과중한 업무에 몸살을 앓고 있다. 멀게는 국제통화기금(IMF)사태로, 가깝게는 벤처열풍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떠난 뒤 남은자는 남은 곳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일 때문에 ‘못살겠다’고 아우성. 그래도 어쨌거나 표면적으로 일터는 ‘돌아간다’.

직장인들의 ‘견뎌냄’은 어디까지일까.

▼ 망가지는 분위기 ▼

G산업의 Y대리(28·여)는 부원이 7명에서 2명이 줄자 회의 분위기부터 달라졌다고 말한다. 자기 아이디어를 채택시키기 위해 무슨 이야기든 열심히 하던 게 불과 1년 전. 이제는 모두가 ‘묵비권’을 행사한다. 떠난 사람들이 하던 일을 고스란히 넘겨 받은터에 스스로 일을 만들 필요가 없으므로.

서울 강남의 한 PCS 고객 센터. ‘낮은 목소리’로 상담해도 고객으로부터 항의를 받기 일쑤인 이곳에선 요즘 일주일에도 몇 번씩 고성이 들린다.

지난 해 증시열풍으로 전화 상담직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자 직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K과장은 “각자 맡은 일이 많아지다보니 상담의 질이 계속 떨어진다”며 “하루 180∼200통씩 전화를 받던 숙련된 직원이 하루 150통도 못 받는다”고 했다.

▼ 계속되는 악순환 ▼

LG-EDS에 근무하는 S씨(29)는 지난해 12월부터 두달사이에 팀원의 약 3분의 1이 물갈이됐다고 말한다. 업무를 제대로 인수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추가로 3개 이상의 시스템을 관리하는 경우 시스템에 이상이 생기면 대응책도 늦기 마련. 그는 무엇보다 ‘곁다리’로 해야하는 일이 전공보다 더 많아진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전문성의 시대인데,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아요. 벤처에 가면 한 분야의 일만 하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벤처로 가려는 사람들이 나오죠.”

▼ 열심히 하는 것만으론 역부족 ▼

대기업 5년차인 N대리(32). 출근해 컴퓨터를 켜면 화면엔 ‘오늘의 일정’이 뜨고 중요한 모임이 있기 1∼2시간 전엔 알람도 울린다.

그가 ‘업무일정관리’ 프로그램을 사용한 건 얼마 전 황당한 경험 때문. 서울 H호텔에서 열리는 수요모임에 허겁지겁 달려갔더니 덜렁 혼자였다. ‘어찌된 일이지? 오늘이 분명 23일이고, 수요일인데….’

알고 보니 책상위엔 2월 달력이 펼쳐져 있었는데 날짜만 보고 약속 장소에 갔던 것.

삼성경제연구소 정권택수석연구원(인사조직)은 “개인의 생산성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며 “처음엔 ‘짜내면 짜지겠지만’ 개인의 업무과다는 곧 성과물의 하강곡선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시절엔 기업이 얼마나 발빠르게 리엔지니어링 아웃소싱 등으로 과감하게 시스템을 바꾸느냐가 기업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지적이다.

▼ 바꿔져야 산다 ▼

광고사인 제일기획의 H대리(27)는 얼마 전 프리젠테이션 준비를 하며 ‘몸’으로 변화를 느꼈다. ‘하늘’이던 A국장이 “내가 차 빼서 1층에서 대 놓을테니까 자네는 천천히 내려오지”하는 것이었다.

“밤샘한 직원들을 배려한 말이지만 불과 1년 전엔 상상도 못할 일이죠.”(H대리)

올해초 회사측으로부터 E메일도 받았다. 해마다 2월에 개최된 등산대회를 언제쯤 했으면 좋겠는지, 어느 산으로 갔으면 하는지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다. 직원들의 의견에 따라 등산은 결국 4월로 연기됐다. 또 지난달엔 의자를 바꾸면서 로비에 5종류의 의자를 전시한 뒤 투표로 정했다. 지하엔 사원들을 위한 사우나와 헬스시설도 마련 중.

과감한 인센티브제, 능력에 따른 직책과 연봉의 도입 등도 남아있는 자의 ‘마음 달래기’정책의 일환이다. L차장(35)은 “무엇보다 회사가 사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이는 게 위안”이라며 “뒤에서 불만이나 토로하던 시대가 지나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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