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미디어와 미국선거'/"선거보도는 정책비교 우선"

  • 입력 2000년 3월 10일 19시 21분


▼'미디어와 미국선거' 토머스 패터슨 지음, 미국정치연구회 옮김/오름 펴냄/332쪽 1만2000원▼

정치학자(하버드대 언론정치공공정책연구소 교수)인 저자가 미디어에 대해 갖는 시각은 “적대적인 언론 때문에 선거에 졌다”고 볼멘 소리를 늘어놓는 정치가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언론은 후보자의 거짓이나 속임수를 유권자에게 알려야 하지만 지금은 이런 수위를 훨씬 넘어섰다’는 대목이나 원제가 ‘Out of Order(‘고장난’이란 뜻)’라는 데 이르면 미디어 불신론자 내지는 미디어 통제자라는 인상마저 갖게 된다.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1960년부터 92년까지의 미국 대통령선거 분석’이라는 실증적 자료 위에서 전개돼 함부로 무시할 수 없다.

▼후보 사생활 캐기 몰두 美언론 보도태도 비판▼

이 책은 ‘대통령선거와 같은 중대한 정치적 행위가 있을 때 진정으로 유권자의 이익을 보호하려면 언론이 과연 무엇을 보도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철없던 어린 시절 마리화나를 피웠든, 불륜을 저질렀든 대통령후보라면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없이 진실해야 한다는 논리로 후보를 검증하는 미국언론의 보도태도와 달리 저자는 후보에게 ‘허용 가능한 거짓말’과 ‘허용해선 안 되는 거짓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일례로 클린턴이 취임 초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제니퍼 플라워스와의 관계를 부인한 것은 비록 거짓이기는 했지만 민주정치과정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허용 가능하다. 그러나 지킬 의사가 전혀 없는 정책을 추구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유권자의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하도록 속임수를 쓰는 것이므로 결코 허용되어선 안 되는 것으로 분류한다.

저자는 이 두가지 거짓말 중 오늘날의 미국언론이 허용 가능한 거짓말 여부를 캐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고 비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정치와 정치가에 대한 회의를 갖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통치권자의 리더십에 누수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미국 언론이 이런 태도를 유지하는 이유가 정치, 특히 선거를 일종의 ‘게임’으로 분석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선거가 통치에 관련된 광범위한 정책을 다뤄 기사거리가 무궁무진한 데도 불구하고 흥미로운 이야기 찾기에만 몰두한다는 것이다. 92년 미국 대선 막바지에 ‘클린턴이 영국유학 시절 모스크바를 여행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전국민의 의료서비스를 좌우할 클린턴의 의료보장개혁안보다 더 크게 다뤄진 것이 상징적인 예.

▼유권자 이익보호 더 중요 공약검증에 중점둬야▼

그러나 저자가 이처럼 자신있게 “후보의 행동이 아니라 정책을 비교하라”고 미국언론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사생활에서는 거짓말투성이였던 대통령후보라 할지라도 일단 대통령이 된 뒤에 자신의 공약만큼은 기필코 지켜냈다는 최근 몇십년간의 사례가 든든히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공약(公約)이 곧잘 공약(空約)이 되고 공약이행의 검증이나 책임소재 규명도 요원한 한국 정치 현실. 선거보도 태도와 정치행태 중 과연 무엇부터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인가. 미국정치연구회 옮김. 332쪽. 1만2000원.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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