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독서]300년 時空넘어 빛 발하는 '燕巖 사상'

  • 입력 2000년 3월 3일 23시 29분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대문호인 연암 박지원 (1737 ∼1805). 저자들은 연암의 글을 이렇게 평가한다. '난공불락의 성채'(정민), '과학과 예술의 탁월한 결합'(임형택).

왜들 그렇게 연암을 찬탄하는가. 300년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연암의 정신과 산문미학이 아직도 빛을 발하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

고전문학 전공자들이 쓴 이 두권의 책이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소장학자인 정민 한양대교수(39)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 중진학자인 임형택 성균관대교수(57)의 '실사구시의 한국학'. 연암의 글에 담겨 있는 철학적 예술적 사유를 들여다보고 시대에 맞게 다시 해석한 책들.

'비슷한 것은 가짜다'는 연암의 대표 산문 40여편을 25개의 주제로 나누어 원문과 그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다. 철학사상 예술론 산문미학 등 연암의 지적 사유를 오늘의 문맥으로 읽어낸

다.

'실사구시의 한국학'은 조선시대 실학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 이 시대의 인문학 공부에 대한 반성이다. 전체적으로 실학을 논하고 있지만 연암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 나오는 연암의 산문 '까마귀 이야기'를 보자. '까마귀는 과연 검은가. 그 날개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나 홀연 얕은 황금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연한 녹색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으로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취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해도 괜찮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또한 괜찮을 것이다.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우리가 검다고만 믿어온 까마귀 깃털 속에 이렇듯 다양한 빛깔이 숨어있음을 간파한 연암.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는 언제나 불변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늘 변화를 중시함으로써 상대성을 인정하고 만물을 균등히 보려는 그의 실사구시 정신. 바로 지금 여기의 이야기다. 연암을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연암의 산문미학 역시 매력적이다. 글 전편에 흐르는 고도의 비유와 상징, 함축.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한번 파악하고 나면 그 깊이와 넓이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그래서 글은 풍요롭다. 그

로인해 연암의 사상은 더욱 빛난다.

정교수의 고백. "연암의 글 속에서 이미지는 살아있다. 내 손 끝이나 눈길이 닿을 때마다 그것들은 경련한다. 살아있는 이미지 속에서만 빛을 발하는 삶의 정신."

'실사구시의 한국학'은 연암의 글과 사유를 통해 오늘날의 인문학적 글쓰기를 반성한다. 논문이라는 요즘의 형식이 인문 사회 자연의 복잡다기한 실상과 본질을 어떻게 생생한 감동으로 담

아낼 수 있을지. 연암처럼 부정과 창조의 변증법을 실천할 수 있을지.

임교수는 연암의 글에서 인간의 숨소리를 듣고 한국인의 주체성과 동아시아의 미래를 예견하는 통찰력, 풍부한 문학성 예술성을 발견한다. 그리곤 "그 과학성과 문학성의 조화를 배우자"고

말한다.

18세기 격변의 시대를 이끌었던 연암의 치열하고도 투명한 지적 풍경. 그 풍경이 감동으로 살아 숨쉬는 글들. 그것은 시대를 초월한다. '비슷한 것은…' 365쪽, 9000원. '실사구시의 …'

489쪽, 1만8000원.

<이광표기자 >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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