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뒤에 숨긴 '유머 테러'… 인신공격 칼날

  • 입력 2000년 2월 27일 19시 21분


“박OO교수님께서 이번에 학과장을 맡아주시는 게 어떨까요?”

서울 A대학. 본관 회의실의 분위기는 진지하다. 보직을 결정하기 위해 열린 단과대 교수회의. 김교수의 추천을 받은 박교수는 “제가 어떻게…”라며 겸손해 했다. 최교수가 말한다.

“박교수님, 그러지 마시고 이번에 보직 한 번 맡아보세요. 박교수님이라면 잘∼말아드실 수 있을 겁니다.허허….”

▼ 유머야? 인신공격이야? ▼

서울 K종합병원 내과 H박사는 “아침 회의에 들어가면 꼭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농담도 하게 되고…그러는 게 회의인데, 요즘 들어서는 인신공격성 유머가 크게 늘었다”는 얘기.

최근 D상사의 회식자리에서는 상금 10만원을 놓고 돌아가면서 참석자의 이름으로 3행시 짓기대회가 벌어졌다. 우승자 이대리가 이정진과장(가명)의 이름으로 만든 작품. ‘이〓이 X같은 자식이, 정〓정서도 X같이 불안한게, 진〓진드기처럼 여직원들 꽁무니만 쫓아다녀요.’

▼ 싫다! ▼

지금까지 유머의 소재는 ‘공적’(公敵)이었다.

1980년대, 실명을 거론하기도 하고 참새를 등장시키기도 하며 우회적으로 ‘씹었던’ 공적은 독재자와 독재상황. 1990년대만 해도 사람들은 최불암, 사오정을 등장시켜 권위주의적 기성세대와 세상을 비웃었다. 조직에 충성하는 것만으로도 연공서열제의 계단을 차근 차근 밟아오를 수 있었던 국제통과기금(IMF) 관리체제 이전까지, 사회의 공적은 때로 내부의 단결을 다져주기도 했다.

하이텔 유머작가 김은태씨(ID 아하누가·그래픽인사이드 디자인팀장). “과거의 유머는 사회지도층에 대한 게 많았고, 힘없는 ‘우리’ 들은 그저 피식 냉소하는 선에서 끝났다.” 그러나….

▼ 밉다! ▼

요즘 유머의 표적은 공적이 아닌 ‘내 앞의 바로 너’.

IMF체제는 세상의 패러다임을 경쟁과 경쟁력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정서는 아직도 연공서열제. 경쟁력서열, 재산서열, 주식서열 등 다른 종류의 서열이 생기는 상황을 홀로 달래기엔 부아가 솟구친다. 고려대 한성렬교수(사회문화심리학)의 말마따나 “아픔을 속으로 삭이는 한(恨)의 정서가 사라진 것”.

눈뭉치에 짱돌을 넣듯, 웃음속에 칼날을 박아 ‘나보다 잘난 너’에게 가볍게 던진다. ‘나름대로 잘난 나’를 내세우기 위한 몸부림의 하나로 우회적인 ‘깎아내리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화를 낼 수 없다. 왜? 유머니까. “웃자고 한 얘기잖아. 아니면 말고…”

입만 열면 상대당(黨) 비방에, 근거없는 주장을 쏟아놓고도 “아니면 말고…”하는 정치판과 신기하게도 닮아 있다. 웃음이 안나온다는 점만 빼고.

▼유머라는 이름의 테러? ▼

과거 ‘최불암 시리즈’에서 공격당한 것은 최불암 개인이 아니라 최불암으로 상징되는 기성세대였다. 그러나 최근 PC통신에서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H.O.T.시리즈’에서 H.O.T.는 사회 상황이나 공적이 아닌 ‘개인의 적’으로 등장한다.

“H.O.T.가 조성모 뮤직비디오에 나옵니다. 처음에 나오는 붕어들 있죠? 이게 바로 H.O.T.입니다.”

립싱크를 하는 H.O.T.를 붕어에 빗댄 유머다. H.O.T.뿐 아니라 혀 짧은 여자탤런트 최모씨, 걸그룹 등이 사정없이 도마에 오른다.

인터넷 사용자가 늘면서 커뮤니케이션의 제한이 사라지고 연예인이나 빌 게이츠의 편지까지 E메일로 받아볼 수 있게 됐다. 대화상대도 동네친구가 아니라 ‘지구인’.

전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사람들과 무한 정보를 나누게 되면서 H.O.T.를 연예스타나 우상이 아닌 나와 동급으로 보는 이들이 생겨난다. 직장인들의 모델도 수출팀의 성실한 박부장뿐만이 아닌, ‘골드뱅크의 김진호사장’. 깎아내리기 유머의 대상도 무한정 넓어진 것.

한국전산원 이석재박사(사회범죄심리학)는 “이같은 깎아내리기 정서의 바탕에는 좌절감이 깔려 있다”고 설명. 내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이 결실을 거두지 못할 때 상대방의 격을 끌어내려 내 수준과 만나도록 하려는 의도다.

한교수는 이를 과도기적인 화법으로 본다. 불만과 좌절을 직설법으로 표현하는 서구식 모델이 될지,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겉치레)를 짊어지고 사는 일본 모델이 될지는 모르지만 IMF체제가 가져온 정신적 충격이 안정되기까지 ‘유머라는 이름의 테러’경보는 한동안 유효하리라는 분석이다.

<나성엽기자> news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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