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독서]'역사와 영화'/허구일지라도 영화는 역사다

  • 입력 1999년 12월 3일 19시 15분


▼'역사와 영화' 마르크 페로 지음/까치 펴냄▼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영화는 ‘거짓말(Fiction)’일 뿐인가? 그 거짓말을 사실(史實)로 삼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현대 프랑스 역사학계의 대표적 인물인 저자는 주저없이 “그렇다”고 말해온 연구자. 그는 뭇 사학자들의 의심에 찬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60년대부터 영화를 역사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방법론을 개발했으며 몇편의 기록영화 제작을 맡기까지 했다.

‘가설은 무엇일까? 현실의 이미지든 아니든, 다큐멘터리이든 픽션이든, 실제 이야기든 순수한 창작이든 영화는 역사라는 것이다. 인간의 믿음 의도 상상력같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것, 이것들이 실제의 역사만큼이나 역사라는 것이다.’

역사 자료로서 영화의 가치에 대해 저자는 먼저 ‘반(反)역사’‘기록문서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비공식 역사’라는 점을 강조한다.

오늘날 러시아혁명의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상징되는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의 장면들. 그러나 에이젠슈타인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 당시(1925년)에는 러시아 사람들 누구나 흑해함대 반란을 얘기할 때는 오차코프호만을 얘기했지 포템킨은 잊고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를 통한 비공식 역사의 부상(浮上)인 셈이다.

20세기 후반에 영화가 사료로서 주목되는 이유가 단지 기술적 발전, 문화 소비양식의 변화 때문만일까. 저자는 오히려 식민지국가의 해방을 주요한 요인으로 꼽는다. 각각의 민족 집단은 자신의 기억을 찾기 위해서 스스로의 역사를 구성하며 과거를 ‘새롭게’ 만들었다. 이러한 역사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비록 허구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이 역사였다’고 믿는 어떤 것. 그 사실 자체가 문서자료들만큼이나 가치있는 사료로 인정된다. 영화는 그 허구 중 중요한 양식이다. 저자가 “역사가의 첫번째 임무는 여러 제도권 기관들이 이 사회로부터 빼앗아간 역사를 되찾아주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잇닿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료로서의 영화 가치를 주장하면서 저자는 이미지 조작의 허상을 직시한다. 저자는 “이미지들은 정보에너지를 제공하지만 그것은 마치 길들여야 할 동물과 같다”고 말한다. 대사와 음악의 힘 같은 후광을 넘어서서 이미지를 ‘꿰뚫어보고 비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료로서 영화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는 프랑스의 역사잡지 ‘아날(Annales)’의 책임편집인이며 러시아 혁명시기 소련사를 전공했다. 그 때문인지 이 책에 언급된 영화 대부분은 영화를 선전도구로 확실하게 인식했던 소비에트 연방과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제작된 것 등 국내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흑백시대의 영화들. 그러나 역사학 방법론으로서 영화읽기를 원하는 사학도에게는 물론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도 의도하든 않았든 자신들이 어떻게 역사쓰기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하는 책이다.

93년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판됐으며 서울대 주경철교수(서양사학과)가 번역했다. 285쪽. 9000원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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