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단군 인식」문제는 없나? 뜨거운 논란

  • 입력 1999년 8월 10일 19시 31분


20세기의 막바지에 단군을 둘러싼 논쟁이 첨예하게 벌이지기 시작했다.

민주화투쟁을 거쳐 생명운동을 펼쳐온 김지하가 최근 단군을 화두로 들고 ‘율려(律呂)학회’와 ‘민족정신회복시민운동연합’을 이끌며 상고사 바로세우기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수 학자들은 단군을 근거없이 과장해서는 안된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단군의 실존 여부와 고조선의 연대 및 위치 등 단군을 둘러싼 논란은 그동안 여러 차례 되풀이됐다. 하지만 시인 김지하가 나섰다는 점에서 이번 논란은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주장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단군 조선은 홍익인간의 이상이 실현된 국가로 실존했다는 것. 또 하나는 단군 조선의 상고사에서 인류 원형을 찾아 우리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 나아가 인류의 정신적 방향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김지하는 단전호흡의 일종인 ‘단학’ 수련과정에서 정신적 원류와의 합일이라는 신비적 체험을 통해 정신적 혼돈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이 정신적 원류는 곧 우리 민족의 집단무의식이며 이를 회복함으로써 신세대를 비롯한 현대인들이 정신 문화적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부도지(符都誌)’에 나오는 ‘마고성(麻姑城)’을 인간 본원의 이상향으로 제시한다. 김지하는 ‘부도지’가 신라시대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라고 주장한다. 마고성은 이성중심주의와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서 화해와 상생, 홍익인간과 이화(理化)세계가 실현된다는 ‘신시(神市)’라고 설명한다. 우리 몸 안에 울리는 우주의 음률인 ‘율려’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마고성과 같은 이상세계를 실현하고 현세의 대립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상고사를 회복하자는 것은 국수주의가 아니라 원형 회복을 통해 전인류를 위한 신시를 미래에 건설하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부 학자들도 김지하의 상고사 바로세우기 운동에 동참했다. 박성수 정신문화연구원 객원교수는 단군을 신화로 격하시킨 일제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해 ‘단군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연세대 강사인 우실하씨(사회학)는 고대사 연구에서 거론되는 자료들이 위작일지라도 그 속에서 우리의 사유방식을 다루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비판적이다. 학계에서도 단군 조선을 신화로만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연대나 규모를 실증적 근거 없이 과장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이기백명예교수(한림대 사학과)는 “학문의 진리와 이치를 무시하고 신화적인 세계에서 정신적 구심점을 찾는 것은 곤란하다”고 지적한다. 최병헌교수(서울대 국사학과)도 “고대사학자의 입장에서 사료를 연구하는 것과 사상운동으로서 고대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또한 복잡한 현대사회 문제의 대안을 고대에서 찾겠다는 것은 너무 소박하고 현실성도 없다”고 비판한다.

사회적 위기를 맞아 정신적 구심점을 찾기 위해 단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상운동은 고려시대 이래 늘 존재해왔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같은 사상운동을 위해 “단군은 BC 10세기 이상 거슬러 올라가기 어렵다”는 기존 역사학계의 성과를 부정하는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이에 김지하는 “과학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나는 한번도 논리에 의해 사상 전환을 해 본 적이 없다. 과학 경제 정치보다는 상상력과 미적인 교육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단전호흡 수행과 율려극 ‘신시’제작 등 젊은이들이 참여할 다양한 이벤트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상운동이든 역사학과 연관시킬 때는 엄밀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박광용 가톨릭대 국사학과교수)는 지적은 음미할 만하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khc@donga.com

▼ 단군 논쟁사

단군과 상고사에 관한 논란의 역사는 몽고 침입 당시 단군을 민족의 구심점으로 삼았던 고려시대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논란과 직접 연관이 있는 논쟁은 1909년 나철이 주도한 단군교(1910년 대종교로 개칭)의 창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식민주의사학자들이 단군을 상상적 신화로 격하시키는데 맞서 대종교는 단군을 신격화했다. 일제시대, 이처럼 민족의 뿌리를 강조한 대종교는 민족적 호응을 얻었다.

제2대 교주 김교헌의 ‘신단실기(神壇實記)’와 ‘신단민사(神壇民史)’가 1914년에 발간되면서 대종교의 입장은 체계화됐으며 이를 비판하는 측의 논란도 본격화됐다.

60년대 다시 불붙은 논쟁은 대종교보다도 고 안호상(초대문교부장관)의 ‘정사찾기위원회’가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군시대 영광의 재현을 외치며 고 이병도(전 서울대교수) 계열의 실증사학을 일제식민사학과 싸잡아 비판했지만 쇼비니즘적 성격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이 논쟁은 80년대 법정과 국회로까지 비화됐다. 안호상 측의 주장은 교과서 개정에도 반영되어 단군은 신화라는 서술이 완화됐으나 논쟁의 양측 모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들어 재야에서 다시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단군상의 목이 잘리는 사건이 발생, 충격을 주었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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