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술렁이는 대덕연구단지]불꺼진「과학메카」

  • 입력 1999년 4월 22일 20시 05분


전국에서 학력수준이 가장 높다는 대전 유성구 대덕연구단지.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산하 광통신연구실에는 간판만 그대로 붙어있을 뿐 신기술을 연구하던 과학자 10여명은 찾을 수 없었다.

얼마전 연구원 전원이 사직서를 던지고 미국 루슨트테크놀러지로 이직했기 때문. 이 연구소의 자랑이던 광통신 연구는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한 연구장비만 덩그러니 남겨놓은 채 맥이 끊겼다.

국내 첨단과학의 메카로 불리던 대덕연구단지는 이제 천덕꾸러기 신세다.

한국원자력연구소의 K연구원(40)은 “이민이나 외국회사 취업, 벤처기업 창업 등 새 길을 찾아 연구원들이 앞다퉈 연구소를 떠나고 있다”면서 “대덕은 지금 전시(戰時)상황”이라고 말했다.

60여개의 정부출연연구소와 기업연구소가 몰려 있는 이곳에서 불과 1년 사이에 5천여명의 연구인력이 희망 또는 명예퇴직으로 떠나갔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촉망받던 한 연구원은 현지 연구소의 집요한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고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귀국, 대덕연구소에서 일하다 3년만에 명예퇴직 당해 쫓겨나기도 했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 그의 가슴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제32회 과학의 날인 21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취임후 처음으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방문해 과학의 날 기념식에 참석했다.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운 대통령을 대덕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였지만 1천7백여명의 과학자들은 이날 대덕체육공원에 모여 ‘한국의 과학기술을 살리고 과학자의 생존권을 지키자’며 시위를 벌였다.

과학자들은 이날 총파업을 결의, 서울까지 올라와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같은 시간 김대통령은 과기원 강당에서 ‘과학자가 존경받는 나라를 만들자’고 강조하고 있었다.

외국기업이나 대학교수에 비해 턱없이 적은 박봉과 정부예산을 타내느라 제안서 쓰기에 급급한 출연연구소의 분위기는 작년 구조조정 한파 이후 더욱 삭막해졌다.

오후 5시반만 넘으면 연구원들은 밀물처럼 대덕단지를 빠져나간다. 밤새도록 연구하느라 불이 꺼지지 않던 시절은 옛날 이야기다. 불안한 미래, 이직 등으로 연구의욕은 땅에 떨어진지 오래다.

대덕에는 올들어 또다시 구조조정의 한파가 불고 있다. 계속된 예산 삭감으로 출연연구소마다 올해에도 10∼20%의 연구인력을 내보내야 한다.

반면 외국기업의 물밑 스카우트 제의는 연구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인터넷 E메일을 통해 실력있는 연구원들에게는 10만달러가 넘는 연봉을 제의하기도 한다.연구소의 복도마다 연구원들이 모여 이민이나 해외취업 정보를 나누는 모습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작년 구조조정으로 대덕을 떠난 연구인력중 절반 이상은 20∼40대. 한창 연구에 몰두할 연령층이다. 이에 따라 연구소마다 중간 연령층이 빠져나가 중도하차한 연구프로젝트가 쌓여 있다.

대덕단지 연구원 10명중 8명이 연구소를 떠나고 싶다고 응답한 설문조사 결과는 우리 과학기술계의 암담한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대덕〓성하운·김종래기자〉jongra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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