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80돌 특별기획]임정은 3·1민족정신 결집체

  • 입력 1999년 2월 25일 19시 24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13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출범했다. 국내외 각지에서 모여든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에서 분출한 온 민족의 염원을 모아 임시정부의 창건을 이날 국내외에 공식 선포했다.

정부 선포식에 앞서 이들은 4월10일부터 이틀간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이란 국호와 연호를 제정했다. 당시 채택된 임시헌장 10개조는 민주공화제를 규정한 우리헌법의 효시(嚆矢)였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정부로서 임정은 동학의 시민혁명의식, 독립협회의 자립정신, 그리고 3·1독립정신을 이어받은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체였다.

임정은 일제의 중국침략으로 충칭(重慶)으로 옮겨 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27년간 내정 군사 외교 정책을 수립, 민족의 독립역량 증대를 위해 노력했다.

임정의 역할 정통성 등에 대한 평가와 관련해 그동안 학계에서는 여러 쟁점들을 놓고 논쟁이 치열했다. 그러나 80년이 흘렀지만 임정에 대한 연구성과는 세월의 부피만큼 쌓이지 못했다.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는 부분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21세기와 통일시대를 앞두고 한민족 독립운동사의 중심에 섰던 임정의 역할과 의미를 재정리하고 그동안의 쟁점을 종합적으로 소개한다.》

★역할 재평가와 국내 연계활동★

80년대 민중사관이 대두된 이후 상당수의 소장학자들은 임정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임시정부가 몇몇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에 불과했다며 아예 정통성을 부인하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임정이 외교노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계급적 한계 때문에 효과적인 독립투쟁을 벌이지 못했다는 게 그 논거다.

그러나 최근 이같은 극단적인 주장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임시정부가 군주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민주공화제를 수립함으로써 민족 민주통치체제의 모체가 됐다”고 평가한다.

안동대 김희곤(金喜坤)교수는 “어떤 이념이나 발전 가설에 임시정부사를 억지로 부합시키려는 학문태도는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임정은 일제의 탄압으로 세가 약화되기 전까지 교통국(交通局)과 비밀행정조직인 연통제(聯通制)를 통해 국내와 실질적인 연관을 맺어왔다.

이를 통해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와 국내의 군 면 리 단위까지 긴밀한 연락관계를 맺고 국내 각 행정지부에 책임자를 둬 교통통신 및 자금조달의 업무를 맡기기도 했다. 1919년 7월 처음 실시된 연통제의 경우 21년까지 경상남북도 충남 제주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운영됐다. 임정에 대한 선전 통신 자금수합 밀정보고 등 연락업무를 담당했던 것이다.

교통국은 22년초까지 평안남북도 함경남도 황해도 서울 만저우(滿洲) 등지에서 활발하게 운영됐다. 교통국은 1군에 1국, 교통소는 1면에 1개소가 설치돼 주로 군자금 모집전달과 국내의 정보수집 분석, 무기의 수송전달 등을 담당했다.

★외교-군사활동 어떻게 했나?★

임정은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대한민국의 독립과 정부승인을 얻기 위한 국제여론 조성에도 앞장섰다.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정치 재정 군사적 지원을 얻어냈으며 쑨원(孫文)의 호법(護法)정부로부터는 공식 승인을 받아내기도 했다.

단국대 한시준(韓詩俊)교수는 “임정이 외교활동에만 치중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창설 이후 일관되게 군사적 독립활동도 펼쳐왔다”고 말했다.

임정은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전시태세를 준비하기 시작해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했다.

김구(金九)주석과 임정요인들은 41년 12월9일 일본의 진주만 침공을 계기로 나라를 빼앗긴 이후 처음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조국독립의 의지와 결의를 세계에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일 선전포고를 계기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임정과 광복군에 참여했다.

이청천(李靑天) 이범석(李範奭) 등이 중심이 된 광복군은 42년 조선의용대 광복군 편입 및 지속적인 초모(招募)공작을 통해 병력을 확충, 각종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특히 광복군은 미중앙정보부(CIA)의 전신인 미육군정보전략처(OSS)와 연합해 구체적인 국내진공작전까지 수립하는 등 명실공히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제에 맞서 싸웠다.

임정초기의 ‘승인외교’에서 이같은 ‘참전외교’로의 전환을 통해 2년 뒤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자유와 독립을 보장받는 결정적 계기를 맞게 됐다.

★법통 계승 굴절의 역사와 과제★

48년 헌법제정 당시 헌법전문에서 대한민국이 임정을 계승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제헌헌법은 ‘우리 대한민국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5·16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62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임정을 계승한다는 내용은 빠져버렸다.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로 변했다. 임정 대신 5·16이 들어섰던 것이다.

임정이 헌법 전문에 다시 등장한 것은 4반세기가 지난 뒤인 87년 6·29선언이후 대통령직선제로 헌법을 개정하면서였다. 당시 헌법조문화작업을 주도했던 현경대(玄敬大·한나라당)의원은 “임정의 법통계승을 명시함으로써 일제지배로 인한 민족사의 단절을 연결시켜 국가의 정통성을 회복했다”고 설명했다.

상하이의 첫 임시정부 청사가 어디에 위치했는지 등 확인되지 않은 연구과제가 수두룩하다. 중국 내에 남아 있는 임시정부 유적에 대한 정밀조사, 중국의 각 대학이나 지방에 남아 있는 당시의 신문 잡지, 미국 일본쪽의 보관자료의 발굴 작업을 하루빨리 서둘러야 한다. 학자들은 “20, 30년대 임정의 독자활동과 대외관계를 밝히는데 관건이 될 재정문제와 국내 연계공작, 환국전후의 외교활동 등을 밝히기 위해 국내외의 자료발굴과 현장조사를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최영훈기자〉c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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