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티즌/일산 이유선씨등 3가족]엄마들 「품앗이과외」

  • 입력 1998년 9월 27일 19시 58분


《70년대초 확산되기 시작한 우리의 아파트. 아파트는 온돌방 문화를 거실문화로 바꾸면서 새로운 생활공간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지난 30여년간 우리네 생활 모습도 크게 바꿔 놓았다. 이제 우리는 그 아파트 생활인을 아파티즌(Apartizen·아파트거주자)이라고 부른다. 그 아파티즌의 생활모습을 추적해 본다.》

경기 고양시의 일산신도시내 호수마을엔 ‘엄마겸(?) 선생님’들이 있다. 호수초등학교에 2학년 딸을 두고 있는 신미경(33) 이혜경(34) 이유선(35)주부. 이웃한 이들 아파트 주부들은 7월부터 자녀의 과외학습을 공동으로 책임지고 있다. 각기 다른 과목을 맡아 아이들의 과외교사가 된 것.

“내 아이를 직접 가르치니 애정을 쏟지 않을 수 없고, 다른 아이들이 함께 있으니 ‘알밤’부터 쥐어박는 감정적 행동을 자제하게 돼 일석이조죠. 아이들 사이에 경쟁의식도 생기고요.”(신미경씨)

‘내 아이는 내가 돌본다’는 홀로서기 정신도 ‘발동’했지만 월 20만원 가량의 사교육비를 줄이자는 것도 중요한 취지. 대학의 전공과 과외아르바이트 경험을 살려 각자 수학 국어 슬기로운 생활(자연과 사회를 합친 과목) 등으로 과목을 나누어 맡았다.

같은 동 아파트에 살면서도 대화조차 없던 단절된 아파티즌(Apartizen)들의 벽허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내 아이를 맡겨야 하니 엄마들의 학벌이나 생활수준도 비슷해야죠.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정서’입니다. 서로 통하지 않으면 ‘옆집’이라도 어쩔수가 없지요.”(이혜경씨)

품앗이 과외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자 이웃으로부터 동참 제안이 이어졌다. 심지어 “교사로 끼워주지 않아도 된다. 돈을 낼테니 아이만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는 어머니도 있었다. 그러나 대답은 ‘절대불가’.

“비록 아이들이 매개돼 이런 모임이 만들어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 집안이 서로 가치관과 정서상 비슷한 점이 많아 자연스럽게 어울릴수 있었지요.” 이유선씨의 말이다.

서로 통하는 사람들이 만나 이루는 공동의 삶. 그런 면에서 아파트 생활은 또 다른 즐거움을 낳는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아파트는 단절된 공간입니다. 하지만 시기와 비난에 대해선 ‘열린 공간’이에요.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면 곧 ‘남편한테 얻어맞았다’는 헛소문이 돌 정도예요.” “과외시간 아이들의 입을 통해 유출될 갖가지 가정사를 침묵으로 소화해낼수 없다면 아마 과외공동체는 깨질수 밖에 없지요.”

아파트를 ‘단절된 공간의 집합’으로만 보는 사람들에게 아파트 생활은 ‘나홀로 살림’밖에 될수가 없다. 그러나 거꾸로 ‘천장을 분할 공유하는 공간의 집합’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아파트는 ‘초집적(超集積) 두레’ 같은 아름다운 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 아파트 품앗이는 그런 면에서 현명한 아파티즌의 괜찮은 삶으로 보인다.

〈이승재기자〉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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