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나의 아버지 박지원

  • 입력 1998년 9월 21일 19시 13분


“그의 문장은 천마(天馬)가 하늘을 나는 것 같아 굴레를 씌우지 않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그의 문장은 천하의 으뜸이라 할 만하며, 후생(後生)이 배워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찌기, 구한말 유수한 문장가 김윤식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문장을 이렇게 평하였다. 혹자는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독일에 괴테가, 중국에 소동파가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박지원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허나, 연암은 문장만 신품(神品)이었던 건 아니다. 그는 도저(到底)한 학문과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글에서는 심중(深重)한 사상이 우러나온다. 그를 우리나라 최고의 문호로 꼽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 그의 문학가로서 면모만이 아니라, 그 인간적 체취와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전기(傳記)가 나왔다. ‘나의 아버지 박지원’(돌베개).

연암의 차남으로 경산현령을 지낸 박종채(朴宗采)가 아버지의 행적을 꼼꼼히 기록하고 조각글이나 짧은 메모라도 그가 쓴 것이라면 다 모아 ‘마치 옛사람이 감나무 잎에다 글을 써서 항아리에 차곡차곡 모으듯이 했다.’

무신년(1788년) 섣달, 연암이 선공감 감역의 임기를 6일 남겨놓았을 때 일이다. 이조에서 전갈이 왔다. 임기가 다 끝나가니 승진 대상으로 보고하라며 “날짜수가 며칠 모자라긴 하나 관례상 조금 융통성이 있습지요”라고 생색을 냈다.

연암이 응하지 않자 이조의 또 다른 관리가 채근하였다. 그래도 “내 일찌기 구차한 짓을 한 적이 없다”며 따르지 않자, 그 관리가 “날이 저물어 갈 길이 멀면 누군들 마음이 급하지 않겠는가. 허나 평소 자신의 원칙에 이리도 철저한 이가 있구나!”라고 감탄하였다.

또 다른 일화.

연암이 관아에 구휼하는 곳을 두어 백성들에게 죽을 나누어 줄 때의 일이다. 그는 뜰에다 금을 그어 남녀를 구분하고 어른과 아이의 자리를 달리한 다음, 먼저 죽 한 그릇을 들었다. 그 그릇은 구휼에서 쓰는 것과 똑같았고 소반이나 상 같은 건 차리지 않았다. 그는 남김없이 죽을 다 들고 나서, “이것은 주인의 예(禮)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구휼을 함에 있어서 이와 같다면 어찌 부끄러움이 있겠는가…”라고 탄복하였다.

번역과 주석작업을 맡은 서울대 박희병교수(국문학과)의 섬세하고 깔끔한 글이 원문의 맛을 고스란히 살려낸다. 한문 원문을 담은 양장본(15,000원·440쪽)과 일반본(9,000원·308쪽)이 따로 나왔다.

〈이기우기자〉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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