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원일씨,「사랑아 길을…」사랑소설 출간 화제

  • 입력 1998년 7월 26일 20시 49분


믿거나 말거나, 그의 침상 머리맡에는 이성복의 ‘남해금산’같은 시집들이 늘 꽂혀있어 잠들기 전 그 시들을 하나둘씩 빼읽으며 “나도 이런 정취를 담은 작품 하나 써보았으면…”하고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는데….

늘 근엄한 표정의 소설가 김원일(56). 오랜 소망을 이루었다. 분단현실을 다룬 ‘불의 제전’ ‘마당깊은 집’과 비교하면 제목부터 어쩐지 그의 것 같지 않은 ‘사랑아 길을 묻는다’(문이당).

등단 32년만에 처음 써보는 연애소설. 그것도 인생 황혼기에 선 남자의 목숨 건 사련(邪戀)이다.

“지난해 대하소설 ‘불의 제전’을 완간하며 이제 분단 얘기는 더 안 쓰리라 다짐한 뒤의 첫 작품입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쓴 첫 장편소설이기도 하구요.”

때는 기울어가는 조선조말, 이퇴계가 세운 소수서원으로 유서깊은 소백산 자락의 순흥 땅. 초로의 사내와 젊은 여인이 밤을 도와 마을을 떠난다. 손자까지 본 마흔일곱의 양반 서한중과 김참봉의 후실 사리댁. 천주교 공소에서 신도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을 택함으로써 ‘배교(背敎)’와 ‘비도덕’의 죄를 범하지만 한때의 불장난은 아니다. 유년시절 아버지가 참수형으로 순교하는 모습을 본 충격때문에 패륜아가 된 서한중이나 재물에 팔려 늙은 지주의 후실이 된 사리댁에게 사랑은 똑같이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

“이제야말로 개떡같게 살아온 내 인생이 새 출발을 하오. 이승에서 살던 나는 죽고 저승에서 다시 태어난 청춘이구려.”(서한중)

그러나 사랑을 얻은 대신 두 사람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가족과 재산 명예를 잃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이를 가진 사리댁은 눈이 멀고 도망 길에 병을 얻은 서한중은 마지막 숨을 몰아쉰다. “진정한 사랑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독한 애정관이 이끌어낸 결말이다.

그러나 작품의 진정한 흡인력은 두 사람의 사랑 묘사보다는 뻔히 비극이 예상되는 일에 불나비처럼 자신과 사랑하는 여인을 던지는 서한중의 파괴적 격정이다.

“토마스 만이 ‘부덴부로크의 집안’에서 그렸듯이 시민사회의 질서에 잘 적응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예술가로서 타고난 기질때문에 운명적으로 일탈자가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당대의 질서와는 어그러지더라도 주어진 숙명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인물로서 서한중을 형상화하고 싶었습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소백산과 남한강 자락에 점점이 펼쳐졌을 옛 풍경들을 고즈넉이 그려냈다. ‘궁합맞는 잡놈 잡년’같은 속담이나 ‘드난’ ‘강샘’같은 우리말도 애써 찾아 문장을 이었다. 서툰 타자실력이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만큼 이야기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누군가 서한중과 자신을 동일시할까 더럭 눈치가 보이기도 한다.

오십줄에 글로나마 써본 ‘지독한 사랑.’

“늙은이가 왜 굳이 사랑타령이냐고요? 글쎄, 겉으로는 사랑이야기지만 그게 결국 자아로의 복귀 욕망 아니겠소?”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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