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전경린씨 두번째 창작집 「바닷가 마지막 집」

  • 입력 1998년 5월 26일 07시 00분


깊은 물을 가까이서 응시해 본 사람은 안다. 물을 오래 바라보면 어느 순간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는 것을. 지금 발딛고 선 자리에서 겨우 한발 내딛는 것만으로도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을 조여오는 야릇한 흥분과 긴장….

전경린(36)의 소설은 그런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다. 96년 이후 발표작 8편을 묶은 두번째 창작집 ‘바닷가 마지막 집’ (생각의 나무).

데뷔 이후 줄곧 그래왔듯이 그는 이번 작품집에서도 질서와 일탈, 윤리와 비도덕, 삶과 죽음이 서로 힘겹게 맞닿은 자리만을 찾아내 ‘이렇다니까. 천리만리 먼 것 같아도 겨우 백지장 한 장 차이야’하는 표정으로 태연히 빙글거린다. 그 웃음은 일상의 틀을 믿고 고수하려는 사람에게는 위험한 유혹이다.

전경린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개 삶의 허방을 짚은 사람들이다.

25년간의 안정된 공무원 생활을 청산한 뒤 낙향해 손에 익숙지 않은 농사를 지으며 급격히 몰락해가는 일가(‘바닷가 마지막집’), 시장에서 떠온 천으로 미싱을 돌려 아이의 원피스와 냉장고 덮개를 만들고 김치를 담그고 아이에게 가나다라를 가르치며 매일 저녁 새 찌개를 끓이던 가정주부에서 남편의 사업실패로 거친 세상 속에 던져지는 여자(‘밤의 나선형 계단’)….

작가는 ‘잘 닫힌 원처럼 안전하고 포근한’ 행복을 애써 추구하지만 결국 낙오하는 이들을 통해 ‘산다는 것은 예측불가능의 지뢰밭을 통과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연민없이 서술한다.

그러나 전경린의 주인공들은 몰락을 통해 비로소 진실과 대면할 힘을 뿜어낸다. 낡은 옷가지가 든 트렁크 하나만 덜렁 들고 화해불능의 결혼생활을 정리하는 아내의 말은 선언에 가깝다.

“수중에 돈이 한푼 없어도 삶은 계속돼. 두려운 건 가난이 아니라, 두려움 자체에 매여 자신을 묶는 거야… 많은 것을 잃고 난 뒤에야 제자리로 돌아갈 용기가 생겼어.”(‘밤의 나선형 계단’중)

전경린의 소설은 에로틱하다. 그가 그리는 사랑이 근친상간이거나 남편의 친구와 친구 아내의 통정, 유부남과 유부녀의 숨겨진 정사 등 금지된 것들이기 때문에 더하다. 그러나 그 위험한 사랑의 주인공들은 야멸차게도 “사랑에 진실 따위는 없다. 내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나를 불러내지 않으면 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은 내 존재의 유일한 거처죠.”(‘거울이 거울을 볼 때’중)

안전한 일상을 지키기 위한 규칙과 경계선을 넘어서면서까지 전경린이 애써 찾고자 하는 것은 다름아닌 ‘삶’이다. 그 자신 평범한 주부에서 소설가가 되었던 것도 자기 내면에서 이렇게 소리지르는 목소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넌 누구의 흉내를 내고 있는 거니? 아니면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흡수되어 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거니?…생이 너를 바라보고 있다. 오래 전에 네가 사라져버린 헐벗은 생이.”(‘거울이 거울을 볼 때’중)

그의 소설은 불온한 유혹이다. 그러나 강렬한 생의 의지로 꿈틀거린다. 날 것인 채로 거칠게 드러나는 그 에너지가 90년대 문학작품을 가두고 있는 ‘일상성의 벽’을 허물어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그의 작품은 아직 주목대상이다.

길들지 않는 고양이처럼 위험하고 뜨거운 목소리로 전경린은 속삭인다.

“공기 속에 너 자신을 놓아. 삶을 신뢰하며 순간의 등을 올라타고 달리는 거야.”(‘평범한 물방울 무늬 원피스에 관한 이야기’중)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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