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애순 「예언의 도시」,프놈펜의 욕망과 사랑 그려

  • 입력 1998년 3월 2일 08시 45분


이곳은 낯선 땅인가. 세상을 단숨에 휩쓸어갈 듯 쏟아지는 열대성폭우, 빗발 퍼붓는 하늘에 종주먹을 들이대듯 총을 쏘아대는 사람들의 광기가 뒤엉킨 곳….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제3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예언의 도시’가 그리는 프놈펜은 그러나 낯설지 않다. 정화된 인민을 단 2백만명만 남기겠다며 수백만의 인명을 아무런 가책없이 도륙했던 폴 포트독재의 잔학성. 피로 물든 공산주의를 버린 뒤에는 ‘킬링필드’마저 관광자원으로 팔며 너도나도 달러를 향해 부나비처럼 온몸을 던지게 된 타락. 열대의 풍광을 걷어내고 나면 프놈펜은 인간 욕망의 끝간데를 보여주는 소돔과 고모라의 한 모델일 뿐이다.

‘예언의 도시’는 지상의 아수라 프놈펜에 불안하게 닻을 내린 사람들의 얘기다.

한국땅에서 사기사건을 벌인 뒤 위조여권으로 도망쳐온 사업가 남정훈. 선천성장애인 아들을 타국땅에 남겨둔 채 남편의 임지로 따라온 풀잎같은 여자 숙영. 사랑을 잃고 혁명가가 됐으나 사랑도 혁명의 꿈도 모두 잃고 만 늙은 캄보디아인 타. 그리고 타가 사랑했던 여인 아니가 지상에 남긴 단 한점의 혈육 스라이.

새 인생을 시작할 ‘한탕’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정훈은 스라이를 내세워 위험한 비즈니스를 시작하지만 눈앞에 펼쳐졌던 장밋빛 미래는 중국계 마피아가 쳐놓은 덫일 뿐. 결국 정훈도 스라이도 총성 속에 사라지고 마는데….

‘예언의 도시’는 속도감있게 읽힌다. 타의 실패한 사랑과 혁명,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이후 끝없이 훼손돼온 상훈의 야망, 온실식물같은 숙영의 상처, 마지막 희망처럼 반짝이는 벙어리처녀 스라이의 상훈을 향한 사랑이라는 각기 다른 빛깔의 이야기들을 영화처럼 빠른 장면전환으로 이어붙인 솜씨 덕분이다.

그러나 소설이 애잔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아름다운 판사의 아내에서 하루아침에 반동분자로 전락한 아니가 혁명가가 된 옛사랑 타에게 자신을 죽여달라며 던지는 호소가 그 한 예는 아닐까.

“당신은 늘 내가 정화되어야 한다고 했지요. 하지만 당신은 알지요. 나는 정화될 수 없다는 것. 정화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에요. 당신의 행복이 내게는 행복이 되지 못하는 거지요. 우린 어째서 이럴까요?”

‘예언의 도시’로 화려하게 등단한 저자 윤애순(42)은 현직 외교관의 아내. 지난해 1,2총리간의 내전으로 포연이 끊이지 않던 프놈펜에서 이 소설을 썼다.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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