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시대 주부 윤선숙씨의 가계꾸리기]본사에 편지

  • 입력 1997년 12월 14일 19시 57분


「그까짓 오렌지 주스가 뭐기에」. 나는 지금 오렌지주스 한병 때문에 밥할 생각도 잊고 이 말을 되씹으며 식탁앞에 앉아 있다. 3천원도 안되는 그까짓 주스 때문에 이렇게 슬픔에 잠겨서. 어제 오후 시장 슈퍼마켓에서 아이들 간식거리로 뭘 살까 고민하다가 눈이 간 것이 요즘 새로 나온 냉장 주스다. 일반 주스보다 값은 약간 비싸지만 생주스라서 아이들한테 꼭 먹이고 싶었다. 매사에 돈, 돈하는 엄마 때문에 남들은 매일 배달해서 먹는 생주스 한번 못먹어본 우리 아이들이다. 얼마전 이모네집에서 생주스를 먹어 보며 신기해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생각나 얼른 주스병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막상 그걸 바구니에 넣으려니 뭔가 자꾸 걸렸다. 「그냥 보통 주스를 사면 요구르트를 몇개 더 살 수 있는데」. 「그래도 애들이 무척 좋아할텐데」. 어떡하나 어떡하나, 한참을 망설인 끝에 나는 결국 주스를 내려놓고 말았다. 「한국경제 부도」 「중소기업 부도 속출」 「달러고갈」기사로 새까맣게 채워진 아침 신문기사가 갑자기 떠올라서였다. 순간 눈물이 핑돌았다. 이까짓 주스 하나갖고…. 누구 때문에…. 그동안 허리띠를 졸라매며 알뜰살뜰 먹을 것 덜 먹고 참아왔는데…. 나는 아들 둘을 둔 30대 중반의 평범한 가정주부다. 남편은 요즘 흔한 말로 살얼음판 걷기보다 힘들다는 영세한 중소기업의 사장이다. 전업 살림이 나의 본분이긴 하지만 하루도 빼지않고 읽는 신문 덕분에 중소기업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알게됐다. 나의 소심증은 거기서 시작됐다. 남편이 갖다주는 생활비는 한달에 2백만원. 그중에 1백20만∼1백30만원은 무조건 저금해왔다. 남편은 너무 궁상떨지 말라고 큰소리를 쳐대지만 그럴수록 모으고 아끼는 것이 최선의 가치라는 내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그렇게 좋아하던 볼링도 남편이 사업을 시작한 뒤엔 딱 끊었다. 친구들이 값 싸다고 할인점에서 물건을 막 사나를 때도 나는 거기에 한번도 끼지 않았다. 한꺼번에 많이 사놓으면 헤프게 쓸 게 분명할 거라는 염려에서다. 친구 아이들이 영어학원을 다닐 때 우리 아이들은 CD롬으로 자습을 해야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들이 못난 엄마 때문에 나중에 커서 뒤처질까봐 얼마나 마음졸였던가. 나는 이렇게 살았다. 남편 사업이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내년에는 나도 좀 허리띠를 풀어볼까 하니까 국가위기란다. 이런 날벼락이 없다.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뛰자고 한다.다시 뛰자니? 중소기업 하는 사람이 5백만원 대출받으려고 해도 온갖 보증을 다 요구해 형제 자매들한테 얼굴도 들지 못할 처지에 놓인 것이 현실인데 급할 때는 얼굴을 돌려 버렸던 경제관료 정치인이 아니던가. 그러나 나는 안다. 분을 삭이고 참아야 한다는 것을. 하루에도 몇번씩 몽땅 팔고 이민이라도 가버릴까 싶지만 냉정히 생각하면 그럴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는 내 아들이 자라야할 나라다. 그 터전을 이렇게 황무지로 망가뜨린 채 넘겨줄수는 없는 일이다. 윤선숙<경기 포천군 소홀읍 이동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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