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36년]『서구중심사관의 「근대화」주장 잘못』

  • 입력 1997년 12월 6일 08시 21분


식민지수탈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시대 한국에서 과연 근대화의 기초가 마련됐느냐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러나 양측은 한가지 측면에서 공통된 전제를 갖고 있다. 그것은 서구합리주의의 산물인 「근대성」 자체는 긍정적이며 성취해야할 과제라는 것이다. 식민지수탈론은 「식민지성과 근대성은 배타적인 것」이라는 대전제하에서 일제시대 한국에서 근대성의 기초가 마련됐을 가능성이 전혀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일제만 아니었으면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성에 대한 옹호론이다. 한편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시기의 토지조사사업 산미증산계획 전시공업정책 등에서 오늘날 한국 공업화의 뿌리를 찾는다. 『수탈론의 논리는 객관적 자료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식민지적 왜곡속에서도 자본주의는 보편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수탈론과 근대화론은 각각 식민지성과 구분되거나 또는 오늘날 한국의 공업화의 동력으로서의 근대성을 절대선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세계사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근대성은 서구중심적 세계관으로서 그 긍정성에 못지않게 문제점이 심각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정근식전남대교수는 『최근 근대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서구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 논의에 힘입어 상당히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우선 식민지성과 근대성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이다. 실제 서구의 근대화 역사 자체도 비서구에 대한 식민화를 포함한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이같은 구분은 비판받을 여지가 상당하다. 강상중도쿄대교수는 『근대성이란 서구적 근대성과 식민지적 근대성간의 상호작용과 그 뒤얽힘의 특이한 양상으로 존재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른바 「식민지적 근대성」이라는 것은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일제시대를 통해 현재의 「눈부신」 경제발전이 이뤄졌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상황을 문제시하면서 이 문제적인 현재의 상황이 발생하게 된 역사적 상황을 과거에서 찾자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서 보면 서구는 근대성의 보편이고 식민지는 이의 왜곡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결국 서구를 절대 목표로 두고 이를 따라가야한다는 서구중심적 사관으로 귀결된다. 근대성의 내용을 서구적 경험에 의거한 한정된 몇가지 지표로 모델화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된다. 수탈론과 근대화론은 모두 근대성을 이루는 핵심내용으로 자본―임금노동 관계의 확립, 민족국가의 형성 및 민주주의의 정착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발전과 저발전된 지역으로서 각각 서구와 동양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기초한 것이다. 김호기연세대교수는 『근대화 담론은 비서구사회에 대한 서구사회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권력의 논리를 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근대성 비판론은 한국에서 근대화라는 것이 식민지적 상황때문에 좌절 왜곡되거나 혹은 긍정적인 과정으로 진행됐다고 보지않는다. 오히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을 왜곡해온 극복의 대상으로 볼 것을 주장한다.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조형근연구원은 『일제시대 뿐만 아니라 개항이후 일제시대를 거쳐 60,70년대에 이르는 전과정을 「식민지적 근대화」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따라서 식민지성의 극복은 근대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수탈론과 근대화론이 모두 과거 일제의 식민통치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합의하고 있다면 이 논쟁은 현재의 관점에서 볼때 시의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다. 서구적 이성의 한계와 병폐가 여실히 드러나는 오늘날 근대성에 대한 반성이 더 절실하지 않는가 하는 반문이 강한 설득력을 지닌 채 다가온다. 〈한정진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