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父子 2代 집념결실「한권으로 읽는 용비어천가」

  • 입력 1997년 9월 30일 08시 51분


「용비어천가」. 우리말 연구자료로서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고 「이처럼 좋은 노래」가 또 어디 있을까 할 정도로 명작이다. 조선왕조 창건을 찬양한 장편 영웅서사시로 훈민정음 반포 한해전, 한글로 써내려간 최초의 작품이다. 그동안 국어학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용비어천가가 역사학자에 의해, 그것도 2대에 걸친 번역작업 끝에 「역사로 읽는 용비어천가」(들녘)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다. 김성칠 전서울대교수(51년 작고)와 그의 아들인 사학자 김기협씨(47). 『아버님이 28세의 나이에 이같은 번역작품을 남기셨다는 데에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때는 상황도 매우 열악했을텐데…』 원래 「아버지」가 경성제대에 입학, 역사학도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던 1941년에 번역해 해방 직후 책으로 낸 것을 이번에 「아들」이 역사학자의 시각을 담아 다시 펴냈다. 아버지 김교수는 몇해전 나왔던 「역사 앞에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 역시 아들 김씨가 아버지의 일기를 모아 펴낸 것으로 「해방에서 6.25까지, 민족주의 역사학자의 투철한 시각이 살아있는 객관적 자료」라는 호평을 받았었다. 국어학자도 아닌 역사학자가 2대에 걸쳐 용비어천가에 매달린 까닭을 물었다. 『용비어천가는 형식은 문학이지만 내용은 철저한 역사입니다. 곳곳에 한국과 중국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어요. 그러니 역사적 고증 없이 용비어천가를 제대로 해석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90년 계명대교수를 그만두고 제주도에서 연구와 집필에만 몰두하고 있는 김씨. 얘기가 끝나갈 즈음 빛바랜 가족사진과 「어느 독립유공자의 이력서」라는 자료를 내밀었다. 「독서회사건으로 퇴학 투옥, 동아일보 논문현상공모 1등 당선 … 학병을 피해 금융조합 복직…」의 아버지. 그 옆의 엄마 품에 안긴 채 제주 바다 만큼이나 맑고 깊은 눈을 가진 두살배기 막내가 김씨다. 이제 쉰을 눈앞에 두고 용비어천가를 통해 역사를 바라볼 정도의 원숙한 역사학자가 됐지만 그에게선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났다. (김기협 지음/들녘 펴냄)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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