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다시보기]「사랑하다가…」「외눈박이…」

  • 입력 1997년 7월 22일 08시 09분


정호승(左) 류시화 시인은 막역한 사이다.
정호승(左) 류시화 시인은 막역한 사이다.
이 격렬한 소음(騷音)의 시대, 세기말의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서 「시는 죽었다」는 외마디마저 까마득히 멀어져 가는 이 때에 아직도 「읽히는 시」 「팔리는 시」가 있다니…. 우리 존재의 마지막 빈 자리까지도 물질에 차압당해버린 이 소모적인 시대에 사람의 걸음걸이와 숨소리가 느껴지는 시, 「살아 있는」 시. 정호승씨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창작과비평사), 그리고 유시화씨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열림원)과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 유씨의 시집은 1, 2권을 합쳐 1백만권 이상이 팔렸다. 정씨의 시집도 5월말 출간되자마자 줄곧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우선 이들의 시는 「읽히기」 때문이라고 출판계는 분석한다. 난해함의 안개 속으로 시가 증발해버린 요즘 이들의 시는 「친숙한 문법」으로, 손을 내밀면 쥐어질 듯 독자들 곁에 다가선다는 것. 절망으로 절망을 「찔러」 희망의 싹을 틔우고(정), 영원에서 「씻긴」 시간의 의미를 낭송하듯 들려주는(유) 두 시인은 대학 선후배 이상의 막역한 사이. 『호승이 형은 제 문학의 스승이에요. 늦은 밤 흔들리는 시내버스 속에서, 내가 시 때문에 절망할 때 형은 제 곁에 있었어요. 낮은 목소리로 내 시를 암송하며 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지요』. 유신과 80년대, 「낮은 데」 사는 사람들의 시린 삶에 따뜻한 체온과 시선을 나누어 온 정호승씨. 이번 시집에서도 그는 여전히 허기지고 갈 곳이 없어 삶의 모퉁이에서 서성거리는 「맹인가수부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눈사람을 기다리며/…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지 않는다. 대신 「희망이 없이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들려준다. 그의 목소리는 실존적 자아의 고통과 절망에 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그래선가. 그의 시는 연애시로 읽히고 그래서 더 많이 읽히는 것 같다. 유씨는 80년대 초입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할 시절부터 저 「들끓던」 시대를 내면의 성찰과 명상에 잠겨 지내왔다. 문단이 온통 민중과 이데올로기, 그 전망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 그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방안에 모여 별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을 때/나는 문 밖으로 나와서 풀줄기를 흔들며 지나가는/벌레 한 마리를 구경했다/까만 벌레의 눈에 별들이 비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문단은그에게 싸늘하다. 1백만권의 시인에게 보이는 평단의 침묵은 냉담함을 넘어 처절할 정도다. 혹자는 그의 시에는 역사와 현실이 없다고 한다. 어느 시인은 그의 시를 「한낮에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의 멍한 느낌」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출판계의 「유시화 신드롬」을 그저 신비주의로 몰아칠 수 있을까. 어렵게 쓴 만큼 쉽게 읽히고 자연에서 인간의 눈물, 그 눈물의 그늘을 읽어내는 그의 시는 오히려 물질에 「치인」 현대인에게 간소한 삶의 미덕을 되돌려 주는 것은 아닐지. 숨가쁜 시계의 태엽을 풀고, 잠시 그의 시에 귀기울여보자. 「…/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흰 눈처럼/소금이 떨어져내릴 때/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아는 사람은/많지 않다/그 눈물이 있어/이 세상 모든 것이/맛을 낸다는 것을」. 〈이기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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