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잠들지 못하는…」,獨서 마주한「초라한 자화상」

  • 입력 1997년 7월 1일 08시 08분


그는 독일에서 무엇을 봤던가. 아니, 그의 독일여행은 무엇을 보기 위함이었나. 에른스트 블로흐, 카를 마르크스, 로자 룩셈부르크…. 오랫동안 자신을 떠받쳐온 정신의 스승들. 그들의 구체적인 흔적을 만나는 순간, 영혼의 불꽃이 기쁨의 심지를 돋우어 한껏 환해져야 할 바로 그 순간에도 마음은 어둡기만 했다. 여행내내 독일이라는 낯선 풍경에 눈을 빼앗기는 그저 그렇고 그런 관광객이고 싶어하면서도, 끝내 역사와 인간에 대한 하염없는 「생각」을 놓지 못했던 지식인. 김명인씨(39). 그 간난의 시절 「민족문학 논쟁」에 불씨를 댕겨온 문학평론가. 지난 6년동안 침묵을 지켜온 그가 뜻밖에도 「여행기」로 말문을 열었다. 「잠들지 못하는 희망」(학고재). 그에게 독일은 전혜린의 「오렌지색 가등이 비치는 아름다운 포도(鋪道)의 나라」가 아니다. 그 뒤안에 숨은, 영등포구치소 독방에서 읽었던 소설 「신변보호」(하인리히 뵐)의 거칠고 황폐한 무대로 다가선다. 나치즘이라는 비인간적인 광기를 낳은 「어떤 심각한 정신사적 결락(缺落)」을 안고 있는 나라. 그래서 청계천에서나 볼 수 있는 갖가지 공구를 갖춰 놓은 한 독일 가정집에 대해서도 「선진국이라 취미도 저만큼 전문화돼 있구나」라고 느끼기보다는, 「저토록 고독하고 강도 높은 취미생활을 강제하는 내면의 공허함」에 섬뜩해 한다. 그런 그가 정작 「목놓아 울고 싶을 정도로」 영혼의 떨림을 느낀 것은 튀빙겐에서 우연히 블로흐의 무덤을 발견했을 때, 트리어에서 마르크스의 흔적을 만났을 때, 그리고 베를린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피살 지점에 갔을 때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20세기가 끝나가는 시점에 살고 있으면서도 19세기나 20세기 전반에 살던, 뜨겁게 남김없이 살던 사람들에 의해 더 많이 울리는 「시대착오적인 공명통」은 아닌지 자문한다. 역사에 대한 그의 고통과 회한은, 「이런 저런 이유로」 유학중이거나 독일에 체류중인 「산 사람」들을 만나면서 더욱 깊어진다. 아직도 마르크스를 삶의 진정한 지주로 껴안고 있는 그들의 「금강심(金剛心)」이 왠지 멀게만 느껴진다. 「이들은, 현실에서 일단 발을 빼고 멀리 날아온 이들은, 나날의 파괴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마음의 보석들이 부스러져가는 것을 뻔히 바라보고만 있는 이들에 비해 사치스러운 것은 아닌가」.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또 다시 역사의 무게와 혼돈에 시달린다. 도대체 이 「룸펜적 지식인의 지향없는 배회」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그의 회한은 마르크스의 초상 앞에서, 그 수염 속의 형형한 눈길을 당당히 맞받아낼 수 없었던 초라한 자화상을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마르크스는 양심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 양심의 구리거울엔 녹이 끼었다. 그 녹을 닦으려고 여러 해째 안간힘을 쓰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이기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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