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사람은 왜]구조 요망 민폐 캐릭터 언년이는 왜 밉상이 됐나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11일 16시 00분


제주도로 소현세자의 남은 아들인 원손을 구하러 간 송태하(오지호)와 언년(이다해 분)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입을 맞췄다. KBS \'추노\'
제주도로 소현세자의 남은 아들인 원손을 구하러 간 송태하(오지호)와 언년(이다해 분)이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입을 맞췄다. KBS \'추노\'
'제주도 서남쪽 용머리 해안가 언덕, 귀밑머리 곱게 단장하고 옥색 한복을 차려입은 한 여인이 누군가를 기다리며 바위에 앉아 있다. 여인의 손에는 큰 칼이 있다. 무사가 칼을 놓고 가면 그건 다시 돌아오겠다는 뜻이란 말을 생각하면서 님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이윽고 남자가 온다. 핸섬한 라티노를 연상시키는 남자는 열정적인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본다. 이어지는 푸른 산방산을 배경으로 한 두 사람의 키스 신….'

앞뒤 잘라 놓고 본다면 아름다운 장면이다. "왕자님과 공주님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디즈니식 엔딩이 떠오를 정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백설공주'가 아니다. 조선 인조시대를 배경으로 '길바닥 사극'을 표방하는 KBS 수목드라마 '추노'(극본 천성일, 연출 곽정환)다.

거기다 키스 신의 주인공 언년(이다해)와 송태하(오지호)는 암살자와 관군, 이대길(장혁) 등 추노꾼에게 쫓기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여기 더해 두 사람은 차기 대권주자 원손 석견을 바닷가에서 기다리게 한 채로 '제주도 신혼여행' 분위기를 낸 것이다. 비난은 주로 언년이에게 쏟아졌다. "태하가 거사에 실패하면, 다 언년이 너 때문이다!"

제작진이 의도한 지고지순 청순가련 여주인공은 시청자들에게 밉상 민폐 캐릭터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일각에서 언년이를 미국 드라마 '24'에 나오는 '인질 전용' 캐릭터 킴벌리 바우어에 비유하기도 한다.
도망다닐때도 한결같이 곱고 예쁜 언년이. KBS '추노'
도망다닐때도 한결같이 곱고 예쁜 언년이. KBS '추노'

대체 누가 언년이를 '밉상'으로 만든 것일까.

'추노' 제작진은 "언년은 대길의 첫사랑이자 환상 속의 여인"이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로미오와 줄리엣'의 올리비아 허시나, '은하철도 999'의 메텔, 무협물로 치면 '신조협려'의 소용녀 같은 '남자들의 로망' 캐릭터란 소리다.

뭔가 신비롭고, 애처롭고, 여신처럼 숭배하고 싶고, 구해주고 싶고, 가만히 있어도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치게 하는 뮤즈 말이다.

그런데 이다해가 연기한 언년이는 원래 노비였다. 병자호란의 혼란을 틈타 도망쳐 양반 김혜원으로 신분을 세탁했을 뿐이다. 이런 언년이가 처음부터 양반집 규수인 것처럼 나오니 반감이 드는 것이다.
이다해가 맡은 언년은 주인집 도령 이대길(장혁 분)을 사랑하는 노비로, 병자호란 당시 주인집에서 도망쳐 양반 김혜원으로 살면서도 10년 째 연인을 그리워하는 지고지순한 여인이다. KBS '추노'
이다해가 맡은 언년은 주인집 도령 이대길(장혁 분)을 사랑하는 노비로, 병자호란 당시 주인집에서 도망쳐 양반 김혜원으로 살면서도 10년 째 연인을 그리워하는 지고지순한 여인이다. KBS '추노'

게다가 언년이는 마음 속에 신분 때문에 이루지 못한 대길에 대한 사랑을 10년째 간직한 여성이다. 그 때문에 세도가와의 결혼 첫날밤에 과감하게 가출해 쫓기는 신세가 됐다.

사랑 없는 결혼을 거부한 것만 보더라도, 언년이는 운명에 순응하고 사는 전근대적인 여성은 아닌 셈이다. 언년이는 양반인 대길을 사랑해 그의 배필이 되고 싶었고, 양반처럼 보이고자 애썼다. 그런 점에서 언년이는 자신의 욕망과 의지대로 살다간, 시대를 앞서간 인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대체로 언년이의 감정을 설명하는 데 불친절했다. 일부러 분석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 그녀의 생각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극의 전개가 남자 주인공 위주로 돌아가는 통에 여주인공이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를 설명할 장치가 부족한 것이다.

가령 대길이가 청나라 군사에게 끌려가는 언년이를 구하기 위해 낫을 휘두른다거나 추운 겨울 찬물에 손을 담그며 일하는 언년이를 위해 귀한 책을 찢어 돌을 덥히는 회상 장면도, 대길이의 시각을 대변할 뿐이다. 대길이의 언년이에 대한 애틋한 사랑만 전해질 뿐, 언년이의 마음은 크게 와 닿지 않는다.

'추노'의 천성일 작가는 최근 인터뷰에서 "남자 캐릭터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확고하게 선이 잡혔던 것과 달리 언년이는 변화하면서 발전하기 때문에 극이 끝나야 완성되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이다해는 거친 추노꾼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여주인공 언년이로 주목받고 있으나, 극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 화사한 화장 등이 현실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을 듣고 있다.
이다해는 거친 추노꾼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여주인공 언년이로 주목받고 있으나, 극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 화사한 화장 등이 현실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을 듣고 있다.

천 작가의 말처럼 최근 방송에서 언년이는 "아이는 여인이 안아야 자연스럽다"며 석견을 안고, 곽한섬(조진웅)에게 "장군이라는 호칭은 위험하다"고 조언하는 등 태하와 원손이 과거 동료였던 무사들을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는 변화된 모습을 보였지만, 시청자들은 생뚱맞아 하는 반응이다.

사실성 문제도 거론된다. 언년은 노비일 때나 도망자 신세일 때나 한결같이 곱고 화사하기만 하다. 같은 노비인 초복(민지아)이의 땟물 줄줄 흐르는 얼굴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태하와 노상에서 잠을 자도 얼룩 하나 없이 단정한 옷매무새다.
선정성 시비가 일었던 언년이 노출신. 제작진은 이후 노출신에 모자이크 처리했다가 시청자의 항의를 받고 다음 방송에선 모자이크를 풀어 또다시 논란이 됐다. KBS '추노'
선정성 시비가 일었던 언년이 노출신. 제작진은 이후 노출신에 모자이크 처리했다가 시청자의 항의를 받고 다음 방송에선 모자이크를 풀어 또다시 논란이 됐다. KBS '추노'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과도한 노출 장면 역시 언년이를 성적인 눈요깃감으로 전락시킨다. 겁탈 당할 뻔한 장면과 칼에 맞아 상의를 벗은 장면, 옷 갈아입는 장면에서 상의를 벗은 채 멍하니 회상하는 모습이 문제가 됐다. 일부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됐지만, 오히려 더 선정적이라는 지적만 받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제작진의 책임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한 편의 CF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배우의 '예쁜 척' 연기도 시청자들의 불만을 유발한다. 게다가 콧소리가 과한 발성도 드라마의 몰입도를 저해한다는 지적이 있다.

'언년이는 무조건 예뻐야 한다'는 제작진의 주문 앞에서 배우가 새로 캐릭터를 설정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노비로 태어난 한(恨), 사랑하는 이를 떠나야 했던 슬픔, 그럼에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의지까지 복잡한 마음을 섬세한 내면 연기로 담아낼 수는 없었을까.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O2/이 사람은 왜] 언년이, 이다해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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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추천 많은 댓글

  • 2010-02-16 02:04:20

    그리 맘에 안들면 최기자 당신이 대신 연기해...-_- 연기 볼만 하더구만 뭘 그리 따지고 들어..

  • 2010-02-15 14:39:18

    사극에서 불필요한 노출장면은 시청자뿐만 아니라 사극에서 이야기 전개에서 문제가 될수가 있으며 인물탈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느측면을 부각시켜야 하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 전개스토리는 사극이든 현대물이든 좋은드라마의 평을 듣기 힘들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요 배우에게도 그 영향은 그대로 갈것이고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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