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코리아 김근탁 사장(43)의 비즈니스는 출근 전 옷장 문을 열면서 시작된다.
‘오늘은 새 차 캐딜락CTS의 판매 문제를 놓고 딜러들과 미팅을 하는 날. 가벼운 분위기를 이끌어내야 한다. 협조를 부탁해야 할 일도 있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려면 넥타이는…, 노란색이 좋겠다.’
일요일 저녁이면 김 사장의 머릿속에는 다음 일주일간 맬 넥타이 색깔이 요일별 스케줄에 따라 대충 결정된다.
●멋내기는 남을 배려하는 것
주변 사람들은 김 사장을 ‘멋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김 사장이 생각하는 ‘멋’이란 무엇일까.
“남을 배려하는 것”이라고 그는 정의한다. 옷을 입을 때 스스로의 만족감도 중요하지만 만날 사람들을 배려하는 게 우선이라는 것.
넥타이에 유독 신경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날은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붉은색 넥타이를 맨다. 연배가 높은 사람들과의 친목 모임 때는 깔끔한 비즈니스맨의 모습을 강조하려고 밝은 톤을 주로 선택한다. 직원들과 가벼운 미팅을 할 때는 넥타이를 하지 않고 줄무늬 셔츠 차림으로 나선다.
“특히 중년이 되면서부터 ‘나’를 조금 누르고 ‘남’을 조금 더 배려하는 멋내기가 더욱 중요해졌다”고 그는 말한다. 대학시절 김 사장은 어깨까지 기른 퍼머머리를 휘날리면서 오토바이를 몰고 다녔다. 30대에는 파스텔톤이나 강한 원색의 넥타이를 매기도 했다.
김 사장이 생각하는 ‘남을 배려하는 중년의 멋’은 옷입기나 몸치장 뿐만 아니라 말투와 제스처, 심지어는 의자에 앉는 자세에도 적용된다.
말은 짧을수록 좋다. 부하 직원에게 시시콜콜 지시를 내리는건 그 업무의 책임자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바라볼 때는 미간에서 약간 아래쪽을 본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상대를 긴장시키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을 때는 상체를 가급적 테이블 쪽으로 기울인다. 그래야 마주한 상대가 편한 마음으로 얘기를 꺼낼 수 있다.
이런 에티켓들은 대학졸업 후 3년간 스위스 호텔학교에 유학하며 배운 내용이 밑바탕이 됐다. 그 뒤 서울 하얏트호텔과 수입차 업계에서 마케팅 전문가로 근무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접하다보니 학교에서 배운 지식은 저절로 ‘몸짓언어’가 됐다.
그런 그의 스타일이 부하직원들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GM코리아 마케팅팀 한상윤 차장은 “소프트하지만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다”고 평했다. 대립적일 수도 있는 ‘소프트’와 ‘카리스마’가 어떻게 공존할까. 한 차장은 “부드럽고 간결한 말투에서 오히려 강한 무게가 느껴진다”고 예를 들었다.
●몽블랑 펜과 6000원짜리 커트
김 사장은 늘 셔츠 주머니에 몽블랑 만년필을 꽂고 다닌다. 펜촉이 굵어 속기스타일의 메모에는 적당치 않다. 서명할 때만 쓰는 펜이다. 서명할 일이 그렇게나 많을까.
그는 “일관성을 잊지 않기 위해 갖고 다닌다”고 설명했다. 경영상 어떤 결정을 내리고 서명할 때면 김 사장은 과거의 비슷한 경우를 떠올린다. 그 때 어떤 논리적 절차에 따라 결정을 내렸는지, 그리고 지금 내리는 결정이 그 때와 궤를 같이 하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서명해야 할 때 과거의 비슷한 어느 순간에도, 이번에도 손에 쥐고 있는 똑같은 펜은 자신에게 ‘일관성’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소도구 노릇을 한다. 그에게 멋내기는 일상과 분리된 꾸미기가 아니다.
‘일관성’은 외적인 모습에서도 마찬가지다. 옷이나 액세서리도 이제는 새로운 시도보다는 그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몸에 밴 스타일을 고수한다.
김 사장이 갖고 있는 10여벌의 슈트 중 몇 벌만 빼고는 모두 빨질레리 제품이다. 자신의 넓은 어깨를 가장 편하게 감싸주는 스타일이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다른 브랜드를 뒤지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헤어스타일은 3년째 남성 커트 전문점인 블루클럽 강남역점에서 6000원짜리 커트로 관리해 오고 있다.
“나에게 어울리는가만 따진다. 브랜드나 유행이 선택기준은 아니다.”
●두 개의 안경테와 할리 데이비슨
1주일간 김 사장은 두 종류의 안경테를 번갈아 쓰고 다닌다. 주중에는 ‘겨울연가’에서 배용준이 썼던 폴스미스의 반무테 안경을 걸친다. 차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주말에 골프를 하거나 가족들과 외출할 때는 해리포터의 안경처럼 알이 큰 뿔테 안경으로 바꾼다. 10년 가량 애지중지 관리해온 조르지오 아르마니 제품이다. “올드 패션이긴 하지만 아카데믹하면서 여유가 느껴지는 스타일이라 내 취향이다.” 티셔츠, 신발, 점퍼 등도 주말용은 따로 있다.
김 사장은 “육체적인 나이는 중년이지만 정신적인 나이는 아직도 사춘기부터 43세까지 끊임없이 넘나든다”고 말했다. 40대가 되면서부터 사춘기적 감성을 가급적 노출시키지 않으려 자제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 폴스미스제 안경이 ‘현실속의 나’라면 아르마니 안경은 마음속에 늘 품고있는 ‘본연의 나’인 셈이다.
안경만 바꾸는 게 아니다. 주말이면 김 사장은 달라진다.
토요일인 19일. 그는 올해 새로 장만한 할리 데이비슨을 몰고 강원도 쪽으로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단풍으로 물든 왕복 300㎞의 거리를 혼자 달렸다. 오토바이에 몸을 맡길 때의 기분을 그는 “자유”라는 말로 압축한다. 그의 사무실에는 항상 검정색 가죽점퍼와 검정색 부츠, 헬맷이 걸려 있다.
가끔은 서해안을 찾아 무선 조종 비행기를 날린다. 직접 나무를 깎고 엔진을 달아 비행기 한 대를 만드는데 걸리는 기간은 6개월. 오랜 시간 공들인 끝에 비행기가 제대로 날아오르면 더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낀다.
오토바이와 비행기는 모두 20대 때부터 해온 취미 생활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할 계획이다. 그 밖의 취미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골프장을 찾는 것. 일요일엔 다른 약속을 잡지 않고 열한살 다섯 살인 두 아이,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업무가 아닌 것에 몸과 마음을 쏟아 주말을 보내고 나면 월요일부터 다시 열심히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아무런 변화없이 반복되는 생활에서 멋이든 일이든 열심히 해 보겠다는 욕망이 생기겠는가.”
중년남자 김근탁의 멋이 만들어지는 화학식은 그런 것이었다.
금동근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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