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예종석/돌고 도는 사대주의 공방

  • 입력 2001년 7월 22일 19시 01분


세상에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구경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권과 이른바 ‘빅3’ 신문의 싸움은 결코 재미있다고 할 수가 없다.

싸움의 핵심이 ‘언론자유’의 문제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당사자끼리 정정당당하게 일전을 겨뤄야 관전의 재미가 있는 법인데 이 싸움은 싸움의 방식도 점점 복잡해져 가고 출전선수도 자꾸 늘어나는 데다 편가르기 양상마저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여권이 ‘언론과의 전쟁’ 운운하며 쏘아 올린 신호탄에 발맞추어 세무 당국이 언론과의 시비를 시작하더니 언론 내에서도 신문과 방송이 반목하고 있고 신문끼리도 처한 상황에 따라 서로를 공격하고 있다. 여기에다 정치인은 물론 문인에다 학자들까지 가세해 곡학아세(曲學阿世) 시비와 홍위병 논쟁으로 이어져 온 국민에게 편가르기를 강요하고 있는 형국이다.

국내의 싸움을 보면서 끓는 성정을 참기 어려웠던지 급기야는 태평양 건너 미국의 하원의원들까지 훈수를 두고 나와 싸움은 점입가경의 경지로 들어서고 있는 듯하다. 자기네 일이나 잘 할 것이지 남의 나라 일에 웬 참견인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칠흑 같던 군사독재 시절도 아니고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이 시점에 나라가 이런 망신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자괴감에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러나 보다 한심한 것은 싸움의 와중에 미국 훈수꾼들에게 보이는 우리 정치권의 반응이다. 미국 하원의원 8명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낸 언론 사태에 관한 우려의 서한에 대해 여권은 ‘개인의 의사표시라 별 의미가 없다’면서도 ‘주권 침해에다 오만 방자한 내정간섭’이라고 격분했다. 그런가 하면 야당은 ‘부끄럽고 참담한 심정’이라면서도 ‘언론탄압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라며 자못 즐거워하는 눈치이다. 이런 야당의 태도에 대해 여권은 사대주의적 발상이라며 몰아붙이고 있다.

곡학아세한다고 할까 봐 언론탄압 논쟁에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해묵은 사대주의 논쟁에 대해서는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다. 대륙의 한 귀퉁이에 위치하여 끊임없이 외세의 침공을 받으며 나라의 명맥을 이어온 이 땅에서 사대주의란 말은 정쟁에서 상대를 매도할 때 쓰일 수 있는 최악의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정쟁사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짐짓 의연한 체하지만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못 가 안달하거나 미국의 유력 정치인들을 만나려고 목을 매기 일쑤인 이 땅의 정치인 중에 사대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치인들의 사대주의 논쟁은 누워서 침 뱉기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현정권은 야당 시절 사대주의란 비판을 가장 많이 받은 세력일 것이다. 지금의 야당이 군사독재로 무장했던 여당 시절 해외 여론을 등에 업은 민주화 투쟁을 평가절하하기 위하여 가장 즐겨 사용한 단어가 사대주의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야당이 자기네가 가르쳐 놓은 레퍼토리인 사대주의로 몰리는 것은 자업자득의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그래도 그렇지 여야가 바뀌었다고 똑같은 노래를 이렇게 바꿔 부를 수 있는 걸까. 과연 시쳇말처럼 불륜도 내가 하면 로맨스가 되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 되는 것인가.

정치에 있어 주장의 일관성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나라의 체면이 걸린 사안을 놓고 처지가 바뀌었다고 말을 바꾸는 후안무치한 태도는 대도를 걷는 정치인의 도리가 아니다. 하긴 지금의 여당에는 과거 독재권력의 그늘에 기생하며 민주화 투쟁을 사대주의로 매도하던 이들도 상당수 합류하고 있고, 야권에는 그 정반대의 처지에 있던 민주투사들도 몸을 담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그런 의미의 일관성은 유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들이 양측의 큰 줄기는 아닌 다음에야 이런 과거를 잊은 듯한 행동은 곤란하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은 국민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적당히 얼버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은 여야가 공히 반성해야 할 일이기에 양비론을 펼치는 것이다.

국민은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지 않고 신념에 따라 일관되게 발언하는 정치인을 원한다.

예종석(한양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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