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쇼크]국세청-공정위 조사유보…경제현실 뒤늦게 인식

  • 입력 2003년 3월 12일 23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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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12일 기업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공정거래위원회의 부당 내부거래조사를 일시적으로 유보 또는 완화키로 전격 결정한 것은 현재 한국경제가 총체적 어려움에 빠지기 시작했다는 위기의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경제개혁’이란 명분만으로 기업에 더 이상의 ‘칼’을 들이댔다가는 자칫 환자를 살리기는커녕 바로 숨지게 할 수 있다는 현실적 한계를 의식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우리 경제를 둘러싼 대내외 여건이 빠른 속도로 악화되면서 경제의 ‘체력’이 떨어졌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다.

▽‘재벌개혁’ 속도조절〓고건(高建) 국무총리가 이날 경제단체장 초청 만찬 간담회에서 밝힌 내용은 새 정부의 정책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고 총리는 “경제가 나쁜 상황에서 공정거래위원회의 일제조사 같은 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기업을 한꺼번에 개혁의 대상으로 몰아치는 일이 없도록 ‘총리로서의 조정권’을 행사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시장 개혁’은 시장친화적 방법으로, 또 기업이 견뎌낼 수 있는 속도에 맞춰 추진하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이에 앞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도 10일 재정경제부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시장개혁의 방법과 관련해 고 총리와 같은 발언을 함으로써 이 부분에 관해 정부 내에서 공감대가 형성됐음을 보여준다.

더구나 SK수사 발표 후 바로 나타나고 있는 국민경제적 악영향과 경기침체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수단이 마땅찮은 현실은 정부에 경제문제, 특히 대기업정책의 어려움과 복잡성을 일깨운 것으로 풀이된다.

▽당분간 경기활성화에 중점〓이에 따라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은 ‘재벌개혁’보다는 ‘경기활성화’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전망된다.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 등 주요 경제부처 관료들은 이미 이런 인식을 갖고 있었으나 노무현 정부 출범 후 더 높아진 ‘개혁 구호’에 밀려 공개적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경제부처들은 이에 따라 기업의 투자를 가로막고 있는 규제를 대폭 풀어 투자심리를 살리는 한편 올해 예산 중 상반기 사용액수를 늘릴 방침이다. 국세청과 공정위가 고 총리의 발언 후 기업에 대한 조사를 당분간 유보 또는 완화하기로 한 것도 얼어붙은 경기를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게 경제계의 분석이다.

▽위기감 높아가는 한국경제〓현재 우리 경제는 ‘위기’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내수경기가 꽁꽁 얼어붙은 가운데 무역수지, 외국환평형채권 가산금리, 환율 등 거의 모든 거시지표에 ‘빨간 불’이 켜졌다. 여기에 가계와 기업의 심리를 나타내는 소비자기대지수, 경기실사지수도 위축됐다. 현장의 체감경기는 지표경기보다도 훨씬 나쁘다. 종합주가지수는 지난해 말 750 선에서 석달 만에 530 선으로 200포인트 이상 급락했다.

또 미국-이라크전쟁의 불확실성은 없어지지 않고 북한 핵문제는 한국 경제에 관련된 최대의 시한폭탄으로 남아있다. 이에 따라 국제적인 신용평가회사들이 국가신용등급을 낮출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여기에 SK그룹의 분식회계 수사발표 후 ‘재계 3위’인 이 그룹이 휘청거리고 있어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김광현기자 kkh@donga.com

천광암기자 iam@donga.com

▼외국언론 반응▼

SK글로벌의 분식회계가 사실로 드러나면서 지난 5년 동안 국제사회에 쌓아올린 한국경제의 적공(積功)이 자칫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다.

검찰의 수사가 재벌들의 불투명한 회계관행을 바로잡아 중장기적으로는 시장의 체질 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물론 외국 투자가들도 한국의 구조개혁의 성공작으로 재벌개혁을 꼽아 왔다는 점에서 한국경제에 대한 국제 투자가들의 호의적 평가는 급속히 식고 있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서울발 기사를 통해 서울지검의 한 검사의 말을 인용해 “한국의 대기업들이 기업경영과 투명성 측면에서 치유할 수 없는 암을 앓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SK그룹 경영인 10명이 주가를 조작하고 이익을 부풀린 혐의로 기소된 혐의내용을 자세히 전하면서 이번 사건은 다른 재벌들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도 “이번 사건은 일부 재벌들이 아직도 과거의 밀실경영을 계속하고 있음을 드러냈다”고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이 신문은 지난해 세계적인 컨설팅회사인 PWC가 세계 35개국의 회계기준을 조사한 결과 한국이 최하위로 나타났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일부 사람들은 SK사건이 빙산의 일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정부의 기업 구조조정 정책의 효율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외국 분석가들의 비판이 거세졌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서울의 외국계 투자은행 경영자의 말을 인용해 “단기적으로 투자신인도에 상처를 주겠지만 정부의 기업비리 단속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SK글로벌에 돈을 빌려줬거나 SK그룹의 다른 계열사가 발행한 회사채를 사들였던 외국계 투자은행들은 이번 사건으로 부분적으로 시장 투명성이 개선될 가능성을 점치면서도 단기적으로 악재임이 분명하다는 입장이다. 서울 주재 유럽계 은행의 한 관계자는 “한국 기업에 대한 신뢰가 손상돼 당분간 한국 기업 채권 및 주식에 대한 투자를 관망할 작정”이라고 밝혔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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