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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0년이면 일본 지방자치단체 중 절반이 사라진다.’ 이런 내용의 ‘마스다 보고서’가 열도를 충격에 빠뜨린 게 2014년 일이다. 저출산과 고령화, 인구의 대도시 유출로 지방이 쇠퇴해 행정체계가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경고였다. 마스다 히로야(増田寛也·74) 전 도쿄대 교수는 그런 점에서 ‘지방소멸’이란 용어의 창시자였다. 10년 뒤인 지난해 말, 후속 보고서가 나왔다. 이번엔 인구전략회의(의장 미무라 아키오 일본제철 명예회장·85·마스다 전 교수는 부의장) 명의로 낸 보고서에서 이들은 ‘지난 10년간 들인 노력에도 인구 감소를 멈추지 못했다’고 고백했다.‘인구 감소 사회에선 민주주의도 흔들려’ 인구전략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소멸 위기 지자체는 10년 전보다 약간(896개→744개) 줄었다. 그러나 큰 의미는 없다고 마스다 전 교수는 말한다. 출산율 추세는 변함없고, 외국인 노동자 유입과 지자체끼리의 인구 쟁탈전 결과라는 것. 대도시가 주변 인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현상도 여전했다. 10년 전 보고서는 당시 1.4인 합계출산율을 1.8까지 끌어올려 2100년 인구 9000만 명대를 유지할 것을 목표로 제시했다. 하지만 실제 출산율은 1.20(2023년)으로 떨어졌고 2100년 추계 인구는 6300만 명 선에 머물고 있다. 인구 감소가 가져올 문제들 가운데 ‘인구감소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도 흔들린다’는 지적이 눈에 띄었다. 민주주의에는 ‘동시대인들과 중장기적으로 이 사회를 함께 만들어 나간다’는 암묵적 합의가 전제되는데, 미래가 불확실하고 시스템의 지속 여부를 알 수 없다면 아무도 손해 보려 하지 않게 된다. 결국 서로에 대한 신뢰가 깨져 갈등이 커지고 민주주의는 훼손된다. 요즘 한국 청년들이 결혼 출산 연금 등에 대해 보이는 냉소적 태도의 배경에도 유사한 불신이 깔려 있는 듯하다.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들여 아이를 낳고 길러 봤자 나만 손해”라거나 “연금 열심히 내 봤자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만이 그렇다. 도처에서 계층과 세대, 지역, 성별로 갈라져 싸우는 배경에도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지방 소멸 방지, “지금이 마지막 기회” 인구전략회의는 새로운 인구 비전으로 ‘2100년 8000만 사회’를 목표로 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이 지속 가능한 성장률을 담보하려면 이 정도 규모는 갖춰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최소한 5년 내에는 출산율을 점차 두 배까지 올리는 움직임이 시작돼야 한다고 했다. 마스다 전 교수와 미무라 의장은 입을 모아 “지금이 미래를 선택할 마지막 기회”라고 외친다. 이분들이 자신은 살아 있지도 않을 2100년을 기약하는 모습에서는 기성세대의 책임감과 걱정이 느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다. 결국 출산과 육아를 맡을 당사자는 적령기 청장년이고 무엇이 필요한지도 이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부 학자들은 ‘세대별 선거구제’ 아이디어마저 내놓고 있다. 선거구를 나눌 때 지역이 아니라 세대별로 잘라 각 세대 대표들을 의회로 보내자는 것. 예컨대 20대가 60대보다 머릿수는 적겠지만 대표성을 위임받은 인원의 의회 진출을 보장해 주자는 것이다. 입시나 채용에서 성별, 인종별 쿼터제가 적용되듯 세대 쿼터제도 고려해 봄 직하다. 인구 감소, 고령화에 관한 한 일본은 우리에게 좋은 학습 사례였다. 그런데 출산율은 좀 다르다. 한국 합계출산율이 1970년 4.53에서 지난해 0.74까지 수직낙하하는 동안 일본은 2.1에서 1.20으로 떨어진 정도에 머물렀다. 그런데도 1989년 ‘1.57 쇼크’부터 시작해 2023년 도쿄의 ‘0.99 쇼크’ 등 새로운 숫자가 나올 때마다 온 나라가 들썩였다. 한국의 ‘0’대 출산율은 ‘집단자살 사회’(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라는 우려 섞인 시선을 받고 있지만 정작 우리 내부에서는 일본만큼의 위기의식도 없어 보인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sya@donga.com}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2012년)’,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2014년)’, ‘나는 품위 있게 죽고 싶다(2021년)’… 그 연배에 이처럼 죽음에 대한 책을 많이 낸 현직의사도 드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첫 저서의 제목대로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였다.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가이자 굵직한 의료정책들을 내놓으며 세상을 바꿔온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61) 얘기다.최근 새 저서를 보내온 그를 만나려 15일 서울대 의대를 찾았다. 대뜸 그는 “내 나이는 43세 정도”라고 말한다. 그가 적정나이를 계산하는 방법은 이렇다. 자신이 태어난 1964년의 기대수명이 58세였고 현재 기대수명이 83세이므로 58을 83으로 나눈 0.7을 곱해야 현재의 적정나이가 된다는 것. 61세에 0.7을 곱하면 43세 정도 된다.20대 누님 암으로 보내며 의사의 길 결심그가 의사가 된 동기에는 개인적 체험이 자리하고 있다. 어린 시절 큰 누나가 24세 꽃다운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중학교 1학년 때, 제가 맹장수술을 받게 돼 큰누나가 간병을 해줬어요. 회진하던 의사가 누나 눈에 황달이 보인다며 검사를 권했는데, 알고보니 위암이 간까지 전이돼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대학생이던 큰 형과 아버지가 크게 싸웠다. 형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니 수술을 해보자고 했고, 6남매를 키워야 했던 아버지는 포기하려 했다. 누나는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소년은 반드시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삶은 한번 방향이 잡히면 자꾸 그쪽으로 끌려 들어간다.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그는 1989년 원목실 봉사활동을 통해 말기 위암 환자를 만났다. 환자 가족들과 함께 간병하고 임종까지 지키면서 호스피스에 대한 사명감을 갖게 됐다. 25세 때였다.“신부님 수녀님들과 함께 말기 환자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기도해주고 책을 읽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게 ‘호스피스’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요.”2011년 EBS다큐 ‘명의’에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의사로 그가 출연하기도 했다. 이 내용을 책으로 쓴 것이 첫 저서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가 됐다. ―가정의학과를 선택한 이유도 호스피스를 하기 위해서라고요.“전공과를 정하기 전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조언을 들었습니다. 심지어 가톨릭단체에 호스피스병원을 만들자는 제안도 했었지요. 선배들은 가정의학과를 권했습니다. 그런데 과 입국식때 제가 ‘호스피스를 하려고 들어왔다’고 했더니 다들 웃더군요. 당시 호스피스는 성직자나 간호사가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어요.”무의미한 연명 중단하도록…연명의료결정법 통과시켜따지고보면 우리 모두는 그에게 신세를 졌다. 2016년 제정(2018년부터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법제화는 그의 노력에 힘 입은 바 크다. 한국인의 삶의 마지막에 대한 생각도 엄청나게 바뀌었다. 사전에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한 사람은 23일 현재 283만 여명. 연명의료 중단을 이행에 옮긴 사람은 누적 42만 여 명에 이른다.―2017년 경 일본의 슈카쓰(終㓉‧인생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활동)를 취재할 때 그쪽 사람이 “한국은 어느 날 갑자기 법을 뚝딱하고 만들어 버렸다”며 혀를 내두르더군요.“그때 일본 언론이 제게도 취재하러 왔었어요. 일본에서도 오래 전부터 추진했지만 계속 안 됐는데 어떻게 한 거냐고요. 이유는 여럿 있지만 일단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죠.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에 이어 2008년 김할머니 사건이 결정적이었습니다.”김할머니는 2008년 2월 식물인간이 되었으나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다가 자녀들이 연명의료의 중단을 요구하며(영양제공 중단은 요구하지 않았다) 재판 끝에 2009년 5월 21일 대법원에서 승소한 사건이다.당시 대법원은 연명의료는 무의미한 신체침해 행위로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하는 것이며,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에 이른 환자가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될 경우 연명의료 중단을 허용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사실상 존엄사를 인정한 첫 판례라는 평가를 받았다.“그 뒤로 국회에서도 계속 법안을 논의해왔습니다. 당시 정부는 연명의료결정법만 통과시키려 했어요. 저희가 호스피스 법안을 함께 넣어야 한다고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연명의료를 중단했는데 호스피스 지원이 없다면 생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분들이 너무 힘들지 않겠어요. 우여곡절 끝에 따로따로 발의된 두 법안을 합쳐서 통과시킨 겁니다.”이때 기여한 공로로 그는 2016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재원 없는 정책은 모래위에 지은 성 같아”천신만고 끝에 법이 제정됐지만 윤교수는 못내 찜찜하다. 법안이 19대 국회 말기에 급하게 통과되면서 그가 넣었던 웰다잉과 호스피스를 위한 ‘기금’과 그것을 운영할 ‘재단’ 조항이 모두 삭제됐기 때문이다.“‘이건 이번엔 빼고 다음에 하자’면서 통과에 집중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법안이나 정책을 만들어도 재원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기금과 재단이 왜 필요한 겁니까.“지금의 연명의료결정법은 연명의료 중단에 국한돼 있기 때문에 아주 소극적입니다.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하는 분들에게 웰다잉을 위한, 존엄한 죽음을 준비시켜 드려야 해요. 생전장례식이나 마지막 소원, 마지막 여행, 자서전 등 인생노트, 이런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기고 죽음을 잘 정리할 시간을 갖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걸 제도화하자고 계속 부르짖었지만 정부도 의료계도 귀담아듣지 않네요.”국가가 그런 데까지 신경쓸 여력이 있을까. 아무튼 윤교수의 논리는 이렇다. 예컨대 누군가가 ‘나는 연명의료 안하겠다’ ‘호스피스를 하겠다’고 결정한다면 건강보험에서는 엄청난 의료비가 절감된다. 대신 이 분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것. “이런 건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마무리, 국가가 책임집니다’라고요. 미국은 카터 대통령때부터 오바마 대통령때까지 매년 11월을 ‘호스피스의 달’로 정하고 대통령이 말기 환자와 그 가족을 위로하고 그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격려하는 메시지를 씁니다. 캐나다는 의회가 나서서 ‘모든 국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에 존엄성을 지키며 자신의 삶을 선택할 권리를 포함했어요.”‘설탕세’에 거는 기대그래서 그가 요즘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은 ‘설탕세’다. 몸에 해로운 상품 판매에 대해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그 사용을 줄이고 모자라는 재원으로도 활용한다는 취지다. 유사한 사례로 담뱃세가 있는데 현재 1갑당 세금이 약 3300원, 연간 11~12조 원이 걷힌다.세계보건기구(WHO)는 2016년 ‘설탕을 넣은 상품값의 20%만큼 세금을 매기라’고 각국에 공식권고했다. 이를 계기로 설탕세를 도입하는 곳이 급증해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0년 17개국에서 2023년 117개 국가 및 지역으로 늘었다. “영국이 2018년에 설탕세를 시작했는데 설탕 섭취량이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비만, 암 발병까지 줄었어요. 최근 청소년 천식이 줄었다는 논문도 나왔습니다. 제가 새로운 재원으로 설탕세(건강세)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 국내에서 여론조사를 두 번 했어요. 초고령사회 노인건강 문제나 예방적 의료에 대한 재원 확보를 위해 건강보험료를 올리는 것과 건강세를 신설하는 것에 대해 물으면 80% 이상이 건강세를 택했습니다. 사실 호스피스도 그렇지만 고령인구 증가에 따른 만성질환 치료와 예방 활동에도 재원이 필요합니다.”고독은 건강에 치명적그가 최근 낸 저서 ‘삶의 의미를 잃기 전에(안타레스)’에서는 삶과 죽음에 관한 얘기 외에 ‘건강하게 나이드는 법’이 수록돼 있다. “이 책은 제 참회록과 같은 것입니다. 건강과 삶에 대한 신념이 담겨 있어요. 미래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건강권, 건강민주화, 건강공동체, 건강세 등을 고민합니다. 세상은 생명공동체, 삶 공동체, 건강공동체를 거쳐 돌봄공동체, 웰다잉공동체로 나아가야 합니다.” 건강하게 나이드는법 파트에는 △건강은 선택에 의해 얻어내는 것 △삶의 목표와 보람이 수명을 늘린다 △고독은 건강을 망친다 △사회적 관계가 건강에 중요하다 △‘아직 젊다’는 믿음이 기적을 곧잘 낳는다 △나이 들수록 돕고 살아야 하는 이유 등이 담겨 있다. “건강하게 나이 들려면 삶의 목표랄까 보람이 있어야 하고 고독을 벗어나야 하고 낙관주의를 가져야 하고 ‘아직 젊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과거보다 기대수명이 늘어났으니 그에 어울리는 젊은 생각을 해야 하죠. 그런 노력을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이타적인 활동이 수명을 늘린다―노년에 사회관계가 좋을수록 건강하다고요.“고독은 건강에 치명적입니다. 고독의 해악에 대해 영국에서는 하루에 담배 15가치를 피우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해롭다고 하고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교류하고 사는 삶이 건강의 비결입니다.”―부자일수록 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말이 있지요“그래서 건강 민주화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건강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재원을 만들고 그 재원을 사용하는 국민은 권리만이 아니라 책임도 져야 합니다. 예컨대 노인들이 젊은 세대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건강이예요. 자신의 건강을 잘 관리함으로써 의료비를 줄이고 젊을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활동을 할 수도 있지요. 재미있는 건 봉사활동이 생존율을 20% 정도 올린다는 점입니다.”―노년의 봉사활동을 강조하시는군요.“심리학자 메슬로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첫째 생존, 둘째 안정, 셋째 소속, 넷째 인정, 다섯째 자아실현의 순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가 자아초월이예요. 이게 바로 봉사하는 마음입니다. 나를 넘어서 이타적으로 사는 삶이 나를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는 거죠. 여기에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것, 사회관계를 잘 만들어가는 이런 것들이 합쳐져서 인간의 삶이 됩니다. 인간은 동물로 태어나 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죠. 불가능하지만 끊임없이 도전하므로 위대합니다.”혼자 꾸는 꿈은 그저 꿈이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했던가. 그의 꿈이 확산돼 현실이 되길 빌어본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첫째,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 둘째, 제가 어머니 아들인 것에 감사합니다. 셋째, 정신이 혼미한 지금도 ‘제가 누구냐’고 물으면 ‘내 아들’이라고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박점식 천지세무법인 회장(70)이 2010년 인지장애(치매) 판정을 받은 어머니 장곤단 여사(2011년 86세로 작고)를 생각하며 써내려 간 1000개의 감사편지 앞부분이다.어머니는 이 편지를 630여 통 썼을 때 돌아가셨다. 박회장은 상을 치른 뒤에도 370여 통을 더 써서 1000개의 감사편지를 완성했다.‘어머니, 내 어머니’누구에게나 어머니는 특별한 존재지만 박 회장에게는 더욱 그랬다. 어머니는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유복자인 5살 아들을 데리고 흑산도로 들어가 남의 집 일을 해주며 키웠고 뭍으로 유학보내 고등학교를 졸업시켰다.“섬에서 유일하게 남의 집 셋방살이를 했어요. 참 어렵게 살았는데, 제 마음 속에는 그런 그늘이 하나도 생기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워낙 저를 신뢰하고 자신감을 갖도록 키워주신 덕입니다. 예를 들어 끼니때면 저는 어머니가 일하러 간 집에 가서 밥을 먹었는데 ‘얻어먹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손님처럼 가서 먹고 온다는 느낌이었죠.”섬 마을 인심이 후했던 것에 더해 그가 공부를 무척 잘했다는 점, 어머니에 대한 평판이 워낙 좋았던 점이 작동했던 듯했다.그는 이 편지들을 모아 2014년 ‘어머니, 부치지 못한 1000통의 감사편지(올림)’이란 책으로 만들었고 2022년 개정판 ‘어머니, 내 어머니(올림)’를 냈다.50대 중반에 ‘감사’를 만난 축복그는 세무업계에서 ‘감사운동 전도사’로 불린다. 지난달 25일 서울시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 내에 자리한 천지세무법인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 입구 벽면에는 ‘감사 메모’가 잔뜩 꽂힌 나무가 장식돼 있었다. ‘00님. 야근당직 짝꿍 해줘서 고마워요’ ‘00팀장님 칭찬합니다’ 등 직원들이 붙인 일상의 소소한 감사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감사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2000년대 후반 회사가 위기라고 느꼈습니다. 당시 세무업계는 전자세금계산서 도입을 앞두고 업무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상황이었어요. 답답하던 차에 우연히 뇌과학자와 심리학자가 쓴 논문을 읽었는데 ‘이거다’ 싶더군요. ‘감사편지를 하루 5개씩 쓰면 3주면 스스로의 변화를 느끼게 되고 3개월이면 다른 사람들이 내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나부터 달라져보자고 생각했습니다.”결국 ‘감사편지 쓰기’는 그의 50 평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일대 사건이 돼 버렸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박 회장 자신이었다.“전에는 제가 성격이 만만치 않아서 직원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윗사람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감사일기를 쓰면서 미소도 늘고 ‘사람이 달라졌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석 달 뒤 그는 감사편지 쓰기를 전 직원에게 확대했다. 종이세금계산서 입력센터를 만들어 기존 업무를 줄이고 남는 시간을 고객 상담에 집중하도록 했다. 사무실도 서초동에서 지금의 장소로 옮기고 스마트오피스로 바꿨다. 직원들이 고객에게도 감사편지를 쓰게 되면서 회사는 더욱 성장세를 이어갔다.“15년째 매일 감사편지를 일기처럼 쓰고 있습니다. 하루 10개 이상은 씁니다. 그날 일어난 인상적인 일이나 상황을 적고 마지막에 감사합니다! 라고. 안 좋은 일이 있어도 더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씁니다.”호랑이 어머니돌이켜보면 어머니는 아들이 ‘아비없는 자식’ 소리 들을세라 더 엄하게 키웠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매를 많이 맞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니 더 이상 매를 들지 않았다.“고등학교 가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 담배에 손을 댔습니다. 어머니는 눈치를 채셨을 텐데도 아무 내색도 없으셨어요.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앉혀놓고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너를 고등학교에 보낼 테니 공부하라’고 하셨죠. 매 맞는 것보다 열배는 더 아팠습니다.”목포상고 다니던 시절 크게 혼난 적이 있다. 방학 때 친구들과 짜고 이웃집 염소를 몰래 잡아먹고 목포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이웃의 염소값을 물어주고 목포 자취집까지 그를 찾아와서 교과서와 책을 전부 꺼내 불사르며 꾸짖었다.“내가 ‘경우 바르게’ 살라고 했냐, 안 했냐? 사람이 그런 나쁜 짓을 하면서 공부는 해서 뭐하냐. 남에게 못된 짓 하는 사람은 공부를 해선 안된다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감사일기를 안 썼으면 그런 일도 다 잊고 살았을 거예요.”졸업 뒤 무작정 상경해 공장과 백화점 등을 전전하며 일했다. 주경야독 끝에 1980년 세무사 시험에 합격한 것이 속세의 기준으로는 삶의 전기였다. “남들에게 잘해라. 베풀면서 살아라”‘어머니, 나의 어머니’를 읽어보면 짤막한 에피소드가 쌓여 어머니의 전체 모습이 그려지고 그 희생과 인내, 깊은 속내가 읽힌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너는 혼자니까 남에게 잘해라, 남에게 베풀며 살라’고 가르쳤다. 그는 ‘가진 것도 없이 뭘 베푸나’라고 생각했지만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제일 먼저 그 생각이 났다고 한다. 흑산도 초등학교 교장선생님께 전화 걸어 ‘혹시 학교에 필요한 건 없느냐’를 묻고 교문 고치는 비용을 보내거나 아내가 다니는 성당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 없느냐를 탐문했다.“누가 어디에 기부했다는 소식 들으면 제 가슴이 덩달아 뛰었어요, 나도 저거 해야 하는데, 어디다 하지? 이러면서.”그렇게 그는 기부천사가 돼 갔다. 그는 사랑의 열매 아너소사이어티 18호 회원이고 푸르메재단의 열성적인 후원자이기도 하다. 정기후원은 물론, 2011년 어머니 장례식 조의금 5000만 원을 기부했고 2014년 푸르메재단 고액후원자 모임 ‘더 미라클스’가 발족하자 1호 회원이 되었다. 정기후원하는 단체만 10여 군데가 넘고 클래식과 국악에 관심을 넓히면서 첼리스트 문태국 바리톤 김기훈을 지원하기도 했다.마음이 씩씩한 아들, “더 오래 내 곁에”1985년생인 아들 동훈 씨는 근위축증의 일종인 듀센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다. 근육의 힘이 빠지고 위축되며 악화되는 병이다. 두 살도 되기 전에 진단을 받았고 모두가 20세를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자꾸만 넘어지던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휠체어에 의지했다. 하지만 온 식구의 헌신적인 돌봄 덕일까. 만 40세인 지금도 꿋꿋하게 지내고 있다.“지금은 손가락끝과 고개 정도만 움직일 수 있어요. 올 초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는 이제 각오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친척들이 마지막 인사까지 하러 왔었지요. 얼마 전 퇴원했고 주 3회 투석을 다닙니다. 밤에만 쓰던 산소마스크를 낮에도 급히 써야 하는 경우가 늘었어요.”―아드님이 힘들어하지는 않는지.“그 녀석의 긍정성은 놀라울 정도예요. 제게 ‘아버지, 내 제삿밥 얻어먹으려면 잘하세요’라고 하는 식이죠. 중환자실에 누워 뼈만 남은 모습에 엄마가 막 우니까 ‘엄마, 맥도널드에 츄러스 신제품 나온다는데 나 그거 먹고 싶어. 안 죽으니까 걱정마’라고 했다나…. 하하. 그저 더 오래 우리 곁에 머물러주기를 바랄 뿐이고 그동안은 우리도 붙어서 최선을 다해야죠.”동훈씨는 10여 년 전 천지세무법인 직원이 됐다. 의사들이 ‘스무살까지도 못 살 것’이라던 아들이 20대 후반에 접어든 어느날, 박회장은 ‘하루를 살더라도 주체적인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게 맞겠다’ 싶어 동훈 씨에게 일을 시켰다. 집에서 컴퓨터로 회사 홈페이지 관리를 하게 한 것. 동훈 씨가 신나게 일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느날 회사에 놀러가보고 싶다고 하더니 주 3일만 출근하겠다고 말해왔다. 그 뒤 코로나 사태 전까지는 거의 매일 출근했다. 직원들에게 커피를 잘 쏘곤 해 인기도 좋았다. 박 회장은 자기 일을 하는 주체적 경험이 아들의 건강을 지켜준 힘이 됐다고 믿고 있다.자수성가한 회사는 후배들에게박회장의 근황을 물으니 ‘은퇴준비 중’이란 답이 돌아왔다. 전국에 퍼진 20여 개 지사의 운영권을 동고동락해온 후배 세무사들에게 넘기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법인은 제 소유로 돼 있지만 그분들이 고객관리하고 영업하면서 키워낸 것이죠. 이 정도 일궜으면 후배들에게 넘겨줘야죠. 승계작업은 상당부분 진척이 됐고 4년 정도 더 지나면 모두 마무리될 겁니다.”―다 나눠주고 나면 어쩌시려구요? 나이 들어도 일을 해야 한다던데요.“일은 할 거예요. 저만 찾는 고객도 있고, 일거리는 있어요. 다만 제가 이 회사에서 더 이상 돈을 가져가지는 않겠다는 거죠. 그간 돈 많이 벌었고, 생각해보니 앞으로 사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가 없겠더라구요.”―아드님 간병비는? 부인 의견은?“간병비는 중증장애인에 대한 정부 지원이 잘 돼 있어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아요. 집사람도 큰 욕심 없는 사람입니다. 사는 데 지장 없으면 괜찮을 겁니다.”“가장 소중한 건 가족인데…”자수성가해 직원 100여 명이 넘는 세무법인을 키워냈으니 사회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그는 요즘 스스로에 대한 반성으로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나이 일흔이 되어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제 스스로는 ‘이 정도면 괜찮은 남편, 괜찮은 아버지’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게 저혼자 착각이었다는 의구심이 드는 거죠. 어쩌면 제가 어머니의 깊고도 끈질긴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오만해진 건 아닐까. 아내와 아들 딸이 어머니처럼 무조건 저를 믿고 품어줄 수는 없는데,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채워주지 못한 그 무엇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박회장이 사업이 바빠 밖으로 도는 사이 부인은 매일 아들을 업어 등하교시킨 후유증으로 앙쪽 무릎 연골이 다 망가졌다. 외아들만 바라보고 살아온 시어머니를 모시고 장애를 가진 아들을 돌보며 가정을 꾸려야 하는 부인의 어려움도 대충 모른 체했다.물론 그는 이런 부인과, 몸이 아픈 오빠 때문에 늘 모든 것을 양보했던 딸에게도 100통의 감사편지를 썼다.-부인이 정말 평생 고생하셨을 것 같습니다.“제가 그걸 잘 몰랐다니까요. 이제 깨닫기 시작하니 집사람 얼굴에 조금씩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반성문을 수없이 썼어요. 그러니까 저는 정말로 뭘 잘못하는지를 몰라서 깨닫지를 못했어요. 이 정도면 됐겠지 싶었는데 아닌 거예요. 스스로 얼마나 한심한지. 감사에 대해 강의하고 다닌 게 부끄럽습니다. 정작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고 가장 소중한 사람한테 상처를 주고….”그래서 은퇴 이후 계획을 묻자 단호한 답변이 돌아온다.“집사람이 하자는 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하려구요. 당분간 제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어요.”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올 초 본보 ‘100세 카페’ 지면에 등장한 지형운 씨는 국가정보원을 퇴직한 뒤 잠시 쉬러 간 고향 강원도 철원에 아예 정착해 농부가 됐다. 보람 있게 일하며 용돈도 벌고 지방소멸도 늦출 수 있다며 즐거워했다. 박병하 전 보건복지부 국장이 ‘100세 카페에 어울릴 사람’이라며 추천 이메일을 보내 주셨다. 기사가 나간 날 인천에서 택시를 운행하는 전직 교장 정정호 씨가 “내 중학교 동기동창”이라며 반가움을 전해 왔다. 정 씨는 2023년 12월 100세 카페에 등장한 인연이 있다. 교직에 종사하며 인천에 정착했지만 고향은 철원이라고 들은 기억이 났다. 1·4 후퇴 때 월남했던 그의 아버지는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겠노라며 군사분계선 바로 아래 철원에 정착했다고 했다. 그 뒤 무정한 세월만 흘렀을 것이다.먹고사는 게 큰일이던 시절 각기 1957년생, 1956년생인 두 사람은 먹고사는 게 큰일이던 시대 배경에 더해 지정학상으로도 변방인 고향에서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렸다. 소년 시절 당연하다는 듯이 공장에 취직했고 우여곡절을 거치며 뒤늦게 학업을 이어 갔다. 인터뷰를 하며 기자가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적절한 시기에 주어져야 했을 정보의 부족이었다. 삶을 조금이나마 더 유리하게 꾸려 나갈 정보랄까 요령을 알려 주는 존재가 전혀 없었다. 이들은 스스로 부딪쳐 시행착오를 거치며 더듬더듬 길을 찾았다. 지 씨는 농고를 졸업한 뒤 경기도의 한 자동차 공장에 입사했지만 고졸과 대졸의 엄청난 대우 차이를 알고는 사표를 냈다. 정 씨는 중학교 졸업 뒤 동생과 서울로 상경해 영등포의 한 공장에서 3년간 일했다. 아무리 똑똑해도 학비가 없으면 진학을 포기하던 시절이었다. 다른 가족의 희생이 따르는 경우도 많았다. 지 씨는 결혼한 누나의 서울 집에서 학원비를 지원받으며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정 씨는 동기보다 4년 늦게 고교생이 됐고 사범대에 진학했지만 그의 두 동생은 계속 공장에서 일하며 가계를 도왔다. 12일자 100세 카페 주인공인 박점식 천지세무법인 회장은 1955년생으로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 격이다. 홀어머니가 흑산도에서 몸이 부서져라 일해 뭍으로 유학 보냈다. 목포상고 졸업 뒤 혼자 상경해 공장과 백화점 직원 등을 전전하다가 주경야독으로 세무사 시험에 붙어 일가를 이뤘다. 힘닿는 대로 기부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박 회장은 은퇴를 앞두고 35년간 키워 온 법인을 동고동락해 온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작업을 고민 중이다. 목표는 4년 뒤. 법인을 넘겨준 뒤에도 자원봉사 형태로 계속 일할 생각이라고 한다.이웃을 생각하는 선한 마음 1차 베이비붐 세대는 1955∼1963년생으로 현재 62세부터 70세다. 산업화 세대 끄트머리, 386 세대 앞머리를 차지한다. 대부분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했지만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청춘들이다. 각자의 불리한 처지를 극복하고 나름 성취를 이뤄낸 그들의 인생 후반전은 멋지고 훈훈하다.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을 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작은 힘이지만 세상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선한 마음도 가득하다. “나쁜 짓 할 거면 공부는 해서 뭐하냐.” 고등학생 시절 박 회장이 어머니께 혼날 때 들었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품을 판 돈으로 애써 아들을 학교에 보낸 어머니의 신념은 ‘공부를 많이 하면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같은 베이비붐 세대지만 요즘 미디어에서 많이 보는 모습은 나라와 공동체는 망가지건 말건 본인의 기득권 유지 혹은 확대에만 골몰하는 엘리트들 모습이다. 소박하지만 건강한 일상을 쌓아 나가는 100세 카페 주인공들 삶의 자세가 더욱 값져 보인다. 선한 영향력을 가진 이가 많아져야 세상이 살 만해진다.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sya@donga.com}
지난해 말 연합뉴스 사진기자로 정년퇴직한 조보희 씨(61)는 사진기자들 사이에서도 ‘괴짜’로 통한다. 퇴직자들의 기념사진을 자청해서 찍어주고 모임이나 행사에서도 기록사진 촬영에 열심이었다. 선배 자녀 결혼식장에서 전속 사진사보다 더 열심히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녔고, 취재현장에서는 관계자나 동료 기자들의 모습까지 열심히 찍어주는 기자였다.“30년 일한 일터에서 사진 한번 안 찍었더라…”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지난해 6월, 베테랑 사진기자였던 부원의 정년퇴직을 축하하는 송별회 날이었다. 그가 ‘타사 후배가 기념사진을 찍어주러 온다’고 양해를 구하기에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이 후배, 현장 취재 나갈 때처럼 제대로 된 카메라 장비에 촬영용 사다리까지 갖추고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부원 모두에게 자신의 ‘그림’에 맞춰 지시하기 시작했다.“자, 모두 얼굴 보이게 일렬로 서시고, 퇴직자는 앞으로 나오세요. 오늘만은 퇴직자가 주인공입니다. 제가 신호 보내면 모두 웃는 얼굴로 박수 쳐 주세요.”끝난 뒤 회식이 예정돼 있었다. 인사말로 ‘밥 먹고 가겠느냐’고 물었더니 스스럼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패 증정에 각자 덕담이 오가고 건배 외치고 케익 자르고. 와중에 그가 말하는 내용에 매우 공감해 한 수 크게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말에는 그가 냈다는 책 ‘사진 시간을 담다(호미)’ 한 권을 건네 받았다. 마침 취재 예정이던 어르신이 마음을 바꿔 펑크가 날 상황. ‘지금, 여기의 소중함’에 대해 조보희 씨의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정년퇴직하면 고향에 내려가 농사지을 거라고 했는데, 뜻밖에도 아직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었다.‘지금, 여기의 소중함’그는 2019년부터 회사에서 퇴직자가 있으면 찾아가서 사진을 찍어주기 시작했다. 정년퇴직자들은 으레 조용히 사라져갔는데, 수십년을 근속한 회사를 떠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보였다. 저들이 저렇게 떠난다는 건, 지금 큰소리 뻥뻥치며 ‘살아있음’을 구가하는 후배들의 미래도 똑같다는 얘기 아닌가. 그렇게 나서서 퇴직기념 사진을 찍어주면 무척이나 기뻐하고 고마워했다. 점차 소문이 나서, 회사에서 퇴직자가 있으면 그를 부르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본인도 같은 방식으로 기념촬영을 받고 회사를 떠났다. ―보도사진을 찍어야 하는 사진기자로서 자칫 하찮아보일 수 있는 기념사진이나 기록사진을 열심히 찍는 이유는.“본업은 열심히 했고 성과도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내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찍어주면서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무척 즐거웠어요. 가족 행사나 친지 행사 등에서도 그렇고, 퇴직하고 나서도 동창회나 향우회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제가 빠지면 행사가 헐겁게 느껴지는지 꼭 오라는 신신당부를 받곤 합니다.”원래 기자 지망생이었던 그는 친척 중 사진기자의 멋진 모습에 매료돼 방향을 바꿨다. 1990년 통신사에 입사한 건 우연이었지만, 업무강도가 높고 수시로 마감해야 하는 상황이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사진기자로서 날개를 단 경험’이었다고 한다. 청와대 출입에서 스포츠 사진까지 사진기자가 해봐야 할 일은 모두 경험했다. “내일, 내일 하다가 영원히 못한다”―평소 직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많이 찍어놓으라고 하셨는데, 사실 그 말에 무릎을 쳤습니다. “사진이란 ‘지금, 여기’를 찍는 겁니다.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기록하고 간직하는 거죠. 기록사진은 내 인생의 여정을 기록하는 거예요. 의외로 30여 년을 일하고도 일터에서의 일상 사진이 하나도 없는 분이 많아요. 어제도 오늘도 출근하는 직장이다 보니 특별할 게 없지만 일단 퇴직하면 그날 이후로는 못 돌아오는 공간이 됩니다. 집 빼고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인데도 말이죠. 기억할 수 있도록 기록을 남겨두는 게 좋죠.”―‘내일 내일’ 하다가 영원히 못하는 게 어쩐지 인생과 닮았네요. 그러고 보면 기록사진을 남기는 것 자체가 생에 대한 긍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맞습니다. 사진을 잘 찍는 사람들은 삶에 대해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분들이 많아요.지금의 자신에 대한 긍정, 지금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긍정….”이런 활동은 모두 ‘봉사’다. 하지만 선행의 대가는 다른 방식으로도 그에게 돌아왔다. 사진 찍어주며 만난 분이 그를 좋게 보고 일자리를 제안했고 퇴직후 곧바로 신생 통신사에서 일을 하게 됐다고 한다. ‘나 이렇게 안 생겼어’―나이드신 분들 중에 사진찍기를 싫어하는 분들이 많던데요.“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들이 보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머릿속으로 인식하는 모습이 다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못 보니 과거의 모습을 생각하는데, 지금보다 젊었을 때 모습이죠. 그런데 사진 찍어 놓으면 늙은 사람이 딱 있으니까 놀라죠. ‘나 이렇게 안 생겼어’라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그 모습으로 보고 있었는데 자기만 자기를 보고 놀라는 거예요. 하지만 사람과의 만남에서 생김새는 사실 아무 상관없어요. 그 사람의 표정이라든지 행동, 즐거움 뭐 이런 걸 보고 그를 느끼게 되죠. 긍정적으로 밝은 표정을 보여주면 다른 사람에게 좋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사진 찍기 싫어하는 분께는 지금이 제일 젊을 때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오지랖일까. 나의 이 순간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순간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작동한다.“며칠 전에는 출근길 횡단보도에서 젊은 아빠가 아기띠에 아기를 안고 왼손은 조금 큰 꼬마 손을 잡고 오른손엔 큰 가방을 들고 서 있더군요. 굳이 ‘사진 찍어드릴테니 핸드폰을 달라’고 말을 걸었죠. ‘지금 이 모습이 훗날 좋은 추억거리가 된다’고요. 처음엔 사양하던 젊은 아빠도 결국 핸드폰 넘겨줬어요. 하하.”일반인의 일상기록에도 역사적 의미―스마트폰 보급으로 누구나 사진을 많이 찍는 시대입니다. 부모님 유품 중 가장 머리 아픈 것이 앨범이라는 말도 있어요. 어떻게 보관해야 할까요.“앨범 사진은 카메라로 복사해 파일로 만들어 보관하는 걸 추천드립니다. 외장하드에 차곡차곡 쌓아서 돌아가실 때 자식에게 넘겨주세요. 저는 필요 없어진 사진이라도 없애는 것은 찬성하지 않습니다. 특히 앨범에 넣어둔 아날로그 사진은 더 그렇습니다. 모든 사진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보거든요. 일반인들의 일상기록도 마찬가지예요. 예를 들어 일제시대에 본인은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귀한 역사 자료가 되기도 하지요. 1세대 사진작가들의 작품 중에 가장 평가받는 것은 그 시대의 풍속이 담긴 작품들이예요.”―우리 현대사에도 사진이 없어 안타까운 일이 많은데요. “예컨대 파독 광부나 간호사들의 활약이 한국 경제성장에 큰 도움을 준 역사에 대해 우린 잘 알고 있지만 정부에는 기록사진이 없었어요. 결국 국가기록원이 개인들이 소장한 사진을 공모해 그걸로 전시도 하고 교과서에 싣곤 했지요. 한국전쟁 당시 사진은 주로 미국 종군기자들의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1960년대 한국이 참전했던 베트남 전쟁은 사진이 거의 없어요. 국력이 약하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기록을 남긴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전에 많은 군인이 가서 고생을 했지만 남아있는 사진이 없으니 기억에서 묻히기 쉽습니다.” 그는 퇴직하면서 자신이 30여년간 찍었던 고향집의 농사일 광경, 장례식과 동네 잔치 등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광이 담긴 사진들도 회사 데이터베이스에 올렸다. 충분히 자료사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 “자신의 소중함을 들여다보세요”―책을 내셨는데. “가장 뿌듯했던 건 사진기자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제가 입사했을 때는 흑백 필름 카메라 시절이었고 그게 컬러, 디지털로 변하면서 DSLR에서 미러리스 카메라로 넘어왔죠. 사진기자는 늘 최첨단 카메라를 썼고 2,3년마다 기종이 바뀌었는데 그런 경험을 한 세대가 별로 없어요. 그때 사용했던 카메라는 물론이고, 전송기라든지 카메라 장비들에 대해 제가 다 기록했어요. 그간 아무도 하지 않았거든요. 회사 창고에 쌓여있는 장비들이 뭔지 후배들은 모르죠. 1998년에 나온 최초의 디지털 카메라는 당시 2500만 원이었는데 화질은 떨어지지만 마감용으로 요긴했죠. 디지털카메라가 필름 화질을 추월한 건 2010년 정도였어요.”―퇴직하면 고향인 경북 상주에 내려가 농사 지을 생각이라고 단호히 말하시더니. “아직 조금 이른가? 하는 생각에 좀더 서울에 남아 있습니다. 주말마다 내려가 부모님 사시던 고향집을 살피고 텃밭도 가꾸고 있어요.”그는 말미에 젊은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가장 큰 기념사진은 자신의 얼굴 모습이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변하고 인생관도 바뀌고 표정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젊을 때 얼굴을 찍어 놓으세요. 핸드폰으로 크게 찍어 놓는 거죠. 1년에 하나씩 찍어놓으면 모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스스로 볼 수 있어요.”자신을 소중하게 들여다보라는 얘기인 듯하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오랜만에 가본 서울 영등포구청역 일대에서 전에 없던 활기가 느껴졌다. 2년 전 역 근처에 청년임대주택이 들어서면서 젊은 취향의 세련된 상점들이 늘어난 덕인 듯했다. 낡은 흑백사진 같던 풍경에 색채가 입혀진 느낌이랄까. 이 동네에서 청년임대주택이 주변 집값을 떨어뜨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지금은 해결됐다지만 한때 여의도에서는 아파트 재건축 과정에 노인들을 위한 데이케어센터를 기부채납하라는 서울시 요구에 주민들이 반발하면서 시끌시끌했다. ‘조만간 본인들이 이용할 시설인데 왜 반대할까’ 하는 생각에 의아했다.‘집 근처 노인시설’은 자랑거리 한국인의 자산 대부분이 부동산에 쏠려 있기 때문일까. 그것이 청년이건 노인이건 장애인이건, 약자를 위한 시설이 들어선다면 반대부터 하는 ‘님비’ 현상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런 시설들이 정말 주변 부동산 가치를 떨어뜨릴지는 곰곰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보다 딱 20년 먼저 초고령사회를 맞이한 일본에서는 좋은 노인복지시설은 인근 주택의 인기를 높이는 요소가 된다. 고령자는 물론 그 가족에게도 큰 혜택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단지 내에 초등학교가 있는 아파트를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라며 반기듯 일본에서는 노인복지시설이 도보 거리에 있는 ‘노품아’를 반기는 것. ‘노후 어디에서 살 것인가’는 많은 이들의 고민거리다. 최근 100세 카페에 실버타운, 즉 시니어 전용 주거시설 입주를 말리는 김경인 공학박사 얘기를 쓴 적이 있다. 그는 한국에서 운영되는 실버타운이 노년 세대를 세상과 격리시킨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앞서 시행착오를 겪은 일본 노인시설들이 일반인과 섞이고 어울리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도 참고할 만했다. 나아가 고령자를 위한 주거를 따로 짓다 보면 전 국토가 실버타운으로 뒤덮일 수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결국 ‘살던 곳에서 살면서(Aging in Place)’ 집과 주변 환경을 고령 친화적으로 바꿔 나가는 게 바람직하다. 몇 년 전 일본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본 것도 결국 ‘살던 곳에서 나이 들기’의 실전편이었다. 1970년대 초반 요코하마의 베드타운으로 조성된 인구 1만 명 규모 단지였는데 기존 시설들을 활용해 단지의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지속 가능한 단지로 살려내기 위한 실험이 한창이었다. 지역 주택공사가 빈 상가를 개조해 어린이집과 주민들이 운영하는 공동식당, 커뮤니티센터를 만들어줬다. 센터에는 주민자치기구가 나서서 고령자들이 사람을 불러 30분 정도 활용할 수 있는 500엔 심부름센터, 은퇴자들이 청년창업을 지원해 주는 상담소, 갑작스러운 질병에 대처하기 위한 간호 스테이션 등을 만들고 있었다. 고독사를 방지하기 위해 이웃끼리 안부를 확인하는 6호 담당제도 있었다.‘살던 곳에서 나이 들기’ 통계청에 따르면 2050년이면 고령자의 절반 이상이 1인 가구가 된다. 혼자 살아가는 수십 년간, 가급적이면 돌봄이 필요 없는 시간을 늘리고 돌봄 받는 시간을 최소화하고 싶은 게 누구나의 바람이다. 조금 힘들더라도 스스로 움직이고 세상과 이웃과 교류하는 것이 고령자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는 길이다. ‘초고령 시대가 왔다’며 매스미디어에서 연일 시끄럽다. 이런 시대일수록 재건축 재개발이건 신도시 건설이건, 요즘 유행하는 ‘소셜믹스’도 좋지만 ‘에이지믹스’를 통해 세대 간 교류를 강화하는 시스템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내부구조도 설계 단계부터 노인이나 장애인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으로 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인구구조에 따른 미래는 정해져 있다 해도, 미리미리 대처해 나가는 지혜가 있다면 조금은 나은 미래가 되지 않을까.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sya@donga.com}
손수진 미래에셋 ETF 연금 마케팅 부문 대표는 퇴직연금 2.0시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 “과거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현상”을 말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 또 초고령사회라는 조건에서는 예금이야말로 ‘위험자산’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연금 2.0시대에 가장 변해야 할 부분은…. “한국의 퇴직연금 시장이 제대로 성장하려면 원리금 보장성 상품에 대한 쏠림을 해소해야 합니다. 적립금의 87.2%가 원리금보장형에 들어가 있어요. 연금 1.0시대에 투자상품 비중에 70% 한도를 둔 것처럼 2.0시대에는 예금성 상품에도 70% 투자 한도를 둬서 수익률을 제고하는 장치로 활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예금에 한도를 둔다면 나머지 30%는 강제로 공격적 상품에 투자하게 한다는 건가요. “2023년 기준 투자수익률은 원리금 보장형이 4.08%, 실적 배당형은 13.27%였습니다. 리스크를 취해야 수익률은 올라갑니다. ‘방치형 투자자’라도 계좌의 30%는 적극적 상품에 투자해 그 성과의 차이를 체험한다면 점차 수익률을 중시하는 포트폴리오로 바뀌지 않을까요.” ―업계 숙원이던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2023년 도입됐지만 성과는 미흡해 보입니다. “선택지 중에 ‘저위험’ 자산인 예금이 포함되면서 85%가 예금에 쏠려 버렸습니다. 10년 후 퇴직연금 시장은 약 1000조 원까지 커질 것으로 추정됩니다. 현재와 같은 구조라면 10년 뒤에는 퇴직연금에 쌓인 정기예금이 800조 원이 된다는 건데, 이 돈이 인플레이션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이런 사회는 이미 고령화, 저성장, 저금리의 순환적 덫에 빠져 자산도 늙어버린 사회인 거죠.” ―자기주도형 투자자와 방치형 투자자의 수익률이 양극화돼 있다는 지적입니다. “투자 성향의 차이를 억지로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적극적 투자자는 ETF 투자와 TDF를 병행하고 방치형 투자자는 TDF를 선택해 나름의 수익률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퇴직 시기에 맞춰 상품이 구성된 선택지들이 많이 준비돼 있습니다.” ―정부가 기업의 퇴직연금 도입을 의무화하고 중도인출을 더 까다롭게 한다거나 디폴트옵션의 ‘고위험’ 표현을 바꾸는 등 손질을 한다고 합니다. “‘고위험’ 표현을 ‘수익형’으로 바꾸는 것은 필요한 조치라고 봅니다. 영어의 ‘risk’는 ‘danger’와는 다르죠. 위험보다는 ‘도전’에 가깝습니다. 퇴직연금 관련 제도는 지난 20년간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발전해왔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보완해 나가야 하겠지요.”서영아 기자 sya@donga.com}
국내에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된 지 20년. 이제는 ‘퇴직연금 2.0’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2005년 12월 시작된 퇴직연금은 그간 양적으로는 빠르게 성장했으나 질적으로는 갈 길이 멀어서 마치 ‘몸집만 큰 아이’처럼 돼버렸다. 과거 퇴직금은 ‘회사’가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시스템을 유지해 왔으나 퇴직 시점에 회사 형편이 어려워지면 못 받게 되거나 목돈을 한 번에 받아 자칫 투자에 실패할 경우 노후가 흔들리는 일이 적지 않았다. 퇴직연금제도는 고용주가 근로자의 근로기간 중 1년에 30일분 평균 임금을 금융기관에 맡기는 형태로 소득이 끊긴 퇴직자의 노후 생계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하고 국민연금 수령 연령까지의 소득 공백을 메워주는 역할이 기대됐다.● ‘양적 성장, 질적 부실’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3년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382조4000억 원. 업계에서는 2024년 420조 원 규모로 불어났을 것으로 추산한다. 국민연금과 개인연금을 합친 전체 연금시장에서 퇴직연금의 비중은 21.4%까지 성장했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미진한 점이 많다. 우선 퇴직연금 도입률이 26.8%(2022년 기준)로 아직 저조하다. 300인 이상 사업장은 91.9%에 이르지만 30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23.7%에 불과하다. 근로자들이 이직하거나 퇴직할 때 연금을 중도 인출하거나 일시금으로 찾는 경우가 많아 불안정성을 가중시켰다.가장 큰 문제는 ‘쥐꼬리’라는 수식어가 붙는 낮은 수익률. 지난 5년간 퇴직연금의 수익률은 연평균 2.35%에 불과해 예금 금리 수준에 머물렀다. 이 수익률을 올릴 방안으로 근로자의 별도 운용 지시가 없으면 사전에 정해둔 방법으로 적립금이 운용되도록 하는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2023년 도입됐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업권 내 이해관계 다툼 속에 ‘초저위험’ 등급에 예금이 포함되면서 전체 적립금의 80% 이상이 원리금보장상품으로 쏠려 제도 도입 취지가 무색해졌다.● 쥐꼬리 수익률은 정기예금 편중 탓 퇴직연금의 수익률이 낮다는 비판에 대해 금융투자업계에서는 ‘평균의 함정’을 지적한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23년 말 기준 퇴직연금의 87.2%가 원리금보장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다. 최근 5년간 퇴직연금의 전체 수익률은 2.35%지만 운용방법별로 나눠서 보면 원리금보장형은 4.08%, 실적배당형은 13.27%로 수익률 격차가 크다는 것(2023년 기준). 최근에는 확정기여형(DC)계좌 수익률이 100%를 넘어섰다거나 은퇴 전까지 연금계좌로 10억 원 만들기를 목표로 한다는 직장인들의 사연이 보도되기도 한다. 주로 미국 지수를 추종하는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한 경우가 많았다. 퇴직연금 계좌도 투자자가 적극적으로 굴리면 대박이 날 수 있다는 것. ● ‘자기주도형’ vs ‘방치형’의 양극화 업계에서는 투자자들이 극단적으로 양분돼 있다고 말한다. 한쪽에는 원리금보장상품만으로 전체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방치형 투자자’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적립금을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자기주도형 투자자’들도 있다.실제로 퇴직연금은 운영주체별로 회사가 운영하는 확정급여형(DB), 근로자 본인이 운영하는 DC, 퇴직 이후에도 본인이 운영하는 개인형 퇴직연금(IRP)으로 나뉘는데 수익률은 본인의 관여도가 높은 순서로 높다. 즉 ,IRP가 가장 높고 DC, DB의 순으로 투자자의 관심과 운용이 수익률을 좌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나 초고령 사회에서는 장기투자자산에서 원리금보장상품은 결국에는 안전하지 못하게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리가 정해진 원리금보장상품이 처음에는 안전해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물가를 못 쫓아가거나 성장률이 둔화되면 금리가 내려가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 반대로 실적배당형 투자자산은 투자 시점에는 위험자산일 수 있지만 물가상승률을 추종하고 성장에 따른 수혜를 수익률로 보상받을 수 있다. 연금투자는 본인의 소득이 둔화하는 시기에 대한 대비이므로 장기적으로 성장에 포커스를 둔 투자를 해야 한다. ● 대량 퇴직시대, ‘현명한 인출’ 준비해야 다른 한편으로 퇴직연금 2.0시대는 한국의 전체 연령대에서 은퇴 준비 세대가 가장 많아지는 시기와 맞물리게 된다. 투자와 적립에 목적이 있었던 1.0시대보다 더 성숙한 시스템이 요구된다. 자산 불리기 못지않게 자산을 연금소득으로 바꿔 인출하는 흐름도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에서는 인출 및 은퇴설계전문가를 양성하고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로보 어드바이저를 개발하는 등 투자자 개개인의 성향과 상황에 맞춘 시스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나이 들어 어디서 살 것인가’.누구나 한번쯤 고민할 화두다. 물론 정답은 없다. 누군가는 고령자를 위한 시설을 생각하고 누군가는 전원살이를 꿈꾸며 누군가는 경제적 여건에 맞춰 작은 집으로 이사할 것이다.신경건축학자의 의견은 달랐다. 건강하고 자립적인 노후를 위해서는 살던 곳에서 사는 게 최선이라는 것. 특히 실버타운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 조언한다. 김경인 경관디자인 공유 대표(58)가 최근 저서 ‘나이들어 어디서 살 것인가’(투래빗)를 통해 던진 주장이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불편해지는 집을 노년의 삶에 맞게 수리하고 지역사회와 함께 살아가는 노후를 권한다. 이를 위한 사회와 국가의 역할도 짚어준다. 좀더 자세한 얘기를 듣기 위해 지난달 27일 서울 강동구 천호동 십자성 경로당에서 만났다. 이곳은 그가 2019년부터 2년간 강동구 도시경관 총괄기획가(부구청장급)로 일하며 공을 많이 들인 공간 중 하나다.공공건물 1층은 ‘모두의 거실’ 경로당은 건평 30평의 3층짜리 현대식 건물이다. 강동구청이 다세대 빌라를 사들여 허물고 지금의 건물을 지었다. 1층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카페다. 시니어 바리스타가 내주는 커피 한 잔이 2000원. 대체로 5060세대로 보이는 중장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즐긴다. 사람이 많고 왁자지껄해서 인터뷰 녹음이 제대로 될까 신경 쓰일 정도였다.이 건물은 김 대표가 강동구청 민간 전문가로서 건축설계사를 들볶으며 만들어냈다고 한다.“당초 세워놓은 리모델링 계획이 불법 건축물이어서 제가 재건축을 적극 주장했습니다. 고령자에게 꼭 필요한 엘리베이터 등을 구현하기 위해서도 새로 지어야 했어요. 건물에는 제가 아는 노인시설의 노하우를 모두 반영했습니다.”주민센터 지하층에 있던 경로당을 옮기는 작업. 예산은 더 들었지만 어르신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2층은 할머니 방. 3층은 할아버지 방으로 하고 그 방 귀퉁이에 인근 아동들이 저녁마다 모여 지내는 공간 ‘꿈미소’를 넣었다. 4층에 해당하는 옥상까지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데, 날씨 좋은 날 어르신들이 간단한 운동을 하고 바람 쐬기에 좋다.김 대표는 2019년부터 2년간 자신의 사무실에 주 3일, 구청에 주 2일 출근하는 생활을 하며 40여개 학교와 공공도서관, 노인복지관, 청소년 문화의 집 등 300여 공공장소들의 디자인을 바꿨다. 강동구는 2020년 ‘대한민국 공간복지대상’ 대상을 받았다.노인 5명 중 1명이 혼자 산다‘살던 곳에서 나이들기(Aging in Place)’는 사실 요즘 ‘핫’한 테마이기도 하다. 경관디자인 1세대인 그가 신경건축학 관점으로 설명한다는 게 새로웠다. 그는 2007년부터 신경건축학에 기반해 학교공간을 바꾸는 작업을 진행했고 2014년 이 경험을 담은 저서 ‘공간이 아이를 바꾼다’(중앙북스)를 펴내 반향을 불렀다. ―신경건축학이란 뭔가요.“신경건축학은 공간과 환경이 인간의 정서 사고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공간설계와 건축에 반영하는 학문이예요. 예를 들어 ‘색을 바꿨더니 아이들이 밝아졌다’ 같은 겁니다. 인지장애(치매) 환자가 요양하는 곳은 어떻게 설계되어야 인지기능 향상에 도움이 되고 행복감을 느낄지를 연구하는 식이죠. KAIST 뇌인지과학과 정재승 교수가 연구회를 이끌고 있습니다.”―노인 5명 중 1명이 독거노인입니다. 또 고령자 사고의 63%가 집에서 발생한다는데요.“편안했던 집이 나이 들면서 가장 위험한 공간이 되기 쉽습니다. 미끄러운 바닥, 불편한 가구배치, 어두운 조명…. 고령자가 집에서 자립적으로 살아가려면 환경을 조금씩 손볼 필요가 있지요. 문턱 낮추고 안전손잡이를 설치하는 등 간단한 변화로도 효과가 큽니다.”“‘살던 곳에서 나이 들기’의 기본이 자립이예요. 그러려면 개인도 노력해야 해요. 연령대에 맞춰 필요한 부분들을 조금씩 개선해나가야 하죠. 50대 후반인 저도 목욕탕 바닥에 시트지를 바르고 슬리퍼를 바꿨어요. 식탁을 각진 것에서 둥근 것으로 바꿨구요. 이렇게 조금씩 불편한 부분들을 개선해나가는 거죠. 국가적 지원도 필요합니다. 일본은 개호보험(한국의 장기요양보험)에서 화장실 핸드레일 같은 고령자 안전을 위한 설비비용을 지원해주는데 사고가 많이 줄었다고 하더군요. 전체 사회로는 이득인 거죠.”―‘나이 들어도 살기 좋은 도시’란.“‘지역사회에서 나이들기(aging in community)’도 중요합니다. 고령자가 쉴 수 있는 벤치나 산책로 조성, 아파트 단지내 공용공간을 세대간 교류의 장으로 바꾸는 등의 작은 변화만으로도 도시를 ‘나이 들어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실버타운, 노년의 낙원인가 새로운 고립인가―실버타운은 반대하신다고요.“지금과 같은 모습의 실버타운이라면 반대합니다. 그곳이 노인 격리시설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유명 실버타운에 가보면 보안 시스템이 몇겹으로 되어있고 ‘어떻게 오셨느냐’고 묻지요. 고령자 입장에서 보호라기보다 격리되는 느낌이었어요. 가뜩이나 외로운 노인들을 으리으리한 건물에 격리시켜서 더 외롭게 만드는 거죠. ”―실버타운 인기가 높아져서 입주하려면 2년 이상 대기해야 한다던데요. “저는 유명 실버타운 내부 시설 보면서도 충격을 받았어요. 시설은 첨단인데 따뜻한 느낌이 없고 노인 감성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더군요. 주거가 아니고 그저 시설인 거에요. 체육시설도 잘 돼 있지만 이용자가 없어요. 고령자에게 맞지 않는 기계들이거든요. 예컨대 사이클은 안장이 높고 작은데 자칫 낙상사고가 나겠더라구요.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실제로 사고가 난대요. 문화시설도 많은데 활기가 전혀 없어요. 노인의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않고 시설을 만들었다는 느낌이었어요.”―고령자 입장에서는 식사 챙겨주고 의료적 비상상황에 대처하기도 좋지 않을까요.“글쎄요. 신경 건축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요리만들기가 치매 예방에 굉장히 좋아요. 힘들어도 고령자가 하루 한 끼 정도는 해 먹는 게 좋다는 거죠. 요리가 어떻게 보면 종합적인 운동이에요. 대근육과 소근육을 다 쓰니까요. 실버타운도 청소 매일은 안 해줘요. 거기까지 가서 그렇게 비싼 돈을 내면서 살 필요가 있을까요. 어르신들도 너무 편하게 지내시는 것보다 자꾸 움직이는 게 좋아요.”외부에 개방돼 세상과 소통하는 일본의 노인시설들―일본의 시설들은 그렇지 않다는 지적을 하셨더군요.“모두 개방돼 있어요. 최고급 노인홈도 커뮤니티 시설 일부가 개방돼 외부와 섞이게 설계합니다. 노인들을 고립시키지 않는다는 취지죠. 노년층과 젊은 층을 자꾸 분리하려 하지 말고 섞어줘야 해요. 노인복지시설하고 양육시설을 같이 만들죠. 일본도 처음부터 이렇게 한 건 아니예요. 본래 따로따로 돼 있던 거를 오랜 시행착오 끝에 세대교류 세대공존 컨셉을 넣는 게 맞겠다는 결론을 내린 거죠. 그들이 실패한 경로를 우리가 굳이 따라갈 필요는 없잖아요.”―경로당에 설치된 꿈미소가 그런 개념인가요. “2층 할머니가 그러시잖아요. 아이들이 옥상에서 행사하면 보러 가신다고. 일본은 자연스럽게 동선을 섞은 커뮤니티 시설들을 많이 만들었어요. 노인홈 식당을 오픈해서 지역 주민들도 이용하게 한다든지 아이들 공간을 연결해서 운영한다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하더군요. 예컨대 ‘붓시엔’ 법인하에 있는 4개 시설은 온천이 메인이에요. 온천은 남녀노소 누구나 가잖아요. 외부인이나 주민들도 와서 그 시설을 이용하고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도록 공간 배치에 엄청 고민을 많이 했더라고요. 모토는 ‘뒤섞임’, ‘어울림’이에요. 우린 폐쇄성이 너무 강해요.”노년의 존엄과 자립―노년의 귀촌 귀향에 대해서는.“익숙한 공간이라면 생각해 볼 수 있겠죠. 하지만 너무 한적한 시골은 의료가 안 되잖아요. 결국 스스로 운전할 수 있는 때까지로 한정되는 것 아닐까요.”―정작 본인은 어떻게?“제 경우는 지금 사는 동네가 너무 좋아요. 전철역에 바로 붙어 있는 아파트인데 병원도 가깝고 자연환경도 좋아요. 문화시설은 전철 타고 가면 다 있죠. 그러니 제 경우 실버타운에 갈 필요가 없더라는 거죠. 이제 재건축 연한이 됐는데 그때 데이케어 시설을 넣자고 제가 나서서 하겠다고 했더니 아는 교수님이 ‘야, 너 그러다가 맞아 죽어’라고 하시더라구요. 하하.” ―언젠가는 본인들이 이용할 시설인데, 왜 싫어할까요. “초고령 사회에서는 재건축이나 신도시 계획할 때 데이케어 시설이나 요양시설을 반드시 넣어야 합니다. 그런 시설들이 곳곳에 확충되면 주민들이 굳이 실버타운에 갈 필요가 없어요. 사실 요즘 신축아파트들은 커뮤니티 시설에 헬스장 사우나가 다 있어요. 심지어 ‘아침밥 주는 아파트’도 생기잖아요. 한국은 아파트 주거가 많은데, 아무리 낡은 아파트라도 엘리베이터니 경사로 등은 기본적으로 다 돼 있어요. 여기에 커뮤니티 시설을 고령친화적으로 구성한다면 상당수 고령자들은 내 집에서 편하게 나이들며 지낼 수 있습니다.”다른 세대와의 어울림 통해 공존 추구그가 보내준 이력서는 깨알같은 글씨로 무려 27쪽에 이르렀다. 대학에서는 조경학을 전공했고 환경대학원을 거쳐 일본 교토대 ‘인간 환경 설계학 연구실’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2001년 경관디자인회사 ‘브이아이랜드’를 설립해 22년간 지자체와 관공서에서 1000여 건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나 2023년 4월 갑자기 사업을 접었다. “이 분야에서는 1, 2위를 다툴 정도로 잘 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이 너무 아팠어요. 그동안 제가 시속 150km로 달리듯 살았거든요. 지금까지 낸 책이 번역 포함 20여 권이고 회사 운영하고 남편 밥해주고 아이도 키웠어요.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싶어서, 사업은 정리했습니다.”―강동구 일을 힘들게 병행한 이유는.“돌아보면 제가 아는 것들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세대 공존과 교류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게 되더군요. 이를 테면 강동구 구도시에는 커뮤니티 시설이 거의 없어서 이것저것 손을 댔는데, 노인복지관 짓는다고 하면 지역 주민들이 싫어합니다. 반대로 청소년 문화의 집 짓겠다고 하면 노인들이 싫어하세요. 서로 싫어하는 거죠. 제 방침은 과감하게 섞는 거예요. 그래서 강동구의 복지시설들은 1층을 비워 ‘모두의 거실’로 만들었어요. 십자성 경로당 1층에 카페를 둔 것처럼 청소년 문화의 집 1층도 어르신들이 들어가 즐길 수 있고 노인복지관도 일반인 누구나 들어와서 쉬고 갈 수 있게 했어요. 세대는 서로 섞여야 하고 그걸 잘 이어주는 게 공간의 힘입니다.” ―지금의 활동을 이어갈 생각인가요. “고령자에게 필요한 건 돌봄이 아니라 자립이고 시설이 아니라 주거입니다. 노인을 따로 보호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거죠. 저는 노년의 삶을 존엄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높이는 일이라고 믿습니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정치권을 중심으로 상속세 관련 논쟁이 한창이다. 표심을 밀고 당기는 논쟁들을 지켜보며 드는 아쉬움은 한국 상속세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통찰이 없다는 점이다. 상속세는 닥쳐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고, 당사자들은 고통이 큰 세금이다. 특히 기업을 일군 연로한 사업가들의 시름이 깊다. 피와 땀을 갈아 넣은 회사 절반을 세금으로 바쳐야 하니 잘나가던 회사를 매각하거나 폐업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게임회사 넥슨은 창업주 김정주 회장이 사망하자 상속세를 주식으로 물납해 정부가 2대 주주가 돼 버렸다. 세제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점도 많다. 예컨대 부부간 경제공동체를 인정하지 않는 배우자 공제, 38년간 물가 상승을 반영하지 않은 공제액 등이 그러하다. 가장 큰 문제는 징벌적 이미지가 강하다는 점. 누군가가 애써 일군 자산에 대한 존중이나 망자에 대한 예의, 상속인들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납세자 입장에서 효용성을 느끼기 어렵고 억울하기만 하다.본질 빠진 상속세 논쟁 일제강점기에 처음 도입된 상속세는 몇 번 변천을 겪은 끝에 1997년 개정판이 유지되고 있다. 당시 설정된 일괄공제 5억 원은 서울에서 30평대 아파트 3채 정도는 살 수 있는 돈이었다. 1997년 30평대 아파트 시세표를 보면 대치동 은마아파트가 1.52억 원, 잠실 주공5단지가 1.35억 원, 노원구 하계동 미성아파트가 1.4억 원이었다. 당시 법 입안자들은 이 정도 액수는 망자가 가족에게 남겨줘도 괜찮은 자산이라고 봤던 거다. 이후 집값은 10배 이상 상승했지만 일괄공제액 5억 원은 변함이 없다. 정치권에선 배우자 공제를 현행 5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올려준다고 선심 쓰듯 말하지만 이상한 얘기다. 한 가정의 자산은 부부가 공동으로 쌓은 것이고 부부는 경제공동체다. 이혼 시 재산 분할에 증여세가 붙지 않고, 1가구 1주택 규제에서도 부부를 한 몸으로 간주하는 이유다. 유독 상속과 증여에서만 부부는 딴 몸이 된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상속이 일어나기 전 이혼을 하는 게 현명하다는 말이 나온다.이혼하면 비과세, 상속하면 세금 폭탄 배우자 공제 문제가 얼마나 큰지 일본 사례를 보면 실감한다. 일본에서는 배우자의 법정상속분은 무조건 전체 상속액의 절반이다. 액수가 얼마건 세금이 붙지 않는다. 1000억 원을 상속하면 배우자에게 돌아가는 500억 원에는 세금이 없다는 얘기다. 또 망자가 사용하던 주택과 건물의 경우 주택은 330㎡까지, 건물은 400㎡까지는 산정가의 80%를 공제해준다. 남은 배우자의 노후 생계와 주거를 보장하고 망자의 생전 자산을 존중한다는 배려가 읽힌다. 가업을 승계하는 경우에도 상속 증여세는 매각 혹은 폐업 시까지 납부 유예된다. 상속세를 거론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한국 상속세는 일본에 이어 가장 높다’는 말의 실상이 이렇다. ‘인간의 얼굴을 한 세금’이 쉬운 얘기는 아닐 것이다. 다만 징벌적 상속세가 부자들을 해외로 내보내는 건 분명하다. 200억 원까지는 상속세가 없는 미국을 비롯해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갈 곳은 널려 있다. 굳이 좁은 땅덩이에 갇혀 부자를 죄악시하는 국세청의 볼모로 살 일이 있겠나. 2023년 사망자의 6.8%가 상속세를 냈다고 한다. 혹자는 상속세가 아직도 극히 일부의 세금이라는 뜻으로 이 표현을 이용한다. 하지만 한국 인구 20%가 65세 이상이다. 이들 모두가 상속을 걱정하고 준비하는 후보군이다. 평생 일군 자산을 지키려면 이민이나 이혼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sya@donga.com}
2020년 9월 마지막 금요일, 정선용 씨(57)는 25년간 청춘을 바친 회사에서 갑작스런 퇴직 통보를 받았다. 당시 52세. 너무 빨리 임원 승진을 했던 탓일까. 주말을 이용해 종이상자 3개 분량의 짐을 챙겨 나온 뒤 다시는 그 건물로 돌아가지 못했다. 곧바로 추석이었지만 연휴가 끝나면 갈 곳이 없어져 버린 현실에 당혹했다.명함이 없어진다는 것‘삶도 직장도 시한부인데, 왜 언제까지라도 이어질 거라고 착각했을까.’ 추석을 보내며 자신이 처한 곤궁한 처지의 근원은 경제구조에 있다고 봤다. ‘하루 한 편씩 경제에 관한 글을 쓰자.’ 다음날부터 경제와 인생에 대한 통찰을 매일 자신의 블로그(정스토리)에 풀어냈다.이를 네이버 카페 ‘부동산스터디’에 시리즈로 올리자 댓글이 수백 개씩 달리는 등 반향이 컸다. 20편쯤 올렸을 때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2021년 3월 펴낸 첫 책 ‘아들아 돈 공부해야 한다’(RHK코리아)는 지금까지 12만 부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는 갑자기 막을 내린 인생 1막의 상처를 부여안은 채 작가이자 유튜버로서 새 인생을 꿈꿨다.여기까지가 2021년 12월 100세 카페에 소개된 정 씨의 모습이다.최근 그가 새 책을 낸다며 연락을 해 왔다. ‘언제까지 흐르는대로 살 것인가’(테라코타)라는 제목에 ‘마흔부터 인생의 밀도를 높이는 6가지 방법’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그로서는 다섯 번째 책이다. 사실 그간에도 새 책이 나올 때마다 보내 주며 건재를 알려 왔었다. 퇴직 후 만 4년 반, 100세 카페 지면에 나간 지도 3년 여가 지났다. 퇴직의 충격을 솔직히 표현하고 거기서 헤어나오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그의 요즘 삶은 어떨까. 14일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나 봤다.작가- 강사- 유튜버로 두번째 인생―어떻게 지내셨는지요?“책 쓰고 유튜브 만들고 강연도 다닙니다. ‘작가’라는 타이틀에 익숙해진 편이예요. 책은 1년에 한 권씩은 꼭 쓰겠다던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켰습니다.”그의 일상은 오전 5시에 시작한다. 집 근처 뒷산까지 운동 겸 산책을 2시간 정도 한 뒤 귀가해 영어회화 공부, 필사 및 낭독, 독서, 글쓰기 순으로 습관화된 하루를 차곡차곡 쌓아 간다. 이 일과를 오전 중에는 마무리한다. “주로 김훈 작가의 글을 (베껴) 쓰고, 읽고 있습니다. 필사를 할수록 책의 깊이가 더 이해가 되요. 필사와 낭독은 글을 제 안에 내재화하는 큰 힘이 되는 듯합니다.”―유튜브나 강연 쪽은 어떤지요. “유튜브는 제가 직접 만드는 것보다 다른 사람 채널에 패널로 참여하는 정도가 적절한 것 같아요. 강연은 사람들 눈을 보면서 소통하니까 즐겁습니다. 기업체나 지방자치단체 도서관 등에서 요청이 오는데, 강연료와 무관하게 불러 주는 곳은 다 갑니다. 지금까지는 ‘월급쟁이들의 재테크’나 ‘4050 세대가 경제적 안정을 위해 해야 할 일’ 같은 주제가 많았고 앞으로 4050이 퇴직 이후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 얘기하려 합니다.”―퇴직 첫해에 인세 수입이 연봉 빈자리를 채워 줬다고 했는데, 그 후로도 순조로운가요.“그 정도는 아닙니다. 인세와 강연료 수입이 대부분인데 두 번째, 세 번째 책은 첫 책만큼 팔리지 않았고 앞의 책과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어요. 일부러 출판사도 바꿔 보고 문체도 바꾸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세 정산은 1년에 두 번이고, 강연료 수입도 들쑥날쑥해서 가계에는 크게 도움이 못 되고 있죠.”직장생활은 단체전, 퇴직 이후는 개인전―이번 책 앞머리에 ‘콩나물세대’라는 표현이 등장하던데요.“1960년에서 1979년생까지를 ‘콩나물세대’라고 제가 명명했어요. 매년 100만 명 안팎이 태어나 성장 과정 내내 빽빽한 콩나물시루처럼 북적이며 치열하게 살아온 세대라는 뜻입니다. 또 콩나물처럼 물만 주면 무럭무럭 자라난 세대이기도 하죠. 이 세대의 일과 자기 계발, 시간 관리, 인간관계, 재테크, 건강 등에 대해 제 직장생활과 퇴직 이후 경험을 통해 알아낸 것들을 전하고 싶었습니다.”―요즘은 지자체나 기업들이 직원 퇴직 교육을 많이 하죠.“맞습니다. 지난번에 포스코 임원 대상으로도 강의했어요. 강의하다 보면 의외로 직장인들이 퇴직 이후 어떤 삶이 전개될지 잘 모른다고 느낍니다. 실제 퇴직해서 5년 정도 지낸 사람의 경험담을 듣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퇴직 후는 직장 때하고는 완전히 결이 다른 삶이 되거든요.”―어떻게 다른가요.“운동으로 치면 단체전에서 개인전으로 바뀌는 거예요. 축구 하던 사람이 갑자기 역도를 해야 하는 상황이죠. 사용하는 근육이 전혀 다릅니다. 직장에서 대표이사였건 본부장이었건 퇴직 후 개인전에서 성공은 장담 못 하죠. 후배들이 그런 부분을 미리 알면 퇴직 이후를 준비하는 데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요즘 주된 직장에서 퇴직 연령이 평균 49.3세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흔부터는 여기 대비해야 합니다.” 마흔의 직장인이 짚어봐야 할 3가지―직장인이라면 마흔에 꼭 짚어 봐야 할 것들이 있다고요.“첫째, 자신의 자산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짚어 보고 그때부터 반드시 재테크를 해야 합니다. 이 나이대에 의외로 자산 점검을 하지 않아요. 다달이 나오는 월급에 중독된 거죠. 월급은 한 달 동안의 생활비뿐 아니라 평생 살아갈 자산의 시드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퇴직하면 명함이 없어집니다. 명함은 사회적 지위를 말하죠. 명함을 이겨 내는 방법은 개인 이름이 명함이 될 정도로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겁니다. 그걸 개발하려면 글쓰기가 효율적이예요. 작가가 되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고 내 안의 가능성이 무엇인가 찾아보는 과정으로서의 글쓰기죠. 이런 노력을 최소한 마흔쯤에는 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셋째, 일을 놀이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일을 재미있게 했던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일을 놀이처럼 하며 그 안에서 흥미로운 걸 발견해낸다면 퇴직 후에 새로운 일을 잘 찾아내더군요.롯데에서 했던 가장 획기적인 경품 행사가 아파트분양권, 우주여행권을 건 ‘대한민국 꿈 시리즈’였는데 그걸 만든 사장님은 일을 놀이처럼 재밌게 하던 분이예요. 1958년생이지만 지금도 다른 기업으로 옮겨 현역으로 일하시죠.”50대, 시간의 주도권을 가져라―50대가 챙겨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요. “50대면 이미 상당수가 첫 직장에서 물러나는 상황에 내몰립니다. 우선 ‘시간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퇴직 후 갑자기 늘어난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촘촘하게 루틴을 만들었습니다. 습관이 되니 시간의 주도권을 내가 쥐게 되더군요. 또 하나, ‘몰입’은 시간의 질을 높여 줍니다. 그러려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죠. 둘째는 건강입니다. 50대가 되면 신체 기능이 떨어지니 식단 관리하고 운동해야죠. 질 높은 수면도 중요합니다. 낮 동안의 습관을 관리하지 않으면 잠을 잘 못 자게 됩니다. 잠, 먹는 거, 몸 움직이는 거, 이런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50대 정도에는 꼭 깨달아야 합니다.셋째, 인간관계입니다. 회사라는 집단 속 관계와 퇴직 후 관계는 전혀 다릅니다. 회사 안에서는 폭넓고 얕게 사람들을 만나죠. 퇴직 후에는 가족과 친구, 특별히 알고 지내는 몇몇 사람만 남게 됩니다. 가족이나 친구를 상대로 회사 다닐 때의 넓고 얕은 관계로 접근할 수는 없죠. 이걸 어떻게 바꿔 갈지 50대는 미리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특히 퇴직 후 제일 먼저 부딪히는 배우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 거냐가 인간관계의 중심축이 됩니다.―배우자 문제는 겪어본 분일수록 심각하게 말씀하시더군요.“인간관계 중 제일 어려운 게 배우자예요. 제 와이프는 큰일에는 대범한데 작은 거에 까칠해요. 치약 가운데 눌러 짰다고, 화장실에서 서서 소변본다고, 불 안 껐다고, 집이 더운데 보일러 안 껐다고 혼나요. 밥 먹고 나서 반찬통을 왜 냉장고에 안 넣느냐고…. 이런 사소한 것들이 사실은 퇴직 후에 크게 부각됩니다.”―혼날 일만 하신 것 같은데요.“이런 얘기를 와이프가 곱게 하진 않잖아요. 저로서는 ‘이 사람이 내가 퇴직했다고 이러는구나’ ‘날 우습게 보는구나’ 이런 못난 마음이 일어나죠. 악순환이 생겨요.”고독을 견디는 자가 인간관계도 좋아그가 찾은 해결책은 자립적인 생활을 늘리는 것. “아침에 알아서 일어나 밥도 차려 먹고 홀로 있는 연습을 많이 합니다. 필요하면 와이프가 말 걸어와요. ‘주말인데 산책이나 가자’고. 그래서 아내와 궁이나 능 같은 곳을 다니고 있어요. 저는 그런 장소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는데, 막상 가 보니 좋더라고요. 그런 시간 외에는 저 혼자서 제 루틴대로 살아가죠.”―너무 애를 많이 쓰면서 사시는 거 아닌가요.“전 이게 더 행복해요. 흐트러져 있을 때가 힘들어요. 제가 주로 8월하고 1월에 주기적으로 무기력증에 빠지는데, 며칠간 아무 것도 못해요. 그렇게 흐트러진 생활을 할 때가 제일 괴로워요.”―일종의 모범생 증후군?“나이를 먹을수록 생활 루틴을 지켜 가는 것이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걸 깨달았고, 그렇게 하니까 내가 조금씩 단단해진다고 느껴져 행복하더라고요. 옛날에 쓴 글과 요즘 쓴 글을 보며 약간의 발전을 느낄 때, 매일의 루틴이 반복되며 쌓여간 덕이라는 생각이 들죠. 소소한 하루를 반복하는 그 시간들이 내 삶의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완벽한’ 습관과 몰입의 나날들10년 뒤, 20년 뒤에도 지금처럼 루틴을 지키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일본 도쿄 시부야에 있는 공중화장실 청소부의 삶을 다룬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언급했다. 주인공은 매일 반복되는 아침 기상부터 일, 취미활동, 인간관계에 최선을 다하며 충만한 일상을 살아간다.“주인공이 제 롤모델이예요. 하루 루틴을 지키며 소소한 행복들을 누리고 밤에는 책을 읽으며 스스로 즐거움을 발견하고. 저도 그 주인공처럼 살아가고 싶어요. 고독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좋은 인간관계도 성립해요. 가족 관계도 제 스스로 외로움을 견뎌 내는 힘이 있을 때 생기가 돕니다.”그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례로 빈번하게 술친구를 찾는 전 직장 동료들을 꼽았다. “혼자 있는 걸 못 견디는 거예요. ‘인생 뭐 있냐, 좋은 사람 만나 즐거움을 나누는 거지’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고독을 못 견디고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거잖아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가 단단하지 않아서라고 봐요. 혼자서 살아갈 힘을 기르는 게 퇴직 이후 생활에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충격 못 헤어난 3년 전… 그 뒤 성찰의 시간3년 전 인터뷰한 그는 퇴직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모습이었다. 퇴직을 통해 깨닫게 된 회사와 자신의 여러 현실에 대해 추슬러지지 않은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 만난 그는 좀 더 차분하고 안정된, 그의 말대로 ‘조금은 더 단단해진’ 모습인 듯했다. 자꾸만 솟구쳐 오는 불안에 맞서 스스로를 다독이고 가족과의 새로운 관계를 가늠하고, 세상과 인생에 순응하는 성찰의 태도가 읽혔다. 그 사이 큰아들은 대학을 졸업한 뒤 취직했고 고등학생이던 둘째 아들은 대학 4학년생이 됐다. 그가 직장에서 바쁜 사이 알뜰살뜰 재테크를 잘했던 부인은 2년 전 유방암 2기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거쳐 회복하고 있다. 그는 이 과정을 함께하며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무척 많다고 한다.이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스스로의 힘으로 남은 삶을 밀도 있게 채워가는 그는, 반딧불이의 삶을 닮고자 한다고 했다. 남의 후광으로 빛나는 휘황한 별이 아니라 미약해도 스스로 빛을 내는 반딧불이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동장 시절, 국가유공자 유족의 집 출입문에 명패를 달아주는 사업이 있었다. 애국지사 조원경의 외손녀인 88세 윤준용 할머니와 60대 아들이 세들어사는 집을 찾아갔다. 아들은 공사장에서 막일을 하다 허리를 다쳐 국민기초생활 수급자가 되어 있었다. 명패를 달아드리려 하니 집주인 허락을 받아야 한다며 놓고 가라고 했다.퇴직 일주일 전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 독지가가 기부한 쌀 20kg 포대를 지고 갔다. 다행히 출입문 한쪽에 ‘애국지사의 집’ 명패가 붙어 있었다.‘할머니, 저 며칠 있으면 정년퇴직합니다. 건강하세요.’ 할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글썽였다. 시간을 더 할애해 이야기를 많이 들어드리고 올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담당 통장에게 오며가며 잘 챙겨달라고 당부했다.” (‘수고했어, 박 동장’에서) ‘동장 박성택’(64). 2019년 말 31년간의 서울시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퇴직했다. 최종 직함은 중랑구 망우본동 동장. 망우동은 1988년 그가 9급 새내기 공무원 시절 처음 배치됐던 곳이다. 퇴직을 딱 1년 앞두고 5급 사무관으로 승진한 그는, 자신의 원점인 이 자리를 고집스레 자원했다.기초단체에서 소를 키우던 ‘늘공’ 퇴직 1년 뒤에는 공직생활을 정리한 ‘퍼블릭 서번트의 꿈’(삼일)이란 책을 펴냈다. 다시 1년 뒤 ‘익지 않은 과일을 따버린 농부의 심경’으로 손질을 더한 개정판 ‘수고했어 박 동장’을 같은 출판사에서 냈다. 그를 알게 된 건 이 책 덕이다. 신문사 문화부에 들어온 기증본 더미에서 집어와 방치해뒀다가 조금 여유가 생긴 최근 펼쳐보게 됐다.출세한 공무원들의 이야기는 넘쳐 나지만 평생 말단을 지킨 공무원 이야기는 드물다. 여기에 숨가쁘게 바뀌어온 30년 간의 시대배경이 어우러져 묵묵히 시민의 삶을 지켜온 공직자의 깨알같은 기록은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게다가 저자는 책상머리 관료가 아니라 바닥을 훑으며 시민의 ‘공복’이라는 자세를 지키고 있었다. 이리저리 차이는 신세이면서도 늘 어려운 사람 편에 선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여기 누가 ‘영혼없는’이란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그가 퇴직후 어떻게 지낼지 궁금해졌다. 출판사를 통해 연락처를 얻고 지난달 31일 그가 귀향한 전남 무안으로 향했다. 평생 입버릇, “퇴직하면 고향 내려간다”그는 2023년에 고향인 전남 무안군 현경면 양학리에 정착했다. 빈 농가를 사서 고치고 마당에는 작은 연못도 팠다. 집에는 자물쇠가 없다. 자신이 집에 없더라도 누구든지 들어와서 자고 가라는 취지다. “도시로 간 이곳 사람들도 조상 묘가 있으니 벌초하러 오잖아요. 그런 분들이 자고 가면 좋잖아요. 고향에 와도 아는 사람도 없고 모텔에서 자고 가니 서글프더라는 얘길 들었거든요. 집이 작지만 집들이할 때는 동네분들 23명이 밥 먹었어요. 베개도 10개 정도 있어요.”마을은 대대로 3개 성씨 50여 가구가 모여 살던 곳인데 지금은 35가구 정도 남아 있다. 혼자 사는 노인도 많다.“일가 친척은 모두 떠났지만 선산이 여기 있고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들도 계시고 친구들도 남아 있어요. 친구들과는 자주 여기서 술 한잔씩 합니다.”―농사도 지으세요?“짓고 싶었는데 제가 체력이 안 되더라구요. 좀 무리 했더니 여기저기 아파서. 선산에 나무나 좀 심고 가꾸는 정도예요. 농사 짓는 친구들은 단련이 돼서 어깨를 만져보면 돌덩이 같아요.” 올림픽 앞두고 밤마다 페인트공 역할도무안에서 목수이자 농사꾼이던 집안의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고교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뒤 해양경찰로 임용돼 2년 남짓,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서울시경이 모집한 ‘외국어 특기자 경찰’로 들어가 8개월 여 일했다.“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당시 주소지인 관악경찰서로 배치됐는데 사복경찰팀으로 차출돼 대학가에 투입됐어요. 두달 만에 ‘이건 못하겠다’고 사표를 썼지요. 그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서울시 시험을 보게 됐죠.”1988년 5월 처음 배치된 곳이 서울의 동쪽 변방인 중랑구 망우2동 사무소다. ―서울시 공무원은 구청과 동사무소를 오가며 정말 여러가지 일을 하시더군요. 88올림픽 직전에는 밤마다 거리에 나가 페인트칠도 하시고. “행정직들은 그래요. 올림픽 직전에는 거리 환경미화 때문에 야밤에 페인트공이 되어 돌아다녔죠. 야식 먹고 길에 널브러져 앉아 쉬는데, 노숙자처럼 보였는지 지나가는 엄마가 아이에게 ‘너 공부 안하면 나중에 저렇게 된다’고 하더군요. 하하.”그의 민원처리 제1원칙은 ‘명확한 규정이 없는 한, 이해관계자가 없는 한, 어려운 자에게 유리하게 적용한다’는 것. 홧김에 사표를 던지기도 하고 민원인들에게 봉변을 당하기도 하는 등 해프닝이 끊이지 않았다. 약자 편에 서다보니 출세와는 거리가 있었던 듯하다. 확 달라진 공무원 사회―9급에서 5급까지 올라가는 데 30년 걸렸네요. “6급에서 8년인가 멈춰 있었죠. 그런데 지자체 공무원 승진은 운도 많이 작용하고 정치 바람도 많이 타요. 구청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달라지죠.”―정년퇴직 딱 1년 전 5급으로 승진했는데 늦었다는 아쉬움은 없으세요?“전혀. 그래도 1년 했으니까요. 친한 구의원들은 제가 동장할 때 ‘자넨 동장 일을 즐기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더 있었으면 조금 더 많이 일할 수 있었으려나. 중랑구에는 다문화 가정이 많거든요. 제가 다문화자녀들의 합창단을 만들었는데 계속 키워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공연할 때마다 엄마들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었는데.” ―혹시 공무원 선택한 거 후회는?“제가 그때 인문계 고졸 출신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공무원이 되어 끝까지 한 것, 최선의 선택이었고 운도 좋았다고 봐요. 이 나이 되니 친구들도 다 부러워해요.” ―책을 쓴 이유는.“제가 보고겪은 것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수다. 이런 것들을 기록으로 남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역사란 기록인데, 역사서들을 보면 군주의 기록만 잔뜩 있지 백성의 것은 없어요. 한국에도 높은 사람이나 정치가들의 기록은 있지만 저같은 말단 공무원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시대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없죠. 이 모두가 우리 역사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니 뭔가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죠.“지난 30년간 공무원 사회도 확 바뀌었다. “주민등록 전산화, 지방자치시대 개막, 호주제 폐지, 복식부기 도입 등 공무원 사회가 달라진 몇가지 계기가 있었어요. 복식부기로 수입과 지출을 한눈에 동시에 알아보게 되니 투명성이 확보됐습니다. 제도를 보완하면 어느 정도 부패를 막을 수 있더군요.” 못 말리는 ‘공복’ 정신무안에 자리잡자 서울에서 인연을 맺은 분들이 보고 싶다며 찾아온다. 이들 중에는 전라도 땅을 처음 밟아본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삼삼오오 2박3일 정도 일정으로 지내고 돌아가서는 힐링됐다고 고마워한다.“무안군 관광과에서 알아야 하는데, 저 때문에 이곳을 찾는사람들이 늘었다는걸 말이죠. 하하. 얼마 전 경찰 시절 동기 몇명도 월출산 등산하고 하룻밤 자고 갔어요. ‘숙박시설이 아니라 벗의 집에서 편안하게 하룻밤 보내니 무척 좋았다’고 하더군요. 밤에 마당에서 장작불 피워 ‘불멍’ 타임 해주고 고구마 구워주고 싱싱한 산낙지 안주 대령해주고….“ 농촌 인심에 푹 빠져 지내기도 한다.“뭘 갖다주는 분이 많아요. 쌀은 작년에 네 가마니 들어왔는데 다 소비됐어요. 김장김치는 열두 집에서 두어포기씩 가져다 주셔서, 그 김치들 보관하느라 결국 김치냉장고를 샀어요. 할매들은 고추장 된장 참기름 같은 걸 갖다주시며 신신당부해요. ‘내가 줬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어.’”고향 생활은 현지 노인들과 어울리는 생활에 가깝다. 집근처 마을회관에는 늘 할머니 7~8 분씩은 계신다. “사람이 귀하니까 누구라도 오면 반가워하시죠. 저는 딸이나 손자가 내려오면 우선 데리고 가서 할머니들한테 인사부터 시켜요. 우리 손자가 지금 30개월인데, 마을회관에 데려가면 난리가 나요. 다행히 손자놈이 낯을 안 가려서 더 귀염을 독차지하죠.”고향집에 머물 때면 밤에 마루등을 켜놓는다. 동네 노인들은 그것만으로도 반긴다.“이분들 주인이 죽은 빈집에는 귀신들이 달려들어서 산다고 믿으세요. 그래서 무섭다고. 제가 들어와서 왁자지껄 사람 소리가 나니까 그것만으로도 무척 좋아하세요.”말단 공무원의 역사, 백성의 역사동네 어르신 몇 분에게는 정기적으로 문안을 간다. 이중 94세 할아버지와 96세 할머니 댁은 각별하다.“동네에 초고령자가 15분 계신데 할아버지는 딱 한분이세요. 할머니는 96세가 최고령인데 그 밑으로 80대 ‘아짐’들이 여러 명 계세요. 더 젊은 층은 노인회관에 나오시니까 걱정을 덜 해도 되고요.”―남성이 장수를 못해서 그런 건가요.“그렇죠. 다들 먼저 가시고 혼자 남으셔서. 할머니들이 많은 마을회관에도 안 가시니 더 외롭죠. 이 분은 제 동창 아버지라서 제가 더 챙겨요. 도시에 사는 자녀들은 번갈아가며 온다고 해도 자주는 못 오니까. 누구라도 가면 굉장히 반가워하세요. 앉으면 놀다 가라고 붙잡으시고. 말씀도 많이 해주시죠. ”알고보니 그가 어르신들을 섬기는 이유는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서라고 한다. “아버지는 1977년에 59세로, 어머니는 1984년에 64세로 돌아가셨어요. 이 분들은 제 부모님과 형님 동생 하면서 살았던 양반들이죠. 부모님 흔적을 느낄 수가 있어요.”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아버님을 기억하세요?“물론입니다. 열댓살 위 동네 큰형님으로 기억하시죠. 이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상여가 나갈 때 앞에서 매김소리하는 역할을 하셨어요. 동네분들 돌아가시면 모두 그 분이 치우신 거죠. 그래서 더 고마움이 있는 거예요. 동네 80대 할머니 한 분은 제가 돌아온 뒤 아들에게 우리 어머니가 장터에서 국수 사준 기억을 얘기하시더래요. 아이 낳고 얼마 뒤 밥도 굶은채 읍내까지 5km를 걸어서 장에 갔는데 우리 어머니가 산모가 허기진 상태인 걸 알아차린 거죠. 그 국수 얻어먹은 걸 잊지 못하고 계셨다가 아들한테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지금은 그 할머니가 매년 복지센터에 쌀도 몇 가마씩 몰래 갖다주고 그러시더라구요. 이런 노인들이 다 돌아가시면 이제 부모님 흔적은 직접 들을 수가 없게 돼요.”그래서 마을 주민들의 밴드(폐쇄형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도 만들었다. 도시에 나간 사람까지 현재 115명이 들어와 있다. 고령의 노인들은 밴드 사용이 어렵다보니 그가 동네 소식을 올린다. ‘지금 ㅇㅇ아짐이 벼 베고 계시다’며 사진과 함께 올리는 식이다.“자기 어머니 추레한 모습 왜 올리냐며 항의하는 애들도 있습니다. 전 사진 찍어서 올리는 것도 기록이고 우리들이 살았던 흔적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다 역사인 거죠. 지금은 이해를 못 해도 나중에 자기 어머니 안 계시게 됐을 때 흔적도 기록도 없으면 어떤 기분일까요. 백성들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명백하게 이 시대를 살았고 그런 스토리들이 있는데 왜 지워져야 하나요.” 이웃집 공복그는 고향에서도 공복으로서의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매의 눈’으로 안전 복지 행정을 지켜보며 도로유실이나 하수구 막힘, 가로등 불꺼짐을 보이는대로 신고해 고치게 한다. ―앞으로 무안에서 하고 싶은 일은. “그냥 이렇게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갈 겁니다. 보고 싶은 사람 보고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그리고 날 풀리면 지난해 했던 마을문화자원 조사를 이어갈 거예요.” 지난해부터 무안문화원 회원이 되어 마을문화자원 조사 작업을 벌이고 있다. 노인들만 남은 고향, 소멸위기에 빠진 고향에서 지역 역사와 문화를 조사한다. 특히 노인들이 간직한 기억들을 오롯이 살려내 기록을 남기는 게 목표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된다’는 구절을 체감하고 있다고 한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박상철(76) 전남대 연구석좌교수는 국내 노화장수 연구의 선구자다. 서울대 의대 생화학교실에서 세포 노화연구에 매진하다 1996년 서울대에 체력과학노화연구소를 만들었고 2000년부터는 100세인(人) 연구분야를 개척해 25년간 1500명이 넘는 100세인을 만났다. 그가 최근 ‘백세 엄마, 여든 아들(시공사)’이란 책을 냈다. 2017년 부친 박선홍 옹을 91세로 여의고 홀로 남은 어머니 강영례 씨(96)와 함께 지낸 7년여 간의 이야기를 담아냈다.당초 모자가 살고 있는 광주광역시의 자택으로 찾아가고자 했으나 어머니가 언론사 인터뷰를 극구 싫어하신다고 했다. 17일 서울대 후문에 자리한 국제백신연구소(IVI) 한국후원회장실에서 박 교수를 만났다.아버지가 입고 떠난 70년 된 두루마기의대에 진학한 뒤 고향에는 명절 때나 손님처럼 찾아가는 무심한 아들이었다. 50년만에 고향살이를 시작한 계기는 2017년 아버지의 타계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장례식에서 본 아버지 복장이 좀 이상했어요. 수의 위에 빛바랜 하얀 두루마기가 입혀져 있었지요. 내색을 못하고 있다가 며칠 뒤 넌지시 여쭤보니 ‘그 두루마기, 네 애비가 장가올 때 입고 온 옷이다’라고 하세요. 아버지가 70년 전 결혼식 때 처갓집에 입고 간 두루마기를 어머니는 고이 간직했다가 마지막 가는 길에 입혀드린 거죠. 가슴이 뭉클하고 목이 메이더군요.”70년을 해로한 아버지의 부재가 미칠 영향이 걱정되던 차에 어머니가 폐렴으로 앓아누웠다. 입원 일주일이 지나도 차도가 안 보이고 어머니는 “네 애비가 날 부르는구나”고 하는 상황. 다행히 새로나온 항생제 덕에 살아나셨다.박 교수는 고민에 빠졌다.“어머니와 더 오래, 더 가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향으로 가서 어머니 곁에서 살자….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무척 후회할 것 같았어요. 100세인들을 만나고 다니며 그분들이 가진 장남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감을 익히 알고 있었거든요.”당시 그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석좌교수였다. 5년 계약중 2년이 지난 상태였고 그가 데려온 교수 3명이 자리를 잡는 중이었다. 한편 그의 사연을 들은 전남대에서는 연구석좌교수라는 새로운 직함을 만들면서까지 자리를 마련해줬다. 결국 DGIST의 양해를 얻어 월 1회 대구에 가서 연구를 돕기로 하고 전남대로 활동무대를 옮겼다.아흔살 노모와 함께 TV연속극 삼매경2018년부터 월화수는 광주에서, 목금토일은 서울에서, 한달에 한번은 대구에 가서 1박2일 지내는 새로운 일상이 시작됐다. 일흔살 아들과 아흔 엄마의 삶은 크게 변했다.“새벽 5시면 어머니가 깨우며 ‘목욕하고 오너라’고 하세요. 평소 안 먹던 아침식사를 차려주시니 먹어야 했고 저녁이면 가까운 학교 운동장을 댓바퀴 돌고 오라고 명하셨죠. 술 한잔 마시고 돌아온 날이면 으레 ‘아직도 술 먹고 다니냐’, ‘넌 하는 짓거리가 왜 네 애비하고 똑같냐’며 가차없이 야단을 치시고요.”박교수는 노모와 한솥밥을 먹고, TV 연속극을 보고, 텃밭을 가꾸고, 꽃구경하며 가끔은 어린 시절처럼 잔소리와 꾸지람도 들으며 일상을 보냈다. 남편이 떠난 후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큰아들을 보살피며 다시 엄마 역할을 부여받아 활력을 되찾았다.“귀향하면서 스스로 두가지 다짐을 했어요. 첫째, 어머니 말씀은 무조건 들어드리자. 둘째,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자주 갖자. 50년 동안 제가 어머니하고 대화도 해본 적이 없더군요. 명절 때 내려가도 장남이다보니 아버지나 손님들과 대화를 이어가야 했고, 어머니는 주방쪽에만 계셨으니까요. 어머니와 함께 있기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TV를 보는 거였어요. 덕분에 평소 안 보던 드라마도 꽤 봤습니다.”어머니에겐 일흔 넘은 아들이 여전히 방에 처박혀서 공부만 하던 고교시절의 자식일 뿐이었다. 기거하는 방에 TV를 두려 하자 “공부해야 하는데 무슨 TV다냐”고 못 두게 했다. 나이든 아들은 다시 어려지고 늙으신 어머니는 다시 젊어지는 시간들이다.“가만히 있으면 뭐 한다냐”어머니 집에는 45년째 출퇴근하며 살림을 돌봐주는 남순댁이 있다. 두 여동생도 가까이 살며 수시로 드나든다. 어머니가 아들의 건강을 직접 챙기자 86kg에 육박하던 박교수의 체중은 74kg까지 떨어지기도 했다.“어머니께 ‘나 살 많이 빠졌죠?’하고 자랑했다가 일언지하에 ‘아직 멀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곁에 있던 여동생이 ‘큰오빠가 일흔 넘어 광주 대구 서울을 다니면서 고생하는데 칭찬도 좀 해주시라’고 거들자 어머니는 ‘일흔 살도 나이다냐? 나는 그때 날아다녔다’고 일갈하시더군요. 일흔이라는 나이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니까 더욱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었죠. 눈앞이 갑자기 환해졌습니다. 그동안 고민해왔던 연령 한계를 어머니는 손쉽게 뛰어넘으신 거죠. 나이를 핑계로 변화에 소극적이던 스스로를 반성했습니다.” 가까이서 본 어머니의 삶에는 ‘쉼’이 없었다. 항상 무언가를 하려고 궁리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근교의 100평 남짓한 밭에 80여 가지 농작물을 유기농법으로 재배해 철 따라 각종 야채가 줄이어 나오게 했다. 농사에 미숙한 딸과 사위들을 채근하며 농작물을 때맞춰 심게 하고 풀 뽑고 벌레들을 일일이 잡도록 지시했다. 연령한계는 스스로 뛰어넘는 것TV에 방영된 각종 건강요리는 메모해뒀다가 일일이 직접 만들어 보기 때문에 어머니 식단은 항상 새로움이 가득하다. 여동생들은 어머니가 식재료를 구해달라 요청하면 툴툴거리면서도 기꺼이 구해왔다. 소싯적엔 국내 맛집기행의 선구자인 백파 홍성유(1928~2002) 선생이 어머니가 해준 추어탕에 감동해 글을 썼을 정도로 어머니의 음식솜씨가 좋았다고 한다.“어머니의 지론은 간단해요. ‘가만 있으면 뭐 한다냐?’는 거죠.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는 자세가 바로 장수인(人)들의 공통점이예요. 도시생활에 젖어 살아온 제게 어머니가 동네사람들과 어울리며 오손도손 지내는 모습도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그나저나 인터뷰를 왜 싫어하시나요? “당신이 늙은 모습 보이기 싫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귀찮다는 거죠. 요즘은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하세요. 언젠가는 제가 TV 출연해서 어머니가 아흔살 생신 기념으로 딸들과 홋카이도에 여행가셨다고 언급했다가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하는 통에 민망했다고 야단치시더군요.”―96세면 혹시 기억력이 좀 떨어지거나 하는 일은 없나요?“우리 여동생들이 어머니 앞에서 말을 못해요. 오만거 다 기억하셔서 끽소리도 못하죠. 한번 본 꽃이나 나무가 어디에 있었다는 걸 일일이 기억하세요.”91~3세 사이 임틀란트 15개, 93세에 대동맥판막대체술초고령 사회가 당면한 고민 중 하나가 의료시술의 연령한계 문제. 어머니는 최고령 수술 기록의 보유자다. 91~93세 사이 임플란트를 15개나 해 넣었고 93세에 대동맥 판막 대체시술을 받아 전남대 병원 최고령 기록을 썼다. “30년간 틀니를 사용하셨는데 더 이상은 곤란한 상황이 됐어요. 치과와 상의를 많이 했는데, 잇몸이 괜찮을 것같다고 해서…. 안하겠다는 어머니를 설득했어요. 얼마간이라도 행복한 시간을 사시는 게 낫다고.”그러던 어느 날 광주에 내려가니 어머니 표정이 아주 밝았다.“그날 깍뚜기를 씹으셨다고. 시술 후 1년이 지나면서 그동안 마음대로 씹지 못하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특히 좋아하는 고기를 항상 죽이나 미음 형태로 갈아서 드셨는데 육회도 그냥 씹어 드실 수 있게 됐죠. 심지어 누룽지, 쥐포까지 씹을 수 있게 되니 생활에 활력이 생겼습니다. 식욕도 늘어 음식 종류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먹고 싶다 하시니 자식 된 입장에서는 반갑기 짝이 없었죠.”―그 연세에 임플란트 15개는 대단하시네요.“어머니가 견뎌주셔서 감사할 뿐이죠. 다만 한 3년 되니까 뼈들이 녹아서 다시 빠지고 있어서 요즘 또 좀 불편하세요.” ―그럼 공연히 고생하신 거 아닌가요?“그때 목표는 어머니가 하루라도 편하게 식사하시는 거였어요. 저로서는 어머니가 다만 몇 년이라도 삶의 질을 즐기셨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영원한 건 있을 수 없죠.”그 뒤 병원에서 그냥 두면 1년 이상 생존이 어렵다는 판정을 받고 어머니를 설득해 대동맥판막 대체술도 받았다. 박 교수는 90세가 넘으면 큰 외과적 수술은 금기시 돼왔지만 의술이 더 발달하면 병을 치료하며 장수하는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난 95세 이상 아니면 상대 안해요”“제 주변엔 장수인들만 모여요. 영어로 100세 이상을 ‘센티네리언’, 95세 이상은 ‘세미(semi) 센티네리언’이라고 해서 100세인 취급해요. 그러니 저를 만나려면 만 95세는 넘어야 해요. 하하.”아닌 게 아니라 그의 주변은 별천지처럼 건강한 100세인들이 많다. 인터뷰 중 조완규 전 서울대 총장(1928년생)이 방문을 두드렸다. 퇴근 인사하러 오신 것. 국제백신연구소는 한국에 본부가 있는 유일한 UN기구다. 97세인 조 총장은 매일 이곳으로 출근한다. 105세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도 조 총장과 밥먹으러 가끔 들른다고.“조 선생님도 오래 만났지만 만 95세 되기 전에는 인터뷰를 안 했어요. 이길여 가천대 총장(1932년생)도 저랑 친하지만 100세인 대접 받으려면 2년 이상 기다려야 해. 이 총장이 ‘나도 나이 많다’고 하면 제가 ‘그게 무슨 나이냐’며 잘라버리죠.”―2000년 경부터 100세인 연구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1994년 국내최초로 노화 종적(縱的) 관찰을 시작했는데 연구비가 문제였어요. 종적 연구는 하버드대처럼 적어도 80년은 해야 성과가 나오는데, 한국 현실은 길어봐야 3년짜리예요. 그래서 방향을 바꿔 추적의 제일 끝, 즉 종말기를 봤어요. 그걸 100세로 설정하고 세가지를 연구합니다. 첫째 종말기에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의학적 조건이 뭐냐. 둘째 그때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을는가. 셋째 수명연장은 어떻게 가능할까.”시행착오를 거쳐 서울대 다양한 분야 교수들을 불러모아 세계 유일의 다학제적 100세인 연구팀을 만들었다. 이 팀이 2006년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로 이어졌다. 그는 국제백세인연구단(ICC) 세계대회에 참석한 해에 회장으로 뽑혀 2006년 한국에서 세계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초고령사회, 고향과 가족의 의미―학술적인 책만 내시다가 개인사를 쓴 이유는… “100세인 연구를 하다 보니 20년 전과 너무 달라졌어요. 전에는 혼자 사는 분이 10% 정도였는데 지금은 30~50%가 혼자 살아요. 요양원 사는 분도 20~30%예요. 가장 큰 문제는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의 본질은 가족이죠. 이 가족 관계가 갈수록 멀어지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모신다는 게 노인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보람있는 일인지 좀 알리고 싶었습니다. 가령 제가 24시간 모시는 것은 못 하지만 자주 어머니 옆에 있기만 해도 어머니에게 활력과 즐거움이 생깁니다. 밭에 가서 작물 중에도 좋은 것 있으면 동생들에게 ‘그거 큰오빠 줄란다’하며 즐거워하세요. 남녀평등 관점에서는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어르신한테는 그게 힘이니까. 여동생들은 뭐 ‘좋을 대로 하세요’하면서 즐겁게 져드리죠.”그는 책을 쓴 또다른 이유를 덧붙였다. “어머니께 헌정하고 싶은 마음도 컸어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데, 뭐라도 하나 남겨드리려고 메모를 해 온 걸 책으로 낸 거죠. 이번에 내려가서 드릴 건데, 아마 ‘뭐 이런 쓸데없는 걸 썼냐’고 야단치실 거예요.”늙은 세포가 더 안 죽는다―‘거룩하게 늙는다’는 표현을 자주 하시는데.“21세기 들어 노화세포의 특성이 새로 발견됐어요. 늙은 세포가 젊은 세포보다 치명적 스트레스에 더 강한 저항성을 보여요. 잘 안 죽는다는 거죠. 개체 수준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저는 노화란 생명체가 단순하게 죽음에 이르는 단계가 아니고 오히려 죽음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과정이라고 봐요. 증식을 포기하는 대신 생존을 보장받는 생명유지 현상인 거예요. 이렇게 보니 늙음의 의미가 특별해지죠. 실제로 100세 넘어서도 당당하게 활동하는 분들을 만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들의 적극적인 삶의 태도와 생명을 마지막 순간까지 소중하게 지키려는 의지가 느껴지거든요. 그 점에서 나이듦과 늙음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해요.”―노인이라는 존재가 생명의 성스럽고 거룩한 결정체다. “제가 결정적으로 사람에게 이 개념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광주 대교구 윤공희 대주교(1924년생)예요. 2023년에 백수연 축하미사에 갔다가 감동했습니다. 만 99세 어르신이 1시간 동안 미사를 집전하고 마지막에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그리고 현재는 하느님이 사랑에 맡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시다’라는 강론을 하세요. 그분이 살아온 길까지 생각하면 99세 신부가 말씀하는 구절 하나하나가 살아 숨쉬는 것 같더군요. 그 강론을 들으면서 아, 이거구나. 사람한테도 ‘늙는다는 것은 거룩한 일’이란 메시지를 던지자.” 행복한 100세인=자식 이웃과 관계가 좋은 사람그는 지난해 12월 고령화와 노인 복지를 연구해온 국내 석학 70여명과 함께 ‘시니어 스카우트’ 결성을 제안했다. 시니어스카우트는 복지 혜택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노인이 아니라 사회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시니어들의 연대를 뜻한다. 오는 4월 정식 출범할 예정이다.―100세인들의 특징이라면.“수많은 100세인을 만나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일들을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의 삶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하게 항상 무엇인가 하시는 모습, 새로운 것을 배워 시도해보는 도전정신, 자식 및 이웃과 어울리고 배려하는 삶, 사물에 대한 깊은 관심, 건강을 스스로 지키려는 적극적 노력, 일흔이 넘은 자식에게 꾸지람을 주며 생활을 지도하는 어머니의 당당함. 이런 것들이죠.”여든을 바라보지만 백 살을 바라보는 어머니 앞에서는 늘 어린 아들이다. 그래서일까. 박 교수는 내내 유쾌하다. 책이건 말이건 매사에 고마움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고 주어진 여건과 주변 존재들에 대해 고마워한다. 간혹 자랑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어쩌랴. 정말 자랑스러운 것을.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초고령사회 진입과 동시에 한국사회 퇴행을 경고하는 신호등이 여기저기 켜지고 있다.지난해 말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는 ‘올해의 단어’로 ‘뇌 썩음(brain rot)’을 선정했다. 미국 생태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1854년 ‘월든’에서 처음 쓴 말이라고 한다. ‘영국은 감자 부패(potato rot)는 치료하려 애쓰지만 뇌의 부패를 치료하려는 노력은 없다’며 시민들이 복잡한 사고를 거부하고 정신적으로 퇴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오늘날 뇌 썩음은 주로 청소년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중독을 경고할 때 거론된다. 자극적인 쇼트폼 콘텐츠 과잉 소비로 집중력이 저하되고 문해력이 약화되는 등 지적 퇴화가 심각하다는 얘기다. 특히 콘텐츠를 추천하는 알고리즘에 중독성이 있어 청소년 뇌 발달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했다.극우 유튜브에 중독된 대통령비단 청소년뿐이랴. 중노년층도 뇌 썩음에 유의해야 할 세대로 꼽힌다. 가뜩이나 40대부터 뇌 전두엽이 위축되는 게 자연의 섭리인데, 당장 편하다고 유튜브 삼매경에 빠져들면 세상을 객관화할 단서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알고리즘에 끌려다니다 보면 정보의 편식이 일어나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이 더욱 강화된다.극우 유튜브에 중독돼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져 버린 윤석열 대통령의 상태가 이를 잘 설명해준다. SNS 중독에 의한 뇌 썩음이 비상계엄에 이르는 오판을 낳고 그것이 온 나라를 흔들어버렸다. 여기에 중노년이 흔히 접하는 알코올과 고혈당, 스트레스는 전두엽을 더욱 위축시켜 감정 조절 장애와 인지 능력 후퇴를 가져온다.한국인 문해력도 추락하고 있다. 문해력(리터러시)은 글을 읽고 해석하는 힘인데,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과 상식이 갖춰져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흔히 청년들의 문해력 문제로 ‘사흘’을 4일로 안다거나 ‘시발점’을 욕으로 알더라는 우스개가 떠돌지만, 객관적인 조사에 따르면 한국 학생들 문해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202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관한 81개국 만 15세 학생 대상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조사에서 한국 학생은 읽기 영역 3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같은 해 조사한 만 16∼65세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서 성인 문해력은 500점 만점에 249점으로 OECD 평균(260점)보다 11점 낮았다. 10년 전 조사 때보다 20점 이상,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고 연령이 높을수록 하락 폭이 컸다.지난해 8월 통계로 한국인 1인당 유튜브 시청 시간은 하루 73분꼴로 5년 전보다 2배 늘었고, 세계 유튜브 사용자들의 하루 평균 19분의 4배에 가깝다.물론 성인 문해력이 빠르게 떨어지는 이유를 유튜브에만 돌리는 건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책이나 신문 같은 활자를 읽는 모습이 급격히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유튜브 시청하느라 TV도 책도 안 본다는 어르신도 부쩍 늘었다.뇌 썩음 막으려면 세상의 상식과 소통해야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를 겪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르신들에게 당장 유튜브 시청을 줄이고 책과 신문을 읽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시라고 권하고 싶다.과거 종이신문 독자들은 이웃들이 가진 일반적인 상식과 교양을 알고 배우기 위해 신문을 구독했다. 아무리 개성과 다양성의 시대라 해도 동 세대의 관심과 생각을 알아볼 필요는 있다. 나아가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해서는 내 생각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점을 한 번쯤 되돌아보는 능력도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민주주의의 근간인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공간이 생겨날 수 있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sya@donga.com}
2020년, 지형운 씨(68)가 고향에 돌아왔다. 강원도 철원. 큰누나 지형숙 씨(73)가 살고 있고, 그가 중학교 때까지 개구쟁이 생활을 하던 곳이다. 처음엔 그저 좀 쉬어가려는 생각이었다. 2016년 30년간의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대학 강의와 사업 등을 전전하며 쉬지 않고 달려왔다. 베트남 중국 인도를 뛰어다니다가 중국에서 의류 무역업을 펼치던 시점에 하필 코로나 19 사태가 터졌다. ‘올스톱’ 상태가 된 상하이에서 철수했다.“고향이 여기 있었네”불과 몇 달 뒤, 그는 농부로 변신했다. 1400평 크기 비닐하우스 2개 동으로 구성된 ‘대형팜’을 짓고 노랑 빨강 색색 파프리카를 연간 30~40t씩 출하하고 있다. 농장이름 ‘대형’은 그의 아들 이름이다.“아무 계획 없이 한 달가량 누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조깅을 하는데 갑자기 제 눈에 고향산천 논밭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좋은 곳을 두고 힘들게 나가서 돌아다녔나’ 싶었죠. 이 참에 ‘고향에 뼈를 묻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15평 빌라를 빌려 살 곳부터 정했습니다.”당시 63세. 철원에서 무엇을 하고 살지 고민했다. 남들은 연금으로 살면서 취미활동이나 하라고들 했지만 너무 지루할 것 같았다. 어릴 때 집에서 과수원을 했고 자신도 영북실고(농과)를 졸업해 농사에는 친근감이 있었다. ‘농사지으며 고향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수확의 기쁨, 말로 표현 못해”그는 바로 군 농업기술센터가 운영하는 귀농귀촌교육을 신청했다. 교육을 받으며 축산도 고려해보고 벼농사나 과실작물도 생각해봤다. 최종적으로 철원 특산품인 토마토와 파프리카 중 무게가 가벼워 유통이 수월해보이는 파프리카를 택했다. 지인이 많은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를 택해 첫해에는 600평짜리 하우스를 운영했고, 이듬해 지금의 대형팜을 열었다.“가장 즐겁고 보람찬 순간은 역시 수확할 때입니다. 수확의 기쁨이 있어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잊고 즐겁게 일할 수 있었죠.”‘돌아온 탕아’처럼 나타나 농사를 짓겠다는 그에게 동창들은 짖굿게 놀려댔다. “야. 너 들깨 참깨 구분은 하냐?” “감자꽃 본 적은 있니?”실제로 뒤늦게 귀농했다가 몇 년을 못 버티고 떠나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니 다들 ‘한 1,2년 저러다 말겠지’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귀농해서 5년간 벼농사를 짓던 지인도 얼마 전 논밭 다 팔고 떠나버렸지요. 벼농사는 상대적으로 덜 힘든데 이윤이 남질 않아요. 연간 3000만 원 정도 이익 남기려면 논이 1만 평은 있어야 하는데 땅값만 10억 원은 들 겁니다. 은행이자를 생각하면 버는 게 아니지요.”‘한 1, 2년 저러다 말겠지’남들이야 뭐라하건, 그는 일이 즐겁기만 했다.“아침마다 빨리 농장에 가고 싶어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갈 곳이 있다는 것도 좋고, 매일같이 달라진 모습으로 절 기다려주는 파프리카 나무들도 좋고. 농번기에는 농장에서 생활하는 일꾼 깨울까봐 억지로 늦게 나가는 날도 많았지요.”파프리카는 1년생 작물이다. 하우스 농사라 해도 철원에서는 3월부터 11월까지 재배하고 한겨울은 쉰다. 한겨울 파프리카는 경남 진주 쪽에서 많이 재배한다고.물론 농사는 녹록치 않았다. 그가 겪은 가장 큰 시련은 3년 전 하우스에 일어난 화재였다. 파프리카를 심은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온도 조절 기계가 불완전연소돼 불이 났다. 119가 와서 불을 껐고 수리비 일부는 보험처리했다. 2년 전 가을에는 쓰레기를 옮기다 배수로에 떨어져 오른쪽 어깨를 다쳤다. 오랜 기간 통증이 이어졌지만 지역 병원에서는 원인을 찾지 못했다. 지난해 8월 서울의 종합병원에 갔더니 힘줄이 끊어져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4일간의 입원시간을 내지 못해 수확이 다 끝난 12월 말에야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보조 기구를 메고 있다.“이제 회복될 일만 남았어요. 2주일 정도만 더 이거 메고 다니면 됩니다. 하하.”날 지켜준 ‘뒷배’는 고향이었다그는 농고 졸업 뒤 자동차 공장에 취직했으나 고졸사원과 대졸사원의 급여차가 엄청난 현실을 깨닫고는 사직하고 대학진학을 준비했다. 동국대 식품공학과를 졸업한 뒤 1986년 국정원에 7급 공채로 입사해 충북지부장(1급)까지 역임하다 2016년 말 퇴직했다. 이후 충북 유원대 보건의료행정학과 초빙교수로 3년간 강의했고, 광주 DK산업 해외산업본부장을 거쳐 중국 상해 무역업체 부회장으로 중국에서 일했다.―젊은 시절 방황이 많으셨다고요.“고교도 대학도 입시실패를 겪으며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같아요. 오히려 국정원에 들어가면서 적성에 맞는다고 느꼈습니다.”―그 직장은 정치바람 같은 게 많지는 않았는지요?“그런 걸 많이 봤지만 저는 해당이 안 됐어요. 강원도 변방 출신이라 지역색도 없고 동국대가 또 그렇게 두드러진 학벌이 형성돼 있지도 않죠. 그곳에서 저를 지켜줬던 것은 직장에서 맺은 선배 상사들과의 인연이예요. 같이 근무하며 챙겨주고 끌어주고 하는. 그걸 혈연 지연 학연 외에 ‘직연’이라 하죠. 또하나, 고향에 돌아온 뒤 직장 후배들에게 이런 얘기를 합니다. ‘퇴직하고 보니 나를 키워준 건 8할이 고향이었더라’고. 진급을 앞두고 치열한 경쟁을 할 때도 내 ‘뒷배’는 고향이었어요. ‘여기서 잘려도 난 돌아갈 곳이 있어’, ‘고향가서 농사나 지을란다’ 뭐 이런 든든함을 주는 뒷배 덕에 무사히 1급까지 마치고 퇴직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평생 도전하는 삶이었던 것같습니다. 농고 졸업 후 공돌이 생활도 해봤고 힘들게 진학한 대학에서 전공에 대한 방황이 이어졌죠. 국정원 입사도 그런 가운데 이뤄졌어요. 59세에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해 완주하고 61세에 중국어 공부를 시작해 중국 의류사업에 뛰어들었죠. 63세에 귀농해 64세부터 파프리카 농장을 경영하고 있죠.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 고민할 때도 비닐하우스 농사가 수익은 많지만 제일 어렵고 힘들다고 해 도전해봤습니다.”귀농귀촌 돕는 지역조직 활성화그는 혼자만 많이 수확하는 것으로는 즐겁지 않았다. 자신처럼 어려움을 겪는 초보 농군들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며 유명무실하던 철원군 귀농귀촌연구회를 활성화시켰다. 2023년 3월 이 연구회 회장으로 선출됐다.약 100여 명의 회원들은 귀농자들이 현지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중개자 역할을 자임한다. 정기 모임과 회원농가 일손돕기, 성공적으로 정착한 회원들의 체험담 공유, 외부 인사 초청특강, 회원 수확물 공동판매사업 등을 통해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귀농귀촌을 꿈꾸는 동년배들에게 조언을 주신다면.“은퇴 2~3년 전부터는 준비해야 합니다. 각 시군에 설치된 농업기술센터의 귀농귀촌 교육을 반드시 이수하세요. 초보 농업인들의 시행착오를 줄여줍니다. 가능한 연고가 있는 지역을 선택하는 게 좋습니다. 고향이나 친척, 친구가 있는 곳, 전에 땅을 사놓은 곳, 멘토를 찾고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으세요. 그렇게 땅을 구입하고 현지 사람들과 교류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준비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아집니다.”작물선택에도 요령이 있다.“작물은 수익이 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수익이 잘 나야 농사가 재미있어져요. 수익으로 봉사를 할 수도 있고, 생활비로 써도 됩니다. 농사를 전업, 직업으로 생각하면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죠. 귀농은 충분히 제2의 직업이 될 수 있어요. 시간을 가지고 알아보고 준비하고 결정하시길 바랍니다.”―귀농자들 중에는 지역 텃세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많던데요.“텃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다만 입장을 좀 바꿔놓고 생각해봐야 해요. 밖에서 들어온 사람 입장에서는 텃세지만 오랜 세월 지역에서 살아온 분들 입장에서는 낯선 불편함이 있어요. 가령 마을 발전 기금만 해도 그래요. 마을 기금은 오랜 세월 주민들이 여러 형태로 십시일반해 마련해놓고 사용해온 거거든요. 밖에서 들어와 그동안 아무 기여도 없었는데 똑같은 혜택을 누리려 하면 불공정하다고 느끼는 거죠. 저는 귀농인들에게 늘 ‘내가 먼저 주민들께 다가가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평생동지’ 같은 누나―대형팜의 연간 매출은 어느 정도인지요?“순수입 5000만 원 정도를 목표로 합니다. 될 때도 안 될 때도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 1명 쓰느냐 2명 쓰느냐에 따라 달라져요.”철원군에는 베트남에서 계절노동자 형태로 인력이 들어온다. 그의 경우 1년 단위로 1명 또는 2명을 고용해 일을 해왔다. 외국인 노동자 임금은 철저히 국내 임금과 같아야 한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국 임금의 10배쯤 된다고 한다.―다른 작물을 재배할 계획은?“파프리카만 해도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요. 전문성을 갖춰야 비용을 최소화하고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거든요.”취재 내내 큰누님이 어깨를 다친 그 대신 차를 운전해주고 커피를 타주며 세심하게 도왔다. “누님은 제 평생 동지 같아요. 2년 전 매형이 돌아가셔서 혼자 계시니 마침 제가 와서 든든해하시기도 하고요.”―가족은요?“각자 바쁩니다. 아들은 미국에서, 딸은 부산에서 직장 다녀요. 아내는 아들이 있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지내는데 곧 손주가 나올 거라서 그곳에 머물 것 같습니다. 저도 겨울에 다녀올 계획이구요.”‘평생 현역’이 꿈―1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적어도 75세까지는 제 손으로 농사지을 수 있다고 봅니다. 힘들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인력을 더 쓰면 되겠지요. 그때는 줄어든 노동시간만큼 청소년대상 멘토 역할을 하면서 교회 봉사활동에 힘을 쏟을 것 같습니다. ‘평생 현역’으로 사는 게 꿈이예요. 하하.”귀농귀촌연구회장으로서 목표는 토마토 파프리카는 물론, 오이 생강 대파 등 작목별로 수익모델을 만드는 것. 귀농인들끼리 도움을 주고 받으며 지역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바람도 있다.그는 “귀농해 대파농사를 짓는 분이 있는데 초보 농군이라 실패가 잦았습니다. 하지만 저희 연구회 농업기술분과위원장의 컨설팅을 통해 지난해에는 큰 수익을 창출했어요. 귀농은 우선 좋은 멘토가 있어야 합니다. 저희 연구회 회원들같은 멘토를 만나신다면 성공이 보장되죠.”이런 그의 관심은 지방소멸이나 인구감소까지 확산된다. “철원 인구가 약 4만 명인데 매년 1000명씩 줄고 있다고 해요. 많은 귀농인들이 철원으로 와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철원=서영아 기자 sya@donga.com}
100년 가까운 일생 중 74년을 언론인으로 산 일본 요미우리 신문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1926∼2024) 전 주필의 타계 소식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2000년대 초반 그를 다룬 ‘언론과 권력’이라는 책을 읽었다. 평기자로 입사한 그가 승승장구하면서 요미우리를 1000만 부 발행 규모의 신문사로 키우고 ‘미디어의 제왕’이 된 과정을 비판적으로 추적한 책이다.일본 정언유착의 대명사 제2차 세계대전 때 반(反)군국주의 소년, 도쿄대 학생 시절 공산당 지역 책임자였던 와타나베는 공산당을 탈퇴하고서도 여기서 배운 전략적 사고를 평생 간직했다. 1950년 당시 신문업계 3위였던 요미우리신문에 입사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1, 2등 신문사보다 규모가 작아야 정상에 오르기 쉽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쿄대 시절 절친이던 우지이에 사이이치로(氏家齊一郞)에게 입사를 강권해 훗날 사내정치에 힘을 보태게 했다. ‘나베쓰네’라는 통칭으로 불리며 언론과 정치판을 쥐고 흔들던 그의 비결은 치밀한 인맥 관리였다. 정치부 기자 시절 자민당 2인자였던 오노 반보쿠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정계의 정보를 얻어 미디어를 관리했다. 한일관계 막전 막후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노를 이용만 한 것은 아니다. 오노가 세상을 뜨자 그의 정부를 위해 고인의 뼛조각을 몰래 훔쳐다 줄 정도로 세심하게 충성을 바쳤다. 이런 그가 미국 워싱턴 지국장으로 발령받았을 때의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웬만하면 견문을 넓힐 기회로 반길 만도 했지만, 그는 유배당한 것처럼 괴로워했다.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기 위해 몸부림쳤고, 본사 정치부와 연락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영향권에서 떠난 부하를 체크하기도 했다. 이 시절 신경안정제나 위장약 등을 달고 살았다. 마키아벨리즘에 심취했던 그는 사내 권력투쟁에서 자기 사람이 아닌 기자는 철저하게 짓밟았고, 자신에게 고개 숙이는 기자는 파격적으로 키워줬다. 주변에는 권력의 속성에 대해 “굳이 시키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처리해 주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누구라도 자신을 앞지르는 일도 용납하지 않았다. 절친 우지이에가 그보다 먼저 차기 톱으로 부상했지만 사주로부터 오해를 사 1982년 계열사인 니혼TV 부사장으로 ‘좌천’(당시의 개념이다)되기도 했다. 그 뒤 우지이에는 2011년 니혼TV 회장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문에 돌아오지 못했다. 나오키상 수상 작가인 오쿠다 히데오의 패러디 단편집 ‘촌장선거’에는 그를 모델로 한 다나베 미쓰오(78)가 등장하는 챕터(‘오너’)가 있다. 고령의 권력자인 그는 권력의 종말을 뜻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패닉장애를 겪으면서도 현직에서 떠날 줄 모른다. 낮이건 밤이건 환한 방에서 지내며 잠도 자지 않았다. 권력자에겐 혼자 남겨지는 것이 가장 두려운 법이다. 실제 와타나베는 사망 직전까지 병원 침상에서 현직 주필로서 사설을 점검했다. 98세 주필을 모신 신문사나 그 자리를 지켜낸 와타나베, 모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마지막까지 현직 지킨 권력의 화신 한 해가 저물고 나라를 뒤흔드는 소식들에 황망함을 느끼는 요즘, 개인적으로는 한 시대가 끝났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특히 역대 대통령 중 상당수가 감옥행으로 끝나는 제왕적 대통령제, 그것을 만들어낸 1987년 체제가 종언을 고할 때가 됐다. 당시 청년 학생과 넥타이 부대로 대표되는 시대정신은 자기 손으로 직접 국가 리더를 뽑는다면 이상적인 국가가 실현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통령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쏠리고 여러 부작용을 낳는 구조가 탄생했다. 와타나베의 타계 소식은 과거처럼 언론과 정치를 소수가 막후에서 주무르는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도 제왕적 권력이 세상을 좌우하는 일을 더 이상 용인해선 안 된다는 논의가 한창이다. 정말 한 시대가 끝났다.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 기자·국장급 sya@donga.com}
인생 ‘100세 시대’라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조금 우울해진다. 통계청 생명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2023년 출생아 기준 83.5세(남성 80.6세, 여성 86.4세). 하지만 건강수명은 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건강수명 조사가 이뤄진 2022년 생명표 기준으로 보면 기대수명 82.7세 중 유병 기간을 제외한 기간은 65.8년에 불과하다. 질병이 있더라도 주관적으로 본인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기간은 72.2년이었다. 통계상 노인들은 마지막 16.9년간 골골거리며 병원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된다는 뜻이다. 행복한 노년을 보내는 비법은 없을까.일본의 정신과 의사 와다 히데키(和田秀樹·64)는 고령자 전문 정신과 의사로서 35년 간 6000여 명의 고령 환자를 접하며 깨달은 점을 저서로 내놓았다. 사실 그는 저서가 50권이 넘는 다작작가에 영화감독이기도 하다. 이중 ‘70세는 노화의 갈림길(2021)’ ‘80세의 벽(2022)’ ‘70세의 정답(2022)’ ‘60세부터는 멋대로 살아라(2022)’ 등 2020년대 이후 쏟아낸 연령을 주제로 한 저서들은 일본에서 수십 만 부씩 팔리며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다. 일부는 한국에서도 번역출간됐다. 이 책들에서 참고가 될 만한 대목을 소개해본다.‘버럭’ 60대, ‘감정 제어’에 유의해야60대는 신체적으로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뇌는 다르다. 50, 60대 무렵부터 ‘버럭’ 화를 내는 사람이 늘어난다. ‘부모님이 나이 들수록 화를 잘 내신다’거나 ‘나이 들면서 성격이 거칠게 변하셨다’고 하는 얘기를 적잖게 들을 수 있다. 일본에서는 ‘폭주(暴走)노인’ ‘노인성 분노조절장애’가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고령자에게서 흔한 분노조절 장애의 배경에는 뇌 전두엽 변화가 있다. 뇌 앞부분에 있는 전두엽은 감정과 충동을 조절하는 기관으로 논리적 사고, 언어 기능도 담당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기관인 셈. 문제는 이 전두엽이 뇌에서 가장 빨리 노화가 시작된다는 점. 빠르면 40대부터 위축이 시작된다. 알코올이나 고탄수화물증, 스트레스에 의해 손상이 가속된다. 전두엽이 위축되면 감정 콘트롤 능력이나 의욕, 창조성이 확 줄어든다.충동제어 기능 전두엽, 뇌에서 가장 빨리 노화50, 60대가 되면 전두엽 기능은 본격적으로 떨어진다. 이 시기에는 ‘성격의 첨예화’ 현상도 일어난다. 평소 화를 잘 내던 사람은 더욱 화를 내게 되고, 의심많은 사람은 더 의심이 깊어진다. 완고했던 사람은 더 옹고집이 된다. 온화했던 사람은 더 부드러워진다.적응력도 떨어져 새로운 정보나 사고방식에 대해 유연성이 사라지고 보수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젊은 직원이 낸 아이디어에 대해 “그런 식으로 해서 일이 되느냐. 철없는 소리” 식의 반응을 보이는 ‘꼰대’가 이래서 생겨난다.와다 박사는 60대가 신체와 뇌의 기능을 유지하려면 계속 부지런히 사용해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가장 권장하는 것은 적어도 70대까지 일을 계속하는 것이다.70세는 노화의 갈림길70대 초반까지는 인지장애(치매)가 되거나 환자가 된 사람은 10%도 채 안 된다. 이 시기를 의도적으로 노력하며 보낸다면, 신체도 뇌도 젊음을 유지할 수 있고 남의 간병을 받는 환자가 되는 시기를 늦출 수 있다.와다 박사는 “70세부터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몸과 마음의 건강이 언제까지 유지되느냐가 결정된다”고 지적한다. 70대에도 신체적 기능은 비교적 건강하지만, 전두엽 노화로 의욕이 저하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70대는 집에 틀어박혀 활발하지 않은 생활에 젖어 들기 쉬운 연령대다. 그러므로 노화를 늦춘다는 측면에서도 여전히 사회활동을 하는 게 좋다. 나이가 들면 은둔 생활을 하겠다는 사람도 있지만 70세 넘어 그런 생활을 하게 되면 단숨에 뇌 기능, 운동 기능을 노화시켜 버릴 위험이 있다. ‘은퇴하면 팍 늙는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언제까지나 현역으로 생활한다는 자세가 노화를 늦추고 만년을 건강하게 보내는 비결이다.”다만 노년의 일하는 방식은 젊을 때와는 달라야 한다. 돈이나 효율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살려 누군가를 돕고 사회에 도움을 주는 데 가치를 두는 게 바람직하다.80세 이후 행복의 비결80대쯤 되면 신체 능력과 뇌 기능에서 개인차가 커진다. 치매가 진행돼 대화가 잘 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라톤을 완주하거나 현역으로 경영을 하거나 학자로 활동하는 사람도 있다.“70대 무렵까지는 현역 때와 그다지 변화 없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80대를 넘기면 대부분 늙어간다. 늙음을 멈출 수는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늙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가 80대 이후 반드시 찾아온다.”‘80세의 벽’에서 와다 박사는 “70대가 늙음과 싸우는 시기라면 80대는 늙음을 받아들이는 시기”라고 말한다. 80세 이후 행복의 비결은 건강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늙음을 받아들이는데 있다는 것.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소중히 여기면 삶을 긍정에너지로 채울 수 있다.와다 박사는 또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는 과도한 강박과 욕심은 스스로를 압박하고 무리한 절제로 이끌어 결과적으로 행복하지도, 건강하지도 못한 삶을 만든다고 경계했다. 당장 내일 생이 마감돼도 후회되지 않도록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것이다.<80대가 유념할 것>⦁걸어라. 걷지 않으면 못 걷게 된다. ⦁씹으면 씹을수록 몸과 뇌는 깨어난다. ⦁혈당 혈압치는 낮추지 않아도 된다. ⦁고독, 홀가분한 시간을 누리자, ⦁좋아하는 일을 한다.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자. 틀어박히면 뇌가 우울해진다. ⦁싫은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라. ⦁잠이 오지 않으면 자지 않아도 된다. ⦁하고싶은 말은 해버려야 마음이 가볍다. ⦁노인의 변신은 무죄…변절을 두려워말라. ⦁천진난만은 늙음의 특권이다. ⦁배우기를 멈추면 늙는다. ⦁‘렛 잇 비’로 산다. ⦁80세가 넘으면 건강검진은 하지 않아도 된다. ⦁병과 싸우지 말고 병과 함께 살아간다. ⦁80세 이후는 대형병원 전문의보다 동네의사와 상의한다. ⦁장기별 진료보다 통합관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약은 몸이 좋지 않을 때만, 필요한 만큼만 먹는다.⦁암은 절제하지 않는다. ⦁혈압은 80대 이후에는 높아도 된다. ⦁먹고 싶은 음식은 참지 않고 먹는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뇌 전두엽이 자극돼 뇌가 젊어진다. ⦁술은 마셔도 되지만 정도껏. ⦁담배도 피워도 된다. ⦁운동은 적당히, 산책이 제일이다. ⦁우울증은 몸과 마음을 움직여 예방한다. ⦁삶의 보람을 찾지 않는다. 즐기다 보면 보이니까. ⦁치매를 늦추려면 약보다 머리를 써야 한다 ⦁전두엽 위축으로 의욕이 사라진다면 뇌를 써서 자극해준다. ⦁오래 살기가 중요할까, 남은 인생이 중요할까. -‘80세의 벽’에서“젊게 오래 살고 싶으면 노년 다이어트는 금물”와다 박사는 “오랜 세월 많은 고령자를 진찰했는데 고령에도 건강한 사람은 통통한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실제 나이보다 10~20년 젊어 보이는 사람은 대부분 통통한 체형이다. 반대로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사람은 마른 체형인데, 식사에서 단백질이 부족한 경향이 있다. 고령자의 단백질 부족은 노화를 앞당기고 면역력 저하도 초래한다. 때문에 암을 비롯한 다양한 질병 위험이 높아진다.”그는 사람을 오래 살게 해주는 의료 기술과 건강을 유지해주는 의료 기술은 다르다고 한다. 예컨대 콜레스테롤은 ‘장수의 적’이라 불리지만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사람일수록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 콜레스테롤은 남성호르몬 재료이기도 한데, 고령남성은 이 수치가 높을수록 몸과 머리가 건강하다. 고령자의 경우 혈압이나 혈당치가 비교적 높을수록 머리가 맑다. 반대로 혈압약이나 혈당약을 복용해 수치를 인위적으로 낮추면 머리가 멍해진다. 고혈압이나 고혈당이면 염분과 식단을 제한하게 되는데 삶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기운없는 노인이 되기 십상. 오래 살기가 중요할까, 남은 인생이 중요할까약을 먹더라도 의사가 권장하는 수치가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량을 떨어뜨리지 않는 정도로 조절하는 게 낫다. 흐릿한 정신으로라도 오래만 살지, 맑은 정신으로 남은 인생의 질을 확보할지 생각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아울러 와다 박사는 “70대부터는 영양 부족에 주의하는 게 우선”이라며 “체중 조절을 한다면 의학적 기준 체중보다 약간 통통한 쪽에 목표를 맞추라”고 권한다.실제로 국내에서도 뚱뚱한 사람이 사망률이 낮다는 연구결과가 최근 나왔다. 지난달 11일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연구원은 20여 년 전 건강검진을 받은 성인 847만 명을 추적 관찰한 결과, 한국인 비만 진단 기준인 ‘체질량지수(BMI) 25 부근에서 사망 위험이 가장 낮더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몸무게(㎏)를 신장의 제곱(㎡)으로 나눈 값인 BMI는 비만 판정의 기준. 한국은 BMI 18.5~22.9를 ‘정상’, 23~24.9를 ‘비만 전단계’(위험체중·과체중), 25 이상을 ‘비만’으로 분류하고 있다. 예컨대 신장 170cm인 사람의 BMI지수를 예로 들면 체중 60kg이면 20.7, 70kg이라면 24.2, 80kg 이라면 27이 된다. 이 조사에서는 BMI 18.5 미만과 35 이상에서 사망 위험이 가장 높았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가까운 회사 동료가 최근 퇴직했다. “다른 건 아쉽지 않은데, 수십 년간 함께했던 동료, 이 좋은 사람들과 아무 관계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무척 상실감이 느껴진다….” 역시 몇 달 뒤 퇴직을 앞둔 다른 동료의 얘기도 절절했다. 그런 때마다 빠지지 않고 “우리끼리라도 퇴직 후 연 1, 2회 정기적으로 만나자”는 다짐이 이어졌다. 올 6월 퇴직한 또 다른 동료의 송별회에선 그의 지인인 타사 사진기자가 찾아와 기념사진을 찍어 줬다. 그의 지시에 맞춰 전체 부원이 배경이 돼 박수를 치고 주인공은 꽃다발을 들고 웃음 짓는 ‘행복한 그림’이 나왔다. 본인 역시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사진기자는 쓸쓸하게 사라지는 퇴직자에게 조금이나마 따뜻한 기억을 남겨주고자 기회가 닿는 대로 사진 촬영 봉사를 다닌다고 했다. 퇴직 전 평소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을 많이 찍으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를 통해 놓치고 있던 무언가를 배운 느낌이 들었다. 지금쯤이면 그도 사무실을 뒤로하고 낙향했을 것이다. 퇴직자의 회한과 ‘불완전연소감’ 미련 퇴직을 앞두면 누구나 회한이 적지 않다. 수십 년 한 우물을 파온 ‘운 좋은 직장인’이라면 그 상실감은 더욱 크다. 어쩌면 이런 풍경도 조만간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요즘 청년 세대에게 커리어 관리법은 이직을 거듭하며 몸값을 높이는 게 상식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5060 구세대들은 여전히 회사에 정 떼지 못해 힘들고, 퇴직 이후 삶은 막막하다. 100세 카페를 통해 만나 온 ‘이런 인생 2막’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과거를 말하다 가슴속 꾹꾹 눌러둔 회한에 힘들어하기 일쑤였다. 더러는 한 맺힌 응어리였고, 때로는 가슴 먹먹한 복받침이기도 했다. 커리어에 미련이 남았거나 잘나가다가 푹 꺾어지는 계기가 있었던 사례자들은 특히 그랬다. 소위 말하는 ‘불완전연소감’이다. 일본의 직장소설에는 승승장구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회사로부터 버림받은 중장년 이야기가 정말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런 혼돈의 시기를 거쳐 결국은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냈다. 평생 해온 일의 연장선에서 강연이나 저술 등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분들도 있다. 퇴직한 뒤 아예 새로운 기술을 배워 ‘○○기사’ 자격증을 따낸 뒤 인생 2막을 걷는 분들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이었다. 30여 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그림 서예 사진 등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김영균 씨(77)가 대표적이다. 그는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 후 벌써 3년이 다 됐는데, 매년 전시회 소식을 전해 온다. 올해도 11일부터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갖는다.“잘 살아왔어” 자신에게 트로피를 60세 넘어 처음으로 해외여행에 도전한 김원희 할머니(74)는 매년 한 달 정도 본인이 모든 계획을 짜서 배낭여행(실제로는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을 다닌다. 최근에는 처음으로 자가 출판 플랫폼을 통해 오롯이 본인 힘으로 책을 냈다고 알려왔다. 제목은 ‘여행은 현재 진행 중: 운 좋으면 120살까지’인데, “자가 출판이다 보니 홍보가 잘되지 않는다”며 하소연했다. 나이 듦을 받아들이지만 ‘그냥 할머니’는 아쉬워 ‘진짜 멋진 할머니’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그는 쉬지 않고, 하지만 무리하지도 않고 꾸준하게 무언가를 벌인다. 이런 분들에게 불완전연소감이란 없다. ‘30년 근속 부장님’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멋진 할머니’ 등, 각자 자기 인생에 최선을 다한 증거라면 세상이 알아봐 주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 트로피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성공과 출세도 좋지만 “잘 살아왔어”라는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의 인정과 응원, 격려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더 크고 험한 세상으로 출발하는 선후배 동료들에게 따스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서영아 콘텐츠기획본부장 sya@donga.com}
2일 오후 5시 충북 청주시 오창호수공원 야외공연장. 점차 어둠이 내려앉고 늦가을의 찬 기운이 스며들 무렵, ‘지토벤’이란 애칭으로 불리는 재즈 피아니스트 지성철 씨(65)의 무대가 시작됐다.계단식 관객석을 채운 100여명의 시민들이 쏟아낸 환호와 함께 그의 손이 건반 위를 날아다녔다. 올드팝부터 대중가요, 클래식 소품의 친숙한 곡조들이 화려한 재즈의 선율로 변신해 공중에 울려퍼진다.60세 이상 시니어예술가들이 만드는 거리 공연이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장애를 딛고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지토벤의 존재는 최근 알게 됐다. 작곡가이자 재즈 피아니스트, 한때 대학 강단에도 섰던 그는, 60세를 넘기고는 음악이 있는 곳을 찾아가는 피아니스트가 돼 있다. 6일 수원의 전문공연장 ‘윤아트홀’에서 그를 만났다.● 20대, 생애 첫 작곡으로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그가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1986년 난생처음 작곡한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유열)’가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으면서다.“유열 씨와의 첫 만남은 우연이었죠. 저는 그 무렵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손님 중 한 분이 제 반주로 ‘마이웨이’를 부르고 싶다고 청해왔어요. 평소 반주하는 걸 싫어하는데 이상하게 그 날은 해주고 싶었어요. 노래를 참 잘 부른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그 손님이 유열이었어요. 비슷한 또래이니 친구가 됐지요.”한달 쯤 뒤 유열이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으니 곡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왔다.“대중가요곡은 한 번도 쓴 적이 없다고 고사했는데 고집이 엄청나더군요. 좋은 가사를 가져오면 해주겠다는 조건을 걸었더니 두어 달 뒤 정말 직접 쓴 가사를 들고 상기된 표정으로 왔더라구요. 그걸 들고 부산으로 여행을 떠나 3일만에 메인 테마를 완성했어요. 상은 탈 것 같았지만 대상까지 받을 줄은 몰랐죠.”1989년에는 대학가요제 금상곡 ‘사랑은 이별을 위해(이은영)’와 동상곡 ‘그대 떠나도(이재영)’를 작곡해 한때 ‘가요제 전문 작곡가’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1990년대부터는 전국 순회공연과 재즈피아노 독주회 등을 통해 재즈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유열 씨와의 인연도 이어져 유열컴퍼니가 주관하는 가족뮤지컬 ‘브레멘 음악대’의 작곡을 전담했다. 이 작품은 2006년부터 10년간 50만 관객을 동원했고 중국에서는 ‘음악이 좋은 뮤지컬’에 주어지는 송레이상도 받았다.유열 씨는 6년 전부터 폐섬유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최근 폐 이식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다. 그에 앞서 모친상을 당했지만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중했다.“(유 씨는)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절제하는 사람인데 어쩌다 그런 병에 걸렸는지. 고생을 너무 많이 했어요. 하루빨리 완쾌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예전에는 유열 씨와 공연을 많이 한 것 같은데, 타격은 없었나요?“제가 직접 공연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거기에 몇 년간 코로나 상황까지 겹쳐 좀 힘들었습니다. 유튜브를 통한 라이브 공연도 해보고 교재도 쓰고. 그러다 실버 마이크도 알게 됐지요.”● 아들의 장애 이겨낸 어머니의 투쟁피아노를 배운 계기를 묻자 길고긴 사연이 쏟아져나오는데, 고비고비마다 그의 어머니의 고민과 사랑이 읽혔다. 지 씨는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성 백내장’ 진단을 받고 초등학교 입학 전에 7차례나 눈수술을 받았다.“어머니 말씀으로는 제가 첫돌 조금 지나 눈수술 받고 병원에 누워 있었는데 침대 난간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더래요. 옹아리가 아니고 제법 음정과 박자가 있는 노래였다고, 그래서 ‘이 아이는 무조건 피아노를 가르쳐야겠다’고 마음 먹으셨다고 합니다. 본인이 여고 합창단 솔리스트 출신이라 그런 감이 오셨다고요. 눈이 불편한 제 앞날을 걱정해 뭐라도 다른 재능을 키워주고 싶으셨던 거겠죠. 어머니는 제가 5살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려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습니다.”어느덧 학령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가 지 씨가 갈 곳은 맹학교라고들 했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당시 종로구 효자동에 있던 맹학교 입학원서를 써놓고도 장안의 안과를 다 뒤졌대요. 무교동 공안과에서 최종산 박사님을 만나 6번째, 7번째 수술을 받았는데 다행히 성공한 겁니다.”덕분에 시야가 조금은 확보됐다. 초등학교 반배정이 다 끝난 시기였지만 교장을 찾아가 읍소해 겨우 입학했다. 이후 용산중학교를 거쳐 서울예고로 진학했다.―지금 시력은 어느 정도입니까?“오른쪽은 0.08 정도, 왼쪽은 망막박리로 시력이 없어요. 한쪽 눈으로도 잘 살고 있습니다.”● 즉흥 재즈 피아니스트 ‘지토벤’―‘지토벤’이란 애칭은 언제부터…“1990년대말 경, 유열 씨하고 대구 공연을 갔는데, 관객석에서 이례적으로 피아노 연주 신청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즉석에서 신청곡을 받았더니 유 씨가 하는 말이 ‘여러분 베토벤 잘 아시죠? 베토벤하고 비슷한 친구입니다. 지토벤입니다’라고 추켜세워 줬습니다. 듣기가 썩 나쁘지 않아서 이후 계속 써먹고 있어요. 하하.“서울예고는 피아노가 아니라 성악으로 입학했는데, 대학 입시를 한 달 앞두고 ‘신경성 성대 경련증’이란 병이 찾아와 또다시 좌절을 맛봤다. 지금도 그는 일상적인 대화때에도 발성이 자연스럽지 않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면서 ‘내 음악을 연주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어요. 혼자 세계적 피아니스트들의 곡을 듣고 즉흥 연주 공부를 했지요. 국내 대학에는 그런 걸 가르치는 곳은 없더군요. 그러다가 재즈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1980년 당시 무교동에 유명한 클럽이 많았어요.”하루 30분짜리 연주를 3차례씩 했는데 보수는 일반 회사원의 두 배가 넘었다.“내 음악을 연주하는 즐거움을 매일 느꼈습니다. 다른 일 할 생각 없이 ‘지금 이 생활이 너무 좋다’는 충만감을 가지고 지냈지요.”● 60세 넘어 실버마이크 프로그램에서 힘 얻어―요즘에는 거리 연주를 많이 하신다고요.“3년 전부터 5월~11월 사이엔 실버마이크(충청권) 공연에 주력합니다. 지역문화진흥원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인데 매월 마지막 수요일인 ‘문화가 있는 날’ 주간에 야외공연이 집중됩니다. 저는 올해 10번 무대에 섰습니다.”‘실버마이크’ 사업을 통해 숨어있던 실버예술가들의 존재감이 빛나게 됐다. 다만 이들은 매년 엄격한 오디션을 통해 실력과 기량을 인정받아야 무대에 설 수 있다.충청권 실버마이크를 관장하는 문화기획사(문화충동)에 따르면 그는 현장에서 신청곡을 받아 즉흥연주를 하는 등 관객 중심의 무대를 진행해 호응이 매우 좋다고 한다.“공연에서 늘 제가 맨 끝 순서라 앙코르도 한두곡 씩 합니다. 제게는 관객과의 소통이 가장 즐겁습니다.”모든 일을 혼자 헤쳐가야 하는 답답한 상황도 실버마이크가 풀어줬다.“그동안 공연장 섭외부터 홍보, 티켓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제가 직접 했어요. 당연히 효율도 떨어지고 전문성도 부족하죠. 실버마이크 활동을 하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내년부터는 정부나 지자체 문화재단 등의 지원을 챙겨 광고도 하고 공연도 제대로 할 생각입니다.”유럽 등 문화선진국에서는 어디를 가나 쉽게 진짜 예술을 향유하는 환경이 조성돼 있다. 우리도 이같은 시도가 이뤄지는 건 반가운 일이다.● 나이 드니 ‘찾아가는 공연’하게 돼실버마이크가 다른 거리 공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청남대에서 월 4회 정기 연주 의뢰가 들어왔고 공연을 보러 왔던 금산여고 교사는 11월 하순 학교 연주를 요청해왔다.“5교시에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연주를 듣게 됩니다. 문화체험 수업이겠죠. 보수를 떠나 학생들에게 제 음악을 선물한다는 게 기쁩니다.”요즘 지 씨는 ‘청춘마이크’ 참가자인 예술가와 콜라보 무대를 선보이고 아이돌 그룹 뉴진스의 ‘버블검’을 재즈곡으로 연주하는 등 젊은 층과의 소통에도 열심이다.―최신 아이돌 곡도 소화하시던데 연습을 얼마나 하신 건가요.“어떤 곡이건 세 번 정도 들으면 연주할 수 있어요. 평소 연습은 손 푸는 정도만 합니다. 즉흥 연주다 보니까 집에서 연습을 해버리면 실제로 공연할 때 김이 빠지거든요.”―연주는 체력도 필요한 일인데….“전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그냥 100%가 나와요. 저도 불가사의라고 생각할 정도예요. 주변 사람들도 일단 피아노 앞에 앉으면 사람이 달라 보인다고 하더군요.”―60대의 음악은 젊은 시절과 어떻게 다릅니까.“예전엔 보여주는 공연을 많이 했습니다. 화려한 테크닉을 앞세웠지요. 이제는 진솔하면서 내공이 꽉 찬 공연으로 바뀌고 있다고 저 스스로 느낍니다. 또 젊을 때는 사람들이 저를 불러줘서 공연을 했는데 이제는 제가 스스로 찾아가는 공연을 해야 해요. 음악가가 나이가 들었다고 재능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봐요. 오히려 연륜이 가져다주는 깊은 맛이 추가되지요. 실버마이크에 참여하는 다른 분들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오랜 세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갈고닦아온 분들이어서 그 깊이가 다릅니다.”● 노년은 예술 즐기기에 딱 좋은 나이사실 공연자도 듣는 이들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다.“시니어들께 젊은 때 바빠서 즐기지 못했던 예술을 다시 찾아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여러모로 여유가 생기는 노년은 예술을 공부하고 즐기기에 딱 좋은 나이입니다.”―재즈라도 주로 대중적인 곡을 연주하시네요.“음악은 기분 좋고 힐링되고 감동받으려고 듣는 건데 생판 모르는 곡을 들으면 계속 집중해야 해서 스트레스를 받기 십상입니다. 저는 귀에 익은 곡에 제가 가진 영혼을 투자해 ‘그 곡이 이렇게도 변하는구나’하고 감탄하시도록 연주하고 싶어요.”그의 유튜브채널 ‘지토벤 음악다방’에는 직접 연주한 곡들이 적지 않게 올려져 있다. 예컨대 ‘엘리제를 위하여’의 재즈풍 연주는 조금은 껄렁한 듯, 묘한 맛과 재미가 있다. 동요인 ‘학교종’도 상당히 멋스러운 재즈곡으로 변신한다. 최근에는 독집 연주 음반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세미 트로트 가요 작곡에도 손대고 있다고.그가 쓴 트로트곡 ‘인생 그림’은 자신의 이야기이자 실버세대에 대한 헌사다.‘강물 같은 시간 속에/지난 날 되돌아보면/고된 날도 많았지만/내가 너무 잘 살았구나…중략…앞만 보며 걸어가요/멋진 꿈이 거기 있어요/아름다운 내 인생그림’. 65세 실버뮤지션 지토벤이 그려 나갈 인생 그림이 기대된다.서영아 기자 sya@donga.com}
‘일본의 리더십 교체와 한일관계 전망’ 주제로 일본 전문가 초청 세미나한일의원연맹이 주관하는 제 12차 한일현안연구회가 15일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렸다. 주제는 ‘일본의 리더십 교체와 한일관계 전망’. 주호영 한일의원연맹 회장은 “11일 열린 일본 특별국회에서 자민당 이시바 시게루 현 총리가 재임됐으나 제2차 이시바 정권의 앞날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며 근래 일본의 급격한 정국 변화에 대해 들어보기 위해 일본 전문가를 초청한 배경을 설명했다.이날 세미나에는 호시 히로시(星浩) 정치저널리스트와 하코다 데쓰야(箱田哲也) 아사히신문 전 논설위원이 참석해 일본 정국상황을 분석하고 향후 한일관계를 전망했다. 하코다 전 논설위원은 동지적 관계를 쌓은 ‘기시다-윤석열 정상’ 시대를 거쳐 ‘이시바- 윤석열 정상 시대’로 이행하는 한일관계가 내년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이해 발전적인 논의를 하자는 입장에는 일치하고 있으나 완전해결되지 못한 역사문제 등 시련도 계속되고 있다고 짚었다. 호시 히로시 정치 저널리스트는 일본 정치는 짧은 시간에 ‘아베 1강’에서 총선거에서 참배한 소수여당정권까지의 변용이 이뤄졌다며 이런 가운데 일본 사회에는 좌우 포퓰리즘과 일부 배외주의 조짐도 일고 있다고 지적했다. 호시 저널리스트는 또 △대중국 포위망으로서의 한미일 연대 △미국 트럼프 정권에 대한 대응 △ 한일민간교류 확대 △국교 정상화 60주년 과제 등을 앞으로 양국 앞에 놓인 숙제로 꼽았다. 이날 세미나에는 주호영 한일의원연맹 회장, 민홍철 간사장, 윤호중 고문 등 십여 명의 의원연맹 소속 의원들이 참석해 열띤 질문과 토론을 벌였다. 한일 현안연구회는 한일의원연맹이 2021년부터 주관해온 세미나 모임으로 회를 거듭할수록 소속 의원들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