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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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5-06-26~2025-07-26
칼럼32%
문학/출판20%
역사13%
문화 일반10%
미술10%
국제일반3%
중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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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김상운]英 정보기관에 파고든 푸틴의 ‘이중 스파이’

    영국 비밀정보부(MI6) 고위 간부의 집에 몇몇 남성들이 잠입한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 들어간 이들은 물건엔 관심이 없다. 그 대신 들고 온 가방에서 영상 및 도청 장비를 꺼내더니 방 안 곳곳에 설치한다. 그러곤 집 앞에 평범한 차량 한 대를 주차해 놓고 유유히 사라진다. 이 차 뒷유리엔 휴지 상자로 위장한 소형 카메라가 MI6 간부의 집을 촬영해 실시간으로 영상을 전송한다. 집 안에서 이뤄지는 가족 간 대화부터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인상착의까지 광범위한 감시가 이뤄진다. 흥미로운 건 도·감청 모니터를 지켜보는 이들의 소속이다. 이들은 같은 영국 정보기관으로 MI6의 ‘형제 기관’인 국내정보국(MI5) 요원들이다. 영국 MI5의 감시 팀이 MI6 내 ‘이중 스파이(double agent)’를 적발하기 위해 벌인 비밀작전(작전명 웨드록·Operation Wedlock)을 다룬 영국 일간 가디언의 최근 보도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기사는 적성국 러시아에 정보를 넘긴 혐의를 받는 MI6 간부를 검거하기 위해 영국 정보기관 사이에 벌어진 도·감청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최근 중국 정보기관에 기밀을 팔아 넘긴 국군정보사령부 요원이 정보당국에 적발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기 국제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이중 스파이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푸틴의 ‘이중 스파이’ 20년간 추적가디언에 따르면 MI5는 MI6에 파고든 이중 스파이를 잡기 위해 감시, 기획, 행정 담당 등 총 35명의 요원들로 구성된 팀을 2015년까지 20년간 운영했다. 시작은 “런던에서 근무 중인 MI6 요원이 러시아에 비밀을 넘기고 있다”는 미 중앙정보국(CIA) 제보에서 비롯됐다. 당시 MI6에 근무 중인 2500명의 요원 중 한 명이 이른바 ‘두더쥐(mole·이중 스파이를 뜻하는 정보계 은어)’라는 것. 특히 1998∼1999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KGB의 후신)의 수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이었다. 탈냉전 이후 최대의 이중 스파이 적발 작전이었기에 팀 소집부터 작전 지시 등 모든 것이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다. 감시 팀은 런던 템스강 근처에 있는 MI5 본부를 벗어나 런던 남서부의 완즈워스에 보안업체로 위장한 사무실을 차렸다. 또 작전 지시를 받을 때도 통신 추적 등을 피하기 위해 교회에서 은밀한 접촉이 이뤄졌다. 국내법상 MI5는 해외 작전이 금지돼 있지만(해외 정보 수집 등의 임무는 MI6 담당), 웨드록 작전은 예외였다. 이중 스파이 혐의자가 유럽, 아시아, 중동 등으로 출장을 가면 감시 팀이 따라붙었다. 혹시나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호텔이 아닌, CIA의 해외 안전 가옥에 머물렀다. 이처럼 MI5는 20년간 막대한 인원과 장비를 투입했지만, 혐의자가 이중 스파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정보 당국자는 가디언에 “혐의자가 이중 스파이가 아니라면, MI6 내부에 아직도 스파이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념, 돈으로 움직인 이중 스파이들 러시아가 영국 정보기관 안에 ‘두더쥐’를 심은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냉전이 한창 벌어지던 1950년대 서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케임브리지 5인방’ 사건이 대표적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신으로 영국 정보기관에서 활동한 킴 필비, 도널드 매클레인, 가이 버지스 등 다섯 명은 자신의 사회주의 신념에 따라 자진해서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이중 스파이들이었다. 이들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30년대 포섭돼 20년 넘게 서방의 고급 정보를 소련에 전달했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 당시 영국이 백군을 지원한 기억에 사로잡힌 스탈린이 케임브리지 5인방을 신뢰하지 않아, 이들이 제공한 일급정보 상당수가 사장됐다. 2차대전 발발 전후 반(反)파시즘 신념에 따라 영국에 핵심 정보를 제공한 독일 내 이중 스파이도 있었다. 1938년 독일 나치의 외교관 볼프강 추 푸틀리츠는 전쟁을 막으려면 히틀러에 대한 강경 노선이 필요하다는 정보보고를 MI5에 보냈다. 유화책은 히틀러를 공격적으로 만들 뿐이라는 것. 역사가들은 이듬해 독일의 체코 침공 당시 영국이 히틀러의 요구를 거부하고 강경론을 고수했다면 2차대전이 발발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보고 있다. 미중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 등 다양한 나라들의 정보 활동이 치열해지는 상황이다. 당연히 해외 정보 수집 못지않게 내부 정보를 지키는 노력도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2차대전과 냉전시대 등에서 이중 스파이가 제공한 정보가 국운을 좌우한 역사적 사례들에 대한 관심도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김상운 국제부 차장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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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英 MI5 ‘두더쥐’ 적발 작전과 ‘이중 스파이’의 세계[김상운의 빽투더퓨처]

    영국 비밀정보부(MI6) 고위 간부의 집에 몇몇 남성들이 잠입한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 들어간 이들은 물건엔 관심이 없다. 대신 들고 온 가방에서 영상 및 도청 장비를 꺼내더니 방안 곳곳에 심어놓는다. 그러곤 집 앞에 평범한 차량 한 대를 주차해 놓고 유유히 사라진다. 이 차 뒷 유리엔 휴지상자로 위장한 소형 카메라가 MI6 간부의 집을 촬영해 실시간으로 영상을 전송한다. 집안에서 이뤄지는 가족 간 대화부터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인상착의까지 광범위한 감시가 이뤄진다. 흥미로운 건 도감청 모니터를 지켜보는 이들의 소속이다. 이들은 같은 영국 정보기관으로 MI6의 형제랄 수 있는 국내정보국(MI5) 요원들이다.영국 MI5의 감시 팀이 MI6 내 ‘이중 스파이(double agent)’를 적발하기 위해 벌인 비밀작전(작전명 웨드록(Operation Wedlock))을 다룬 영국 가디언의 최근 보도 내용을 재구성한 겁니다. 기사는 적성국 러시아에 정보를 넘긴 혐의를 받는 MI6 간부를 검거하기 위해 영국 정보기관 사이에 벌어진 도감청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죠. 한국에서도 최근 중국 정보기관에 기밀을 팔아 넘긴 국군정보사령부 요원이 정보당국에 적발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이후 냉전시기 국제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이중 스파이의 세계를 들여다봤습니다.유럽, 아시아, 중동 등에서 벌인 20년의 추적가디언에 따르면 MI5는 MI6에 파고든 이중 스파이를 잡기 위해 감시, 기획, 행정 담당 등 총 35명의 요원들로 구성된 팀을 2015년까지 20년간 운영했습니다. 시작은 “런던에서 근무 중인 MI6 요원이 러시아에 비밀을 넘기고 있다”는 CIA의 제보에서 비롯됐습니다. 당시 MI6에 근무 중인 2500명의 요원 중 한 명이 이른바 ‘두더쥐(mole, 이중 스파이를 뜻하는 정보계 은어)’라는 것. 특히 1998~1999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KGB의 후신) 수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이었죠. 영국 정보기관 당국자는 “또 다른 킴 필비를 상대하는 작전이었다”고 가디언에 말했습니다. 킴 필비는 전설적인 영국의 이중 스파이로, 냉전시기 소련에 포섭된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방(Cambridge Five) 중 한 명입니다.탈냉전 이후 최대의 이중 스파이 적발 작전이었기에 팀 소집부터 작전 지시 등 모든 것이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습니다. 감시 팀은 런던 템스강 근처에 있는 MI5 본부를 벗어나 런던 남서부의 완즈워스에 보안업체로 위장한 사무실을 차렸습니다. 또 작전 지시를 받을 때도 통신 추적 등을 피하기 위해 교회에서 은밀한 접촉이 이뤄졌습니다. 새로운 요원을 처음 작전에 투입할 땐 훈련으로 위장했습니다.국내법상 MI5는 해외 작전이 금지돼 있지만(해외 정보 수집 등의 임무는 MI6 몫), 웨드록 작전은 예외였습니다. 이중 스파이 혐의자가 유럽, 아시아, 중동 등으로 출장을 가면, 가명으로 위장한 감시 팀이 따라 나섰습니다. 이름 등 여권 정보를 속였기에 해당국에서 체포될 경우 자력으로 해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유명 헐리우드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 주인공 이단 헌트가 작전 지시를 받을 때마다 듣는 멘트(“언제나 그렇듯, 당신 또는 당신의 팀원이 체포되거나 사망할 경우, 장관은 여러분의 존재를 부인할 겁니다.”)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입니다. 또 혹시나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호텔이 아닌, CIA의 안전 가옥에 머물렀습니다.이처럼 MI5는 20년에 걸쳐 막대한 인원과 장비를 투입했지만, 혐의자가 이중 스파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데는 결국 실패했다는 게 가디언의 취재 내용입니다. 스파이 혐의자는 현재 MI6를 퇴직한 상태로 알려졌습니다. 정보 당국자는 “혐의자가 이중 스파이가 아니라면, MI6 내부에 아직도 스파이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가디언에 말했습니다.‘이념’ ‘돈’으로 움직인 이중 스파이들러시아가 영국 정보기관 안에 ‘두더쥐’를 심은 건 어제 오늘 일은 아닙니다. 냉전이 한창 벌어지던 1950년대 서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케임브리지 5인방’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신으로 영국 정보기관에서 활동한 킴 필비, 도널드 매클레인, 가이 버지스 등 다섯 명은 자신의 사회주의 신념에 따라 자진해서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이중 스파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학 재학 중이던 1930년대 포섭돼 20년 넘게 서방의 고급 정보를 소련에 전달했죠.하지만 러시아 내전 당시 영국이 백군을 지원한 기억에 사로잡힌 스탈린은 영국에 깊은 불신을 갖고 있었고, 케임브리지 5인방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1943년 소련 정보기관 국가보안인민위원회(NKGB·KGB의 전신)는 이들이 소련을 위해 일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영국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들이 제공한 서방진영의 외교, 군사정보는 정확하고 가치도 높았던 걸로 확인됐습니다. 스탈린의 편견으로 인해 케임브리지 5인방이 제공한 일급정보들이 사장된 셈입니다.2차대전 발발 전후, 반(反) 파시즘 신념에 따라 영국에 핵심 정보를 제공한 독일 이중 스파이도 있었습니다. 1938년 독일 나치의 외교관 볼프강 추 푸틀리츠는 MI5에 전쟁을 막으려면 히틀러에 대한 강경 노선이 필요하다는 정보보고를 올립니다. 그해 3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데 이어 9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영국에선 대응 방향을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히틀러와 적당히 타협하자는 주장과, 더 이상의 침략을 저지하려면 무력개입도 불사해야한다는 주장이 맞섰죠.이때 푸틀리츠는 유화책은 히틀러를 공격적으로 만들 뿐이며, 그를 막는 유일한 길은 강경 노선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는 MI5에 “영국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면 히틀러의 엄포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독일군은 아직 큰 전쟁을 치를 준비가 안 돼 있다”고 했죠. 실제로 독일군은 1938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 침공 당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는데도 차량 고장으로 진군이 지연될 정도로 전쟁 준비에 빈틈이 많은 상태였습니다. 이후 독일이 체코를 병합하며 전쟁물자를 추가로 확보한 뒤 전력을 더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당시 MI6는 MI5와 반대로 대 독일 유화책을 주장했습니다. MI6는 체코가 독일어권인 주테텐 지방을 독일에 내주면 히틀러의 폭주가 멈출 거라고 했죠. 하지만 현실은 MI6의 예상과 완전히 다르게 전개됐습니다. 결국 MI5의 예상대로 영국 정부의 유화 정책에 따른 뮌헨협정은 히틀러의 야욕을 키우는 결과를 낳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독일의 체코 침공 당시 영국이 프랑스 등과 연합해 히틀러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강경론을 고수했다면 2차 대전이 발발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정보기관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크리스토퍼 앤드루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 ‘스파이 세계사’에서 이중 스파이의 활동 동기가 냉전 전후로 변화했다고 말합니다. 즉, 2차대전과 그 이전엔 케임브리지 5인방처럼 사회주의 등 이념에 의해 이중 스파이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전후 냉전이 본격화되고, 스탈린 체제의 참혹한 현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이념보다는 돈에 의해 이중 스파이가 된 이들이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참고 문헌]-Guardian <UK launched huge operation to find suspected Russian double agent in MI6> ( 2025. 6. 27)-크리스토퍼 앤드루·박동철 역 〈스파이 세계사〉 1, 2, 3 (한울·2021년)“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5-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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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상운]트럼프 반대 뚫고 US스틸 인수… 주목받는 日의 끈기와 노하우

    “하시모토 에이지 일본제철 회장은 거래가 거의 무산될 위기에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위한 치열한 노력’이라는 제목의 지난달 25일자 기사에서 이런 평가를 내놨다. 일본제철은 2023년 12월 US스틸 인수 계획을 발표한 지 18개월 만인 지난달 13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인수 허가 결정을 받아냈다.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는 일본 특유의 끈기로 숱한 난관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대미 관세 협상과 맞물려 주목할 만하다. 당초 산업계에선 미국 내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미국 산업의 자존심으로 통하는 US스틸을 외국 회사가 인수하는 건 어렵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미국 철강노조와 정치인들이 국가안보 등을 이유로 US스틸 매각에 반대하자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올 초 매각 불허 결정을 내렸다. 대선 전부터 매각에 반대한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해 12월 트루스소셜에 “나는 한때 위대하고 강력했던 US스틸이 외국 기업, 이번 경우엔 일본제철에 매각되는 것에 전적으로 반대한다(totally against)”고 썼다.이 같은 악조건을 이겨내고 반전에 성공한 건 일본제철과 일본 정부가 2028년까지 110억 달러(약 15조 원)를 투입하겠다고 약속하며 투자에 목마른 트럼프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긁어줬기 때문이다. 앞서 트럼프발 관세 전쟁이 뉴욕 증시 및 미 국채 가격 폭락으로 이어지면서 국내외 반발이 거세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가 미국 내 생산과 일자리를 가져올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런 상황에서 때마침 일본제철이 “50%의 철강 관세로 인해 대규모 대미 투자를 결정했다”는 이야깃거리를 제공한 것이다.본사 위치나 생산 이전 등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른바 ‘황금주’를 트럼프에게 부여한 것도 한몫했다. 일각에선 경영 간섭 우려를 제기하지만, US스틸이 1901년 앤드루 카네기가 설립한 이래 미국 산업화를 상징하는 기업인 만큼 미국인들의 상실감을 달래기 위한 ‘절묘한 선택’이었다는 시각도 있다.정부와 기업이 혼연일체가 돼 미 행정부와 정치권을 집요하게 설득한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WP에 따르면 이사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올 2월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US스틸 인수 정보를 수집하며 설득 논리를 준비했다. 이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단순한 인수가 아닌 투자”라며 협력 의사를 보였다. 윌리엄 추 허드슨연구소 일본 담당 연구원은 “(이시바의 설득 논리는) 아주 영리했다. 그것이 더 큰 협상의 문을 열었다”고 평했다.이시바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 설득에 주력하는 동안, 일본제철은 지역 정치권과 노조를 만나 “인수를 계기로 투자와 첨단기술 도입,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설파했다. 또 500만 달러 이상을 들여 워싱턴의 유명 로비업체 아킨 검프를 통해 미 의회 관계자들을 접촉하고, 마이크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을 고문으로 영입했다. 민관이 하나가 돼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뚝심 있게 설득전을 벌인 일본제철 사례를 트럼프발 관세 폭풍에 직면한 우리 정부와 기업도 되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김상운 국제부 차장 sukim@donga.com}

    • 2025-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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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엇갈리는 이란 핵개발 정보, 이라크戰 데자뷔?[김상운의 빽투더퓨처]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털시 개버드 국가정보국장(DNI))“이란은 몇달 내 시험용 및 초기 핵무기를 개발할 가능성이 있으며, 확실히 1년 내 달성할 수 있다.”(베탸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미국이 이스라엘-이란 무력충돌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거론되는 가운데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미국,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상반된 분석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이번 무력충돌의 핵심 명분인 이란의 핵개발 능력에 대한 분석입니다. 이는 향후 미국의 군사개입 명분과도 직결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정보 평가에 그칠 사안이 아닙니다. 22년 전 미국의 이라크전쟁도 이라크의 WMD(대량 살상무기) 능력에 대한 잘못된 평가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일각에선 당시와 ‘데자뷔’ 같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美 정보기관 “당장 무기화 아니야” VS 이스라엘 “몇달 내 개발”우선 개버드가 수장으로 이끌고 있는 ODNI(Office of the Director of National Intelligence, 국가정보장실)라는 조직의 창설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ODNI는 CIA, FBI, NSA 등 18개 미국 정보기관들을 통솔 조정하고, 예산을 통제하는 ‘사령탑’ 역할을 합니다. 2011년 9.11 테러 당시 CIA, FBI, NSA 등 정보기관들이 수집한 정보를 제때 공유하지 못해 테러범을 사전에 포착하지 못했다는 정부 조사결과에 따라 ODNI가 생겼습니다. 그런 만큼 개버드 국장의 발언은 미국 정보기관들의 종합적인 분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그 무게가 남다르다고 볼 수 있죠.그런데 외신에 따르면 그가 올 3월 25일 미 상원 정보위원회에서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가 2003년 중단시킨 핵무기 프로그램을 아직 승인하지 않았다”고 발언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란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다시 승인할지 여부를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다. 이란의 농축우라늄 비축량은 최고 수준이며 핵무기가 없는 국가로는 전례가 없는 수준”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무기화 할 수 있는 농축 우라늄 비축량이 우려할 만한 수준이긴 하지만, 당장 무기화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선을 그은 겁니다.이는 9일 네타냐후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모사드 등의 분석을 토대로 이르면 몇 달 내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과 상반되는 내용입니다. 그는 “우리는 9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이란의 우라늄 농축을 발견했다”고도 말했죠. 구체적인 개발 시기와 농축량까지 제시하며 이란 공습의 시급성을 강조한 겁니다.이처럼 미국과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분석이 정반대를 가리키고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는 후자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17일 G7 정상회의를 하루 앞당겨 귀국하는 길에 개버드의 발언에 대해 기자들이 묻자, 트럼프는 “그녀가 말한 것은 상관없다“고 일축한 뒤 “나는 이란 핵무기 개발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자국 정보기관보다 동맹국 정보기관의 분석을 더 신뢰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역사적 편견으로 소련군 초기 패배 초래한 스탈린최고지도자가 자국 정보기관을 신뢰하지 않는 건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도자의 편견에 사로잡힌 데 따른 거라면 재앙이 될 수도 있죠.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가 1941년 6월 독소전쟁입니다. 그해 12월 미국의 2차 대전 참전과 더불어 전쟁의 거대한 흐름을 바꾼 대사건이죠. 이로부터 2년 전인 1939년 8월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스탈린은 독일군의 기습 공격에 크게 당황합니다. 나치 침공 당시 소련이 보낸 지원열차가 독일을 향하고 있을 정도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일격이었죠.그런데 이때도 소련 정보당국이 독일군의 침공 가능성이 높다는 사전 보고를 84차례에 걸쳐 스탈린에게 올렸지만, 그는 이를 무시합니다. 20년 전 러시아 내전 당시 영국, 일본 등 열강이 백군을 지원한 역사적 기억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죠. 영미 등 자본주의 제국이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주의 혁명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볼셰비키 혁명관도 영향을 미칩니다.이에 스탈린은 독일 침공 정보를 자신과 히틀러를 이간질하려는 처칠의 음모로 규정하고, ‘역(逆) 정보’에 속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수령의 지시에 소련 정보기관은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죠. 과거의 역사적 경험과 사회주의 혁명관이 ‘정보 실패’로 이어진 겁니다.‘정보 왜곡’ 이라크전쟁 데자뷔 우려 네탸냐후도 자국 정보기관을 불신해 도마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2023년 10월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네타냐후의 강한 당파성에 따른 정보기관 불신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정보 실패를 낳았다고 분석했습니다. 네타냐후가 사법부를 무력화하는 비민주적 정책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한 군부와 정보기관을 적대시했다는 겁니다.정책 결정자가 정보기관을 길들이는 이른바 ‘정보기관의 정치화’는 지금 상황의 데자뷔로 꼽히는 이라크 전쟁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미국 싱크탱크인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은 2004년 1월 8일 보고서에서 “이라크가 WMD를 폐기 또는 이동하거나 은닉했을 가능성은 없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의 WMD 위협을 조직적으로 왜곡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마디로 9.11 테러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일으킨 이라크 침공 명분을 얻기 위해 정보기관이 나서 WMD 위협을 조작했다는 겁니다.예컨대 CIA는 2001년 이라크가 암시장에서 알루미늄 튜브를 구입하려고 한 것을 핵무기 개발 증거라고 보고했습니다. 해당 알루미늄 튜브의 크기, 모양, 재질이 핵무기 부품과 전혀 다르다고 밝힌 타 정보기관의 분석은 무시했습니다. 결국 나중에 구성된 조사위원회는 해당 알루미늄 튜브가 재래식 로켓용 부품이며, 핵무기와 무관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또 CIA의 WMD 정보 출처 중 하나는 이라크인 망명자들이었는데 이것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사담 후세인 축출을 염원한 망명자들이 미국의 개입을 유도하기 위해 WMD 존재를 허위로 보고했기 때문이죠.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군사 개입 여부를 놓고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자국 정보기관보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분석을 신뢰한 그의 인식은 향후 국면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판단이나 편견 등에 빠지면 이라크 전쟁의 비극이 재현될 수 있다는 걸 경계해야하지 않을까요.[참고 문헌]-크리스토퍼 앤드루·박동철 역 〈스파이 세계사〉 1, 2, 3 (한울·2021년)-Foreign Policy 〈What Israeli Intelligence Got Wrong About Hamas〉 (2023.10.11)-전웅 〈9/11 테러, 이라크 전쟁과 정보실패〉 (세종연구소, 2005년)“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5-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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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김상운]美-유럽 ‘우크라戰 종전안’ 갈등에 불거진 ‘처칠論’

    “유럽 국가들은 모두 ‘윈스턴 처칠’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건 터무니없는 생각이다.”(3월 21일, 스티브 윗코프 미국 백악관 중동특사)“많은 사람들이 미국과 유럽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건 큰 실수다. ‘처칠’도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다.”(이틀 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해법을 놓고 미국과 유럽이 반목하는 가운데 때 아닌 ‘처칠론’이 화두에 올랐다. 구체적인 안보보장 없이 러시아에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를 떼주고 전쟁을 마무리하려는 미국과, 러시아의 재침을 막을 확실한 안보 대책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는 유럽의 주장이 맞서는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 영웅이 소환된 것. 이는 유럽 대륙에서 영토 전쟁이 벌어진 게 2차대전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아돌프 히틀러 2차대전 당시 독일 총통으로 치환해보려는 일부 서방진영의 시각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2차대전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논란의 핵심은 침략자의 진의(眞意)다. 다시 말해 히틀러와 푸틴이 품은 진짜 의도 말이다. 1938년 영국, 프랑스와 뮌헨협정을 맺을 당시 히틀러는 체코 주데텐 지방을 요구하며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대(對)나치 유화책을 이끈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히틀러의 이 말을 믿고 협정에 서명하며 “유럽 전체가 평화를 찾을 수 있는 더 큰 합의의 서막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곧 자신의 약속을 뒤집고 체코 전역을 점령했다. 또 이듬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대전의 서막을 열었다. 뮌헨협정은 체코의 35개 전투사단과 군수품 생산이 가능한 스코다 생산공장을 히틀러에게 안겨줘 침략에 날개를 달아줬다. 당시 영국 정치권에서 오직 한 사람이 오래전부터 히틀러의 거짓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처칠은 1935년부터 본격화된 독일의 ‘재무장’ 움직임에 주목하며 히틀러의 군사력 집착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당시 체임벌린과 주류 정치권은 처칠을 한낱 ‘전쟁광’으로 폄하했다. 결국 처칠의 예언이 적중한 건 그가 히틀러의 말이 아닌 ‘행동’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 국면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이 영구 종전을 정말 원하는지가 핵심이다. 토니 블링컨 전 미 국무장관은 19일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전쟁 중재가 효과를 내지 못하는 건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추구하는 걸 트럼프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에 골몰한 표트르 대제를 롤모델로 삼는 푸틴에게 점령지를 인정해주는 등의 유화책으로만 대응하면 제2의 히틀러를 낳을 수 있다고 유럽은 우려한다. 더구나 푸틴은 2014년 크림반도를 점령하고 10년도 안 돼 우크라이나를 다시 침공했다. 유럽이 종전 후에도 러시아의 재침을 우려하며, 평화유지군 파견을 추진하는 이유다. 하지만 미국의 생각은 다르다. 트럼프는 최근 시간을 끌며 휴전협상에 응하지 않은 푸틴에 대해 간간이 실망을 표시했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트럼프는 18일 푸틴과 2시간에 걸친 통화를 마친 직후에도 “나는 푸틴이 전쟁을 멈추길 원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사실 이런 판단은 미국이 바라는 ‘희망사항’에 가깝다. 막대한 재정적자를 악화시키는 대외 무력 개입을 최소화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원칙이 그것이다. 미국은 종전 후 미군 파견 등을 거부한 채 미국산 무기에 대한 대가를 희토류 등으로 받아내겠다며 최근 우크라이나와 ‘광물협정’을 체결했다. 윗코프는 “유럽은 러시아가 진군할 거라고 보고 처칠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하는데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며 “우리에게는 지금 (2차대전 때와 달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가 있다”고 했다. 나치 독일에 대해 강경책을 펼친 처칠의 방식이 이 시대엔 통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그의 지적대로 2차대전과 지금의 국제질서는 판이하게 다르다. 하지만 국제관계에서 특정 국가 혹은 지도자의 의도를 파악할 때 말보다 행동을 근거로 삼는 게 안전하다는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정치 지도자의 말은 언제든 바뀔 수 있고,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의도 자체도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가 푸틴의 말이 아닌, 행동을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김상운 국제부 차장 sukim@donga.com}

    • 2025-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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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김상운]‘시그널 게이트’로 드러난 美 외교 속살

    최근 군사기밀 유출 논란을 빚고 있는 ‘시그널 게이트’는 외교안보 관점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적지 않다. 미국 외교안보 분야의 파워엘리트들이 총망라된 메신저 단체 대화방의 대화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이 어떻게 결정되고 있는지 그 생생한 속살을 엿볼 수 있어서다. 특히, 최근 미-우크라이나 정상회담 등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대장을 자임한 J D 밴스 부통령의 속내와 ‘문고리 권력’ 스티븐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의 위상 등이 생생히 담겼다. 시그널 게이트를 세상에 알린 제프리 골드버그 디애틀랜틱 편집장이 공개한 대화방 전문을 분석했다.● 트럼프 지시에 토를 단 행동대장 부통령‘후티 PC(Principals Committee) 소그룹’이라는 제목 답게 예멘의 친이란 무장단체 후티 반군에 대한 공습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대화방에 파문을 일으킨 건 밴스였다. 대화방이 개설된 바로 다음 날인 3월 14일 오전 8시 16분 그는 “우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포문을 열었다. 후티 반군의 공격 대상인 홍해(수에즈 운하) 통과 선박들의 단 3%만 대미(對美) 무역과 관련돼 있고, 40%는 유럽 무역에 기여한다는 것. 더구나 “후티 공습은 심각한 수준의 유가 급등을 초래할 수 있다”며 “공습을 한 달 정도 연기하고 경제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는 게 합리적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후티 공습은 유가 급등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유럽) 좋은 일을 하는 것이기에 재고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통령의 앞선 후티 공습 지시에 사실상 어깃장을 놓은 것. 더구나 밴스는 “대통령이 이것(후티 공습)이 현재 유럽에 대한 그의 메시지와 얼마나 불일치하는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 등 동맹 외교에서 철저한 거래 관계를 추구하고 있는데, 대통령의 공습 지시가 이 같은 외교 방침과 어긋난다고 지적한 것. 차기 대권주자를 꿈꾸는 밴스가 트럼프 대통령보다 강력한 ‘고립주의 외교’ 원칙에 따라 대통령의 지시에 사실상 반기를 든 셈이다. 26일 워싱턴포스트(WP)는 시그널 대화방에서 밴스의 메시지는 미국의 대외 개입 최소화를 요구하는 유권자들의 요구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그에게 정치적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논란 종결한 실세 스티븐 밀러 밴스의 문제 제기에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과 마이클 왈츠 국가안보보좌관은 ‘항행의 자유’와 ‘대외 메시지’를 들어 공습 필요성을 설득하고 나섰다. 헤그세스는 “후티 공습을 지연시키면 미국이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고, 이스라엘이 먼저 행동에 나설 경우 미국이 주도적으로 나설 기회를 잃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국제통상 질서의 전제가 되는 항행의 자유를 회복하는 건 미국의 핵심 국가이익임을 강조했다. 왈츠도 “결국 홍해 항로를 다시 여는 건 미국의 몫이 될 것이다.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 국무부와 협력해 공습 비용을 유럽으로부터 받아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헤그세스를 거들었다. 후티 공습을 둘러싼 부통령과 외교안보 참모들의 논란은 줄곧 침묵으로 일관하던 한 사람의 말을 끝으로 종결된다. 트럼프 대통령의 복심이라고 불리는 밀러다. 그는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대통령은 분명히 후티 공습을 ‘승인’했다. 만약 미국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항행의 자유’를 회복한다면 이에 상응하는 경제적 이익을 (유럽 등으로부터)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썼다. 이후 헤그세스의 “동의한다”는 답글 외에 누구도 추가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고, 다음 날 후티 공습은 현실화됐다. 철저히 거래 중심의 외교 관점에서 동맹을 불신하는 트럼프 행정부 핵심 인사들의 이런 속내는 남의 일이 아니다. 외교가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 핵보유 발언과 맞물려 북핵 ‘스몰딜’ 과정에서 한국이 패싱 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곧 본격화될 미국과의 통상 및 방위비 협상을 앞둔 당국자들이 시그널 게이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미 외교안보 라인의 인식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김상운 국제부 차장 sukim@donga.com}

    • 2025-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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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상운]트럼프도 시장을 이길 순 없다

    “나는 항상 옳다. 우리는 호황을 누릴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1일(현지 시간)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고율 관세 정책에 따른 경기 침체 우려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10일 미 나스닥지수가 4% 급락하는 등 뉴욕 증시가 극도의 패닉에 빠진 직후 이뤄졌다는 점에서 트럼프의 확언을 수긍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10일 증시 폭락의 도화선이 된 트럼프의 ‘과도기(transition)’ 발언이 진실에 가까운 게 아니었을까. 그는 9일 친(親)트럼프 매체로 꼽히는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올해 경기 침체를 예상하느냐는 질문에 “(고관세 정책엔) 과도기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하려는 것은 미국의 부를 다시 창출하는 대단한 일이며, 여기엔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이에 투자자들은 대통령이 고관세에 따른 경기 침체 부작용을 사실상 시인한 거라고 해석하며, 경기 하락에 풀베팅했다. 사실 경기 침체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미국 경제지표는 혼재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 중 소비 부문에선 하락세가 확연하다. 미 상무부에 따르면 1월 개인소비지출(PCE)은 전월 대비 0.2% 줄어 팬데믹 때인 2021년 2월(―0.6%) 이후 약 4년 만에 가장 큰 감소율을 보였다. 생산 부문에서도 2월 미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가 전월(50.9) 대비 0.6포인트 하락해 제조 업황이 둔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고관세로 인해 가장 우려되는 물가는 아직까지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2월 미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2.8% 상승에 그쳐 시장 예상을 밑돌았다. 고용 부문도 2월 비농업 부문 일자리가 15만1000개 증가해 전달(12만5000개)보다 늘었다. 2월 실업률이 4.1%로 전월 대비 0.1%포인트 높아졌지만, 비교적 양호한 수준으로 평가된다. 결국 미국 내 소비와 생산이 위축된 반면, 물가와 고용은 비교적 견조한 흐름을 보이는 상황에서 경제 주체들의 심리가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트럼프의 관세 정책이 오락가락 행보를 보이며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멜라니 졸리 캐나다 외교장관이 “30일마다 이런 ‘사이코 드라마’를 겪을 순 없다”고 토로할 정도다. 경제에서 불확실성은 소비자와 기업들에 불안 심리를 자극해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킨다.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투자 불안이 뱅크런을 일으키며 경기 침체를 촉발시킨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와 관련해 2월 미 소비자신뢰지수가 전월 대비 7포인트 하락해 2021년 8월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한 건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장을 이긴 통치 권력은 없었다. 트럼프가 일종의 세금인 관세로 미국의 부(富)를 이루고자 한다면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1776년)에 쓴 다음의 구절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가를 가장 낮은 야만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부유로 이끄는 데 필요한 건 평화와 ‘낮은 세금’, 공정한 법 집행뿐이다. 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방해하는 모든 정부는 폭압적일 수밖에 없다.”김상운 국제부 차장 sukim@donga.com}

    • 202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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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캐나다 보복에 재보복 “철강 관세 50%로 인상”

    11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부터 캐나다산 철강 관세를 다른 나라의 두 배인 50%로 올리겠다고 밝혔다. 또 미국산 유제품에 대한 캐나다의 관세를 거론하며 4월 2일부터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대폭 인상하겠다고 했다.트럼프는 이날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미국으로 들어오는 전기에 대해 캐나다 온타리오주(州)가 25%의 관세(할증 요금)를 부과한 것을 근거로, 나는 상무장관에게 캐나다로부터 미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해 추가로 25%의 관세를 부과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관세는 총 50%가 될 것”이라고 썼다. 12일은 미국이 수입하는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25% 관세가 예정돼 있는데, 캐나다산에 대해선 추가로 25% 관세를 더 붙여 50%를 적용하겠다는 것이다.이는 10일 미국 고관세 조치에 대한 보복으로 캐나다 온타리오주가 미국 미네소타주 등에 공급하는 전기 요금을 25% 할증한 데 따른 대응으로 분석된다. 트럼프는 “나는 곧 위협 받는 지역의 전력에 대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이라고 했다.이와 함께 캐나다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 인상 조치도 밝혔다. 그는 “캐나다는 다양한 미국산 유제품에 대해 250~390%의 반미 관세를 즉시 인하해야 한다”며 “이를 철회하지 않으면 4월 2일에 미국으로 들어오는 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대폭 인상하겠다”고 덧붙였다.그러면서 캐나다의 51번째주 편입이라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캐나다는 국가안보를 위해 아무런 비용도 지불하지 않으며, 미국에 군사적 보호를 의존하고 있다”며 “캐나다가 우리의 51번째 주가 된다면 모든 관세와 그 외 문제들이 사라질 것이다. 캐나다 국민들의 세금은 크게 감소할 것이며, 모든 면에서 안전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5-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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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상운]트럼프發 안보위기 맞아 여야 머리 맞대는 독일 정치

    “Was zusammengehört, wächst zusammen(한 뿌리에서 나온 것은 함께 성장한다).”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직후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사회민주당 소속)의 연설은 이듬해 헬무트 콜 당시 총리(기독민주당)의 독일 통일로 현실화 됐다. 독일 속담을 차용한 그의 연설 문구는 1차적으로 동서독의 재결합을 의미했지만 자신이 추진한 동방정책(ostpolitik)의 발전적 계승을 뜻한 것이기도 했다. 중도 보수 성향의 기민당과 중도 좌파 성향의 사민당은 외교 노선이나 경제 개발 방식, 세금 운영 등 여러 정책에서 의견이 엇갈리는 라이벌 정당이다.그런데 콜 전 총리는 기민당의 전통적인 친미 외교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동독 및 동유럽 국가들과의 교류와 경제협력을 강조한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계승했다. 동서독 분단 직후 기민당이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미국의 대소련 봉쇄정책에 적극 협력한 것에서 180도 달라진 것이다. 이는 통독에 대한 미소 열강과 주변국들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기여했다.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기민당이 완성함으로써 독일 통일이 가능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중대한 국가안보 이슈를 놓고 여야가 합의를 이루는 독일의 정치문화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며 러시아와 밀착하자, 연정 협상에 들어간 기민당과 사민당이 방위비 확대를 협의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외신들에 따르면 최근 총선에서 승리한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민당 대표가 25일(현지 시간) 사민당 소속 올라프 숄츠 총리와 면담했다. 두 사람은 우크라이나 지원과 국방력 강화를 위해 특별방위비 편성 등을 논의했다고 한다. 그동안 기민당이 줄기차게 반대해 온 국가부채 한도 규정 개정도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기민당은 숄츠 총리의 사민당 연립내각이 부채 한도 규정을 어겼다며 헌법재판소에 제소해 위헌 결정을 받아냈었다.재정적자를 극도로 경계해 온 메르츠 대표와 기민당이 기존 원칙을 버리고 서둘러 방위비를 늘리려는 것은 당면한 안보 위협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협상에서 러시아와 밀착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탈퇴 가능성을 시사하는 등 유럽에 대한 안보공약을 약화시키고 있어서다. 이는 확고한 친미주의자였던 메르츠 대표가 입장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는 총선 잠정 개표 결과가 발표된 23일 “미국이 이제 유럽의 운명에 무관심하다”며 “나의 최우선 과제는 가능한 한 빨리 유럽을 강하게 해, 단계적으로 미국으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트럼프발(發) 안보 위기를 여야가 머리를 맞대며 숙의 중인 독일에 비해 한국은 어떤가. 대북 정책의 핵심 원칙과 맞닿아 있는 북한인권법은 여야 이견으로 발의된 지 11년 만인 2016년에야 국회를 가까스로 통과했지만, 아직까지도 법에 규정된 북한인권재단이 출범조차 못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이사 추천을 거부하고 있어서다.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은 함께 성장한다’는 독일 속담처럼 우리 여야도 안보에서만큼은 합의를 이뤄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 본다.김상운 국제부 차장 sukim@donga.com}

    • 202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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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김정은과 ‘러 파병 중단’ 조건 스몰딜 가능성”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연계해 (‘스몰 딜’을 조건으로) 북한의 러시아 파병 및 무기 공급 중단을 협상할 가능성이 있다.”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사진)는 18일 미국 워싱턴에서 CSIS 주최로 열린 ‘트럼프 행정부에서의 미국 동맹 및 파트너’ 세미나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담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공식적으로는 ‘북한 비핵화’를 천명했지만 실질적으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미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만 해소되면 러시아 파병과 무기 지원 중단을 조건으로 스몰 딜(핵군축과 대북 제재 해제 교환)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날 세미나에서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과거(트럼프 1기 때) 북-미 정상회담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이번엔 새로운 틀에서 접근할 것”이라며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공식적으로는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를 언급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 우선주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미국 우선주의’ 전략을 북한에 적용해 핵무기 및 ICBM 위협을 무력화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 있다”고 전망했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하고 있는 한국, 일본과 달리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ICBM 개발 중단 등을 조건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스몰 딜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미일 정상회담 공동성명 등에서 ‘북한 비핵화’를 공식화했지만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과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핵능력 보유국(nuclear power)’이라고 지칭했고, “김 위원장과 다시 접촉하겠다”고 발언하는 등 대북 유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탄핵 정국으로 인해 한국의 대미 외교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언급도 있었다. 차 석좌는 “다른 나라들의 대미 협상을 보는 한국은 마치 사탕가게 밖에서 유리창을 통해 지켜보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북-미 대화와 관련해 최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북-미 대화 재개 노력을 지지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것도 고려하겠다”고 말한 사실도 거론했다. 트럼프 1기였던 2019년 당시 청와대가 “트럼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게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밝힌 것처럼 현재 민주당도 북-미 대화와 관련해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5-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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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벌 이슈/김상운]반세기 만에 재현된 韓日 ‘안보 협력’

    “미군 주둔은 극동 지역의 안정을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다.” 1970년 7월 한일 정기 각료회의에서 양국은 이 같은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과거사 문제로 갈등을 겪던 양국이 이례적으로 한목소리를 낸 외교적 사건이었다. 한일 공동성명에서 미군 주둔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도 처음이었다. 발단은 그해 6월 미국 닉슨 행정부의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 철수’ 발표였다.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 기여와 당시 박정희 정부의 간곡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닉슨 행정부는 비용 절감 등을 위해 주한미군 철수를 밀어붙였다.그런데 이것은 단지 한국의 안보 불안에만 그치지 않았다. 주한미군 철수를 동아시아에서 미국 안보 공약의 후퇴로 인식한 일본도 위기 인식을 공유한 것.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당시 일본 총리가 윌리엄 로저스 미 국무장관을 만나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동아시아 ‘안보 공백’ 우려를 전하며 지원 사격에 나섰다. 이에 대해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저서 ‘적대적 제휴’(문학과지성사)에서 한일에 안보를 제공하는 미국이 ‘고립주의’로 쏠릴 때, 한일 양국이 갖는 안보 불안이 과거사 갈등에도 불구하고 ‘협력’을 낳는다고 분석했다.역사는 반복되는가. 7일 미일 정상회담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북한 비핵화와 더불어 한미일 안보 협력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재확인받았다. 어떤 면에선, 우리 정부가 트럼프 2기 행정부에 요청할 안보 공약을 일본이 앞장서 협상해 준 셈이다. 이런 구도는 55년 전 한미일 3국 관계와 닮은꼴이다. 미국의 안보 공약을 둘러싼 한일 간 협력뿐 아니라, 1970년 닉슨 행정부 때처럼 트럼프 행정부도 비용 절감을 위해 대외 군사 개입을 자제하는 신고립주의 외교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방위비 분담금 인상 압박을 위해 주한미군 감축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상황도 비슷하다.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의 북한은 55년 전에는 갖지 못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한일이 북한 비핵화를 추진함에도 최근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과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핵능력 보유국(nuclear power)’이라 지칭했다. 핵 군축을 대가로 대북제재를 완화하는 ‘스몰 딜’ 가능성을 은연중 시사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탄핵 사태로 정상외교가 막힌 비상 상황에서 이웃 나라 일본의 움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트럼프 2기 출범을 맞아 안보 위협국인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면서 국방력을 강화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구체적으로, 모리야마 히로시 일본 자민당 간사장이 지난달 13∼15일 방중해 6년 만에 중국공산당과 ‘중일 여당 교류협의회’를 열었다. 중국은 정부보다 공산당이 정책 주도권을 쥐고 있어 여당 간 교류의 의미가 작지 않다. 지난해 12월엔 이와야 다케시 일본 외상이 방중해 중국인 관광객에 대한 비자 발급 완화 방침을 밝혔다. 일본은 이시바 총리의 방중과 더불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일도 추진 중이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의 제이크 설리번 전 국가안보보좌관이 고별 인터뷰에서 “동맹국들이 미국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으로 ‘중국으로 헤지(hedge·위험 회피)를 해야 한다’고 말하게 될까 봐 걱정된다”고 한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유화책만 쓰는 건 아니다. 일본 방위성은 내년에 소형 자폭용 드론 310대를 도입할 방침을 굳혔다고 산케이신문이 최근 보도했다. 자폭용 드론을 일본 자위대가 보유하는 건 처음이다. 방위성은 드론을 이용해 규슈 남부에서 대만 인근까지 이어진 난세이 제도에서 대응력을 높일 계획이다. 중국의 해양 진출을 견제하고, 양안 전쟁에 선제적으로 대비하겠다는 것이다. 이 또한 55년 전 일본 사토 정부가 1970년도 국방예산을 전후 최대인 17.7% 늘린 것과 겹친다. 예측 불허의 트럼프 2기를 맞아 중국, 북한의 안보 위협에 맞서 일본과 안보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자체 국방력을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김상운 국제부 차장 sukim@donga.com}

    • 202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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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에서/김상운]‘1호 친구’ 머스크와 ‘로보캅’ 디스토피아

    미국 할리우드 영화 ‘로보캅’(1987년)에서 디트로이트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건 OCP라는 거대 테크기업이다. 첨단기술로 무장한 OCP는 경제부터 도시 개발, 군수, 치안까지 도시의 모든 영역을 장악한다. 급기야 각종 범죄 소탕을 명분으로 전직 경찰관의 신체에 기계를 결합한 로보캅을 만드는 데 이어 군용 로봇 ED-209를 개발한다. 하지만 시연 도중 ED-209가 오작동하면서 시민들을 무차별 살해한다. OCP는 수익 창출을 위한 무기 개발에만 혈안이 돼 있을 뿐 시민 안전엔 별 관심이 없다. 국가 영역을 넘보는 거대 테크기업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최측근으로 부상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겸 스페이스X CEO의 최근 행적을 보고 ‘로보캅’을 떠올리는 건 무리일까. 그는 최근 유럽 각국에서 ‘내정 간섭’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데 이어 미국 내에선 그를 두고 안보 위협론까지 불거졌다. 미국과 특수 관계를 맺고 있는 영국에선 머스크의 키어 스타머 총리에 대한 공격이 여야 간 논란으로 확산됐다. 머스크는 스타머 총리가 왕립검찰청장을 지낼 당시 아동 성착취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며 “스타머는 사임해야 한다. 국가적 수치”라고 X에 올렸다. 이에 스타머 총리는 “선을 넘은 주장으로 거짓말과 허위 정보”라고 반박했지만, 영국 보수당은 성착취 사건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요구했다. 영국 더타임스는 “트럼프가 이 논쟁에 개입하진 않았지만 머스크와 가까운 관계라는 사실은 심각한 리스크를 제기한다”고 보도했다. 유럽 최대 경제대국인 독일에서도 머스크는 논란의 핵이다. 다음 달 23일 독일 총선을 앞두고 머스크가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공개 지지하고, 총리 후보인 알리스 바이델 AfD 공동대표와 라이브 토크쇼를 열기로 하는 등 선거에 개입하고 있어서다. 미국 내에선 그가 안보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러셀 아너레이 예비역 육군 중장은 지난해 12월 31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머스크가 트럼프의 재선에 거액을 기부했다고 해서 백악관이 국가안보 위험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썼다. 테슬라의 상하이 공장이 글로벌 생산량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가운데 머스크가 대만을 중국의 특별행정구로 만들어야 한다고 발언하는 등 친중 행보를 보여 왔기 때문이라는 것. 머스크의 발언에 주요국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건 그가 트럼프의 전폭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글로벌 테크업계와 미 정치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서다. 요나스 가르 스퇴레 노르웨이 총리는 6일 방송 인터뷰에서 “SNS에 대한 막대한 접근권과 대규모 경제자원을 가진 사람이 다른 나라 내정에 직접 관여하는 게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머스크의 영향력과 더불어 그의 비즈니스 제국은 급격히 확장되고 있다. 스페이스X의 위성 인터넷 서비스 스타링크는 100여 개국 400만 명에게 공급되며 저궤도 위성통신 시장을 장악했다. 스페이스X는 민간용뿐 아니라 군사용 위성 서비스까지 구축했다. 거대 테크기업 OCP가 군림하는 영화 속 디스토피아가 부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김상운 국제부 차장 sukim@donga.com}

    • 2025-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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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달 폭설에 궁궐-조선왕릉 1025건 피해

    지난달 수도권 폭설로 궁궐과 조선왕릉에 1000건이 넘는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24일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올 11월 폭설로 궁궐과 조선왕릉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거나 넘어지고, 주변 시설물에 피해를 준 사례는 총 1025건이었다. 이 중 조선왕릉에서 확인된 피해가 903건, 주요 궁궐 피해는 122건이다. 국가유산청은 “비를 머금어 일반 눈보다 약 3배나 무거운 습설이 내린 탓에 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는 소나무 같은 상록수가 많은 궁궐과 왕릉의 나무 피해가 컸다”고 설명했다. 피해가 발생한 나무는 복구를 마친 상태다. 국가유산청은 폭설 후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등 4대 궁과 조선왕릉 관람을 일시 중단하고, 제설 작업과 시설물 보수에 나섰다. 관람로를 정비하고 쓰러진 나무를 정리하기 위해 긴급 예산 4억200만 원을 투입했다. 복구 작업이 마무리됨에 따라 현재 4대 궁과 조선왕릉은 개방되고 있다. 다만 경기 고양 서오릉, 화성 융릉과 건릉, 서울 태릉과 강릉, 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정릉, 서울 의릉, 경기 여주 영릉과 영릉 등 왕릉 숲길 일부 구간은 관람이 제한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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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 폭설로 궁궐·조선왕릉 피해 1025건…현재 복구 완료

    지난달 수도권 지역 폭설로 궁궐과 조선왕릉에 1000건이 넘는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24일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올 11월 폭설로 궁궐과 조선왕릉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거나 넘어지고, 주변 시설물에 피해를 준 사례는 총 1025건이었다. 이 중 조선왕릉에서 확인된 피해가 903건, 주요 궁궐 피해는 122건이다.국가유산청은 “비를 머금어 일반 눈보다 약 3배나 무거운 습설이 내린 탓에 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는 소나무 같은 상록수들이 많은 궁궐과 왕릉의 나무 피해가 컸다”고 설명했다. 피해가 발생한 나무는 복구를 마친 상태다. 국가유산청은 폭설 후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등 4대 궁과 조선왕릉 관람을 일시 중단하고, 제설 작업과 시설물 보수에 나섰다. 관람로를 정비하고 쓰러진 나무를 정리하기 위해 긴급 예산 4억200만원을 투입했다.복구 작업이 마무리됨에 따라 현재 4대 궁과 조선왕릉은 개방 중이다. 다만 고양 서오릉, 화성 융릉과 건릉, 서울 태릉과 강릉, 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정릉, 서울 의릉, 여주 영릉과 영릉 등 왕릉 숲길 일부 구간은 관람이 제한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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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편견-차별 맞서 ‘문화 상대주의’ 꽃피운 그들

    1925년 8월 대학원을 마친 갓 스물셋의 미국인 여성이 태평양 사모아 제도 투투일라섬에 홀로 내렸다. 이후 그녀는 10년 넘게 사모아인들과 살면서 사춘기 소녀들을 집중 관찰했다. 함께 밥을 먹고, 고기를 잡으면서 이들과 주변 사람들을 연구했다. 그 결과 그가 내린 결론은 반항적인 사춘기 현상은 서구적 개념으로, 호르몬 등 생리학적 변화와는 무관하다는 것. 그보다는 서구보다 평균 수명이 짧은 사회에서 10대부터 성인의 삶을 요구하는 문화에 따른 영향이라고 봤다. 인종이나 성별보다 후천적 문화와 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1901∼1978)의 이야기다. 이 책은 미국 국제정치학자가 20세기 전반까지 서구 사회를 지배한 과학적 인종주의와 사회 진화론에 맞서 문화 상대주의를 꽃피운 문화인류학자 다섯 명의 삶을 추적한 것이다. 참여관찰법 등 문화인류학의 연구 방법론이 정치학 등 여러 사회과학에 적용되고 있는 걸 감안하면 국제정치학자가 저자인 게 이상할 것은 없다. 책은 문화인류학을 창시한 프란츠 보아스(1858∼1942)를 중심으로 그에게 배운 여성 제자들을 조명한다. 이 중에는 ‘국화와 칼’을 쓴 루스 베네딕트, 성역할은 자연적인 게 아니라 문화적 창조물임을 밝힌 마거릿 미드, 북미 원주민 출신으로 동족의 문화를 연구한 엘라 캐러델로리아, 미국 남부와 아이티에서 현지 연구를 토대로 소설을 쓴 흑인 페미니스트 조라 닐 허스턴이 포함됐다. 여성, 유색 인종, 성소수자의 타이틀을 하나 이상 가진 이들은 미국 주류사회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피부색이나 성별과 무관하게 문화들 사이에는 우열이 없다는 문화 상대주의를 이들이 주장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스승인 보아스도 남성이었지만 독일에서 이주한 유대인 출신으로 이민자의 비애를 겪었다. 특히 보아스는 1930년대 1차대전 이후 자유의 방파제로 여겨진 미국조차 독일 나치와 다를 바 없는 인종주의 편견에 가득 차 있음을 고발했다. 당시 미국은 학교나 관공서, 극장 등 공공시설에서 인종분리 정책을 시행했는데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여기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 저항한 보아스와 제자들은 미 연방수사국(FBI)의 감시를 받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불이익을 받았지만, 편견과 차별에 맞서 문화인류학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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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여옥 시인, 네번째 시집 ‘나는 언제나 나를 향해 서 있었다’ 펴내

    월간문학 편집국장 출신의 시인 김여옥이 네번째 시집 ‘나는 언제나 나를 향해 서 있었다’(들꽃)를 최근 펴냈다. 1963년 해남에서 태어난 김여옥은 1991년 월간 ‘문예사조’에 발표한 연작시 ‘제자리 되찾기’가 당선돼 등단했다. 시집 ‘제자리 되찾기’(1994), ‘너에게 사로잡히다’(2008), ‘잘못 든 길도 길이다’(2019) 등의 시집을 펴냈다. 1996년 마케도니아 제35차 스트루가 국제 시축제, 1998년 불가리아 문화성 초청 ‘한·불가리아 문학의 밤’에 한국 대표로 참여했다. 그는 이번 시집을 통해 지나온 생에 대한 끈질긴 탐구와, 사회적 존재로서 현실의 문제를 형상화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승철 시인은 “이순의 삶터에서 길어 올린 시적 떨림이자 울림이기에 한 줄기 강렬한 빛으로 다가온다. ‘고통만이 우리를 승화시킨다’는 결론에 다다른 영혼의 진혼곡이자, 우리 사회의 혼돈을 외면치 않는 간곡한 선언”이라고 평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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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묘서 차담회 연 김여사…국가유산청 “사적 사용 맞다” 사과문 발표키로

    김건희 여사가 서울 종묘에서 차담회를 연 데 대해 국가유산청이 ‘사적 사용’에 해당한다며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겠다고 20일 밝혔다. 이재필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장은 20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서 ‘김 여사의 종묘 차담회가 국가행사라고 생각하느냐’는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 질의에 “개인적인 이용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적 사용이 맞다”고 답했다. 앞서 김 여사는 종묘 휴관일인 9월 3일 종묘 망묘루에서 외국인 남녀 2명, 신부 1명, 스님 1명과 차담회를 가진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종묘 내 시설을 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건 문제라는 지적이 불거진 것. 이날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은 ‘국가유산청 내규에 따른 절차를 준수해 사용허가를 했느냐’는 민주당 양문석 의원 질의에 “당시에는 당연히 국가적인 행사라고 판단해서 관행대로 했다. 추후 상황 판단을 해보니 판단이 미숙했던 점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통령실 문화체육비서관실이 궁능유적본부장과 협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히 공식적인 행사로 판단해 사용을 허가해 주는 게 맞지 않겠냐고 제가 판단했다”고 했다. 최 청장은 이와 관련해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겠다고 덧붙였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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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학자들, 1960년대 中과 공동발굴때 고조선의 영역 내몽골까지 확대 의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강상(崗上) 무덤 발굴 ‘비파형동검’은 평양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도 거의 똑같은 것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북한에 있는 유물은 진품이고, 남한에 있는 건 복제품이라는 것. 이것은 1963∼65년 북한과 중국이 다롄 일대를 공동으로 발굴 조사한 끝에 찾아낸 고조선의 핵심 유물이다. 다만, 당시 중국 측은 북한의 ‘고조선’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청동기’ 유물이라고만 명명했다. 고조선의 강역을 둘러싼 북한과 중국의 고대사 논란이 이때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이다.중국 고고학자 안즈민(安志敏·1924∼2005)의 일기를 최근 번역 출간한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18일 기자와 만나 “1960년대 북중 고고 발굴단(조중 고고 발굴대)은 구성부터 운영까지 다분히 정치적 색채가 강했다”고 설명했다. 1960년대 중소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북한을 자국 편으로 끌어들어야 했던 중국이 북한의 공동 발굴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당시 북한 역사학계에선 고조선 중심지를 중국 대릉하 일대로 보는 ‘요동(遼東) 중심설’이 주류였다. 이에 따라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王儉城)이 평양이 아닌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국 현지 발굴조사가 필요했다. 안즈민은 북중 발굴단에서 중국 측 고조선 연구팀을 이끈 고고학자. 그는 자신의 일기에 리지린(1915∼?) 등 북한 학자들과 겪은 갈등을 비롯해 공동 조사 과정에서 겪은 일화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안즈민 일기’(주류성)에 따르면 북한 학자들은 중국 요동지역의 하이청현 일대를 고조선 수도인 왕검성으로 지목하고 관련 증거를 찾기 위해 곳곳을 답사했다. 하지만 중국 측은 이들이 찾아다닌 성터들 대부분이 명나라 때 조성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양측의 역사 갈등은 ‘스파이 논란’으로까지 비화됐다. 북한 학자 리지린이 1959∼1961년 베이징대에서 고조선에 대한 박사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였던 고힐강(顧頡剛)이 간첩 활동을 도와준 혐의로 취조를 받기도 했다. 양국의 역사 갈등 이면에는 북중 발굴단이 한창 활동하던 1964년 체결된 ‘북중 국경 조약’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북중 접경지대인 만주지역은 고대부터 한민족의 활동 무대였던 데다 조선인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당시 북한 학자들은 내몽골까지 고조선의 강역으로 확대해 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며 “북한이 고조선 강역을 바탕으로 만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것을 중국이 우려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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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학자들, 내몽골까지 고조선 강역으로 간주해  中과 역사갈등”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강상(崗上) 무덤 발굴 ‘비파형동검’은 평양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도 거의 똑같은 것이 있다. 차이점이라면 북한에 있는 유물은 진품이고, 남한에 있는 건 복제품이라는 것. 이것은 1963~65년 북한과 중국이 다롄 일대를 공동으로 발굴 조사한 끝에 찾아낸 고조선의 핵심 유물이다. 다만, 당시 중국 측은 북한의 ‘고조선’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청동기’ 유물이라고만 명명했다. 고조선의 강역을 둘러싼 북한과 중국의 고대사 논란이 이때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이다. 중국 고고학자 안즈민(安志敏·1924∼2005)의 일기를 최근 번역 출간한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18일 기자와 만나 “1960년대 북중 고고 발굴단(조중 고고 발굴대)은 구성부터 운영까지 다분히 정치적 색채가 강했다”고 설명했다. 1960년대 중소갈등이 본격화되면서 북한을 자국 편으로 끌어 들어야 했던 중국이 북한의 공동발굴 요구를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당시 북한 역사학계에선 고조선 중심지를 중국 대릉하 일대로 보는 ‘요동(遼東) 중심설’이 주류였다. 이에 따라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王儉城)이 평양이 아닌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국 현지 발굴조사가 필요했다. 안즈민은 북중 발굴단에서 중국 측 고조선 연구팀을 이끈 고고학자. 그는 자신의 일기에 리지린(1915∼?) 등 북한 학자들과 겪은 갈등을 비롯해 공동 조사과정에서 겪은 일화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안즈민 일기’(주류성)에 따르면 북한 학자들은 중국 요동지역의 하이청현 일대를 고조선 수도인 왕검성으로 지목하고 관련 증거를 찾기 위해 곳곳을 답사했다. 하지만 중국 측은 이들이 찾아다닌 성터들 대부분이 명나라 때 조성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양측의 역사 갈등은 ‘스파이 논란’으로까지 비화됐다. 북한 학자 리지린이 1959~1961년 베이징대에서 고조선에 대한 박사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였던 고힐강(顧頡剛)이 간첩활동을 도와준 혐의로 취조를 받기도 했다. 양국의 역사 갈등 이면에는 북중 발굴단이 한창 활동하던 1964년 체결된 ‘북중 국경 조약’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북중 접경지대인 만주지역은 고대부터 한민족의 활동무대였던데다 조선인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당시 북한 학자들은 내몽골까지 고조선의 강역으로 확대해 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며 “북한이 고조선 강역을 바탕으로 만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것을 중국이 우려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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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제인 에어, 마리 퀴리… 삶 개척한 여성들

    ‘나는 그와의 싸움을 중지하고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지난날 다른 남성에 의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음의 자유를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에 의해 마음의 자유를 잃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나 이제나 나는 바보였다. 그때 굴복했더라면 그것은 신조의 과오였으리라. 그리고 이제 굴복한다면 판단의 과오가 될 것이었다.’ 샬럿 브론테의 로맨스 고전 ‘제인 에어’(1847년)에서 주인공 제인 에어가 성직자 존 세인트 리버스의 청혼을 접하고 번민하는 구절이다. 그녀는 결국 리버스의 청혼을 거절하고, 자신이 떠나온 자산가 에드워드 로체스터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주목할 건 로체스터가 시각 장애인이 되는 등 철저히 무너지고 나서야 제인 에어가 그를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로체스터가 제인 에어에게 순응하는 순간, 그녀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던 것. 여성 차별이 극심했던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발표된 파격적 서사에 유종호 문학평론가는 “여성주의 혁명 소설”이라고 평했다. 문학과 사회학을 전공한 저자는 신간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한 여성 27명의 삶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살핀다. 제인 에어 같은 소설 속 주인공부터 마리 퀴리 등 과학자까지 다양한 여성들을 망라했다. 특히 소설가 브론테가 그린 제인 에어는 기구한 여성이라기보다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여성이라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로체스터의 전 부인인 메이슨은 단순한 사랑의 장애물이 아닌, 제국주의와 남성주의의 피해자로 볼 수 있다는 흥미로운 시각도 제시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2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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