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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은 매년 12월 국세 체납액이 2억 원 이상인 고액·상습 체납자의 인적사항을 공개한다. 지난해 신규 공개 대상자는 개인 6848명, 법인 4161곳이나 됐다. 체납자를 압박하고 성실 납부를 유도하려는 일종의 ‘망신 주기’ 전략이다. 앞으론 주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기업들의 명단도 공개될 예정이다. 대상자 선정 기준은 ‘주가순자산비율(PBR)’이다. ▷금융위원회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자본시장 안정과 정상화를 위한 간담회’에서 PBR이 1배 미만인 ‘저(低)PBR 기업’을 집중 관리하겠다고 했다. PBR은 시가총액을 기업이 보유한 총자산으로 나눈 비율인데, PBR이 1을 밑돈다는 것은 기업을 청산했을 때의 가치보다 시장에서 평가받는 가치가 낮다는 뜻이다. 금융위는 ‘네이밍 앤드 셰이밍(Naming and Shaming·이름을 밝혀 망신 주기)’ 방식으로 관리하겠다고 했다. 동일 업종 기업끼리 PBR을 비교해 2개 반기 연속해 하위 20%인 기업의 명단을 반기마다 공개하고, 종목명에 ‘저PBR’ 꼬리표를 붙이는 식이다. ▷PBR이 낮은 기업에 대한 압박은 일본의 밸류업 정책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2023년 3월 일본 도쿄증권거래소는 상장기업에 ‘자본비용과 주가 의식 경영’을 요구했다. PBR 1배 미만인 기업에는 기업가치 개선 계획을 공시하도록 했다. 다음 해부터는 개선 계획을 잘 짠 기업과 그러지 못한 기업의 명단을 공개했다. 법적 제재보다는 시장의 압박을 통해 참여를 유도했다. 일본 기업들은 앞다퉈 개선 대책을 내놨고, 일본 증시는 상승세를 타면서 2024년 40,000엔 선, 지난해 말 50,000엔 선을 넘어섰다. ▷한국 기업들의 PBR은 지난해 5월까지만 해도 평균 0.8∼0.9배 수준에 머물렀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저개발 국가보다 낮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지난해 이후 기록적인 주가 상승으로 지난달 말 기준 1.6배까지 올라왔지만, 미국(5.4배) 일본(2.6배)은 물론이고 2.4배 수준인 신흥시장 평균에도 미치지 못한다. 국내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의 절반가량이 PBR 1배를 밑도는 실정이다. ▷한국 기업들의 자산 대비 주가가 유독 낮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주주환원에 소홀했고 지배구조가 취약해 기업이 돈을 벌어도 주주들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았다. 대규모 설비투자가 필요해 PBR이 낮은 제조업의 비중이 높다는 구조적 문제도 있다. 만성적인 주가 저평가 상태를 방치하는 경우는 바로잡아야겠지만, 업종별 특성과 회계 기준의 차이 등을 두루 고려해 세심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명단 공개의 목적은 단순한 기업 망신 주기가 아니라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통한 제값 찾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지난달 21일 경남 함양군에서 발생한 산불이 올해 첫 대형 산불로 번지자 주민들은 방화를 의심했다. 올해 들어서만 벌써 인근에서 여러 차례 산불이 발생해서다. 5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버섯, 약초를 캐며 지내던 60대 김모 씨가 수상쩍다고들 했다. 경찰이 폐쇄회로(CC)TV 등을 분석해 보니 발화지역 근처엔 항상 김 씨의 차량이 있었다. 그가 다녀간 뒤 2시간 정도 지나면 불길이 치솟았다. 경찰은 야산 세 곳에 불을 지른 혐의로 김 씨를 긴급 체포해 16일 구속했다. 초범이 아니었다. ‘함양 산불’은 그의 99번째 방화일 가능성이 커졌다. ▷김 씨는 과거 울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희대의 연쇄 방화범인 ‘봉대산 불다람쥐’였다. 1994년부터 2011년까지 17년 동안 울산 동구 봉대산과 마골산 일대에서 96차례나 불을 냈다. 처음엔 등산객의 실화로 여겨졌지만, 반경 3km의 좁은 범위에서 너무 자주 불이 나자 경찰은 방화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산 곳곳에 산불감시원을 매복시키고 수사 전담팀까지 꾸렸지만, 방화범은 날다람쥐처럼 유유히 빠져나갔다. 500만 원으로 시작된 현상금은 3000만 원, 1억 원을 거쳐 3억 원까지 올랐다. ▷김 씨는 매년 겨울, 특히 주말에 주로 범행을 저질렀다. 사흘 연속으로 불을 낸 적도 있고, 하루 세 곳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처음에는 주로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수준이었지만 갈수록 수법이 교묘해졌다. 두루마리 화장지를 새끼처럼 길게 꼬아 불을 붙여 ‘지연 방화’를 유도했다. 금속 너트에 성냥과 휴지를 묶어 불을 붙인 뒤 멀리 던지는 수법도 썼다. 산불 감시 상황을 확인하려 산불감시원들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미궁에 빠진 범행은 2011년 3월 꼬리가 밟혔다. 아파트 단지 CCTV에서 흔적이 발견됐다. 잡고 보니 방화범 김 씨는 방화 지점에서 500m 떨어진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울산의 한 대기업에 다니던 50대 가장이었다. 가정불화와 금전 문제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방화를 저질렀다고 했다. 김 씨는 37차례 불을 낸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산불방화죄 공소시효가 7년이어서 2005년 이후 범행만 기소됐다. ▷출소 후 5년 만에 다시 불을 지른 김 씨는 “최근 뉴스에서 산불 소식을 보고 희열을 느껴 충동을 참지 못했다”고 했다. 10년을 복역하고도 가슴속 뒤틀린 불길이 꺼지지 않은 것이다. 그의 잘못된 선택에 축구장(7140m²) 328개 면적인 산림 234ha가 피해를 입었다. 방화는 유독 재범률이 높다. 지난해 경기 의정부의 한 오피스텔에서 불을 지른 60대는 방화미수 혐의로 복역한 후 출소 하루 만에 범행을 저질렀다. 방화 범죄에 대한 강력한 처벌은 물론이고 재범을 막기 위한 특별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현실 법정은 드라마보다 지루하다. ‘존경하는 재판장님’으로 시작하는 화려한 변론도 없고, 판을 뒤엎는 반전의 증인도 없다. 현실의 주주총회도 재벌 드라마에서처럼 긴박하진 않다. 치열한 지분 싸움, 예상치 못한 폭로전 등은 보기 어렵다. 상장사들의 주총 소요 시간은 평균 30분 남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번 주부터 줄줄이 열리는 올해 주총은 다를 것 같다. 소액주주들의 권한을 강화한 세 차례의 상법 개정안이 통과된 이후 열리는 첫 주총 시즌이기 때문이다. 올해 주총을 앞둔 기업들은 소액주주들의 눈치를 살피며 바짝 몸을 낮추고 있다. 지난해 1차 상법 개정으로 기업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기존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이사의 보수 한도 승인’ 같은 것은 별다른 설명 없이 통과되던 형식적 안건이었지만 올해는 달라졌다. 기업들은 수백에서 수천 자 분량의 자료를 공개하며 보수 산정 기준이 뭔지, 왜 올려야 하는지 주주들에게 구체적으로 밝히기 시작했다.힘세진 소액주주, 몸 낮춘 기업들 배당 확대 요구 정도에 그치던 주주 제안도 더 구체적이고 집요하게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팰리서캐피털, 얼라인파트너스 등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들은 이미 주요 상장사를 대상으로 주주 환원 강화와 이사회 개편 등을 요구하는 주주 제안서를 발송했다. 소액주주들도 온라인을 통해 지분을 결집하고 행동주의 펀드와 연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 대응해 기업들은 현금 배당을 확대하고 자사주를 소각하는 등 선제적으로 주주 환원 강화에 나섰다. 기업들은 이사회의 결정이 주주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주주들에게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 과거처럼 형식적 질의응답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 없다. 기업들은 9월 시행되는 2차 개정 상법에 대응하기 위해 경영권 보호의 방벽도 쌓고 있다. 이사회 규모를 줄이거나 이사의 임기를 바꾸는 것이 대표적이다. ‘집중투표제’에 대비한 포석이다. 주식 1주당 선임할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면, 소액주주들이 특정 후보에게 몰표를 던져 자신들을 대변하는 후보를 이사회에 진입시킬 수 있다. 그런데 한 번에 선임하는 이사 수가 줄면 ‘표 몰아주기’의 효과가 반감된다. 이사 임기 규정을 ‘3년’에서 ‘3년 이내’로 바꾸는 것도 퇴임 시점을 분산해 한 번에 뽑는 이사 수를 줄이려는 목적이다. 이사회 진입 장벽을 높이려는 기업들의 시도에 대해 일각에선 비판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대주주에 맞서 이사회와 감사위원회의 독립성을 높이려는 개정 상법의 취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시도란 것이다. 국민연금은 상법 개정 취지에 반하는 안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서고 있다.반대로 기운 저울에 뭘 올려놓을지 하지만 기업들의 이런 움직임을 우회나 회피 전략으로 몰아붙이기는 어렵다. 적대적 인수합병(M&A) 등에 맞설 유일한 대안인 자사주 카드를 잃어버린 기업들로선 마땅한 대응책이 없기 때문이다. 1차 상법 개정 때부터 논의되던 배임죄 폐지는 아직 기약도 없고, 차등의결권이나 황금주 등 경영권 방어 장치도 보이지 않는다. 기업들은 외풍에 견디기 위해 수비 라인을 내리고 잔뜩 움츠리고 있다. 이런 자세론 골은 안 먹을지 몰라도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하긴 어렵다. 상법 개정은 대주주 쪽으로 치우친 균형을 바로잡는다는 의의가 있다. 이번 주총을 앞둔 기업들의 투명성 강화, 주주 환원 노력은 상법 개정의 순기능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균형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중심을 잡는 동태적 개념이다. 한쪽에 한꺼번에 세 개의 추를 올렸으니 반대쪽으로 기울어졌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한다. 개정 상법이 자본시장 선진화의 계기가 될지 아니면 기업 경영의 족쇄가 될지 이번 주총을 통해 저울 눈금을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한국 반도체 인재들이여, 테슬라로 오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태극기 이모티콘 16개를 주르륵 올렸다. 그는 “만약 당신이 한국에 있고 반도체 설계와 제조 또는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면 테슬라에 합류하라”고 했다. 머스크 CEO가 자사 채용공고를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건 처음이 아니지만, 특정 국가와 업무 분야를 꼭 찍어 공개적으로 러브콜을 보낸 것은 이례적이다. ▷15일 테슬라코리아는 “세계 최고 수준의 대량 생산 AI 칩 개발에 함께할 인재를 찾는다”며 AI 칩 설계 엔지니어 채용공고를 냈다. ‘향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생산량을 기록할 AI 칩 아키텍처 개발’을 목표로 제시했다. 자율주행, 휴머노이드 로봇(옵티머스) 등을 차세대 성장엔진으로 삼은 테슬라는 엔비디아 제품 의존도를 낮추고 자체 AI 반도체를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머스크 CEO는 지난달 “AI 칩이 없으면 ‘옵티머스’는 ‘오즈의 마법사’ 속 깡통 인간처럼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했다. ▷설계를 넘어 제조 역량까지 확보하는 ‘반도체 독립’ 의지도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머스크 CEO는 지난달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삼성전자와 TSMC 등 주요 공급 업체의 생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며 자체 생산시설인 ‘테라팹’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로직 반도체뿐만 아니라 메모리, 패키징 공정까지 모두 아우르는 미국 내 거대 생산시설이다. 이를 위해 설계, 메모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 반도체 분야 전반에 걸쳐 인재가 풍부한 한국을 우선적으로 노리는 것으로 보인다. ▷테슬라뿐만 아니라 엔비디아, 구글 등 빅테크들도 한국 인재 확보에 혈안이다. 한국이 강점을 보이는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성능 메모리가 AI 시대의 핵심으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출신 경력직을 웃돈을 주고 찾는 것은 물론이고, 대졸 신입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은 지난해 12월 서울대와 고려대 등 주요 대학을 찾아 현장에서 곧장 인재를 채용하기도 했다. 마이크론의 사업부 내에선 한국어로 내부 회의가 가능할 정도란 얘기까지 나온다. ▷한국 기술인재들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건 반갑지만, AI 시대의 핵심 경쟁력인 인재를 넘겨주는 것은 뼈아픈 손실이다. 이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도 수성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보상만으론 빅테크와 경쟁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과학기술자를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 연구 인프라 개선 등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만으론 인재들을 지켜내기 어렵게 됐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올해도 멋진 라이벌로 함께 달릴 수 있어 기쁘다.” 2일 동아일보 등 국내 주요 일간지에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그룹 회장이 현대자동차의 레이싱카 옆에서 ‘엄지 척’을 한 사진이 담긴 광고가 실렸다. 도요다 회장은 “라이벌과 경쟁하며 느끼는 분함과 기쁨이 서로 더 좋은 차를 만드는 원동력”이라며 현대차를 치켜세웠다. 지난해 12월 도요타 레이싱팀이 ‘국제자동차연맹(FIA) 월드랠리챔피언십(WRC)’에서 3관왕을 달성하자 현대차가 축하 광고를 낸 데 대한 답례 성격이었다.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두 자동차 업체는 2024년부터 모터스포츠를 매개로 우정을 쌓아 오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도요다 회장은 2024년 10월과 11월 경기 용인과 일본 도요타시에서 각각 열린 레이싱 대회에서 거푸 만나 공감대를 나눴다. 그해 현대 월드랠리팀이 WRC 드라이버 부문에서 우승하자 도요타가 일본 현지 광고로 응원과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고, 지난해 12월엔 현대차가 도요타의 우승을 축하하며 주거니 받거니 덕담을 이어갔다. ▷과거 현대차에 도요타는 ‘타도’, ‘추격’의 대상이었다. ‘도요타를 배우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전교 1등의 공부법을 따라 하듯 현대차의 마케팅 전략도 도요타를 빼다 박았다. 도요타는 1980년대 미국 시장조사업체 JD파워 품질조사 성적에 집중해 품질에서 인정을 받은 뒤 1990년대 브랜드 파워를 키워 프리미엄 브랜드 ‘렉서스’를 출시했는데 20여 년 간격으로 현대차가 그 길을 따라갔다. 현대차가 하이브리드차를 개발할 땐 “도요타가 했는데 우리도 할 수 있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반면 도요타는 현대차를 몇 수 아래로 봤다. 2004년 JD파워 품질 조사에서 쏘나타가 캠리를 이기자 “(개가 사람을 문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개를 물었다”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로 현대차에 진 것을 이례적 사건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현대차가 1등 도요타를 무섭게 추격하는 3등으로 급성장하자 이젠 도요타가 현대차 배우기에 나설 정도가 됐다. 2024년 도요다 회장이 WRC 최종전에서 현대 레이싱팀에 대해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라고 했는데 단지 모터스포츠만 염두에 둔 말은 아니었다. ▷두 회사는 비슷한 점이 많다. 현대차는 3대째, 도요타는 4대째 가업을 이어가며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내연기관부터 하이브리드, 전기차, 수소차까지 고른 라인업을 갖춘 회사도 전 세계에 둘뿐이다. 중국 차의 거센 공세에 맞서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최근 두 회사가 서킷 위 경쟁을 넘어 수소, 로봇 등 미래 모빌리티 분야에서 손을 잡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의의 라이벌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다. 두 회사가 경쟁과 협력을 통해 미래 시장을 함께 선도하길 기대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공무원에게 퇴근 시간이 어디 있나.” 이달 초 공개된 이재명 대통령의 청와대 시무식 발언을 들은 공무원들은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동네에 불이 났는데,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아, 나 퇴근했네, 휴일이네’ 그런 게 어디 있냐”라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충분히 지급하겠지만 공직자는 24시간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직자들의 사명감을 강조한 말이지만 대통령의 이 발언 속에 노동 개혁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이 몰릴 때는 제대로 하고, 이후에 충분한 휴식이나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근로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다. 공직과 민간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공직은 국민을 위해 무한 봉사해야 하는 성직이고, 민간 기업은 받은 만큼만 해주면 되는 싸늘한 계약관계로 나눌 순 없다.‘전쟁’ 중에도 땡 하면 퇴근하는 韓“불났는데 퇴근이 어디 있냐”는 자세는 민간 기업에도 꼭 필요하다. 1999년 대만을 강타한 ‘9·21 대지진’ 당시 TSMC 공장이 있던 신주과학단지는 들어가려는 차로 길이 막혔다.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공장 복구를 위해 달려간 것이다. 공장이 장기간 멈출 것이란 우려가 컸지만 2주 만에 정상 가동됐고, 고객사들의 신뢰를 굳혔다. 망설임 없이 회사로 달려가는 문화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업에 대한 사명감, 그리고 자신의 헌신이 보상받을 것이란 믿음이 쌓였기에 가능했다. 한국 기업에선 이런 모습을 찾기 힘들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 ‘군인’들은 시계를 보다가 땡 하면 총을 내려놓는다.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획일적인 주 52시간 규제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연구개발(R&D) 분야만이라도 예외를 허용해달라는 호소는 대답 없는 메아리로 남았다. 3교대로 24시간 불을 밝히는 TSMC의 ‘나이트호크 프로젝트’나 007(24시간, 7일) 근무를 불사하는 중국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근로시간 규제의 예외를 폭넓게 인정하는 다른 선진국들만큼이라도 할 순 없는 걸까. 이 대통령도 경직된 근로시간의 문제점과 고용 유연성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한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 대표 시절인 지난해 2월 토론회에서 “특정 산업의 연구개발 분야 고소득 전문가들이 동의할 경우 예외로 몰아서 일하게 해주자는 게 왜 안 되냐고 하니 (나도) 할 말이 없더라”라고 했다. 지난해 10월 유연근무 확대를 요구하는 게임업계에 “탄력적인 노동시간 운영에는 양면이 있다”며 지혜로운 해결을 주문했다. 하지만 주 52시간 규제를 무력화할 것이라는 양대 노총 등 노동계의 반발에 이후 논의는 쑥 들어갔다.제대로 일하고 보상받는 게 노동개혁 물론 근로시간 개편에는 충분한 휴식이나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지난 정부가 추진했던 근로시간 개편은 ‘주 69시간 근로’ 프레임에 걸려 좌절됐는데, 노사관계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 한몫했다. 지금도 포괄임금제에 묶여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있는데 ‘공짜 야근’이 더 늘어날 것이란 우려가 컸다. 건강권 보호를 내세워 근로시간 개편 논의를 아예 봉쇄하기보다는 함께 머리를 맞대 효율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현 정부의 노동 개혁은 ‘시간’에 매몰돼 있다. 2030년까지 실근로시간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연 1700시간대로 단축하는 게 목표다. 하지만 근로시간 단축은 목표가 아닌 생산성 높은 방식으로 일한 결과여야 한다. 업무의 밀도와 효율성을 높이는 쪽으로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근무 시간만 채우면 포인트 쌓듯 해마다 연봉이 높아지는 호봉제 대신 성과 중심의 평가와 보상체계를 확대해야 한다. 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이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해야 일이 굴러가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지난해 1월 뉴욕포스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소를 머금고 지시봉으로 서반구 지도를 가리키는 그림을 1면에 큼지막하게 실었다. 캐나다 위에 붉은 글씨로 가위표를 치고 ‘51번째 주’라고 새로 썼다. 덴마크령 그린란드는 ‘아워 랜드(우리 땅)’, 멕시코만(灣)은 ‘아메리카만’, 파나마 운하는 ‘파나-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하가 됐다. 당시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허풍에 대한 풍자로 읽혔지만 베네수엘라 사태가 터진 지금은 웃고 넘길 수 없게 됐다. ▷3일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압송한 ‘확고한 결의’ 작전 직후 미국 백악관 공식 인스타그램엔 트럼프 대통령의 흑백사진과 함께 ‘FAFO’라는 짤막한 글이 올라왔다. ‘까불면 죽는다’는 뜻이다. 베네수엘라를 친 진짜 이유도 밝혔다. 1년 6개월 안에 미국 회사들을 통해 베네수엘라 석유산업을 재건할 수 있다며 “유가를 낮게 유지할 수 있어 미국에 좋은 것”이라고 했다. ▷다른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개입도 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콜롬비아에 대해 “코카인을 제조해 미국에 파는 걸 즐기는 역겨운 남자가 통치하는 나라”라며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라고 했다. 군사작전을 할 거냐는 질문엔 “괜찮게 들린다”고 했다. 쿠바는 “그냥 무너질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마약·이민자의 유입을 차단하고, 천연자원 확보 등 경제적 이득을 취하면서 중남미를 탐내는 중국, 러시아엔 경고를 보낸 것이다. 미국 정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에는 ‘서반구에서 미국의 우위 회복’이 ‘트럼프 수정조항’이라는 이름으로 들어 있다. ▷덴마크령 그린란드에 대한 욕심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4일 “그린란드 도처에 러시아와 중국 선박이 깔려 있다”며 “국가 안보 관점에서 그린란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5일 스티븐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은 “누구도 미국과 군사적으로 싸울 순 없을 것”이라며 “세상은 힘과 권력이 지배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린란드는 유럽과 아시아, 북미를 잇는 최단 항로이자 희토류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보물섬’이 탐난다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 멤버이자 오랜 동맹의 영토를 뺏겠다는 노골적 선언에 유럽이 아연실색하고 있다. ▷미국이 중남미를 ‘근외(近外·near abroad)’로 여기며 장악에 나서면서 중국과 러시아 역시 들썩일 것이란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과 마찬가지 논리로 중국이 대만을, 러시아가 옛 소련 지역을 공격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국 이익을 위해 힘자랑에 나선 미국의 행보가 세계 정세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시대가 다시 왔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던 보험사의 화끈한 말은 보험금 청구를 할 땐 싸늘하게 바뀌곤 한다. 사전고지 의무를 위반했다느니, 별도 특약이라느니 깨알 같은 약관엔 보험금을 줄 수 없는 이유만 빼곡하다. ‘무조건 보장’이란 말을 믿었기에 더 쓰라리다. 요즘 반도체 기업들의 심정이 딱 이렇다. 틈만 나면 반도체가 나라의 미래라며 파격적으로 지원하겠다던 정부와 정치권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발목을 잡는다.앞으론 파격 지원, 뒤로는 발목 잡기 일주일 전 SK하이닉스는 ‘반도체 공장 투자 관련 설명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반도체 분야에 한해 지주회사 규제를 완화하는 정부 방안이 특혜가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해명했다. 당초 이재명 대통령은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첨단 산업에 자금 조달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금산분리 완화를 언급했는데, 공정거래위원장이 “몇몇 회사의 민원 때문에 금산분리 원칙을 훼손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하면서 엉뚱하게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 의혹으로 불똥이 튀었다. 결국 기업이 나서 기존의 자금 조달 방식으론 투자 재원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대국민 설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국가 전략 프로젝트라며 정부와 정치권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던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클러스터)를 흔드는 손도 많아졌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라디오 방송에서 “꼭 거기에 있어야 할지”라는 발언으로 불을 세게 지폈다.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장인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새만금 이전을 주장하며 맞장구를 쳤다. 시민단체 등이 제기한 용인 산단 승인처분 취소 소송에도 정치권이 개입해 화력을 보태고 있다.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반도체 전리품을 챙기려는 지역 정치권의 이전투구가 가열될까 걱정이다. 숙원 법안이던 ‘반도체 특별법’은 결국 또 해를 넘겼다. 2024년 22대 국회가 문을 열 때부터 여야 모두 한목소리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지만 연구개발(R&D) 인력의 ‘주 52시간 근로 예외’ 조항 적용을 놓고 다투다가 1년 넘게 시간을 허비했다. 결국 핵심 쟁점을 뺀 반쪽짜리 법안을 통과시키기로 여야가 합의했지만 그마저도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정부는 비(非)수도권의 반도체 R&D 인력에 대해선 근로시간 규제 완화를 검토할 수 있다며 지역균형발전과 엮어 보려고 한다. 시험 잘 치라고 응원한다면서 밤엔 공부하지 말라고 강제 소등시키니 수험생은 속이 타들어 갈 수밖에 없다.전쟁을 하는 건지 전쟁놀이를 하잔 건지 우리가 입으로만 파격적 지원을 외치는 동안 해외 각국은 립서비스가 아닌 진짜 지원을 하고 있다. 공장 건설 발표부터 가동까지 불과 28개월 만에 끝낸 일본 구마모토의 TSMC 파운드리 공장이야말로 파격이다. 외국 회사의 공장을 건설하는 비용의 절반을 댄 일본 정부의 조치가 파격적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소리를 들어 가며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 반도체 자립에 다가선 중국 정부의 지원이 전폭적이다. 지난해 12월 10일 대통령 주재로 열린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는 전쟁 작전 회의 같은 분위기였다. 서부전선(중국), 동부전선(미국), 아군의 전력 열세 등의 용어를 쏟아내며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 철저하게 대비하겠다고 강조했다. 이게 실제 전쟁이라면 한국의 전비 태세는 암울하다. 지휘부는 입으로만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여론은 적전분열 상태인 데다 보급마저 시원찮다. 세계는 밤새워 불을 밝히며 덤벼드는데 우리는 균형발전과 건강권을 강조하며 ‘군자는 기습하지 않는다’는 송양공 식의 전쟁을 하고 있다. 한국에 유일하게 남은 초격차 산업인 반도체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는데 왜 이리 한가한가. 전쟁이 아닌 전쟁놀이만 하고 있는 것 같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잘 모르는 청년들에 대한 노동 착취 수단이 되고 있다고 하더라.” 이재명 대통령은 11일 고용노동부 업무보고에서 한 제도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다. “제도 자체의 남용 여지가 너무 크지 않나” “대체적으로 노동자에게 불이익하지 않나”라고 꼬집었다. 이 대통령이 지적한 제도는 ‘공짜 야근’의 주범으로 꼽혀 온 포괄임금제다. 1974년 대법원 판례로 인정돼 산업 현장에서 적용해 왔는데, 52년 만에 정부가 포괄임금제를 대폭 손질하기로 했다. ▷30일 고용부와 ‘실노동시간 단축 로드맵 추진단’은 포괄임금제 오남용을 막기 위해 내년 상반기 중 근로기준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다. 포괄임금제는 실제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연장·야간·휴일근로 수당을 사전에 정해 지급하는 방식이다. 연구개발직, 사무직, 영업직 등 근로시간을 정확히 측정·관리하기 어려운 직군에서 많이 활용해 왔다. 하지만 약정한 시간보다 일을 더 해도 추가 보상을 받기 어려워 장시간 노동, 공짜 야근을 유발하는 제도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7월 한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근무하다 사망한 20대 근로자는 주 80시간가량 근무했는데, 포괄임금제를 적용받은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됐다. ▷노동부는 근로자의 동의가 있고, 근로자에게 불리하지 않은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포괄임금제를 허용하겠다고 했다. 또 정확한 법정 수당의 산정을 위해 출퇴근 시간 기록을 의무화하는 등 근로시간을 명확하게 측정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기업들의 근태 관리가 지금보다 엄격해져 기존에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흡연·커피 시간, 대기 시간 등을 근로시간에서 제외하는 등 노사 갈등이 생길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회사가 근로시간을 제대로 측정하겠다며 폐쇄회로(CC)TV나 마우스 감시 프로그램 등을 설치해 논란을 빚은 경우도 있다. ▷고정수당이 폐지되고 실근로시간이 단축되면 연장근로 수당 등이 줄어들어 근로자 소득이 감소할 우려도 있다. 디지털 전환과 플랫폼 노동의 확산으로 업무의 질을 시간으로 측정하기 힘든 시대적 변화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중소기업들은 행정비용 상승을 우려한다. 예외 규정을 구체화하고 근로시간 관리 시스템을 지원하는 등 보완책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공짜 야근’으로 대표되는 고질적인 장시간 노동을 해소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줄어드는 근로시간을 시장 상황에 맞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유연성도 뒤따라야 한다. 유연근무제 확대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고연봉 관리·전문직 근로시간 규제 적용 제외)’ 등을 함께 논의할 필요가 있다. 노동개혁의 목적은 단지 적게 일하자는 게 아니라 생산성을 높여 적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이 돼야 할 것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해마다 3월이면 어느 임원이 얼마를 받았다더라, 누가 ‘업계 연봉킹’이라더라는 기사가 쏟아진다. 사업보고서에 임원 보수 총액과 1인당 평균 보수, 5억 원 이상 받은 임원을 공개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임원 평균 연봉 1위는 삼성전자로 6억7000만 원이었다. 수십억, 수백억 원을 받는 최고경영자(CEO)들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다. 임원이 아닌 ‘단순 실무자’에게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36억 원)만큼의 보수를 안긴 인심 좋은 회사도 있다. 바로 쿠팡이다. ▷쿠팡이 ‘단순 실무자’라 주장하는 이 행운의 직원은 김범석 쿠팡Inc 의장의 동생 김유석 씨다. 쿠팡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보고서를 보면 김 씨는 2021년부터 4년 동안 152만 달러(약 22억 원)의 보수를 받았다. 현 주가 기준으로 118억 원에 이르는 양도제한 조건부 주식(RSU)까지 포함하면 4년간 140억 원에 이른다. 김 씨는 지난해 급여와 주식을 합쳐 32억 원을 받았는데 별도 보상 없이 급여 30억 원을 받은 형보다 더 많이 수령했다. ▷김 씨는 미국 본사 소속으로 직위는 ‘Vice President’다. 통상 ‘C레벨’인 한국의 ‘부사장’보단 위상이 떨어지지만 단순한 실무자로 보기는 어렵다. 김 씨는 파견 형식으로 국내에서 쿠팡 배송캠프 관리 부문 총괄로 근무하고 있는데 임원급 직위다. 2021년 한국 법인 의장직과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며 한국 사업과의 법적 연결고리를 끊은 김 의장이 동생을 통해 한국 법인의 경영을 컨트롤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쿠팡이 김 씨를 실무자로 포장하려는 것은 김 의장이 공정거래법상 동일인(기업 총수)으로 지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기업 총수에서 빠지면 일감 몰아주기 규제, 친인척 자료 제출 등 법적 의무에서 자유로워진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김 의장이 미국 국적이고 국내 지분이 없으며 친족이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며 쿠팡을 ‘총수 없는 대기업’으로 분류해 왔다. 김유석 씨의 보수와 직위를 볼 때 경영 참여 가능성이 높은 만큼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불리하면 ‘미국 기업’이 되는 쿠팡은 한국적 정서와는 동떨어진 행보를 보여왔다. 개인정보 유출을 홀로 ‘노출’이라고 했고, 청문회에 출석한 미국인 대표는 “김범석 어디 있냐”는 질문에 “Happy to here(이 자리에 오게 돼 기쁘다)”라고 했다. 29일 쿠팡은 피해 고객 1인당 5만 원의 쿠폰 보상안을 제시했다. 쇼핑과 배달은 각 5000원씩 할인되고, 나머지 4만 원은 여행·명품에 배정돼 보상이 아닌 신종 마케팅이란 지적을 받았다. 한국을 잘 모르고 한국인을 무시하는 기업이 한국에서 사업을 계속해도 되는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가습기 살균제 피해 참사는 착한 사람일수록 손해를 본다는 불편한 진실을 일깨워 줬다. 임신한 아내, 사랑스러운 아이, 편찮으신 부모님의 호흡기 건강을 위해 매일 가습기를 틀었다. 세균·곰팡이 번식을 막기 위해 꼼꼼히 청소하면서 살균제도 잊지 않았다. 그땐 미처 몰랐다. 가족을 생각하는 극진한 마음이 죽음의 수증기가 되어 가족의 폐를 완전히 망가뜨릴 줄은…. 내 손으로 독극물을 전파했다는 죄책감에 피해자 가족들은 무한 감옥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극은 당신 때문이 아니라고, 국가에도 책임이 있다고 처음으로 정부가 인정했다. 24일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사회적 참사’로 공식 규정했다. ‘참사의 공동 책임자’로서 정부가 배상을 비롯한 피해 구제를 주도하겠다고 했다. 피해 사실이 확인된 2011년 이후 14년 만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24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모든 피해자와 유가족들께 머리 숙여 애도와 위로를 전한다”며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근본적으로 점검하겠다”고 했다. ▷‘조용한 살인자’가 된 가습기 살균제는 1994년 처음 등장했다. 제대로 된 안전성 검사도 없이 기업들은 ‘인체에 무해하다’며 앞다퉈 제품을 출시했고, 정부는 ‘세계 최초의 창의적 제품’이라며 KC마크까지 달아줬다. 2000년대 들어 기침 등 이상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이 늘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011년 임신부들의 ‘원인 미상 폐 질환’이 집단 발생한 후에야 역학조사 결과 가습기 살균제와 폐 손상의 인과관계가 처음 확인됐다. 현재까지 공식 피해자는 5942명, 사망자는 1382명에 이르는데 미신고 사례 등을 포함하면 실제 피해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된다. ▷원인이 밝혀졌지만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피해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힘들고 긴 법적 다툼을 견뎌야 했다. 2012년 국가와 제조·판매업체 등을 상대로 첫 집단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기업들의 사과와 보상 약속은 사건이 본격화된 지 5년이 지난 2016년에야 나왔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2023년 대법원은 제조·판매업체의 손해배상 책임을 처음 인정했고, 지난해 6월엔 국가 배상 책임까지 받아들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사회적 참사’로 인정한 정부는 손해배상 책임을 기업과 국가로 넓히기로 했다. 치료비뿐만 아니라 사고로 장래 벌 수 있었던 소득을 잃은 손해와 위자료도 지급하고 학업, 병역, 취업 등 생애 전 주기에 걸쳐 피해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적절한 배상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등 남은 숙제가 많다.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사회적 참사 피해자들의 눈물을 정부가 제대로 닦아 주길 기대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금리 없는 나라’ 일본이 ‘정상국가’로 돌아왔다. 일본의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은 19일 단기 정책금리(기준금리)를 0.5%에서 0.75%로 인상했다. 겨우 0.25%포인트 올렸을 뿐이고 절대 수치도 낮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미는 남다르다. 1995년 9월 이후 한 번도 넘어서지 못한 ‘0.5%의 벽’을 30년 만에 뚫은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 질서와 세계 자금시장의 흐름이 요동치는 신호가 될 수도 있다. ▷일본은 1990년대 초 자산버블 붕괴 이후 장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오랫동안 초저금리 기조를 이어갔다. 2016년부턴 제로금리를 넘어 이자는커녕 수수료를 내며 돈을 맡겨야 하는 ‘마이너스 금리’ 시대로 접어들었다. 물가와 임금이 오르며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면서 지난해 3월 마이너스 금리를 종료하고 금리 정상화를 선언했다. 지난해 7월 0.25%, 올 1월 0.5%로 금리를 올렸다. 이후 미국의 관세 정책 등을 고려해 동결을 이어가다가 경기에 끼치는 영향이 예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추가 인상에 나섰다. ▷일본이 초저금리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전 세계 자산시장의 자금줄 역할을 해 온 ‘엔화 빚투’는 타격을 받게 됐다. 싼 이자로 엔화를 빌려 해외 고수익 자산에 투자했던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회수(청산)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전체 엔 캐리 자금은 506조 엔(약 4800조 원)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 6.5%인 32조7000억 엔(약 300조 원)이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7월 말 일본은행이 깜짝 금리를 인상하고 추가 인상을 시사하자 세계 주식시장이 동반 폭락하며 ‘검은 월요일’ 충격에 휩싸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일본 닛케이225지수는 하루 만에 12.4% 빠졌고 코스피도 8.8% 급락했다. ▷구조적 약세를 벗어나지 못하던 엔화가 금리 인상으로 강세로 돌아서면 원화 환율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최근 원화가 엔화와 함께 약세를 보이는 동조화 현상을 강하게 보여온 만큼 엔화 약세가 멈추면 원화 가치도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나온다. 반면 엔 캐리 자금의 이탈로 주식시장에서 외국인이 급격히 빠져나갈 경우 환율 상승(원화 가치 하락)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일본이 금리 인상을 발표한 19일 코스피는 오히려 상승세를 보이는 등 증시와 환시는 대체로 평온했다. 이미 시장에선 금리 인상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인들의 엔화 대출 규모가 지난해부터 상당 부분 줄어들어 있어 급격한 자금 이동은 없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금융시장 급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면밀히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여당 의원과 대통령실 비서관 사이에 오간 ‘청탁 문자’는 현 정부에서 먹히는 인사 청탁의 패스트트랙을 제시했다. 먼저 우리 학교와 우리 캠프, 즉 ‘우리 편’임을 강조한다. 경력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지만 어쨌든 차순위다. 에둘러 갈 필요 없이 가능하면 대통령실을 직접 찌르는게 좋다. 자리는 공공이든 민간이든 상관없다. 민간기관장 인사 청탁을 받은 대통령실 비서관은 “이러시면 안 되는데” 같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네 형님, 추천할게요”라고 답했다. 민간기업들의 단체장까지 청탁이 오가는데 공공기관 인사에선 더 많은 거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건 합리적 의심이다. 331개 공공기관 가운데 현 정부 들어 임명된 기관장은 한국산업은행장과 한국수출입은행장 두 명뿐이다. 앞으로 에너지, 금융, 복지, 주택 등의 분야에서 기관장 인사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과거 정부완 다르다고 주장하려면 말이 아닌 결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정치권 내정설’ 이번에도 반복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공공기관 인사를 보면 달라진 모습을 찾기 힘들다. 민간기업이지만 민영화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 외풍에 시달렸던 KT의 경우 차기 사장 인선에서도 정치권 낙하산과 내부 카르텔 논란이 반복되고 있다. 33명이 지원한 사장 공모는 9일 3명으로 압축됐는데, 문재인 정부 청와대 경제보좌관 출신이자 현 정부에서 국정기획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한 후보가 들어 있다. 역시 사장 선임 절차가 진행 중인 예금보험공사에서도 이재명 대통령의 사법시험 동기이자 과거 이 대통령의 변호인단으로 활동한 인사가 최종 후보군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가스공사 사장도 보수정당 출신이었다가 지난 대선 때 여당으로 말을 갈아 탄 전직 국회의원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나돈다. 공기업 사장은 공모를 통해 임원추천위원회가 복수 후보를 추리고 기획재정부 공공기관운영위원회와 장관 제청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하지만 요식 행위일 뿐 공모 단계부터 내정설이 파다했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교통정리 차원에서 그 어느 때보다 낙하산이 설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난달 정부가 공무원 인사 제도로 공식 도입한 ‘국민추천제’도 인사 청탁의 루트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선출직을 제외한 정무직, 공공기관 임원, 행정기관 소속 위원회의 민간위원, 국가공무원 중 개방형 직위까지 폭넓게 추천할 수 있는데 측근들을 활용한 ‘셀프 추천’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6월 정부가 장차관 후보에 대해 국민 추천을 받자 일부 국회의원이 보좌관을 동원해 단체 대화방에 ‘의원님을 장관으로 추천해 달라’고 했다가 논란을 빚기도 했다. 후보를 내려 꽂는 입장에서도 ‘윗선의 뜻’이 아닌 ‘국민의 뜻’이라고 포장하기 쉬워졌다.‘낙하산 방지법’부터 만들어야 낙하산 부대의 공습이 예고되고 있지만 공공기관장 자격 요건을 강화하고 선임 절차의 투명성을 높이는 ‘낙하산 방지법’은 하세월이다. 공공기관장을 하려면 해당 분야에서 5년 이상 전문 업무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낙하산 방지법이 제19대 국회부터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번번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여당은 공공기관장과 대통령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알박기 방지법’에만 관심이 쏠려 있을 뿐이다. 청탁 문자에 대해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내부 감찰 결과 청탁이 대통령실 내부에 전달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배송 오류일 뿐이지 청탁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이번 기회에 정부의 인사 시스템에 대한 철저한 재점검과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 이번 일의 교훈이 ‘다신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가 아니라 ‘좀 더 조심해 다신 들키지 말아야겠다’가 돼선 안 될 것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불가능에 도전해 왔던 한국 경제의 역사 속에서 조선업만 한 ‘맨땅의 헤딩’도 없었다. 1970년대 초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와 조선소가 들어설 울산 미포만 모래사장 사진을 들고 투자자들과 선주들을 설득한 일화는 유명하다. 1974년 맨몸으로 만들어낸 유조선 1척이 51년 만에 5000척이 됐다. 조선 역사가 긴 유럽과 일본의 어떤 회사도, 2000년대 이후 물량 공세에 나선 중국의 국영회사들도 해내지 못한 세계 최초의 금자탑이다. ▷HD현대는 19일 울산 HD현대중공업에서 ‘선박 5000척 인도 기념식’을 열었다. 딱 5000번째로 넘긴 선박은 필리핀 초계함 ‘디에고 실랑’이었다. 그동안 HD현대가 건조한 선박은 총 68개국 700여 개 선주사에 납품됐다. 선박들의 길이를 평균 250m로 잡고 5000척을 일렬로 늘어놓으면 총 길이가 1250km에 달한다. 서울에서 일본 도쿄까지의 직선거리(약 1150km)보다 길다. 수직으로 세우면 8848m 에베레스트산 높이의 141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전설의 시작은 1971년 정 회장이 그리스에서 수주한 26만 t급 초대형 유조선이었다. 조선소도 없는 상황에서 조선소와 유조선을 동시에 짓는 불가능한 시도였다. 하지만 1974년 6월 28일 울산조선소 준공과 함께 유조선을 성공적으로 물에 띄웠다. 건조 기간 동안 다섯 차례나 사양을 변경할 정도로 까다로웠던 그리스 선주는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 가장 잘 만들어진 배”라고 칭찬했다. 가칭 ‘7301호선’이던 배에 고 육영수 여사가 ‘애틀랜틱 배런(대서양의 남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첫 항해에 성공한 HD현대는 이후 새로운 역사를 계속 써내려 갔다. 1980년 최초의 국산 전투함 ‘울산함’을 건조하며 K-방산의 시작을 알렸고, 1983년 선박 건조량 기준 세계 1위에 올라섰다. 이후 글로벌 조선 수요가 컨테이너선, 액화천연가스(LNG) 수송선, 친환경 선박 등으로 변화할 때마다 HD현대는 시장을 선도하며 선두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 선박 등 미래 해양 혁신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HD현대의 첫 배가 인도된 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조선입국(造船立國)’ 휘호는 현실이 됐다. 수출 한국의 최전선에서 활약해 왔을 뿐 아니라 최근엔 ‘마스가(MASGA) 프로젝트’를 통해 한미 동맹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50여 년 전 500원짜리 지폐의 거북선 그림은 금빛 거북선 모형으로 바뀌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과거 50년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50년도 ‘K-조선’이 한국 경제 앞에 놓인 거친 파도를 헤치고 힘찬 항해를 이어가길 기대한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한국 노동계에 11월은 각별한 달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절규와 함께 분신한 날이 1970년 11월 13일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의 생일도 이때다. 1995년 11월 둘째 주 토요일이던 11일 창립대의원대회를 열고 공식 출범했다. 다음 날인 11월 12일 서울 여의도광장을 가득 메운 7만 명의 노동자·시민들이 노동운동의 새 역사를 선언했다. 피날레는 노동운동의 대표곡 ‘철의 노동자’ 합창이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촉발된 민주노조 운동을 이어받은 민주노총은 30년 동안 양적으로 크게 팽창했다. 출범 당시 41만6000명이던 조합원은 지난해 106만 명으로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법외단체로 출발했지만 1999년 합법단체가 됐고, 지금은 한국노총과 함께 제1노총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하지만 질적 성장은 더디다. 연대와 책임의 열사 정신은 잘 보이지 않는다.‘낙수효과’ 주장하는 그들만의 운동 민주노총의 주력은 여전히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정규직, 중장년층 조합원이다. 노동운동 초기에는 조직화가 용이한 대기업 공장이 투쟁을 선도했고,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함께 끌어올린 측면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커지면서 그들만의 운동이 되고 있다. 평균 연봉 1억 원이 넘는 노조가 “빼앗긴 우리 피땀을 투쟁으로 되찾자” 하고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는 상황이 됐다. 기득권화된 노조는 여전히 노동운동 초기의 ‘낙수 효과’를 믿는다. ‘우리가 잘돼야 전체가 잘된다’는 논리다. 정년 65세 연장, 주 4.5일제 도입 등도 우리가 선도하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노조의 보호를 두껍게 받는 상위 노동자들만의 잔치로 그칠 공산이 크다. 노동시장 이중 구조의 벽을 더욱 견고하게 해 비정규직·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상향 이동과 청년들의 일자리 진입 자체를 막을 것이란 우려가 높다. 최근 민주노총 택배노조가 촉발한 ‘새벽배송 금지’ 논란은 민주노총이 대중과 현장의 생각과 얼마나 괴리돼 있는지 보여준다. 새벽배송이 막히면 소비자는 물론 영세 소상공인, 납품 농가 등의 피해가 불가피한데도 거칠게 문제를 제기했다. 당사자인 택배 기사들도 일자리와 생존권을 위협한다고 반대한다. 민주노총이 새벽배송을 걸고 넘어지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의혹도 나온다. 쿠팡노조 측은 “민주노총 탈퇴에 대한 보복으로 보인다”며 성명서를 냈다.결과 책임 회피하는 선택적 참여 노동시장 이중 구조 개선 등 노사정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할 노동 개혁 사안에서는 정작 책임을 회피한다. 민주노총은 1999년 2월 노사정위원회(현 경사노위)를 탈퇴한 후 아직까지 복귀하지 않고 있다. 노동계의 양보가 필요한 사안에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장외투쟁만 고집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민주노총 출신인 문성현 위원장을 임명했을 때도 참여를 거부해 당시 문 위원장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잃을 것 없는 자리에는 참석한다. 주 4.5일제 도입을 논의하는 정부 주도의 ‘실노동시간 단축 로드맵 추진단’에 들어가 연내 입법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대정부 투쟁을 해 오면서도 사무실 임차보증금은 정부로부터 받아 왔다. 최근 정부가 6대 구조 개혁 가운데 하나로 내건 노동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노동계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일률적 법정 정년 연장, 임금 감소 없는 근로시간 단축만 고집해서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배곯는 어린 ‘시다’들에게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집까지 걸어갔던 청년 전태일의 마음을 기억해야 한다. 더는 약자라고 볼 수 없는 민주노총이 이제 노동계의 대표로서 어른의 책임을 다해야 할 때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15년 만에 한국을 찾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지난달 30일 ‘깐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소맥 러브샷을 하며 “한국 프라이드치킨이 최고”라 했고, 엔비디아 그래픽카드 ‘지포스’ 한국 출시 25주년 행사에선 “모든 것은 한국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그는 “e스포츠, PC방, PC 게이밍 문화가 없었다면 오늘의 엔비디아도 없었을 것”이라며 29년 전 한국과의 첫 인연을 소환했다. ▷황 CEO는 “1996년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매우 아름다운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발신인은 편지에서 ‘한국에 대한 세 가지 비전이 있다’고 썼다”고 했다. 한국 전역을 초고속 인터넷으로 연결하고 싶다. 비디오 게임이 한국 기술 성장을 이끌 것이다. 세계 최초의 비디오 게임 올림픽을 열고 싶다…. 이 꿈을 위해 황 CEO가 도와달라고 발신인은 제안했다. 황 CEO는 “그 편지 때문에 한국에 처음 오게 됐다”며 “제이(이재용 회장)의 아버지가 보낸 편지였다”고 털어놨다. 당시 54세였던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었다. ▷편지를 받은 황 CEO는 33세의 청년 엔지니어에 불과했다. 그의 엔비디아는 창업 4년 차의 신생 기업이었고, 그래픽카드 개발 실패로 파산 위기에 몰려 있었다. 이 선대회장이 꿰뚫어 본 엔비디아는 1999년 지포스를 선보이며 일어섰고, 여기에 삼성전자의 D램이 들어가며 양사의 협력이 시작됐다. 이 선대회장의 비전도 현실이 됐다. 초고속 인터넷으로 한국은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이 됐고, 게임은 한국의 대표 산업으로 성장했다. 비디오 게임은 ‘e스포츠’로 인정받아 각종 국제 대회가 열리는 것은 물론이고 아시안게임 정식종목까지 됐다. ▷두 거인의 인연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1983년 당시 이미 태블릿PC를 구상하던 잡스는 부품 공급 가능성을 타진하려 반도체 후발 업체 삼성을 찾아왔고, 73세의 이 창업회장이 직접 그를 맞았다. ‘미래는 모바일에 있다’고 설파하는 28세 청년의 이야기를 들은 이 창업회장은 “잡스는 IBM에 맞설 인물이 될 것”이라 평했다고 한다. 모바일 패권을 둘러싼 삼성과 애플의 협력과 경쟁의 역사는 여기에서 시작됐다. ▷아이들의 장난 같던 게임에서 인공지능(AI) 기술이 꽃피웠듯, 멀리 내다보는 선견지명과 이를 이루기 위한 꾸준한 실천이 미래를 만들어낸다. 허황되게 보이는 꿈을 알아주는 지음(知音)도 필요하다. 엔비디아와 ‘AI 동맹’을 맺고 글로벌 AI 혁명에 올라탄 한국이 쫓아가기에 급급하지 않고 미래를 주도하려면 다음을 내다보는 상상력과 혁신이 필요하다. 거인의 어깨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내년에 정원을 20%가량 늘릴 예정인 ‘경제 검찰’ 공정거래위원회의 최대 화두는 밀가루다. ‘빵플레이션’(빵+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밀가루 제조업체들을 상대로 가격 담합 조사에 착수했고, 설탕 업체의 담합 혐의도 들여다보고 있다. 국세청도 생활물가 밀접 업종에 대한 고강도 세무조사로 가세했다.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이 식료품 물가가 너무 높다며 “고삐를 놔주면 (기업은) 담합하고 독점하고 횡포를 부리고 폭리를 취한다”고 비판한 이후부터다. 고용노동부는 ‘노동경찰’로 불리는 근로감독관을 현재의 3000명 수준에서 3년 뒤 1만 명까지 늘릴 계획이다. ‘산업재해와의 전쟁’에 대응한다는 명분이다. 보건복지부는 불법 사무장병원을 척결해 건강보험 재정을 지키겠다며 국민건강보험공단에 특별사법경찰(특사경)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자본시장 불공정거래 대응에 대해 민생금융범죄도 근절하겠다며 전담 특사경 신설과 인지수사권, 강제조사권을 요구하고 있다.수사 조직 늘려가는 행정부처들얽히고설킨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은 단칼에 끊어내는 것이다. 소위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나 ‘쾌도난마’ 같은 해법이다. 최근 정부가 난제에 대응하는 방식이 바로 이렇다. ‘나쁜 놈들’을 설정하고 강력한 단속과 수사, 엄벌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기존 경찰 조직 외에 각 행정부처까지 전방위로 동원된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을 선포한 정부는 10·15 대책을 통해 전쟁을 지휘할 전담조직 신설을 선언했다. 국무총리 직속으로 ‘부동산 감독기구’를 만들어 ‘집값 띄우기’ 등 시장 왜곡에 대해 직접 조사·수사하고, 국토교통부 내 별도의 부동산 특사경도 두기로 했다. ‘부동산판 금융감독원’ 같은 기구는 집값이 급등하던 문재인 정부 때도 도입을 검토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거래까지 위축시키고 과도한 재산권 감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논란 속에 백지화됐다. 범죄를 척결하겠다는데 반대할 이유는 없겠지만, 사안을 단순화시켜 진짜 원인을 도외시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빵값이 오른 데는 환율 상승과 원자재 수급 불안, 인건비 상승, 복잡한 유통 구조 등 다양한 원인이 있을 텐데 식품업계의 탐욕 탓으로 간단히 돌려버린다. 근로감독관 증원에 앞서 과거 정부에서 근로감독관을 1000명 늘렸는데도 산재와 임금체불이 줄어들지 않은 이유부터 따져봐야 한다. 건보 재정 문제도 안정적 재원 확보 방안을 찾고, 사무장병원 개설을 사전에 차단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먼저다.정책 실패 감추는 핑계 아니어야최근 국토부는 2023년 3월부터 올해 8월까지 집값 띄우기 정황이 있는 425건을 기획 조사 중이며 이 중 위법성이 짙은 8건을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비리가 만연한 듯 보이지만 같은 기간 서울 아파트 거래량 24만여 건에 비하면 0.2% 수준인데, 이를 근거로 투기꾼들이 집값을 끌어올린 주범이라고 주장하긴 어렵다. 부동산 정책에 대한 오랜 불신, 수요자들의 불안을 잠재우기엔 턱없이 미흡했던 정부의 공급 대책 등부터 돌아봐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규제·감독기관부터 설치하고, 대국민 서비스가 주 업무인 행정부처들을 감시와 통제, 처벌 강화에 동원하는 방식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새로운 조사·수사기관이 만들어지면 조직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실적 만들기에 급급해 자칫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할 수 있다. 모든 것을 ‘카르텔’ 탓으로 돌렸던 윤석열 정부에서 보듯 대중이 분노할 대상을 만들어 처벌하는 삼청교육대식 접근은 답이 아니다. 감시와 처벌을 강조하는 진짜 이유가 정책 실패를 가리려는 의도는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한때 취리히 제네바에 이은 스위스 제3의 금융 중심지였던 루가노는 스위스의 금융 비밀주의가 흔들리며 시들어 갔다. 활력을 되찾기 위해 루가노는 ‘비밀금고’에서 ‘가상자산’으로 도시의 색깔을 바꿨다. 도심 공원에 비트코인 창시자의 동상을 세울 정도로 가상자산에 진심이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시절부터 있었을 것 같은 노포에서도 가상자산으로 결제가 가능하고 세금도 코인으로 낸다. 최근 3년간 유치한 가상자산 관련 스타트업만 100여 개에 달하면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아 청년들이 몰려들고 있다. ▷세계 휴대전화 시장을 석권하던 노키아 공장이 문을 닫은 이후 침체에 빠졌던 핀란드 북부 도시 오울루는 이제 ‘노키아 도시’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뗐다. 다만 한때 노키아의 상징이던 혁신의 정신만은 그대로 남겼다. 통신 분야의 연구개발(R&D) 역량을 바탕으로 산학협력을 다양한 산업으로 확대했다. 친환경 에너지 & 클린테크, 교육, 소비재, 헬스케어, 게임, 인공지능(AI), 핀테크 등의 스타트업이 활동하며 시 전체가 신기술 테스트베드로 거듭났다. ▷호주의 산업도시 질롱은 ‘러스트벨트’에서 ‘실리콘밸리’로 변신했다. 자동차 공장이 속속 폐쇄되며 위기를 맞았던 질롱은 도시의 엔진을 자동차에서 장갑차, 자주포 등 방위산업으로 갈아 끼웠다. 과거 양모산업이 발달했던 지역의 강점을 이용해 탄소섬유 등 신소재 개발에 적극 나섰다. ‘말뫼의 눈물’로 유명한 스웨덴 말뫼도 조선업 등 기존 산업의 몰락에 좌절하지 않고 재생에너지 등 미래 산업으로 과감하게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골칫거리였던 빈집을 지역의 효자로 만든 도시들도 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주의 소도시 무소멜리는 버려진 집을 단돈 1유로(약 1650원)에 판매해 낙후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8개국에서 온 외국인들이 ‘1유로 주택’을 사들여 개조한 뒤 영구 거주하고 있고, 관광객도 10배로 늘면서 인구 감소세가 멈췄다. 지역 특유의 끈끈한 유대감과 환대 문화 덕분에 외지인들이 지역에 잘 녹아들 수 있었고 도시는 활기를 되찾았다. ▷인구절벽 위기를 극복한 해외 도시들의 공통점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통과 인프라를 변화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전통금융을 가상자산으로, 통신 연구개발(R&D)을 스타트업으로 바꿔내는 식이다. 남들이 성공한 모델을 그대로 베낀다고, 정착지원금을 뿌리거나 ‘기업 하기 좋은 도시’를 표방한다고 해서 저절로 인구와 일자리가 느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지역의 자산을 바탕으로 특화 전략을 찾아내고 매력을 극대화하는 것, 인구 소멸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지방 도시들이 해외 도시의 성공 사례에서 배워야 할 진짜 교훈이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7월 말 큰 틀에서 타결됐던 한미 관세 협상이 이후 조율 과정에서 오리무중에 빠지면서 안도감은 이제 막막함으로 바뀌었다. 대출·보증 형태로 생각했던 대미 투자 3500억 달러에 대해 미국 측이 ‘현금 선불’이란 억지를 부리고 있어서다.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 등을 통해 한국은 상호 윈윈을 꿈꿨지만, 미국 측은 이를 ‘미국만 위대하게(Solely Great)’로 생각하는 듯하다.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예언서를 다시 펼쳐볼 때가 됐다. 지난해 11월 나온 ‘국제 무역체제 재구조화를 위한 사용설명서’라는 제목의 보고서로, 보통 ‘미런 보고서’ ‘미란 보고서’ 등으로 부른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내에서 홀로 ‘빅 컷’을 외치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지원 사격하는 스티븐 ‘마이런’ 연준 이사가 썼다. 보고서가 나왔을 땐 우리가 이름조차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을 정도로 무명이었던 저자의 제안대로 협상이 흘러가고 있다.‘현금 선불’로 현실화된 ‘100년 국채’ 보고서는 “경제 불균형의 근원은 지속적인 달러 과대평가에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재정·무역 적자를 줄이려면 달러 약세를 유도해야 한다. 통화 조정을 유도하는 지렛대는 고율의 관세다. ‘징벌적 관세’를 매긴 이후 관세 완화를 조건으로 다른 나라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 미국의 안보 우산을 제거할 수 있다는 위협도 병행한다. 문제는 달러 약세로 기축통화의 지위가 흔들리고 국채 금리가 급등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각국이 보유한 미 국채를 100년 만기 초장기 국채로 전환하도록 하면 이자 부담 없이 돈을 마음껏 쓸 수 있다고 제안했다. 유동성 부족을 우려하는 국가엔 통화 스와프를 당근으로 줄 수 있다. 운동도 하지 않고 마음껏 먹으면서 살은 빼겠다는 마법의 다이어트약 같은 처방이다. 4월 초 미국이 전 세계에 상호 관세를 선언한 이후의 진행 과정은 보고서의 주장과 비슷하다. 고율의 관세부터 던져 놓고 미국을 만족시킬 제안을 들고 오면 낮춰 줄 수 있다고 했다.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급했던 일본이 먼저 손을 들었고, 한국도 일본의 합의를 기준점 삼아 협상을 서둘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는 알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족쇄였다. 전액 현금으로 받아 미국이 원하는 곳에 투자하고 수익의 90%를 미국이 갖겠다는 것은 남의 돈을 맘대로 쓰겠다는 100년 만기 국채 아이디어의 다른 버전이다. 일각에선 패전국에 부과된 전쟁 배상금보다 가혹하다며 협상을 엎어버리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상호 관세 25%를 적용받아도 한국 전체 수출은 4% 정도 줄어드는 데 그칠 것이며, 미국에 줄 돈으로 차라리 피해 기업에 지원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세를 세수 확보를 넘어 협박의 수단으로 보는 미국이 더 높은 ‘징벌적 관세’를 매길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미국 시장을 아예 포기하는 도박을 하긴 어렵다.미국 요구 부당해도 판 엎을 순 없어 지금으로선 판을 깨지 않으면서 신중하게 협상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최소한의 방어장치인 통화 스와프를 포함해 투자 규모와 조건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본의 움직임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차기 일본 총리를 예약한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가 재협상 가능성을 시사했고,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은 “5500억 달러 중 실제 투자금은 1∼2%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출과 보증”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이번엔 7월 협상 때처럼 데드라인에 쫓겨 디테일을 놓치면 안 된다. 정치권도 정부와 협상팀에 대한 정치적 공세와 압박을 자제하고 차분히 기다려 주는 여유가 필요하다.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업가로 유명해진 계기가 된 1970년대 뉴욕 코모도어 호텔 재개발은 손에 없는 것을 파는 ‘봉이 김선달’식이었다. 호텔 인수를 전제로 뉴욕시로부터 세금 탕감을 받고, 뉴욕시 참여를 전제로 가격을 협상한 뒤 계약서만 들고 융자를 받았다. 인수 및 재개발 비용 8000만 달러 중 트럼프가 부담한 건 50만 달러뿐이었다. 대통령이 되고도 변함이 없다. ‘절대 주식’ 딱 한 주를 들고 20조 원 가치의 회사 경영권을 쥐고 흔든다. ▷6월 미국 철강회사 US스틸 지분 100%를 인수한 일본제철은 최근 미국 일리노이주의 제철소 한 곳을 폐쇄하려다 미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혔다. 2023년부터 철강 생산은 하지 않고 외부에서 생산된 강판을 압연만 하던 곳이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이 직접 회사에 전화를 걸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일본제철 측은 계획을 철회했다. 미국 내에서 새 제철소를 짓되 비효율적 설비는 정리하는 최소한의 구조조정마저 벽에 막혔다. ▷일본제철을 굴복시킨 미국 정부의 카드는 ‘황금주’였다. 단 한 주로도 핵심 경영 사항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별 주식이다. 미국 내에서 반대 여론이 높던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황금주 부여와 110억 달러 신규 투자 등을 조건으로 승인했다. 황금주는 미 정부가 아닌 트럼프 대통령 ‘개인’에게 주어졌다. 황금주에 대해 일본제철 측은 “상징적 의미일 뿐이며 경영 자율성은 보장된다”고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기업 사냥꾼’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 미 정부는 정부 지원금을 대가로 자국 반도체 기업 인텔의 지분 10%를 인수해 최대 주주가 됐다. 반도체뿐 아니라 조선, 방산 기업의 지분에도 군침을 삼킨다. 엔비디아와 AMD의 반도체 대중 수출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중국 내 매출의 15%를 일종의 ‘수출세’로 걷었다. 최근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미 정부가 중국 동영상 공유 플랫폼 틱톡의 미국 사업 매각을 주선하는 대가로 투자자들로부터 수십억 달러의 수수료를 챙길 예정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국가 간에도 막무가내식 거래는 그치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관세를 올리곤 협상을 통해 깎아줬다며 생색낸다. 한국이 미국과 합의한 3500억 달러(약 486조 원) 대미 투자펀드도 한국은 당연히 대출·보증 방식일 거라 생각했지만, 미국 측은 ‘현금으로 내놓으라’고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내가 동의하면 탄핵당할 것”이라고 할 정도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다. 역량을 총동원해 최대한 국익을 지키는 방향으로 협상해야 한다. 눈뜨고 코 베이지 않으려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김재영 논설위원 redfo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