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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국내 대학에서 배출된 박사학위 졸업자는 1만7673명. 이들 중 외국인 비율은 23.9%(4224명)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10%를 채 넘지 않았던 걸 감안하면 외국인 박사가 2배 이상으로 늘었다는 뜻이다. 늘어난 국내 대학원 박사 과정 정원은 외국인 학생이 채웠다. 국내 대학이 배출한 인공지능(AI), 로봇, 바이오 등 이공계 박사에서 외국인이 연간 1000명을 넘는다. 외국인 박사는 졸업까지 국제학술지(SCI급)에 평균 2편 정도 논문을 게재할 정도로 실력을 갖춘 인재가 많다. 학위를 마치면 절반은 모국으로 돌아가거나 취업, 연구를 위해 미국, 유럽 등으로 향한다. 나머지 절반가량만이 국내 대학, 연구소에 남는다. 이들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한국을 떠난다. 이들은 왜 한국에 남지 않는 것일까. 외국인은 학교를 졸업한 뒤 유학 비자(D-2)를 특정활동 비자(E-7), 거주 비자(F-2) 등으로 전환해야 안정적으로 체류할 수 있다. 2023년 기준 국내 유학생은 15만2094명이지만 같은 해 유학 비자를 특정활동 비자로 전환한 사례는 576명에 그친다. 전환 요건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평균 급여도 내국인과 비교하면 낮은 편이다. 내국인 이공계 박사 44%는 연 5000만 원 이상을 받는다. 반면 이공계 외국인 박사 30%는 연 소득이 2000만 원 미만이다. 5000만 원 이상을 받는 비율은 12%에 불과하다. 외국인은 박사후과정을 밟거나 연구교수, 연구원 등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승진 기회 제한, 연구용역 수주 한계 등도 한국을 떠나게 만드는 요인이다. 저출생으로 학령인구가 줄면서 고급 인재 확보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국내 학생을 우수한 인재로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해외 인재를 유치하는 전략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최근 최우수 인재 유치 방안 중 하나로 ‘톱 티어’ 비자를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다만 글로벌 100위 이내 대학 석박사 학위와 글로벌 500대 기업 및 세계적인 연구기관 근무 경력 등 취득 요건은 높은 편이다. 이런 능력을 갖춘 인재가 과연 한국에 계속 남을지 의문이다. 보다 현실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비자 취득 요건을 더 낮춰서 매년 1000명 넘게 배출되는 이공계 외국인 박사만이라도 흡수해야 한다. 외국인은 상대적으로 국내 일자리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만큼, 아예 외국인 인재풀 등을 만들어 취업을 지원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장기적으로 외국인 유학생의 취업과 정착을 지원하는 기관 설립도 고려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을 더해야 국내 장학금으로 키운 고급 인재를 놓치지 않는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 따르면 한국의 두뇌 유출 지수 순위는 2021년 24위에서 지난해 30위로 하락했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에 따르면 2032년 2차전지 등 5개 유망 신사업에서 석박사 출신만 1만685명이 더 필요할 것으로 전망됐다. 최근 10년간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 전문 인력은 4만∼5만 명대에서 정체를 보이고 있다. 국내에 들어왔던 고급 인력이 대부분 다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이들이 계속 머무를 만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때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최근 법정 정년 연장을 공식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임금이 줄어들 수 있는 ‘퇴직 후 재고용’ 방식은 반대한다고 선을 그었다. 민노총은 그동안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는 달리 정년 연장과 관련해서 유보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양대 노총의 정년 연장 추진에 정부와 경영계도 본격적으로 관련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됐다. 정년 연장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당면 과제다. 지난달 한국갤럽이 성인 100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79%가 ‘정년을 65세로 올려야 한다’고 답했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은 정년 제한이 없거나 상향 조정하고 있다. 다만 ‘자식 인생도 책임을 못 지는데, 어떻게 직원을 40년이나 책임져야 하냐’ ‘60세도 버거운데 연금을 못 받고 5년을 더 일해야 한다면 언제 은퇴하냐’ 등의 의견도 나온다. 정년 연장 방식을 두고 정부와 경영계, 노동계 의견도 첨예하게 엇갈린다. 정년을 늘리면 일차적으로 사업주 부담이 커진다. 직장인은 은퇴하고 싶으면 언제든 퇴사할 수 있지만, 사업주는 얘기가 다르다. 청년 고용 감소, 생산성 저하 등 경제 순환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창업, 채용에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년 연장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한국은 지난해 12월 초고령사회로 진입했고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이다. 한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생)가 지난해부터 차례대로 은퇴하면서 향후 11년간 경제성장률을 연간 0.38%포인트까지 떨어뜨릴 것으로 전망됐다.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를 겪은 일본은 1994년 60세 정년을 도입했다. 2012년에는 65세까지 사실상 정년을 연장했다. 현재 70세까지 일할 수 있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일본이 60세 정년을 도입할 당시 기업의 80%는 이미 60세 정년을 시행하고 있었다. 65세로 정년을 늘릴 때도 2000∼2025년 3단계에 걸쳐 점진적으로 도입해 기업 부담과 노동시장 부작용을 최소화했다. 한국은 2016년 60세 정년을 도입한 상황에서 정년 연장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지적이 있다. 일본은 정년을 5년 늘리면서 기업을 많이 배려했다. 계속고용 제도를 도입해 직원이 같은 직장에서 일하지만, 임금이 줄어들 수도 있게 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일본 기업 70%는 계속고용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고용 의무를 ‘개별 기업’에서 ‘기업 그룹’으로 확대해 계열사로 옮길 수 있도록 했고 근무 태도가 불량하거나 정상 근무가 어려울 때는 제외할 수 있도록 했다. 또 70세까지 취업하는 방안으로 다른 기업 재취업, 창업 지원, 프리랜서 계약 등을 검토하고 있다.정년 연장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고민은 청년을 위한 배려다. 대한상공회의소 보고서에 따르면 일자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정년을 연장하면 청년 일자리가 위축될 수 있다. 청년층은 업무 숙련도는 낮지만, 열정적이고 창의력이 높다. 반면 고령층은 순발력은 떨어지지만, 숙련도가 높다. 고령층이 몇 배 많은 급여를 받으려면 생산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증명해야 사업주 불만도 줄어든다. 일자리는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찾고 ‘일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제 사업주와 청년까지 만족하는 묘수를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할 때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지난해 공개한 과학 분야 국가별 연구 순위(리서치 리더스)에서 한국이 8위를 기록했다.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처음으로 1위에 올랐고 이어 독일 영국 일본 프랑스 캐나다 순이었다. 한국은 2021년 스위스를 넘은 뒤 4년째 8위를 지키고 있다. 네이처는 한국에 대해 인구 감소, 투자 효율성 저하 등을 거론하면서도 “과학에 대한 강한 투자와 기술 혁신에 대한 명성은 매우 인상적”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그런대로 잘 유지하고 있지만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언제 뒤처질지 모른다는 뜻이다. 저출생 여파로 국내 학령인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 2040년쯤엔 이공계 대학원생이 현재의 절반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박사 인력을 제대로 양성할 수 있는 연구 중심 대학도 20개 정도로 줄어든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수도권과 지역의 격차, 대기업 취업 선호 등으로 이공계 대학원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게다가 오랜 기간 의대 열풍이 불며 많은 과학 영재들이 돈 잘 버는 미용의료 전문가로 사회에 진출하고 있다. 더 이상 이과 최상위권 학생들이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하지 않는다. 한국은 첨단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제품을 개발하고 수출해야 먹고살 수 있는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과학인재 양성의 요람인 이공계 대학원이 흔들리면 산업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2차전지, 신금속소재, 차세대세라믹소재, 첨단화학소재, 하이테크섬유소재 등 5개 유망 신사업에서만 석박사 출신 573명이 부족했다. 2032년에는 5개 산업에서 석박사 출신만 1만685명이 더 필요할 것으로 전망됐다. 그렇다면 국내 이공계 대학원들은 저출생과 산업구조 변화에 맞춰 미래를 잘 대비하고 있는 것일까. 학령인구가 줄어 석박사 학생을 현재와 같은 규모로 유지하기는 어렵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학교 사정에 따라 석사 중심 대학원은 실무자와 현장 인력을 양성하고, 연구 중심 대학원은 박사를 키워 분야별로 특화하고 해외 주요 대학들과 경쟁해야 한다. 반도체, 인공지능(AI), 바이오, 양자컴퓨팅 등은 최고 수준을 유지해야 승부할 수 있어 창의적 인재가 매우 중요하다. 교수들이 개인적으로 경쟁해서 각종 연구비를 받는 현행 방식도 일부 보완이 필요하다. 경쟁 방식은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다만 대학원 연구가 사회적 수요보다는 연구비 수주에 유리한 분야에 몰리고 학생들이 대학원에서 배운 내용이 산업계에서 전혀 필요가 없을 때도 많다. 연구개발(R&D) 예산 자체가 학술적 역량 강화에 무게를 둘 때가 많아 산학협력을 강조하는 연구는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서울대, KAIST 등 국내 주요 대학들의 R&D 예산은 하버드대, 칭화대 등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 수준이다. 정부는 ‘과학기술계 카르텔’을 청산한다며 과학 예산을 대폭 삭감하기도 했다. 지난해 네이처가 선정한 과학 분야 상위 10개 대학에 8개 중국 대학이 포함됐다. 2016년에는 베이징대만이 이름을 올렸다. ‘글로벌 8위’ 성적표는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일본이 더 내려갈 수 있고 인도가 한국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정부와 과학계의 협력과 노력이 매우 중요한 시기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태국 방콕 중심가 실롬의 한 편의점. 음료수 냉장고에는 한글로 ‘건배’라고 적힌 소주가 두 줄로 진열돼 있다. 소주에 사과, 포도, 딸기 등 과일즙을 첨가한 과실주도 보였다. 가격은 85밧(약 3600원) 안팎으로 현지 주류기업인 ‘타이 스피릿’이 2019년 출시했다. 반면 한국산 소주들은 한 줄로 옆에 보였다. ‘건배’ 소주가 더 잘 팔린다는 의미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확산으로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에선 젊은이들이 한국식 포장마차에서 K팝을 들으며 소주를 마시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다. 현지 한식당도 많아 삼겹살과 치킨을 먹으며 반주하는 게 낯설지 않다. 유행에 민감한 동남아 MZ세대(밀레니얼+Z세대)들은 바와 클럽에서 초록색 병을 흔들었다. 이런 영향으로 국내 소주 업체들은 지난해 역대 최대인 1억450만 달러(약 1528억 원)어치를 전 세계에 수출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보이지 않는 소주들이 많다. 건배, 태양, 선물, 자연…. 소주의 인기를 간파한 현지 업체들은 소주를 흉내 낸 제품을 출시했다. 인도네시아 전통 술을 만들던 기업은 ‘대박 소주’를, 필리핀 브랜디 양조장은 ‘행복한 소주’를 내놓았다. 현지 소주들이 빠르게 시장을 점령하고 있으며 대마 성분이 함유된 소주까지 팔린다. 소주 유사품만 수십 종에 달하고 국내 식품안전관리인증(HACCP)을 받았다고 홍보하는 곳도 있다. 그렇다면 현지 소비자들은 소주의 맛을 잘 알고 마실까. 희석식 소주는 고순도 에탄올인 주정에 물을 타고 감미료 등을 첨가해 만든다. 다소 역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맛이 강한 편이다. 반면 동남아 소비자들은 도수가 낮고 달달한 소주를 선호한다. 현지 업체들은 이런 취향을 반영해 사과, 포도, 파인애플 등 과일즙을 첨가한 과실주를 선보이며 점유율을 끌어올렸다. 현지 생산이라 관세가 없고 물류비도 적어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일 수밖에 없다. 이미 튼실한 유통망도 가지고 있다. 국내 주류업체들이 “우리만 소주를 만들 수 있다”고 안이하게 생각하거나 신흥시장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매대는 유사품들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해법은 무엇일까. 종주국이라는 강점을 살려 차별화를 꾀해야 한다. 현지 양조장들은 불순물을 걸러내는 기술이 떨어지고 짝퉁 소주는 숙취도 심하다. ‘한국산 소주’라는 인증을 따로 만들어 격차를 벌릴 수 있다. 동남아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소주 브랜드는 한두 개에 그친다. 100년 역사를 가진 지방 소주 업체들이 여럿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브랜드를 소개할 수도 있다. 희석식 소주뿐만 아니라 전통 증류식 소주도 출시해 위스키에 맞설 수 있다. 소주와 맥주를 섞는 다양한 한국식 주도 문화를 전달하며 시장을 확대하는 방안도 있다. 현지 짝퉁 제품을 경계해야 하는 상황은 비단 소주뿐만이 아니다. 김치, 고추장 등 거의 모든 제품에서 비슷한 사례가 발생했다. 경각심을 높이지 않다 시장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낮은 품질로 K브랜드의 이미지만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재점검할 시기다. 국내 소주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이며 공장 가동률은 하락하고 있다. 국내 제빵 브랜드 파리바게뜨가 바게트 원조국인 프랑스에 진출한 사례가 다른 분야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필리핀 마닐라에서 북동쪽으로 58km 떨어진 앙가트댐. 마닐라 일대 수돗물의 98%를 공급하고 약 70만 명이 사용할 수 있는 전력도 생산한다. 1967년 일본이 준공한 시설로 필리핀 정부는 2010년 공공 인프라 민영화 정책에 따라 국제 경쟁 입찰을 진행했고 한국수자원공사가 낙찰을 받았다. 필리핀이 다목적 댐 시설을 외국인투자가에게 매각한 첫 사례로 해외 수력발전소의 운영권을 인수한 국내 첫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국 기업이 대형 공공 인프라의 운영권을 확보하자 필리핀 내부에서 논란이 일었고 2014년 수자원공사는 지분 40%만 확보하고 나머지 60%는 맥주 기업으로 잘 알려진 산미겔(San Miguel)에 넘겼다. 준공 이후 반세기 동안 별다른 시설 개선을 하지 않았던 앙가트댐은 매우 낡았다. 아날로그 기술로 지어져 발전량을 최대로 끌어내지도 못했다. 수자원공사는 시설 개선 사업을 추진했다. 2021년 금융권에서 발전설비 현대화에 필요한 돈을 빌려 발전기를 교체하기 시작했다. 발전기 9기 중 6기만 바꿨는데, 이전 발전량을 웃도는 전력이 생산됐다. 전력 판매 단가가 높은 시간대를 중심으로 발전 효율을 높였고 전기를 생산하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내던 ‘무효 방류’ 문제도 해결했다. 한국에서 댐, 정수장 등을 운영하던 노하우가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2020년 319억 원에 그쳤던 앙가트댐 발전소 매출은 지난해 547억 원으로 늘었고 첫 흑자도 기록했다. 수자원공사가 수력발전 시설 지분에 투자한 돈은 약 1000억 원이다. 댐 운영권이 최대 50년 보장되기 때문에 향후 상당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게다가 수익, 배당금 외에도 부가적인 수혜가 발생했다. 수자원공사는 수력발전 시설 리모델링과 관련해 새로운 사업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당장 필리핀에 시설 개선이 필요한 다목적댐만 135개다. 미국과 브라질, 캐나다, 러시아, 인도, 노르웨이 등에 시설 개선이 필요한 수력발전소가 넘치는 상황에서 더 넓은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 해외 공공 인프라 사업은 실패하는 사례가 잦다. 또 장기간 투자해야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이 대부분이라 회수 기간이 길다. 매년 국정감사에서 “사업 초기 장밋빛 미래를 그렸던 것과 비교된다. 공기업이 해외 사업에 돈을 물 쓰듯 한다”는 비판도 단골로 받는다. 앙가트댐의 경우 배당금은커녕 수년간 운영 적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해외 자원 투자의 경우 사업을 진행하다가 경제성을 담보하기 어려워 낭패를 볼 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뛰어넘어야 새로운 시장이 열릴 수 있다. 한국도로공사는 중국 건설업체가 시공한 방글라데시 파드마대교(길이 6.15km)를 감리했다. 방글라데시는 오랜 침식 작용으로 대부분 모래 지형이다. 지하 100m를 파 내려가도 지지해줄 암반이 없다. 이런 혹독한 상황에서도 도로공사는 인천대교 감리 노하우 등을 바탕으로 꼼꼼하고 안전하게 감리했다. 공사 기간을 늦춘다는 오해까지 받을 정도였다. 결국 방글라데시는 2022년 6월 시공사가 아닌 감리 업체에 운영유지관리사업까지 맡겼다. 해외 공공사업은 유무형의 파급효과가 매우 크다.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중국과 일본도 이런 사정을 꿰뚫고 공적개발원조(ODA)를 활용해 해외 인프라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23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국민연금법 개정안 공청회.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민연금 개혁은 적정소득 보장이라는 목표를 정확히 해야 한다. (현재 40%인) 소득대체율(받는 돈)을 50%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명예연구위원은 “국민연금 미적립 부채는 1825조 원(2023년 기준)이 넘는다. 소득대체율을 40%로 유지해도 2093년이 되면 미적립 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383.9%가 된다”고 반박했다. 1988년 도입된 국민연금은 1998년과 2007년 두 차례 개혁이 단행돼 소득대체율 등을 조정했다. 이후 또다시 기금 안정화 문제가 제기됐고 2018년 문재인 정부는 4가지 개편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국회에선 단일안이 아니라며 논의를 사실상 거부했다. 연금개혁을 4대 개혁 과제 중 하나에 포함시킨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9월 보험료율(내는 돈)을 9%에서 1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40%에서 42%로 늘리는 단일안을 제시했다. 현재 국회에선 정부 개편안을 제외하고도 여야 보건복지위원들이 발의한 국민연금법 개정안만 29건이다. 여야는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는 방안에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으나 소득대체율은 각각 42%와 44%로 이견을 보이고 있다. 또 여당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따로 설치하고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조정하는 ‘모수개혁’과 함께 공무원연금, 퇴직연금 등을 연계해 전체 연금제도의 틀을 새로 짜는 구조개혁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야당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차원에서 모수개혁부터 먼저 추진하자고 한다. 문제는 말처럼 합의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과거 전례를 살펴보면 여야가 이견을 보이는 소득대체율을 조정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모수개혁과 구조개혁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에도 풀지 못한 사안이다. 21대 국회에서 진통 끝에 여야는 보험료율 13%, 소득대체율 44%로 합의 직전까지 갔으나 모수개혁과 구조개혁을 함께 해야 한다는 여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구조개혁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이해관계자가 너무 많아 모수개혁과 함께 추진하려면 언제 합의될지 모를 일이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박주민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은 21일 모수개혁과 관련해 “복지위 차원에서 속도를 내면 다음 달이라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야당은 정권 교체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어 ‘뜨거운 감자’인 연금 개혁을 이번 정부에서 털고 가는 게 낫다고 판단해 속도를 내려는 것으로 보인다. 여당에서도 ‘야당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다만 단서를 달았다. 국민의힘 연금개혁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는 박수영 의원은 “모수개혁 통과 후 1년간 구조개혁을 양당이 추진한다는 정치적 합의를 한다면 모수개혁부터 먼저 처리할 수 있다”고 했다. 국민연금 개혁이 늦춰질수록 미래 세대는 더 많은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 개혁이 하루 늦어질 때마다 재정 부담이 1000억 원 가까이 늘기 때문이다. 논의만 하다 벌써 10년이란 시간을 허비했다. 일단 모수개혁으로 첫발을 떼고 구조개혁은 이후 추진할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지난해 2월 6일 정부는 전국 의대 입학 정원을 3058명에서 5058명으로 늘렸다. 1998년 이후 27년 만에 의대 정원을 증원한 것이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당시 “급속한 고령화로 늘어나는 의료 수요 등을 감안할 때 2035년까지 의사 수가 1만5000명 부족할 것이란 수급 전망을 토대로 의대 증원 규모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한 전공의와 의대생은 수련병원과 학교를 떠났다. 현재 전공의와 의대생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전공의 과반은 수련병원이 아닌 다른 병의원에 취직했다. 휴학계를 제출한 의대생은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밀린 공부를 하고 있다. 일부는 학교를 옮기려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다시 쳤고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례도 있다. 의대생 단체는 올해도 휴학계를 제출하겠다고 밝혔고 의료계에선 3월 입학할 신입생도 사실상 집단 휴학을 할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온다. 과거 이들이 돌아올 기회는 전혀 없었을까. 정부가 지난해 3월 20일 2025학년도 대학별 의대 입학 정원을 발표했을 때 전공의는 동요했다. 지방 의대를 중심으로 증원이 확정되자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전공의 단체가 나서 단속했다. 정부가 병원을 이탈한 전공의에게 처벌하지 않겠다고 밝혔을 때도 흔들렸다. 다만 당시 의대 교수들이 정부의 방침을 처벌로 오해하고 제자들인 전공의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휴진을 결정하면서 복귀 가능성은 사라졌다. 정부가 방침을 바꿔 전공의들을 모두 사직 처분했을 때도 역시 전공의 내부에선 파장이 일었다. 역시 전공의 단체는 내부 단속에 들어갔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신규 레지던트를 모집했을 때 가장 많이 흔들렸다. 1년 가까이 수련을 포기한 전공의들은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심리적인 갈등이 많았다. 대형 병원 전공의 다수는 레지던트 지원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12·3 비상계엄으로 탄핵 정국에 들어가며 이런 움직임은 사라졌다. 올 3월 수련을 재개할 레지던트 모집엔 역시 지원이 저조했다. 그렇다면 이제 손을 놓고 있어야 할까. 정부는 의사 단체가 “의대 교육 방안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만큼 이들을 설득할 만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교원과 시설 확보에도 필요한 예산만 제시할 게 아니라 언제까지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내년도 의대 정원도 감원을 포함해 원점에서 검토하겠다고 밝힌 만큼 유연하게 협상에 임해야 한다. 의료계도 ‘2026학년도 의대 정원 0명’ 등 현실적이지 않은 주장은 접고 합리적인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각종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의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여론이 여전히 우세하다. 병역 문제로 고민하는 전공의도 상당수 존재한다. 내년도 의대 정원이 확정되는 5월 말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의대 교수들이 제자인 전공의를 설득할 수도 있다. 의료 공백의 피해는 결국 고스란히 환자와 국민에게 돌아간다. 정부는 지난해 의료공백 대응과 수련병원 선지급금 등으로 건강보험 재정 2조8895억 원을 투입했다. 초유의 2년 연속 전공의 이탈과 의대생 휴학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부와 의료계는 일단 만나서 소통해야 할 때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째 출산율 전국 1위에 오른 전남 영광군. ‘영광 굴비’로 대표되는 수산업과 농업, 제조업 등이 골고루 발달한 지역이지만 고령인구 증가, 청년층 유출 등 지방소멸 위험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1970년대 15만 명에 달하던 영광군 인구는 지속적인 감소로 2000년 7만3168명, 올해 10월 기준 5만1948명으로 줄었다. 저출생 고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전국 곳곳에선 인구소멸 위기가 코앞에 다가왔다는 아우성이 들린다. 한국고용정보원 분석에 따르면 올 3월 기준으로 전국 288개 시군구 중 소멸위험지역은 절반에 가까운 130곳에 달한다. 광역시 전체 45개 구군 중 소멸위험지역도 21개나 된다. 그렇다면 한국과 비슷한 사정을 겪는 일본은 어떨까. 일본은 1970년대부터 지방소멸 대응 정책을 펼쳤다. 5년간 인구감소율 10% 이상인 지역을 과소지역으로 정의하고 이들 지역을 대상으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지방창생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지방 인구소멸을 최대한 막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지역부흥협력대 사업은 상당한 성과를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일본 총무성이 2009년부터 추진한 사업으로 1인당 연간 480만 엔(약 4500만 원) 상당의 지원을 받고 인구 과소지역으로 주민등록을 옮기면 특산품 개발, 농수산업 종사, 주민 지원 등을 하며 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도다. 2022년 기준으로 6477명이 과소지역에 주민등록을 했으며 1∼3년 동안 정부 지원을 받은 뒤 65%가 해당 지자체나 인근 지자체에 정착했다. 정착한 이들의 30%가량은 카페, 레스토랑, 게스트하우스 등을 열며 인구소멸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한국 정부도 2021년 10월 출생률, 고령인구, 유소년인구, 생산가능인구 등을 고려해 인구감소지역을 지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기초자치단체 89곳이 지정됐는데 이들 지역에는 2022년부터 2031년까지 매년 1조 원씩 총 10조 원의 지방소멸 대응기금이 지원되고 있다. 그런데 사업 초반임에도 벌써 잡음이 나온다.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올해 정부는 인구감소지역 대응 사업 예산을 8조9000억 원이라고 밝혔으나 이 중 6조1000억 원(68.5%)은 인구감소지역 밖에서 시행되는 사업이거나 관련성이 떨어지는 사업의 예산이다. 일부 지자체는 신항만 개발, 재해안전항만구축 등을 인구감소 대응 예산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한 자치단체는 분수 광장을 설치하면서 사업비의 절반가량인 10억 원을 ‘지방소멸대응기금’으로 집행했다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사실 인구감소지역 상황은 지역마다 다르다. 일부 지역의 경우 출산율이 의외로 높은 편이기도 하다. 글 처음에 언급한 전남 영광군은 2022년 기준으로 합계출산율이 1.803명에 달한다. 또 전북 임실군(1.560명), 경북 군위군(1.486명) 등도 인구감소지역임에도 비교적 출산율이 높았다. 출산율 높은 인구감소지역의 경우 청년층 수도권 이동이 지역 인구 감소의 주원인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들이 정착할 수 있는 지원책을 마련한다면 인구 감소가 상당 수준 늦춰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역 대학 지원, 지역 일자리 창출 등 맞춤형 지원이 이들의 정착률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382조4000억 원. 최근 10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15%로 적립금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나기까지 채 5년이 안 걸렸다. 최근 발간된 자본시장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2040년 퇴직연금 적립금은 국민연금 기금(1755조 원) 규모를 뛰어넘는 최대 2063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돈은 잘 굴리고 있을까. 퇴직연금 적립금의 최근 10년 평균 투자수익률은 2.07%에 불과했다. 증시 호황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낸 지난해에도 5.26%에 그쳤다. 마찬가지로 보수적으로 운용하는 국민연금의 경우 장기 수익률이 연평균 5.92%이고 지난해엔 13.59%였다. 국민연금 정도로만 투자해도 현재 2배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셈이다. 왜 이렇게 성과가 저조한 것일까. 가입자가 직접 관리할 수 있는 퇴직연금은 크게 계약형과 기금형으로 나뉜다. 계약형은 가입자가 민간 금융기관인 퇴직연금 사업자와 직접 계약을 맺고 스스로 투자 상품을 선택해 적립금을 운용하는 방식이다. 반면 기금형은 국민연금처럼 투자전문가 집단이 가입자를 대신해 적립금을 관리하면서 기금을 만들어 투자하거나 민간 금융기관에 투자를 위탁한다. 문제는 계약형의 경우 투자 정보가 부족한 가입자들이 원금마저 잃지 않기 위해 은행예금 등 원금과 이자가 보장되는 금융상품에 주로 투자하고 장기간 방치하기 일쑤란 점이다. 국내 퇴직연금 전체 적립금에서 원리금 보장형 상품의 투자 비중은 90%에 가깝다. 저조한 수익률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반면 기금형은 가입자들이 장기간 방치하더라도 전문가들이 주식, 대체상품 등에 공격적으로 투자할 수 있다. 기금의 덩치가 커질수록 ‘규모의 경제’를 활용해 수익률을 더 높일 수 있다. 국민연금의 경우 올해 8월 말 기준으로 주식과 대체투자에만 적립금의 63.3%를 투자했다. 다만 퇴직연금이 대체로 기금형으로 운용되는 선진국과 달리 국내에는 30명 이하 사업장에 한정된 ‘중소기업 퇴직연금기금’을 빼면 기금형 퇴직연금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해외 모범 사례도 있다. 호주의 퇴직연금은 여러 기업의 퇴직연금을 묶어 운영하는 기금형인데, 가입자들이 수익률에 따라 다른 기금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수탁법인 간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2022년 기준으로 10년 투자 수익률이 연평균 7.2%로 맥쿼리 같은 대기업 등 직장인들의 퇴직연금을 모아 운용하는 기금만 12개다. 호주 정부는 가입자가 투자 결정을 하지 않더라도 ‘평타’ 이상의 수익률을 내는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상품에 가입할 수 있게 하고 관리 감독과 공시 의무를 강화하고 있다. 2005년 12월 시작된 퇴직연금 제도는 내년 20주년을 맞는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올해 8월 취임한 뒤 기금화 등 다양한 개선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국회에서도 국민연금공단에 퇴직연금 사업자 지위를 부여하는 내용의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다만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까지 위탁 운용하는 시스템은 공공 영역의 과밀화라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어떤 방식이든 직장인이 원하는 것은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으로 안정적인 노후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금화를 포함한 시스템 개선이 시급하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매년 이맘때가 되면 성적표를 하나씩 발표한다. 대학 기금 회계연도는 매년 7월 시작해 이듬해 6월 종료되는데 연간 실적이 10월경 공개되는 것이다. 올해 최고 수익률을 기록한 대학은 컬럼비아대로 11.5%에 달했다. 이어 브라운대(11.3%), 하버드대(9.6%), 코넬대(8.7%) 순이었다. 미국 명문대의 운용 자산은 수백억 달러, 한국 돈으로 수십조 원에 달한다. 올해 6월 기준으로 하버드대는 532억 달러(약 73조 원), 예일대는 414억 달러(약 57조 원), 프린스턴대는 341억 달러(약 47조 원)를 운용하고 있다. 하버드대의 기금 규모는 인구 1170만 명인 튀니지의 국내총생산(GDP)과 비슷하다. 수익만 해도 한화로 조 단위다. 하버드대는 기금 운용으로 지난해 25억 달러(약 3조4000억 원)를, 예일대는 23억 달러(약 3조2000억 원)를 벌었다. 이 돈으로 하버드대는 올해 예산의 37%를, 예일대는 예산 34%를 마련했다. 그들도 시작은 미약했다. 하버드대는 1974년 하버드매니지먼트컴퍼니(HMC)를 설립하고 종잣돈 3억 달러(약 4000억 원)로 처음 기금 운용을 시작했다. 예일대는 1985년 월스트리트 출신 데이비드 스웬슨을 영입해 10억 달러(약 1조4000억 원) 규모로 출발했다. 스웬슨이 활약한 35년 동안 예일대 기금은 연평균 13% 이상의 수익률을 기록했고 대학 예산 기여도는 10%대에서 30%대로 늘었다. 릭 레빈 전 예일대 총장은 스웬슨을 가리켜 “예일대 역사상 가장 큰 기부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대학들은 어떻게 돈을 굴릴까. 보통 HMC처럼 운용 회사를 따로 두고 주식, 채권, 헤지펀드, 기업 인수합병(M&A), 부동산 등에 투자한다. 여느 사모펀드와 다를 바 없다. 월가 출신 동문 등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운용역으로 참여한다. 기금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상당한 성과를 내는 대학도 많다. 미국 텍사스주 베일러대는 20억 달러(약 2조8000억 원)의 기금을 운용하는데, 최근 5년간 연평균 수익률이 10.9%로 브라운대(13.3%)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비리그 대학보다 높았다. 편중되지 않은 투자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도모한 결과다. 기금 운용도 대학이 간섭하는 대신 운용 회사에 최대한 독립성을 보장하고 그 대신 운용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평가한다. 지난해 국내 사립대 291곳의 교비회계 적립금은 총 11조2931억 원에 달했다. 대부분 투자금을 예금 등 안전자산에 맡겼고 61개 대학만 주식에 1조6506억 원을 투자했다. 100억 원 이상 목돈을 투자한 대학은 26곳에 그쳤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1원이라도 수익을 낸 대학은 7곳뿐이었다. 같은 기간 증시 호황으로 국민연금 운용 수익률은 13.59%에 달했다. 국내 대학들은 최근 학령인구 감소와 등록금 동결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급여가 적어 우수 교원들이 해외로 유출되고 있다. 물론 대학 자산은 부동산이 많아 쉽게 수익을 내기 어렵고 당국 규제로 대부분 안전자산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도 엄연하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교육당국과 대학이 백년대계를 위한 기금 운용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하는 게 아닐까.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는 직장인 프랑크 슈나이더 씨(45)는 180km 떨어진 북부 소도시 슈베린에서 주말을 보낸다. 주말 거주지인 그곳에서 작은 텃밭을 일구며 일상을 잊고 망중한을 즐긴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복수 거주지를 두고 있는 독일인은 180만 명(2.1%)으로 최근 2년 새 44만 명이나 늘었다. 이웃 나라 오스트리아는 140만 명(15%)이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 저출생의 여파로 한국은 급속한 인구 감소에 직면했다. 비수도권의 경우 소멸 위기에 처한 곳이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지방소멸을 막기 위한 특단의 대책으로 복수주소제를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복수주소제는 현재 거주하는 주민등록 주소 외에 ‘부주소(제2의 주소)’를 둘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상시 거주는 아니더라도 일시 거주 인구라도 늘려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겠다는 취지다. 국내 인구감소지역 89곳의 인구는 총 490만 명에 불과하지만 이들 지역에서 하루 3시간 이상 머무는 횟수가 월 1회 이상인 체류인구는 2000만 명에 달한다. 경제적 효과는 얼마나 기대할 수 있을까. 강원연구원이 복수주소제를 도입했을 때 강원도에 끼칠 경제적 효과를 추산한 결과 10년 후 체류인구는 최대 226만 명, 소비지출액은 2300억 원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현 추세라면 강원도 인구는 2022년 153만 명에서 2052년 144만으로 9만 명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강릉, 홍천, 양양, 속초의 체류인구는 인구 대비 52∼82%에 달한다. 해외는 어떨까. 독일은 1970년대 대학 도시와 휴양지에 복수거주지제를 도입해 일부 지역의 경우 인구가 5년간 38% 늘었다. 프랑스에선 지난해 1월 기준으로 전체 거주지 3781만 곳 가운데 제2거주지와 비정기 숙소가 370만 곳(9.8%)에 달했다. 주로 60세 이상(66%) 부유층(34%)이 날씨가 좋은 지중해와 대서양 연안, 산악 지역 등에 별장을 뒀다. 일본 국회는 올해 5월 두 지역 거주를 촉진하는 내용의 관련 법을 개정해 공포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먼저 위장전입 합법화 가능성이 제기된다. 지역인재특별전형으로 자녀들을 의대에 보내려는 학부모를 부추길 수 있다는 것이다. 지방재정이 늘 것이란 기대도 주민세, 재산세 등을 주거주지 자치단체와 나누지 않는다면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오히려 외지인의 주택 구입으로 부동산 투기만 부추길 수 있다. 스위스의 경우 제2주택이 계속 늘어 2015년 3월 제2주택 비율이 20% 이상인 게마인데(기초자치단체)에 주택 신축 등을 규제하는 연방법을 제정했다. 이같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상당하긴 하지만 복수주소제는 인구소멸지역을 막기 위한 뚜렷한 해법이 없는 현 상황에서 버리기는 아쉬운 카드다. 지역인재특별전형, 선거권 등의 경우 범위를 주거주지로 한정해 풀 수도 있다. 체류인구는 그냥 늘지 않는다. 인구감소지역에서 제2주택을 구입하더라도 1주택자로 간주하는 등 유인책이 필요하다. 독일의 경우 제2거주지에 세금을 부과하자 등록자가 급감한 사례도 있다. 농어촌에는 여전히 빈집이 많다. 제2의 인생을 한적한 곳에서 보내려는 은퇴자들도 있고, 체류인구는 언제든 정주인구로 바뀔 수 있다. 복수주소제를 인구소멸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을 마중물로 삼으면 어떨까.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국내 시내버스 회사 15곳을 소유한 차파트너스자산운용은 현재 선진운수를 제외한 나머지 14곳의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이르면 다음 달 말 예비입찰을 실시하는데 업계에선 매각 금액을 4000억∼5000억 원 선으로 보고 있다. 현재 싱가포르 국부펀드 계열 투자사와 미국 자산운용사 등 20여 개 업체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시내버스가 펀드의 투자 대상이 된 건 2000년대 후반부터다. 호주 금융그룹 맥쿼리 등이 투자 상품으로 시내버스 펀드를 만들거나 기업공개(IPO)를 통해 수익을 내는 방식을 구상하며 인수를 타진했다. 실제 맥쿼리는 2006년 영국 런던의 5대 버스회사 중 하나인 스테이지코치를 6억5740만 호주달러(약 6003억 원)에 인수하고 2010년 되판 경험이 있다. 국내 자산운용사들은 201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내버스 펀드를 출시하기 시작했다. 올해 6월 기준으로 서울시 전체 시내버스 7384대 중 1027대(13.9%)를 차파트너스 등이 소유하고 있으며 인천의 경우 사모펀드 점유율이 34%에 달한다. 그렇다면 펀드들이 왜 첨단산업도 아닌 시내버스에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일단 이들이 투자하는 시내버스들은 준공영제로 운영돼 적자가 발생해도 지방자치단체가 손실금을 보전해 준다. 투자자 입장에서 손해를 볼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차고지 등 알짜 부동산을 보유한 회사도 많다. 시내버스가 전기차나 수소차로 모두 바뀔 경우 에너지 전환을 통한 기업가치 상승도 기대해 볼 수 있다. 사모펀드의 시장 진출이 긍정적 효과를 내기도 한다. 뉴욕, 싱가포르, 토론토, 마드리드 등 주요국 대도시의 시내버스들은 업체당 평균 2000대 안팎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 서울 버스업체 평균 보유 대수는 115대에 불과하다. 난립한 회사들을 통합하고 규모의 경제를 통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일부 회사들은 사모펀드 인수 후 인건비 15% 절감 등 경영 효율화를 달성하기도 했다.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인프라 개선이나 새로운 시스템 도입 등을 위해 자본도 더 쉽게 동원할 수 있다. 반면 부정적 측면도 존재한다. 지자체들은 손실지원금으로 연간 2조 원이 넘는 돈을 지급하는데 이 지원금이 사모펀드의 배만 불리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인천의 경우 사모펀드가 인수한 회사들은 이후 주주 배당을 크게 늘렸는데, 약 2000억 원 넘는 손실지원금이 주로 사모펀드 투자자들에게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 부천시의 한 회사는 적자에도 불구하고 사모펀드 인수 후 주주들에게 연평균 48억 원을 배당했다. 서울과 경기에선 사모펀드가 인수한 8개 업체의 64개 노선에서 하루 운행이 1268회 줄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단순히 손실을 보전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자체가 서비스 향상, 경영 효율화 등을 평가해 성과를 낸 회사에 지원을 더 해주는 방식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도 이 같은 성과이윤이 지급되고 있지만 규모는 전체의 2.6%에 불과하다. 또 사모펀드가 차고지 등을 팔아 배당하는 도덕적 해이를 막기 위해 준공영제 가이드라인 보완이나 매각 금지 명령 등도 고려할 수 있다. 2004년 도입된 버스 준공영제는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공익을 해치는 회사들을 준공영제에서 퇴출시키는 등 재정비 노력이 필요한 때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국민연금공단이 지분 약 30%를 보유한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내 ‘원 부시 포디움’ 빌딩. 이달 초 이곳에 뉴욕과 런던, 싱가포르에 이어 네 번째 해외 투자사무소가 문을 열었다. 소장을 포함한 기금 운용인력은 모두 4명. 이들은 잠재력이 큰 실리콘밸리 기업들을 골라 직접 투자하는 업무를 시작했다. 김태현 공단 이사장은 개소식에서 “기금 수익률을 제고해 연금 개혁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1988년 출범한 국민연금은 올해 6월 말 기준 운용 규모가 1147조 원에 달한다. 하지만 ‘내는 돈’보다 ‘받는 돈’이 많게 설계돼 어느 시점이 지나면 기금이 고갈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익률을 끌어올리면 그만큼 국민들이 수혜를 보면서 고갈 시점을 늦출 수 있다. 수익률을 1%포인트 높이면 고갈 시점은 5년 늦춰진다. 현 제도가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할 때 기금은 2041년 1882조 원으로 정점에 달하고 이후 줄어들게 된다. 앞으로 17년간 기금 735조 원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이 기간이 기금 운용을 위한 ‘골든타임’이라고 볼 수 있다.그런데 돈이 쌓이는 반면에 돈을 굴릴 사람은 부족하다. 기금운용본부 운용직 정원은 지난해 말 기준 365명인데 2018년부터 한 번도 정원을 채운 적이 없다. 사실 인력을 채우고 싶지 않아 안 채우는 게 아니다. 사무실 소재지가 지방(전북 전주시)이라 몸값이 비싼 금융인들에겐 선호도가 크게 떨어진다. 매년 운용인력 20, 30명이 퇴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봉도 업계 눈높이에 미치지 못한다. 사무실을 서울로 옮기고 급여를 민간 수준 이상으로 높이는 것이 해법이 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지역의 반발과 형평성 논란 등에 휩싸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해외사무소 운용인력을 더 늘리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해외사무소의 경우 지리적 요인에서 비교우위가 있다. 정부 내부 분석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해외 전문인력을 201명까지 늘리면 인건비 1137억 원이 늘어난다. 반면 기금 수익률 상승 등으로 최대 1조7000억 원의 추가 수익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해외사무소 정원은 수년째 58명으로 동결된 상태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규모가 작은 편이다. 국민연금은 해외사무소에 10명가량 근무하는데 네덜란드, 캐나다, 노르웨이 등의 연기금은 많게는 50∼90명에 달한다.인력 1인당 기금 운용규모도 줄여야 한다. 주식 투자에서 높은 수익률을 안정적으로 내려면 성장 잠재력이 큰 기업을 최대한 꼼꼼하게 조사하고 발굴해야 한다. 국민연금 운용인력은 1인당 운용 규모가 3조 원을 넘지만 네덜란드 공적연금 운용공사(APG) 등 해외 연기금의 1인당 운영규모는 수천억 원 수준이다. 투자 대상을 신중하고 심도 있게 살펴볼 수 있는 만큼 성과 역시 더 좋을 수밖에 없다.공단 스스로도 노력해야 한다. 캐나다 연기금(CPPIB)의 경우 2006년경부터 다양한 대체자산에 투자해 수익률을 크게 끌어올렸다. 장기 수익률이 연 10%를 웃돈다. 국민연금은 장기 운용목표가 없고 정해진 자산군만 투자할 수 있어 시장 변화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연금개혁에 시간이 필요한 만큼 이제라도 부족한 인력을 채우고 투자 체질을 개선해 다시 도약해야 할 때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2018년 5월 경남 진주시 S치과의원은 자본금 122억 동(약 6억5000만 원)으로 베트남 호찌민 2군 주상복합건물에 약 230m²(약 70평) 규모로 치과의원을 열었다. 스타벅스와 CGV영화관 등이 들어선 유동 인구가 많은 대로변 건물이다. S치과의원은 이후 호찌민 10군과 하노이에도 추가로 의원을 개설했다. 현지에 진출한 의료인들은 “베트남엔 치의대가 거의 없을 정도로 전문성이 많이 부족하다. 시장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입을 모은다. 전북 전주 예수병원도 올해 2월 캄보디아 프놈펜에 진출해 종합병원(300병상) 건립과 의대, 치대, 간호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병의원 설립, 운영 컨설팅, 수탁 운영 등 의료 관련 해외 누적 투자는 31개 국가, 205건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다소 주춤했던 기간이 있지만 최근 9년간 연평균 투자 증가율은 45.8%에 달한다. 중국과 미국, 중동 등에 많이 진출했지만 최근에는 중국 시장의 대안으로 떠오른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등 동남아 국가들도 많아졌다. 그렇다면 왜 해외로 가는 것일까. 현행 의료법에 따르면 국내 병의원은 의사 등 의료인만이 설립하거나 투자할 수 있다. 규모를 더 키우고 싶어도 비의료인의 투자를 받을 수 없고 시장도 사실상 포화상태라 외연 확장에는 한계가 있다. 반면 베트남에선 외국인이 100% 투자할 수 있으며 의사가 아니라도 병원을 설립할 수 있다. 누구나 투자자를 모아 기업처럼 의료 사업을 할 수 있는 셈이다. 일부 의사들은 “베트남 증시에 한국 병원 최초로 상장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게다가 의료 규제 철폐에 적극적인 현지 분위기도 매우 고무적이다. 지난해 인도네시아는 외국인 의사의 개업을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고 필리핀도 보건의료 분야에서 외국인 투자에 대한 제한을 완전히 풀었다. 낡은 현지 공공병원들은 외부 투자를 받아 최신 장비와 기술을 도입하고 싶어 한다. 신약 치료, 비대면 진료 등 국내에선 제한적인 영역도 시도해 볼 수 있다. 넘어야 할 장벽도 존재한다. 한국 의사가 베트남 현지 의사 면허증을 받더라도 일부 진료만 할 수 있다. 현지에 전임자를 두기엔 비용 문제 등이 커서 현지를 오가며 진료하지만 응급 상황에선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현지 보건당국의 잦은 단속 등도 풀어야 할 과제다. 반면 현지에 진출한 병원들은 의료진 파견, 수익 등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으며 ‘개인 병원’이라고 불리는 영세성에서 벗어날 계기가 될 수 있다. 제약사, 의료기기 업체, 바이오 벤처기업 등과 함께 진출해 동반 성장이 가능하며 사회공헌이라는 무형의 가치를 쌓고 국가 이미지까지 제고할 수 있다. 싱가포르 래플스메디컬그룹은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 13곳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기업형 병원으로 증시에도 상장돼 있다. 중국은 2000년대 의료개혁을 시행한 후 민간 의료를 집중적으로 육성했고 병원들이 해외에도 진출하며 경쟁하고 있다. 의료는 공익성이 강하지만 환자에게 치료비를 받고 수익을 내야 하는 경영의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바이오, 금융, 관광 등으로 파급 효과도 크다. 부디 국내 병원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도심에서 북동쪽으로 약 70km.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서울대병원이 10년째 위탁 운영하는 왕립 셰이크칼리파전문병원이 있다. 248병상 규모로 전체 의료진 800명 중 한국인만 100명이 넘는다. 서울대병원은 2014년 미국 스탠퍼드·존스홉킨스, 영국 킹스칼리지, 독일 샤리테 등 글로벌 병원들과 경쟁해 계약을 따냈다. 국내 병원이 해외 종합병원급 의료기관의 위탁운영권을 따낸 첫 사례다. 초창기 5년간 1조 원의 운영예산이 책정됐고 별도로 연간 70억∼80억 원의 위탁운영 수수료도 받았다. 운영 2년 만에 외래환자가 5만 명을 넘었다. 2019년 재계약에 성공했고 이달 중순 2번째 재계약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까. 일단 이번 재계약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이 병원은 왕실 산하인데 다른 왕실 산하 기관이 위탁운영을 맡겠다고 나서며 갑자기 경쟁 구도가 형성됐다. 또 왕실 측이 병원에 운영비 절감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병원 수익성도 낮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심장, 뇌신경, 암에 집중하고 다른 진료 과목을 구조조정하란 요구도 있었다. 전문병원이라고 해도 일정 부분 종합병원 기능을 유지해야 하는데 수요가 많은 정형외과, 안과를 없애라고 하니 전체 환자가 줄고 수익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운영 초기와 비교하면 한국인 의료진도 많이 줄었고 진료비 삭감, 의료 분쟁 등 크고 작은 불협화음도 있다. 이런 이유로 서울대병원 내부에선 그만두자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걸프협력회의(GCC) 6개 회원국의 헬스케어 시장은 679억 달러(약 92조 원)에 달했다. 중동 부국들은 메이오클리닉, 존스홉킨스, 클리블랜드, 하버드 등 선진국 유수의 병원과 의대를 유치하며 현지 의료 수준을 높이고 의료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UAE만 해도 2022년 의료관광객 67만4000명을 유치해 10억 디르함(AED·약 3700억 원)을 벌어들였다. 현지에 진출한 글로벌 의대와 병원들은 임상연구, 교육, 진료 각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장이다. 병원 수출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많다. 한국 의료에 대한 현지인들의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긴 하지만 같은 조건이면 여전히 미국과 유럽 병원을 선호하고 있다. 외국인 환자들과 쉽게 영어로 소통하며 진료할 수 있는 의사와 간호사도 부족한 실정이다. 해외 진출 사례가 많지 않다 보니 국가별 상황별 노하우 축적도 필요하다. 상호 의료진 면허 인정, 의료사고 문제 등 현실적인 과제도 많다. 올해 6월 카타르 도하에는 10층 규모의 ‘한국의료센터’가 문을 열었다. 서울아산병원, 라임나무치과, JK성형외과, 안강병원 등이 불임, 임플란트, 미용성형, 재활 등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울아산병원은 2026년 개원을 목표로 두바이에 65병상 규모인 ‘UAE아산소화기병원’도 추진하고 있다. 분당서울대병원은 지난달 300병상 규모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종합병원 프로젝트에서 사업 총괄을 맡았다. 의료 해외 진출은 경제적 측면에서도 이득이지만 국격을 높이고 양국 협력에 기여하는 외교적인 역할도 한다. 제2, 제3의 왕립 셰이크칼리파전문병원이 앞으로 더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최근 영국의 대학 평가 기관인 ‘THE(Times Higher Education)’가 발표한 올해 대학 순위에서 독일 대학들의 약진이 돋보였다. 뮌헨공대(30위)와 뮌헨대(38위), 하이델베르크대(47위) 등 8개 대학이 전 세계 100위 안에 들었다. 국내 대학은 서울대(62위) 등 3곳에 불과했다. 미국 시사잡지 US뉴스앤드월드리포트의 글로벌 대학 평가에서도 독일 대학 5곳이 100위 안에 포함됐다. 독일에선 이른바 명문대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고교 졸업생들은 ‘아비투어(대학입학자격시험)’만 통과하면 자유롭게 전공을 선택하고 진학할 수 있다. 학과별로 정원이 제한되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 결원이 발생하면 전국 어느 대학이나 자유롭게 전학할 수 있다. 베를린자유대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결원이 생긴 뮌헨대로 옮길 수 있는 셈이다. 오랜 기간 평준화 정책을 고수해 온 독일 대학들은 글로벌 대학 순위에서 늘 뒤처져 있었다. 평가기관마다 편차가 있지만 많아야 한두 개 대학이 100위 안에 드는 정도였다. 독일 대학들은 고교 상위권 학생들을 엄선해 엘리트로 키우는 아이비리그, 옥스브리지와 달리 일반고 졸업생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교육하는 데 무게를 둔다. 교수 1인당 학생 수도 미국, 영국의 명문대와 비교하면 많은 편이다. 반면 대학 진학률은 2000년 33%에서 2021년 55%로 증가했다. 직장인 전형도 크게 늘렸다. 자동차 정비사로 일하다 뒤늦게 기계공학과에 진학하는 이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성적만으로 따지면 중위권 이하 진학이 크게 증가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다. 독일 대학들은 대부분 국공립이고 무상교육이라 교육의 질과 국제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았다. 수십 년째 이런 지적이 이어졌지만 평준화의 원칙을 깨지는 않았다. 대학 경쟁력은 결국 국가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급기야 독일 정부는 2005년부터 뛰어난 성과를 낼 5∼10개 대학을 선정해 지원하는 ‘우수 대학 육성 사업(Exzellenzinitiative)’을 추진했다. 1기(2006∼2012년)와 2기(2012∼2019년) 사업에 46억 유로(약 7조 원)의 예산이 투입됐고 현재 3기(2019년∼) 사업이 진행 중이다. 베를린공대, 뮌헨공대 등 명문 9개 공대는 연합체 ‘TU9’을 만들고 따로 관리했다. 학부 과정이 없어 입학하면 석사 이상의 학위를 취득해야 했던 교육 시스템도 개편해 미국과 영국 대학처럼 학사 학위 과정을 신설했다. 입학 정원제를 강화해 성적순으로 학생을 뽑는 대학도 크게 늘었다. 우수한 외국인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영어로 진행되는 전공도 늘렸다. 그 결과 슈피겔 등 독일 유수 언론들이 “유럽 대륙 대학들은 계속 대학 순위가 처지고 있으며 상황을 개선시킬 별다른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대학 순위가 고등교육의 모든 성과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대학들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경쟁력을 강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수백 년 전통을 깨고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는 독일 대학의 사례를 본보기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대학의 인재 양성은 산업의 근간이다. 국내에서도 명문대와 지방대를 가리지 않고 재도약의 사례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라오스 비엔티안 와타이 국제공항에서 국가주석궁까지 거리는 약 5km. 현지 승차공유 서비스 ‘로카’로 이동하면 내릴 때 요금이 10만 킵(약 6700원) 정도 나온다. 하지만 다른 승차공유 서비스인 ‘인드라이브’를 이용하면 7만 킵(약 4700원) 이하에도 갈 수 있다. 인드라이브는 승객이 직접 기사와 택시비를 흥정하는 구조다. 승객이 목적지를 설정하면 ‘인드라이브’가 적정 금액을 산출하는데 승객이 마음껏 올리고 내려 제시할 수 있다. 기사들이 제시 금액을 보고 역제안할 수도 있다 보니 밀당이 빈번하다. 심야 시간이나 외진 곳에선 요금이 올라가고 한산한 시간대엔 가격이 내려간다. 동남아 시장 진출이 겉보기에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쉽지는 않다. 과거 ‘양말 한 켤레씩만 팔아도 10억 켤레가 넘는다’는 단순한 전략으로 중국에 진출했던 기업들은 대부분 실패했다.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뉴7’ 국가들에서도 현지 시장을 제대로 읽지 못해 철수한 유니콘 기업들이 많다. 글로벌 앱 ‘인드라이브’와 로컬 앱 ‘로카’가 현지 밀착 전략으로 라오스 시장에 안착했으나 우버, 그랩 등은 여전히 사용되지 않고 있다. 베트남에서도 스타벅스, 맥도널드, 버거킹은 맥을 못 추고 있고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은 사업을 접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동남아를 하나로 뭉뚱그려 판단하지 말고 개별 국가의 특성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도차이나 3형제’인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는 보통 한 묶음으로 묶이는데 사실 서로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 과거 공산주의 국가에서 입헌군주국으로 변신한 캄보디아 경제는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다. 신탁회사를 통해 사실상 외국인이 토지를 매매할 수 있고 일상에서 달러가 통용돼 환율 방어에도 유리하다. 또 라오스는 경제적, 민족적 측면에서 태국에 훨씬 가깝다. 잘로(베트남), 라인(태국), 페이스북 메신저(필리핀, 캄보디아) 등 선호하는 메신저는 국가별로 제각각이지만 네이버 같은 포털사이트 역할은 페이스북이 대부분 맡고 있다. 변화가 더딜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동남아 국가들은 이미 ‘현금이 필요 없는 사회’로 상당 부분 진화했다. 신용카드 보급을 건너뛰고 누구나 보유한 스마트폰을 활용한 QR코드 결제가 자리 잡았다. 노점상에서도 QR코드 결제가 가능하고, 상점에선 QR코드 결제만 받는 곳이 많다.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000달러 안팎인 국가에서도 이런 상황은 마찬가지다.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수출하는 라오스에선 BYD 등 중국산 저가 전기차들이 택시로 사용되고 캄보디아에선 ‘툭툭(Tuk-Tuk)’이라 불리는 삼륜차마저 전기차로 세대교체가 진행 중이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투자 성공 사례도 상당하다. 베트남 국방부 산하 이동통신사 비엣텔은 현직 장성이 최고경영자(CEO)로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동티모르 등 10개국에 진출했다. 덴마크 맥주 기업 칼스버그는 라오스 국영기업이었던 ‘비어라오’의 지분 50%를 인수해 시장을 장악했다. 승리하려면 결국 현지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바탕으로 맞춤형 전략을 세워 발 빠르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이미 숱한 경쟁자들이 뛰고 있으며 살림(인도네시아), CP(태국), SM(필리핀), 칩몽(캄보디아) 등 현지 재벌들도 강력한 경쟁자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지난해 서울의료원의 적자는 379억 원.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지원금 227억 원이 투입됐음에도 적자였다. 부산의료원도 적자 178억 원을 기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당시 지급했던 손실보상금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진료 실적이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원인이다. 지난해 지방의료원 35곳 중 33곳이 적자로 적자액 합계는 3107억 원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지방의료원 신축·증설에 의욕적으로 나서고 있다. 서울시와 인천시 등은 제2의료원을, 부산시는 서부산의료원을 추진하고 있다. 광주시와 울산시도 지방의료원 신설을 검토하고 있다. 의료 안전망을 더 꼼꼼하고 튼실하게 만들겠다는 기본 취지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면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지방의료원은 “코로나19 환자에게 집중하느라 다른 병원으로 보낸 환자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이유를 댄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환자들이 지방의료원을 선호하지 않는 것이다. 지방의료원을 하나 신축하려면 비용은 얼마나 들까. 병원 하나를 짓는 데 민간 병원의 경우 800∼1000개 병상 기준으로 5000억 원 정도가 필요하다. 인천시 제2의료원 사업비는 4272억 원으로 추산되고 있다. 세운 뒤 의료기기 성능 개선, 유지 보수 등을 위한 꾸준한 투자도 이어져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매년 수십억∼수백억 원의 예산을 지방의료원에 지원하고 있지만 의료진 채용마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강원 영월의료원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구하지 못해 지난해 11월 이후 10번이나 재공고를 냈다. 경기도의료원 안성병원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1명을 채용하지 못해 3개월 이상 야간 진료를 중단했다. 해법은 없을까. 먼저 지방의료원에 제대로 투자해 경쟁력을 확보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최신 의료기기 등을 대폭 늘리고 우수 의료진을 대거 확보한다면 환자들도 돌아올 수 있다. 다만 기존 대형 병원 브랜드를 단기간에 따라가는 건 쉽지 않으며 의료진 확보도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과제다. 일부 지방의료원의 경우 지금도 의사에게 연봉으로 5억∼6억 원을 주고 있다. 정부는 “지역의료를 강화하고 지방 공공병원을 수도권 대형 병원 수준으로 키우겠다”고 했지만 이 구상도 지방의료원 대신 지역 거점 국립대병원 위주다. 다들 대형 병원으로 가다 보니 지방의료원은 경제적으로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고 이 때문에 적자가 악화된다. 큰돈을 들여 지역의료원을 만들었는데 악순환만 되풀이되는 셈이다. 차라리 서민들에게 의료 바우처를 지급하고 민간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대학병원장 출신의 한 기관장은 최근 고위공직자에게 “정부가 공공의료를 살리려면 정책 책임자인 장차관, 국회의원, 지자체장부터 지방의료원에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기관장은 “자신들도 지방의료원을 이용하지 않으면서 왜 애꿎은 국민들에게만 대형 병원에 몰린다고 지적하느냐”고도 했다. 막대한 예산만 낭비하고 정작 지방의료는 살리지 못하는 상황이 지금이라도 바뀌길 기대한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지난달 20∼24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제10차 세계물포럼. 148개국 1만3000여 명이 참석한 이 행사에 누수 방지와 관련된 각종 첨단 기술이 선보였다. 열화상 드론이 제방에서 물이 새는 틈을 찾아냈고 지하투과레이더는 시설물 균열을 탐색했다. 수중 드론은 관로에 투입돼 안전상태를 점검했다. 2022년 기준 전국 상수도 누수율은 9.9%로 서울시민들이 1년간 쓰는 물의 61%가 새고 있다. 생산원가로 따지면 약 7000억 원을 그냥 버리는 셈이다. 한국은 1인당 강수량이 전 세계 평균의 약 8분의 1 수준이고 하천 취수율이 36%에 불과해 물에 관한 스트레스가 높은 국가군에 속한다. 반면 생활 및 산업용수는 꾸준히 증가해 최근 10년간 1인당 사용량은 20L가 늘었다. 물 쓰듯 물을 쓸 수 없다. 누수 원인은 낡은 배관 때문이다. 내구 연한인 설치 21년을 넘긴 수도관이 37%에 달한다. 하지만 매년 교체하거나 개량하는 비율은 1% 안팎에 불과하다. 수도관 공사는 땅을 파서 관을 꺼내고 다시 매설해야 하기 때문에 큰 비용이 소요된다. 서울(1.6%) 부산(4.2%) 대구(2.4%) 등 대도시 누수율은 낮은 편이지만 재정 상황이 상대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강원 삼척(44%) 정선(41%), 전남 영암(45%), 경북 경주(41%) 등은 생산량 절반 가까이를 버리고 있다. 사실 161개 지방상수도 사업자 약 80%는 인구 30만 명 이하 지역을 담당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게 쉽지 않다. 대도시와 군 지역의 수돗물 생산원가는 3배 가까이 차이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환경부는 2017년부터 노후 상수도 관망을 개선하기 시작했고 지난해에만 16곳의 정비사업을 마쳤다. 누수율이 30%에 달했던 전북 순창군은 배관 교체로 누수율이 1%대로 낮아지는 성과도 냈다. 다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국 누수율은 2013년 10.7%에서 크게 떨어지지 않고 있다. 환경부가 내세운 선진국 누수율 5%에 도달하려면 좀 더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지방상수도는 공기업으로 분류돼 수익을 낼 때 투자를 할 수 있다. 반면 대부분 사업성이 떨어지는 곳에 설치돼 시설 투자가 쉽지 않다. 국비 지원을 더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디지털과 인공지능(AI)을 결합한 관망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배수관에 센서를 설치해 수질, 수압, 여과장치 등을 파악하고 대응하는 방법이다. 낡은 배관에서만 물이 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노후관 개량과 함께 스마트 관망 관리로 시스템을 효율화하는 게 필요하다. 상수도 지하배관망의 지리정보체계(GIS)는 광역시만 100% 완료했을 뿐 군 단위 지역에는 평균 35% 정도 설치에 그치고 있다. ‘세계는 물의 전쟁 중’이라고 불릴 만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막론하고 치수(治水)에 관심이 많다. 영국 런던시 템스워터는 지난해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고 데이터 딥러닝을 통한 누수 관리에 나섰다. 아랍에미리트(UAE)도 AI를 활용한 수돗물 공급망 개선에 나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30년 기준 세계 물 수요는 공급을 40% 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K워터가 내수시장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통할 수 있도록 전략을 다시 짜야 할 때다.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
“한국 병원에서 승모근 보톡스를 맞으면 1만2000엔(약 10만4000원)인데, 일본에선 6만 엔(약 52만 원)이나 내야 해요.” 지난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환자가 사상 처음으로 60만 명을 넘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전 최대치보다 10만 명 이상 많다. 환자들은 일본(18만 명)과 중국(11만 명) 미국(7만 명) 순이지만 베트남 태국 등 ‘아시아 뉴(NEW) 7’ 국가 환자들도 9만 명을 넘는다. 경제적 파급 효과는 7조 원, 취업유발 인원은 6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왜 한국에서 치료받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의료기술은 선진국인데, 비용은 개발도상국 수준이기 때문이다. 한국 의사들은 암과 간 이식, 뇌혈관 등 중증질환 치료뿐만 아니라 라식, 임플란트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여기에 K팝, K드라마 등을 좋아하는 외국인들은 한국 스타일 성형을 선호한다. 코로나19를 거치며 ‘드라이브스루’ 검사가 알려지는 등 한국 의료 시스템의 브랜드 파워도 높아졌다. 하지만 이런 추세가 계속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2019년 16만 명 넘게 한국을 찾았던 중국 환자들은 지난해 30%가량 줄었다. 러시아 환자도 많을 때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외국인 환자 수요는 언제라도 경제, 외교, 안보, 유행 등의 영향으로 급감할 수 있다. 싱가포르, 태국 등 쟁쟁한 경쟁자도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문을 더 열어야 한다. 현재 외국인 환자들은 의료관광 비자(90일), 치료요양 비자(1년) 등을 받고 입국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개발도상국 환자와 보호자들은 비자 발급이 까다로워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고 얘기한다. 의료관광 비자 발급이 암 등 일부 중증질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의료관광 비자로 들어와 치료 기간이 늘어나면 치료요양 비자로 바꿔야 하는데, 임대차계약서 등 증빙 서류가 필요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무부와 보건복지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나서고 있지만 부처별 이해관계가 달라 진척이 더딘 상황이다. 실제로 비자 발급이 거절되거나 지연된 몽골 환자들은 한국 대신 중국이나 튀르키예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반면 태국은 의료관광을 유치하기 위해 지난해 직계가족 3명까지 동반하고 1년까지 체류할 수 있는 비자를 도입했다. 피부과, 성형외과에 쏠린 수요를 중증질환으로 옮길 필요도 있다. 미용 수술은 유행에 민감해 수요 변화가 클 뿐 아니라 태국, 말레이시아, 브라질, 튀르키예에서도 가능하다. 그 대신 고난도 수술에서 꾸준한 실력을 보여야 중증 환자들이 선호하는 미국, 독일 같은 ‘업계 톱티어’에 오를 수 있다. 만혼이 증가하는 국가가 많은 상황에서 난임 시술 같은 글로벌 경쟁력이 높은 분야에 집중하는 것도 경쟁력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다. 이 밖에도 비대면 진료, 의료관광 생태계 복원, 전문 통역사 확보, 지역 특화 등 풀어야 할 과제는 넘친다. 외국인 환자들은 치료만 잘한다고 오지 않는다. 할랄을 엄격하게 따지는 무슬림에겐 음식도 매우 중요하다. 지난해 내과통합(9만 명), 건강검진(5만 명), 한방통합(1만8000명), 치과(1만5000명)를 방문한 외국인도 많았다. 고무적인 성과인 만큼 모처럼 되살아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더 준비해야 할 때다.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