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장원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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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입사해 사회부 경제부 정치부 등을 거쳤습니다.

취재분야

2025-04-02~2025-05-02
칼럼100%
  • [오늘과 내일/장원재]‘혐중 시위’ 막을 ‘카운터 시위’가 필요하다

    이달 17일 저녁 서울 광진구 양꼬치 거리에선 청년 200여 명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행진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자로 구성된 시위대는 “짱깨, 북괴, 빨갱이는 대한민국에서 빨리 꺼지라”는 구호를 수십 차례 반복하며 한자 간판 사이를 지났다. 한 음식점 직원과는 몸싸움이 벌어져 경찰도 출동했다. 시위대는 해산 후에도 “뜨거운 물을 뿌리며 위협했다”며 해당 음식점에 ‘별점 테러’를 이어갔다.혐한시위 연상케 하는 혐중시위 이날 시위대의 모습은 일본에 있었던 혐한시위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2013년경부터 도쿄 신오쿠보 등 일본 내 코리아타운에서 행진하며 “조선인을 죽이자”, “바퀴벌레를 박멸하자” 같은 구호를 외쳤다. 이들이 처음부터 거리로 나온 건 아니다. 일본에선 2000년대 초반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2채널’을 중심으로 재일교포들이 부당한 특권을 누린다는 루머가 확산됐다. 경제가 뒷걸음치며 고용 상황이 악화되자 박탈감과 소외감을 느끼던 이들이 재일교포를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이후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이 결성됐고, 2012년 말 아베 정권의 재등장으로 극우 세력이 목소리를 높일 환경이 조성되면서 거리 시위가 본격화했다.‘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경찰 보호를 받으며 혐오 발언을 일삼는 시위대 앞에서 신오쿠보 상인들은 무력했다. 대신 시위대를 막은 건 ‘카운터스’라고 불리던 일본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몇 배의 인원으로 시위대를 둘러쌌고, 경찰이 끌어낼 때까지 바닥에 앉아 행진을 막았다. 시위대 중 일부는 ‘친하게 지내요’라는 한글 손팻말을 든 친한파였지만, 다수는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다. 일본이 인종차별주의자가 활개 치는 나라가 되는 걸 용납할 수 없어 나왔다”고 했다. 혐한시위대를 수적으로 압도하는 카운터 시위를 보면서 용기를 얻은 재일교포들은 국회 증언을 하며 여론을 움직였고, 유엔 등 국제사회까지 나서자 일본 국회는 2016년 헤이트 스피치 규제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해 6월 5일 가와사키시에서 카운터 시위대와 재일교포가 함께 혐한시위대를 둘러싸고 신고 집회를 처음 취소시켰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한 재일교포 변호사는 “드디어 막았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감격스러워했다. 이후 혐한시위대의 기세는 한풀 꺾였고, 대규모 거리 시위도 자취를 감췄다.한국에도 카운터 시위가 필요하다 코리아타운에 난입한 혐한시위대와 광진구 양꼬치 거리를 행진한 혐중시위대는 닮은 구석이 많다. 사회에 대한 불만을 소수집단의 탓으로 돌리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외국인이 특권을 누린다’는 음모론을 퍼뜨리며,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높일 환경이 조성되자 거리로 나와 혐오 발언을 일삼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거리 집회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자칭 ‘애국보수 청년’들은 전국 곳곳에 ‘중국인 유학생은 100% 잠재적 간첩’ 등의 플래카드를 걸며 혐오 메시지를 확산시키고 있다. 정당 현수막이라 철거도 쉽지 않다. 중국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인구 감소로 좋든 싫든 다문화 사회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한국에서 음모론에 기반해 특정 국적자에 대해 혐오 발언을 일삼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시위대는 스스로를 보수로 규정하지만 원색적 혐오 발언은 보수의 품격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온라인에선 이미 혐오 발언을 일삼는 극우 유튜버들을 신고해 자금줄을 차단하자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혐한시위대를 막은 일본 시민들에 빗대 스스로를 ‘카운터스’라고 부른다. ‘카운터 스피치’는 유엔에서 헤이트 스피치에 맞서는 방법 중 하나로 권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차이나타운에서 혐중시위가 벌어진다면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카운터 시위대가 비폭력적 방식으로 이들을 막아 세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 2025-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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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여전히 풍차와 싸우는 사람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용산 관저에서 퇴거한 다음 날(12일) 광화문과 사저 인근에는 총 1만2000여 명(경찰 추산)의 지지자가 모였다. 이들은 ‘윤 어게인(YOON AGAIN)’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같은 구호를 외쳤다. 14일 윤 전 대통령이 내란 혐의 재판에 처음 출석할 때도 법원과 사저 앞에서 지지자들은 ‘윤 어게인’을 외쳤다.‘윤 어게인’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직후 지지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한 문구다. 다만 의미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광화문 집회를 주도하는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는 “윤 전 대통령이 5년 후 대선에 재출마할 것”이라며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하지만 헌법상 대통령 중임은 금지돼 있어 현실화되려면 개헌이 필요하다. 일부에선 비유적으로 해석한다. ‘윤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가자는 의지의 표현’ 또는 ‘윤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갈 후보와 대선에서 이기자는 취지’란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든 이 구호를 외치는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헌재 파면 결정을 인정할 수 없고 계속 싸우겠다”는 태도다.예언 틀렸지만 믿음은 더 강해져 100일 가까이 거리에서 “탄핵 기각”을 외쳤던 이들이 헌재의 만장일치 파면 결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순 있다. 다만 실망과 분노가 헌법 질서에 대한 부정이나 음모론으로 이어지는 건 우려스러운 대목이다.“100% 기각을 확신한다”고 했던 극우 유튜버들은 윤 전 대통령 파면 직후부터 “헌법재판관 의견이 5 대 3이었는데 막판에 보수 재판관 한 명이 배신해 무너졌다”, “더불어민주당이 약점을 잡아 보수 재판관을 협박했다” 등 각종 음모론을 퍼뜨리고 있다. 온라인에도 “좌파 판사 카르텔이 사기 탄핵을 했다”, “반국가 세력이 언론을 장악해 여론을 조종한 결과다” 등 밑도 끝도 없는 일방적 주장이 퍼지고 있다. 사회심리학에는 신념과 다른 현상이 발생했을 때 심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을 부정하거나, 음모론에 빠지거나, 자기 합리화에 나서는 경향이 있다는 ‘인지부조화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을 발표한 리언 페스팅거 교수팀은 실제로 사이비 종교 집단에 잠입했는데 대홍수와 외계인 등장이 예언된 날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자 신자 상당수가 “기도가 세상을 구원했다”, “외계인이 소요 사태를 우려해 그냥 돌아갔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특히 금전이나 시간을 많이 투자한 신자일수록 믿음은 더 강했다. 자신이 그동안 헛된 일을 했다는 걸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현저히 비합리적이고 자의적인 계엄” 헌재는 파면을 결정하면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현저히 비합리적이거나 자의적인 판단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과 변호인단의 주장과 달리 반국가세력 때문에 국가가 중대한 위기에 처한 상황도 아니었고, 부정선거나 북한 중국 러시아 등과의 하이브리드전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였다고 볼 객관적 근거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거리에 남은 상당수는 ‘윤 어게인’을 외치며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반국가세력과 끝까지 싸우겠다”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여기에는 윤 전 대통령이 헌재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로 일관하는 영향도 크다. 파면당하고도 개선장군처럼 사저로 돌아온 윤 전 대통령을 보며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주인공 돈키호테가 떠올랐다. 그는 “거인을 무찌르겠다”며 놋그릇을 머리에 쓰고 풍차에 돌진했다가 나가떨어졌는데 나중에 왜 그랬냐는 질문을 받고 “마법사가 막판에 거인을 풍차로 둔갑시켰다”며 남 탓을 했다. 하나 확실한 건 윤 전 대통령과 지지자들이 계속 ‘반국가세력 척결’을 외치며 풍차에 돌진할수록 국민 다수와 더 유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보수 진영의 재건은 늦어질 것이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 2025-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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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가 만난 사람]“의성 산청 산불 위험도 평년의 4배… 기후변화로 한반도 전역 위험권”

    《지난달 21일부터 경북 경남 울산 등에서 발생한 동시다발적 산불은 ‘사상 최악’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서울 면적의 80%에 해당하는 산림이 불에 탔고 7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2022년 울진 삼척 산불도 역대급이었는데 3년 만에 더 큰 산불이 발생한 것이다. 기후환경 전문가인 정수종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지난달 31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경북 의성군과 경남 산청군의 산불위험지수(FFDI)를 분석해 보니 산불 발생 직전 위험도가 평소의 4배였던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또 “기후변화로 한반도 전역이 대규모 산불이 발생하기 쉬운 여건이 됐다”며 “이제 3, 4월 산불이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는 만큼 사전 모니터링과 예방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번에 동시다발적으로 산불이 발생한 원인이 뭔가.“산불은 실화 등 여러 원인으로 발생할 수 있다. 문제는 왜 이렇게까지 크게 확산됐는지인데 이는 기후변화라는 요인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대기가 건조하고 땅의 수분이 적은 상태에서 마른 낙엽까지 쌓여 있으면 작은 불씨도 폭발적으로 번지기 쉽다. 이번에 대기와 땅, 낙엽의 건조도를 종합적으로 반영한 산불위험지수를 분석해 보니 의성과 산청의 경우 3월 말 산불 위험도가 과거 40년 평균 대비 약 4배로 높아진 상태였다. 기온이 오르고 대기가 건조해 언제든 큰 산불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왜 산불위험지수가 높아졌나.“겨울에 눈이나 비가 많이 안 왔기 때문이다. 눈이 적게 쌓인 상황에서 날씨가 풀리면 녹은 눈이 증발하며 땅이 금세 건조해진다. 땅만 마르는 게 아니라 산불 발생 시 연료 역할을 하게 되는 식물과 낙엽에서도 수분이 증발한다. 특히 식물의 경우 뿌리까지 마르면서 산불이 순식간에 옮겨붙기 쉬운 상태가 된다.” ―산불이 발생한 11곳 대부분이 남부 지역이었다.“의성, 산청뿐 아니라 지난겨울 남부 지역에 강수량이 적었던 영향으로 보인다. 반면 수도권을 포함한 중부 지역에는 눈이 상당히 왔다. 땅이 축축하고 쌓인 낙엽에 수분이 많으면 실화가 발생하더라도 금방 불길이 사그라든다. 이 때문에 올 초 전문가 사이에선 ‘중부 지역에는 올봄 큰 산불이 없을 것 같다’는 예상이 많았다.” ―산불에 특히 취약한 지역이 있나.“그건 해마다 다르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한반도의 기온은 과거보다 올라간 반면에 강수량은 소폭 줄었다. 전반적으로 산불이 나기 좋은 환경이 된 것이다. 다만 강수량은 해마다 지역별로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특정 지역이 항상 산불에 취약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2022년에는 경북 울진군과 강원 삼척시를 중심으로 큰 산불이 발생했고 2023년에는 서울 인왕산과 북악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산불이 났다. 한반도 어디서든 큰 산불이 날 수 있는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언제가 위험한가.“과거 자료를 보면 매년 3, 4월 땅이 급속하게 마르면서 산불이 발생할 확률이 커진다. 특히 직전 겨울 강수량이 적었던 지역은 한마디로 땅에 기름이 뿌려진 상태라고 보면 된다. 과거처럼 아무렇지 않게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쓰레기를 태우다가는 큰일 날 수 있다. 더구나 기후변화로 지역별 강수량 편차가 확대되고 있어 산불 피해는 갈수록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2022년 울진 삼척 산불을 다룬 논문을 발표했다.“지난해 국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강원 강릉·동해·삼척시와 경북 울진군의 과거 100년 치 기상관측 자료를 분석했다. 그 결과 겨울 기온이 평균 4도 상승하고, 강수량은 17mm 감소했으며, 상대습도는 8%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지역이 ‘춥고 습한 겨울’에서 ‘따뜻하고 건조한 겨울’로 바뀌면서 화재에 더 취약해지고 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생각보다 기후변화의 영향이 커서 나도 놀랐다.” ―최근 해외에서도 대형 산불 소식이 많이 들린다.“올 1월 발생한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산불, 지난해 10월 발생한 그리스 산불, 지난해 여름 발생한 캐나다와 미국 하와이 산불 등은 모두 인간의 힘으로 끄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산불이 더 길게, 더 크게 발생하는 것 역시 기후변화 때문이다. 2018년 ‘네이처 기후변화’에 발표한 논문에서 기후변화에 따른 대기 건조화 현상을 분석했는데 미국 캘리포니아주, 호주, 지중해, 중국 남부 등에서 큰 산불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실제로 이들 지역에서 역대급 산불이 이어지고 있다.” ―대형 산불의 피해를 줄일 방법은 없나.“산불이 대형화되는 건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만큼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피해를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다. 예를 들어 강수량, 대기 중 습도, 식물의 수분 등 다양한 변수가 포함된 산불 위험 지수를 만들고 지역별로 모니터링하다가 지수가 높아지면 해당 지역을 집중 관리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 인력을 대거 투입해 산불 발생 시 연료가 될 수 있는 고사목과 낙엽 등을 치우고, 주민들이 쓰레기를 소각하지 못하게 하고, 등산객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지금도 정부가 건조주의보와 산불 위기 경보를 발령한다.“지금의 경보 시스템은 너무 단순하고 과학적이지도 않다. 무작정 ‘건조하니 산불을 조심해 달라’고 하는 대신에 한반도의 달라진 기후까지 감안해 실효성 있는 산불위험지수를 만들고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한다. 사전 예방에 드는 돈을 아까워하면 안 된다. 그런데 국내에선 예산을 들여 예방 조치를 취하고 몇 년 동안 아무 일 없으면 ‘괜히 예산을 투입했다’고 담당자가 질책당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임도 및 진화 헬기 확충 등도 필요하지 않나.“임도를 만들고 산불 진화 헬기를 확충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다만 투입 대비 효과로 보면 산불 발생을 막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기존 산불 전문가들은 과거에 유효했던 방식을 주로 제안하는데 지금은 기후변화로 상황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 새로운 접근과 해결 방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저희 연구팀이 지난해 발표한 울진 삼척 산불 논문이 기후변화와 산불의 연관성을 정밀하게 분석한 아시아 지역 첫 논문이었다. 아직 기후변화로 대형화되는 산불에 대한 연구가 매우 부족하다.” ―말씀하신 사전 대응 강화에 예산이 얼마나 필요한가.“정확히 계산해 보진 않았다. 다만 산불위험지수는 지금 발표되는 기상 자료를 토대로 충분히 산출할 수 있다. 폐쇄회로(CC)TV 확충 등 인프라 개선에 다소 예산이 필요하겠지만 피해 복구 예산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산불이 다른 재난과도 이어질 수 있다고도 했다.“산불은 그 자체로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주지만 다른 재난을 유발하며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산불로 검게 그을린 지면은 열을 쉽게 흡수하기 때문에 땅속까지 마르면서 산사태나 홍수가 발생하기 쉬운 환경이 된다. 산불 시 발생한 미세먼지가 공기를 오염시키는 동시에 땅이 침식되면서 재가 지하수로 유출돼 하천도 오염된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해야 할 나무가 소실된 탓에 기후변화를 가속화시키는 요인도 된다.” ―다른 나라는 산불에 어떻게 대응하나.“최근 세계 각국이 선제적 대응에 나서고 있다. 캐나다는 산불만을 감시하는 전용 위성을 띄우겠다고 발표했다. 제가 근무했던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레이더를 투과시켜 낙엽 아래 잔불까지 감시할 수 있는 센서를 개발하고 있다. 다만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은 땅이 워낙 넓다 보니 산불 예방에 한계가 있다. 인프라도 노후화돼 아직 나무 전봇대를 쓰는 곳도 많다. 산불이 발생했을 때 진화 대신 방화선을 구축해 태울 만큼 태우고 꺼지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국토가 크지 않고, 인적 자원이 우수하며, 정보기술(IT) 역량이 뛰어난 한국은 산불 대응 기술을 선도할 잠재력이 충분하다.” ―기후변화가 산불 외에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한반도는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교차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기후변화로 인한 영향을 일 년 내내 받고 있다고 보면 된다. 봄에는 산불, 여름에는 집중호우, 가을에는 늦장마와 태풍, 겨울에는 폭설이 반복되고 있어 연중 대응이 필요하다. 게다가 기후변화의 영향이 갈수록 커지는 만큼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예측하기도 쉽지 않다. 정부와 국민 모두 이제 과하다 싶을 정도로 기후변화 리스크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 202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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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외신도 놀란 한국의 ‘Hagwon’

    16일(현지 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는 “한국 6세 미만 아동의 절반이 입시 학원에 몰린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미취학 자녀들에게 사교육을 시키느라 가구 소득 3분의 1을 쓰는 공무원 사례를 소개하며 한국의 ‘학원(Hagwon)’ 시스템을 다뤘다. 기사에는 댓글이 50개 달렸는데 그중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건 “6세 미만이? 진심으로 미쳤다”는 짧은 글이었다. 여기에는 다시 “넷플릭스에서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봐라. 영어 자막도 있다”는 대댓글이 달렸다.‘4·7세 고시’ 기승에도 정부 속수무책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Hagwon’이 등록된 건 2021년이다. 이후 외신에 학원을 고유명사로 표기하며 한국의 사교육 열풍을 다룬 기사가 심심찮게 게재됐지만 대부분은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초중고교생에 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FT가 이번에 정부 조사 결과가 처음 발표되며 실태가 드러난 미취학 대상 사교육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정부가 13일 발표한 영유아 사교육 조사 결과에 따르면 6세 미만 아동의 47.6%가 사교육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월평균 사교육비는 33만2000원이었는데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경우 월평균 154만5000원을 지출하고 있었다. 2세 이하에서도 4명 중 1명이 사교육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초등 의대반’으로 대표되는 사교육 연소화는 최근 나타난 트렌드다. 1인당 사교육비 추이를 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초등학생 사교육비가 중고생에 비해 가파르게 늘어나는 경향이 뚜렷하다. 특히 지난해는 교육부가 “늘봄학교 시행으로 사교육비가 줄어들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음에도 초등학생 사교육비가 전년 대비 11.1% 늘어 증가율이 고교생(5.8%)의 두 배에 육박했다. 교육부는 브리핑에서 초등학생 사교육비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저출산 시대에 아이를 제대로 키워 보겠다는 부모 심리가 있는 것 같다. 학부모 인식 개선을 병행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한가한 말을 하는 사이 현장에선 초등학교 입학 전 유명 영어학원에 다니기 위한 ‘7세 고시’, 영어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한 ‘4세 고시’까지 기승을 부리는 상황이다. 지난해 사교육을 다룬 소설집에서 박서련 작가는 영어유치원 입학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입학설명회 참석권을 따내는 1차에선 아이돌 콘서트 티케팅처럼 피 튀기는 예매 경쟁이 벌어졌고, 학부모를 인터뷰하는 2차는 대학 입시 면접을 연상케 했으며, 합격선에 들어간 이들을 대상으로 추첨하는 3차는 아파트 청약처럼 손에 땀을 쥐게 했다.”사교육 연소화 막아야 망국병 고친다 사교육은 지역 불균형과 계층 양극화를 고착화하고 저출산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망국병’으로 불린다. 또 사교육 연소화가 진행될수록 격차는 더 확대되고 출산율에 미치는 악영향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며 온갖 정책을 내놓은 지난 4년 동안 사교육비 총액은 매년 사상 최대를 경신했다. 해당 기간 학령인구는 770만 명에서 714만7000명으로 55만 명 이상 줄었는데 말이다. 이번 정부에서 ‘킬러 문항’ 논란과 ‘사교육 카르텔과의 전쟁’을 거치며 다시 확인된 것은 사교육 문제를 누구도 쾌도난마식으로 해결할 순 없다는 것이다. 경쟁적 사회 분위기, 대학 서열화와 학벌주의, 공교육에 대한 불신, 누더기가 된 입시제도 등이 결합해 나타난 고차원 방정식인 만큼 보다 정교한 분석과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번 정부에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은 꼭 명심했으면 한다. 바로 사교육은 불안을 먹고 자라니, 더 이상 즉흥적으로 정책을 발표하거나 오락가락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그나마 상황이 더 악화되는 걸 막을 수 있는 길이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 2025-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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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요 초대석]“의대생 복귀 마지노선은 이달 28일, 선배 의사들도 이젠 복귀 독려해야”

    《의대가 있는 전국 대학 40곳의 총장 모임인 ‘의대 선진화를 위한 총장협의회’(의총협)는 7일 교육부와 함께 의대생들이 이달 중 복귀할 경우 2026학년도 입시에서 증원 전 정원인 3058명만 선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동시에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며 미복귀 시에는 학칙대로 유급시키고 증원된 인원을 모두 선발하겠다고도 했다. 이를 두고 의료계에선 “학생을 협박하느냐”는 반발이, 환자단체에선 “1년 동안 희생했는데 결국 원점이냐”는 불만이 쏟아졌다. 의총협 공동회장인 양오봉 전북대 총장(63)을 12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전북대 서울사무소에서 만나 의대 정원 원상복귀 방침을 내놓은 이유와 의대생 복귀 전망 등에 대해 들었다.》―내년도 모집인원을 줄이겠다고 한 이유가 뭔가.“올해 의대생이 안 돌아오면 의학 교육이 파국을 맞게 된다. 내년 예과 1학년의 경우 3개년도 학생이 한꺼번에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의대 학장들 모임인 한국의대·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 이종태 이사장이 절박한 심정을 토로하며 ‘의대 선발 인원을 되돌리면 학생들이 돌아올 명분이 생길 것’이라고 제안했다. 의대생과 대화한 끝에 나온 제안으로 알고 있다. 저와 의총협 공동회장인 이해우 동아대 총장이 공감해 ‘이제 우리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다른 총장들을 설득했다.” ―일부 사립대 총장은 반대했다고 들었다.“대학 중에는 증원을 전제로 이미 시설 투자를 진행하고 교수도 채용한 곳이 많다. 전북대만 해도 이미 교수 15명을 채용했고 연말까지 17명을 더 채용할 계획이다. 시설 확충에도 올해까지 35억 원을 투입하고 있다. 사립대의 경우 투자에 대한 부담이 국립대보다 크다 보니 모집 인원을 되돌리기가 더 쉽지 않다. 하지만 더 이상 의대생 복귀가 늦어지면 안 된다는 점과 2027학년도 이후는 국회에서 논의한 대로 의료인력 수급 추계위원회에서 정원을 정하는 방식으로 증원이 이뤄질 것이니 지금까지 투입된 예산이 결코 헛된 투자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총장들을 설득했다.” ―발표 후 복귀 움직임은 나타나고 있나.“초반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의대 학장부터 교수까지 역할을 나눠 학생들을 전방위적으로 설득 중이다. 의대 학장들끼리도 매일 줌 회의를 하면서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지난해 의대 교수들에게 학생 복귀를 설득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의료계의 전반적인 분위기 때문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의대 학장과 교수들이 뜻을 모아 내놓은 제안을 총장들이 수용한 것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3월 셋째 주(17∼21일) 학생들이 상당수 돌아와 넷째 주(24∼28일) 대면 수업에는 대부분 출석할 것으로 믿고 있다.” ―의대생들이 의대 교수 말을 들을 것으로 보나.“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의술을 가르쳐준 스승을 아버지처럼 여기라’는 내용이 있다. 또 이를 개정한 1948년 제네바 선언을 보면 첫 번째 항목이 ‘인류에 대한 봉사’, 두 번째 항목이 ‘스승에 대한 존경과 감사’다. 지금 의대 교수들은 주 2회 이상 당직을 하면서 병원을 지키고 있다. 개원가로 나가면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지만 의료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면서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또 의대생은 결국 교수로부터 의술을 전수받아야 한다. 교수들은 제자들이 돌아오기만 하면 주말이든 방학이든 나와서 가르치겠다는 확고한 각오를 갖고 있다. 제자들을 위해 그렇게 하겠다는 교수들 말을 안 듣고 누구 말을 듣겠나.” ―올해 신입생은 증원 후 입학했음에도 수업에 안 나온다.“수업 첫날 강의실을 돌아보니 의대 신입생 30%가량이 수업을 듣고 있었다. 당시 수업마다 10명씩은 출석했는데 지금은 1, 2명밖에 안 남았다. 같이 행동하자는 선배들의 요구가 강하고 과거 비슷한 사태 때 집단과 다른 행동을 했다가 따돌림을 당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 수업을 듣고 싶어도 못 듣는 것 같다. 그런데 올해 신입생은 증원 사실을 알고 지원해 입학했다. 또 의료계에서 가장 약자다. 고학번이야 1, 2년 쉬었다고 생각하면 되지만 25학번은 24학번과 함께 수업을 듣고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피해가 크다. 이들이 수업을 못 듣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달 말이라고 했는데 정확한 복귀 시한이 언제인가.“의대 학장들은 늦어도 이달 24일까지 모두 개강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전북대의 경우 이달 초 개강했지만 그동안 온라인 수업을 했고 24일부터 대면 수업을 진행한다. 의대 특성상 첫 주 대면수업에 안 들어오면 진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그리고 학칙상으로도 수업의 4분의 1 이상 빠지면 F 학점을 받고 유급하게 되는데 그 시점이 이달 28일이다. 결국 최종 데드라인은 28일이 될 것이다.” ―이달 28일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유급이란 건가.“반드시 돌아올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만약 안 돌아온다고 해도 지난해처럼 개강을 다시 연기하거나 질병 임신 등 규정된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데 휴학을 받아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대학들도 이번에는 학칙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는 방침이다. 대학에는 의대생뿐 아니라 다른 단과대 학생도 있다. 지난해는 요건을 갖추지 못한 휴학 신청이라도 받아줘야 한다는 국가적·국민적 컨센서스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반 국민과 대학 구성원 모두 ‘또 그렇게 해줄 순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의대생 단체는 교육 준비가 안 됐다는 입장이다.“의대생 단체 대표뿐 아니라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대표도 그런 얘기를 한다. 24, 25학번을 합치면 증원 전의 2.5배나 되는데 이들을 6년 동안 제대로 교육시킬 수 있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대학과 의대에 맡겨 달라고 말하고 싶다. 지난 1년 동안 의대 교수와 학장, 총장이 머리를 맞대고 최선을 다해 교육을 준비했다. 24학번을 6개월 먼저 졸업시키기 위해 주말과 방학에도 수업을 해서 규정된 수업 시간을 모두 채울 계획이다. 이는 24, 25학번 학생의 수업권을 보장하고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기도 하다.” ―선배 전공의가 안 돌아오니 의대생도 못 돌아오는 것 아닌가.“의대생들은 아직 의사가 아니고, 의료계에서도 약자다. 의사가 되겠다는 필생의 꿈을 펼치기 전에 장기간 공부를 멈추고 있는 건 의료계 전체로 봐도 손실이다. 전공의 단체와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이제라도 ‘앞으로의 일은 선배 의사들에게 맡기고 의대생들은 돌아가 공부하라’고 해야 한다. 제가 전북대병원 이사장이라 전공의들의 열악한 근무 여건을 잘 안다. 처우 개선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의대생 복귀 후 정부와 병원, 전공의 등이 머리를 맞대고 얼마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미복귀 시 증원된 인원을 모두 뽑겠다고 했다.“대학 입장에서 의대 증원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여론과 환자단체 입장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지방의 의료 사각지대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전북 지역만 해도 공공의료원 3곳이 있는데 모두 의사 정원을 못 채우고 있다. 규모가 작은 기초지자체에는 의사가 한두 명밖에 없는 지역도 태반이다. 그리고 대입 예고제에 따라 지난해 이미 2026학년도 의대 정원을 예년보다 2000명 늘어난 5058명으로 공고했다. 입학 정원은 학칙으로 정하게 돼 있어 지난해 대학마다 교수평의회, 대학평의원회 등 내부 절차를 거쳐 학칙을 개정했다. 만약 상황 변화가 없다면 학칙에서 정한 정원만큼 뽑을 수밖에 없다.” ―그러면 5058명을 모두 선발하겠다는 건가.“5058명이라도 모집 인원은 각 대학의 준비 상황에 따라 약간 차이날 수 있다. 국회에서 논의 중인 안에서도 의료인력 수급 추계위에서 결론이 안 나면 2026학년도 모집인원은 대학 총장이 정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전북대의 경우 원래 의대 정원이 142명인데 200명으로 정원을 늘렸다. 다만 2025학년도는 거점 국립대들이 증원분의 절반만 반영하기로 했기 때문에 29명 늘어난 171명을 선발했다. 만약 학생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171∼200명 사이에서 학내 논의를 거쳐 내년도 모집 인원을 정할 것이다.” ―의료계에선 ‘0명’을 뽑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국민, 학부모, 수험생에게 약속했던 증원을 철회하고 3058명만 뽑자고 한 건 대학 총장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제안을 한 것이다. 2026학년도에 의대 신입생을 아예 선발하지 말라거나 기존 정원 미만을 뽑으란 의료계 일각의 주장은 대학 입장에선 절대 수용할 수 없다. 아무리 급해도 대학이 넘지 말아야 할 금도가 있고, 지켜야 할 사회적 신뢰가 있다.” ―학생들이 안 돌아오면 내년도 수업은 어떻게 하나.“그렇게 안 되길 바라지만 만에 하나 학생들이 안 돌아오면 내년 예과 1학년은 24∼26학번 신입생이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한다. 이는 말했다시피 여건상 불가능하다. 전북대뿐 아니라 다른 대학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26학번의 학습권을 우선 보장할 수밖에 없다. 24, 25학번의 경우 학습권이 보장된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른 총장들과도 이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는데 비슷한 의견이 많았다. 본인들이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은 본인들이 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의대생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나.“교육이 제대로 준비돼 있는지는 정말 걱정 안 해도 된다. 전북대의 경우 의대 교육 지원위원회를 만들어 강의실 의자까지 제가 직접 챙기고 있다. 또 470억 원을 들여 의대 건물을 짓고 있고 2028년까지 군산시에 500병상 규모의 새 병원도 짓고 있다.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집인원 추가 조정을 제외하고 24, 25학번 분리 교육 등 받아들일 수 있는 요구사항은 충분히 수용할 생각이다.”양오봉 의총협 공동회장△1985년 고려대 화학공학과 학사△1987년 KAIST 화학공학 석사△1991년 KAIST 화학공학 박사△2023년∼현재 전북대 총장△2025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 202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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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서울외신기자클럽이 보도 완장을 만든 이유

    주한 특파원 모임인 서울외신기자클럽은 지난달 회원들에게 하늘색 보도 완장을 배포했다. 완장에는 언론을 뜻하는 ‘PRESS’를 검은색으로 새겼고 그 아래 ‘서울외신기자클럽’이라고 영문과 한글로 표기했다. 클럽 측은 회원사 공지에서 “최근 일부 시위 참가자가 과격해지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현장 취재 시 위협을 느끼는 회원이 늘고 있다”며 완장을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실제로 들어보니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 등 아시아 매체 기자도 집회를 취재할 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시키고 말투가 어색하면 “중국인이냐”, “중국인이 왜 찍느냐”며 위협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한다.한국서 나타나는 혐오 폭력의 징후 최근 탄핵 찬반으로 사회가 분열되며 상대에 대한 혐오가 폭력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부정선거의 배후로 사실상 중국을 지목한 후 온라인에는 윤 대통령이 언급한 주권침탈세력 및 반국가세력이 ‘화교’와 ‘중국인’이란 음모론이 급속히 퍼졌다. 이를 접한 윤 대통령 지지자들은 올 1월 서울서부지법에 난입하며 경찰을 ‘중국 공안’이라고 불렀고, 지난달 26일 이화여대 집회 때는 탄핵 찬성 시위대에 “중국인이냐”고 묻고 멱살을 잡았다. 심리학에선 혐오를 혐오 발언, 회피, 차별, 신체적 공격, 집단학살 등 다섯 단계로 분류한다. 낮은 단계에선 상대를 피해 다니지만, 높은 단계가 되면 사냥하듯 상대를 찾아내 공격한다. 최근 집회 현장을 지나는 외국인에게 신분증을 요구하며 ‘중국인 색출’에 나서고, 헌법재판소나 언론사에 중국 국적자가 있다며 특정인을 지목해 마녀사냥을 하는 건 혐오 수위가 올라가는 명백한 징후다. 더 불안한 건 이런 행동을 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반국가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왜곡된 사명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노스이스턴대 교수진은 연구를 통해 혐오 범죄자 유형을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그중 가장 위험하고 심각한 유형이 바로 ‘사명감을 가진 혐오자(mission hater)’였다.‘트럼프 효과’와 ‘살라흐 효과’ 편견이 혐오가 되는 과정에는 상대적 박탈감과 과장된 공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허위 정보 확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다 제도권에서 혐오를 인정하거나 정당화하면 더 이상 자신들이 온라인에 고립된 소수가 아니란 자신감을 갖고 집단적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번에도 윤 대통령이 불씨를 지피자 여당 의원들이 ‘언론이 화교에 넘어갔다’ 등의 글을 공유하며 혐오를 부채질했다. “계엄군이 중국 간첩 99명을 체포했다”는 허위 정보를 확산시킨 인터넷 언론, “중국이 한국 붕괴를 위한 전쟁에 돌입했다”고 발언한 한국사 강사 전한길 씨 등도 혐오를 자극했다. 영국 범죄학자 매슈 윌리엄스는 2021년 자신의 책에서 ‘트럼프 효과’와 ‘살라흐 효과’를 소개한 바 있다. 전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슬람에 대한 분열적·차별적 트위터 메시지를 올린 후 혐오 범죄가 증가한 것이다. 이번 ‘트럼프 2기’가 시작된 직후에도 아시아계를 겨냥한 비방 혐오 표현은 66% 증가했다. 후자는 2017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리버풀에 입단한 무함마드 살라흐 선수의 활약으로 무슬림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확산되면서 해당 지역에서 혐오 범죄가 줄고 SNS상의 혐오 게시물이 감소한 것이다. 지역 팬들은 “그가 몇 골 더 넣으면 나도 무슬림이 될 것”이란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한국 사회는 혐오가 집단적 폭력으로 넘어가는 ‘티핑 포인트’에 와 있다. 혐오가 선을 넘지 않도록 무엇보다 정치권과 정부, 언론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며 혐오를 부추기지 말아야 한다. 유튜버와 인플루언서, 소셜 플랫폼이 더 이상 허위 정보와 선동, 혐오 표현을 확산시키지 않게 만드는 제도적 보완도 시급하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 2025-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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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원재]“선관위는 가족회사” “친인척 채용이 전통”

    “믿을 만한 사람을 뽑기 위해 친인척을 채용하는 전통이 있다.” 감사원 담당자가 특혜 채용의 이유를 묻자 선거관리위원회 간부가 한 말이라고 한다. 감사원은 2013년부터 10년간 진행된 전국 선관위 경력 채용 사례를 조사해 878건의 규정 및 절차 위반을 확인하고 32명에 대해 중징계 등을 요구했다. 감사 결과에 따르면 선관위에서는 오랜 기간 친인척 특혜 채용과 청탁이 공공연하게 이뤄졌는데, 직원들끼리 “선관위는 가족회사”라는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번 감사는 2022, 2023년 김세환 박찬진 전 사무총장과 송봉섭 전 사무차장 등 선관위 최고위직 자녀의 특혜 채용 의혹이 불거지며 이뤄졌다.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은 대법관이 겸직하는 위원장을 보좌하며 조직을 이끄는 사실상의 1, 2인자다. 감사 결과 김 전 총장 아들을 경력 채용할 때 규정을 어기고 면접관 전원이 김 전 총장과 같이 일했던 사람으로 구성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중 한 명은 김 전 총장 아들 결혼식 때 축의금을 접수했던 직원이었다. 송 전 차장은 실무자에게 전화해 “내 딸을 추천하면 안 되겠냐”고 노골적으로 청탁했다. 이렇게 채용된 최고위직 자녀는 내부에서 ‘세자’로 불리며 근무할 때도 각종 특혜를 받았다고 한다. ▷채용 특혜는 최고위층 자녀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지역 선관위 과장급 자녀까지 특혜를 받았는데, 감사에선 최소 10명이 특혜 채용되고 그만큼 억울한 탈락자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무자들은 면접관에게 “평가표에서 점수는 비우고 사인만 하라”고 한 뒤 나중에 점수를 채웠고, “점수를 연필로 쓰라”고 한 뒤 지우고 새로 적어넣기도 했다. 특혜 채용에 대한 내부 고발도 있었지만 묵살됐다. 오히려 논란이 되자 특혜 채용을 감추기 위해 국회에 “친인척 채용 현황 자료가 없다”며 허위 답변했고, 관련 자료를 파기하며 은폐를 시도했다는 게 감사원 지적이다. ▷이번 감사에선 내부에 만연한 근무 태만 사례도 적발됐다. 강원선관위 과장은 8년 동안 124회 출국해 817일 동안 해외에 체류하며 무단결근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정상 근무한 것처럼 위장해 챙긴 급여만 3800만 원가량이다. 무단결근과 허위 병가를 셀프 결재하며 2019년에만 131일 동안 해외여행을 다녀온 국장도 있었다. ▷선관위는 그동안 ‘헌법상 독립기관’임을 내세우며 감사원 감사를 거부해 왔다. 헌법재판소 역시 27일 “선관위는 감사원 직무감찰 대상이 아니다”라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헌재는 “(이번 결정이) 부패 행위의 성역을 인정하는 것으로 호도돼선 안 된다”며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선관위가 감사원 감사 대상이 아닐 수는 있지만 자정 노력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되찾지 못하면 존립의 위기를 맞게 될 수 있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 202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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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양치기 소년이 된 교육부총리

    “학칙에 따라 엄정하게 학사를 운영해 달라.”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13일 의대가 있는 전국 대학 40곳 총장들과 화상 간담회를 열고 이렇게 주문했다. 예정대로 3월 초 개강하고 의대생들이 계속 수업을 거부하면 학사경고, 유급 처분을 원칙대로 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한 대학 총장은 필자에게 “의정합의가 안 되면 올해도 수업 거부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학칙을 엄격하게 적용한다고 돌아올 거면 지난해 돌아오지 않았겠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엄정하게’ 등 14차례 반복 효과 없어 이 부총리는 지난해 의대생들이 휴학계를 내자 “동맹휴학은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없다”며 휴학을 승인하지 말라고 대학들을 압박했다. 수업 거부가 현실화된 지난해 2월에만 3차례 대학 총장, 부총장, 학장들을 모아 ‘철저한 학사관리’와 ‘수업 거부에 대한 엄정한 조치’ 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의대생 대부분이 돌아오지 않자 이 부총리는 지난해 7월 의료 인력 수급 차질이 우려된다는 이유를 들며 태도를 바꿨다. 학칙을 유연하게 적용해 불출석으로 F학점을 받더라도 유급시키지 말라는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것이다. 다만 ‘휴학 승인 불가’ 방침은 고수했다. 그래도 학생들이 휴학 승인을 요구하며 복귀하지 않자 지난해 10월에는 2025학년도 복귀를 약속하면 휴학을 승인해 주겠다고 다시 입장을 변경했다. 이때도 복귀를 약속하지 않고 계속 수업을 거부할 경우 “학칙을 엄격히 적용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의대생과 의료계가 반발하자 3주 만에 ‘조건 없는 휴학’을 허용하겠다며 말을 바꿨다. 그러면서도 “(의료계와) 신뢰가 형성됐다. 의대생도 내년에는 돌아올 것”이라며 낙관론을 폈다. 이 부총리가 의료공백 사태 이후 의대생 학사관리를 ‘엄정하게’, ‘엄격하게’, ‘원칙대로’, ‘철저하게’ 해 달라고 말한 건 공개 석상에서만 14번이다. 하지만 별 효과는 없었고 의료계의 반발만 커졌다. 한 대학 총장은 “학사관리를 엄정하게 하라면서 유급은 금지했고, 휴학은 불허한다고 했다가 허용하는 등 정부 방침이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갈팡질팡한 게 지난 1년”이라고 요약했다. 여러 차례 원칙을 강조했다가 번복하며 교육계와 의료계의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다.냉탕 온탕 오가며 신뢰 잃어 이 부총리가 이번에 ‘엄정한 학사관리’를 다시 들고나온 건 올해 신입생이 수업 거부 대열에 동참하는 걸 막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의료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올해 의대 신입생을 1500여 명 늘렸는데 이들까지 수업 거부에 동참할 경우 의대 증원의 정당성이 훼손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장기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내년 1학기에 3개년도 신입생 1만 명 이상이 함께 수업을 듣는 사태도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지난달 기준으로 재학생 95%가 휴학한 상황이다 보니 신입생들은 수업에 들어갔다가 괜히 선배들에게 찍히는 건 아닌지 고심하는 분위기다. 과거 의정갈등 때도 수업 거부에 동참하지 않았다가 배신자 취급을 당하며 고생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 대학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집단행동의 계기가 되는 걸 막기 위해 ‘선배와의 대화’ 순서를 생략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입학 후 선배들이 접촉하는 것까지 막을 순 없다. 대학 중에는 지난해 신입생 휴학을 허용하며 1학년 1학기 휴학 금지 규정을 없앤 곳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이 부총리가 다시 압박에 나선다고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원칙대로 처리하겠다면 초반부터 그렇게 했어야 했다. 지금은 의대생이 버티면 정부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교육계도, 의료계도 다 안다. 이 부총리는 최근 인터뷰에서 “물에 빠져 죽을 각오로 2월 중 의료계와 반드시 협상을 끝낼 것”이라고 했다. 의미 없는 압박보다 그 말을 지키는 것이 의대생 복귀를 위한 가장 빠른 길일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 202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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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무죄 판결에도 책임 안 지는 한국 검사들

    일본에 ‘정밀 사법’이란 단어가 있다. 검사가 100% 유죄를 확신할 때 기소해 반드시 유죄 판결을 받아낸다는 뜻이다. 실제로 일본 형사재판의 유죄 비율은 99.9%에 달한다. ‘법원 판단을 받아보겠다’며 일단 기소하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그런 만큼 형사재판 무죄는 일본 검찰에 큰 불명예로 여겨진다. “무죄 판결이 나오면 검사직을 떠나겠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검사로 12년 동안 일했던 이치가와 히로시 변호사는 자신의 책에서 “무죄 판결은 검찰에 일대 사건”이라며 “3년 차에 처음 경험한 무죄 판결은 지옥 같았다”고 돌이켰다. 내부 항소 심의에선 무죄 책임을 두고 추궁이 이어지는데 “담당 검사에 대한 린치 수준”이라고 했다. 항소는 새 증거나 쟁점이 있는 경우에 제한적으로 이뤄진다. 일본 파견 경험이 있는 전직 검사는 “일본에선 검찰의 항소나 상고가 매우 드물고 유무죄가 아닌 양형의 경중을 이유로 상소하는 건 본 적이 없다”고 했다.미국은 무죄 시 항소 불가 미국의 경우 하급심에서 피고인에게 무죄가 선고되면 검찰이 상소할 수 없다. “동일한 범행으로 생명이나 신체에 대한 위협을 재차 받지 않는다”는 수정헌법 5조에 따른 것이다. ‘세기의 재판’으로 불린 O J 심프슨 사건과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아동 성추행 혐의 사건도 1심 무죄 판결로 끝났다. 대법원에 따르면 한국과 같은 대륙법 체계인 독일에서도 중죄 사건의 경우 사실 심리를 다투는 항소는 허용되지 않는다. 반면 한국에선 무죄 판결이 나오면 검찰이 대부분 항소나 상고를 한다. ‘다시 판단을 받아보겠다’는 것이다. 기소율이 일본보다 높은데 상소까지 일반화돼 있으니 한 번 형사 기소되면 수년 동안 시달리다가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또 한국에선 무죄가 나와도 담당 검사에게 불이익이 거의 없다. 검찰 내부에 설치된 ‘사건평정위원회’가 매년 무죄 사건에서 검사의 과오 여부를 판단하지만 최근 5년간 무죄 사건 3만6117건 중 검사의 과오가 인정된 건 3730건(10.3%)에 불과했다. 나머지 90%는 ‘판사와의 견해차로 인한 무죄’로 마무리됐다. 과오가 인정되면 벌점을 받지만 인사에 큰 영향을 주진 못한다. 과오가 인정돼 징계를 받은 검사도 최근 5년 동안 ‘0명’이었다. 오히려 검찰 차원에서 힘을 쏟았던 사건은 무죄 판결이 나도 승진하는 경우가 많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1심은 혐의 47개가 모두 인정되지 않았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1, 2심에선 혐의 19개가 모두 인정되지 않았지만 이들 사건을 담당한 검사들은 대거 승진했다. 두 사건을 지휘한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총장 시절 “무죄 신경 쓰지 말고 기소하라”며 독려했다고 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뜬금없이 현행법 탓한 이복현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자신이 수사를 맡았던 이 회장 재판에서 2심 무죄가 나오자 “국민께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 회장과 삼성그룹에는 사과 한마디 안 했고 뜬금없이 현행법을 탓했다. 검찰도 “법원과 견해가 다르다”며 상고했다. 무죄에 제대로 사과하지 않는 건 다른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만 해도 과거사 사건 재심에서 줄줄이 무죄가 선고됐지만 검찰은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친부 살해 혐의로 25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올 초 재심 무죄 판결로 출소한 김신혜 씨에겐 사과 대신 항소로 대응했다. 일본에서 지난해 말 47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80대 남성이 재심 무죄 판결을 받자 지검장이 자택을 찾아 “대단히 죄송하다. 항소하지 않겠다”며 90도로 고개를 숙인 것과 대조적이다. 형사사건 기소는 한 사람의 생애와 기업의 존망을 좌우하는 사안이다. 그런 만큼 신중해야 하고, 결과에 대해선 검사가 제대로 책임을 지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 2025-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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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대행의 시대

    올 초 국무회의 참석자 중 5명이 참여하는 단톡방이 생겼다고 한다. 공석인 장관급을 대신해 참여하는 차관급이 모인 이른바 ‘대행 단톡방’이다. 멤버는 법무부 국방부 행정안전부 여성가족부 차관과 방송통신위원회 부위원장인데 최근 이진숙 방통위원장 복귀로 김태규 방통위 부위원장은 빠졌다고 한다. 단톡방 참여자들은 정식 국무회의 구성원이 아니고 의결권도 없지만 매주 국무회의에 참석한다. 이런 애매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서로 상의하기 위해 단톡방을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이 얘기를 전해준 고위공직자는 “정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국무회의에 임시 멤버가 늘다 보니 단톡방까지 생긴 웃픈 상황”이라고 했다.국무회의 참석자 ‘대행 단톡방’ 등장 지금은 바야흐로 ‘대행의 시대’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을 시작으로 권한대행이나 직무대행, 직무대리 직함을 가진 고위공직자가 줄잡아 15명 이상이다. 국방과 재난, 치안을 책임지는 국방부 행안부 경찰청이 모두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 중이다. 헌법재판소, 감사원, 대통령경호처도 권한대행이 수장이다. 대행 체제로 운영되는 조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긴 어렵다. 법적으로 대행이 권한을 대부분 행사할 수 있다지만 정당성이 약하고 임시 성격이 강하다 보니 단기적 유지 관리 업무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기 인사, 산하기관장 임명 등 현안도 미루는 경우가 많다. 이호영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최근 “정기 인사를 언제 하겠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밝혀 13만 경찰의 한숨을 키웠다. 군은 육군참모총장, 수도방위사령관, 특수전사령관, 방첩사령관 자리가 모두 직무대리로 채워지자 한동안 훈련을 연기해 안보 우려가 커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직자들이 업무에 집중하길 기대할 순 없다. 대행이 적극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경우 논란도 불가피하다. 최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을 둘러싸고 제기된 논란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감사원에선 임기가 불과 40여 일 남은 조은석 감사위원이 감사원장 권한대행을 맡고 현 정부 대통령실 관저 이전 감사 결과 재심의 검토를 지시해 논란이 됐다. 재난 등 급박한 상황에 대처하기도 힘들다. 지난해 말 무안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당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가동됐지만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행안부 장관도 공석이라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이 최 권한대행과 동분서주해야 했다.대행 더 이상 늘려선 안 돼 매일 보도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지친 국민이 바라는 건 더 이상 불확실성이 커지지 않는 것이다. 이미 비상계엄 및 탄핵 정국으로 한국 경제는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6조3000억 원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주식시장은 폭락 후 간신히 회복된 상태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며 물가가 오르고,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동맹 청구서를 만지작거린다는 소식에 설 연휴에도 명절 분위기를 느끼기 어려웠다는 국민이 많다. 고위공직자 상당수가 대행으로 채워진 불안정한 상황이 조만간 해소되긴 어려워 보인다. 정치권 일각에선 국가 안보, 국민 안전과 직결된 국방부 행안부 장관만이라도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논의가 흐지부지됐다. 헌재가 대통령 탄핵심판에 주력하면서 국무총리, 감사원장 등에 대한 탄핵심판 결론은 늦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야당이 고위공직자 추가 탄핵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이어가는 건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수권정당이 되겠다’면서 국정 안정에는 눈을 감아선 안 된다. 여야가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더 이상 대행이 늘어선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을 모으길 바란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 202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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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가 만난 사람]“화장실 리모델링 못하는 대학… 등록금 차이에 교환학생 교류도 어려워”

    《“가장 많이 접수되는 학부모 민원이 화장실에 대한 겁니다. 낡고 냄새까지 나 자녀가 못 가겠다고 한다는 거죠.” 21일 서울 동작구 중앙대 본관에서 만난 박상규 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64·중앙대 총장)은 “단과대 화장실을 리모델링하고 싶어도 수십억 원이 든다. 16년 동안 등록금을 동결한 상태라 대학 입장에선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내 주요 대학은 정부 방침에 따라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16년 동안 등록금을 동결해 왔다. 그러다 보니 비가 오면 건물에 물이 새고, 학생들이 중고교보다 못한 실습실에서 공부하는 상황이 됐다. 전국 4년제 대학 197곳의 모임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를 이끌고 있는 박 회장을 만나 최근 주요 대학이 등록금 인상에 나선 배경과 대학 재정의 현실에 대해 들었다. 인터뷰는 21일 대면으로 진행했고, 23일 전화해 추가로 얘기를 들었다.》―등록금을 올리겠다는 대학이 어느 정도 있나.“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가 등록금 인상 여부를 집계하진 않는다. 다만 총장들을 만나 보면 16년 동안 등록금을 못 올린 만큼 이번에는 올리겠다는 의지가 강한 것 같다. 국립대는 동결 방침을 밝혔지만, 국내 4년제 대학의 80%를 차지하는 사립대 중 절반 정도는 올리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 같다.” ―인상 폭은 어느 정도인가.“고등교육법에 따르면 대학은 직전 3년 물가상승률 평균의 1.5배까지 등록금을 인상할 수 있다. 올해 상한선은 5.49%다. 등록금 올리기가 워낙 힘들고 대학 재정이 어려우니 처음에는 총장 상당수가 상한선까지 올리겠다고 했다. 다만 교내 논의 과정에서 인상 폭을 4%대로 낮춘 곳이 많은 것 같다.” ―교육부에선 ‘경기가 어렵다’며 등록금 동결을 요구한다.“정부는 그동안 등록금을 인하·동결한 대학 학생에게만 국가장학금 Ⅱ유형을 지원하면서 각 대학이 등록금 인상을 자제하도록 했다. 그렇게 16년이 지나면서 교육 환경은 계속 열악해졌다. 교육부는 22일 대교협 총회에서도 등록금 동결을 요청하면서 ‘인센티브로 보상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많은 대학이 교육부에 등록금 인상의 불가피성을 호소하는 등 예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탄핵 정국에 왜 등록금을 올리냐는 지적도 있다.“대학들은 원래 지난해 ‘더 이상은 못 버틴다’며 등록금을 올리려 했다. 그런데 4·10총선이 코앞이다 보니 정부와 여당에서 난색을 표했다. 결국 지난해 등록금을 올린 대학은 26곳으로 전체의 13.5%뿐이었다. 올해는 이미 시기를 놓치고 뒤늦게 올리는 것으로 봐야 한다. 탄핵이나 정치적 이슈와는 상관없다.” ―대학 재정이 언제부터 그렇게 어려워졌나.“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굉장히 어려워졌다. 비대면 수업을 위해 필요한 학습관리시스템(LMS) 구축 등에만 수십억 원이 들었다. 또 모든 강의실에 온라인 강의 시설을 갖춰야 했고, 유료 줌(Zoom) 프로그램도 이용했다. 미국 대학들은 온라인 수업 시스템 구축 등을 이유로 등록금을 올렸는데 국내 대학은 ‘재학생들이 수업을 제대로 못 들었다’는 여론 때문에 오히려 등록금을 일부 환불해줬다. 최근 물가도 많이 올랐다. 중앙대의 경우 10년 전 연간 50억∼60억 원이던 전기·수도·통신비가 지금은 120억∼130억 원이다.” ―그동안 어떻게 학교를 운영했나.“교수 급여를 못 올리다 보니 우수 인재를 채용하기 어려워졌고, 지방대에선 상상 이하의 급여를 받는 교수도 생겼다. 중앙대의 경우 지난해 인공지능(AI) 대학원을 만들고 교수 20여 명을 뽑았는데 민간 인재 채용은 불가능했다. 과거에는 삼성전자에서 1억 원 받는 사람에게 7000만, 8000만 원을 주면 대학교수라는 프라이드(자부심) 때문에 오기도 했다. 지금은 민간 기업 대우가 좋아져 AI 인재는 2억, 3억 원을 받는데 대학은 과거와 똑같이 준다. 급여가 두세 배 차이가 나니 고민조차 안 한다. 또 상당수 대학이 규제를 안 받는 유학생 등록금을 올리며 유학생 유치에 집중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유학생 관리가 제대로 안 되거나, 학습 능력이 부족한 유학생이 유입되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이다. 한국을 동경해 왔다가 실망하는 유학생도 적지 않다.” ―등록금 인상에 재학생과 학부모 반발은 없나.“과거처럼 ‘절대 안 된다’는 의견은 많지 않다. 중앙대의 인문사회계열 등록금은 연간 640만 원가량이다. 특수목적고의 절반이고, 사립 국제고의 4분의 1이다. 그러니 등록금이 과도하다고 생각하는 학생·학부모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등록금을 5% 올린다고 해도 한 학기에 16만 원 정도 더 내는 것이다. 학생 대표들도 학교 측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대학이 얼마나 돈이 없는지 느끼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에선 학생들이 먼저 ‘등록금을 이 정도 올리자’고 한 곳도 있다고 하더라. 또 대학들은 이번에 올린 등록금 인상분 대부분을 학생을 위해 쓰기로 했다. 교육 환경을 개선하거나 중단되는 국가장학금 Ⅱ유형 지원을 대신해 장학금을 추가하는 식이다.” ―국내 등록금 수준을 해외 대학과 비교하면 어떤가.“미국 대학과 비교하면 10배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한다. 최근 미국 뉴욕대에 갔는데 연간 등록금이 7만 달러(약 1억 원)가량 된다고 하더라. 중앙대와 비교하면 10배 이상 차이 난다. 그러다 보니 교환학생 교류에도 소극적이다. 등록금을 7만 달러 받아서 5000달러(약 700만 원) 받는 대학에 보내면 학생들이 손해라는 것이다. 결국 우수한 대학에서 교환학생을 유치하려면 기숙사비 지원 등 추가 혜택을 줘야 한다. 안 그러면 싱가포르 등으로 보내지 한국으로 안 보낸다.” ―쌓아둔 적립금을 활용할 순 없나.“그런 얘기를 많이 듣는데 적립금이라고 대학 마음대로 쓸 수 없다. 중앙대의 경우 1000억 원가량 남은 적립금 대부분이 장학금이다. 장학금은 기부자 뜻대로 지출해야 한다. 허락을 받아야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어 ‘장학금 대신 교육 환경 개선에 써도 되겠느냐’고 몇 번 기부자를 설득해 봤는데 ‘안 된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일부는 그럴 거면 기부금을 회수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회수하기도 했다. 시설 개선을 위해 쓸 수 있는 적립금은 적립된 감가상각비 정도인데 대학들 형편이 어렵다 보니 이미 거의 다 썼다.” ―등록금 5% 인상으로 대학 재정난이 해결되나.“그렇지 않다. 정부 재정 지원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올해 말까지 3년 동안 지방교육재정교부금(교부금) 일부를 고등교육에 지원하는 ‘고등평생교육지원특별회계’가 도입됐는데 연장 및 확대가 필요하다. 현재 재정 내 고등교육 투자액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66% 수준이다. 최소한 평균 수준으로 확대해야 한다. (교부금은 초중고 교육에 쓰지 않나) 현재 대학 교육 여건이 초중고보다 훨씬 열악하다. 초중고에서 체육관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대학에서 비슷한 시설을 세우려면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하다. 학생들도 초중고 시설과 너무 차이가 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번 학기 의대생 수업 복귀는 가능한가.“의료계에선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최근 ‘감원까지 포함해 2026학년도 의대 정원을 원점에서 유연하게 협의하겠다’고 밝힌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대한의사협회(의협) 새 지도부도 구성된 만큼 내년도 정원 관련 협의가 잘 이뤄지고 교육의 질 관리 방안이 마련된다면 돌아올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서울대 등에서 의대생 일부가 복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현재 수업에 참여하는 의대생은 각 대학에서 10% 안팎이다. 대학 대부분이 2월 중순∼3월 초 개강인 만큼 정부와 협상이 빨리 이뤄져 정상화되었으면 한다. 학생들이 돌아올 경우 지난해 신입생과 올해 신입생이 함께 수업을 들어야 해 예과 1학년이 2배로 늘어나는데, 늘어난 인원을 효율적으로 수업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서울 소재 의대는 정원이 안 늘어 상대적으로 여건이 나은 셈이다. 인원이 크게 늘어나는 비수도권 의대는 돌아올 경우 어떻게 수업해야 할지 고민이 깊다고 들었다.” ―교수진 확보, 시설 확충에 문제는 없나.“기초의학 교수 확보가 제일 문제다. 생리학, 해부학 등을 가르칠 의사 출신 교수가 없다. 지금 있는 의사 출신 교수 상당수도 은퇴한 의대 교수인 경우가 많다. 시설 확충도 국립대는 정부가 지원하겠다고 했는데 사립대에 대해선 대출로 지원하겠다는 정도라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의대 증원으로 이공계 인재 의대 쏠림이 심해졌다는 우려도 나온다.“중앙대에서도 지난해 공대 재학생의 반수가 늘었고, 증가하던 이공계 대학원 진학률도 떨어졌다. 증원된 의대 입시에 재도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연구개발(R&D) 예산을 삭감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월 200만 원을 받다가 130만 원을 받게 된 대학원생이 70만 원을 채우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전공을 잘못 택했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의대 증원과 이공계 인재 육성은 함께 추진하기 어렵다. 이공계 지원 체계를 확고하게 마련한 후 의대 증원을 해야 하는데 순서가 거꾸로였다. 지금이라도 파격적인 이공계 지원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박상규 회장(64)△1983년 중앙대 응용통계학과 학사△1985년 중앙대 대학원 통계학 석사△1990년 미국 뉴욕주립대 통계학 박사△2015∼2019년 중앙대 행정부총장△2020년∼현재 중앙대 총장△2021∼2024년 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수석부회장△2024∼2025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 2025-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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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장원재]돈 걷어 ‘간부 모시는 날’, 공직사회 아직도 이런 폐습이…

    지난해 9급 초임 공무원 월급은 각종 수당을 포함해 222만2000원이었다. 월 최저임금보다 불과 16만 원 많은 수준이다. 혼자 살기에도 빠듯한 돈인데 일부 지자체 공무원은 여기서 매달 5만∼10만 원을 팀비로 낸다. 이른바 ‘간부 모시는 날’을 위해서다. ▷간부 모시는 날은 하급 직원들이 사비를 털어 상급자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공직사회 특유의 문화다. 팀마다 순번을 정해 주 1회 과장을 대접하고, 월 1회 국장을 대접하는 식이다. 국과장이 혼자 식사하지 않도록 챙기면서, 매번 돈을 내는 부담도 줄여주기 위해 생긴 관행이라고 한다. 국과장 입장에선 매일 돌아가며 공짜 밥을 대접받는 셈이다. 젊은 공무원 사이에선 “월 200만 원 받는 처지에 월 500만 원도 넘게 받는 국과장 밥을 사야 하나”, “식비가 부담이라 도시락 싸 다니는데 상급자 밥값을 내라니 어이가 없다” 등의 불만이 나온다. ▷최근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일부 지자체에는 매주 1, 2회 간부 모시는 날이 남아 있다. 이날이 되면 주로 막내인 팀 총무가 상급자에게 미리 선호 메뉴를 물어 식당을 예약한 후 함께 이동해 식사하고 원하면 커피까지 대접한다. 팀 총무는 상급자의 취향은 물론이고 전날 먹은 메뉴까지 파악하고 참석자를 체크하느라 오전 업무를 제대로 하기 어렵다. 식비는 미리 걷은 팀비에서 내는 경우가 많은데, 하급자 입장에선 돈은 돈대로 쓰고 마음 편히 식사도 못 하니 억울할 만하다. 하지만 매달 순번표까지 만들어 내려오는 데다 공무원 사회에선 ‘점심시간도 업무의 연장’이란 인식이 여전해 다른 일정이 있다며 빠지기도 어렵다.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서란 명목으로 마련되는 자리지만 실제 성격은 다르다. 공직사회 특성상 명확한 성과 측정이 쉽지 않다 보니 한 번이라도 더 만나 식사를 하고 친분을 쌓아야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넓게 보면 청탁의 일종으로도 볼 수 있어 국민권익위원회는 올해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공무원 행동강령 위반 여부를 점검할 방침이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이 관행은 2000년대 들어 공직사회 세대교체가 진행되며 ‘시보떡’(수습 기간이 끝나면 사비로 돌리는 떡)과 함께 대표적 공직사회 악습으로 꼽히게 됐다. 정부도 여러 차례 근절을 약속했다. 현재 중앙부처에선 거의 사라졌지만 지자체의 경우 지난해 조사에선 응답자의 44%, 올해 조사에선 24%가 여전히 ‘모시는 날 관행이 남아 있다’고 답했다. 최근 정부 조사에서 공무원의 91%는 ‘모시는 날 관행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했다. 공무원 스스로도 불필요한 관행임을 인정한 만큼 이번에야말로 시대착오적 악습을 뿌리 뽑아야 한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 202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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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공의 처단” 끝까지 어설픈 윤석열식 의료개혁[오늘과 내일/장원재]

    3일 비상계엄 선포 후 나온 포고령에는 “전공의 등 파업 중이거나 현장을 이탈한 의료인은 48시간 내 복귀해야 하고 위반 시 처단한다”는 문구가 있다. 역대 계엄 포고령 중 특정 직군이 언급된 건 처음이다. 이 문구를 보며 “윤석열 대통령 등 계엄 주도 세력이 의정 갈등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료계에서 ‘분노’와 ‘황당’이 교차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부실한 현실 인식에 비현실적 해법 첫째, 엄격히 말하면 현재 파업 중인 전공의는 극소수다. 사태 초기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을 내렸던 보건복지부가 6월 사직을 허용해 전공의 86.7%의 사직서가 수리됐기 때문이다. 현재 근무 중인 전공의까지 감안하면 사직도 근무도 안 하는 이른바 ‘파업 전공의’는 전체의 5% 미만이다. 둘째, 사직 전공의 과반은 이미 개원가 등에 재취업했다. 중증·필수의료 현장이 아닐 뿐 이미 의료현장으로 돌아간 것이다. 나머지 중 상당수는 인턴이나 저연차 레지던트로 안 돌아간 게 아니라 못 돌아간 측면이 크다. 사직 전공의가 개원가에 쏟아지자 동네 병원들이 도움이 되는 고연차를 주로 뽑았기 때문이다. 한 사직 인턴은 본보에 “병원 100곳에 지원했는데 연락이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복귀하라’니 당장 “어디로 돌아가란 말이냐”는 반응이 쏟아졌다. 셋째, 의료공백 사태 직후 정부는 ‘주동자·배후세력 구속’ ‘의사 면허정지’ ‘구상권 청구’ ‘의대생 휴학 금지’ 등 강경 대책을 쏟아냈지만 대부분 실현되지 않았고 의사들의 반감만 키웠다. 결국 복지부와 교육부가 방향을 바꿔 전공의 사직과 의대생 휴학을 허용하자 의대 교수들이 자리를 지키며 의료대란을 막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을 동원해 ‘처단’하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건 현실감 부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올 초 의료공백 사태 직후 대통령실에선 윤 대통령이 “환자를 떠난 전공의는 총을 버리고 떠난 전방 군인과 같다”며 격분했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전공의는 수련생으로 대형병원이 이들에게 의존하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 한국 의료의 일면이었다. 군대에 비유하자면 ‘전방 군인’이 아니라 ‘훈련생’이다. 훈련생이 대우에 불만을 품고 단체 이탈했다고 안보에 문제가 생겨선 안 된다. 전공의 제도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거칠고 어설픈 대책을 반복하는 동안 사태 해결은 점점 멀어졌다. 윤 대통령은 4월 초 ‘의료개혁에 후퇴는 없다’는 대국민 담화로 여당의 총선 패배를 자초했고, 추석 전 응급의료 위기 우려가 커지면서 지지율 하락세가 가속화됐다. 여기에 ‘김건희-명태균 리스크’가 현실화되며 정권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사태가 이렇게 된 게 전공의 탓이라며 이를 가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전공의 처단’ 문구가 포고령에 들어간 걸 설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전공의 집단행동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대통령실과 정부는 대비를 제대로 안 했고, 주요 국면마다 자살골로 사태를 악화시켰다. 결국 윤 대통령과 정부의 실력 부족이 국민 80%가 찬성했던 정책을 지지율 하락 요인으로 전환시킨 것이다.실력은 없는데 고집만 세 실패 반복 윤 대통령은 의료 전문가가 아니다. 잘 모르는 분야에 손을 대려면 주변 조언을 충분히 듣고, 추진 중에도 상황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 했다. 하지만 실력은 없고 이해는 부족한데 고집만 세니 일 년 동안 같은 실패를 반복하며 환자와 국민이 10개월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윤석열식 의료개혁을 자성해야 할 마당에 전공의를 탓하는 포고령이 나오니 말 그대로 황망할 따름이다. 오죽하면 조규홍 복지부 장관이 5일 국회에서 “(포고령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했겠는가.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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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공의와 의대생은 언제 대화에 나설까[오늘과 내일/장원재]

    11일 여야의정 협의체가 가동되면 올 2월 의료공백 사태가 발생한 지 9개월 만에 대화 국면이 시작된다. 하지만 대화가 성과로 이어지기엔 상황이 녹록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은 7일 기자회견에서 “내년도 정원은 정부가 추진하는 대로 됐다”며 내년도 정원 조정 불가 방침을 거듭 밝혔다. 반면 사태 해결의 키를 쥔 전공의(인턴, 레지던트)와 의대생 단체는 여전히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를 주장하며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일각에선 전공의·의대생과 충돌하던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이 물러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란 예상도 나오지만 정부가 요지부동인 이상 드라마틱하게 국면이 바뀌긴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더 많다.늦어도 내년 2월엔 전공의 입장 변화 불가피 한 가지 확실한 건 전공의가 돌아오지 않으면 의료공백 사태는 안 끝난다는 것이다. 정부가 제시하는 ‘전문의 중심 병원’도 전공의가 돌아와 수련을 마치고 전문의가 지속적으로 배출될 때 가능한 얘기다. 정부는 11, 12월 진행되는 내년 상반기 수련 전공의 모집 때 일부 전공의가 복귀할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7, 8월 진행된 하반기 수련 전공의 모집 때 지원율이 1.6%에 불과했던 걸 감안하면 이번에도 복귀 규모는 미미할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올 7월 칼럼에서 “전공의와 의대생 연내 미복귀는 상수로 봐야 한다”고 썼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14일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진행되고 다음 달 13일까지 각 대학은 수시전형 합격자를 발표한다. 이제 대학이 할 수 있는 건 수시모집 미선발 인원을 정시로 이월하지 않는 등 선발 인원을 일부 조정하는 것 정도인데 정부는 이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전공의와 의대생 역시 ‘미세 조정’이란 타협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문제는 내년이다. 전공의 대표인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은 자신들의 요구가 안 받아들여지면 “내년 봄에도 전공의와 의대생은 병원과 캠퍼스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만 전공의 등이 내년도 증원 철회를 언제까지나 요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의대 정시전형 결과는 내년 2월 7일까지 발표된다. 합격자 발표로 신입생들은 전공의와 의대생의 후배가 된다. 후배들의 합격 취소를 요구할 순 없으니 합격을 인정하는 대신 수업 거부에 동참해 달라고 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내년도 2월 이후에는 2026학년도의 ‘증원 철회’나 ‘신입생 모집 중지’ 등이 새 요구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내년 3월 전공의 입대도 변수 변수는 하나 더 있다. 7, 8월 대거 사직 처리된 전공의 상당수는 내년 3월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사(공보의)로 입대해야 한다. 전공의는 의무사관 후보생이어서 일반 사병 입대는 불가능하다. 인턴이나 저연차 레지던트는 몰라도 고연차 레지던트의 경우 수련 중 38개월의 공백이 생기는 것이니 의료공백 사태가 조속히 해결돼 수련병원에 복귀하는 게 이들에게도 유리하다. 의료공백 사태가 언제 어떻게 끝날 것인지 현재로선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내년 초 어떤 형태로든 전공의와 의대생이 요구사항을 조정할 수밖에 없다면 정부와 의료계도 이를 계기로 의료공백 사태를 해소할 노력을 지금부터 해야 한다. 먼저 여야의정 협의체에서 전공의 수련 제도 개선이나 내년도 증원 일부 조정을 논의하면서 전공의가 대화의 장으로 나올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의료계에선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들을 중심으로 진행 중인 의사 수 추계가 내년 초 나오는 만큼 이를 토대로 적절한 증원 규모에 대한 의견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전공의·의대생 단체에도 상황 변화가 생길 때 보다 적극적으로 논의에 참여할 것을 권하고 싶다. 올 한 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비교해 보면 무조건 강경하게 나오거나 누워만 있는 게 답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테니 하는 말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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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연금개혁, 국회와 정부를 믿어선 안 된다

    정부는 지난달 4일 국민연금 개혁안 발표 후 “2003년 이후 21년 만에 발표한 정부 연금개혁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연내 국회를 통과하면 17년 만에 개혁이 이뤄진다”고 했다. 정부가 연금개혁안을 제출한 건 2003년인데 왜 개혁은 2007년에야 됐을까.4년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연금개혁 국내외에서 연금개혁이 진통 없이 진행된 경우는 없다. 2000년대 중반 연금개혁 때도 마찬가지였다. 2003년 취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선거 전 연금개혁에 소극적이었지만 취임 후 입장을 바꿨다. 이후 학계, 경영계, 노동계 등이 모여 논의를 거듭했지만 결론을 못 냈고 결국 세가지 안을 발표한 뒤 정부로 공을 넘겼다. 정부는 그중 하나를 택해 2003년 10월 법안을 발의했지만 총선을 앞둔 정치권은 소극적이었고 결국 이듬해 16대 국회가 막을 내렸다. 17대 국회에선 후속 논의가 3년 동안 이어졌고 2007년 4월 본회의 표결까지 갔지만 ‘국민연금법-기초노령연금법’ 세트 중 표에 도움이 되는 기초노령연금법만 통과되고 정작 국민연금법은 부결됐다.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맛이 쓰기에 사탕과 같이 올렸는데 약사발은 엎고 사탕만 먹었다”고 국회를 비판하며 사퇴했다. 언론에서도 ‘무책임한 행태’란 비판이 이어지자 여야는 부랴부랴 그해 7월 국민연금법을 통과시켰다. 20여 년 전 연금개혁 과정을 설명한 건 현재 상황에 주는 시사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 연금개혁은 인기를 얻기 어려운 지난한 작업이다. 2002년 대선 때 연금개혁을 주장했던 이회창 후보가 패배하고 정작 연금개혁에 소극적이었던 노 전 대통령이 당선 후 추진하겠다고 나선 것도, 2004년 총선 직전 표결이 무산된 것도 연금개혁이 표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둘째, 전문가와 각계 대표가 머리를 맞대고 개혁안에 합의할 것이란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당시에도 이번에도 전문가와 시민사회단체는 어떤 안에도 합의하지 못했다. 합의가 가까워질 때마다 더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는 등 딴지를 거는 인물이 나타나곤 했다. 김상균 전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연금특위) 공론화위원장은 “가장 기본적이고 시급한 것부터 하나씩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교훈”이라고 했다. 셋째, 국회와 정부를 믿으면 안 된다. 17년 전 국회는 4년간 논의 후에도 결국 표에 도움이 되는 법안만 통과시켰다가 비판을 받고서야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노무현 정부도 출범 직후부터 추진했던 연금개혁을 지지율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임기 말에 마무리했다. 국회, 정부가 못 미더운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21대 국회 연금특위는 2년 동안 논의했지만 결론을 못 냈고 임기 말 유럽 출장 계획을 발표했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현 정부는 ‘연금개혁’을 주요 국정과제로 내세우고도 지난해 24개 시나리오를 국회에 제출해 ‘맹탕 개혁안’이라는 비판을 받고서야 1년 만에 단일안을 제시했다.“가장 좋은 연금개혁은 빠른 연금개혁” 유불리에 따라 입장을 뒤집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기일 복지부 1차관은 지난달 6일 브리핑에서 “어느 백신이든 빨리 맞는 게 좋은 것처럼 연금개혁은 빠를수록 좋다”고 했다. 불과 4개월 전 “(21대 국회에서) 급하게 하기보다 22대 국회에서 충분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를 거치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던 조규홍 복지부 장관의 말과는 전혀 달라진 태도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20여 년 전 언론의 감시와 국민의 관심이 연금개혁을 완수하는 최종 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부탁하고 싶다. 앞으로 눈을 크게 뜨고 조변석개하는 정부와 표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국회를 언론과 함께 감시하자고 말이다.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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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불리한 죽음은 집계되지 않는다

    북한은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이후 2년 넘게 확진자가 0명이라고 주장했다. 2022년 5월에야 확진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지만 코로나19 사망자로 인정한 건 현재까지 74명뿐이다. 그러나 전문가 사이에선 한국(3만5605명)보다 많은 5만∼10만 명이 코로나19로 사망했을 것이란 의견이 많다. 국내에선 지난해 8월 말 전수조사에서 표본감시로 전환돼 코로나19 확진자·사망자 수가 집계되지 않는다. 다만 질병관리청은 지난달 말 정점에서 주간 확진자를 20만 명 미만으로 추정했다. 이번 변이 치명률이 0.05%라고 한 만큼 그 주에만 백여 명이 사망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보건 당국은 확진자 수만 추정 발표했을 뿐 “(사망자 수는) 현재로선 알 방법이 없다”고만 했다. 최근 응급의료 공백으로 병원 응급실 수용을 거절당하는 일이 늘고 있다. 2일 부산 공사장에선 70대 남성이 병원 8곳에서 거절당한 후 50km 떨어진 병원에 이송됐으나 수술할 의사가 없어 사망했다. 같은 날 세종에서도 계단에서 넘어진 70대 남성이 뇌출혈 증상을 보였으나 18시간 만에 대형병원으로 이송돼 의식불명 상태가 됐다. 더 이상 구급차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뉴스가 아니게 됐고, 24시간 365일 열어야 하는 대형병원 응급실이 문을 닫는 비상식이 ‘뉴 노멀’이 됐다.정부 “응급의료 공백 사망자 통계 없다” 정부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는 예전부터 있었고 이 때문에라도 의료개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렇게 버틸 수 있는 건 의료공백 피해 사례가 따로 집계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최근 “응급실 미수용으로 사망했는지 따로 통계를 집계하지 않는다. 관련 사망이 늘었다는 정치권 주장은 확인 불가”라고 했다. 정부가 발표하지 않는 건 또 있다. 정부는 올 2월 “의료공백 피해자 소송 등을 지원하겠다”며 의사 집단행동 피해신고 지원센터를 열었다. 지난달 14일까지 반년간 4188건이 접수됐지만 정부가 ‘의료공백으로 인한 피해’로 공식 인정하고 소송 지원 방침을 발표한 사례는 한 건도 없다. 응급의료법에 따르면 정당한 사유 없이 응급의료를 거부할 수 없고 이 경우 복지부에서 행정처분을 내릴 수 있지만 의료공백 이후 해당 조항을 적용해 행정처분을 내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의료공백 피해 인정을 꺼리는 건 의사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병원을 떠난 의사 때문에 국민이 죽어 나간다’는 비판에 대한 우려도 있을 것이다. 한 대형병원 교수는 “중증 응급질환으로 사망하면 일반인들은 제때 의료진을 만나지 못해서 사망한 건지 정말 사망률이 높은 질환이어서 사망한 건지 가려낼 수 없다”고 했다.“피해 조사·검토” 말만 되풀이 조규홍 장관은 지난달 국회 청문회에서 의료공백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는 우려에 “(체계적 조사를)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이후 한 달 가까이 지났지만 후속 조치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피해 의심 사례가 보도될 때마다 “조사해 보겠다”고 했지만 그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과적으로 정부에도, 의사에게도 불리한 죽음은 집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진료 체계가 그래도 원활하게 가동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한덕수 국무총리는 국민들이 죽어 나간다는 지적에 “가짜 뉴스”라고 소리 높여 반박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서두에 언급한 두 사례처럼 불리한 상황에서 피해 규모를 밝히지 않는 건 이번만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느끼는 것처럼 ‘의료대란’이란 유령은 지금도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애써 보려 하지 않는 대통령실과 정부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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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만나지 않으면 모른다

    10년 전 일본 대학에서 연수할 때 일이다. 방학을 이용해 자전거로 일본 열도를 종단하던 중 삿포로의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남성이 일본 내 혐한 보도를 토대로 한국 비판을 쏟아냈다. “혐한 보도는 극히 일부 사례를 과장한 것”이라며 조목조목 반박하자 “한국인의 생각과 행동을 언론에서만 접했는데 그게 획일적이고 틀에 박힌 것이었다”며 물러섰다. 또 “나중에 자전거를 같이 타자”고 제안했다. 그와는 여행 후 도쿄에 돌아와 함께 자전거를 타는 사이가 됐다. 지바에서 열린 200km 자전거 대회에도 함께 출전했는데 생소한 길을 그와 그의 지인이 자신의 기록을 신경 쓰지 않고 앞뒤로 에스코트해 줘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낯선 사람과 만나는 경험 사라져 이달 초 공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의 사회통합 조사 결과를 보면서 당시 생각이 났다. 조사에선 국민 92.3%가 “사회 갈등 중 보수와 진보 간 갈등이 가장 심각하다”고 답했다. 또 58.2%는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 연애·결혼을 할 수 없다”고 했고, 33%는 “정치 성향이 다른 친구·지인과 술자리를 할 의향이 없다”고 밝혔다.‘우리’와 ‘타자’를 구분하고 자신과 다른 이들을 경계하는 건 인간이 가진 ‘부족 본능’이다. 그래도 과거에는 가족 모임, 동창회, 회식, 학부모 모임 등에서 자의든 타의든 생각이 다른 사람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신문과 TV 뉴스에서도 찬반 의견을 어느 정도 균형 있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스마트폰과 메신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낯선 사람과 대면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기를 거치며 국민 다수가 비대면에 익숙해졌다. 신문과 TV의 자리를 유튜브 등이 상당 부분 대체하며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성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는 경향도 강해졌다. 그렇다면 낯선 사람을 안 만나는 게 좋을까. 2017년 미국 시카고대 연구팀은 통근 열차를 타는 시민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탑승 전 대다수는 “낯선 사람과 얘기하고 싶지 않다. 혼자 가는 게 훨씬 좋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실험 결과 혼자 출근한 사람보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라”는 지시를 받은 사람이 “출근 시간이 훨씬 즐거웠다”고 답했다.극과 극도 만나면 통한다같은 해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는 ‘독일이 말한다’ 기획을 시작했다. 온라인 설문조사를 거쳐 생각이 극과 극인 사람을 만나게 해 보자는 취지였다. 이 기획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는데 결과는 놀라웠다. 난민과 극우주의자, 동성애자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서로를 상당 부분 이해하게 됐다는 후기를 남겼다. 디 차이트 편집장은 자신의 책 ‘혐오 없는 삶’에서 “많은 참가자가 싸움 등 극적인 걸 기대했지만 실제 발견한 건 동의와 공감이었다”고 썼다.(동아일보도 2020년 ‘극과 극이 만나다’ 기획을 통해 생각이 다른 이들이 대화를 통해 서로 이해해 나가는 모습을 보도했다.)‘타자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는 깨달음의 계기”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필자가 진보와 보수 정권에서 모두 청와대를 출입하며 알게 된 것은 진보의 절대다수는 종북좌파가 아니고, 보수의 절대다수는 토착왜구가 아니란 점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사람들은 진보와 보수 어느 한 극단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사이 다양한 스펙트럼상 어딘가에 있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 만나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다. 10년 전 일본 남성이 필자를 만난 후 실제 한국인이 혐한 뉴스에 나오는 것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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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가 만난 사람]“사교육업체에 해킹된 수능, 기괴한 퍼즐놀이로 변질”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국어 영역에는 독일 철학자 헤겔의 미학과 변증법을 다룬 지문이 등장했다. 철학 전공자도 고개를 흔들 정도로 어려운 내용으로 킬러(초고난도) 문항의 전형적 사례로 거론되지만 의외로 수험생 절반에 가까운 45%가 정답을 맞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2023학년도 수능에서 만점을 받은 두 학생은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공부 비법을 설명하다 “책을 안 읽는다” “책을 안 좋아한다”고 했다. 1994년도에 처음 도입된 수능의 취지가 ‘암기식 교육 대신 독서와 토론을 통한 사고능력 향상’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깊이 있는 독서가 중요하다’던 수능은 어디로 간 걸까.최근 출간된 504쪽짜리 책 ‘수능 해킹’은 이처럼 어느새 도입 취지와 전혀 달라진 수능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고발한다. 또 기괴한 퍼즐놀이로 바뀐 수능을 이제라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수능을 100여 일 앞둔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두 저자를 만나 수능의 현실과 개선 방안에 대해 들었다.》사교육 시장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봤던 현직 의사 문호진 씨(34)와 소설가 단요 씨는 헤겔의 미학이 거론된 2022학년도 국어 문제의 경우 “핵심 개념을 몰라도, 지문을 이해하지 못해도 풀 수 있다”고 단언했다. 낱말카드를 맞추는 것처럼 지문과 문제의 중복 키워드를 찾아내 매칭하는 일명 ‘눈알굴리기’ 기법을 활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2023학년도 국어 영역에서 킬러 문항으로 꼽힌 기초대사량 지문의 경우 “숙달된 학생은 레고 블록을 갈아 끼우듯 서술어를 바꾸는 ‘치환 테크닉’으로 1분 30초∼3분 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했다. 국어 영역 외 다른 영역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두 저자는 이 같은 퍼즐 맞추기식 문항이 “반교육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단요 씨는 “과학탐구의 경우 생명과학1은 논리 퍼즐이, 화학1은 빠른 사칙연산과 미지수 찾기가 관건”이라며 “이는 다른 곳에서 활용할 수 없는 기예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했다. 또 “‘4974와 23134를 곱하시오’라는 문제는 어렵지만 초등학교 수준의 지식만 있으면 된다. 이처럼 형식적 복잡성만 가진 퍼즐식 문항이 지식과 논리의 깊이가 필요한 고난도 문항처럼 오해되며 수능의 문제를 가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은 왜 수능에 퍼즐식 문항을 내게 됐을까. 문 씨는 “최근 시험 과목 수와 교과 범위가 줄어드는 반면 사교육 업체의 서비스 질은 높아지는 상황에서 평가원이 수험생들을 줄 세우기 위해 택한 게 퍼즐식 문항”이라고 분석했다. 의도가 나쁘지 않았다는 건 저자들도 인정한다. 정부는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며 2000년대 중반 EBS 교재와 수능을 연계했고 2011학년도부터 연계율을 70%로 강화했다. 또 같은 이유로 4과목씩 선택해 시험을 보던 수능 사회탐구·과학탐구 영역을 2014학년도부터 2과목만 선택해 보도록 했다. 2018년도부터는 영어 영역을 절대평가로 만들었고, 이른바 ‘조국 사태’ 후에는 ‘아빠 찬스를 막겠다’며 정시를 강화했다. 문제는 시험 과목 수와 교과 범위가 줄면서 수험생들이 제한된 영역에 자원을 집중하게 됐다는 것이다. 문 씨는 “일례로 과거 4과목 시험을 치른 후 2, 3과목만 반영하던 탐구 영역이 ‘2과목 시험 후 2과목 모두 반영’으로 바뀌면서 ‘한 과목이라도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상위권 수험생들이 필사적으로 각 과목에 매달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자원이 집중되는 영역을 알게 된 사교육 업체는 평가원의 출제 경향을 패턴화한 사설모의고사로 테크닉을 가르쳤고, 평가원은 줄 세우기를 위해 복잡도를 강화한 퍼즐식 문항으로 대응하며 점차 난도가 높아졌다. 단요 씨는 “갈수록 의미 없는 복잡도만 높이는 식으로 진화해 생명과학의 경우 현재 학원 강사도 ‘특정 유형 문제는 포기하라’고 할 정도로 극한 수준이 됐다”고 말했다. 퍼즐식 문항을 평가원만의 책임으로 돌릴 순 없다. 1998년 설립된 평가원은 역대 원장 11명 중 3명만 임기를 채웠고, 나머지는 문제 오류나 난이도 조절 실패 등에 책임을 지고 중도 사퇴했다. 그러다 보니 문제를 출제하며 교육적 효과보다 난이도 조절에 더 신경쓰게 됐고, 새로운 유형의 문제를 제출해 논란을 부르기보다 기존 유형에 퍼즐형을 가미해 난이도를 컨트롤하는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문 씨는 “평가원이 난이도 조절이나 복수정답 막기 등에만 치중하는 대신 교육적 목적에 충실할 수 있도록 국민과 교육 당국, 언론이 돕기만 했어도 현재 같은 극단적 문항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른바 ‘수능의 퍼즐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같은 변화는 2010년 전후부터 수년에 걸쳐 이뤄졌지만 그동안 거의 공론화되지 못했다. 수험생과 학부모 모두 일단 입시를 거치고 나면 관심이 줄어드는 데다, 교육부 공무원과 교육 전문가도 문항의 세부 변화까진 알아채지 못한 탓이다. 뒤늦게 초고난도 문항에 대해 알게 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수능에서 킬러 문항을 제외하라’는 취지의 지시를 내렸고 이른바 ‘사교육 카르텔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와 국세청, 검경까지 동원했음에도 성과는 거의 없었다. 저자들은 “지난해 최고치를 경신한 사교육비도 당분간 줄어들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했다. 단요 씨는 “현 정부는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보다 적을 만들어 대결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사실 사교육의 문제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고 설명했다. 문 씨도 “암세포가 온몸에 퍼져 있는데 일부만 잘라낸다고 해결될 수 있나. 오히려 불안감만 더 키웠다”고 했다. 저자들은 교육부에 대해서도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면피성으로만 대처하며 역효과를 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단요 씨는 “킬러 문항을 없앴다고 하지만 6월 모의평가의 경우 영어 영역 1등급 비율이 1.47%로 역대 최저였다”며 “이는 절대평가의 탈을 쓴 상대평가이며 과거의 영어 영역으로 회귀하려는 징조”라고 말했다. 저자들은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 역시 사교육을 자극하면서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문 씨는 “의대 증원이 의사 배출로 이뤄지려면 6∼10년 걸리는 반면 사교육 유발 효과는 즉각 발생한다”며 “아동학대라고 부를 수 있는 초등의대반, 자퇴한 N수생을 위한 입시학원, N수생이 빠져나간 자리를 노리는 편입학원 등으로 연쇄반응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봤다. 제목은 ‘수능 해킹’이지만 저자들은 암기형 문항으로 산출되는 내신 성적, 고교생 수준을 뛰어넘는 수행평가를 요구하는 교사들, 사교육 없이 불가능한 대학 면접시험 등 수능 외에 고교생을 옥죄는 다양한 입시 제도의 현실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들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건 ‘안전 마진(safety margin)’이다. 실수를 해도 치명적 상황에 이르지 않을 수 있어야 수험생과 학부모의 불안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수능 선택과목을 다시 늘려 한두 과목은 실패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 수험생과 평가원을 포함해 입시 당사자들이 오류와 시행착오에 여유를 갖고 대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 사교육이 개입할 여지를 줄이기 위해 입시를 단순화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단요 씨는 “지방 일반고에 진학한 학생이 사교육 도움 없이 내신과 수능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입시 정책의 목표가 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책은 나온 지 한 달 만에 초판 3000부가 매진돼 최근 2쇄를 찍었다. 아르바이트 등으로 사설모의고사 출제 경험이 있는 저자들은 “책이 마치 사교육 업체 광고처럼 받아들여질까 봐 걱정”이라면서도 “현실을 바꾸려면 먼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썼다. 앞으로 입시 제도를 손볼 때 논의의 토대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6일이면 수능이 꼭 100일 남는다. 수험생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묻자 여러 차례 수능을 쳤다는 문 씨는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책을 쓰면서 여러 명을 인터뷰했는데 지난해 역대급 불수능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학생이 좋은 결과를 내는 걸 봤습니다. 올해 수능 난이도가 어떨 것이란 예상이나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됩니다. 당일 눈앞의 시험지에 집중하고 설사 몇 문제 틀렸더라도 멘털(정신)을 잡고 끝까지 버티면 좋은 성과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문호진(34)△1990년 인천 출생△2022년 인하대 의대 졸업△2023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중앙집행위원△현재 서울의 한 공공병원에서 근무 중단요△경기 출생△2022년 소설 ‘다이브’로 데뷔△2023년 문윤성 SF 문학상, 박지리문학상 수상△2024년 문인동네 신인상 평론 부문 당선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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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전공의와 의대생은 돌아오지 않는다

    지난주 정부는 미복귀 전공의(인턴, 레지던트)에 대해 면허정지 처분을 중단하고, 수업을 거부 중인 의대생은 F학점을 받아도 유급 대신 ‘강제 진급’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정부가 복귀시한으로 정한 15일까지 복귀한 전공의는 10% 미만이고 과반이 사직 처리됐다. 의대생 역시 대부분 수업 거부를 이어가고 있다. 이쯤 되면 정부도 인정할 때가 됐다. 전공의와 의대생은 내년도 의대 증원 백지화 외에 어떤 조치를 내놓아도 당분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내년도 증원이 정부 말대로 ‘상수’가 됐다면 이제 연내 전공의·의대생 미복귀 역시 ‘상수’로 받아들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연내 미복귀 전제로 대책 만들어야 전공의와 의대생의 진심을 의심하진 않는다. 특히 필수과 전공의들은 사명감을 갖고 힘든 길을 택한 이들이다. 갈수록 악화되는 의료 현장, 정부의 미흡한 대책, 의사를 늘리면 해결될 것이란 단순한 해법, 비상식적 증원 규모 등에 실망해 병원을 떠난 걸 ‘밥그릇 챙기기’라고만 매도할 수도 없다. 정원이 최대 4배로 늘면 학습 여건이 열악해질 것이란 의대생들의 우려도 일정 부분 타당하다. 하지만 내년도 증원은 5월 말 확정됐고 이제 전공의·의대생도 복귀해 함께 해법을 논의할 시점이 됐다. 의사인 지인은 필자에게 “전공의들은 불합리하게 결정된 정책을 마음으로 못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더 많은 표를 얻은 앨 고어 후보가 분열을 막기 위해 패배를 인정한 것처럼, 때론 비합리적 결정이라도 승복하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2000명이란 규모를 제외하면 의대 증원은 국민 다수가 광범위하게 동의하는 사안이다. 다만 최근 정부가 잇따라 내놓은 정책이 전공의·의대생이 돌아오지 않게 하는 쪽에 가까웠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당초 ‘법과 원칙에 따른 엄정 대응’을 강조했던 정부는 지난달 전공의에게 내린 각종 명령을 철회한 데 이어 면허정지 처분도 철회했다. 교육부도 의대생이 수업을 거부하자 “성적 평가를 학년 말에 하고 수업에 안 나와도 진급시켜 주겠다”며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할 유인을 스스로 없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자명한 일이다. 누워서 버틸수록 정부가 양보안을 내놓는데 전공의와 의대생이 왜 돌아오겠다고 나설까.의대생은 휴학이나 유급 불가피 전공의와 의대생은 올 2월 병원과 학교를 떠날 때부터 “최소 1년은 쉴 수 있다”, “유급은 각오했다”는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정부가 해야 할 건 ‘할 수 있는 조치는 다했다’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전공의·의대생 미복귀를 전제로 대책을 만드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상급종합병원이 중증·응급 환자를 계속 볼 수 있도록 비상진료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다행히 교수들이 환자 곁을 지키는 만큼 중증·응급 환자 수가 인상, 진료지원(PA) 간호사 확대, 경증 환자 회송 활성화 등을 통해 연말까지 버틸 수 있도록 시스템을 보강해야 한다. 교육부는 더 이상 꼼수를 쓰는 대신 휴학 또는 유급을 허용하고 내년도 예과 1학년 7500명 수업을 전제로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 수업을 제대로 안 들은 의대생을 진급시키는 건 교육 원칙에도 어긋날뿐더러 국민 건강과 생명에도 도움이 안 된다. 정부와 사회가 이제부터 해야 할 건 원칙을 지키며 전공의와 의대생을 기다리는 것이다. 또 복귀할 경우 관용을 베풀고 원하는 의사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마지막까지 임기응변성 대책으로 일관할 경우 이번 사태는 전공의·의대생은 물론 정부와 사회에도 유용한 교훈을 남기지 못한 또 하나의 반면교사 사례로 남을 것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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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장원재]의사단체가 이번엔 이기기 어려운 이유

    서울대 의대·병원 교수들은 17일부터 시작한 무기한 휴진을 닷새 만에 중단하기로 했고, 대한의사협회(의협)가 공언했던 ‘27일부터 무기한 휴진’도 내부 반발로 무산 가능성이 커졌다. 의협이 주도한 18일 하루 휴진의 동네병원 동참률은 4년 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의사단체 내부에서도 “더 이상은 싸우기 어렵다”는 말이 나온다. 2014년, 2020년 전면 투쟁으로 정부를 좌절시켰던 의사단체가 이번에는 왜 이렇게 고전하는 걸까.손자병법이 제시한 승부 결정 요소 손자는 손자병법에서 전쟁의 승부를 결정하는 다섯 요소가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이라고 했다. 가장 중요한 ‘도’는 전쟁의 대의명분이다. 2000명이란 숫자에 대한 이견은 있을 수 있지만 주요국이 고령화와 함께 의사 숫자를 늘려온 만큼 한국도 27년 만에 의사를 늘려야 한다는 정부의 대의명분은 알기 쉽고 분명했다. 하지만 의사단체는 ‘원점 재검토’를 외칠 뿐 증원 찬성인지 반대인지조차 의견을 정리하지 못했고, 각각의 이유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국민이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다음으로 ‘천’은 천시(天時), 즉 외부 환경의 변화다. 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기였던 2020년 의대 400명을 증원하려다 실패했다. 국민들은 보건의료 위기 상황에서 굳이 의사들이 반대하는 정책을 왜 해야 하는지 정부에 물었다. 하지만 이후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과 오픈런’이 일상화되면서 국민들은 의사 증원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 의사들은 이런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아과 오픈런의 원인이 젊은 엄마들의 ‘브런치 타임’ 때문이라는 등의 발언으로 여론의 반발을 샀다. ‘지’는 자신의 강약점을 알고 지형지물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의사의 힘은 국민 생명을 다룰 수 있는 면허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에서 나온다. 그러다 보니 의사 집단 휴진으로 생긴 의료 공백을 해결할 주체도 의사뿐이고, 결국 의사들이 버티면 정부가 물러나는 패턴이 반복됐다. 정부는 과거 실패를 감안해 진료지원(PA) 간호사 투입 등의 대안을 마련했고, 5월 말 대학 수시모집 요강 공고로 수험생과 학부모를 같은 배에 태우며 물러날 수 없는 배수의 진을 만들었다. 돌아보면 의사들이 자신들의 강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던 시기는 4월 총선 직전이었고, 마지막으로 발휘할 수 있었던 시기는 5월 말 모집 요강 공고 직전이었다. ‘장’은 지혜(智), 믿음(信), 어짊(仁), 용기(勇), 엄격함(嚴)을 겸비한 장수다. 법정단체 의협의 임현택 회장은 비타협적·기습적 게릴라 전술로 회장이 됐지만 14만 의사의 리더로서 통합적 리더십은 보여주지 못했다. 전공의(인턴, 레지던트) 대표와도 갈등을 표출하며 전공의 복귀가 목표인 정부가 의협을 상대하지 않게 만들었다. 병원을 떠난 뒤 누워 있기로 일관하는 전공의 대표, “가족 같은 전공의가 나갔는데 환자 치료나 하는 건 천륜을 저버리는 것”이라며 병원을 떠난 의대 교수도 덕이 있다고 보긴 힘들다. 마지막으로 ‘법’은 조직을 관리하고 보급망을 유지하는 매니지먼트 능력이다. 하지만 올 2월 전공의 이탈 후 의사단체의 4개월은 내부에서 분열과 불신, 독선과 비방이 반복되는 ‘사분오열’ 그 자체였다.버티면 이긴다는 생각 이젠 버려야 의사 중 일부는 필자의 글을 보고 “아직 안 끝났다” “더 버티면 이길 수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전쟁의 승부를 결정짓는 다섯 요소 중 어느 것 하나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황이다. 더 이상 싸움을 이어가 봐야 전세를 뒤집기 어려울 거란 생각은 필자만 하는 게 아닐 것이다. 장원재 정책사회부장 peacechaos@donga.com}

    • 2024-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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