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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 만찬은 한마디로 우리의 멋과 맛이 어우러진 자리였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실제 모델인 배우 차은우가 사회를 봤고, 가수 지드래곤은 갓을 쓰고 축하 공연을 했다. 한국계 셰프 에드워드 리가 화합의 의미를 담아 나물 비빔밥을 차려냈다. 싱가포르 총리와 일본 외상, 멕시코 경제장관 등이 “스펙터클한 갈라 디너 쇼”라며 사진과 동영상을 공유했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는 ‘K팝이여 영원하라(Kpop Forever)’란 해시태그까지 달았다. ▷정부는 지난해 6월 경주를 APEC 정상회의 개최지로 선정하면서 ‘문화의 멋’을 선보일 기회라는 걸 이유로 들었다. 천년고도 경주에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소프트 파워’를 보여주겠다는 구상이었다. 한미·한중 정상회담을 공식 행사장인 화백컨벤션센터 대신 경주박물관에서 연 것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 모형을 선물한 것도 ‘한국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신라 금관 6점 합동 전시는 이를 관람한 정상들을 매료시킨 기획이었다. ▷정상들과 기업인들을 사로잡은 것 가운데 ‘한국의 맛’을 빼놓을 수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선물 받은) 황남빵을 맛있게 먹었다”고 말한 사실이 전해지며 황남빵 매장 앞에는 긴 줄이 생겼다. 이재용 정의선 회장과 ‘치맥 회동’을 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한국 치킨은 세계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CNN은 세 거부의 회동 소식을 전하며 “치맥은 한국을 방문하는 누구나 꼭 먹어야 할 조합”이란 설명을 달았다. 라면과 호떡, 찰보리빵, 약과, 호두과자 등도 행사장 안팎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K푸드의 저변을 한층 확장시켰다. ▷K뷰티 열기도 뜨거웠다. 20대 후반인 캐럴라인 레빗 미 백악관 대변인은 국내 브랜드 화장품 13종을 직접 구입하고 인증샷과 함께 ‘한국 스킨케어 추천 아이템’이란 글을 남겼다. 조선미녀 인삼아이크림 등 이름만 봐도 한국산인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할 법한 제품들이었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배우자인 다이애나 폭스 카니 여사는 김혜경 여사에게 “딸이 사 오라며 K화장품 리스트를 줬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APEC 기간 경주 시내 화장품 매장에는 세계적인 명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APEC은 정치·경제 지도자의 모임이지만 이번 회의에서는 K컬처가 또 하나의 주역이었다. 천년사찰 불국사를 돌아보며 ‘어메이징’을 연발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지드래곤 공연을 직관한 덕분에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고 말한 싱가포르 총리 배우자 등에게 한국의 소프트파워가 선사한 감동적인 순간이 오래 기억되리라 믿는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한국에서 근대적 인구조사가 시작된 건 1925년으로 일본, 대만보다 5년 늦다. 일제가 3·1운동의 영향으로 조사 계획을 5년 연기한 탓이다. 실제로 1920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이 일본 기자에게 “조사원으로 활용할 고등보통학교(중고교) 상급생과 졸업생이 모두 독립사상을 갖고 있어 곤란하다”며 하소연하는 대목이 나온다. 우여곡절 끝에 5년 뒤 시작됐지만, ‘호구조사 나왔냐’는 말이 오늘날까지 핀잔으로 통할 정도로 조사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감은 심했다.▷일제가 수탈 목적으로 한 조사라 더 그랬겠지만 사실 생면부지의 사람이 사생활을 캐묻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현재 시행 중인 인구주택총조사 조사에는 직장 이름과 직책, 결혼 및 자녀 계획, 1인 가구가 된 이유 등 요즘 친인척도 쉽게 물어보기 어려운 내용을 묻는 항목이 포함돼 있다. 정부는 10년 전 전수조사를 폐지하고 13개 항목은 행정자료를 활용하며 조사를 간소화했지만, 여전히 조사원이 물어야 할 항목이 42개에 달한다. 올해도 조사원 3만 명이 전체의 20%인 500만 표본 가구를 방문할 계획이다.▷100년 전 첫 조사에서 이름, 성, 연령, 결혼 유무, 국적 등 5개뿐이던 조사 항목이 늘어난 건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늘면서 한국 입국 시기, 한국어 실력,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 등의 항목이 포함된 게 대표적이다. 5년 전 반려동물도 조사 항목에 포함됐다. 시대 변화와 함께 빠진 항목도 있다. 1960년대는 화장실 형태, 1970년대는 상수도 시설 유무, 1980년대는 목욕 시설 유무를 물었지만 지금은 위생 관련 항목은 묻지 않는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하는지 묻는 항목은 2000년에 처음 포함됐다가 곧 사라졌다.▷세금을 걷고, 군대를 편성하기 위한 인구조사는 기원전 4000년경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됐을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 인구조사를 뜻하는 ‘센서스’도 로마 시대 인구와 재산을 조사하던 관직 이름 ‘켄소르(Censor)’에서 나왔다. 지금은 국제통계협회(ISI)의 권고에 따라 대부분의 나라가 5년 또는 10년마다 인구조사를 실시한다. 인구가 14억 명인 중국도 조사원 700만 명을 투입해 10년마다 인구조사를 한다. 세계 최대 인구 대국인 인도만 2011년 이후 아직까지 인구조사를 못 한 상태다.▷100주년을 맞은 인구주택총조사는 이달 22일부터 다음 달 18일까지 진행 중이다. 대면 조사가 부담스럽다면 온라인, 모바일, 전화로도 답변할 수 있다고 한다. 인구주택총조사는 ‘통계의 어머니’로 불린다. 모든 통계의 ‘모집단’을 구성하며 고용, 복지, 주택, 교육, 교통 등 다양한 정책을 수립할 때 활용되기 때문이다. 100주년에 걸맞은 내실 있는 조사가 되기를 바란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영국 가디언은 지난달 “쥐가 이겼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2년 전 ‘쥐와의 전쟁’을 선언하며 미국 뉴욕시가 임명한 방역 책임자 ‘쥐 차르’가 사임했다는 내용이었다. 뉴욕에 서식하는 쥐는 300만 마리로 추정되는데, 질식 가스와 피임약까지 살포하며 총력을 기울였지만 성과는 크지 않았던 것이다. 가디언은 “쥐가 차르를 폐위시켰다”는 표현까지 썼다. ▷‘쥐의 왕국’으로 불리는 뉴욕처럼 최근 서울에서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쥐 목격담’이 쏟아진다. ‘서울의 심장’ 광화문광장에 쥐가 출몰해 구청이 긴급 방역에 나서는가 하면, 한 채가 수십억 원인 강남 신축 아파트 단지에서도 “대낮에 쥐를 봤다”는 민원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서울시에 접수된 쥐 민원은 2181건으로 3년 전의 2배 이상이 됐다. 어느새 도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불청객이 된 것이다. ▷올해 초 국제학술지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세계 주요 대도시 16곳 중 11곳에서 쥐 개체 수가 크게 늘었다. 특히 미국 워싱턴은 10년간 증가율이 390%에 달했다. 일본 도쿄에서도 이달 초 신주쿠를 걷던 외국인 관광객이 쥐에 물리는 등 피해 신고가 이어지고 있다. 파리, 로마 등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도 쥐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중이다. 기후 변화로 도시가 따뜻해지면서 번식에 유리한 환경이 되고, 하수관 등 인프라 노후화로 서식지와 이동 통로가 늘어난 영향이다. 설상가상으로 천적도 사라졌다. 먹을 게 넘치는 도시에서 들고양이는 천적이 아니라 쥐와 음식물 쓰레기를 나눠 먹는 이웃이 됐다. ▷한국에선 3년 전 여의도 한복판에서 쥐 20여 마리가 쓰레기봉투를 파먹는 영상이 공개돼 충격을 줬다. 1970년대 ‘쥐잡기 운동’으로 박멸된 줄 알았던 쥐가 다시 활개 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쥐 꼬리를 모으거나 쥐약을 살포하던 시절로 돌아가긴 어렵다. 쥐를 잡아 꼬리를 자를 만큼 용감한(?) 국민도 많지 않고 살포한 쥐약이 자칫 반려견, 반려묘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어서다. 서울시는 23일 대안으로 사물인터넷(IoT) 센서가 장착된 ‘스마트 쥐덫’을 설치하기로 했다. 쥐가 먹이를 먹으러 들어오면 문이 닫히고 경보가 방제센터로 전송돼 수거하는 방식이다. ▷쥐가 갑자기 많이 보이는 건 놀라운 번식력 때문이기도 하다. 한 쌍의 쥐는 출산을 거듭하며 1년 만에 최대 1250마리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한다. 서울도 머잖아 뉴욕처럼 매년 수만 건의 쥐 출몰 신고에 시달릴 수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쥐 대응의 ‘3원칙’은 굶기고, 막고, 잡는 것이다. 쥐들에게 ‘뷔페 식당’ 역할을 하는 음식물 쓰레기를 신속하게 치우고, ‘고속도로’ 역할을 하는 노후 하수관 틈을 막는 것부터 서둘러야 한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점심 자리에서 폭탄주가 오가던 법조계의 ‘낮술’ 문화는 2000년을 전후로 크게 줄었다. 과도한 음주로 인한 추태나 실언이 사회적 물의를 빚으면서, 드러내놓고 공공연히 술자리를 갖는 일은 점차 자제하게 됐다. 하지만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닌 듯하다. 지난해 6월 제주지법 부장판사 3명이 근무시간에 낮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소란을 피운 사실이 최근 뒤늦게 드러났다. 국회 법사위가 이들을 국감 증인으로 채택하자 셋 모두 ‘재판 준비’를 이유로 불출석 사유서를 냈다. ▷사건은 지난해 6월 28일 제주지법 직원 환송회 자리에서 벌어졌다. 오창훈, 여경은, 강란주 등 세 부장판사는 낮술을 마시다 취한 상태로 노래방을 찾았는데, 업주가 “술은 못 파니 나가 달라”고 하자 버티면서 경찰까지 출동했다. 이들은 다른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고, 3명 중 2명은 법원에 복귀하지 않고 퇴근했다. 법원 감사위원회는 성실 의무와 품위 유지 의무 위반을 인정했지만 ‘경고’ 조치로 마무리해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는 평가다. ▷이들 중 오 부장판사는 다른 논란에도 휘말려 있다. 그는 올 3월 재판 중 방청객에게 “어떤 소리도 내지 말라. 한숨도 쉬지 말라. 어기면 구속하겠다”는 취지로 발언해 직권남용 혐의로 공수처에 고발됐다. 여 부장판사는 고교 동문인 변호사와 “2차 애기 보러 갈까”, “좋죠. 형님” 등의 대화를 나눈 카톡 화면이 공개되며 부적절한 접대 의혹을 받는다. 이 변호사는 여 부장판사와의 친분을 내세우며 구속된 피고인에게 “보석으로 풀려나게 해줄 테니 돈을 달라”고 요구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그런데 대법원은 오 부장판사에 대해선 “징계 사유가 아니다”, 여 부장판사에 대해선 “친분이 없는데 변호사가 과장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 관행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7년 서울동부지법 성범죄 전담 재판부 판사가 지하철에서 여성 신체를 몰래 촬영하다 현행범으로 붙잡혔는데, 법원은 벌금 300만 원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판결 직후 감봉 4개월 징계 처분을 내렸다. 2012년 일본 오사카지법 판사가 같은 혐의로 적발된 후 파면된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당시 일본 재판관탄핵재판소는 판결문에서 “사법 전체에 대한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실추시켰다”고 질타했다. ▷법사위는 제주지법 부장판사들에게 동행명령장을 발부했다. 국회가 현직 판사에게 동행명령장을 발부한 건 처음이다. 결국 끌려오다시피 나온 여 부장판사는 “부적절한 처신에 깊이 반성한다”며 여러 번 고개를 숙였다. 동행명령을 거부한 두 부장판사는 고발될 처지에 놓였다. 사법부가 내부 비위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밖으로부터의 ‘사법부 개혁’ 목소리는 점점 커지게 될 것이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일본 정치에는 ‘나막신의 눈(雪)’이란 말이 있다. 신발 바닥에 들러붙은 눈처럼, 밟히는 수모를 감수하며 권력에 달라붙는다는 뜻이다. 자민당과 손잡고 26년 동안 여당 자리를 지켜온 공명당을 두고 일본 언론이 자주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명당이 10일 정치자금 제도 개선 대책이 명확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자민당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정치권에선 “26년 만에 나막신의 눈이 녹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불교 종파인 창가학회를 기반으로 한 공명당은 중도 보수 성향으로, 1999년부터 더 보수적인 자민당과 연정을 유지해 왔다. 지역구 후보를 거의 안 내고 비례 의석에 주력하는 대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지지자들에게 “자민당 후보에게 투표해 달라”고 독려하면서 자민당과 공생했다. 선거구당 평균 2만 명의 조직표를 가진 공명당의 지지는 자민당 의석 확보에 큰 도움이 됐고, 자민당은 ‘알짜’인 국토교통성 장관을 항상 공명당에 내줬다. 또 중의원 지역구 10∼15곳에 후보를 안 내며 공명당 후보 당선을 이끌었다. 공명당이 중시하는 복지 교육 공약 일부도 정책에 반영해 줬다. ▷‘악어와 악어새’ 같던 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2년 전 자민당에서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지면서부터다. 모금 행사에서 걷힌 정치자금 일부를 뒷돈으로 챙겨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이 터지면서 자민당 지지율은 급락했다. 창당할 때 ‘돈에 깨끗한 정당’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공명당 본부에도 항의 전화가 쏟아졌다. 그 이후로 자민-공명 연합은 주요 선거에서 3연패했다. 특히 지난해 중의원 선거에서 공명당 의석수는 32석에서 24석으로 8석이나 줄어 당 지도부가 충격에 빠졌다. 윈윈이었던 두 당의 관계가 어느새 자민당이 공명당의 발목을 잡는 관계로 바뀐 것이다. ▷철옹성 같던 자민-공명 연합이 무너지면서 일본 정치권에선 정권 교체 가능성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이 공명당과 손잡고 다른 야당을 끌어들여 ‘비자민 연립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야당 간 이념 스펙트럼이 넓긴 하지만 1993년 8개 당파가 손잡고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를, 이듬해 5개 당파가 연합해 하타 쓰토무 전 총리를 선출한 전례를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자민당은 조속히 새 연정 파트너를 찾아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연패를 거듭하면서도 정치자금 스캔들에서 못 헤어나오는 자민당 손을 잡을 야당이 있을지 의문이다. ‘첫 여성 총리’를 꿈꿨던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는 취임 6일 만에 기자회견에서 “총재직을 유지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는 처지가 됐다. 26년 만에 나막신에서 녹아내린 눈이 일본 정치 지형을 흔드는 대형 눈사태를 유발할지, 주목되는 순간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오세훈 서울시장이 2023년 3월 발표한 ‘그레이트 한강’ 프로젝트에는 새 이동 수단으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곤돌라가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이후 영국 런던에서 템스강의 수상버스를 체험한 오 시장은 ‘수상버스 도입 추진’을 공식화하고 곤돌라는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불과 나흘 만에 발표를 뒤집은 걸 두고 서울시 안팎에선 “수상버스에 대한 시장의 집념이 대단하다”는 말이 돌았다. 오 시장은 2006년 시작한 첫 임기 때도 ‘한강 르네상스’를 내세우며 수상버스 도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이후 2년여의 준비를 거쳐 이달 18일 한강버스가 처음 출항했다. 하지만 거의 매일 사건 사고가 이어졌다. 방향타나 전기 설비에 문제가 생겨 운항을 중단하는 일이 반복됐다. 화장실 오물이 역류했고, 팔당댐 방류로 모든 배가 하루 운항을 중단하기도 했다. 취항식에서 “한강의 역사는 한강버스 전과 후로 나뉠 것”이라고 했던 오 시장은 결국 “앞으로 한 달간 승객을 안 태우고 시범 운항을 더 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한강버스의 초반 시행착오를 두고 ‘예고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한강버스는 첨단 기술이 필요한 전기 하이브리드 선박임에도 운영사는 선박 건조 실적이 전혀 없는 신생 업체에 제작을 맡겼다. 결과적으로 선박 건조 및 인도 일정이 늦어지면서 운항 시작은 지난해 10월에서 올해 9월로 3차례나 미뤄졌다. 그나마 계획했던 12척 중 4척만 확보된 상황에서 개문발차식으로 운항을 시작해 출근 시간대에는 이용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무리하게 취항을 서둘렀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한강버스를 이용한 승객 사이에선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많다. 런던의 경우 런던아이, 국회의사당 등 주요 명소가 선착장 바로 앞에 있다. 반면 한강은 보통 수백 m는 걸어야 도심이나 지하철역까지 갈 수 있다. 강폭이 템스강의 5, 6배다 보니 제방과 둔치를 폭넓게 조성한 탓이다. 잠실 선착장의 경우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걸어서 15분이나 걸린다. 또 마곡부터 잠실까지 운항 시간이 일반은 127분, 급행은 82분 걸린다. 지하철의 2, 3배라 출퇴근용으로 이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비가 많이 오거나 겨울에 강이 얼면 운항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한계도 있다. ▷오 시장은 첫 임기 때 수상버스 도입에는 실패했지만 대신 수상 콜택시를 도입했다. 한 명당 5000원을 받고 쾌속보트로 마곡과 여의도, 잠실을 오가는 식이었는데 이용률이 저조해 사업자가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 지난해 조용히 문을 닫았다. 수상버스가 ‘제2의 수상 콜택시’가 되지 않으려면, 초반 시행착오를 만회하고 남을 획기적인 ‘서비스 혁신’이 필요한 상황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3일 오전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서 전세기 한 대가 이륙했다. 기내에는 주황색 티셔츠에 영문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단 한국인 범죄 피의자 49명이 탑승했다. 한국 경찰은 피의자들에게 한 명씩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고 수갑을 채웠다. 영토로 간주되는 국적기 내에서 체포영장을 집행한 것이다. 한국판 ‘콘 에어’로 불리는 역대 최대 피의자 송환 작전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기내에는 피의자의 2배가 넘는 124명의 경찰이 탑승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중앙에 피의자를 두고 양쪽에 경찰이 앉았고, 화장실 갈 때도 동행했다. 포크와 나이프 없이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가 식사로 나왔다. 승무원 8명은 모두 남성이었고, 필리핀 이민청 직원 12명과 경찰병원 의료진 2명도 동행했다. 경찰은 테이저건도 지참했지만 다행히 사용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비행 4시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한 피의자들은 대기하던 버스에 올라 관할 경찰서로 이송됐다. 경찰은 체포영장 후 48시간 내 구속영장을 신청해야 하는 만큼 신속하게 조사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이날 송환된 피의자들은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후 필리핀으로 도주했거나, 필리핀에서 한국인 대상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는다. 조직 폭력,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 보이스피싱, 횡령 등 혐의도 가지각색이다. 경찰은 이들로 인해 국민 1322명이 총 605억 원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9명 중 45명이 인터폴 적색수배 대상 흉악범이다. 송환 피의자 중에는 기업에서 200억 원을 횡령하고 무려 16년 동안 필리핀에서 숨어 지냈던 60대도 있었다. ▷콘 에어는 ‘수형자를 태운 비행기(Convict Airplane)’의 줄임말로 미 법무부 산하 연방보안관실(USMS)에서 운영하는 수형자 항공 이송 시스템을 뜻한다. 1997년 개봉한 동명의 할리우드 영화 덕분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한국에선 2017년부터 경찰이 전세기를 동원한 우리 식 ‘콘 에어 작전’을 진행하고 있다. 한 번 전세기를 빌리는 데 예산 1억 원가량이 들지만 일반 송환 절차가 길게는 몇 년씩 걸리다 보니 생각해 낸 고육지책이다. 하지만 여전히 매년 1000명 안팎이 해외로 도피하는데 송환되는 인원은 절반 남짓에 불과하다. ▷전세기까지 띄울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데려올 범죄 피의자들이 늘었다는 건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최근 중국, 필리핀, 캄보디아 등을 거점으로 진행되는 한국인 대상 범죄는 갈수록 대담해지고 교묘해지고 있다. 이번 작전을 통해 범죄자들이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전세기 운용에 들어간 국민 세금이 제값을 하는 셈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장관급 위원장을 포함해 공무원 31명이 근무하는 정부 조직이 있다. 상근자 외에 100명 넘는 전문가를 위원이나 전문위원으로 두고, 3년 동안 예산 300억 원을 썼지만 제대로 된 정책 보고서 하나 못 냈다. 사회 통합을 내세웠지만 볼썽사나운 내부 주도권 다툼만 뉴스가 됐다. 국민 혈세를 계속 쓰며 이런 조직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공약으로 출발했다. “백년대계인 교육 정책이 정권 따라 흔들리면 안 된다. 사회적 합의로 향후 10년 중장기 교육 정책의 틀을 마련하자”는 취지였다. 의도는 좋았다. 문제는 교육 전문가 사이에도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데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는 점이었다.3년간 합의 대신 내부 다툼만 국교위 법은 문 전 대통령 임기 말인 2021년 7월 국회를 통과했고, 국교위는 윤석열 전 대통령 취임 후인 2022년 9월 활동을 시작했다. 진보 정권에서 틀을 잡고 보수 정권 때 가동된 것이다. 위원 21명 중 대통령이 5명, 국회가 9명을 임명하는데 이배용 위원장을 포함해 과반이 보수 성향으로 채워졌다. 국교위 내부에선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난이도와 유형을 어떻게 할지, 고교 내신은 절대평가와 상대평가 중 어떤 게 나은지, 고교 평준화를 유지할지 등을 두고 격론이 이어졌다. 입시 변별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보수 진영과 지나친 경쟁을 지양하고 학업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진보 진영의 의견 차이는 토론을 거듭해도 좁혀지지 않았다. 수적으로 밀린 진보 진영은 “다수파가 밀실에서 담합한 안을 밀어붙인다”며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지난해 11월에는 중장기 교육계획을 맡은 진보 측 전문위원 8명이 전원 사퇴해 전문위원회를 새로 꾸려야 했다. 의견이 모아지긴커녕 교육계는 더 분열됐고, 지난해 9월 발표 예정이었던 ‘중장기 국가교육발전계획 시안’ 발표는 4차례나 연기됐다. 결국 국교위 1기는 중장기 교육계획을 한 번도 발표하지 못한 채 다음 달 임기를 마치게 됐다. 진영 갈등의 최전선이 됐다는 점 외에도 국교위는 여러 한계를 드러냈다. 실질적 권한이 없었던 과거 자문기구를 보완하기 위해 의결·집행 기구로 출범했지만 5년 단위 교육계획을 발표하는 교육부, 초중고 교육을 관할하는 시도교육청과 역할이 겹쳐 ‘옥상옥 논란’이 이어졌다. 장기적·거시적 접근이 목표였지만 교육과정 및 대입제도 심의 때 지엽적 지적만 하고 원안을 통과시키며 거수기 논란을 자초했다. 결국 내부에서도 ‘총체적 실패’란 지적이 나왔고 교육계 안팎에서는 ‘국교위 무용론’이 확산됐다.‘조국 딸 사과’ 새 위원장의 정치 편향 논란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때 다양성과 공정성을 갖춘 위원 구성, 시민 참여 확대 등을 통해 국교위가 제 역할을 하도록 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교육철학이 다른 다양한 위원과 시민이 참여한다고 사회적 합의가 도출될까. 설사 합의가 나온다 한들 5년 후 바뀐 정권이 이를 존중하고 받아들일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2기 위원장으로 내정된 차정인 전 부산대 총장은 이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동기로 초중고 교육에는 문외한에 가깝다. 과거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했고,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 입학 취소를 두고 “미안하다”고 했을 정도로 정파적 색채가 짙다. 그가 이 대통령이 약속한 ‘공정성을 갖춘 위원’이라고 볼 수 있을까. 또 임기가 3년인 위원과 달리 2년인 전문위원 중에는 여전히 보수 성향이 많아 무리하게 진보 정책을 밀어붙일 경우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차 내정자가 이렇게 산적한 과제를 풀어내고 국교위를 벼랑 끝에서 구하지 못하면, 그때는 정말 국교위 폐지만이 남은 답일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10일 강원의 한 골프장에는 빨간 바지를 입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자외선 차단용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쓴 남성이 등장했다. 같이 골프 친 4명 중 얼굴을 빈틈이 안 보일 정도로 철저하게 가린 사람은 그뿐이었다. 라운딩 중 그늘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마스크를 잠시 벗었을 때 드러난 얼굴은 국민의힘 권성동 의원이었다. 그리고 해당 골프장은 권 의원이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가 있는 통일교의 소유였다. ▷한 인터넷 언론은 12일 ‘복면 골프’ 동영상을 공개하고 권 의원이 야외는 물론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다며 비밀 접대 라운딩 의혹을 제기했다. 동반자 명단에 ‘권성동’이란 이름이 없었다고도 했다. 논란이 되자 권 의원은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더운) 날씨 때문에 마스크를 착용했고, 식사비 포함 35만 원을 직접 결제했다”고 해명했다. 몰래 골프를 치거나 접대를 받은 건 아니란 취지였다. ▷권 의원은 2022년 대선 당시 통일교로부터 1억 원 이상의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통일교 전직 간부는 특검에서 “권 의원이 가평 천정궁을 두 차례 찾아 한학자 총재에게 큰절을 하고 금품이 담긴 쇼핑백 2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이 간부가 2023년 국민의힘 전당대회 때 건진법사 전성배 씨로부터 “윤심(尹心)은 변함없이 권(성동)”이란 말을 듣고 교인들을 단체 입당시켜 권 의원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우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당시 권 의원은 출마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임에도 권 의원이 통일교 소유 골프장에서 골프를 친 걸 두고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부글부글하는 분위기다. 김건희 특검팀은 ‘복면 골프’ 사흘 후 “통일교인 입당 의혹 규명을 위해 당원 명부가 필요하다”며 국민의힘 당사 압수수색에 나섰다. 15시간 대치 끝에 간신히 압수수색은 막았지만 당내에선 “권 의원을 넘어 당 전체가 타깃이 됐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을 ‘오랜 친구’라고 불렀던 권 의원은 지난 정부에서 ‘원조 윤핵관’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윤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을 때 비서실장을 맡았고, 이후에는 원내대표가 됐다. 이준석 전 대표를 대표직에서 내려오도록 하는 데도 ‘기여’해 윤 전 대통령으로부터 ‘체리 따봉’ 문자도 받았다. 지인의 아들을 대통령실에 근무하도록 하는 등 인사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후문이다. ▷비상계엄 이후에도 권력에서 멀어지고 싶지 않아서일까. 권 의원은 지난해 말 국민의힘 의원총회에서 “욕 먹겠지만 얼굴 두껍게 다녀야 한다”며 단일대오로 버티자고 했다가 당내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이번에 자신 때문에 당으로까지 불똥이 튈 수 있는 상황에서 ‘통일교 소유 골프장에서의 복면 골프’로 구설에 오른 걸 보면, 의원총회에서 했던 말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2022년 5월 10일 청와대가 일반에 개방된 이후 이달 1일 문을 닫을 때까지 1179일 동안 852만 명이 방문했다.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던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 국내 최고의 정원으로 꼽히는 녹지원 등을 둘러볼 수 있다는 점이 국내외 관광객을 끌어모은 것이다. 특히 ‘청와대 복귀’를 선언한 이재명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예약 사이트 서버가 마비되고 수백 m 줄을 서 입장할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 개방 초창기에 잠시 나돌았던 암표도 다시 등장했다. ▷돌아보면 용산 대통령실 이전은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잘못 끼운 첫 단추였다. 당선 열흘 만에 공약했던 광화문 대신 용산으로 이전하겠다고 선언했고, 취임 첫날 대통령실 이전과 청와대 개방을 단행했다. 대통령실 이전은 김영삼 전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 대부분이 약속하고도 실현하지 못한 과제인 만큼 충분한 검토와 의견 수렴이 필요했다. 그런데 윤 전 대통령은 “일단 들어가면 못 나온다”며 군사 작전하듯 밀어붙였다. 왜 하필 용산인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해 “천공 등 비선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퍼졌다. ▷대통령실 이전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원활한 소통’은 공염불에 그쳤다. 출근길 도어스테핑은 반년 만에 중단됐고, 대통령 기자회견은 2년 가까이 안 열렸다. ‘국민이 대통령 일하는 걸 볼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소통하는 대신 윤 전 대통령은 외부와 단절된 삼청동 안가에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소수의 측근과 비밀스러운 모임을 하며 야당 탓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자신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옛 국방부 청사에서 비상계엄까지 선포하며 몰락을 자초했다.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기는 데 들어간 비용은 국회예산정책처 추산으로 832억 원, 더불어민주당 추산으로는 1조 원 이상이다. 최근 정부가 대통령실을 청와대로 재이전하는 예비비로 259억 원을 배정한 걸 감안하면, 간접비용을 빼고 순수하게 대통령실이 오고 가는 데만 최소 1000억 원 넘는 국민 혈세가 쓰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비상계엄의 악몽이 남아 있는 용산에 계속 있을 순 없는 노릇이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세종 집무실을 위해선 개헌이 필요하다. 그렇다 보니 현실적으로 청와대 외에는 마땅한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정부는 대통령실이 돌아온 후 청와대를 다시 개방할지에 대해선 ‘검토 중’이란 입장이다. 하지만 이미 국민 여섯 명 중 한 명이 청와대를 구석구석 둘러봤다. 방문객 수가 입증하듯이 청와대 개방에 대한 수요도 많다. 업무공간이나 관저까지는 곤란하겠지만, 대통령 입주 후에도 정원과 등산로 산책, 문화재 관람 정도는 시민에게 허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서울중앙지법이 이달 25일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비상계엄으로 인한 국민들의 정신적 피해를 배상하란 판결을 내린 걸 두고 법조계에선 의외라는 반응이 나온다. 8년 전 국민 4000여 명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국정농단 사태로 인한 정신적 피해를 배상하라고 청구했는데 1∼3심 모두 패소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설마 하는 생각에 간단한 의견서만 냈던 윤 전 대통령 측도 “국민 104명에게 위자료 10만 원씩을 배상하라”는 판결문을 받아 들고 허를 찔린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도권의 한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직후 동료에게 농반진반으로 ‘윤 전 대통령에게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했다”며 “충분히 내릴 수 있는 판결이라는 생각”이라고 했다. 8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는 취지였는데 생각해 보니 그럴 만했다.8년 전보다 명백한 기본권 침해 과거와 다른 판결이 나온 이유로 먼저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의 위헌성이 더 명확했다는 점을 법조인들은 꼽는다. 박 전 대통령의 경우 측근을 국정에 개입하게 하고 대통령 권한을 남용한 점, 그리고 수사를 거부하며 헌법 수호 의지를 보이지 않은 점이 인정돼 헌법재판소가 파면을 결정했다. 하나하나가 파면 후에도 형사 재판에서 법적 책임을 다투는 쟁점이다 보니 민사 재판에서 먼저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헌법상 요건인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없었다는 점에서 비상계엄이 위헌이란 게 누가 봐도 분명했다. 중앙지법도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국가비상사태가 아니었음은 물론 그 징후조차 없었다.” 두 번째로 국민 기본권 침해가 더 직접적이고 명백했다고 볼 여지가 컸다. 8년 전 소송 때는 일반 시민이 국정농단으로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원고들은 “우울증과 위장병이 재발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의견이 달라 직장에서 싸웠다” 등의 주장을 폈지만 법원에서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의 포고령은 모든 국민이 가진 ‘집회 결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었다. 중앙지법은 “국민들은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보장받아야 할 기본권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공포와 불안, 수치심 등 정신적 고통을 받았던 것이 명백하다”고 판단했다. 마지막으로 판결의 근거가 되는 대법원 판례 역시 달라졌다. 8년 전 소송에서 재판부는 과거 대법원 판례에 따라 “대통령은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는 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2022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70년대 긴급조치 9호로 입은 피해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며 해당 판례를 변경했다. 물론 당시 대법원 판결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영장 없이 체포, 구금되거나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직접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앙지법은 이번에 해당 판례를 인용하며 비상계엄이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미친 만큼 일반 국민이 입은 피해도 배상받을 수 있다고 봤다.소송은 권력자 향한 국민 경고 윤 전 대통령 측은 29일 항소장을 제출했다. 항소심에서 윤 전 대통령 측은 비상계엄이 일반 국민에게 미친 정신적 피해를 어떻게 인정하고 위자료를 산정할 것인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비슷한 소송이 이어질 조짐은 확산되고 있다. 이미 1만 명 이상이 소송 비용 3만 원씩을 내며 소송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윤 전 대통령의 재산이 6억6000만 원가량임을 고려하면 이들이 승소해도 10만 원씩 받아내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호주머니를 털어 소송에 나서고 있다. ‘패가망신하지 않으려면 비상계엄 같은 무도한 일은 꿈도 꾸지 말라’는 준엄한 경고를 권력자들에게 보내겠다는 취지일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을 둘러싼 윤석열 정부의 대응은 작은 일을 크게 키운 전형적인 사례다. 해병대 조사 결과를 원칙대로 경찰에 이첩했다면 책임자 처벌로 끝났을 사안이었다. 그런데 당시 이종섭 국방부 장관이 이첩 승인 결정을 하루 만에 번복하고, 그 배후에 윤석열 대통령의 ‘격노’가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며 사건은 ‘정권 리스크’로까지 비화했다. 리스크를 키우는 데는 02-800-7070 전화번호를 둘러싼 거짓말과 말 뒤집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전 장관은 2023년 7월 31일 02-800-7070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직후 김계환 전 해병대 사령관에게 전화해 이첩 결정을 뒤집었다. 야당은 윤 전 대통령이 외압을 가한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이에 이 전 장관은 통화 상대를 밝히지 않은 채 “(수사외압 의혹과 관련해) 대통령실로부터 문자나 전화를 받은 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통신 조회를 통해 이첩 보류 당일 이 전 장관이 임기훈 전 대통령국방비서관과 통화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틀 후엔 윤 전 대통령이 개인 휴대전화로 이 전 장관과 1시간 사이에 3차례 통화했는데, 이것도 확인됐다. ▷이 전 장관은 거짓 해명 논란이 제기될 때마다 “7월 31일에는 통화를 안 했다는 것”, “외압은 없었다는 것” 등으로 교묘하게 말을 바꿨다. 그러다 특검 수사로 코너에 몰리자 2년이 지난 이달 21일에야 800-7070 번호 통화 상대를 밝힌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이 전화해 군 조직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 말은 (이첩 번복 결정에) 참고만 했다”며 누구도 믿기 어려운 해명을 곁들였다. ▷이 전 장관이 해병대의 수사를 뒤집고, 거기에 더해 이리저리 말을 바꿔 온 2년은 참과 거짓이 통째로 뒤바뀐 세상이었다. 외압 의혹을 처음으로 폭로한 박정훈 해병대 수사단장은 그해 8월 보직에서 해임되고 군 검찰에 의해 항명 혐의 등으로 기소까지 당했다. 올 1월 군사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이달 9일 특검의 항소 취하로 무죄가 최종 확정됐지만 그에게 지난 2년은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의 날들이었다. 채 상병 유족들의 아픔은 더했을 것이다. ▷채 상병 순직 사건과 관련해 윤석열 정부 관련자들이 쌓아 올린 ‘거짓말의 성’은 특검의 칼날 앞에 줄줄이 무너지는 중이다. 국회에서 “윤 전 대통령이 격노한 적 없다”고 했던 김태효 전 국가안보실 1차장은 특검에 출석해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는 모습을 봤다”고 털어놨다. ‘VIP 격노설’을 박 단장에게 처음 전달한 해병대 김 전 사령관은 군사법원에까지 출석해서 “그런 말 한 적이 없다”고 했다가 최근 이를 뒤집었다.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한 거짓말은 반드시 드러나게 돼 있다. 이제는 당사자들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고 책임을 져야 할 시간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대법원은 16일 경기 용인 경전철 사업의 부실 추진과 관련해 이정문 전 용인시장과 한국교통연구원에 214억6800만 원을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확정판결을 내렸다. 민간 투자 사업으로 지자체에 피해를 끼친 지자체장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첫 판결이다. 앞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한 지자체장에게 ‘패가망신’에 가까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2013년 개통한 용인 경전철 ‘에버라인’은 18km 구간에 사업비 1조 원 이상을 투입해 15개 역을 만들었다. 하지만 개통 직후 이용객이 수요 예측치의 5%에 불과했다. 계약서에는 민간사업자에게 30년 동안 최소수익보장(MRG)을 해 준다는 조항까지 담겨 있었다. 2043년까지 발생할 혈세 낭비를 합치면 총사업비는 2조 원이 넘을 수 있다. 소송은 지역 주민들이 시작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란 주위의 만류에도 12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소송을 이어가 지자체장의 혈세 낭비에 경종을 울린 주민 소송단 오이천 씨(65)와 박순애 씨(70)를 19일 에버라인 기흥역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대법원 판결 후 “시민의 힘으로 공공의 책임을 바로잡을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성명을 발표했다.》1990년대 논의가 시작된 용인 경전철 사업은 2001년 한국교통연구원에서 완공 시 매일 16만1000명이 이용할 것이란 수요 예측 결과를 내놓으며 논의가 급진전됐다. 하지만 2010년 6월 완공되고도 캐나다 봄바디어 컨소시엄과 용인시가 수입 배분을 둘러싼 이견을 보이면서 3년 동안 운행을 못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국제중재재판에서 패소해 용인시가 시행사에 이자를 포함해 8500억 원을 물어주게 됐다. 오 씨는 “1991년 용인으로 이사 온 뒤 난개발을 눈으로 확인하고 시민운동을 하게 됐다”며 “특히 경전철은 지역 특성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노선을 잘못 짰다는 지적이었다. 용인 북부에 있는 수지구 주민들은 더 북쪽인 서울로 출퇴근하고, 서부에 있는 기흥구 주민들은 더 서쪽인 수원으로 출퇴근하는데 엉뚱하게 기흥과 동쪽 구도심을 잇는 노선이 잡혔다는 것이다. 천문학적 금액을 물어준 용인시는 ‘전국 채무 1위’가 되며 파산설이 나올 정도로 재정이 악화됐다. 박 씨는 “노후 학교 시설을 고칠 예산이 없을 정도로 시에 돈이 없었다”고 했다. 용인시는 공동묘지를 매각하는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뭐든 팔았다. 도로 확장, 공원 건설, 공공시설 증축 등이 줄줄이 미뤄지며 주민 삶의 질에도 타격을 줬다. 주민 소송 아이디어는 용인 시민단체들이 대책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들 두 사람을 포함해 총 12명이 소송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승소 가능성을 두고선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이 전 시장은 2002∼2006년 재임 시절 “소모적 논쟁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경전철 반대 운동에 적대적이었다. 주민 중에서도 “대안이 있느냐”, “이길 수 있겠느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박 씨는 “이길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엉터리 수요 예측에 기반해 방만하게 사업해 놓고, 아무도 책임을 안 지는 게 너무 화가 났다”고 소송 참여 이유를 밝혔다. 마침 무료 변론을 맡아 줄 변호사가 나타나 주민들이 부담한 비용은 인지대 등 수백만 원에 그쳤다. 하지만 4년 동안 진행된 1, 2심 재판에선 주민들이 졌다. 법적으로 주민소송은 주민감사를 청구한 후에만 제기할 수 있는데 주민들이 청구한 소송과 감사의 내용이 다르다는 이유에서였다. 2심 패소 후 “대법원에서도 지면 상대방 소송 비용까지 물어줘야 하고 자칫 손해배상청구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오 씨는 “만약 3심서도 패소해 돈을 물어내게 되면 동등하게 나눠 내기로 뜻을 모았다”고 돌이켰다. 재판이 열릴 때마다 자비를 들여 수원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으로 피켓 시위를 다녔던 오 씨와 박 씨는 서울 서초동 대법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2020년 대법원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재판부가 “주민소송은 감사 청구와 관련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며 사건을 파기한 뒤 2심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소송을 거쳐 이달 16일 주민 승소가 최종 확정된 것이다. 대법원은 “현 용인시장이 이 전 시장과 교통연구원을 상대로 214억68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라”고 판결했다. 이 전 시장은 재판과 별개로 진행된 수사에서 경전철 시공업체에 압력을 넣어 측근이 운영하는 회사에 하도급을 주게 하고 미화 1만 달러를 받은 사실도 드러났다. 오 씨는 “기획재정부에서 ‘승객이 수요 예측의 90%를 밑돌 땐 30년 동안 차익을 보전한다’는 계약 조항에 문제를 제기했다. 보전액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전 시장은 계약을 밀어붙였다”고 했다. 박 씨는 “지금도 매년 300억, 400억 원씩 보전해 주고 있다. 이 전 시장을 포함해 역대 용인 시장 7명 중 6명이 비리 혐의로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았다. 뭔가 잘못 돌아갔다는 뜻 아니겠느냐”고 물었다. 경전철 계약 및 추진 과정에서 시의회의 견제 기능도 작동하지 않았다. 용인시는 시의회에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고, 시의원 21명 중 18명은 봄바디어 측의 지원을 받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박 씨는 “시의원들이 예산 감시만 철저하게 했다면 경전철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통연구원 역시 연구원들이 봄바디어 측으로부터 해외 견학을 지원받고 명절마다 선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사업 시작 때 교통연구원은 200명이 탈 수 있는 객차 1량만 가동해도 하루 승객이 16만 명에 이를 것이란 분석을 내놨다. 오 씨는 “전체 노선에 10대가 동시에 움직여도 특정 시점의 최대 승객은 2000명뿐이다. 16만 명이 이용하려면 낮에도 계속 만원 열차로 다녀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반문했다. 국책 연구기관에서 왜 이런 전망치를 내놓았는지 알 수 없다고 오 씨는 말했다. 교통연구원은 재판 과정에서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분석을 진행했다’는 식의 입장만 밝혔다. 교통연구원 분석 당시 50만 명에 못 미쳤던 용인 인구는 100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개통 직후 9000명이던 하루 이용객은 지금도 하루 4만 명이 약간 넘는 수준이다. 여전히 교통연구원 예상치의 30%에 못 미친다. 오 씨는 “교통연구원에서 비합리적인 분석 결과를 내놓는 데 모종의 외압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이 들지만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선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12년 동안 재판이 진행되면서 주민소송단은 7명으로 줄었다. 오 씨는 “일부는 이사를 갔고, 시의회 등 공직에 진출한 사람도 있었다”며 “하지만 남은 사람들끼리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서로 격려했다”고 말했다. 용인 경전철은 외환위기 이후 재정이 충분치 않은 정부와 지자체가 우후죽순 민자투자 사업을 추진하던 상황에서 진행됐다. 오 씨는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특성상 적자가 나기 쉬운데 국가나 지자체가 적자는 물론이고 투자자 이윤까지 보전해 주는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특히 도로 위에 고가를 만들어 그 위를 달리는 경전철은 아파트 조망권 문제 등이 있어 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용인 경전철 재판이 이슈가 되면서 다른 지역에서 주민 소송을 하고 싶다며 소송단에게 문의하기도 했다. 오 씨는 “최근은 민자 사업을 하더라도 운영사가 수익을 내는 방법을 찾아야지 적자 보전은 못 해 준다는 게 지자체들의 입장”이라며 “이번 판결로 지자체장들도 보여줄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한 사업을 추진할 경우 반드시 개인이 책임을 진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재판에서 이겼지만 오 씨와 박 씨에게 돌아오는 금전적 혜택은 없다. 용인시가 이번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앞으로 소송을 내서 이 전 시장과 교통연구원이 손해를 배상하더라도 전액 시에 귀속될 뿐이다. 오 씨는 “주변에서 ‘재판에서 이겼으니 얼마 받느냐’고 물어올 때마다 쓴웃음이 나온다”며 “소송 비용을 돌려받는 것도 역시 주민이 낸 용인시 재정에서 나오는 것 아니냐. 큰 액수는 아니지만, 보전받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박 씨는 “이상일 현 용인시장이 판결 내용대로 하루빨리 이 전 시장과 교통연구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 제대로 진행하는지 끝까지 감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이 전 시장 개인이 214억 원이란 막대한 피해액의 일부를 국가에 내놓을 여력이 있는 걸까. 이 전 시장은 2005년 공직자 재산 등록 때 신고한 재산은 31억 원 규모지만, 20년 전의 일이다. 오 씨는 “중요한 판례를 만들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보람을 느낀다”며 “앞으로 교통연구원 등 연구용역 수행 기관에 외압이나 무리한 요구가 가해졌을 때 ‘우리가 거덜 난다’며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가 생기면 좋겠다. 그러면 지자체의 무리한 사업 추진도 줄어들 것”이라고 강조했다.오이천(65)△1960년 충북 증평 출생△1988∼2008년 서울농수산식품공사 근무△2010∼2022년 용인미래포럼 환경분과위원장△2008∼2015년 한경국립대 겸임교수△현재 ㈜행복한조경 대표박순애(70)△1955년 전북 정읍 출생△1981∼1982년 원풍모방노조 부조합장△2006∼2008년 용인참여자치시민연대 활동△2012∼2015년 용인시주민참여예산위원용인=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지난해 검거된 조폭 10명 중 7명은 30대 이하였다. 국내 폭력 조직의 중심이 ‘MZ조폭’으로 세대교체된 것이다. 서울 서남권에서 1983년 설립된 ‘진성파’ 역시 10년 전 창립 멤버들이 은퇴한 후 조직 상층부가 1980년대생으로 대거 교체됐다. 이들은 유흥주점에서 보호비를 갈취하거나 사행성 게임장을 운영하는 대신 불법 도박 사이트와 보이스피싱, 코인을 이용한 자금 세탁을 시작했다. 이후 막대한 돈을 벌었는데 그만큼 피해자도 늘었다. ▷경찰이 17일 일망타진을 선언하며 밝힌 진성파의 운영 방식은 조폭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잘 보여준다. 전통적인 합숙소를 운영하며 조직원을 관리했지만 보이스피싱 같은 범죄를 저지를 때는 4∼6명의 프로젝트팀을 별도로 가동했다. 검경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필리핀, 태국, 베트남으로 활동 반경도 넓혔다. 강령에는 ‘선배의 말을 안 따르면 빠따(매)를 맞는다’ 등 고전적 내용도 있었지만 ‘사업(범죄) 관련 대화를 나눈 후에는 텔레그램 자동 삭제 기능을 활용한다’ 등 스마트폰 보안 관련 내용도 있었다. ▷최근 조폭들이 온라인을 활용한 사행성 사업과 사기 범죄에 집중하는 건 ‘저위험 고수익’이기 때문이다. 흉기를 들고 싸우지 않으니 다치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일이 없다. 서버를 해외에 두고 익명 메신저로 소통하기 때문에 붙잡힐 위험도 적다. 불법 도박 사이트는 1000만 원이면 만들 수 있는데 불법 도박 시장 규모는 연간 82조 원에 달한다. 이처럼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한때 감소세였던 조폭 수는 다시 늘고 있다. 경찰이 관리 대상으로 지정한 조폭은 지난해 5662명으로 5년 만에 451명 증가했다. ▷MZ조폭의 특징은 거리낌 없이 자신을 과시한다는 것이다. 2년 전 약에 취한 채 보행자를 치어 사망케 한 20대 남성은 불법 도박 사이트 및 리딩방 운영에 관여하며 5억 원 넘는 롤스로이스 차량을 몰았다. 같은 해 주차 시비를 벌이다 흉기로 시민을 위협한 이른바 ‘람보르기니남’은 캄보디아에 서버를 둔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에 가담했다. SNS를 통해 고가의 시계와 문신, 외제차 등을 과시하며 조직원을 모으는 경우도 많다. ▷2015년부터 사업 구조를 온라인 지하경제 기반으로 바꾼 진성파는 지난해에야 경찰의 본격 수사 대상이 됐다. 불법 스포츠 토토, 리딩방 사기 같은 범죄가 기존 수사 당국의 레이더에는 잘 포착되지 않았던 것이다. 검경은 롤스로이스남과 람보르기니남 사건 이후에야 ‘온몸에 문신을 하고 고가의 외제차를 모는 청년들’에 관심을 갖게 됐고 지난해 ‘MZ조폭과의 전쟁’을 선언했다. ‘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막기에 너무 늦지 않았길 바랄 뿐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3년 동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한 우등생의 ‘어두운’ 비밀이 경비 시스템 오작동 때문에 들통났다. 이달 4일 오전 1시쯤 경북 안동 A여고 교무실에서 무단 침입을 알리는 경보가 울렸다. 현장엔 아무도 없었지만, 확인 결과 한 퇴직 교사가 과거에 등록했던 지문을 찍고 건물 현관으로 들어온 것이 확인됐다. 이 교사는 이 학교 고3 학생의 엄마와 함께였는데, 목적은 기말고사 시험지를 훔쳐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교사는 기억하고 있는 교무실 비밀번호까지 정상 입력했지만, 시스템 오류로 경보가 잘못 울리는 바람에 덜미가 잡혔다. ▷이 교사는 5년 전 과외를 하며 학부모와 학생을 알게 됐다. 학생이 2023년 고교에 진학한 후에는 같은 학교에 기간제 국어 교사로 취업했고, 1학년 담임까지 맡았다. 경찰 수사에서 엄마는 교사에게 3년 동안 200만 원씩 10차례에 걸쳐 총 2000만 원을 송금한 것으로 드러났다. 엄마는 딸을 의대에 보내 의사인 남편의 뒤를 이으려는 생각에 시험지 유출을 의뢰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대부분의 대학은 3학년 2학기 내신을 입시에 반영하지 않는다. 이 학생에겐 이번 기말고사가 마지막 고비였다. ▷2018년 ‘숙명여고의 시험지 빼돌리기 사태’ 이후 교육부는 전국 고교의 시험지 보관 시설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고 출입을 통제하도록 했다. 하지만 A여고가 퇴직교사의 지문을 시스템에서 삭제하지 않은 것이 1차적 화근이었다. 공범도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교사는 지난해 초 퇴직 후 경기 지역 고교로 옮겼지만, 이후에도 시험 때마다 한밤중에 A여고를 찾았다. 교사와 학부모의 영상이 CCTV에도 찍혔다. 하지만 학교 시설 관리자가 출입을 막지 않고 영상까지 삭제해 준 것. ▷학생부 위주인 수시전형이 대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나 된다. 그만큼 고교 내신이 중요하다 보니 시험지 유출 사건은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10월에는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중간고사 시험지를 학원으로 유출한 기간제 교사가 검거됐다. 3년 전 광주에선 교사 컴퓨터에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해 화면을 캡처하는 방식으로 시험 문제와 답안을 빼돌린 학생 2명이 퇴학당했다. ▷엄마가 빼낸 시험 문제 덕에 줄곧 전교 1등을 지켰던 학생은 어떤 마음으로 매번 시험을 봤을까. 노력 없이 1등을 한 데 따른 죄책감, ‘거짓의 성’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자신 때문에 내신이 밀린 친구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을까. 엄마는 안 보는 곳에선 반칙을 해서라도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딸에게 가르쳤던 셈이다. 하지만 딸은 고교에서 받은 모든 성적을 ‘0점 처리’ 당하고 퇴학당했다. 비뚤어진 교육열이 딸의 인생을 망쳐놓고 말았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1991년 한국의 1인당 생활폐기물 배출량은 778kg으로 일본(412kg)의 2배에 육박했다. 그런데 불과 10년 만에 한국의 1인당 배출량은 절반 이하로 줄었고, 한국은 일본보다 쓰레기를 덜 버리는 나라가 됐다. 드라마틱한 반전을 이끈 요인은 1995년 시행된 쓰레기 종량제였다. 환경부는 ‘버리는 만큼 돈을 내는’ 종량제 시행으로 30년 동안 최소 1억6000만 t의 쓰레기가 줄고 45조 원의 경제적 가치가 창출된 것으로 추산한다. ▷종량제 시행 전에는 가정에서 검은색 봉지에 구분 없이 쓰레기를 담아 내놓으면 미화원이 수거해 난지도 등에 매립했다. 그러다 매립장이 포화 상태가 되고 환경 문제가 대두되면서 대안으로 나온 게 쓰레기 종량제였다. 1995년 1월 1일부터 종량제가 시행되자 환경부에는 ‘무슨 쓰레기를 돈 내고 버리냐’는 민원이 빗발쳤다. 무단 투기가 횡행했고, 가짜 종량제 봉투까지 유통됐다. 당시 신문에는 “쓰레기를 내놨더니 내용물은 쏟아놓고 종량제 봉투만 훔쳐갔다”며 황당해하는 독자투고가 실렸다. ▷초반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쓰레기 문제를 놔둘 수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 덕분에 종량제는 금세 정착됐다. 시행 3개월 만에 쓰레기 배출량이 37% 줄었고, 종량제 봉투로 쓰레기를 내놓는 비율은 99%가 됐다. 2013년 음식물 쓰레기 종량제 도입 등 후속 조치도 이어졌다. 덕분에 한국은 30년 동안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4배가량으로 늘었지만 쓰레기 배출량은 20% 가까이 줄었다. ‘소득이 늘면 쓰레기 배출량이 증가한다’는 국제 상식을 뒤집은 것이다. 환경부는 종량제 시행 후 지금까지 폐기물이 1억6000만∼3억 t 줄고 2억 t이 분리 배출돼 재활용된 것으로 분석한다. ▷쓰레기 종량제는 미국 일본 등에서 일부 지자체가 운영했지만 전국 규모로 도입한 건 한국이 처음이다. 도입 전에는 한국 공무원들이 일본을 찾아 벤치마킹했지만 이후 일본 지자체들이 한국을 참고해 마을 단위에서 가구 단위로 종량제 시스템을 개선했다. 대만도 한국을 참고해 2000년 종량제를 도입했다. 미국과 유럽에선 최근까지 한국을 쓰레기 관리 선진국으로 꼽으며 “우리도 배워야 한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음식물 쓰레기 분리배출을 시작한 프랑스에서도 ‘한국은 바이오 폐기물 챔피언’이라며 본받을 것을 촉구하는 기사가 실렸다. ▷‘버리는 만큼 낸다(Pay As You Throw)’는 종량제 원칙은 지금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국민을 설득하지 못해 도입에 실패하는 곳도 적지 않다. 홍콩의 경우 한국 등을 참고해 종량제를 지난해 도입할 예정이었지만 여론 반발 때문에 무기한 연기한 상태다. 한국의 쓰레기 종량제 30년은 성숙한 시민의식이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범 사례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서울 종로구 청진동의 한 빌딩 3층에는 9년 가까이 비어 있는 사무실이 있다. 2016년 9월 이석수 초대 특별감찰관이 물러난 후 현재까지 공석인 특감 집무실이다. 28명이 일할 수 있는 147평 공간으로 법무부가 매년 임차료 5억 원가량을 내며 유지 중이다. 그런데 적막한 사무실에 조만간 다시 활기가 돌 가능성이 커졌다. 이재명 대통령이 3일 기자회견에서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이 불행을 안 당하도록 예방하는 게 중요하다”며 특감 임명을 지시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한때 청진동 사무실에서 최고 권력자 주변을 감시했던 이 전 특감과 차정현 전 특감 직무대행에게 특감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물었다.“중립적 인사 임명하고 신분 보장해야” 먼저 이 전 특감은 누굴 임명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통화에서 “여당에 가까운 사람이면 ‘대통령을 봐주려 하느냐’는 말이 나오고 야당 성향이 강하면 대통령이 임명을 꺼릴 것”이라며 “국회가 후보자 3명을 추천할 때부터 정치색이 없고 중립적이면서 능력 있는 인물을 골라야 한다”고 했다. 2015년의 경우 여당, 야당, 대한변협이 후보자를 한 명씩 추천했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여당이 추천한 이 전 특감을 택했다. 그는 인사청문회에서 여야의 적격 의견을 받았음에도 임기 초반부터 “허수아비 노릇 하는 것 아니냐”는 야당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두 번째로 특감과 특감실 직원들의 신분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특감은 대통령의 배우자 및 4촌 이내 친인척, 대통령실의 수석비서관 이상 공직자를 감찰한다. 살아 있는 권력을 감시하는 만큼 법적으로 신분을 보장하게 돼 있다. 하지만 이 전 특감은 당시 실세였던 우병우 민정수석을 감찰하고 국정농단 사건의 단초가 됐던 미르재단을 내사하면서 권력의 눈 밖에 났다. ‘감찰 내용을 언론에 흘렸다’며 되치기당했고, 결국 임기 절반만 채운 채 떠밀려 나갔다. 남아 있던 차 전 직무대행 등 특감실 직원들에게는 당연퇴직 공문이 날아왔다. 차 전 직무대행에게 당시 상황을 묻자 “현재 공수처 부장검사라 답변이 어렵다. 2년 전 펴낸 책을 참고해 달라”고 했다. 책에서 그는 “특감실은 매일 고립되고 고사되는 중이었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건물에서 비용을 대납하며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고 돌이켰다. 또 “(특감은) 조직이 해체되거나, 부당하게 공격받거나, 직을 잃는 일 없이 조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특감 내치거나 임명 안 한 대통령 ‘잔혹사’ 세 번째로 검경과 감사원, 공수처 등 기존 조직과 원활한 협력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특감은 정원 28명으로 검경은 물론 감사원(1128명), 공수처(85명)보다도 규모가 작다. 압수수색 등 강제수사 권한도 없어 기관 공조가 필수적이지만 대통령 주변을 건드리다 보니 정부 자료를 받는 게 매우 어렵다. 이 전 특감이 우 전 수석 감찰 당시 “경찰에 자료를 달라고 하니 하늘만 보면서 딴소리하더라”라고 하소연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감 임명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아니라 대통령과 국회가 반드시 이행해야 할 법적 의무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특감을 내쳤고 문재인 윤석열 전 대통령은 특감을 임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 대통령 모두 본인이나 가족이 수사 대상이 됐다. 이 전 특감은 “윤 전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를 컨트롤할 자신이 없어 특감에 소극적이었던 것 같다. 문 전 대통령의 경우 임기 초 특감을 임명했다면 퇴임 후 사위의 이스타 특혜 채용 의혹으로 고초를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며 반복되는 대통령 잔혹사를 안타까워했다. 퇴임 후 본인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대통령 주변을 철저히 단속할 인물을 특감으로 임명하고 활동을 보장할 것을 이 대통령에게 권하고 싶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2015년 6월 22일,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 행사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호텔 주위에선 우익들이 확성기를 들고 “한국은 은혜를 모른다”며 혐한 시위를 벌였다. 가와무라 다케오 일한의원연맹 간사장은 “한일 정상회담이 (3년째) 안 열리며 냉각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며 축사인지 지적인지 모를 연설을 했다. 이날 참석자 중에서 10년 후 일본 내각 서열 1∼4위가 총출동하고, 전직 총리 3명이 참석해 60주년 기념행사가 성황리에 치러질 걸 예상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정상회담 3년째 안 열렸던 2015년 도쿄 특파원 시절이었던 10년 전 한일 관계는 ‘사상 최악’이라 할 정도로 험악했다. 과거사 문제로 정상회담이 3년째 안 열리며 한일 정상이 민주화 이후 가장 오랜 시간 마주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행사 사흘 전 “국회 일정이 있다”며 50주년 일본 측 행사 불참을 통보했다. 가와무라 간사장의 연락을 받은 유흥수 주일 한국대사가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한국 측 행사 참석을 확정하며 막판에 아베 총리의 마음을 돌렸다. 그래도 행사장 분위기가 살얼음판 같아 행사가 끝날 때까지 마음을 졸였던 기억이 난다. 일본이 강제징용 노동자의 아픈 기억이 있는 군함도(端島·하시마)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겠다고 나서고, 한국이 이에 반대하며 양국 국민 감정도 악화됐다. 당시 동아일보와 아사히신문 공동 여론조사에서 ‘상대국이 좋다’는 답변은 한국 5%, 일본 10%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달 16일 참석한 한국 측 행사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이재명 대통령은 영상 축사에서 일본이 “중요한 파트너”라며 “안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다짐했다. 사흘 후 열린 일본 측 행사에선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직접 참석해 “(이틀 전) 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 아주 좋았다”고 화답했다. 10년 만에 다시 진행한 동아일보-아사히 공동 여론조사에선 ‘상대국이 좋다’는 답변이 한국은 4.6배, 일본은 1.9배로 늘었다.10년 동안 얻은 ‘세 가지 교훈’ 한일 관계가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과정을 보면서 얻은 교훈은 세 가지다. 먼저 정상 간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미국의 압박에 3년 반 만에야 한일 정상회담을 했고, 그해 말 ‘위안부 합의’까지 도출했다. 하지만 떠밀려 급하게 추진한 터라 이후 ‘부실 합의’ 논란에 휩싸였다. 정상 간 소통이 안 되는 상황에서 아베 총리가 사과 편지 제안을 거절하는 등 후속 조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국내 여론은 더 악화됐다. 두 번째 교훈은 일본의 우익적 행보와 한국의 반일 선동이 둘 다 자해에 가깝다는 것이다.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고노 담화 재검토 등 아베 총리의 우익 행보는 국제사회의 우려를 불렀고 한일 관계의 발목을 잡았다. 문재인 정부는 ‘죽창가’를 부르며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독립을 외쳤지만 대일 의존도는 거의 개선되지 않았고, 야심차게 발표했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역시 미국의 압박으로 유야무야됐다. 마지막 교훈은 상호 교류가 호감과 이해를 높인다는 것이다. 한일 양국 간 방문자 수는 10년 전 584만 명에서 지난해 1204만 명으로 2배 이상이 됐다. 그동안 일본에선 한식과 K드라마, K팝이 보편화됐고 한국에선 일본 가수 콘서트가 연이어 열리고 있다. 물론 한일 관계의 미래가 계속 장밋빛일 거라고 예단하긴 어렵다. 하지만 과거사가 다시 발목을 잡도록 하기엔 트럼프발(發) 관세 폭탄, 중국의 부상, 북-러 밀착 등 함께 대처해야 할 현안이 많다. 양국 정치인들이 자해 행위를 자제하고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가 활성화돼야 상호간 불필요한 오해를 막고 한일 양국의 국익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이달 17일 저녁 서울 광진구 양꼬치 거리에선 청년 200여 명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행진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 지지자로 구성된 시위대는 “짱깨, 북괴, 빨갱이는 대한민국에서 빨리 꺼지라”는 구호를 수십 차례 반복하며 한자 간판 사이를 지났다. 한 음식점 직원과는 몸싸움이 벌어져 경찰도 출동했다. 시위대는 해산 후에도 “뜨거운 물을 뿌리며 위협했다”며 해당 음식점에 ‘별점 테러’를 이어갔다.혐한시위 연상케 하는 혐중시위 이날 시위대의 모습은 일본에 있었던 혐한시위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2013년경부터 도쿄 신오쿠보 등 일본 내 코리아타운에서 행진하며 “조선인을 죽이자”, “바퀴벌레를 박멸하자” 같은 구호를 외쳤다. 이들이 처음부터 거리로 나온 건 아니다. 일본에선 2000년대 초반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2채널’을 중심으로 재일교포들이 부당한 특권을 누린다는 루머가 확산됐다. 경제가 뒷걸음치며 고용 상황이 악화되자 박탈감과 소외감을 느끼던 이들이 재일교포를 타깃으로 삼은 것이다. 이후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이 결성됐고, 2012년 말 아베 정권의 재등장으로 극우 세력이 목소리를 높일 환경이 조성되면서 거리 시위가 본격화했다.‘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경찰 보호를 받으며 혐오 발언을 일삼는 시위대 앞에서 신오쿠보 상인들은 무력했다. 대신 시위대를 막은 건 ‘카운터스’라고 불리던 일본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몇 배의 인원으로 시위대를 둘러쌌고, 경찰이 끌어낼 때까지 바닥에 앉아 행진을 막았다. 시위대 중 일부는 ‘친하게 지내요’라는 한글 손팻말을 든 친한파였지만, 다수는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다. 일본이 인종차별주의자가 활개 치는 나라가 되는 걸 용납할 수 없어 나왔다”고 했다. 혐한시위대를 수적으로 압도하는 카운터 시위를 보면서 용기를 얻은 재일교포들은 국회 증언을 하며 여론을 움직였고, 유엔 등 국제사회까지 나서자 일본 국회는 2016년 헤이트 스피치 규제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해 6월 5일 가와사키시에서 카운터 시위대와 재일교포가 함께 혐한시위대를 둘러싸고 신고 집회를 처음 취소시켰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한 재일교포 변호사는 “드디어 막았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감격스러워했다. 이후 혐한시위대의 기세는 한풀 꺾였고, 대규모 거리 시위도 자취를 감췄다.한국에도 카운터 시위가 필요하다 코리아타운에 난입한 혐한시위대와 광진구 양꼬치 거리를 행진한 혐중시위대는 닮은 구석이 많다. 사회에 대한 불만을 소수집단의 탓으로 돌리고,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외국인이 특권을 누린다’는 음모론을 퍼뜨리며,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높일 환경이 조성되자 거리로 나와 혐오 발언을 일삼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거리 집회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자칭 ‘애국보수 청년’들은 전국 곳곳에 ‘중국인 유학생은 100% 잠재적 간첩’ 등의 플래카드를 걸며 혐오 메시지를 확산시키고 있다. 정당 현수막이라 철거도 쉽지 않다. 중국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인구 감소로 좋든 싫든 다문화 사회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한국에서 음모론에 기반해 특정 국적자에 대해 혐오 발언을 일삼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시위대는 스스로를 보수로 규정하지만 원색적 혐오 발언은 보수의 품격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온라인에선 이미 혐오 발언을 일삼는 극우 유튜버들을 신고해 자금줄을 차단하자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혐한시위대를 막은 일본 시민들에 빗대 스스로를 ‘카운터스’라고 부른다. ‘카운터 스피치’는 유엔에서 헤이트 스피치에 맞서는 방법 중 하나로 권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차이나타운에서 혐중시위가 벌어진다면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카운터 시위대가 비폭력적 방식으로 이들을 막아 세우는 모습을 보고 싶다.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

윤석열 전 대통령이 용산 관저에서 퇴거한 다음 날(12일) 광화문과 사저 인근에는 총 1만2000여 명(경찰 추산)의 지지자가 모였다. 이들은 ‘윤 어게인(YOON AGAIN)’ 문구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같은 구호를 외쳤다. 14일 윤 전 대통령이 내란 혐의 재판에 처음 출석할 때도 법원과 사저 앞에서 지지자들은 ‘윤 어게인’을 외쳤다.‘윤 어게인’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직후 지지자들에게 보낸 편지에 등장한 문구다. 다만 의미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광화문 집회를 주도하는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는 “윤 전 대통령이 5년 후 대선에 재출마할 것”이라며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하지만 헌법상 대통령 중임은 금지돼 있어 현실화되려면 개헌이 필요하다. 일부에선 비유적으로 해석한다. ‘윤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가자는 의지의 표현’ 또는 ‘윤 전 대통령의 뜻을 이어갈 후보와 대선에서 이기자는 취지’란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든 이 구호를 외치는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헌재 파면 결정을 인정할 수 없고 계속 싸우겠다”는 태도다.예언 틀렸지만 믿음은 더 강해져 100일 가까이 거리에서 “탄핵 기각”을 외쳤던 이들이 헌재의 만장일치 파면 결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순 있다. 다만 실망과 분노가 헌법 질서에 대한 부정이나 음모론으로 이어지는 건 우려스러운 대목이다.“100% 기각을 확신한다”고 했던 극우 유튜버들은 윤 전 대통령 파면 직후부터 “헌법재판관 의견이 5 대 3이었는데 막판에 보수 재판관 한 명이 배신해 무너졌다”, “더불어민주당이 약점을 잡아 보수 재판관을 협박했다” 등 각종 음모론을 퍼뜨리고 있다. 온라인에도 “좌파 판사 카르텔이 사기 탄핵을 했다”, “반국가 세력이 언론을 장악해 여론을 조종한 결과다” 등 밑도 끝도 없는 일방적 주장이 퍼지고 있다. 사회심리학에는 신념과 다른 현상이 발생했을 때 심리적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현실을 부정하거나, 음모론에 빠지거나, 자기 합리화에 나서는 경향이 있다는 ‘인지부조화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을 발표한 리언 페스팅거 교수팀은 실제로 사이비 종교 집단에 잠입했는데 대홍수와 외계인 등장이 예언된 날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자 신자 상당수가 “기도가 세상을 구원했다”, “외계인이 소요 사태를 우려해 그냥 돌아갔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특히 금전이나 시간을 많이 투자한 신자일수록 믿음은 더 강했다. 자신이 그동안 헛된 일을 했다는 걸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현저히 비합리적이고 자의적인 계엄” 헌재는 파면을 결정하면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현저히 비합리적이거나 자의적인 판단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과 변호인단의 주장과 달리 반국가세력 때문에 국가가 중대한 위기에 처한 상황도 아니었고, 부정선거나 북한 중국 러시아 등과의 하이브리드전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였다고 볼 객관적 근거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거리에 남은 상당수는 ‘윤 어게인’을 외치며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반국가세력과 끝까지 싸우겠다”고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여기에는 윤 전 대통령이 헌재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로 일관하는 영향도 크다. 파면당하고도 개선장군처럼 사저로 돌아온 윤 전 대통령을 보며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주인공 돈키호테가 떠올랐다. 그는 “거인을 무찌르겠다”며 놋그릇을 머리에 쓰고 풍차에 돌진했다가 나가떨어졌는데 나중에 왜 그랬냐는 질문을 받고 “마법사가 막판에 거인을 풍차로 둔갑시켰다”며 남 탓을 했다. 하나 확실한 건 윤 전 대통령과 지지자들이 계속 ‘반국가세력 척결’을 외치며 풍차에 돌진할수록 국민 다수와 더 유리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보수 진영의 재건은 늦어질 것이다. 장원재 논설위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