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수

정원수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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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원수 부국장입니다.

needjung@donga.com

취재분야

2024-05-05~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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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원수]누가 ‘불장’을 쓸 것인가

    검사들끼리 쓰는 은어 중에 ‘불장’이라는 것이 있다. 불기소장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검사는 수사를 마무리할 때 공소를 제기하면 공소장을 쓰고 법원에 제출한다. 반대로 기소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할 땐 불기소 이유를 적은 문서를 남겨야 한다. 흔히 검사는 공소장으로 말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보면 ‘불장’으로도 말하는 것이다.도이치 사건, 불기소장과 공소장 다 공개 불기소장엔 반드시 담당 검사와 수사 결과, 처분 이유를 기재해야 한다. 어떠한 이유로 공소를 제기하지 않는지를 기록으로 남길 의무가 있는 것이다. 당사자 외에 고소인이나 고발인이 불기소장을 볼 수 있고,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으면 불복 절차를 제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검사에겐 불기소장도 공소장처럼 성적표가 매겨지는 시험 답안지와 같다. 흔히 공소장의 내용을 갖고 공소 사실에 어떤 부분을 넣고, 뺄지를 놓고 검찰 내 알력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불기소장을 놓고도 티격태격한다. 검사가 불기소장을 쓰느니 사표를 쓰겠다고 버티고, 결재라인에 있는 지휘부는 곤혹스러워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얼마 전에도 비슷한 소문이 돌았던 적이 있다. 그 소문과는 무관하지만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연루된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사건이야말로 결국 ‘불기소장을 쓰느냐, 마느냐’가 핵심 쟁점인 사건이다. “기소는커녕 소환조차 못 한 사건”이라는 여권 입장에서 본다면 이미 불기소장을 썼어야 했다. 하지만 수사 기간이 모두 4년, 현 정부에서만 2년이 넘었지만 불기소장은 나오지 않았다. 서울중앙지검 지휘부가 교체된 5·13 검찰 고위 간부 인사는 ‘왜 불기소장을 아직까지 쓰지 않았느냐’에 대한 문책성 인사라고 보는 게 검찰 내부의 대체적 시각이다. 그렇다면 검찰은 앞으로 불기소장을 쓸 수 있을까. 사회적 논란이 된 사건의 불기소장은 그동안 예외 없이 공개됐다. 만약 김 여사의 불기소장이 작성된다면 그 전문이 그대로 외부에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 곧 개원할 22대 국회가 특검법을 통과시켜 특검이 출범한다면 가장 먼저 불기소장의 적정성부터 살펴볼 것이다. 자칫 탄핵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결재권자의 책임도 따지겠지만 아무래도 불기소장을 직접 작성한 담당 검사가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다. 담당 검사로서는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처럼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다. 도이치모터스 사건은 주임 검사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대면 조사 없이는 공소장도 불기소장도 쓸 수 없다”는 것이 수사팀의 일관된 의견이었다고 한다. 김 여사 명의의 계좌가 주작조작에 이용된 것은 팩트여서 최소한 김 여사가 검찰에서 전후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피의자의 주장을 살펴보건대’라는 식으로 당사자의 사정을 감안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 지휘부는 김 여사 대면 조사를 밀어붙이지 않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 결과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검찰로서는 불기소와 기소 사이에서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법원에서 공소 시효가 완성됐다고 판단하면 공소권 없음으로 손쉽게 처분하길 기대했다고 볼 수 있다. 檢 “있다, 없다” 법원보다 먼저 말해야 이번 정부는 검찰 인사를 하면서 ‘정의와 공정에 대한 의지’를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고 홍보한 적이 있다. 공소장을 쓰건 불기소장을 쓰건 검찰 지휘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법원보다 먼저 “있다, 없다” 결론을 내려야 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하다고 해서, 대통령 부인이 연루됐다고 해서 범죄 유무에 대한 판단을 다른 기관에 자꾸 미룬다면 ‘정의와 공정에 대한 의지가 없는’ 비겁한 검찰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 202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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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로의 이원석 “사직도 귀하게 써야 될 상황 있어… 나갈 때까지 의무 다할 것”

    《이원석 검찰총장(55)과의 인터뷰는 없었다. 그 대신 이 총장을 최근 만났거나 대화한 전직 검찰총장들을 포함한 전현직 검사, 법조계 인사들을 두루 취재했다. 이 총장의 말들을 따라가면 그의 향후 행보가 보일 것이다.》 “외롭습니다.”11일 이 총장은 가깝게 지내던 지인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과 인사 문제를 처음 협의하던 날이었다. 총장으로선 두어 번 직속 상관으로 모셨던 장관마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 갑갑했을 것이다. 이틀 뒤 서울중앙지검 수사지휘 라인을 교체하는 인사가 단행됐다. 지방 출장 중이던 총장이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로 왔다. 다음 날 출근길엔 ‘7초 침묵’ 뒤 “인사는 인사, 수사는 수사”라고 했다. 그를 잘 아는 전직 검사는 “총장이 첫 반응을 어떻게 할지 조언을 구했다. 장관이 인사권을 행사하자 총장이 ‘수사는 내 방식대로 하겠다’고 대응한 것”이라고 전했다.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아야”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총장으로 재임할 때 참모였던 이 총장은 정권 초엔 종종 대통령과도 직접 소통했다고 한다. 한동훈 국민의힘 전 비대위원장처럼 그도 대통령과의 연락이 어느 순간 끊겼거나 혹은 스스로 접촉을 피했을 것이다. 검찰총수들은 늘 “힘들고, 외롭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이 총장이 “저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 대통령이 그렇게 생각 안 하시는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한다는 얘기까지 들렸다. 이 총장은 한 달 전쯤 ‘그런 말을 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아야 군자라고 하지 않나.” 논어에 나오는 구절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다. 그는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지만 저는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서운하고 섭섭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보는 분에 따라서”라고 했다. “용산의 의사결정 체계 어떻게 보나” 그 즈음 이 총장은 “요즘 용산의 의사결정 체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말도 했다. “나는 대통령이 총장일 땐 2, 3번이 아니라 4, 5번 총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처음엔 ‘그게 된다는 말이냐’고 물어본다. 그러고 난 뒤에는 ‘그게 맞으면 자네들 뜻에 따라 하라’고 했다.” 이 총장이 대검 참모 시절 오전 보고 때 총장에게 심하게 깨지면, 오후에 다시 들어가서 결재를 받아왔다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직접 조사하고 구속했던 이 총장은 “역대 대통령 중에 자기 뜻을 굽히는 사람은 없었다. 절대반지를 낀 자리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검찰에선 생각이 달라도 그게 토론의 과정이라고 봤다. 욕먹고 깨진 적이 있지만 토론이라고 하는 것은 정답은 없다. 대통령이 생각해 봐야 한다. (참모들이)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열어줘야 한다”고 했다. “세 가지 사건으로 균열 발생” 이 총장에 대한 윤 대통령의 신임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가 서초동에 처음 퍼진 건 지난해 9월 초순 검찰 인사 때였다. 당시 총장의 참모진이 물갈이 됐는데, 총장은 막판까지 교체 여부를 잘 몰랐다고 전해진다. 참모진이 자주 바뀌면 ‘총장 라인’을 만들기 어렵다. 검찰 고위 간부는 “이 총장이 신뢰를 잃은 계기”라며 3가지 사건을 거론했다. △양평 공흥지구 개발 의혹 사건 △이태원 참사 관련 사건 △도이치모터스 의혹 사건이다. 야당 대표의 구속영장 기각보다 이런 사건들이 균열의 원인일까. 하나씩 뜯어 보면 여권이 껄끄러워할 수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지난해 5월 경찰은 사문서 위조 혐의로 양평 공흥지구 개발 사업에 관여한 대통령의 처남을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은 석 달 뒤 경찰이 적용하지 않았던 공무집행 방해 혐의를 추가해 처남을 기소했다. “총장이 꼼꼼하게 지휘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 총장은 올해 1월 4일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의 기소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를 직권으로 소집했다. 심의위는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김 청장을 기소할 것을 권고했다. 결국 김 청장이 기소됐다. “일선 지검의 불기소 의견을 뒤집은 배경이 뭐냐”고 수군거리는 검찰 관계자가 많아졌다. 마지막으로 지난해 말과 올해 초 당시 송경호 서울중앙지검장이 윤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의혹 사건에 대한 대면조사 필요성을 대통령실에 전달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28일 김 여사에 대한 특검법 통과가 계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기소는커녕 소환조차 못한 사건”이라는 입장을 줄곧 유지해 온 여권에선 “총장이 자기 정치를 하는 것 같다”는 불쾌감을 대놓고 표출했다.“‘나도 사표 쓰겠다’ 2월 인사 유보” 세 번째 사건은 인사 충돌 직전까지 갔다. ‘원포인트 인사’로 송 검사장을 고검장으로 승진시켜 수사에서 배제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2년 전 김 여사에 대한 서면조사만으로는 부족하고, 대면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송 검사장이 굽히지 않고 있었다. 당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인사는 “설 연휴 직후 인사검증을 마무리했고, 박 장관이 취임하면 인사를 하려고 했다. 이 총장이 ‘나도 사표를 쓰겠다’고 버텨 유보됐다”고 전했다. 올해 1월 21일 이른바 ‘1차 윤-한 충돌’에 이어 만약 이 총장이 검찰 인사에 반발하는 일이 발생했다면 총선을 앞둔 여권에 커다란 악재였을 것이다. 한 전 위원장과 이 총장은 사법연수원 같은 반이었다. 이 총장은 송 검사장의 고교 선배다. 여권에선 한 전 장관이 여당의 비대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난 뒤, 이 총장과 송 검사장이 한 몸처럼 움직인 배경을 의심하고 있다고 한다. 인사는 막았지만 “이 총장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평가가 여권에서 강해졌다. “도이치 수사지휘권” 약속 못 지켜 이 총장은 한 전 위원장처럼 이른바 ‘윤석열 사단’으로 분류되는 검사는 아니었다. 윤 정부 출범 직후 총장 권한대행 역할을 했지만 석 달 동안 총장 후보로 지명되지 않았다. 권한대행이 일종의 충성도 테스트였다는 분석도 있다. 그 사이 검찰 원로들은 대통령에게 이 총장보다 선배 기수에서 총장이 나와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한 검찰 원로는 “이 총장이 전임보다 7기수 아래 아니냐”고 했다. 이 총장은 현재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사건에 대한 지휘권이 박탈된 상태다. 2020년 10월 당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발동한 지휘권을 장관이 3번 바뀌고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총장은 인사청문회에서 “제가 수사지휘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지만 그가 총장이 된 후에도 법무부는 수사지휘권을 넘기지 않았다. 총장이 수사지휘권을 무시한다고 해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법조계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 총장은 “지금 복원하면 전임 장관의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법원 판단을) 오불관언할 수 있나” 수사지휘권 미복원은 ‘이원석의 검찰’이 김 여사 수사를 빨리 매듭짓지 못하는 ‘오판’을 불렀다. 처음엔 “1심 결과를 먼저 봐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2월 1심 재판부가 김 여사의 계좌가 주가 조작에 이용됐다고 판단했다. 야당이 특검법을 발의했는데, 그때라도 수사를 서둘러야 했다. 그런데 “항소심까지 보겠다”며 다시 미적댔다. 이 총장은 평소 “법리적 문제를 법원과 검찰이 배치해서 어긋나게 하면 되나. (법원의 판단을) 오불관언하기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검찰 선배들은 수사 지연에 대해 “이 총장의 가장 큰 실수”라고 비판했다. 야당에는 특검법 추진의 빌미를 줬고, “왜 사건을 질질 끌었냐”는 여권의 불만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이번 검찰 인사 직전 이 총장은 디올백 수사에 대해서만 전담수사팀 구성을 지시했을 뿐 도이치모터스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전직 검찰 고위 간부는 “총장은 일반적 수사지휘권이 있다. 수사팀이 도이치모터스 수사 결과를 갖고 오면 국민적 의혹 사건에 대해 제대로 결론 내라고 지시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총장은 임기가 4개월도 남지 않았고, 수사가 그 전에 끝날지 불투명하다. “사직도 귀하게 써야 될 상황 있다” 서울중앙지검장 교체 이후 이 총장은 전직 총장 등에게 거취와 수사 방향에 관한 조언을 구한다고 한다. 한 전직 총장은 “지금 사표를 내면 정치권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표 내는 건 용기 있는 모습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 다른 인사는 “외압은 항상 있다. 바르고 당당하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얼마 전 주변에 “사직도 다 때가 있고, 귀하게 써야 될 상황이 있다. 검사 생활 하면서 느낀 게 검찰은 권한은 있는 곳이 아니고, 의무밖에 없는 곳이다. 나갈 때까지 책임과 의무를 다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공직자는 임기를 지키는 게 중요하지 않다. 하루를 해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남은 기간에도 그럴 것”이라는 말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1월 이 총장은 신임 검사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마태복음 한 구절을 소개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세상을 짜게 하리오.’ 그러면서 “첫 문장보다 더 중요한 것이 두 번째 문장”이라고 했다. ‘(짠맛을 잃은)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뿐이다.’ 벼랑 끝에 좁게 들어선 ‘잔도(棧道)’를 걷고 있는 이원석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 2024-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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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원수]법률수석이 민정수석처럼 안 되려면

    윤석열 대통령이 집권 2년 만에 법률수석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민심을 제때 정확히 전달하고 정책 조정과 공직 기강, 정보 통합 역할을 하는 수석급 비서관 신설이 필요하다”는 것이 대통령실의 설명이다. 민정수석 폐지가 대선 공약이었던 점을 감안해 ‘민정수석 잔혹사’의 원인으로 지목된 사정(司正) 기능을 빼고, 명칭도 민정수석 대신 법률수석으로 부를 거라고 한다.관료-정치인 출신 대통령 참모와 달라야 그런데 법률수석으로 거론되는 후보군의 면면을 보면 대통령실의 설명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렵다. 대부분 대통령과 직간접적으로 인연이 있는 고검장과 검사장 출신 고위 전관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검찰 내 요직을 여러 번 맡았을 만큼 수사의 흐름이나 수사기관의 특성을 잘 알고, 후배 검사들과의 네트워크가 강하다. 민심 전달에 방점이 있다면 찾기 어려운 후보들이다. 여기에 역대 민정수석의 10명 중 6명 정도가 검사 출신이었다는 이력까지 더하면 명칭이 무엇이건 민정수석 같은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법률수석은 공직자 인사 검증과 감찰 기능이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 대통령실 업무 전반의 위법성 여부를 심사하는 법률비서관실을 지휘하게 된다. 과거 반부패비서관실처럼 수사 정보를 수시로 보고받고, 과도하게 개입하지 않더라도 검찰과 경찰, 국가정보원,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권력기관을 인사와 감찰로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권력기관들의 군기반장’에 ‘대통령의 그림자’라는 타이틀이 더해진 막강한 권한의 법률수석 자리가 의외로 인기가 없다. 공직을 제안받은 상당수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일부는 피해 다닌다는 얘기까지 들린다. 무엇보다 검사 출신 대통령 밑에서 법률수석을 맡는 것이 곤혹스럽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수사 또는 법률 전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역할이나 권한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집권 중후반기라는 시점도 꺼림칙하다고 말한다. 권력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 공직사회 전반에 긴장감을 높이는 악역을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법률수석이 해결해야 할 과제 역시 녹록지 않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거대 야당이 통과를 벼르는 채 상병, 김건희 여사 등 특검법에 대처해야 한다. 야당의 특검 추진에 반대하는 논리를 만들고, 혹시라도 대통령실 관계자가 수사를 받게 되면 사실상 변호사 역할을 해야 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수사기관 개편이나 시대 흐름에 따라 법률수석이 쓸 수 있는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가령 채 상병 수사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수사 중인데, 법률상 대통령실은 공수처 수사에 일절 관여할 수 없다. 간섭하면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 특검은 ‘야당의 검찰’이어서 대통령실이 통제하기 어려운 구조다. 집권 중후반기 대통령실이 검찰의 수사를 찍어 누르려고 했을 땐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직언, 직언, 직언… ‘민정 잔혹사’ 피하는 길 이런 악조건 속에서 법률수석은 어떻게 해야 할까. 평균 재임 기간이 1년을 넘지 못했고, 물러난 뒤 검찰 수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던 민정수석처럼 하면 안 된다. 승소하는 변호사가 되려면 의뢰인을 가장 먼저 설득해야 한다. 대통령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집무실 문을 2, 3번이 아닌 5, 6번이라도 다시 열고 들어가야 한다. 화가 난 대통령이 얼마 뒤 “그게 된다는 말이냐”라고 묻고, 결국 “그게 맞으면 자네들 뜻에 따라 하라”고 말할 때까지…. 다른 관료 출신이나 정치인, 연배가 낮은 검사 출신 참모들이 지금까지 대통령에게 제대로 못 한 직언들을 줄기차게 하는 것, 그것이 법률수석의 유일한 생존법이다.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 202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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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원수]사법부의 ‘조용한 혁명’

    “법원장이 직접 재판을 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요?” 조희대 대법원장은 지난해 12월 국회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후배 판사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고 한다. 판사들이 머리를 짜내 제안한 재판 지연의 다양한 해결 방안엔 없던 것이었다. 사안이 복잡하고 품이 많이 드는 악성 장기 미제 사건을 법원장이 직접 재판하는 실험은 그렇게 시작됐다. 요란한 구호보다 가능한 처방 먼저 처음엔 효과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전국 37곳의 법원장은 소속 법관과 직원을 관리하는 사법 행정의 책임자에 가깝다. 재판을 하지 말라는 명시적 규정은 없지만 관행상 하지 않았다. 법원장 외엔 사법 행정 경험이 거의 없었던 조 대법원장의 무모한 시도로 오해받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달 중순 법원장 재판이 하나씩 열리면서 법관과 민원인들이 대체로 호평하고 있다고 한다. 단순하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메기 효과처럼 판사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소속 법관이 갖고 있던 미제 사건을 법원장에게 재배당하는데, 그 자체가 해당 법관에겐 무능의 낙인이 될 수 있다. 당연히 법관은 미제 사건을 털어내려고 더 애쓸 수밖에 없고, 이를 민원인이 싫어할 리가 없다. 둘째, 재판 능력이 법원장의 필수 조건이 됐다. 법원장 추천제로 인기투표에 영합해 법원장이 되려는 법관이 적지 않았는데, 그런 판사가 더 이상 발붙이기 어렵게 된 것이다. 조 대법원장의 전임 대법원장이 사법부에 남긴 가장 큰 짐이 재판 지연이다.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전임자를 악마화하고, 내부의 원인 제공자를 찾고, 법관 3200여 명을 향해 완전히 새로운 해법을 내놨다면 어땠을까. 시작부터 파열음이 일어났을 것이고,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지도 못하고 티격태격하다 재판만 더 느려졌을 게 뻔하다. 법원장의 재판 참여는 요즘 사법부의 조용한 변화 중 하나일 뿐이다. 조 대법원장은 법원장 추천제를 바로 없애지 않았다. 법관의 추천을 받아 2년 임기의 법원장에 취임해 아직 임기가 남은 법원장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1, 2년 법원장 추천제를 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도태시킬 수 있는데, 굳이 마찰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 후보 추천 과정도 비슷하다. 조 대법원장 취임 직전 사법부의 반대로 차기 공수처장 후보가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법원행정처장이 그대로인데, 대법원장이 바뀌었다고 찬반을 바꾼다면 사법부가 권력에 코드를 맞추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 시간은 조금 더 걸렸지만 먼저 법원행정처장을 바꾸고 난 뒤에 자연스럽게 새 공수처장 후보를 추천하는 길이 열렸다. 일선 근무 때 조 대법원장은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면 직원들 퇴근이 늦어질까 봐 먼저 청사를 빠져나갔다가 직원들이 퇴근하고 난 뒤에 다시 들어와 업무를 봤다. 늘 관용차로 출근하다가 대법원장 지명 다음 날 대중교통을 이용했던 전임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자연스럽고, 조용한 조치들은 그 반대의 방식보다 전임의 흔적을 훨씬 더 빠르고, 확실하게 지우고 있다. 전임과 반대지만 더 빠른 ‘전임 지우기’ 그런데도 왜 일도양단식으로 사법부를 화끈하게 바꾸지 않느냐는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사법 행정의 고수’로 불리던 고위 법관이 예전에 사법 개혁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법부는 항공모함과 같다. 항공모함은 목적지로 가기 위해 방향을 틀지만 배에 탄 사람들이 흔들림을 느껴선 안 된다.” 실속 없이 요란하기만 한 사회 곳곳의 개혁 움직임을 보면, 최소한의 조치로 예상 밖 변화를 이끌어내는 ‘조용한 혁명’이 비단 사법부에만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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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원수]“정치를 해본 적이 없어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이 또다시 논란을 불렀다. 27일 이태원 국정조사에서 참사 당일 첫 보고를 받고 85분 뒤에야 현장에 도착했다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이 장관은 “그 시간은 이미 골든타임을 지난 시간이었다”고 답했다. “그 시간 동안 참사 현장에서 많은 국민들이 죽어가고 있었다”는 야당 의원의 주장을 반박하다 튀어나온 말이다. 결국 “제가 골든타임을 판단할 자격이 없는데 성급하게 말한 것 같다”며 사과했다. ▷이 장관은 구설에 올랐다가 사과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참사 다음 날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했다. 국민 안전을 책임지는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부적절한 발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장관은 이틀 만에 “국민 여러분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야당 등의 사퇴 요구가 비등할 때 “누군들 폼 나게 사표 던지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겠느냐”고 해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이 장관은 15년간 판사로 지냈다. 스스로 “저는 정치를 해본 사람이 아니다. 법률적으로 말한다고 했는데…”라고 주변에 말한다고 한다. 관가에선 과거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을 할 땐 직원들의 얘기를 잘 경청했는데, 장관이 되고 태도가 좀 변한 것 같다는 얘기도 들린다. 경찰국 신설 때 경찰서장들의 반발을 “하나회 쿠데타와 다름없다”고 했다가 사과한 것이 단적인 예다. 대통령의 고교 및 대학 후배라는 사실에서 근원적 원인을 찾는 시각도 있다. ▷경찰 승진 후보자를 집무실에서 면담했던 이 장관은 경찰 인사에도 거침이 없다. 대학 동문을 경찰에 밀고한 의혹을 받고 있는 김순호 초대 경찰국장을 경찰대학장으로 발령 낸 것이 대표적이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승진까지 시킨 건 경찰국 신설에 대한 기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현 정부 들어 고속 승진한 조지호 치안정감과 김희중 치안감을 각각 ‘경찰 2인자’인 경찰청 차장과 후임 경찰국장에 임명한 것도 마찬가지다. 조 차장은 대통령직 인수위에서도 근무했다. ▷판사나 장관이나 똑같은 공직자다. 공직 수행에 있어 필요한 자질이나 자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적 인연이 있는 대통령에 의해 발탁됐지만 대한민국 장관이다. 장관에 취임한 지 벌써 7개월이 넘었다. “정치를 해본 적이 없어서…”라는 말만 할 때는 지났다. 그는 “사의를 표명하거나 대통령실과 의논한 바가 없다”고 했다. 이쯤에서 자신의 위치를 냉정하게 되돌아봤으면 한다.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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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원수]北 사이버 도둑 ‘김수키’가 남긴 발자국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올 4월부터 10월 사이 여러 차례 수상한 이메일을 받았다. 그중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출입기자 명의로 한미 정상회담 관련 뉴스링크에 댓글을 부탁하는 내용이 있었다. 태영호 의원실 비서 명의로 수신자가 참석하지도 않은 통일 정책 세미나에 대한 사례비를 준다고도 했다. 무심코 링크나 첨부파일을 열면 악성코드가 삽입돼 메일을 실시간으로 감시당하거나, 컴퓨터 내부 자료까지 도난당한다. 최소 892명에게 메일이 발송됐고, 49명이 피해를 입었다. ▷경찰청은 이 같은 이메일 사칭이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조직인 일명 ‘김수키(Kimsuky)’의 소행이라고 25일 밝혔다. 김수키가 저지른 8년 전 원전 도면 유출 해킹 사건과 인터넷 주소(IP)가 거의 동일하고, 악성코드의 핵심 기술이 똑같다는 것이다. 경유 서버로 접속한 컴퓨터에선 백신의 북한말 ‘왁찐’을 인터넷에서 검색한 기록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도둑이 남긴 발자국이 상습범의 것과 일치한 것”이라고 본다. ▷북한의 사이버 공격 능력은 러시아와 함께 세계 1, 2위를 다툰다. 김수키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곳이 러시아의 한 백신 업체다. 사이버 공격에 사용된 메일 계정이 영문으로 ‘Kimsukyang’(김숙향)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해킹 조직의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Kimsuky’로 부른 보고서를 2013년 냈다. 그때부터 국내외 전문가들은 이메일에 악성코드를 숨겨 개인 정보를 빼돌리는 북한 해킹 조직을 김수키로 불렀다. ▷정찰총국은 정보 탈취가 주된 임무인 김수키 외에도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해킹 조직 3, 4개를 더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자루스(Lazarus)’가 대표적이다.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에서 10억 달러를 해킹으로 인출해 카지노를 통해 돈세탁을 하려다가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적발됐다. 북한 체제를 조롱한 영화를 제작한 미국 소니 픽처스도 해킹했다. 기업을 전문적으로 노리거나 암호화폐 거래소를 주로 공격하는 해킹 조직도 있다. ▷북한은 1990년 ‘조선컴퓨터센터(KCC)’를 설립한 뒤 영재 교육 시스템으로 해커들을 양성해왔다. 특히 김정은이 사이버 전쟁을 핵, 미사일과 함께 3대 전쟁 수단으로 선언한 이후 인력이 2배로 늘었다고 한다. 덩치만 커진 게 아니라 수법도 진화하고 있다. 최근 김수키는 중소기업에 랜섬웨어를 유포해 시스템을 마비시킨 뒤 비트코인을 받고 풀어줬다. ‘총칼 대신 키보드’라는 구호 아래 정보와 기술, 돈을 닥치는 대로 훔쳐가는 이들을 막지 못하면 우리에겐 진짜 총칼 못지않은 위기가 닥칠 수 있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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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원수]‘검사는 공소장으로만 말한다’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9일 재판에 넘겨진 정진상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의 공소장은 33쪽 분량이다. 이 가운데 10쪽가량이 사건 관계인들의 지위나 유착, 대장동 개발의 배경 설명에 할애됐다. 공소사실이 아닌 내용도 여러 번 언급됐다. 정 전 실장이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과 함께 2013년 9, 10월경 대장동 민간 사업자에게 받은 유흥주점 접대를 금액과 참석자, 지불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적은 것이 대표적이다. ▷검사가 피고인을 기소하면서 법원에 제출하는 공소장엔 공소사실과 관련이 없는 내용을 기재해선 안 된다. 유죄로 예단할 수 있는 표현도 사용할 수 없다. 유죄 심증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증거물이나 서류를 첨부하는 것도 금지된다. 범죄 사실을 간략하게 적은 공소장 하나만 제출하는 것이 원칙이어서 ‘공소장 일본주의(一本主義)’라고 부른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법관이 증거 조사를 하기 전에는 예단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다. ▷이 원칙을 위반하면 판사가 무죄를 선고할 수 있지만 과거엔 사문화된 규정이었다. 그런데 대법원은 2009년 “범죄의 실체 파악에 장애가 된다면 공소기각을 해야 한다”는 판례를 처음 남겼다. 이후 공소장에 대한 공방이 자주 벌어지고 있는데, 정 전 실장의 공소장도 법정 다툼이 예상된다. 검찰은 대장동 개발의 사건 구조가 워낙 복잡해 공소장을 길게 쓰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한다. 변호인 측은 공소사실과 무관한 내용이라고 맞서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법관들이 피고인석에 서는 불행한 사건 이후 공소장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다른 일반 재판으로도 확산됐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전현직 법관들은 “공소장을 읽다보면 유죄로 귀결된다”며 첫 재판부터 공소장을 문제 삼았다. 공판중심주의가 더 강조되고, 국민참여재판이 늘어나면서 공소장은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공소장의 흠결로 무죄가 선고된 사건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여전히 드물다. ▷공정한 재판을 위한 공소장 작성의 원칙은 사실 수사의 공정성 보장으로 연장될 필요가 있다. 수사 도중 피의사실이 유출되면 결국 기소로 이어지고, 유죄 심증이 굳어지면서 재판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 “검사는 공소장으로만 말한다”고 한다. 이는 피의사실을 섣불리 누설하지 말고, 증거 원칙에 따라 수사를 한 뒤에 수사 결과를 간명한 공소장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적 논란이 큰 사건일수록 검찰은 이런 원칙을 어기지 말고, 더 철저하게 지켜야 할 것이다.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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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원수]입문마약

    미국에는 ‘420’이라는 은어가 있다. 오후 4시 20분을 일컫는 말이다. 1970년대 초반 캘리포니아주의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 방과 후 학교 담벼락에 모여 대마초를 피운 시간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확장돼 매년 4월 20일을 대마초의 날로 기념하고, 심지어 그날 대마초를 싸게 파는 판매점도 있다. 지금은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캘리포니아주를 포함해 3분의 2 이상이 기호용 또는 의료용 대마초를 합법화했다. ▷대마초는 가격이 가장 싼 마약류여서 아무래도 접하기가 쉽다. 중독성이 담배보다 약하다는 연구도 있다. 하지만 대마초에 한번 손을 대면 중독성이 더 강한 코카인이나 헤로인, 케타민 등의 마약을 찾게 된다. 어둡고 위험한 마약의 길로 유혹한다는 뜻에서 ‘입문 마약(gateway drug)’으로 불린다. 미국 유학생이 학교에서 액상이나 가루, 젤리 형태의 대마를 접하고, 이를 한국에 들여오면서 4, 5년 전부터 국내에서도 번졌다. ▷검찰이 수사 중인 액상 대마 사건이 대표적이다. 서울 강남에서 피트니스클럽을 운영하는 A 씨는 해외에서 액상 대마를 가져와 전자담배 용기에 담아 팔았다. 이를 매입한 남양유업 창업주의 손자 홍모 씨 등 유력 인사의 자제 9명이 이미 기소됐다. 홍 씨에게 대마를 샀던 직장인 등 3명이 추가로 자수했는데, 전직 경찰청장의 아들도 있다. 검찰은 이들이 대부분 유학 시절 처음 대마를 접한 뒤 귀국 후에도 끊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대부분의 주에 이어 4년 전 캐나다에서도 대마가 합법화되면서 북미 지역에서 국내로 밀수되는 대마가 늘고 있다. 관세청이 지난해 적발한 대마 밀수량이 총 98kg이었는데, 이는 5년 전과 비교해 500배가량 폭증한 것이다. 대마 밀수량의 80% 가까이가 북미 지역이다. 설상가상으로 올해 태국에서도 대마가 합법화되면서 동남아시아 밀수 경로까지 추가됐다. 국내 마약의 양이 증가하면 구매 단가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이원석 검찰총장의 말대로 “집 안에서 피자 한 판 가격에 마약을 구매하는 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마약 가격의 하락으로 그동안 마약에 손을 대지 않던 젊은층이 마약에 노출되는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 올해 마약 사범은 역대 최대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가장 큰 특징은 초범이 많고, 10·20대 마약 사범이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여기엔 대마의 영향이 작지 않다. 마약 공급상 입장에선 마약 소비 연령대가 낮아지면 마약을 더 오래, 더 많이 팔 수 있다. 정부는 넉 달 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입문 마약의 접근을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전쟁이 있을까.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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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원수]자택 앞 시위 민폐

    올 6월 한 정보기술(IT) 기업 회장의 서울 단독주택 앞에 시위대 1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소액주주 병들어 죽는다’는 플래카드를 펼친 채 “사측이 주가 상승을 저지하고 있다”는 구호를 외쳤다. 비슷한 시기 한화 등 다른 기업의 일부 소액주주도 주가 하락에 항의하기 위해 최고경영자(CEO)의 자택 앞을 찾아갔다. 기업 본사가 아닌 기업인들의 자택 앞에서 시위를 하는 것이 공식처럼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자택 앞에서 텐트를 치고 노숙하거나 삼겹살을 구워 먹는 민폐 유발형 집회도 많아졌다. ▷자택 앞 시위의 유형도 예전엔 1인 시위 위주였는데, 요즘엔 단체 시위로 바뀌었다. 은마아파트 재건축추진위 주민들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자택 앞에서 12일부터 벌이고 있는 시위도 한 예다. 이들은 현대건설이 시공을 맡은 공사로 인한 붕괴 위험을 거론하며 아파트 하부를 지나도록 설계된 광역급행철도(GTX) 노선의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GTX 노선을 바꿀 결정권은 현대건설이 아니라 국토교통부에 있다. 정 회장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주민들이 안전 문제를 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국토부는 안전에 관한 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설명한다. 터널을 뚫는 공법도 주민들이 걱정하는 ‘발파공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전성에 대해 “산 밑에 빨대 두 개를 꽂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비유하는 전문가도 있다. 무리한 시위는 재건축추진위에 소속된 주민들에게도 자충수가 된 형국이다. 국토부가 재건축추진위 공금을 GTX 반대 시위에 사용한 것이 위법이라며 조사를 시작한 것이 단적인 예다. ▷자택 앞 시위의 대상은 기업인뿐만 아니다. 정치인이나 지방자치단체장이 사는 지역이 단골 시위 장소가 된 지 오래다. 단독주택이든 아파트든 가리지 않고 극단적 표현이나 원색적 욕설을 쏟아내 이웃 주민들이 단체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잦다. 자택 앞 집회가 금지된 곳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장 등 현직 헌법기관장이나 외교 사절의 공관뿐이다. 한때 아파트 단지 출입구를 집회 금지 장소에 추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무산됐다. ▷현행 집시법에는 ‘사생활의 평온(平穩)을 뚜렷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경찰이 집회를 금지 또는 제한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그러나 자택 앞 시위는 법률의 문제를 떠나, 기본적인 상식과 시민의식의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앞서 주가 하락 시위만 하더라도 충분히 항의는 할 수 있지만 꼭 프라이버시를 침해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시위 대상이 되는 기업인들의 이웃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음과 혐오 표현에 고통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무슨 죄인가.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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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원수]국회는 어떻게 특권을 늘리나

    대장동 사건 주요 피의자들의 변호인이 요즘 서초동에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일부 변호사가 압수수색 영장 사본을 들고 다니면서 ‘정보 교환’의 도구로 활용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공소장은 재판 직전 국회를 통해 공개되고, 구속영장은 청구 이후엔 당사자가 복사할 수 있어 그 내용이 외부로 드러난다. 하지만 고도의 밀행성이 요구되는 압수수색 영장이 통째로 돌아다니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황당한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더불어민주당은 2020년 7월 압수수색 때 수사 기관이 당사자에게 영장 사본을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가 한창이던 그해 법안 심사가 있었지만 국민의힘과 법무부의 반대로 제동이 걸렸다. 주가 조작이나 화이트칼라, n번방 사건과 같은 관련자가 여러 명인 사건에서 압수수색 영장이 유출되면 수사에 지장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프라이버시 침해 우려가 크다는 이유였다. 상임위에서 법안 처리가 유보됐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작년 9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고발사주 사건에 연루된 국민의힘 김웅 의원의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도한 것이다. 국민의힘이 의원실 앞을 가로막았고, 압수수색 범위를 놓고 양측이 신경전을 벌였다. 이 압수수색을 계기로 민주당이 발의한 압수영장 사본 교부 법안이 국회에서 다시 논의됐다. 1년 전과 달리 반대 없이 상임위를 통과한 법안은 올 1월 국회 본회의에서 압도적 표차로 가결됐다.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통과한 이 법은 올 2월부터 시행 중이다. 이번 법 개정 전까지 압수수색 때 영장을 제시하는 내용의 형사소송법 조항은 1954년 제정된 이후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헌법도 압수수색 때에는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실무적으로 수사 기관은 사본을 주지 않고, 당사자에게 압수영장을 보여주거나 요지를 설명해왔다. 미국은 구속영장뿐만 아니라 압수영장 사본을 당사자에게 제공한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이나 프랑스는 구속영장만 사본을 제출하고, 압수수색 영장은 해당 사항이 없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유사하다. 첫 논의 때는 해외 사례가 법안 유보의 근거 중 하나였는데, 작년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피의자의 방어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수사 과정에 인권 침해 소지를 없애겠다는 입법 취지는 전혀 반대할 일이 아니다. 압수수색 영장 범위를 벗어난 위법 수집 증거가 법정에서 논란이 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법 개정이 오히려 늦은 측면도 있다. 하지만 법안 통과의 계기나 시점을 되짚어 보면 씁쓸하다. 일반인의 침해 사례에는 꿈쩍 않던 국회가 동료 의원들이 당하고 나서 발 빠르게 법을 바꿨기 때문이다. 대형 사건은 수사 기간이 길다. 초기 관련자가 혐의를 벗고 다른 관련자의 혐의가 드러날 정도로 수사가 살아 움직인다. 그런데 수사 단계별 압수영장 사본이 유출되면 수사에 혼선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정치권 수사를 막는 도구로 악용될 소지도 있다. 양당은 정쟁 와중에도 압수영장 사본 교부 같은 법안 통과에는 힘을 합쳤다. 해외에서는 없애는 추세인 국회의원의 불체포나 면책 특권 개정에는 눈감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특권을 이용하는 국회를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나.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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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원수] ‘CCTV는 보고 있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350m가량 떨어진 골목길 폐쇄회로(CC)TV 카메라엔 참사 당일 오후 10시 59분 용산경찰서장이던 이임재 총경이 뒷짐을 진 채 걷는 장면이 찍혔다. 10시 20분 참사 현장에 도착했다는 상황보고서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같은 날 오후 8시 22분 이태원의 자택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CCTV에 나왔다. 지방 출장을 다녀온 뒤 집 근처 골목을 2분간 걸었을 뿐이다. “8시 20분 거리 점검을 했다”는 용산구의 설명은 “퇴근길을 업무로 속인 것”이라는 비판을 받는 부메랑이 됐다. ▷작년 말 기준으로 전국의 CCTV는 약 1600만 대로 추정된다. 인구 3.2명당 1개꼴이다. 구청이나 경찰이 설치한 것보다 민간 부문이 보유한 것이 10배 이상 많다고 한다. 이 총경과 박 구청장의 참사 당일 행적을 포착한 것도 옷 가게나 식당 등 상인들이 설치한 카메라였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0년 감시 카메라 노출 빈도를 조사한 결과 하루 최대 110회, 이동 중에는 9초에 한 번꼴이었다. 대수가 그때보다 2배 이상 늘어난 만큼 노출 빈도 역시 크게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참사 현장 인근에는 최소 수십 대의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다. 과거엔 저해상도 노후 카메라가 많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설치된 지 5년 미만의 최신형으로 교체됐다. 고화질의 화면에 줌인 촬영도 가능해서 현장의 감시자 역할을 톡톡히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감시 카메라의 화면은 아직 공개된 적이 없다. 경찰은 사고 현장과 인근이 찍힌 157건의 영상자료를 확보했다. 이 중에는 수사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이른바 ‘스모킹건’도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공공 CCTV를 실시간으로 통제하고, 볼 수 있는 관제센터는 구청에 있다. 구청이 관리하고, 경찰관들이 상황실에 파견돼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범죄나 재난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작년 강원 강릉에서 초등학생 인질범의 동선을 구청과 경찰이 실시간으로 추적해 4시간 만에 검거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태원 참사 당일엔 용산구 관제센터는 위험 신호를 보낸 게 없다. 모니터링은 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감시 카메라의 천국’ 영국은 전국적으로 425만 대, 런던에만 62만 대의 CCTV가 있다. 카메라가 시민들의 행동을 24시간 내내 감시하는 곳이다. 서울도 8만 대의 공공 부문과 그 10배인 민간 카메라까지 합치면 런던 못지않게 감시망이 촘촘하다. 이런 곳에서 자신의 행적을 숨기거나 포장하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따름이다.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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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원수]112 녹취록

    2012년 20대 여성이 112 신고를 하고도 흉악범 오원춘에게 잔혹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경찰은 “신고가 15초에 불과했고, 구체적인 장소도 언급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경찰의 부실 대응에 대한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고 경찰은 결국 112 녹취록을 공개해야 했다. 실제 신고 시간은 7분 36초였다. 경찰의 당초 해명과는 달리 장소도 분명하게 언급됐다. 여기에 피해자가 “살려 달라”며 비명을 지르는 것을 경찰이 듣고만 있었다는 사실까지 추가로 드러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112 신고 시스템은 완전히 바뀌었다. ▷신고 접수는 생활안전과, 현장 출동은 경비과가 각각 담당하던 운영체계를 하나의 컨트롤타워 아래 통합했다. 시도경찰청에 24시간 긴급 신고를 접수하는 112종합상황실을 만들었고, 신고 내용은 전자시스템으로 일선으로 하달했다. 112 신고는 자동 녹음된다. 다만 텍스트 변환은 하지 않는다. 신고자 측이 방문하면 녹음 파일을 재생해 주지만 녹취록을 제공하지 않는다. ▷지난달 29일 경찰에 접수된 이태원 참사 관련 11건의 112 녹취록이 1일 공개됐다. 국회의 요구에 따라 경찰이 녹음 파일을 듣고 임의로 발췌 정리한 것이다. 녹취록 전문이 아닌 녹취 요약본인 셈이다. 이것만으로도 참사 4시간 전에 “압사당할 것 같다”는 첫 신고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경찰의 부실 대응 의혹이 커졌다. 문제는 전체 녹음 파일 내용은 베일에 싸여 있다는 점이다. 녹취록에 ‘비명소리’로 적힌 부분을 육성으로 듣게 되면 상황이 또 달라질 수 있다. ▷한때 전화 응대 교육조차 받지 않은 신참들이 신고를 접수해 논란이 되자 요즘은 전문 교육을 받은 베테랑 경찰이 아니면 종합상황실 근무가 어렵다. 전문요원은 신고 유형에 따라 대응의 수준을 가장 위급한 ‘코드0’부터 긴급성이 전혀 없는 ‘코드4’까지 5단계로 입력한다. 코드0은 광역 단위로 대규모 인원이 필요하고, 코드1은 강력범죄처럼 위해가 곧 가해질 수 있는 다급한 상황을 뜻한다. 11건 중 코드0은 1건, 코드1은 7건이었다. 그런데도 대규모 경찰력의 신속한 출동이 왜 없었는지 의문이다. ▷과거 20개가 넘었던 위급 상황 신고 전화 창구는 지금은 경찰과 소방(119), 민원상담(110) 등 3곳으로 통합됐다. 경찰과 소방은 시스템도 연계되어 있다. 이태원 참사 관련 11건의 신고 중 2건을 경찰은 소방에도 전달했다. 112 녹취록은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날의 상황을 복원할 수 있는 디지털 증거들을 모아 참사의 원인이라는 진실에 최대한 접근해야 할 것이다.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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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원수]규모 4.1 괴산 지진

    29일 충북 괴산군 북동쪽 11km 지역에서 리히터 규모 4.1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원지 인근 주민들은 “갑자기 ‘우르릉’ 하는 큰 소리가 울리면서 창문이 심하게 흔들렸다” “전쟁이 난 줄 알았다”고 했다. 지상에서 느끼는 이 지역 흔들림의 정도는 ‘거의 모든 사람이 진동을 느끼고, 그릇과 창문 등이 깨지기도 하는 수준’으로 측정됐다. 우리 국토의 중앙 지점에 위치한 이번 지진으로 충북뿐만 아니라 서울과 강원, 경남에서도 흔들림이 감지됐다. ▷올해 국내에서 규모 4.0 이상의 지진이 발생한 것은 처음이다. 1978년 지진 관측 이래 역대 38번째 규모다. 문제는 규모가 아니라 발생 지역이다. 괴산 등 중부 내륙은 한반도에서 지진이 가장 드문 지역으로 꼽혔다. 규모 10위권 이내의 주요 지진은 동해와 서해 해안이나 섬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괴산 진원지의 반경 10km 이내에서 발생한 지진 기록도 40년 넘게 없었다. ‘지진 안전지대’에서 발생한 의외의 지진인 셈이다. ▷한반도가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곳이라는 통념은 규모 5.0 이상의 지진이 경주와 포항에서 잇따라 발생하면서 깨졌다. 국내에서 관측된 가장 강력한 지진은 2016년 경주에서 발생한 규모 5.8의 지진이다. ‘천년 유물’ 첨성대가 기울어졌고, 이재민 100여 명이 발생했다. 이듬해 포항 지진(5.4)은 역대 두 번째 규모였지만 이재민은 10배 이상 많았다. 특히 수능 하루 전날 발생해 시험이 일주일 연기되는 등 전국적 혼란을 가져왔다. ▷지진은 단층 등의 급격한 지각 변형이 원인이다. 지각이 살아 움직이는 지구엔 영원한 지진 안전지대가 없다는 것을 역사는 그대로 보여준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 한반도 지진 관련 기록만 1900건이 넘는다고 한다. 이 중에 굵직한 피해가 발생한 것만 추려도 40여 차례다. 지진 발생은 영남 지방에 국한되지 않았다. 서울과 충북 등 내륙에서도 지진이 많이 발생했다. 특히 충북은 언급되지 않은 지역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과거엔 지진이 잦았다. ▷지질학자들은 최근까지 활동했고, 가까운 미래에 움직일 수 있는 활성 단층이 한반도에 450여 개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부는 경주 지진 이후 2041년까지 전국의 활성 단층 전수조사에 나섰는데, 충북 일대는 올해 조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조차 “지진 발생을 예측할 수 있는 기술이 아직 없다”고 한다. 내진설계 기준 등 잘못된 통념에 따라 만들어진 기존 대비 체계를 하루빨리 바꾸지 않으면 무방비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대형 지진을 맞게 될 수도 있다.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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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얼굴 보고’ 보이스피싱[횡설수설/정원수]

    얼마 전 40대 의사 A 씨가 서울중앙지검 검사를 사칭한 보이스피싱범에게 41억 원을 뜯긴 일이 있었다. 단일 보이스피싱 피해액으로 역대 최고액이었다. A 씨는 예금과 적금, 보험, 주식 해약금을 영업 창구에서 현금으로 인출한 뒤 보이스피싱범이 지정한 장소에서, 자칭 ‘금감원 직원’을 만나 이 돈을 건넸다. 최근 변호사와 연구원 등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를 상대로 10억 원 가까운 고액 피해 사례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 역시 비슷한 유형이다. ▷보이스피싱의 원조는 계좌로 돈을 송금 받는 계좌이체형이다. 하지만 2015년부터 고액을 계좌로 송금하기 어렵게 하는 제도가 하나씩 만들어졌다. 신규계좌 개설자가 증빙서류를 제출하지 못하면 인터넷이나 모바일뱅킹, 현금자동입출금기(ATM)의 이체 한도를 하루 30만 원으로 제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때부터 영업 창구에서 본인이 직접 인출하면 한도가 없는 허점을 노린 대면편취형이 늘었다. 2년 전 대면편취형(1만5111건)이 처음으로 계좌이체형(1만596건)을 추월했다. ▷피해자를 직접 만나 돈을 뜯어내는 대면편취형은 분업화된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점조직처럼 운영된다. 총책과 관리책의 지휘 아래 아르바이트생은 현금 수거와 송금, 인출 등으로 칸막이처럼 역할을 나눈다. 예를 들면 현금 수거 아르바이트생은 피해자로부터 돈 봉투를 전달받아 5% 정도를 수수료로 챙기고, 나머지를 보이스피싱범이 지정한 계좌에 입금한다. 그 돈을 인출해 총책이나 관리책에게 송금하는 아르바이트생도 있다. 수사기관의 추적도 어렵고, 적발되더라도 꼬리 자르기가 쉽다.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자의 60% 이상이 20, 30대 청년이라고 한다. 대면편취형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고액 아르바이트라는 말에 속아 취업난에 경제적으로 궁핍한 청년층이 뛰어든 것이다. 청년층은 일부 역할만 담당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인식이 낮다고 하지만 엄연히 범법 행위다. 대면편취형을 줄이지 못하면 청년층이 또 다른 청년층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수백만 원을 뜯어내는 범죄에 이용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어렵다. ▷보이스피싱범은 자신들의 범죄 수법이 노출되거나 한계에 부닥치면 새 수법을 개발한다. 2006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이스피싱 범죄가 발생했는데, 당시엔 중국에서 걸려온 국제전화였다. 국제전화 식별 제도를 만들자 발신번호를 조작하는 중계기까지 만들어 피해자에게 접근했다. 범정부 차원에서 보이스피싱 대책을 29일 내놨지만 대면편취형에 대한 대응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고강도, 전방위 대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놈 목소리’에 당하는 피해자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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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원수]이원석 檢총장이 前총장들에게 전화한 이유

    이원석 검찰총장은 지난달 18일 총장 후보자로 지명된 직후 전직 검찰총장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많이 부족한 제가 무거운 자리를 맡았다”고 자세를 낮춘 이 총장은 전직 총장들에게 새 정부에서 검찰과 총장의 역할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검찰의 위기는 늘 있었지만 지금은 초유의 상황이다. 현직 대통령이 총장 출신이라 검찰이 어떤 수사를 하더라도 수사의 공정성과 중립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총장은 전직 총장들의 조언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이 총장은 16일 취임식에서 ‘검찰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취임사를 공개했다. 이 총장은 스스로 던진 질문에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검찰권을, 국민을 위해, 바른 방법으로 행사해야 한다”고 답했다. 참모들을 물리치고 초안부터 직접 썼다고 하는데, 여기까지만 보면 역대 총장의 취임사 키워드를 합쳐 놓은 것 같다. 그런데 이 총장은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법불아귀(法不阿貴·법은 신분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는다)’를 인용하면서 “법 집행에는 예외도, 혜택도, 성역도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권력이나 재산의 유무, 지위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법의 잣대가 똑같아야 한다는 말은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말처럼 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 쉬운 게 아니다. 엄격한 법 적용은 필연적으로 적을 만들고, 저항도 생긴다. 법치를 주장했던 한비자는 도리어 모함을 받고 내쳐져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비단 먼 옛날의 일만은 아니다. 총장이 엄격한 수사권 집행을 약속하면 그 말에 발목이 잡힐 수 있다. 더구나 정권 초기 총장은 더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 총장 취임사에서 한비자가 한동안 금기어처럼 여겨졌던 이유다.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총장이었던 김수남 전 총장이 한비자의 ‘법불아귀’를 취임사에서 처음 언급했다. 이 총장은 김 전 총장과 인연이 깊다. 2003년 김 전 총장이 대검 중수과장으로 근무할 때 이 총장이 중수부 연구관으로 발탁됐다고 한다. 공적자금 비리를 함께 수사하면서 이 총장은 기업 회계분석 등 특별수사의 기본기를 배웠다. 김 전 총장은 총장 재임 때 임명권자인 현직 대통령을 피의자 신분으로 처음 조사하고, 구속 수감하는 얄궂은 운명을 마주해야 했다. 김 전 총장은 후배들에게 ‘법불아귀’를 되풀이하면서 “검사는 그래야 한다”며 수사를 밀고 나갔다. 당시 이 총장은 국정농단 사건의 검찰 특별수사본부에 투입돼 현직 대통령을 직접 신문했다. 이 총장이 김 전 총장에게 수사 내용을 대면 보고하면서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다. 취임사가 비슷한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던 셈이다. 시대에 따라 해법이 달라지는데 과거 총장들의 교과서적인 취임사를 그대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 이 총장은 취임사 속 이례적인 약속을 그대로 이행한 총장으로 기억될까. 전 정권의 비리나 정치권 수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마침 한비자는 가족이나 측근 등 권력과 가까운 ‘내부의 적’에게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뜻의 비내(備內)를 강조했다. 새 정부 들어 민정수석실이 없어져 대통령 주변 비리에 대한 대응이 늦을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검찰 수사 지휘라인이 대통령과 가까워 관련 수사가 무딜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중립 없는 검찰은 생각할 수 없다”던 이 총장의 최우선 과제는 민정수석실의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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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년 만에 잡은 살인강도[횡설수설/정원수]

    2001년 12월 대낮에 대전의 은행 지하주차장에서 현금 수송차가 습격당했다. 복면강도 2명은 3억 원이 든 현금 가방을 빼앗고, 저항하던 은행 직원에게 실탄까지 쐈다. 3중 선팅 된 검은색 차로 폐쇄회로(CC)TV가 없던 인근 지하주차장으로 이동한 이들은 하얀색 차로 갈아탄 뒤 사라졌다. 버려진 차에는 지문까지 닦여 있었다. 경찰은 은행 강도 영화를 빌려 본 사람들까지 1만 명 넘게 조사했지만 좀처럼 증거를 찾지 못했다. ▷16년 뒤 경찰은 압수물 창고에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던 차량 속 손수건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냈다. 기존 수사 때는 범인의 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혈액형과 지문 정보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국과수가 얼마 뒤 손수건에서 유전자(DNA) 정보를 찾아냈다. 범행 당시 얼굴을 가리던 용도로 쓰인 손수건에 땀이나 침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사기관이 보관 중이던 수십만 명의 범죄자 DNA 정보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수사팀은 손수건 속 DNA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재수사에 나섰다. “최소 5년은 잡고 가자. 우리가 못하면 우리 자식을 경찰 시켜서라도 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수개월 전 경찰은 50대 초반의 용의자 A 씨가 범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A 씨가 버린 담배꽁초를 입수했다. 담배꽁초와 손수건의 DNA 정보는 똑같았다. 경찰은 범행 21년 만인 27일 A 씨와 공범 B 씨를 동시에 구속 수감했다.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연장되지 않았다면 강도 살인 사건의 진범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당초 범행 15년 뒤인 2016년 12월까지였다. 2007년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25년으로 늘어났지만 법 시행 이전에 발생한 은행 강도 살인 사건은 소급 적용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2015년 7월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없애는 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법 시행 시점을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남아 있던 2000년 8월 1일 이후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무기한으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살인 미제 사건 수사가 속도를 냈다. ▷3년 전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진범 이춘재가 33년 만에 붙잡혔던 것은 피해자 속옷의 미세한 땀방울까지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DNA 분석 기법이 정교해졌기 때문이다.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를 없앤 것은 피해자 유족의 응어리를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한 것이다. 은행 강도 살인 사건처럼 경찰이 추적 중인 미제 사건이 아직 279건이 더 있다고 한다. 경찰은 ‘완전 범죄는 없다’는 집념을 갖고, 조그마한 단서라도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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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원수]수원 세 모녀의 비극

    21일 오후 경기 수원시의 다세대주택 1층에서 60대 여성 A 씨와 40대 두 딸이 숨진 지 한참 뒤에 발견됐다. A 씨는 암 투병 중이었고, 두 딸은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었다. 남편은 지병으로 이미 사망했고, 손을 내밀 친인척도 없었다. 병원비 부담으로 보험금마저 채권자에게 넘어갔다. 경찰은 세 모녀가 생활고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A 씨가 다세대주택으로 이사 온 것은 2년 전이었지만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다. 주소지를 둔 경기 화성시는 복지사각지대 발굴시스템을 통해 A 씨가 기초생활수급 대상이라는 점을 확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연락이 끊긴 지 한참 됐다”는 A 씨 지인 말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A 씨가 복지서비스를 신청하거나 상담한 적도 없어 수원시와 화성시 모두 세 모녀가 숨진 뒤 이 같은 사실을 파악했다고 한다. 같은 광역단체라도 기초단체만 다르면 사각지대 발굴시스템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가장을 잃은 다세대주택 거주자인 수원 세 모녀의 비극적인 사연은 8년이라는 시차가 믿기지 않을 만큼 송파 세 모녀 사건과 놀랄 만큼 닮았다. 다세대주택 지하 1층에 거주하던 60대 여성 B 씨는 2014년 2월 두 딸과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남편과 사별한 후 식당일로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한 달 전 몸을 다치면서 갑자기 수입이 끊겼다. 건강이 좋지 못했던 두 딸이 있었지만 이들이 근로능력이 있는 30대라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A 씨처럼 B 씨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극한 상황에 몰려서도 월세에 마음을 쓰던 모습도 비슷하다. A 씨는 집주인에게 “이번 달 월세(42만 원)를 내기 어렵다”는 휴대전화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지병과 빚으로 더 이상 살기 힘들다’는 취지의 유서도 남겼다. 월세를 한 번도 미루지 않았던 B 씨는 현금 70만 원이 든 봉투 위에 ‘주인아주머니께…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복지 혜택의 문턱이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조금 낮아졌다. 기초생활지원 대상자의 급여 기준을 최저생계비가 아닌 상대적 빈곤 개념의 중위 소득으로 높였다. 연체와 단수 등 각종 지표를 활용해 위기 가구를 찾아내는 시각지대 발굴시스템도 도입됐다. 하지만 대상자가 먼저 신청하지 않으면 사각지대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인 데다 빈곤 비율(16%)에 비해 인구 대비 기초생활수급자의 비율(4%)이 너무 낮은 것에 대한 허점이 여전히 메워지지 않고 있다.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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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원수]경찰국장의 ‘밀고’ 논란

    “행정안전부와 협의를 해보겠다.” 윤희근 경찰청장 후보자는 8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김순호 행안부 초대 경찰국장의 파견을 취소할 계획은 없느냐’는 야당 의원의 질의에 이같이 답했다. 야당은 김 국장이 대학 시절 노동운동단체인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에서 활동하다가 동료들을 밀고한 대가로 경찰에 특별 채용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윤 후보자는 “그런 부분까지 알고 추천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경찰청의 전신 내무부 치안본부가 인노회를 본격 수사한 건 1989년 2월이었다. 노태우 정부 출범 후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 혐의를 적용한 첫 사건이었다. 당시 관련자 15명이 구속됐다. 같은 해 4월 구속된 김 국장의 대학 1년 선배는 이듬해 출소 뒤 극단적 선택을 했고, 유족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인노회가 이적단체라는 소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경찰의 영장이 한 번 기각된 적이 있는데, 2년 전 대법원은 재심 사건에서 인노회가 이적단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경찰 수사 1년 전 김 국장은 인노회에 가입했지만 이듬해 갑자기 동료들과 연락이 끊겼다. 동료들이 수사와 재판을 받던 같은 해 8월 김 국장은 경찰에 특채됐다. 이후 대공 분실에 근무하면서 여러 차례 검거 표창을 받아 4년 8개월 만에 경장에서 경위로 초고속 승진했다. 김 국장은 동료 밀고 의혹에 대해 “소설 같은 얘기”라며 부인했다. 반면 옛 동료들은 김 국장이 신군부를 위해 운동권의 정보 수집 업무를 한 프락치였다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김 국장이 특채 전 만난 인노회 사건의 수사 책임자 이력과 시점도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 대공3부장이던 홍모 전 경감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보고서의 최초 작성자로 알려져 있다. 홍 전 경감은 4일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인노회 사건에서 (김 국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고 특채로 받았다”고 말했다. 김 국장은 홍 전 경감이 특채했다는 주장에 “확인이 어렵다”고 했다. 김 국장은 1989년 7월경 경찰을 찾아갔다고 했지만 홍 전 경감은 수사 전인 “그해 초”라고 했다. ▷인노회 수사를 전후해 경찰은 완전히 바뀌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은 박종철 고문치사 및 은폐 축소 사건의 재발을 막자며 경찰 중립 법안을 제출했다. 당시 여당이 야당의 요구를 일부 수용한 것이 치안본부 폐지와 경찰청 분리였다. 31년 만에 부활한 경찰국의 상징인 경찰국장이 고문 수사와 프락치 의혹이라는 경찰의 흑역사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진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김 국장이 사실 관계를 상세히 밝히고,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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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정원수]용궁과 DM

    지난달 10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힘 지도부를 용산 대통령실로 초청해 오찬을 했다. 윤 대통령이 ‘이태원로22’ ‘국민의집’ 등 대통령실 명칭 후보군이 모두 마음에 안 든다고 하자 한 참석자가 우스갯소리로 “용산에 있으니 ‘용궁’ 어떠냐”고 했다. “궁이 들어가면 다 중국집 이름 같다”는 윤 대통령 답변을 다들 웃어넘겼다. 나흘 뒤 대통령실은 옛 청와대를 대체할 집무실 이름을 정하지 않고 당분간 ‘용산 대통령실’로 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요즘 국회와 정부 부처 공무원은 용산 대통령실을 풀네임으로 부르기 쉽지 않자 용궁으로 짧게 줄여 부른다고 한다. 대통령실은 너무 길고, 국방부 청사가 있는 용산으로 줄이면 대통령 집무실이라는 상징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침 프랑스의 엘리제궁, 러시아의 크렘린궁처럼 해외에서도 대통령 집무실을 궁으로 부르는 사례도 있다. 영문 약칭은 Dragon Palace의 이니셜 DP가 아닌 용산을 영어로 번역한 Dragon Mountain의 이니셜 DM이 자주 쓰인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원욱 의원은 18일 대통령실의 ‘사적 채용’ 의혹을 비판하며 “국민의힘 보좌진과 기자들은 대통령실을 용궁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용궁의 의미에 대해 그는 “용산에 있는 궁이라는 의미도 있고, 대통령과 아주 가까운 그들만의 리그라는 뜻도 있다”고 덧붙였다. 박홍근 민주당 원내대표도 같은 날 대통령실을 용궁으로 불렀다. 야당이 대통령실을 비판하기 위해 왕조시대와 신분사회를 연상시키는 궁(宮)이라는 단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당초 대통령실 명칭 5개 후보에 대한 국민선호도 조사에선 대통령실의 도로명 주소인 ‘이태원로22’가 1위였다. 권력기관 이름을 인위적으로 짓지 말고, 영국 총리 관저인 ‘다우닝 10번가’처럼 자연스럽게 주소로 부르자는 것이다. ‘이태원로22’는 대통령 집무실의 대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최종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대통령 집무실 주변 도로명을 먼저 바꾸고, 거기에 대통령을 상징하는 1번지를 달면 어떨까. 미국 백악관 남쪽을 좌우로 가로지르는 도로명도 뒤늦게 ‘헌법로’ ‘독립로’가 됐다. ▷윤 대통령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종식시키고, 국민을 위해 제대로 일하는 정부를 만들겠다”며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겼다. 집권 2개월 만에 의도와 달리 집무실 명칭이 긍정적 의미보다는 부정적 뉘앙스로 불리기 시작했다. 대통령실은 서두르지 않고 국민과 소통을 넓혀가면서 합당한 집무실 이름을 짓겠다고 했는데, 왜 용궁이라는 말이 확산되고 있는지 자문(自問)해 봐야 할 것 같다.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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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정원수]전직 국정원장의 눈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스탠딩 오더’라는 것이 있다.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북한 최고 지도자의 명령을 말한다.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에 대한 암살 명령이 대표적이다. 김정은은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정보기관장인 이병호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해서도 반드시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전 원장이 김정은을 겨냥해 북한에 침투시킨 공작 요원들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 정부 초기엔 이 전 원장에게 경호팀이 붙었을 만큼 긴박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이 전 원장에 대한 경호가 필요 없다. 김정은의 스탠딩 오더가 해제된 게 아니라 이 전 원장이 수감 중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에게 2년 동안 국정원 특수활동비 21억 원을 상납한 혐의로 기소된 이 전 원장은 구속과 석방을 되풀이하다가 징역 3년 6개월의 대법원 확정 판결로 지난해 7월 재수감됐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북한군에 끌려가서 손톱, 발톱 다 뽑히는 것보다는 대한민국의 감옥에 있는 게 더 낫지 않으냐”고 주변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한다고 한다. 이 전 원장은 영어 교관으로 군에서 복무하다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국정원 해외 파트에서 40년 넘게 근무했다. 은퇴했다가 75세 때 국정원장에 취임한 이후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를 전범 삼아 국정원의 국내 정치 개입 관행을 뿌리 뽑으려고 했다. 대표적인 대북 매파인 그는 “선진국 어느 나라 정보기관도 권력기관으로 불리지 않는다”며 국내 정치가 아닌 대북 관련 첩보 수집과 공작을 강조했다. 국내 정치를 멀리하려고 했던 이 전 원장도 퇴임 뒤 특활비 상납 관행에 발목을 잡혔다. 구속 직후 충격을 받은 그는 면회 온 지인 앞에서 눈물을 한참 동안 흘렸다고 한다. 이 전 원장을 포함해 보수 성향의 박근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장 5명이 모두 특활비 문제로 기소됐다. 진보 성향 정부의 전직 국정원장도 도청과 대북송금 등으로 수사를 받았다. 특히 과거 정부의 비정상적 운영을 바로잡겠다며 국정원 쇄신에 나섰던 문재인 정부의 서훈 박지원 전 국정원장도 최근 국정원에 의해 고발됐다. 정보기관이 1999년 국정원으로 간판을 바꿔 단 뒤 전직 원장 14명 중 11명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된 것이다. 검찰 수사의 반작용으로 국정원은 국내 파트의 역할을 조금씩 축소하다가 결국 국내 담당 차장까지 없애면서 대북과 해외 정보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요즘은 북핵 등 현안이 생길 때마다 해외 정보기관과의 협조 없이는 진상 파악이 쉽지 않아 무게중심이 앞으로 해외 쪽으로 더 기울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5년 전 적폐청산 수사로 국정원 서버를 통째로 열어젖히면서 다른 나라 정보기관의 협조에 상당 기간 어려움을 겪다가 최근에야 어느 정도 원상 복구가 됐다고 한다. 해외 정보기관의 협조 내역이 혹시라도 공개되는 것 아니냐며 정보 공유를 꺼렸다는 것이다. 교훈도 일부 얻었지만 잃은 것도 그만큼 컸던 국정원의 과거 청산이라고 할 수 있다. 조그마한 정보라도 얻기 위해 수시로 이합 집산하는 정보 전쟁에서 다른 나라에 주는 것 없이 일방적으로 받을 수만은 없다. 국정원장 수사가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되면 정보 전쟁에서 앞서가지 못하고, 뒤처질 수밖에 없다. 국정원에 대한 검찰 수사는 국정원을 바로잡을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임계점까지만 유용하다. 정보기관에도, 국가 안보에도 도움이 되는 검찰의 신속하고 절제된 수사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정원수 논설위원 needjung@donga.com}

    • 202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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