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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진영 논설위원입니다.

ecolee@donga.com
  • [이진영 칼럼]‘신빨’ 떨어진 정치 무당 김어준

    소설가 성해나의 베스트셀러 ‘혼모노’(창비)엔 30년 차 박수무당 얘기가 나온다. 선거철엔 예비 출마자들을 상대로 억대의 굿값을 벌던 그는 ‘신빨’이 예전 같지 않음을 감지하게 되고, 갓 신내림을 받은 무당 ‘신애기’가 앞집에 이사 와 단골들을 채가면서 위기를 맞는다. 요즘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김어준을 보며 이 박수무당이 떠올랐다. 김어준은 청와대 출입기자를 둔 언론인이지만 강준만 교수의 책 제목대로 ‘정치 무당’에 가깝다. 김어준 유튜브 채널이 얼마 전 내보낸 ‘대통령 공소 취소 거래설’을 놓고 “팩트체크도 안 했다” “게이트키핑은 기본”이라고 비판하는 건 전한길뉴스더러 왜 공정보도 안 하냐고 따지는 것과 같다. “냄새가 난다”며 후각대로 보도하는 기자가 어디 있나. 오보로 판명 나면 책임지는 게 언론이지만 김어준은 그러지 않는다. 점사가 틀린다고 복채 돌려주지 않고, 굿의 효험이 없다고 굿값 돌려주지 않는 법이다. 동양 철학자 임건순은 ‘한국형 무속 정치학’에서 한국 사회의 심층엔 무속이 자리하고 있고 인과적 사고보다 응보적 사고, ‘문제 풀이’보다는 ‘한풀이’식 무속적 세계관이 한국 정치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진단했다. 박정희, 노무현 대통령이 좌우 진영에서 추앙받는 배경에도 비극적 최후를 맞은 이에게 상징적 힘을 부여하는 무속적 정서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노무현 노제 때 숨어서 울다 결심한 게 있다. 남은 세상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라 했었는데 노무현이란 신을 모시는 무당을 자처한 것으로 해석된다.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검찰개혁 하면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떠오른다”고 했다. 여권 강경파들에게 검찰개혁은 검찰 수사 도중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한 해원(解冤)의 의미를 갖는 듯하다. 무속은 믿음의 영역이란 점에서 진위의 영역인 언론과 다르고, 영적 성장이 아닌 세속적 욕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다르다. 정치 무당 김어준도 좌파 진영이 위기에 몰릴 때마다 온갖 음모론으로 ‘액막이’ 역할을 하며 상대 진영엔 화를, 자기 진영엔 복을 불렀다. ‘윤미향 의혹’을 제기한 이용수 할머니를 배후설로 공격했고, ‘박원순 피해자’를 겨냥해 “굳이 나선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김어준 신봉자들은 ‘김어준이 문재인도 대통령 만들고, 박근혜도 감옥 보내고… 나랏일을 다 하고 있다’고 한다. 김어준 신당, 아니 방송에만 나가면 “공천받는 건 일도 아니고 후원금 계좌도 두둑”해지니 곽상언 의원처럼 안 나갔다간 오히려 “지가 뭐라고…” 같은 욕을 먹게 되는 것이다. 무당이 ‘신빨’이 다해 간다는 걸 깨닫는 계기는 작두 타다 칼날에 베여 피를 봤을 때다. 김어준으로선 올 1월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의 합당 좌절이 그런 순간이었을 것이다. 합당하라는 ‘공수’를 내렸지만 먹히지 않았고 유튜브 구독자들만 빠져나갔다. 이후 ‘이재명 정청래 악수 패싱설’ 등으로 허둥대다 거래설이 터졌다. 여당의 대통령 공소취소 몰이는 방관하면서 검찰개혁 절제를 당부하니 “냄새가 난다” 할 법하지만 대통령 측근과 검찰 간 거래설을 밑도 끝도 없이 내지를 일은 아니었다. 여권에선 “김어준은 민주주의의 적” “괴물이 됐다”고 야단들이다. 민주당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니다. 이해찬 전 대표는 생전에 “김어준이 하는 유튜브는 다 봤다. 김어준이 민주당을 위해 큰일을 한다”고 했고, 송영길 전 대표는 “김어준 없는 아침이 두렵다”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12·3 계엄 후 처음 인터뷰한 곳도, 대선 하루 전날 출연한 곳도 김어준 채널이다. 현 정부는 처음으로 김어준 채널 기자에게 청와대 출입기자증을 내주었다. 정권 초기만 해도 총리, 장관, 청와대 대변인이 국정TV 드나들듯 김어준 방송에 나와 정책 배경과 해외 순방 성과를 소개했다. 상대를 겨냥한 음모론자는 ‘참언론인’이고, 우리 쪽을 향하면 무슨 무슨 ‘수괴’가 되는 건가. 김어준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그의 음모론을 정치 의제 삼아 사회를 분열시키고, 공동체를 위한 정치를 사적인 제액구복(除厄求福)의 도구로 삼아 온 무속적 습속부터 반성하라. 무당 정치의 폐해가 너무나 크다. 선거에 지면 ‘K값’ 때문이고, 유죄 판결을 받으면 “정치 판사” 탓이라 한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기보다 음모론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정치에 무슨 책임 윤리가 있고 발전이 있겠나. 김어준과 절연해 봤자 유튜브 푸닥거리 장단에 맞춰 정치하는 문화를 청산하지 못하면 헛일이다. 좌우 가리지 않고 제2의 김어준과 신애기들이 정치와 공론장을 망치는 대가로 부와 권력을 누리려 무령(巫鈴)을 요란하게 흔들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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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한 아비는 열 아들을 길러도…’

    외모, 성격, 학력, 직업, 자산, 집안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을 요즘 결혼 시장에선 ‘육각형 배우자’라 부른다. 이 중 ‘집안’을 볼땐 배우자 부모의 노후 대비 여부도 따지는데, 부모의 자립도는 배우자의 직업만큼 중요한 조건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대출 없는 자가(自家) 1채, 연금을 포함해 월수입 300만 원에 아플 때를 대비한 1억 원 이상의 현금을 갖고 있어야 합격권에 든다고 한다. 자녀의 원만한 결혼생활을 위해선 자녀에게 손 벌릴 생각을 접어야 하는 것이다.▷얼마 전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국민 의식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부모를 부양할 책임이 자식에게 있다’는 데 동의한 응답자는 20.6%였다. 이 조사를 처음 시작한 15년 전 53%가 부모 부양에 동의한다고 답했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드는 소식이다. 저출산 현상으로 부양할 자식은 줄었으나 부모의 평균 수명은 늘어 부양 부담이 커진 데다, 가족이 전담해 온 돌봄 책임을 사회가 나눠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된 결과로 보인다.▷요즘엔 부모들도 자립심이 강하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60세 이상 고령자 10명 중 8명은 본인이나 배우자가 생활비를 마련하고, 10명 중 7명은 자녀와 따로 산다. 자녀에게 부담을 주기 싫은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벌어 따로 사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은퇴한 부부의 월평균 적정 생활비는 300만 원, 연금 수령액은 110만 원이다. 이들은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노후로 미뤄둔 취미 생활과 여행의 꿈을 접고 생활비를 버는 데 상당 시간을 보낸다. 60세 이상 취업자는 절반에 육박한다.▷부모 부양이 자식된 도리로 통하던 시대가 바뀌는 과도기엔 ‘낀 세대’가 있기 마련이다. 1960년대생이 이에 해당한다.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라는 뜻에서 ‘마처 세대’라 불린다. 재단법인 ‘돌봄과 미래’의 2024년 조사에서는 1960년대생의 56%가 부모나 자녀 중 어느 한쪽을 부양하고 있고, 15%는 부모와 자녀를 ‘이중 부양’하느라 월평균 164만 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퇴 후엔 자신의 노후까지 ‘삼중 부양’을 해야 하는 처지다.▷“한 아비는 열 아들을 길러도, 열 아들은 한 아비를 봉양하기 어렵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 어느 나라든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나 보다. 더구나 ‘그냥 쉬었음’ 청년이 71만 명에, 청년 세대 전체가 부모보다 가난한 최초의 세대다. 자식 덕 보기는커녕 자식 부양 부담만 덜어도 좋겠다는 부모들이 많다. 때 되면 부모 품 떠나 제 앞가림 하는 것이 최고의 효도이고, 자녀에게 기대지 않고 활기 있게 보내는 노후가 자녀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인 시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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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죽음과 전쟁까지 베팅, 폴리마켓 논란

    미국과 이란의 전쟁에 주식 시장 못지않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장이 예측 시장이다. 세계 최대 베팅 사이트인 미국 폴리마켓에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시점을 맞히는 내기에 5억2900만 달러(약 7800억 원)가 몰렸다. 지난달 28일 공습 하루 전 베팅해 12만 달러를 벌어간 사람도 있다. 현재는 ‘이란 정권은 3월 중 무너질까’ ‘호르무즈 해협 봉쇄는 3월까지 유지될까’를 놓고 내기가 한창이다. ▷폴리마켓은 뉴욕대 중퇴생인 셰인 코플란(28)이 2020년 설립한 가상화폐 기반의 베팅 플랫폼으로 스포츠 경기나 선거 결과뿐만 아니라 이란 전쟁과 같은 지정학적 사건의 미래에 베팅할 수 있는 최초의 사이트다. 선거를 예로 들면 특정 후보의 당선 가능성에 ‘Yes’나 ‘No’를 0∼1달러 가격에 사고팔 수 있는데 이 가격이 참여자들이 예상하는 그 후보의 당선 확률이 된다. 2024년 미국 대선 결과 예측에는 30억 달러 넘는 베팅이 이뤄졌다. ▷올해 초 잠시 한국어 서비스를 한 적이 있지만 국내에서 폴리마켓이 유명해진 계기는 그보다 앞선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사태 때다. 탄핵 여부뿐만 아니라 정확한 시기를 맞히는 세분화된 상품이 나와 판돈이 커졌다. ‘윤 대통령이 2025년 4월 이전에 탄핵될까’에만 2600만 달러 넘게 베팅됐다. ‘LadyGunhee’라는 닉네임의 이용자는 16억 원을 벌어갔다고 한다. 현재는 ‘차기 서울시장’ ‘부산시장’ 맞히기 내기가 뜨겁다. 하지만 스포츠토토처럼 특별법으로 허용하는 경우가 아니면 온라인 베팅은 형법상 도박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폴리마켓은 2024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가능성을 가장 먼저 예측해 주목받았다. 일론 머스크는 “여론조사보다 더 정확하다. 돈이 걸려 있어서”라고 했다. 하지만 2022년 미국 중간선거에선 공화당의 압승을 점쳤으나 빗나갔다. 참여자들 중 다수가 가상화폐에 익숙한 우파 성향의 젊은 남성들이어서 전체 민심을 반영하지 못했다고 한다. 2024년 베네수엘라 대선에선 여당 후보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당선 예측에 실패했는데 집권 세력의 부정선거 변수를 놓쳤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내부자 거래 의혹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달엔 이스라엘 예비군이 기밀정보를 이용해 베팅했다 걸려 기소됐다. ‘가장 빠르고 냉정한 여론 지표’라는 낙관론과 달리 ‘큰손’이 특정 후보나 이슈에 베팅해 여론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예측 결과의 판정 기준도 모호하다. 올 1월엔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언제 침공할까’ 내기가 있었는데 마두로 대통령 체포 압송은 ‘침공’이 아니라며 배당금 지급을 거부해 논란이 됐다. 무엇보다 ‘피 묻은 배당금’이 죽음과 전쟁으로 돈을 벌어도 되느냐는 무거운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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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파멸적 위험’ AI 무기화 갈등

    요즘 전쟁에선 인공지능(AI) 기술이 승패를 가르는 핵심 자산이다. 방대한 위성사진과 소셜미디어, 드론 영상을 실시간 분석해 적군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정밀 타격 지점을 찾아내는 데 AI 기술이 활용된다. 저비용으로 살상력을 높이는 데 AI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킬러 로봇’과 같은 치명적 ‘자율살상무기’가 현실화하면 인류를 파멸적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AI 무기화는 윤리적 문제를 낳기 마련. 미국 정부와 앤스로픽이 AI의 군사적 사용 범위를 놓고 벌이는 갈등이 대표적이다. ▷앤스로픽은 ‘가장 안전한 AI’를 지향하지만 이 회사 챗봇 클로드는 군사용으로 각광받는다. 다양한 언어와 방언으로 된 문서, 첩보 보고, 작전 계획서를 이해하고 요약 비교하는 능력이 뛰어나 미 국방부 기밀 작전에 사용되는 유일한 AI 모델이다. 올해 초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생포 작전 때도 팔란티어와 함께 위성 정찰, 첩보 보고 등을 요약 분류해 지휘관의 질문에 빠르게 답하는 ‘AI 참모’ 역할을 했다고 한다. 클로드, 챗GPT, 제미나이의 3자 가상 전쟁에선 클로드가 8승 4패로 최고 승률을 올렸다는 영국 연구팀의 실험 결과도 나왔다. ▷클로드가 이번 이란 공습에도 활용됐다는 보도가 나온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돌연 모든 연방 정부 기관에 클로드 사용을 6개월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클로드를 ‘합법적인 모든 용도’에 제한 없이 활용하게 해달라는 국방부 요구를 앤스로픽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군사작전 결정권은 대통령과 군에 있는데 민간 기업이 회사 정책을 군에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앤스로픽은 AI 기술이 인간의 개입 없는 완전 자율살상무기 체계에 활용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 정부 주도의 군사 기술 개발에 핵심 역할을 했던 실리콘밸리는 AI 기술에 관한 한 ‘반전(反戰)’ 정서가 강하다. 2018년엔 구글이 국방부의 AI 화상 인식 기술 개발에 참여한 사실이 알려져 비난이 쏟아지자 ‘살상용 AI는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발표하고 사업을 포기한 적이 있다. 그만큼 AI의 위력이 원자폭탄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챗GPT, 제미나이, 클로드를 써서 시행한 전쟁 실험에서는 21번의 전쟁 중 20번의 전쟁에서 핵무기를 쏴 충격을 줬다. AI가 핵을 공멸의 무기가 아닌 승리의 수단으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이번 앤스로픽 사태를 두고 빅테크 기업들은 갑론을박 중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윤리적 제약 없이 AI 무기를 만들고 있는데 우리만 손 놓고 있을 순 없다”는 주장과 “AI가 인류 최고이자 최후의 발명품이 돼서는 안 된다”는 반박이 교차한다. 민간의 혁신 기술이 주력 전략 자산으로 동원되는 ‘기술 징집’의 시대에 그 통제 권한은 누가 가져야 하는지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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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BTS 광화문 공연 D-1개월

    한 달 앞으로 다가온 3월 21일 BTS 복귀 공연은 대중문화사를 새로 쓰는 빅 이벤트다. 한국의 심장부인 서울 광화문광장이 대형 콘서트장으로 변신해 아티스트의 무료 단독 공연이 펼쳐지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넷플릭스가 K팝 공연을 190개국에 생중계하는 것도 초유의 일. 미국 월가에선 슈퍼볼급 시청자들이 몰릴 것으로 예상한다. 광화문 일대의 빌딩 외벽에 설치된 초대형 스크린에선 멤버들의 공연 관련 영상을 송출하며 색다른 도시 미학을 선보이게 된다. ▷예상되는 관객 규모부터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객석은 3만4000석 규모이나 광화문광장 무대부터 숭례문까지 모든 차로에 사람들이 가득 찰 경우 26만 명이 몰릴 것으로 추산된다. BTS가 세운 K팝 사상 최다인 ‘62회 공연에 206만 명’을 깨는 기록이다(2018∼2019년 ‘Love Yourself’ 투어). 넷플릭스 생중계 실시간 접속자 수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라이브 이벤트 사상 최다 기록인 5000만 명을 웃돌 것으로 전망된다. 공연 시작 시간이 한국은 오후 8시, 미국 서부는 오전 4시다. ▷‘라이브 쇼의 제왕’인 해미시 해밀턴 감독(60)이 공연 연출을 맡는 것도 화제다. 지상 최대의 쇼로 불리는 미국 슈퍼볼 하프타임쇼, 2012년 런던 올림픽 개회식, 오스카상 그래미상 에미상 시상식을 두루 연출한 감독으로, 영국 출신인 그가 유서 깊은 공간에서 ‘아리랑’이라는 한국적 주제의 공연을 어떻게 표현해 낼지 주목된다. 특히 광화문에서 숭례문까지 1.2km에 달하는 야외 공연장의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 간 불일치를 어떻게 극복할지도 관심거리다. 소리는 빛보다 느리다. ▷안전과 교통 관리에도 비상이 걸렸다. 서울시와 경찰은 공연장을 밀집도에 따라 4개 구역으로 나누어 인파를 관리하고, 난동과 테러에 대비해 9개 경찰서의 13개 강력팀과 경찰특공대를 배치하기로 했다. 광화문역, 경복궁역, 시청역은 지하철이 무정차 통과하고 주무대인 세종대로뿐만 아니라 새문안로, 종로, 사직로, 율곡로 전반에 걸쳐 단계별 교통 통제가 이뤄질 예정이다. 인근 주민들과 결혼식 같은 행사가 예정된 시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것도 과제다. ▷광화문광장은 역사적 변곡점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세종대로 사거리 주변에만 55만 명이 모여 응원전을 펼쳤다. 세계는 그 뜨거운 함성에 놀라고, 사건 사고 없이 청소까지 하고 돌아가는 깨끗한 마무리에 또 한 번 놀랐다. 올해는 BTS 복귀 공연에 힘입어 관광객 2000만 명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화문의 밤을 즐기고 가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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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폐섬유증 60대 환자의 스위스行

    폐섬유증을 앓고 있는 60대 남성이 10일 가족 몰래 조력사를 하기 위해 스위스로 가려다 인천공항에서 제지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 남성은 “아버지가 조력사를 위해 출국하려는 것 같다”는 신고 전화를 받고 출동한 경찰을 “그냥 여행 가는 것”이라는 거짓말로 돌려세웠으나 “유서 형식의 편지를 발견했다”는 가족의 두 번째 신고 전화를 받은 경찰이 항공기 이륙까지 늦춰가며 설득하자 출국을 포기했다. 남성을 태운 비행기가 이륙하기 15분 전이었다. ▷스위스는 의사의 도움을 받아 환자 스스로 약물을 투여해 사망하는 ‘조력 자살’을 외국인에게도 허용하는 유일한 나라다. 존엄한 죽음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조력사를 위한 스위스행에 대한 관심도 높다. 조력사를 선택한 사람들의 스위스 여정을 담은 책들이 여럿 출간됐고, 스위스 조력사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도 흥행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스위스의 4개 조력사 단체에 가입한 한국인이 300명이 넘는다. 가입한 사람들은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위안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스위스에서 조력사한 한국인은 10명 남짓으로 추정된다. 죽음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고, 결심했다 해도 가족을 설득해야 하며, 설득했다 해도 동행한 가족이 자살방조죄로 처벌받을 가능성을 각오해야 한다. 남유하 작가는 말기 암 환자로 고통에 몸서리치는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인 스위스행에 동행했다. 한국에 돌아와 주민센터에 사망 신고를 하며 장소를 스위스로 적었더니 직원이 “안락사하셨느냐”고 물었고 엄마의 죽음에 대해 거짓말하기 싫어 “맞다”고 했지만 경찰에 신고당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해외에서도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조력사를 진행하는 것이 윤리적이냐는 논쟁이 제기되곤 한다. 지난해 10월엔 영국의 40대 남성이 가족에게 파리 여행을 간다고 속이고 스위스에 가서 조력사한 일이 있었다. 귀가하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다 뒤늦게 아들 통장에서 조력사 단체로 1만5000달러(약 2200만 원)가 빠져나간 사실을 확인한 어머니는 단체에 항의한 후에야 유해 발송 계획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헌법재판소는 조력사를 허용해 달라는 헌법소원 사건을 심리 중이다. 하반신이 마비된 회복 불능의 척수염 환자가 조력사를 하러 스위스로 가려다 간병을 맡아온 딸이 동행할 경우 자살방조죄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마음에 걸려 청구한 사건이다. 이에 대해 법무부는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할 우려가 있다” “환자 생명을 구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의료 윤리에 배치된다”는 의견서를 냈다. 헌재가 “현대판 고려장이 될 것”이라는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마지막 인권으로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인정할지 주목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6-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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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아이스크림 하나 때문에 9세 초등생 사진 공개한 점주

    중장년 세대 중엔 어린 시절 학교 앞 가게에서 물건을 슬쩍하다 혼쭐난 경험들이 더러 있을 것이다. 유년 시절 친구들과 콩 서리, 수박 서리하던 경험담을 털어놓는 유명인들도 있다. 대개는 “다신 하지 마라”는 훈계를 듣고 풀려나거나, 부모에게 먼저 들킨 경우 제 발로 찾아가 “잘못했다” 사과하고 용서받는 것으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자녀에게 서리 당한 집 일손을 돕게 하는 부모도 있었다. 아이들의 잘못을 교육의 기회로 삼을 줄 알았던 이들에게 얼마 전 600원짜리 아이스크림 미결제 사건을 놓고 벌어진 송사는 씁쓸하기만 하다. ▷사건은 2023년 4월 9세 어린이가 인천 무인매장에서 아이스크림을 계산하지 않고 들고 나가면서 시작됐다. 40대 가게 주인은 이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 캡처 사진을 ‘일주일 안에 연락 없으면 경찰에 신고한다’는 문구를 달아 가게 내부에 공개했다. 아이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했지만 인근 주민들은 알아볼 수 있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이 부모는 가게 주인과 합의를 시도했으나 불발됐다. “절도”라는 가게 주인과 “단순 실수”라는 부모 주장이 엇갈렸다. ▷경찰은 아이가 어려 죄가 되지 않는다며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가게 주인이 그해 7월 아이 사진을 다시 가게에 붙이면서 사건이 커지기 시작했다. 아이 아버지가 사진을 떼자 가게 주인은 재물손괴죄로 고소하고, 부모는 가게 주인을 아동학대와 명예훼손으로 맞고소했다. 아이 아버지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지만 가게 주인은 1심에선 무죄, 2심에선 벌금 2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아이를 알아볼 수 있는 사진과 절도를 암시하는 글을 같은 학교 학생들이 이용하는 매장에 게시한 책임이 가볍지 않다고 했다. 아이는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아이 부모는 아이가 실수로 계산을 안 하고 나온 건데 상습범으로 몰아붙여 화가 났다고 한다. 또 “검찰에서 가게 주인이 30만 원에 합의할 의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며 합의금을 목적으로 이 일을 벌인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반면 가게 주인은 “합의금을 요구한 적 없다. 정식으로 사과만 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렇더라도 아홉 살 아이 잘못을 쉽게 범죄로 규정하고 사진까지 공개하는 극단적 방법을 써야 했을까. ▷중장년 세대가 어린 시절 소소한 일탈을 웃으며 돌아볼 수 있는 이유는 동네 어른들의 따끔하되 너그러운 꾸지람에서 좋은 어른으로 자라길 바라는 배려심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 사방에 CCTV 달아놓고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잘못하다 걸리면 아이 장래고 뭐고 무조건 범죄자로 낙인찍어 응징하고, 법 말고는 갈등을 조율할 줄 모르는 각박한 사회가 됐는지 600원짜리 아이스크림 하나로 벌어진 기막힌 송사에서 절감하게 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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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BTS ‘아리랑’에 들썩이는 세계

    군 복무를 마친 BTS 멤버 7인이 4년 만에 완전체로 복귀하는 월드투어 ‘아리랑’을 앞두고 전 세계가 들썩이고 있다. K팝 가수 단일 투어로는 최대 규모가 될 아리랑 투어는 3월 서울을 시작으로 34개 도시에서 82회 공연이 예정돼 있는데 예매를 개시한 북미와 유럽에서 41번 열리는 공연이 전석 매진됐다. 소셜미디어에는 예매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50만 명 대기 중’이란 메시지에 좌절하고, 인터넷이 빠른 한국으로 ‘원정 티케팅 와서 성공했다’며 환호하는 영상들이 공유되고 있다. ▷이번 투어 티켓 가격은 한국 공연을 기준으로 19만8000∼26만4000원. 하지만 미국의 재판매 시장에선 스탠퍼드 스타디움 공연 표가 5700달러(약 820만 원)에 거래되고 있다. 이곳에서의 단독 공연은 ‘콜드플레이’에 이어 BTS가 두 번째다. 멕시코는 15만 장을 놓고 110만 명이 몰려들어 암표 가격이 치솟고 ‘아미(ARMY)’들의 민심이 험악해지자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대통령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외교 서한을 보냈다. “BTS 공연을 늘리거나 스크린 상영을 허용해 달라.” ▷글로벌 팬덤인 아미들이 움직이면서 공연이 열리는 도시들의 항공권과 숙박 예약 사이트도 불이 났다. 서울행 여행 검색량이 전주 대비 155%, 6월 공연이 예정된 부산행 검색량은 2375% 폭증했다. 브라질도 공연이 예정된 상파울루행 장거리 버스표 검색량이 600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공연장까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BTS세권’ 호텔들은 하루 60∼80달러이던 숙박료가 375달러로 뛴 곳도 있다. ▷빌보드는 BTS가 아리랑 투어로 10억 달러(약 1조4500억 원)의 수익을 올릴 것으로 추산한다. BTS 공연이 열리는 곳마다 관객들이 먹고 자고 관광하는 데 돈을 쓰면서 지역 경제가 살아나는 ‘BTS노믹스’ 효과는 이보다 훨씬 커서 ‘스위프트노믹스’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2023년 3월부터 21개월간 전 세계 51개 도시에서 149회 공연으로 거둔 경제 효과는 총 100억 달러였다. ▷BTS는 3월 20일 신곡 14곡이 담긴 정규 5집 ‘아리랑’을 발표하고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첫 공연을 갖는다. 막내 정국(28)을 빼곤 모두 30 줄에 접어든 멤버들이 ‘기다림도 사랑이다’라는 표어로 ‘군(軍)백기’를 인내해온 아미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다. 광장의 수용 인원은 1만8000명이지만 무료 공연이어서 전 세계 아미들 20만 명이 몰려들 것으로 전망된다. 광장 주변의 대형 전광판에선 공연을 생중계하는 것을 논의 중이다. 겨우내 세계 곳곳에서 반목하던 사람들이 인종과 종교와 이념의 차이를 뛰어넘어 봄의 희망을 함께 노래하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6-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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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82세에 6번째 징역형 선고받은 장영자

    1980년대 사채업계 ‘큰손’ 장영자 씨(82)가 얼마 전 사기죄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사찰을 공동 명의로 인수하자’고 속여 지인 소개로 만난 피해자로부터 1억 원을 챙겼다고 한다. 1982년 단군 이래 최대 금융 사기였던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이후 6번째 징역형이다. 형이 확정되면 전체 수감 기간이 35년으로 늘어난다. ▷장 씨는 5공 시대를 돌아볼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사건은 시중에 파다한 소문에서 시작됐다. 이순자 여사의 측근인 미모의 여성이 서울 시내 특급호텔 한 층을 세내어 쓰면서 대형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장 씨는 이순자 여사의 작은아버지 이규광 씨 처제이고, 남편 이 씨는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이었다. 장 씨 부부를 통해 청와대가 비자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자 청와대 민정팀 내사를 거쳐 검찰 수사가 시작됐고, “겨우 안정돼 가던 청와대와 나라 경제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은”(이순자 자서전)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장 씨 부부는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에 접근해 현금을 빌려준 뒤 거액의 어음을 받아내고 이를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챙긴 현금으로 다른 회사에 같은 수법으로 사기 쳐 돈을 불렸다. 피해액이 6400억 원대로 당시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1.2%, 정부 예산의 10% 수준이었다. 철강업계 2위 일신제강과 도급 순위 8위 공영토건을 비롯해 여러 회사가 부도났고, 이규광 씨를 포함해 30명 넘게 구속됐다. 정부는 민심 수습을 위해 총리를 비롯한 5공 실세 19명을 교체했다. 그러고도 장 씨는 당당했다. “경제는 유통이다. 날 풀어주면 막힌 돈을 유통시킬 자신 있다.” ▷5공 청산 후로도 장 씨는 출소와 재범을 되풀이했다. 1차부터 6차 사건까지 법원이 인정한 피해액만 6891억 원이다. 장 씨는 왜 멈추지 않는 걸까. 사기는 피해자가 속아 넘어가야 완성되는 범죄여서 사기꾼 입장에선 ‘속는 사람이 나쁘다’고 범죄를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어 재범률이 높다. 특히 장 씨처럼 ‘큰 건’을 성공시켜 본 사람은 그 쾌감이 워낙 커 평범한 삶은 무료해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은 피해자에겐 악몽이고 정권에도 치명타였지만 돈도 가족도 없고 세금 체납액만 21억 원인 장 씨에겐 그 시절이 화양연화였을지 모른다. 각별한 인맥과 ‘고위층 구권 화폐 비자금’ 같은 거짓말을 흘려 쉽게 돈뭉치를 만들 수 있었고, 당시 서울 시내 20평대 아파트를 사고도 남는 1100만 원을 하루 생활비로 쓰고 외제차 5대를 굴렸다. 지금은 사기 수법도 첨단화하고 있지만 장 씨는 여전히 어음이나 위조 수표 방식을 고수하며 화려했던 ‘큰손의 추억’에 갇혀 사는 듯하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6-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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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영 칼럼]잘난 韓, 못난 尹, 이상한 張

    없는 집구석보다 있는 집안 싸움이 시끄러운 법이다. 걸려 있는 게 많아서다. 그런데 입법과 행정 권력을 모두 쥔 거대 여당의 내전보다 법안 하나 통과시킬 힘도 없는 국민의힘 집안싸움이 더 요란하다. 누구 하나는 진짜 죽어 나갈 것 같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여당의 내전은 ‘명청 대전’이라 부른다. 국힘의 내전은 ‘장한 전쟁’이자 ‘윤한 전쟁’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66), 한동훈 전 대표(53), 장동혁 현 대표(57) 사이에서 벌어지는 물고 물리는 난투극은 보물 지도를 놓고 서로 총질하는 김지운 감독의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 캐릭터에 맞게 고쳐 부른다면 ‘잘난 놈, 못난 놈, 이상한 놈’ 정도가 되겠다. 먼저 ‘못난 놈’ 윤석열이다. 자폭 계엄으로도 모자라 그 책임을 죄다 아랫사람들에게 돌림으로써 마지막 구명줄인 훗날 사면을 위한 동정 여론 조성도 못 하는 못난 사람이다. ‘잘난 놈’은 한동훈이다. 수사면 수사, 말싸움이면 말싸움, 훈훈한 외모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으나 치명적인 약점이 품을 줄 모르는 성품이다. 교수라면 한동훈에게 A학점은 줘도 딸은 주지 않을 것 같다. ‘이상한 놈’은 장동혁이다. 온건 보수인 줄 알았는데 국힘의 극우화를 선동하고 여당 독주를 막겠다면서 여당 좋은 일만 시키는, 못난 듯 이상한 사람이다. 원래 한동훈은 윤석열에게 의리남이었다. 윤이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로 좌천된 후 한동훈만 같이 산책하고 케이크 나눠 먹으며 윤을 챙겼다고 한다. 윤이 검찰총장이던 시절 ‘정치를 하려면 지금 나가야 한다’고 조언한 사람도 한이었다(‘실록 윤석열 시대’). 윤은 대통령이 된 후 한을 법무부 장관에 깜짝 발탁해 공직자 인사 검증 권한까지 몰아주며 2인자 자리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둘 사이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윤에게 한은 “총으로 쏴서라도” 없애고 싶은 죽일 놈이 됐다. 각별했던 사이일수록 한번 틀어지면 끝도 없이 어긋나는 법이다. 윤과 한이 계엄과 탄핵으로 실권한 틈을 타 당권을 잡은 이가 장동혁인데 그를 발탁한 사람이 한이다. 한은 비대위원장 시절 3선 이상이 맡던 사무총장 자리에 보궐선거로 배지를 단 0.5선 장을 앉히면서 그의 정치적 체급을 높여줬다. 둘은 윤의 탄핵에 관한 견해차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장은 한더러 “윤의 배신자”라 하고, 친한계는 장을 “한의 배신자”라 한다. 장의 윤리위원회가 ‘당원 게시판’ 문제로 한을 제명하자 여당 의원은 이런 촌평을 남겼다. “윤석열의 사형 구형을 듣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한동훈이 죽어 있었다.” 셋은 어쩌다 깐부에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걸까. 정책이나 정치적 노선에 관한 견해차로는 이렇게까지 감정의 골이 깊게 패지 않는다. 내란 특검에 따르면 윤은 한의 후임인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에게 ‘도이치 수사는 불법임에도 사악한 한동훈이 2년째 끌고 있다’는 문자를 보냈다. 친윤계는 “윤이 한을 업어 키우다시피 했는데 배은망덕하다”고 하고, 한은 “개똥 같은 소리”라고 한다. 장과 한의 결별엔 한의 페북 게시글이 결정적이었다. 장이 당 대표 선거에 나가자 한은 “최악(장동혁)을 피하게 해달라”며 김문수 편을 들었다. 요즘 양쪽 진영은 “한동훈은 면장도 못할 사람” “장동혁은 내 스태프였다”는 말을 놓고 입씨름 중이다. 결국 지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서울대 법조인 출신 정치 초보들이 사감(私感)에 빠져 공사(公事)를 그르치는 바람에 보수당은 총선에 대패하고, 정권 내주고, 이젠 지방 권력까지 내줄 처지가 됐다. 한동훈으로선 싸잡아 비난받는 게 억울할 것이다. 윤에게 드물게 직언한 소신파, 계엄을 앞장서 막아낸 사람이 누군가. 한은 내용도 절차도 하자투성이인 불의한 ‘당게 제명’의 피해자 아닌가. 모두 맞는 말이나 한동훈 스스로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그래서 주인공인 ‘좋은 놈’이 못 되는 것이다. 윤이 계엄으로 탄핵당하자 한은 계엄을 막아낸 무용담을 책으로 내고 대선 경선에 뛰어들었다. 그때 윤 정부의 2인자로서 책임지고 물러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러고 보니 보수엔 한동훈만 한 사람이 없다’는 여론의 추대로 기회를 잡지 않았을까. 문제 될 것 없는 당게 사건을 대형 사태로 키우기까지 한의 무오류에 대한 강박과 오만의 책임은 없나. 한동훈 최종 징계 결정을 앞두고 당내 명망가들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하나가 돼 보수 재건의 길을 찾자”고 호소하지만 당도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는 회복 불능의 길로 빠져들고 있다. 종군기자로서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목격했던 생텍쥐페리가 썼듯 “내전은 전쟁이 아니라 병”이나 양쪽 다 이길 궁리만 하지 치유할 마음은 없어 보인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6-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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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템플스테이 지난해 35만 명

    요즘 가장 ‘힙’한 종교는 불교다. 전국의 유명 사찰을 돌며 진행하는 짝짓기 프로그램 ‘나는 절로’에 참가하려면 100 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매년 열리는 서울국제불교박람회는 ‘극락도 락(Rock)’ 같은 재치 있는 슬로건 덕에 성황을 이룬다. 빵과 소스까지 식물성 식재료만 쓰는 ‘극락 버거’ ‘왕생 핫도그’는 채식주의자는 물론이고 육식을 즐기는 이들에게도 화제다. 절에서 하룻밤 지내며 수행 문화를 체험하는 템플스테이에 지난해 역대 최대 인원이 몰려든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전국 158개 사찰에서 진행된 템플스테이 참가자는 35만 명. 템플스테이는 2002년 월드컵 때 외국인들의 숙소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됐는데 K팝 스타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체험기가 입소문을 타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체험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까지 누적 참가자가 418만 명이고, 이 중 세계 200여 개국에서 온 외국인 참가자가 59만3000명이 넘는다. 경북 경주 함월산 중턱의 골굴사와 서울 북한산 자락에 자리한 금선사는 외국인 참가자가 훨씬 많다. ▷한국은 선불교 전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다. 맑은 공기와 칠흑 같은 어둠, 새벽 예불을 알리는 청량한 목탁 소리까지 빛과 소음이 차단된 산사에서의 하룻밤은 경이로운 체험을 선사한다. BTS 멤버 RM은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 필요할 때” 절로 간다.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곳”이라고 했고, 미국 미슐랭 3스타 셰프인 에릭 리퍼트는 불교의 식사 의례인 발우공양을 경험한 뒤 “인내와 겸손,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듬뿍 담겼다”고 썼다. ▷요즘 템플스테이 인기몰이의 일등 공신은 ‘나는 절로’다. 코로나를 겪으며 대면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청춘남녀를 위해 2023년 11월 시작했는데, ‘솔로’인 스님들이 솔로 탈출을 돕는다는 설정 자체가 화제를 불러 모았다. 회당 20∼30명의 남녀가 참가하고 이 중 절반이 커플이 돼 절을 떠난다. 지난해 9월엔 결혼 1호 커플이 탄생했다. 사찰이 주는 진중함과 신뢰감에 서로 진지한 마음으로 임하기 때문에 만남의 질이 높고 커플 성사율도 높다고 한다. ▷템플스테이를 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다양하다. 누구는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하고, 누구는 평생의 인연을 찾으러 간다. 사찰음식을 통해 식재료에 대한 존중을 배우기 위해, 소고기 없이도 소고기 맛을 내는 화엄 버거를 먹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찰의 개방성과 유연함이 기독교, 가톨릭, 이슬람 교도들까지 고요한 산사를 찾고 비움의 미학을 얻어 사찰 문을 나서는 비결일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6-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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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가짜 금 주의보

    지난해 5월 국제 학술지에 실린 논문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납 원자핵을 가속 충돌시키는 실험 도중 납이 금 원자핵으로 변했다는 내용이었다. 결론적으로 금 원자핵은 워낙 불안정해 생성되자마자 부서져 사라졌고, 금 100만분의 1g를 얻으려면 거대강입자충돌기 전기료로만 천문학적인 돈이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 이로써 연금술은 사실상 불가능한 기술임이 판명났지만 사기꾼 ‘연금술사’의 가짜 금 만드는 기술은 날로 정교해지고 있다. ▷최근 금값이 치솟는 가운데 한국주얼리산업단체총연합회가 서울 종로 귀금속 거리 일대에 ‘함량 미달 금 척결을 위해 모두 나서 주세요’라는 제목의 긴급 담화문을 게시했다. 종로는 전국 귀금속 제조 업체의 40%가 모여 있는 곳. 연합회는 지난해 9월 9%의 이물질을 섞은 도매용 가짜 금이 유통된 사실을 확인했다. 금 1kg을 기준으로 최소 2000만 원 상당의 순금이 빼돌려진 셈이다. 가짜 금은 은이나 주석을 이용해 만드는데 요즘은 금과 성질이 비슷한 텅스텐에 두껍게 도금해 적발하기 어렵다고 한다. ▷가짜 금을 감별하는 대표적 방법이 비중을 측정하는 것이다. 금은 밀도가 높아 같은 부피의 다른 금속보다 무겁다. 고대 그리스의 과학자 아르키메데스가 한 사기꾼 세공사의 금관이 은을 섞어 만든 가짜임을 증명할 때도 이 원리를 이용했다. 왕관과 같은 무게의 순금을 물에 넣었는데 밀어내는 물의 양이 달랐던 것. 그런데 텅스텐은 밀도(cm³당 19.25g)가 금(cm³당 19.3g)과 거의 같아서 레이저 같은 비파괴 검사로는 감별이 불가능하다. 확실하게 하려면 녹여보는 수밖에 없다. 순금은 녹는 점이 1064도, 텅스텐은 3422도여서 금은 녹아도 텅스텐은 남는다. ▷금값이 오를 때마다 가짜 금 주의보가 발령됐지만 글로벌 온라인 플랫폼이 등장한 후로는 가짜 금 유통이 더욱 쉬워졌다. 중국 온라인 쇼핑몰에는 가짜 금반지를 샀다가 반품도 못 했다는 후기들이 올라온다. ‘포 나인(99.99%)’ 순금을 할인 판매하기에 품질 보증서만 믿고 샀는데, 하도 가벼워 감정을 의뢰한 결과 금 함량이 2%밖에 안 되는 도금 반지였다는 식이다. 온라인 경매나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시세보다 싸게 나온 금을 샀다가 피해를 보는 사례도 적지 않다. ▷순금은 자석에 붙지 않고, 물렁해서 깨물면 자국이 남는다. 금 제품을 사진으로 찍거나 바닥에 떨어뜨려 나는 소리를 이용해 진짜 금인지 판별해 주는 앱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가 레이저를 쏘고 엑스레이를 찍어도 못 하는 감별을 일반인이 할 수는 없다. 믿을 만한 업체를 이용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환불 절차가 명확한지 확인하며, 거래 기록을 남겨둬야 한다. 서양의 오래된 속담대로 반짝인다고 해서 다 금은 아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6-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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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영 칼럼]“생리대가 아닌 집값·환율 잡아야”

    지금껏 이런 대통령 업무보고는 없었다. 2주간의 업무보고를 생방송으로 진행한 것도 처음이고, 업무보고 영상들이 ‘대통령, 심각한 표정으로 긴급 지시’ 같은 쇼츠로 제작돼 온라인 공론장을 주도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김민석 총리는 “이재명 대통령이 새로운 장르를 하나 만드셨다. 넷플릭스보다 재미나는 잼플릭스”라고 했다. 듣고 보니 잼플릭스엔 대중문화의 고전적 흥행 요소가 곳곳에 들어 있다. 기초와 광역 단체장, 국회의원을 두루 거친 ‘행정 천재’가, 19부 5처 18청 7위원회 등 228개 공공기관을 ‘도장깨기’ 하듯 돌면서, 무사안일에 빠진 철밥통들을 흔들어 깨워 함께 성장한다는 서사부터 그렇다. 예측 불가의 대통령 질문에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남는 전개는 ‘오징어 게임’ 같은 긴장감을 준다. 답변이 부실한 기관장은 “써준 것만 읽는다” “도둑놈 심보”라며 공개 모욕을 당했는데 그 수위가 아침 드라마의 맵디매운 ‘김치 싸다구’ 수준이다. 생방송 업무보고의 흥행으로 이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커졌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갤럽과 리얼미터의 이달 3주 차 여론조사 결과 대통령의 국정 수행 지지율 반등은 없었다. 최근 3주간 한국갤럽의 대통령 지지율은 62%-56%-55%로 2주 연속 하락세다. 리얼미터는 54.9%-54.3%-53.4%다. 두 조사기관 모두 생중계 업무보고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지만 경제 불확실성과 특정 기관장 공개 질책이 지지율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했다.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대통령 부정 평가 이유 1위는 경제와 민생이다. 요즘 이런저런 모임에 가면 대화가 집값에서 시작해 환율로 끝난다. 그런데 새해 국정운영 방향을 제시하는 이번 업무보고는 탈모에서 시작해 생리대로 끝난 느낌이다. 이 대통령은 “젊은 사람들이 보험료만 내고 혜택을 못 받는다”며 탈모약 건강보험 지원 검토를 지시했다. 취업이 안 돼 자존감이 바닥나고 뛰는 월세 내느라 죽을 지경인데 “탈모는 생존의 문제”라는 말이 와닿겠나. 이 대통령이 “국산 생리대 가격이 비싸다”며 실태 파악을 지시한 날엔 친명 여성 커뮤니티도 들썩였다. “생리대값 안 내려도 되니 집값과 환율을 잡아달라.” 한국갤럽 조사에서 대통령 부정 평가 이유 2위가 도덕성 문제다. 이 대통령은 “능력은 없는데 연줄로 버티는 경우”와 “부패한 이너서클”을 질타했다. 바른말도 행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역효과만 난다. 대통령의 질책을 듣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떠올린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실 비서관이 “훈식이 형” “현지 누나” 운운하며 대학 동문 출신을 공공기관도 아닌 민간 협회장 자리에 앉히려다 들키지 않았나. 대통령 사법연수원 동기로 북한 안보리 결의안도 몰라 망신당한 유엔대사는? 대통령의 변호사 출신으로 공직을 차지한 사람들은? “이 대통령은 민족의 축복”이란 아부 외엔 발탁 사유를 모르겠는 인사혁신처장은? 이 대통령은 이달 초 업무보고를 생방송으로 진행하겠다며 “국민 알권리 존중, 투명한 국정 운영 실현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강유정 대변인은 “CCTV를 늘 켜놓고 국민께 공개하고 감시받겠다는 뜻”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제대로 감시받겠다는 자신감과 의지는 평가할 만하지만 일방적 소통을 생중계한다고 국정 운영이 투명해지고 국민 알권리가 보장되는 건 아니다. 올해 국정감사 기간 내내 야당 의원들이 묻고 물었어도 ‘핵심 실세’ 김현지 제1부속실장의 기본적인 이력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현 정부 들어 소통의 효용을 실감한 건 3일 외신 기자회견이었다. 한 기자가 “북한에 억류된 한국 국민들의 석방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겠는가”라고 묻자 이 대통령은 “처음 듣는 얘기”라고 했다. 질문한 기자도 놀라고 듣는 국민도 놀랐다. 회견 다음 날 대통령실은 북한에 억류된 한국인 현황을 공개하며 “조속한 남북 대화 재개 노력을 통해 해결해 나가겠다”고 했다. 정부가 제대로 일하는지 감시하고 국민에게 책임을 다하도록 견제하는 건 날카롭게 묻고 성실히 답하는 정부와 언론 간 양방향 소통에서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정부 내에선 벌써부터 잼플릭스 시즌 2 얘기가 나온다. 본편만 한 속편은 만들기 어렵다. 설사 흥행하더라도 시청률이 깡패인 넷플과 여론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국정은 같을 수가 없다. 신뢰받는 정부가 되려면 정부 감시와 견제가 본업인 국회와 언론에 설명의 의무부터 다해야 한다. 잼플릭스 제작은 선택이지만 이건 필수다. 국회와 언론을 불편해하며 일방적 홍보만 고집하다 탈선한 전임자의 불행을 잊지 않기 바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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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돌고 돌아 일회용 컵 ‘따로 계산’

    정부가 일회용품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카페 등에서 일회용 컵값을 따로 받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최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소비자와 판매자 모두 불편했던 일회용 컵 보증금제를 ‘컵 따로 계산제’로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컵 가격은 100∼200원이 될 전망이다. 시행 시기는 공청회 의견 수렴 후 결정한다. 이로써 문재인 정부가 도입한 일회용 컵 보증금제는 제대로 시행도 못 해 보고 폐기 수순을 밟게 됐다. ▷일회용 컵 보증금제만큼 오락가락했던 정책도 드물 것이다. 코로나로 일회용 쓰레기가 급증하자 정부는 2020년 6월 일회용 컵 음료를 사면 보증금 300원을 낸 뒤 컵을 반환할 때 돌려받는 이 제도를 2년 후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시행 한 달을 남겨두고 준비 부족을 이유로 6개월 연기했다가, 6개월 후엔 세종과 제주에서만 우선 시행하기로 물러선 뒤, 2023년 11월 윤석열 정부가 소상공인 부담을 이유로 전국 확대 시행을 보류했다. 현재 시범 시행 중인 세종과 제주에선 74%까지 올랐던 컵 반환율이 55%로 떨어진 상태다. ▷이 제도가 표류한 이유는 부담은 크고 유인은 작았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보증금 300원을 돌려받으려고 컵을 씻어 반납하는 걸 번거로워했다. 업주 입장에선 컵마다 반납 라벨 붙이고, 반납한 컵 보관했다 회수업체에 보내고, 보증금 내주는 게 불편하고 비용까지 드는 일이었다. 사실 이 제도는 2002년 처음 도입했다 2008년 폐지됐는데 그때도 ‘누가 보증금 50∼100원 받자고 귀찮게…’라는 저항이 컸다. 이미 실패했던 정책을 도입하면서 2년의 준비 기간이 있었음에도 똑같은 이유로 실패한 셈이다. ▷역대 세 번째 일회용 컵 규제가 될 ‘따로 계산제’는 반납하는 불편함이 없다. 대신 소비자로선 가격 인상이 불만일 수 있다. 정부는 텀블러를 이용하면 일회용 컵값 100∼200원, 탄소중립포인트 300원, 매장 할인 500원 등 총 900∼1000원을 할인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일회용 컵 보증금제와 함께 도입했다가 유야무야된 것이 플라스틱 빨대 매장 내 사용 금지다. 정부는 재질에 상관없이 빨대는 고객이 요청할 때만 제공하도록 규정을 고치기로 했다. ▷그린피스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일회용 컵 사용량은 102개다. 일회용 컵은 생산 단계부터 폐기까지 많은 자원을 쓰고 환경을 오염시킨다. 종이컵 안쪽 코팅 성분은 뜨거운 음료가 닿으면 미세 플라스틱이 나와 인체에도 좋을 것이 없다. 유럽은 매장 내 사용은 물론이고 배달 시에도 일회용품 사용을 금지하는 추세다. 하지만 앞선 두 번의 실패에서 보듯 수용성 고려 없이 명분만으론 성공하기 어려운 것이 환경 정책이다. 일회용품 규제하자며 ‘일회용’ 대책만 내놓는 일은 그만 봤으면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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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美 국방부 보도지침에 위헌 소송 낸 NYT

    언론 자유를 수정헌법 1조로 보장하는 미국에서 정부 및 고위 공직자와 언론 간 소송은 매우 드문 편이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경우 지난 1기 때부터 현재까지 대통령 개인이 언론사를 상대로 낸 소송만 30건이 넘고 올해 제기한 소송만도 6건이나 된다. 미국 역사상 최다 기록일 것이다. 언론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5일엔 뉴욕타임스(NYT)가 국방부를 상대로 새로운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NYT가 문제 삼은 것은 국방부가 10월 발표한 보도지침으로 ‘기밀이든 아니든 모든 보도는 사전 승인을 받으라’는 내용이다. NYT는 “이 보도지침은 정부가 공식 발표한 내용 이외의 정보를 취재해 국민에게 전달하는 기자들의 역량을 제한하는 것으로 수정헌법 1조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또 보도지침을 어기면 출입을 금지하는 일방적 처벌 규정도 적법 절차를 보장하는 수정헌법 5조 위반이라고 했다. 사전 검열이나 다름없는 보도지침 시행 후 40여 명의 기자들이 출입증을 자진 반납하고 펜타곤 밖에서 취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수정헌법 1조와 5조는 언론이 정부의 언론 통제에 맞서 법정 다툼을 벌일 때 꺼내 드는 핵심 방패다. AP 기자는 ‘멕시코만’을 ‘아메리카만’으로 표기하라는 행정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백악관 출입을 금지당하자 수정헌법 1조 위반으로 소송을 냈고, 1심 승소 후 항소심을 진행 중이다. 트럼프 1기 때는 CNN 백악관 출입기자가 날 선 질문을 한 후 출입증을 빼앗겼으나 수정헌법 1조와 5조 덕에 되찾은 적도 있다. 공영방송 PBS와 NPR은 ‘논조의 편향성’을 이유로 연방 자금 지원이 끊기자 수정헌법 1조에 근거해 소송을 이어가고 있다. ▷언론 입막음용으로 트럼프 정부가 활용하는 무기는 거액의 소송 폭탄이다. 억만장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에게 보낸 ‘외설 편지’를 보도한 월스트리트저널엔 100억 달러(약 14조7000억 원), “수십 년간 트럼프와 가족, 미국 전체에 거짓말을 퍼뜨려온 최악의 신문”이라 부른 NYT엔 150억 달러짜리 손해배상 소송을 낸 상태다. ABC뉴스(1500만 달러), NBC뉴스와 CBS(각 1600만 달러)엔 명예훼손 소송을 취하하는 대가로 거액의 합의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언론 자유와 관련한 기념비적인 판결로, 공인에 대한 명예훼손 여부는 원고가 ‘실제적 악의’를 입증해야 성립한다는 ‘뉴욕타임스 대 설리번’(1964년), 국가기밀이란 이유만으로 언론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는 ‘뉴욕타임스 대 미국 정부’(1971년)가 꼽힌다. 모두 NYT가 당사자였다. 이번에 국방부를 상대로 낸 NYT 소송도 그 효력은 모든 언론에 미칠 것이다. 세계 언론자유지수 순위를 57위까지 추락시킨 트럼프 정부에 맞서 언론 자유를 지켜내는 또 하나의 판례가 나올지 기대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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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영 칼럼]떨어지는 감도 못 받아먹는 국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어록 중에 “정치는 상대가 자빠지면 이긴다”는 명언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인용해서 새삼 유명해진 말이다. 그런데 상대가 자빠지는데 이기기는커녕 지는 바보도 있다. 여당이 부동산 대책으로 자빠지고, 대장동 항소 포기로 비틀대는 동안 여당과 대통령 지지율이 오르고 국민의힘 지지율은 내려가고 있다. 떨어지는 감도 못 받아먹는 게 요즘 국힘의 정치력이다. 이탈리아 경제사학자 카를로 치폴라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법칙’에서 인간을 현명한 인간, 순진한 인간, 영악한 인간, 어리석은 인간 네 종류로 나누었다. 개인의 행동이 본인과 집단에 득실이 되는지가 기준인데 이는 정치에도 유용한 분류법이다. 첫째, 나와 공동체 모두에 득이 되는 ‘현명한 정치’가 있다. 둘째, 사회엔 득이 되는데 난 손해를 봤다면 ‘순진한 정치’다. 노동개혁으로 독일 경제 부활의 초석을 놓고 실각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노동정책이 순진한 정치다. 셋째, 개인이나 정파의 이익을 채우려 나라에 막대한 손해를 주는 ‘영악한 정치’가 있다. 여당의 사법 정치는 개인적 사법 리스크 해소를 위해 삼권분립을 훼손하는 영악한 정치다. 넷째, 자신은 어떠한 이득도 못 얻거나 심지어 손해를 보면서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어리석은 정치’다.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고 패가망신한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정치가 딱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요즘 국힘이 ‘1호 당원’ 못지않은 어리석은 정치를 하고 있다. 장동혁 대표를 가리켜 ‘멍청한 윤석열이 가고 나니 더 멍청한 장동혁이 왔다’고들 혀를 찬다. 1년 전 계엄의 밤 국힘 의원 18명이 없었더라면 신속한 계엄 해제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계엄 극복에 정치적 지분을 주장하기는커녕 계엄 옹호 세력과 절연하지 못한 채 여당이 놓은 ‘내란 정당’의 덫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나라는 폭주하는 권력에 위태롭게 내어주고 당은 위헌 정당으로 해산될 위기에 처했으니 이보다 어리석은 정치도 없다. 최근 부동산 대책 혼란과 대장동 항소 포기 국면에서 국힘이 구사한 전략은 1사 만루의 기회를 병살타로 날려 먹은 야구팀 수준이다. 역대 진보 정부의 아킬레스건인 부동산 문제는 국힘엔 ‘우리 싸움터’에서 싸워 볼 기회였지만 장 대표가 윤 전 대통령 면회 다녀온 사실을 공개하면서 싸우기도 전에 힘이 빠져버렸다. 대장동 일당에 수천억 원의 부당 이득을 챙겨준 항소 포기에 국힘은 규탄대회까지 열어 놓곤 “우리가 황교안이다” 하고 헛발질하는 바람에 “우리가 김만배다” 세력의 기만 살려줬다. 결정적 위기 때마다 지지율 방어에 나서주는 국힘이야말로 ‘찐명’ 아닌가. 어느 나라든 현명한 정치나 순진한 정치는 어렵고, 흔한 것이 영악한 정치다. 영악한 정치끼리 만나면 서로 견제가 돼 큰 탈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악한 정치와 어리석은 정치가 만나면 ‘헌법 존중 TF’와 ‘사법 정상화 TF’ 같은 기만적 이름의 조직이 헌정 질서를 유린해도 속수무책인 한국처럼 파국으로 치닫기 쉽다.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민주주의의 유산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폭정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제도는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체제 위기를 겪었던 20세기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을 연구한 결과 사람들이 새로운 질서에 저항하기보다 놀랍도록 잘 적응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부가 죄 없는 사람 휴대전화 들여다보고, 내 편이면 상 주고 아니면 벌주는 엉터리 신상필벌에 입법권과 예산권을 남용하는데도 별 저항 없이 안정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새로운 질서에 놀랍도록 순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 보호하지 못하는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지켜낼 수 있을까. 영악한 정치보다 나쁜 것이 어리석은 정치다. 영악한 사익 추구 정치는 정당하진 않아도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해 방어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도 큰 손해 봐가며 공동체에 해코지하는 어리석음은 비합리적이어서 예측도 반격도 어렵다. 국힘이 왜 여당의 내란 몰이가 극에 달할 계엄 1주년이 다가오도록 선제적 사과와 청산을 하지 않는지, 여당을 긴장케 하는 대안 세력으로 거듭나려 하지 않는지 이해하려 애써 봐야 소용없다. 그저 그들이 “신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정당이 해산된들 뭐가 아쉽겠나. 어리석은 정당 탓에 나라가 비가역적 치명상을 입게 될까 걱정되고 분통 터질 뿐이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아직도 윤 어게인을 외치는 자가 있다면 모두 모자란 사람들이다. 암적 존재들이다”라고 했다. 폭정의 여당 대표가 할 말인가 싶지만 이 말만큼은 동의할 수밖에 없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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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죽은 엡스타인, 산 트럼프 잡나

    폭주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1년도 안 돼 대형 장애물을 만났다. 트럼프 정부가 공개 반대를 고수해 온 억만장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의 수사 기록에 대해 상하원이 사실상 만장일치로 공개하라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 엡스타인은 미성년자들을 동원해 정·관·재계 인사들에게 성접대를 한 혐의로 기소됐다가 2019년 구치소에서 자살했는데, 그의 ‘고객’으로 의심되는 명단엔 전현직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거물들이 망라돼 있다. 트럼프가 19일 법안에 서명하면서 한 달 내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게 됐다. ▷엡스타인 사건을 스캔들로 키운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과 경쟁한 대선을 앞두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 대해 “엡스타인 때문에 큰일을 겪게 될 것”이라며 성접대를 받았음을 암시했다. 이즈음부터 부정선거론과 함께 극우 보수세력의 2대 음모론인 딥스테이트(deep state), 즉 좌파 엘리트 소아성애자들로 구성된 비밀 조직이 세계를 조종한다는 음모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지난해 대선에선 엡스타인 파일을 공개해 배후 세력인 딥스테이트를 척결하겠다고 공약했다. ▷대선 승리 후엔 피해자 정보 보호를 명분으로 비공개로 선회했는데, 이후로는 트럼프에게 불리한 정황이 담긴 자료가 유출되며 거꾸로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2000년대 중반 무렵 ‘역겨운 변태’와 절연했다고 했지만 엡스타인은 2011년 지인에게 보낸 메일에서 “트럼프와 피해자가 내 집에서 몇 시간을 보냈다”고 했고, 죽기 직전 메일에선 “트럼프는 소녀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아직까지 트럼프가 성범죄에 연루됐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는 상태다. ▷트럼프 정책의 ‘거수기’ 역할을 하던 공화당은 이번 표결에선 하원의원 1명을 빼곤 모두 공개 찬성 쪽에 섰다. 그만큼 엡스타인 음모론은 마가 진영을 결집시키는 핵심 이슈다. 마가를 지탱하는 6개의 기둥이 있는데 미국 우선주의가 중심이고, 나머지가 국경 문제, 반(反)세계화, 표현의 자유, 나라 밖 전쟁 개입 금지, 그리고 ‘우리 국민(we the people)’이다. 마가 진영이 워싱턴 아웃사이더 트럼프를 선택한 건 엡스타인 파일에 나오는 딥스테이트에 맞서 ‘우리 국민’을 보호할 적임자로 봤기 때문이다. ▷클린턴, 오바마 행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래리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은 얼마 전 엡스타인과 연애사를 공유하는 사이임이 드러나 모든 공적 활동을 중단했다. 엡스타인으로부터 미성년자 성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동생 앤드루 왕자도 왕실 작위와 칭호를 포기했다. 미국 국민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또 어떤 이름이 나올지 못지않게 왜 트럼프가 감추고자 했는지 궁금해한다. 죽은 엡스타인이 산 트럼프를 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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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하루에 책 12권 쓰는 ‘괴물 작가’

    다작(多作)하는 작가들이 있다. 프랑스의 발자크는 26년간 125편의 소설과 희곡을 완성했다. 하루 15시간씩 커피를 50잔 마셔가며 썼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76)는 46년간 107편의 소설과 에세이집을 냈다. 달리기와 수영으로 다져진 몸으로 매일 새벽 5시부터 7시간 동안 4000자씩 쓴다.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 유배 시절 19년간 500편의 저작을 남겼다. 연평균 26.3권으로 제자 18명과 협업한 덕분이다. 세계적인 다작의 명수들이 울고 갈 괴물 작가가 나타났다. ▷요즘 출판계에선 1년 새 9000권 넘는 책을 낸 무명의 출판사가 화제다. 하루 평균 20여 권씩 찍어낸 셈인데 ‘작가 회원’에게 ‘AI 툴’을 제공한다는 홍보 문구로 보아 인공지능(AI)을 적극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 작가는 이곳에서 4개월간 137권을 냈다. 철학 예술 공학 경제 입시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이 쓴 날엔 하루 12권도 냈다고 하니 AI가 다 쓴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AI의 등장으로 급변하는 분야 중 하나가 출판이다. 편집, 교열, 디자인을 맡기는 수준을 넘어 목차 구성부터 본문 집필까지 전 과정을 AI로 하는 경우도 많다. 글쓰기 진입 장벽이 낮아지면서 전자책 시장엔 AI ‘유령작가’들 책이 쏟아진다. 한 작가는 AI를 ‘글쓰기 파트너’로 받아들인 후 2년 걸리던 책을 2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했다. AI가 초안을 쓰면 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낸다는 것이다. 이 작가는 ‘챗GPT’를 공저자로 표기하지만, 관련 표기 기준이 없어 양심 없는 저자들이 AI로 써놓고 아닌 척해도 확인할 길은 없다. ▷AI의 기여도를 판별하는 ‘문해력’ 기술도 진화 중이다. 무엇을 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썼느냐를 본다. 구문 패턴과 어휘의 다양성 등 AI가 남긴 ‘문체적 지문’을 분석하거나, 문자 입력 속도가 규칙적이고 수정 없이 입력됐다면 AI가 쓴 것으로 판별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를 39번 고쳐 썼는데, AI라면 한 번에 좌르륵 썼을 것이다. 문자를 입력하는 동안 심박수와 뇌파를 측정하는 기술도 있다. 슬프거나 분노가 느껴지는 대목을 타이핑하면서 생리 신호에 변화가 없다면 AI가 쓴 것으로 본다. 앞으론 집필 과정의 이런 정보를 보관했다가 ‘AI로 썼느냐’는 의심을 받을 때 반박 근거로 사용하게 될지 모르겠다. ▷AI 덕분인지 지난해 발간된 신간 종이책만 6만4300종으로 10년 전보다 42% 늘었다. 하지만 1030 청년들의 독서량은 14년 새 반 토막이 났다. 책보다 재밌는 게 많아진 데다 “끔찍하고 기진맥진한 투쟁”(조지 오웰) 같다는 글쓰기가 하루에 12권을 너끈히 쓸 정도로 가벼워진 탓이다. 출판의 풍요 속 지적 빈곤을 느끼는 AI 시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5-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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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새벽 3시 출근한 다카이치

    성공한 사람들 중엔 ‘새벽형 인간’이 많다. 애플 최고경영자(CEO) 팀 쿡은 새벽 3시 45분이면 일어나 직원들에게 보낼 메일을 준비한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은 새벽 5시에 눈을 떠 1시간 동안 독서하는데 “출근도 전에 내 하루가 성공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새벽에 폭풍 트윗을 날려 참모들 잠을 설치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을 압도할 새벽형 인간이 화제다. ▷얼마 전 일본 집권 자민당 총재로 당선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7일 새벽 3시 4분에 출근해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 답변 준비 회의를 3시간 했다. 다카이치 내각 출범 이후 첫 예산위원회인 만큼 “정성스럽고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으나 전날 밤까지 답변 자료를 완성하지 못해 새벽 회의를 소집했다고 한다. 야당에선 “총리가 3시부터라면 직원들은 1시 반, 2시부터 대기해야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윗사람이 일찍 출근하면 아랫사람 여럿이 힘들어진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새벽 1시에도 회의를 소집해 참모들이 하루 24시간 대기 상태였다. 수면 장애를 겪는 북한 김정은은 ‘새벽 시찰’이 잦은데 그때마다 사진 속엔 보고하고 지시받는 간부들이 한가득이다. 민주적인 조직에서 리더의 새벽 출근이 드문 이유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오전 6시 30분 출근해 안보 브리핑을 받아 원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다카이치 총리도 새벽 출근에 대해 “도와준 비서관, 경호원, 운전사들께 폐를 끼쳤다”며 사과했다. ▷새벽형 인간은 적게 자는 편이다. 나폴레옹은 “남자는 6시간, 여자는 7시간, 바보는 8시간 잔다”고 했는데 남자의 전유물이던 지위에 오른 여성들도 적게 잔다. 다카이치 총리의 롤모델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재임 시절 3∼4시간 자고 새벽 5시면 일어나 농부용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출근 준비를 했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16년의 재임 기간에 많이 자도 하루 5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고도 버티는 비결에 대해선 “(밤새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기질이 있다”고 했다. ▷적게 자야 성공하는 건 아니다. 빌 게이츠는 7시간, 제프 베이조스는 7∼8시간, 워런 버핏은 8시간 이상 잔다. 미국 국립수면재단은 “세계 인구의 5%는 4시간 미만을 자고도 버티지만 5%는 10∼12시간을 자야 한다. 규칙적으로 잘 자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도 같은 값이면 열심인 게 좋아 보인다고 여기는 걸까. 백악관 대변인은 3∼4시간만 자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잠도 자지 않고 일하는 근면한 지도자”라고 홍보했다. 다카이치 총리가 취임 일성으로 “워라밸이란 말을 버리겠다.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하고 일해 나갈 것”이라고 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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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영]맘다니 쇼크

    뉴욕은 무슬림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도시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사는 곳인 데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이슬람 공포증까지 더해졌다. 역대 뉴욕시장 110명 가운데 흑인 시장은 2명 있지만 무슬림 시장은 없었다. 민주당 텃밭인 뉴욕시장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조란 맘다니(34)의 당선이 이변인 이유도 그가 미국 시민권을 얻은 지 7년밖에 안 되는 무슬림이어서다. 더구나 뉴욕은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인데 맘다니는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다. ▷우간다의 인도계 가정에서 태어나 7세에 미국으로 이민 온 맘다니는 뉴욕주 하원의원을 지낸 정치 신예다. 돈도 조직도 없는 그가 뉴욕 주지사를 지낸 무소속의 거물 정치인 앤드루 쿠오모(68)를 꺾은 데는 살인적인 생활비 해결을 일관되게 주장한 것이 주효했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걷어 공공주택 임대료 동결, 무료 버스, 무상 보육을 실현하겠다는 포퓰리즘 공약이 심각한 빈부 격차에 분노하는 표심을 사로잡았다. ▷맘다니는 1892년 이래 최연소 시장 당선인이다. 진보 언론들도 그의 경륜 부족을 문제 삼았지만 그는 ‘고인 물을 갈아보자(drain the swamp)’며 자신이 좌우 기득권을 청산할 적임자라고 반격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딥스테이트(deep state·기득권 세력)’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과 비슷한 전략이다. 뉴욕의 인구 구성이 라틴계와 남아시아계 이민자들 위주로 변화하는 추세도 맘다니에게 유리했다. ▷1970년대 석유 파동으로 재정 위기를 겪은 이후 월가의 암묵적 지지 없이 당선된 뉴욕시장은 없다고 한다. 그가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자 월가가 수천만 달러를 들여 맘다니 저지 작전을 짜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월가와 각을 세우며 인지도를 높인 맘다니는 민주당 후보가 된 후엔 래리 핑크 블랙록 최고경영자를 비롯해 월가 거물들과 물밑 접촉을 하며 ‘부자세는 대안이 있으면 철회 가능하다’고 설득했다. 그가 컬럼비아대 교수 아버지에 유명 영화감독 어머니를 둔 ‘캐비아 좌파’인 점도 부자들과의 소통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맘다니의 승리는 반(反)이민, 친(親)이스라엘인 트럼프의 패배다. 트럼프는 ‘공화당 찍으면 맘다니 된다’며 무소속 쿠오모 지지를 호소했다. 반면 극우 세력에 밀리던 유럽 진보 정당들은 맘다니 승리에 고무된 표정이다. 하지만 맘다니의 급진적 좌파 공약은 민주당조차 거리 두기를 할 정도다. 뉴욕시 세수 기반이 붕괴되고, 임대료 동결은 도심 인프라 투자 동결로 이어져 슬럼화가 진행될 것이라는 우려다. 그가 인구 850만에 연간 예산이 1160억 달러(약 168조 원)인 뉴욕 시정을 제대로 이끌어갈지, 어두운 트럼프 시대를 밝힐 빛이 될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5-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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