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윤석열 전 대통령 곁에 누가 남아 있을까. 계엄의 ‘설계자’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님은 나라와 국민 생각만 하는 미련하신 분”이라 두둔했던 인물인데, ‘계엄 포고령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윤과 엇갈리는 진술을 했다. 계엄을 지휘한 사령관 3인방도 혐의를 인정하고 돌아섰다. ‘윤의 복심’인 대통령실 부속실장과 ‘호위무사’ 경호처 차장은 진술을 번복하며 윤의 구속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가 재구속되던 10일 새벽 법원 앞 지지자 규모는 확 줄었고, 올 1월 1차 체포영장 집행 때 관저 앞으로 몰려갔던 국민의힘 의원 45명 중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지금 변호인을 구할 돈도 없고 아무도 나에게 오려 하지 않는다.” 윤 전 대통령이 영장실질심사에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진술을 강요하거나 회유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아 증거인멸 우려가 없으니 구속하지 말아 달란 뜻이다. 그는 “국무위원들조차 본인 살길 찾아 떠나려고 국회에서 없는 이야기 한다”고 했다. 계엄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장관들은 ‘계엄에 반대했다’고 말해왔다. 내란특검이 출범한 후로는 회의 불참자들까지 줄줄이 소환당하고 있는데 이들이 어떤 ‘없는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통령 시절 장관들의 행태를 떠올리면 배신감이 클 것이다. 툭하면 격노하는 성정 탓이었을까. 그의 곁에는 아부꾼이 많았다. 50년 넘게 공직 생활을 해온 총리는 언론에 “대인이다. 제일 개혁적인 대통령”이라고 극찬했다. 사회부총리는 “대통령은 입시 수사를 여러 번 해서 내가 많이 배우는 상황”이라 했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국무회의를 해보면 인공지능(AI)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뿐이라며 “단연 발군”이라 추켜세웠다. ▷대선 후보 시절만 해도 “아부하는 공무원은 솎아내겠다”고 경고했다. 당선 직후엔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참모에게 “아부하지 말라”고 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하지만 용산에 들어간 후론 인사 때마다 ‘검찰 라인’ ‘김건희 라인’이라는 구설이 따라다녔다. 친분이 없으면 충성심이라도 보여야 했다. 부산 엑스포 유치 업무를 맡았던 외교부 2차관은 “대통령 PT가 국면 전환의 분수령이 됐다”고 했는데 유치 실패 후 오히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격노에 겁먹고 아부에 취한 끝이 참담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 후 “선거 때마다 애타게 나를 찾던 이들도 등 돌리더라”고 회고록에 썼다. 무사히 임기를 마치는 대통령도 권좌에서 내려오는 순간 권력 무상을 느끼게 된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친구를 원한다면 개를 키우라”고 했다. 다 떠나고 키우던 개만 남더란다. 윤 전 대통령 곁에는 그 많던 반려견조차 없다. “혼밥 않겠다”며 임기를 시작했지만 10㎡(3평) 독방에 갇혀 버렸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혁신위원장직을 수락한 지 닷새 만에 사퇴하고 당 대표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대선 패배에 책임이 있는 ‘2인’의 탈당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너무 빠른 철수의 속내가 의심스럽지만 인적 쇄신 요구는 정당했다고 본다. 안 의원은 혁신을 거부하는 당내 기득권 세력을 ‘수술 거부하는 중환자’에 비유했는데 필자는 지하철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아 민폐를 끼치는 ‘쩍벌남’이 떠오른다. 쩍벌남 비유가 와닿지 않는다면 당 개혁안을 놓고 친윤과 비윤이 격돌했던 지난달 9일 국힘 의원총회 사진을 찾아보라. 회의장 앞줄에 김용태 당시 비상대책위원장과 권성동 당시 원내대표가 서로를 외면한 채 앉아 있는데, 김 위원장이 양손과 다리를 가지런히 모은 모습과 대조적으로 권 원내대표는 다리를 쩍 벌리고 있다. 당 관계자는 최근 라디오 시사프로에 나와 당내 주류들이 의총장 앞줄을 선호하는 이유는 쩍벌하기 좋아서라고 했다. 외부 시선을 의식하는 비윤과 무시하는 친윤의 차이를 이보다 생생하게 보여주는 이미지도 없을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부터 유명한 쩍벌남이다. 대선 주자 시절 온라인에서는 ‘아랫도리만 보고 누군지 맞히기’ 게임까지 벌어졌다. “쩍벌남은 100% 안 좋은 이미지”라는 전문가의 경고가 있었지만 그 후로도 고쳐 앉지 않았다. “쩍벌과 쇄신이 무슨 상관이냐” “과도한 일반화다” 반박해도 소용없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쩍벌은 내가 편하면 됐지 남을 배려할 필요가 있느냐는 오만한 멘털리티의 문제다. 사람들이 계엄으로 피해를 입든 말든, 계엄 정당으로 낙인찍든 말든 내 지역구만 지키면 그만이라 생각한다면 그게 남자든 여자든 쩍벌남이다. 윤 전 대통령이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후로도 쩍벌남들은 꿈쩍도 않는다. 쩍벌남이 앉았던 원내대표 자리에 또 다른 쩍벌남이 앉았고 당 3역도, 비상대책위 지도부의 다수도 윤을 옹호했던 ‘방탄의원단’ 혹은 ‘탄반모’ 지지 인사들이다. 다리 좀 모아 달라 지적하면 되레 성을 내는 게 쩍벌남의 특징이다. 인적 쇄신을 요구한 안 의원에게 “비열한 행태” “혁신의 대상”이라고 했다. 김 전 비대위원장도 5대 개혁안을 꺼냈다가 “사퇴하라”는 소릴 들었다. 혁신하지 않으면 절멸할 위기인데 이런 해당 행위도 없다. 쩍벌남들이 나라에 끼치는 민폐는 더 걱정이다. 이재명 정부의 장관 후보자들 중엔 투기, 논문 표절, 이해충돌 의혹을 받는 이가 수두룩하지만 여당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전원 통과’를 자신한다. “대통령이 전과 4범이라 인사 기준 무뎌졌나” 따지면 “법정형이 사형이나 무기징역형밖에 없는 내란죄 피의자 싸고돌던 당이 할 소린가”라고 되치기당한다. 전한길 강사에게 “계몽령 가르쳐줘 감사하다”던 의원의 ‘배추 총리’ 임명 철회 농성은 촌극 같았다. 여당은 기업에 무거운 족쇄를 채우는 상법 개정을 시작으로 경제 사회 방송 각 분야에 악영향을 줄 입법 독주에 시동을 걸었다. 76년간 존속해 온 검찰청을 추석 전에 해체한다 하고, 이 대통령과 측근들이 기소된 사건을 ‘조작 기소’라며 이에 대응하는 특별팀도 꾸렸다. 쓴소리꾼이라는 법무장관 후보자까지 이 대통령 사건의 공소 취소를 주장하고 있다. 하나같이 함부로 거론할 사안들이 아님에도 거침이 없다. 제1야당은 내란당으로 권위를 잃었고, 3개 특검이 윤 전 대통령 부부의 35개 혐의를 탈탈 털고 있다. 김 여사, 샤넬백, 주가조작, 통일교, 북풍 공작 의혹에 건진법사까지 넷플릭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한 수사 내용이 줄줄이 공개돼 눈과 귀를 잡을 텐데 누가 재미없는 방송3법 검찰4법에 관심을 가지겠나. 보수의 뿌리와 기둥으로 이승만 박정희를 꼽지만 구한말 문명 개화와 부국 강병을 도모하고, 해방 공간에 농지개혁이란 진보적 과제를 수행하고 극단을 배격하며 다원적 정치 체제를 구축한 막후 주역은 온건하고 점진적인 상층 지주 보수 세력이었다(이승렬 ‘근대 시민의 형성과 대한민국’). 희생과 책임의 신사들이 뿌리내린 보수의 나무에서 계엄을 두둔하고 부정선거에 현혹되는 극단주의의 가지가 뻗어 나왔으니 ‘보수의 심장’에서도 “느그가 보수가”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국힘이 자력으로 혁신할 기회는 다음 달 전당대회만 남은 듯하다. 당 대표 출마를 저울질하는 후보들은 “이재명과 싸우겠다” “야성(野性)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야성보다 염치가 필요하고 이재명이 아니라 당내 쩍벌남들과 싸우는 게 먼저다. 민폐를 끼친 데 대한 사과와 자리 양보는커녕 바로 앉을 생각도 않는 사람들은 일으켜 세우고, 생각과 몸가짐이 반듯한 호감형 인물들을 앉혀야 한다. 이제 쩍벌남은 지하철에서도 보기 어렵다. 우리 민도(民度)가 쩍벌남을 도저히 참아내지 못하는 수준이 됐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한국 KAIST, 미국 컬럼비아대, 중국 베이징대, 일본 와세다대 등 14개 유명 대학 연구자들의 논문 17편에서 인공지능(AI)을 이용한 평가 조작 시도가 발견됐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 논문 속에 “좋은 말만 쓰라” “부정적 내용은 쓰지 말라” 같은 영어 명령문을 슬쩍 써넣었는데, 흰색 바탕에 흰색 글씨거나 아주 작은 글씨로 되어 있었다. 사람 눈엔 안 보이고 AI만 인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논문 평가에 AI가 이용됨을 전제로 한 연구 부정 행위다. 논문 작성과 동료 평가로 이뤄진 연구 생태계 전반에 AI가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실감케 한다. ▷논문 작성 단계에선 AI가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대개는 관련 문헌을 찾고 데이터를 분석할 때 조교처럼 활용하는 정도인데 1년 전부터는 주제어와 개요만 제시하면 논문을 통째로 써주는 서비스도 나왔다. 연구자가 방학 내내 매달려도 쓸까 말까 한 30쪽짜리 논문 한 편을 3분이면 써낸다. 일본 AI 스타트업 사카나는 올 3월 AI가 쓴 논문이 학회 워크숍의 동료 평가를 처음으로 통과했다고 발표했다. ▷연구자의 ‘밥줄’이 걸려 있는 논문 심사를 AI에 맡기는 건 더욱 민감한 문제이나 2, 3시간 걸릴 일을 AI는 몇 분 만에 해주니 알음알음 쓰는 추세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는 올 3월 연구자 10명 중 2명꼴로 AI를 논문 심사에 이용한 적이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전했다. 동료 평가는 해당 분야 전문가 2, 3명이 참여해 학술지 게재 여부를 결정하는데, 사람은 평가자들 간 편차가 크지만 AI는 그렇지 않아 심사를 받는 쪽에서도 만족도가 높다는 연구도 있다. ▷문장을 다듬는 수준을 넘어선 AI 논문 심사에 대해선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연구 논문엔 민감한 실험 자료가 포함되는 경우가 있는데 AI 도움을 받는 순간 심사가 끝나기도 전에 정보가 유출될 수 있다. 동료 평가에선 평가자와 논문 간 이해 충돌 문제를 걸러낼 수 있지만 AI는 그럴 방법이 없다. 기존 데이터를 학습해 심사하는 AI로서는 전혀 새로운 연구의 가치를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네이처는 동료 평가 시 AI 사용을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미국 최대 연구 지원 기관인 국립보건원과 국립과학재단은 금지하고 있다. ▷이번 AI 평가 조작 보도에 언급된 KAIST 소속 연구자는 “AI에 긍정적인 동료 평가를 유도한 것은 부적절했다”며 논문 게재를 철회하기로 했다. KAIST는 이번 사건을 조사하는 한편으로 AI 활용을 위한 가이드라인 제정에 나섰다. 조만간 AI가 쓰고 AI가 심사한 논문까지 나올 것이다. 그 논문에 치명적 오류가 있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기술 혁신이 일어날수록 연구 윤리에 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KBS가 수신료 인상을 추진한다. 박장범 KBS 사장은 어제 열린 KBS 시청자위원회 전국대회에서 1981년 2500원으로 인상된 후 45년째 동결된 수신료 인상 재추진 의사를 밝혔다. KBS 내부에서는 수신료 인상 슬로건으로 ‘3·4·5’를 내걸었다고 한다. ‘3000원으로 44년 만에, 500원 인상한다’는 뜻이다. KBS의 수신료 인상 요구는 2007년(4000원), 2010년(3500원), 2013년(4000원), 2021년(3840원)에 이어 다섯 번째다. ▷수신료 인상 추진 배경엔 고질적인 경영 악화가 있다. KBS의 지난해 사업 손익 적자는 881억 원으로, 2008년 금융위기 당시 기록(935억 원)을 제외하면 역대 최대 규모다. 이에 전체 수입의 49%를 차지하는 수신료를 올려 경영난을 덜어보겠다는 계산이다. 지난해 KBS 수신료 수입은 6516억 원. 수신료가 3000원으로 20% 인상되면 수신료로만 한 해 1300억 원 이상의 추가 수입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자구 노력 없이 준조세나 다름없는 수신료를 더 걷어 경영난을 해결하려는 계획은 여론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 박 사장은 올 3월 “현재 5248명인 KBS 정원을 20% 감축하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시행 계획은 밝히지 않았다. 역대 사장들도 수신료 인상을 요구하면서 대대적인 감원을 공언했지만 KBS의 인건비 비중은 32%로 MBC(23%)나 SBS(16%)보다 훨씬 높다(2023년 기준). 수신료 인상이 국회 최종 승인 단계에서 번번이 무산됐던 이유다. ▷더구나 올 4월 여당 주도로 수신료를 예전처럼 전기요금에 합쳐 내도록 방송법이 개정돼 KBS로서는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된 상태다. 지난 정부가 공영방송 실패에 수신료 납부 거부로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며 분리 징수제를 시행했으나 다시 통합징수제로 돌아간 것. KBS로서는 이것만도 큰 혜택인데 불황 국면에 수신료 인상까지 꺼내자 사내에서도 “여론 수렴 않고 성급하다”거나 ‘파우치 사장’의 흑역사를 언급하며 “편파 방송에 대한 반성이 먼저”라는 비판이 나온다. ▷국내에선 20년 가까이 수신료 인상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해외에선 공영방송 무용론이 제기된 지 오래다. 공영방송 의존도가 높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유료 방송에 넷플릭스, 유튜브까지 수많은 채널이 존재한다. 1만 원 넘는 넷플릭스 구독료는 기꺼이 내도 공영방송 수신료 지불의사액은 2006년 3775원에서 가장 최근 조사인 2019년엔 1667.45원까지 쪼그라들었다. 일본 NHK가 수신료를 내리고 영국 BBC가 2년 후 수신료 폐지 여부를 결정하기로 한 이유다. 지금은 수신료 인상이 아니라 제구실 못 하는 다수의 공영방송을 언제까지 공적 재원으로 유지해야 하나 검토할 때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이달 말 전국 의대의 유급과 제적 처리 행정 시한을 앞두고 동료와 후배들의 막판 복귀를 막으려는 강경파 의대생들의 압박 행위가 도를 넘어섰다. “수업 듣고 시험 치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협박 문자를 보내고, 학교 앞에서 스크럼을 짜 학생과 교직원들을 못 들어가게 막는다는 것이다. 급기야 후배들이 학교 측에 수업 복귀를 막는 선배의 제적을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차의과대 의학전문대학원 2학년 학생 14명은 “수업 거부로 제적 예정 통보를 받은 3학년 선배의 방해와 협박으로 수업과 시험 참여가 모두 어려운 상황”이라며 “학교가 학칙대로 선배들을 제적하지 않으면 학교와 선배를 상대로 소송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문제의 3학년 학생들은 2학년 후배들을 불러내 대화 내용을 녹음하지 못하게 휴대전화를 빼앗은 뒤 “블랙리스트” 운운하며 수업 거부를 강요했다고 한다. 모든 학생이 수업을 거부해야 자신들도 제적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교육부에는 수업 복귀 방해를 막아 달라는 의대생과 학부모들의 호소가 잇따르고 있다. 한 국립대 의대는 강경파 학생들이 간담회를 열어 수업 거부를 압박했다는 민원이 제기됐고, 을지대 의대는 학생들에게 수업 참여 여부를 공개적으로 밝히게 함으로써 수업 거부를 겁박했다는 민원이 접수됐다. 을지대는 주동자 2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수업 거부를 강요하거나 복귀 의대생 신상을 유포해 교육부가 의대생 수사를 의뢰한 사건이 18건이나 된다. ▷선배와 동료의 수업 거부 강요는 의대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까지 10년 넘게 도제식 교육을 받으며 동고동락하고 졸업 후에도 평판이 중요한 집단 내에서 ‘배신자’로 찍히는 건 제적이나 면허 정지보다 무서운 일이라고 한다. 지난달엔 집단행동을 거부한 의사와 의대생들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유포한 사직 전공의가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부당한 정책에 반대한다는 명분이라지만 비동조자에 대한 조리돌림은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부끄러운 일일 뿐이다. ▷정부가 의대 증원을 철회한 후로도 집단적 수업 거부로 의대생 40%가 유급이나 제적 예정 통보를 받았고, 나머지 60% 중 상당수도 한 과목만 수강하는 등 수업 파행이 계속되고 있다. 내년에 3개 학년이 동시에 수업을 듣는 ‘트리플링’을 완화하려면 이번 달 안에라도 복귀해 다음 달부터 계절학기를 들어야 한다. 그런데도 후배가 선배 제적을 요구할 지경이 되도록 학교와 정부는 무얼 한 건가. 정부는 학생들이 안심하고 복귀할 수 있게 현장을 챙기고, 의료계도 후배들의 수업 복귀를 독려하는 한편 이탈자를 매장해 버리는 비민주적인 집단문화를 돌아보기 바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보수는 유능하고, 진보는 도덕적’이라는 통념도 옛말이다. 보수가 무능함을 보여주고 진보가 도덕성에서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미국에선 공화당은 멍청한 당(stupid party), 민주당은 사악한 당(evil party)이라고 한다. 공화당은 지적 역량이 떨어지고, 민주당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뜻인데 지금 한국 여당과 제1야당에 딱 들어맞는 이분법 같다. 여당의 사악함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윤석열 전 대통령의 구속을 취소한 판사를 술잔도 안 나오는 사진 한 장으로 ‘룸살롱 접대’ 의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린 사건을 들고 싶다. 접대를 받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살계경후(殺鷄儆猴·닭을 죽여 원숭이를 훈계하다)란 말이 있듯 많은 판사가 ‘여당에 협조하지 않으면 X망신 당한다’는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참으로 사악한 당이다. 국민의힘의 멍청함을 보여주는 사례 역시 많은데 6·3 대선에서는 이보다 더 멍청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듯하다. 윤 전 대통령의 파면으로 치러지는 선거라는 특수성, 대선은 중원 싸움이라는 경험칙을 더하면 윤과 멀고 중도에 가까운 후보를 내세우는 건 승리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윤과 가장 가깝고 중도에서 가장 먼 후보를 뽑았다. 후보 바꿔치기하려고 벌인 소동은 그 불의함과 무능함이 실패 확률 제로라는 친위 쿠데타에도 실패한 옛 1호 당원의 그것과 닮았다. 이길 생각으로 그랬다면 참으로 멍청한 당이다.‘지혜로운 사람은 실패에서 배우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실패하면 다른 사람 탓을 한다’는 말이 있는데 국힘은 후자 쪽이다. 패장이 된 대선 후보가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 신념이 없었다”며 당 탓을 하고, 친윤계 의원들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라”며 개혁하자는 젊은 비대위원장을 몰아세우고 있다. 윤의 폭정과 계엄을 싸고돌다 나라를 진창에 빠뜨리고 3년 만에 정권을 내준 ‘폐족’ 친윤이 무슨 낯으로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나. 우매한 탓에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고 배우지 못해 우매함이 더해지니 하는 일마다 실패의 연속이다. 10년도 안 돼 대통령 2명이 탄핵을 당해 쫓겨났고 2016년 20대(새누리당), 2020년 21대(미래통합당), 2024년 22대(국민의힘) 총선에서 내리 참패했다. 40%를 넘긴 이번 대선 득표율을 보고 ‘졌잘싸’ 한다면 오산이다. 이번이 총선이었다면 국힘 의석은 81석으로 개헌 저지선도 뚫렸다. 여당의 ‘부울경’ 지지율이 40% 안팎까지 치고 올라왔고, 4050세대는 여당의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굳어졌다. 선거 결과를 당 색깔로 보여주는 지도는 갈수록 파랗게 변하면서 빨간 지역은 소멸의 길로 빠져드는 추세다.‘보수는 멍청한 당’이란 표현의 원조는 영국 보수당이다. 19세기 지성 존 스튜어트 밀이 하원의원 시절 한 말인데, 영국 보수당은 그 당시 멍청했는지 몰라도 서구에서 가장 성공한 당으로 평가받는다. ‘영국은 가끔 노동당에 투표하는 나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당 이름은 1830년대부터 줄곧 ‘보수당’이지만 지도부와 정책은 시대 변화에 따라 부단하게 쇄신해 온 덕분이다.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노조 활동을 보장하고, 10세 이하 어린이 고용을 금지하는 입법을 주도한 정당이 보수당이다. 사립학교를 나온 백작, 후작, 남작들 차지였던 당 지도부도 공립고교 중퇴자, 잡화점 딸, 유대인, 힌두교도로 문호를 꾸준히 넓혀 왔다. 모범 사례를 찾으러 먼 곳까지 갈 필요도 없다. 국힘이 잠깐이나마 호평받던 시절을 돌아보라. 2012년 총선에서 ‘경제 민주화’로 담론을 주도해 제1당이 된 후 다음 대선에서 승리했고, 2021년엔 헌정사상 최초로 ‘0선’ 30대 당 대표를 뽑아 이듬해 대선에서 이겼다. 반대로 혁신한다면서 요란하게 당 이름만 바꾸고 알맹이는 ‘늙은 건물주와 퇴물 판검사들’로 채웠을 때, 의제를 주도하기보다 ‘운동권 청산’ ‘이재명은 아니다’라며 끌려다닐 땐 졌다. 이번 대선으로 입법과 행정 권력에 사법부 물갈이 권한까지 모두 쥔 전례 없는 절대 권력이 탄생했다. 선하고 지혜로운 사람도 감당하기 어려운 힘을 ‘사악한 당’이 갖고 있다. 그런 권력을 견제해야 할 국힘은 당내 계파 싸움엔 의욕적이면서도 여당에 대해선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무력감을 호소한다. 여전히 107석을 가진 제1야당, 없는 나라 곳간 털어 지원해준 선거보조금으로 재산을 1200억 원으로 불린 부자당이 할 소린가. 이번에도 문패만 바꿔 달고 하던 대로 하며 상대가 자빠지는 요행만 바란다면 ‘멍청한 당’이란 욕도 아까운 당이 된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하네’ 싶을 만큼 쇄신해야 살길이 열린다. 개혁하지 않으면 개혁당하는 수밖에 없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프랑스 대문호이자 언론인 에밀 졸라는 1898년 ‘여명’이란 뜻의 일간 신문 ‘로로르’ 1면에 프랑스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을 글을 기고했다. 펠릭스 포르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제목은 ‘나는 고발한다’. 다들 쉬쉬하던 ‘드레퓌스 간첩 사건’이 조작됐고, 드레퓌스는 무죄이며, 조작에 가담한 이들을 고발하니, 나를 잡아가서 신문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졸라는 이 글로 군법회의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이 사건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스캔들이 됐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 육군 대위가 군사 기밀을 독일에 팔아 넘긴 혐의로 체포되면서 시작됐다. 독불전쟁에서 패배한 후 희생양을 찾던 군부가 마침 전쟁에서 빼앗긴 독일 접경 지역 알자스 출신의 유대인을 반유대주의 분위기에 편승해 증거도 없이 스파이로 몰고 간 것.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마의 섬’에 유배됐다. ‘나는 고발한다’는 이후 진범이 잡혔는데도 군부가 진실 은폐를 위해 진범을 찾아낸 조르주 피카르 중령을 좌천시키고 진범을 풀어주자 게재됐다. ▷거대한 국가 권력에 맞서 개인의 무고함을 주장하기란 쉽지 않은 일. 더욱이 드레퓌스 사건 당시 프랑스는 패전 후 민족주의와 유대인 차별 정서로 들끓었다. 프랑스인의 절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는데 로마 가톨릭교회도 드레퓌스 재심에 반대했다. 드레퓌스 무죄를 주장했던 이는 소수의 지성인과 양심 있는 군인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을 찾아낸 피카르 중령은 “대체 무엇 때문에 그 유대인을 위해 애를 쓰느냐”는 상사의 질책에 답했다. “드레퓌스는 죄가 없으니까요.” ▷결국 세계 언론까지 주목하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게 됐다. 드레퓌스는 1906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복권돼 중령으로 제대했고,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최고 영예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군부를 개혁하고, 공화정을 안착시켰으며, 프랑스식 정교분리인 ‘라이시테’ 원칙을 수립했다. 사족을 달면 군부 편에서 드레퓌스 재심을 거부했던 대통령은 1899년 엘리제궁에서 유부녀와 밀애 중 숨졌다. 프랑스에선 드레퓌스 얘기가 나올 때마다 졸라와 포르 대통령 이름이 거론된다. ▷프랑스 하원이 90년 전 작고한 드레퓌스 중령을 준장 계급으로 추서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하원은 “반유대주의는 과거의 일이 아니다. 공화국은 모든 종류의 차별에 맞서 경계심을 유지하고 단호함을 보여야 한다”고 법안 제안 이유를 밝혔다. 세계 곳곳에서 차별과 증오가 마녀사냥에 나서고 불의한 권력이 개인의 인권을 유린할 때마다 131년 전 드레퓌스 사건과 진실의 편에 섰던 ‘나는 고발한다’가 행동하는 지식인의 다짐으로 소환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세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나라 북한. 그런 북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동안 공영방송들이 여러 북한 관련 프로그램을 내보냈지만 ‘북한 프로는 재미없다’는 고정관념만 심어줬을 뿐 화제가 된 적은 없다. 그런 점에서 2011년 12월 시작한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의 성공은 이례적이다. 탈북민이 나오는 예능의 원조인 이만갑은 재미와 교양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덕에 다음 달 1일 방송 700회를 맞는다. 종합편성채널 최장수 예능이다. ▷탈북민들이 출연하는 버라이어티쇼 이만갑은 시작부터 국내외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목숨 건 탈북 과정을 들으며 울고, 노래와 춤 북한 요리 솜씨 자랑에 웃고, 좌충우돌 남한 정착기엔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일본 NHK와 영국 가디언 등 외신은 녹화 현장을 취재하며 “재기발랄한 젊은 여성들이 용기 내어 자기 이야기를 전하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보도했다. 지금까지 출연한 탈북민은 1000여 명. 방송이 뜨자 출연자들도 테드 강연과 국제 인권 운동을 하며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만갑 출연자들은 체제 선전에 가려져 있던 북한의 실상을 생생히 전달한다. 약이 귀한 북한에선 감기에 걸리거나 작은 부스럼만 생겨도 ‘빙두’를 찾을 정도로 마약이 널리 퍼져 있다거나, 북한엔 머리 좋은 ‘자연 수재’와 부모 잘 만난 ‘인공 수재’가 있는데 인공 수재들은 입주 과외까지 받는다거나, ‘북한에서 검사 3년 하면 집이 생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법 일꾼’ 인기가 좋다거나, ‘성도파’ 같은 반정부 청년 단체가 있다는 증언은 다른 곳에선 듣기 힘든 얘기다. 공개 재판 장면 같은 희귀 영상을 입수해 공개할 때도 있다. ▷북한 사람들도 이만갑에서 정보를 얻는다고 한다. 통제 사회인 북한에선 다른 지역 소식은 모르는데 몰래 입수한 이만갑 영상을 보며 내부 실상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만갑을 보고 탈북을 결심하거나, 탈북 전 한국 정착 ‘예습’을 위해 이만갑을 챙겨 봤다는 이들도 있다.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다 탈북해 연 매출 100억 원대 식품회사 사장이 되고, 치과 의사로 펀드매니저로 성공한 출연자들을 보며 탈북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됐다는 이들도 있다. ▷남북으로 떨어져 산 세월이 너무 길어 얘깃거리가 쌓여서일까. 제작진은 처음엔 소재 고갈로 100회까지 갈 줄 몰랐다고 했는데 700회 방송을 앞두고 있다. 요즘은 엘리트 탈북민과 북한 전문가들이 출연해 북한의 역사 정치 외교 이슈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북한 정보 쇼로 발전했다. 이만갑의 출연자들과 제작진은 남과 북을 자유롭게 오가는 세상이 돼 프로 제목이 ‘이제 만나러 왔어요’로 바뀌는 게 꿈이다. 그런 날이 머지않아 오게 되길 바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올해는 대표적인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한 지 10년이 되는 해다. 한국 드라마를 최대 30개 언어로 서비스하며 한류 확산의 일등 공신으로 평가받던 넷플릭스지만 요즘은 국내 방송 생태계를 초토화시킬 ‘황소개구리’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넷플릭스의 등장 이후 국내 방송과 광고 시장은 OTT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국내 OTT 이용률이 해마다 증가하는 동안 방송 채널 시청 시간은 2020년 161분에서 2023년 121분으로 3년 새 25% 감소했다. 국내 방송 프로그램 제작도 위축되고 있다. 글로벌 OTT가 제작하는 한국 드라마 제작 편수는 2019년 3편에서 2023년 22편으로 7배 넘게 급증한 반면 국내 방송사 드라마 제작 편수는 109편에서 77편으로 줄어들었다. 전체 광고에서 방송광고가 차지하는 비중도 3년 연속 하락해 17.6%로 쪼그라들었다. ▷해외 OTT에 날개를 달아준 건 방송과 통신을 구분하는 시대착오적인 비대칭 규제다. 시청자 입장에선 OTT든 방송이든 차이가 없지만 법적으로 OTT는 전기통신사업법상 부가통신사업자로 분류돼 사실상 ‘규제 프리존’에 놓여 있는 반면 방송사는 방송법에 따라 소유와 겸영부터 편성, 심의까지 깨알 같은 규제의 감시를 받는다. 광고 규제를 예로 들면 모유 수유를 장려한다는 명분으로 조제분유 광고까지 금지하는 등 관련 조항이 140가지가 넘는다. OTT는 표현의 제약 없이 참신한 시도를 하는 동안 방송사들은 콘텐츠에 투자할 역량을 규제 리스크 관리에 쏟아붓고 있는 실정이다. ▷해외 OTT는 방송통신발전기금 납부 의무도 없다. 2023년 국내 방송 사업자들은 6092억 원의 발전기금을 냈지만 넷플릭스는 국내 매출 8233억 원을 기록하고도 발전기금 납부 대상에서 제외됐다. 국내 방송사에만 불리한 역차별일뿐더러 글로벌 OTT에 수익의 5∼20%를 기금으로 부과해 자국 콘텐츠 제작에 지원하는 해외 주요국들의 추세와도 맞지 않는다. ▷한국언론학회 주최로 최근 열린 세미나에서는 “글로벌 미디어 사업자에게 요구하지 못하는 규제를 국내 사업자에게만 요구하는 건 부당한 시합을 하는 것” “시장 현실에 부합하도록 규제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방송과 통신의 경계를 허무는 인터넷TV(IPTV)가 등장할 때부터 비대칭 규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방송통신위원회까지 만들고도 방송 따로 통신 따로인 규제는 그대로 방치하면서 ‘넷플릭스 천하’로 가는 길을 열었다. 무역 수지 불균형 해소에 기여해온 국내 방송 산업이 고사되기 전에 OTT는 되고 방송은 안 되는 불합리한 규제부터 바로잡아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기어이 사법부를 손볼 모양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대법원이 선거를 앞두고 이례적인 속도로 이재명 대선 후보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자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희대의 난’을 일으킨 책임을 묻겠다며 자진 사퇴와 위법 소지가 다분한 청문회 출석을 요구했고, 자진 사퇴도 청문회 출석도 거부하자 명확한 범죄 혐의도 없이 ‘조희대 특검법’을 발의했다. 이 후보 사건에 유죄 의견을 낸 대법관 10명을 탄핵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대법원장 손보기는 민주주의의 토대인 삼권분립을 위태롭게 하는 초유의 시도로 독재 국가에서나 일어나는 만행이다. 필리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집권 시절에 대법원장이 정부의 즉결 처형도 허용하는 범죄자 소탕전과 계엄 선포를 비판하다 탄핵당한 적이 있다. 두테르테는 그 대법원장이 지적했던 반인도적 살상 범죄 혐의로 얼마 전 체포돼 국제형사재판소 재판을 받는 신세가 됐다. 철권 통치자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사법부 때리기를 집권 가능성이 높은 제1당이 하고 있으니 이런 나라 망신도 없다. 민주당은 일명 ‘이재명 재판 정지법’ ‘4심제 허용법’과 함께 대법관 수를 현행 14명에서 30명, 100명으로 늘리는 대법원 재구성 법안도 내놓았다. 민주당은 ‘사법개혁’이라 하지만 정치학 용어로 ‘심판 매수’라 부르는 ‘사법부에 제 사람 심기’ 꼼수다. 근대 사법 체계의 핵심이 통치 권력과 사법 권력의 분리다. 민주당 법안이 통과되면 통치 권력이 입맛대로 사법부를 구성해 두 권력 간 분리가 안 되는 ‘원님 재판’ 시절로 퇴행할 우려가 크다. 경제는 인공지능(AI)으로 가자면서 사법 체계는 왜 조선시대로 돌아가자 하나. 국내 공론장에서 수도 없이 인용된 미국 하버드대 교수 2명의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는 대법관 수 늘려 어용 판사로 채우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심판 매수’ 사례가 줄줄이 나온다. 베네수엘라가 대표적이다. 차베스는 ‘사법개혁’이라며 모든 국가 기관 해산권을 요구했고 대법원은 다수결로 이를 받아줬다. 차베스는 대법원을 해산하고 대법관 수를 20명에서 32명으로 늘려 ‘혁명적’ 측근들을 앉히고, 대법원장은 “법원은 암살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는 말을 남기고 사퇴했다. 암살이든 자살이든 사법부가 죽는 건 마찬가지다. 이후 대법원이 정부에 불리한 판결을 하나도 내놓지 않은 덕에 차베스는 14년간 장기 집권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책의 개정판에는 한국의 사법부 손보기 사례가 포함돼 세계적인 반면교사로 회자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후보의 사법 리스크가 삼권분립을 흔드는 국가 리스크로 커진 데는 이 후보 책임만 있는 게 아니다. 먼저 ‘정당의 문지기’ 역할을 못 한 민주당 책임이 무겁다. 왜 선거 앞두고 재판을 하느냐고 따질 자격이 없다. 8개 사건에 대해 5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을 대선 후보로 선출한 건 민주당이다. 사법권 침해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법률 전문가들은 또 어떤가. 대한민국 1호 헌법연구관으로 법제처장을 지낸 인사는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으로서 문제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 ‘헌재가 윤석열 대통령 파면 결정으로 세계적 각광을 받자 대법관들이 자존심을 찾기 위해 퇴행적 판결을 했다’고 주장했다. “정치도 선거도 법 위에 있지 않다”고 일갈했던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의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인사는 총괄선대위원장인데 ‘민주당의 대법원장 사퇴 요구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당으로서는 충분히 할 말을 했다”고 두둔했다. 이들이야 캠프 사람들이라 치자. 헌법학회건 공법학회건 이번 사태에 대해 성명서 한 장 내지 않은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법대 교수들 몇 명이 국회에서 규탄 성명을 발표한다 해서 봤더니 ‘대법원장 사퇴, 대법관 수 대폭 증원’이라는 민주당과 똑같은 주장을 하다 끝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곳이 사법부다. 이 후보는 “(사법부의) 총구가 우리를 향해 난사하면 고쳐야 한다”고 했다. 지금의 사법부에는 사법부로 향하는 권력의 총구를 막아낼 의지가 있는가. 이 후보의 출석 의무가 있는 재판들이 모조리 선거 이후로 미뤄졌는데 사법부가 ‘암살’을 피해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니라 믿고 싶다. 이 후보는 대선 공약으로 대통령 계엄권 통제 강화와 사법개혁을 통한 ‘내란 극복’, ‘K민주주의 위상 회복’을 내세웠다. 대통령의 어리석은 비상계엄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일 테지만 요즘 민주주의의 붕괴는 군을 앞세운 쿠데타가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 손으로 이뤄진다. 폭력을 내세운 ‘경성 내란’은 가시적이어서 경각심을 갖고 막아낼 수 있어도 합법과 다수결을 통한 ‘연성 내란’은 난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당한다. 민주주의는 총칼로만 무너지지 않는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역대 교황들 중엔 유럽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8일 선출된 레오 14세(70)를 포함해 지금까지 15개국에서 267명의 교황을 배출했는데 이 중 이스라엘 출신인 초대 교황 성 베드로를 비롯해 12명을 빼면 모두 유럽인이다. 최초의 신대륙 출신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하기 전 135년간 재위한 10명의 교황 전원이 유럽인이었다. 시카고 태생인 레오 14세 선출은 신대륙, 그것도 가톨릭교회 2000년 역사상 최초의 미국인이라는 점에서 파격적이다. 교황직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초강대국 출신은 배제한다는 불문율을 깬 것이다. ▷새 교황 레오 14세는 아버지 쪽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혈통이고 어머니는 스페인계다. 27세부터 로마에서 유학했고,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뒤로는 페루로 건너가 20년간 사목하며 페루 시민권도 얻었다.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등 5개 국어와 라틴어가 유창한데 교황에 선출된 후 첫 강복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로 하고 라틴어로 마무리했다. 미국과 유럽 언론은 “가톨릭 글로벌리스트”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 교황”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은 청교도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여서 반(反)가톨릭 정서가 있었다. 역대 대통령 중 가톨릭교도는 존 F 케네디와 조 바이든 2명뿐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남부연합군 출신 가톨릭 교인들에게 암살당하자 1867년 건국 이후 유지해온 바티칸시국과의 영사 관계도 끊었다. 이후 117년 만인 1984년에야 공식 수교했는데 당시 교황이던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로 2세는 반공주의자로서 미국의 든든한 우군으로 냉전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 1979년 백악관에 초청받은 첫 교황이었다. ▷미국 출신 교황 선출에 대해선 “도널드 트럼프 시대 대미 소통 강화 차원” “트럼프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은 백인 기독교인 집단인 복음주의자들이다. 레오 14세 교황은 신학적으로는 중도 성향이지만 전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이민자 보호나 기후 위기 같은 진보적 의제에 관심이 많다. 트럼프 정부의 반이민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도 있다. ▷전임자들과 달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12년간 68개국을 돌면서도 고국인 아르헨티나는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교황의 방문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걸 원치 않았다고 한다. 특히 대선 전 “망할 공산주의자”라며 교황을 욕했던 극우 성향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과는 껄끄러웠다. ‘교황 합성사진’ 논란을 일으켰던 트럼프 대통령은 “레오 14세를 만나길 고대한다. 매우 의미 있는 순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 교황이 언제 고국을 찾을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미국 대통령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될지 주목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4세 이하 어린이 인구가 지난달 539만 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전체 인구 대비 10.5%다. 이는 인구 4000만 명 이상인 37개국 중 가장 낮은 비율로 세계 평균치(24.7%)의 절반도 안 되며, 한국보다 17년 앞서 초고령사회가 된 일본(11.4%)보다도 낮다. 17개 시도 가운데 어린이 인구 비율이 가장 낮은 지역은 서울(8.9%)이고 가장 높은 지역은 세종시(17.7%)다. ▷어린이날이 공휴일로 지정된 1970년대만 해도 어린이 인구 비중은 43%, 65세 이상은 3%로 세계 각국과 비교하면 젊은 나라에 속했다. 그런데 지금은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어린이 비중의 2배다. 지금 같은 저출산 고령화가 지속되면 25년 후엔 어린이 인구는 8%로 쪼그라들고 65세 이상은 40%로 불어날 전망이다. 연령대별 인구 분포가 아래는 좁디좁고 위로 갈수록 비대해지는 역삼각형 형태로 바뀌고 있다. 부양 부담만 커지는 암울한 인구 구조다. ▷어린이 행복도도 수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2024 아동행복지수’에서는 어린이 행복도가 100점 만점에 45점으로 낙제점 수준이었다. 공부는 권장 학습 시간보다 더 오래 하고, 잠은 적정 수면 시간보다 훨씬 적게 자는 생활 습관 탓이 크다. 기저귀 떼기 전부터 사교육을 시작해 영어 유치원 입학을 위한 ‘4세 고시’, 유명 영어와 수학 학원 수강용 ‘7세 고시’를 거쳐 초등학생이 되면 수학 문제가 수능 만점자도 풀기 어렵다는 ‘초등 의대반’을 준비하는 세태다. ▷공부만 하고 놀지 않는 아이가 건강할 리 없다. 밤늦게까지 공부하거나 스마트폰 하느라 불면증을 겪는 어린이는 13%이고, 소아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를 겪는 초등학생도 10만5000명으로 4년 전보다 2.3배로 늘었다. 영유아 사교육 열풍이 뜨거운 서울 강남 3구 9세 이하 어린이의 우울증과 불안장애 진단은 4년새 3배로 늘었다. 유아기부터 시작되는 지나친 선행학습은 뇌 기초공사를 할 시기에 고층 빌딩을 짓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학습 능력과 감정 조절 기능이 약해져 작은 충격에도 쉽게 마음의 병을 얻고 무너진다는 것이다. 돈 써서 아이 망치고 있는 셈이다. ▷행복지수가 높은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방과 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하루 평균 53분 길고, 운동하는 시간은 17분 길었으며, 학원에서 공부하는 시간은 38분 짧았다. 일하는 어른들도 워라밸을 챙기면서 왜 한창 뛰어놀 아이들에겐 놀 권리를 주지 않나. 행복하게 자란 아이가 커서도 행복하다.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아이도 낳고 싶어진다. 적게 낳아 불행하게 키우는 바보짓은 이제 그만하자.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정상급 인사 8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130여 개국 대표단과 함께 25만 명이 장례미사에 참석했고, 15만 명이 운구 행렬을 따랐다. 26일 엄수된 프란치스코 교황 장례식 참석자들의 면면과 추모 인파는 바티칸 시국의 수반이자 14억 가톨릭 신도들의 지도자로서 교황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하지만 장례식은 검박했다. ‘가난한 이들의 겸손한 수호자’였던 교황의 유언대로 품위 있되 소박한 마무리였다. ▷21일 선종한 교황은 전임자들과 달리 방부 처리를 않고 세 겹이 아닌 홑겹 관에 안치돼 조문객을 맞았다. 선종 후에도 우상이 되기보다 인간적이었던 교황의 마지막 모습에 조문객들은 사진기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장지인 성모 대성전에서 교황의 관을 처음 맞이한 이들은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 76세에 즉위한 후 12년간 68개국을 돌며 약자들을 위로했던 고단한 몸은 땅 아래 묻혔고, 고급 대리석 대신 증조부 고향에서 캐낸 ‘민중의 돌’로 만든 비석엔 ‘빈자의 성인’에서 따온 교황의 라틴어 이름만 새겨졌다. ‘프란치스쿠스’. ▷검소했던 장례 절차는 교황직을 수행하던 모습 그대로다. 교황청은 보유 자산이 최소 8조5000억 원에 연간 예산이 1조2000억 원이지만 교황은 ‘가난 서약’에 따라 월급(4600만 원)을 모두 교회에 기부했다.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된 후로도 월급(670만∼840만 원)을 받지 않았다. 교황이 남긴 전 재산이 100달러뿐이라는 아르헨티나 언론 보도도 나왔다. 교황은 저서에서 “교회의 사제, 주교, 추기경들이 고급차를 몰며 청빈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마음 아프다”고 썼다. ▷청빈함은 12년 전 남미 출신으로는 최초로 교황에 선출된 비결이다. 교황청 안팎으로 비리와 추문이 끊이지 않던 시기에 교황이 된 그는 방만한 재정 개혁에 나섰다. 2021년엔 “교황청 재정은 투명한 유리집이 돼야 한다”며 교황청이 전 세계에 보유한 5000여 개 부동산 실태를 공개했다. 교황청 고위직이 신자들의 헌금으로 영국 런던의 고급 빌딩을 시세보다 비싸게 사들였다 큰 손해를 본 사건이 계기가 됐다. 연간 800억∼900억 원의 적자 해소를 위한 추기경 임금 삭감 등 구조조정도 마지막까지 힘을 기울였던 과제다. ▷한국에선 김수환 정진석 염수정 유흥식 4명의 추기경이 나왔고, 이 중 2명이 선종했다. 2009년 선종한 김 추기경 장례미사는 일반인과 별 차이 없이 소박했고, 2021년 선종한 정 추기경 때는 코로나로 더욱 간소했다. 김 추기경은 각막 기증으로 빛을, 정 추기경은 장기 기증으로 생명을 주고 떠났다. 모든 걸 내어주고 빈손으로 떠난 성직자들을 보며 혼탁한 뉴스로 어지러운 세상에 부끄러움을 느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21일 향년 88세로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점진적 개혁주의자로 평가받는다. 최초의 신대륙 출신 교황이자 예수회가 배출한 첫 교황이었다. ‘교황청의 아웃사이더’인 셈인데 동시에 아르헨티나 국적이긴 하나 이탈리아 혈통이고 가톨릭 교리에 충실한 보수주의자였다. 급진적이지 않으면서 성추문과 부패 문제로 신뢰를 잃어가던 가톨릭 교회를 재건할 적임자로 제266대 교황에 선출된 그는 12년간 12억 가톨릭 교인들과 함께 안정적인 변화를 이끌며 울림이 깊은 말을 남겼다. ▷가톨릭의 최고 이론가였던 전임 교황과 달리 그는 거리의 성직자였다. “천성이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고선 살 수 없다”던 그는 1969년 사제품을 받은 후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며 평생을 낮은 곳에 사는 이들과 함께했다. 가난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제2의 출애굽’으로 여기는 해방신학의 고장 남미 출신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좌파적 해방신학에 거리를 두면서도 “가난한 이들의 깃발은 기독교도의 것”이라고 했다. ▷76세 고령에 교황이 된 그는 우려와 달리 전 세계를 바삐 다니며 평화와 화해를 호소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도 피하지 않았다. 난민들의 떼죽음엔 “우리 모두 공범”이라고 질타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민 정책에 대해선 “다리가 아닌 벽만 세우려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무슬림 과격분자의 공격을 받은 후엔 이슬람과 폭력을 동일시하지 말라며 “이슬람 폭력을 말하려면 가톨릭 폭력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고 했다. 2014년 방한 당시 세월호 리본을 단 그에게 주변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으니 떼는 게 좋겠다’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인간적 고통 앞에 정치적 중립은 없다.”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해선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다. 동성애자 사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반문했다. “내가 누구라고 그들을 판단하겠나.” 동성애, 이혼, 재혼에 대해서도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하지만 동성혼 허용과 여성 사제 서품엔 반대하며 가톨릭의 핵심 가치를 고수했다. 개혁론자들은 반발했지만 “더 크고 오래가는 합의를 만들려면 점진적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는 것이 교황의 지론이었다. ▷청빈했던 그는 교황에 오른 뒤엔 화려한 전용 숙소를 거부하고 소박한 사제들의 공동 숙소에서 살았다. 낡은 구두를 신고 순금 대신 철제 십자가를 목에 걸었다. 나머지는 다 헛것이라고 했다. “공작새를 보라. 앞에서 보면 아름답지만 뒤에서 보면 진면모를 알게 된다.” 마지막 부활절 강론에서 “전쟁을 끝내 달라”고 당부하고, 유언장에는 “장식 없는 무덤에 이름만 새겨 달라”고 했다. 13세기 ‘빈자의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딴 이름다운 마무리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6·3 조기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이 경선 시작도 전에 ‘빅텐트’ 운운하며 우왕좌왕하는 동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는 대선을 향해 안정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브리풍 동화 같은 영상 메시지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결국 국민이 합니다’는 겸손한 제목의 책도 내고, 경제 성장을 강조하며 1호 공약으로 “인공지능(AI) 투자 100조 원 시대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이재명은 위험하다’며 망설이는 중도 표심을 안심시켜 이재명 대세론을 굳히려는 시도로 보이지만 기대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1호 공약은 AI에 집중 투자해 ‘AI 기본사회’를 만들겠다는 내용이다. AI 교과서도 반대했던 민주당이다. AI 기본사회란 어떤 사회를 말하는가. 엄청난 전력을 소모하는 AI 산업을 육성하려면 싸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수적이다. 탈원전 정책을 폈던 유럽 국가들이 원전 건설을 늘리는 이유다. 민주당도 어제 “원자력 생태계를 구축하자”고 나섰는데 탈원전 정책을 포기한다는 얘긴지 헷갈린다. 당내 관련 조직에서 에너지 분과위원장을 맡은 이가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에 앞장섰던 인물이고, 이 전 대표도 책에서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만 언급했을 뿐이다. 지지 세력인 탈원전 단체들이 들고일어나면 한다 했다가 철회한 ‘반도체 부문 주52시간 예외 특례’처럼 되는 것 아닌가.공약의 신뢰도 문제는 이 전 대표 성정에 대한 불안감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 같다. 그의 새 책에서 “다양성과 비판은 우리 민주당의 생명과도 같은 원칙” “(지난해 4월 총선에서) 혁신 공천으로 공천 혁명을 이뤄냈다”는 대목을 읽고 많이 놀랐다. 민주당 법률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변호사마저 ‘이재명 일극 체제’에 실망하고 당을 떠나며 “더불어도 없고 민주도 없다”고 했다. ‘혁신 공천’이 아니라 ‘비명횡사’ ‘공천 학살’이었음은 이 전 대표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는 지난달 유튜브 방송에 나와 2023년 9월 자신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일을 거론하며 ‘총선에서 다 드러나서 책임을 물었다’고 했다.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졌을 것으로 의심되는 의원들을 ‘숙청’했다 인정해 놓고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양성이 민주당 생명이고 혁신 공천이었다 말하나.지난 대선에서 짙은 색 정장 차림에 “이재명은 합니다”를 외쳤던 그는 이번 대선 출마 영상에선 크림색 스웨터를 입고 나와 “대한 국민의 훌륭한 도구 이재명이 되고 싶다”고 했다. ‘못할 게 없는 사람’이라는 무서운 이미지를 벗고 ‘믿음직한 국민 머슴’ 이미지를 입고 싶었겠지만 ‘도구’라는 단어 선택은 실수였다. 당 대표 시절 ‘민주당이 이재명 로펌이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당을 사조직처럼 도구화한 전력을 떠올리게 해서다.비명들이 횡사하는 동안 이 전 대표와 측근들의 사법 리스크를 변호하고 관리했던 율사 5명은 금배지를 달았다. “사실상 변호사비 대납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민주당이 검토하고 추진했던 법안들 중엔 당 대표 사건을 맡은 검찰을 압박하는 ‘검사 법 왜곡죄’, 수천억 원대 배임 혐의로 재판받는 대표를 위한 배임죄 폐지, 대표가 재판받고 있는 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죄를 없애고 이를 소급 적용하는 법안도 들어 있다. 이 대표 수사하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검사가 5명이다. 민주화 이후 이 정도로 민주주의와 법치를 유린한 당 대표가 또 있었나.민주당이 야당인 상황에선 말도 안 되는 법안이 통과되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최대 야당이 행정 권력까지 거머쥐면 국회가 정부를 감시하기는커녕 대통령 사법 리스크 제거를 위한 법을 만들어도, 대통령 친인척 비리 수사를 못 하게 법을 바꿔도 막을 도리가 없다. 혹여라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할 경우 야당 의원만으로는 계엄 해제안을 통과시킬 수도 없다.‘이재명 공포증’에 대해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라디오 방송에 나와 “김대중 대통령도 과격하다, 빨갱이다 많은 걱정들을 했지만 성공한 대통령이 됐다. 김대중을 보면 이재명이 보인다”고 두둔했다. 동의할 수 없다. 이재명이 두려운 건 이념 문제보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바꾸고 권력을 잔인하게 쓰면서 삼권분립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 같기 때문이다.대통령 이재명은 김대중이 아니라 김대중이 3선 개헌 후 대선에 나선 박정희를 비판하며 언급했던 ‘총통’에 가까울 것이라는 우려까지 나온다. 그는 이재명 공포증을 해소해줄 ‘대선날 분권형 개헌안 국민투표 동시 실시’ 제안도 거부했다. 그래서 편안한 옷차림으로 웃고, 이재명이 아니라 국민이 한다 하고, 오늘까진 당을 도구로 썼지만 내일부턴 국민의 도구가 되겠다는 이재명이 여전히 미덥지가 않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올림픽, 월드컵과 함께 3대 글로벌 이벤트로 꼽히는 엑스포가 12일 오사카에서 개막했다. 1970년 오사카, 2005년 아이치에 이어 일본에서 열리는 세 번째 등록 엑스포다. 오사카가 개최지로 선정될 때만 해도 전후 일본의 부흥을 알렸던 55년 전 오사카 엑스포의 영광을 재현하리라 들떠 있던 현지인들은 이번엔 시작부터 저조한 흥행에 ‘동네 잔치’로 끝나는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고 있다. ▷오사카 엑스포 개최 지역은 매립지에 만든 인공섬 유메시마다. 엑스포 상징물인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 ‘그랜드 링’(둘레 2km) 안팎으로 한국을 비롯해 각국의 전시관 42개가 마련돼 첨단 기술을 선보인다. 일본 정부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한국인들이 몰려들기를 기대하고 있다. 개최지 선정 당시만 해도 관람객 2820만 명을 유치해 33조 원의 경제 파급효과를 낼 것으로 예상했지만 지금까지 팔린 티켓은 1000만 장도 안 된다. 라멘 한 그릇에 3만8000원, 여행 가방 맡기는 데 하루 10만 원인 ‘바가지요금’도 논란이다. ▷한국은 오사카 다음으로 국내 최초 등록 엑스포가 될 2030 부산 엑스포를 유치하려다 실패했다. 지역 안배 원칙을 감안하면 오사카에서 가까운 부산이 될 가능성은 낮았음에도 대통령실에 전담 조직까지 두고 유치전에 올인한 결과 2023년 11월 1차 투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29 대 119로 대패했다. 부산만의 매력을 보여주기보다 강남스타일과 오징어 게임을 내세운 홍보 전략은 “뜬금없고 식상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1차 투표 3개월 전 ‘잼버리 사태’가 터지자 한국의 대형 행사 개최 역량이 의심받기도 했다. ▷결과 예측에 실패해 헛심 쓰게 한 정부의 무능은 더 큰 문제였다. 대통령이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한 후론 ‘한국 지지로 선회’ ‘불과 10여 표 차이’라는 보고가 줄을 이었다. 1차 투표에서 70표 얻고 2차 투표에서 뒤집자는 전략이었다. 일선에서 ‘아직 그만한 표를 확보 못 했다’고 보고하면 ‘왜 사기를 꺾느냐’는 질책이 떨어졌다고 한다. 외교망 확충 효과를 거뒀다고 하나 2년간 5744억 원, 표당 198억 원이 들었다.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담화를 발표했지만 그뿐이었다. 판세 예측 실패나 허위 보고 여부에 관한 진상 규명은 없었다. 외교부 장관과 대통령실 참모는 징계는커녕 총선 공천을 받았고, 외교부 차관은 경제 부처 장관으로 승진까지 했다. 여권에서도 “무능하고 아부에 찌든 참모들이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는 질타가 나왔는데, 그때 대통령 보고 체계를 점검했더라면 엑스포 유치엔 실패해도 정권 실패엔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부산 엑스포의 꿈을 접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당시 유치전부터 복기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이 기각되면서 거대 야당이 주도한 고위 공직자 탄핵 시도가 9전 9패를 기록했다. 현 정부에서 발의된 탄핵소추안 30건 중 헌법재판소가 선고한 9건 모두 기각 결정이 났다. 주요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탄핵 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직무가 정지된다. 9명의 직무 정지 기간이 평균 5개월이니 무리한 탄핵 남발로 국정 공백을 초래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이제 한 총리를 복귀시킨 헌법재판관 8명이 윤석열 대통령은 어찌할지 주목된다. 윤 대통령 탄핵은 성공할까.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은 변론 종결 후 14일, 박근혜 전 대통령은 11일 만에 결론이 났는데 윤 대통령은 한 달이 지나도록 선고일도 못 잡고 있다. 탄핵 심판이 법적 절차이자 정치적 절차임을 감안하면 탄핵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은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노 전 대통령 땐 탄핵 반대 여론(71%)이 압도적이었고, 박 전 대통령은 탄핵 찬성(77%)이 압도했다. 윤 대통령은 탄핵 찬성 58%, 반대 36% 구도가 두 달간 이어지고 있다(한국갤럽). 탄핵 찬성 비율이 높지만 압도적이진 않다. 앞서 두 차례 대통령 탄핵 때와 달리 보수 성향의 헌법학자들을 중심으로 절차적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은 점도 부담일 것이다. 권위 있는 헌법학자인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와 박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주심을 맡았던 강일원 변호사도 우려를 표하고 있어 흘려듣기 어렵다. 상식의 눈으로 보면 비상대권을 ‘경고용’으로 휘두른 무모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통령 자리를 계속 맡길까 싶다. 국회에 무장 군인이 들어가는 걸 생방송으로 봤고, 체포조 얘기도 여럿한테 들었으니 더 따져볼 것도 없다 싶은데 보수 헌법학자들 생각은 다르다. 대통령과 국회가 주고받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계엄선포권과 해제 요구권 행사)에 사법부의 개입은 신중해야 하고, 탄핵 사유에서 핵심인 내란죄 부분을 철회한 것은 심각한 하자이며, 국회 무력화와 정치인 체포 지시 같은 사실관계도 명확히 정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윤 대통령은 이전 두 대통령과 달리 내란 혐의 수사도 받고 있다. 형사 법정에선 쓸 수 없는 증거들을 탄핵 심판에서는 채택했는데 단심제인 탄핵 결정이 난 후 형사 재판에서 다른 결론이 나오면 어떻게 될까. 헌재가 신문한 증인은 16명이지만 내란죄 형사 재판에선 검찰이 신청한 증인만 520명이다. 윤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기 한 달 전 이철희 정치평론가가 두 전직 대통령 탄핵의 성패를 가른 요인을 분석한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냈다. 노 전 대통령 때는 국회가 민심에 역행해 탄핵을 밀어붙이는 바람에 ‘의회 쿠데타’로 받아들여져 실패한 반면, 박 전 대통령 탄핵은 무르익은 민심의 요구를 국회가 수용하는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1기 때인 2017년 워싱턴포스트 칼럼에서 모범 사례로 소개됐다. 러시아 대선 개입 의혹에 트럼프 대통령 탄핵 요구가 거세던 시기로 이 칼럼은 탄핵 주도 세력의 절제와 신중함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여론이 거셌지만, 거국 중립내각 구성 등 다른 ‘위엄 있는 퇴로’를 먼저 제안하다 탄핵을 최후의 수단으로 활용함으로써, 혼란을 끝내고 질서를 회복할 정치 세력이라는 신뢰까지 얻을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거의 다 된 것 같던 윤 대통령 탄핵 절차가 막판에 느려진 이유도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 확정 판결 전 조기 대선을 치르려고 서두른 탓이 크다. 헌법상 탄핵안 의결은 ‘대통령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라야 가능하다. 하지만 탄핵안 가결 전 헌법과 법률 위반 여부를 따져보는 절차는 없었다. 1차 탄핵 때는 언론 기사 7건, 2차 땐 63건을 참고 자료로 첨부했을 뿐이다.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 탄핵 때는 상원에서 사실조사 하는 데 1년, 하원에서 소추 사유 확인하는 데 6개월 걸렸다고 한다. 국회가 제 역할을 했더라면 헌재에서 ‘요원’이냐 ‘인원’이냐 같은 사실관계 따지느라 귀한 시간 허비하는 일도, 광장에서 찬탄 반탄으로 갈라져 싸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탄핵은 국회의 탄핵 소추, 헌재의 심판, 여론의 승복으로 완성된다. 첫 번째 단계의 과오를 만회할 두 단계의 기회가 남아 있다. 헌재는 ‘신속하되 공정한’ 결정으로 설득하고, 윤 대통령과 야당은 무조건 승복해야 ‘58 대 36’의 갈등을 봉합할 수 있다. 탄핵 결정이 내전의 종식이 아닌 확전의 시작이 된다면 탄핵이 인용돼도 성공한 탄핵이 아니고, 탄핵이 기각돼도 성공한 기각이 아닌 게 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언론 통제 국가들에 외부 소식을 전해온 국영방송 ‘미국의 소리(VOA)’가 설립 83년 만에 신규 방송을 중단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VOA를 운영하는 글로벌미디어국(USAGM)을 구조조정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후 1300명 넘는 VOA 기자와 PD들이 휴직 처리됐다. USAGM 산하 조직으로 중국의 인권 유린 실태를 폭로해온 자유아시아방송(RFA)도 방송이 중단됐다. 트럼프는 비용 절감을 내세우지만 비판 언론 길들이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VOA는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선전전에 대항해 설립된 후 영국 BBC 해외방송과 함께 주요 심리전 수단으로 활약했다. 신규 방송 중단 전까지 북한 중국 이란 등의 수용자 3억6000만 명에게 48개 언어로 해외 뉴스를 전하고 독재 정권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왔다. VOA 총국장은 “80년 넘게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싸우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온 미국의 귀중한 자산이 침묵당해 슬프다”고 했다. ▷한국어 방송은 같은 해 8월 시작됐는데 첫날 방송에서 이승만의 떨리는 육성 연설 ‘2000만 동포에게 고한다’를 내보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를 단파방송으로 몰래 듣고 외부에 전파한 이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6·25전쟁 발발과 미국의 참전을 가장 먼저 전한 것도 이 방송이었다. 전쟁 기간 내내 매일 1시간 15분씩 정규 방송을 편성하고, 학교 교육이 어려워지자 ‘방송학교’라는 교육 프로도 내보냈다. 주요 청취자는 귀한 라디오를 가진 엘리트 계층이었는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땐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었다고 한다. ▷1952년 임시 수도 부산에서 있었던 ‘부산 정치 파동’으로 방송이 중단된 적도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집권을 노리고 직선제 개헌을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자 VOA는 이를 비판 보도했고, 공보처가 ‘내정 간섭’이라며 KBS를 통한 중계방송을 2주 넘게 중단했다. 전후 한국 언론이 제자리를 잡은 후엔 북한을 핵심 청취 및 취재 대상으로 바꿨다. 2018년 북한산 석탄의 국내 위장 반입 의혹을 처음 보도한 것이 VOA였다. ▷VOA는 연간 예산 10억 달러(약 1조4500억 원)를 정부에서 지원받지만 방송의 독립성을 내세우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보도를 해왔고, 백악관은 그런 VOA를 “좌파 편향적”이라며 불편해했다. 민영 방송사와도 소송전을 마다하지 않는 트럼프에게 국영방송 문을 닫게 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VOA 신규 방송 중단 소식에 중국 관영 언론은 “거짓말 공장”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논평했다. 미국 언론이 지적하듯 ‘독재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침묵하게 하는 것은 ‘미국의 적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김대중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감옥은 작지만 큰 대학”이라고 했다. 내란 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옥살이 6년간 하루 10시간씩 독서하고, 그리운 가족과 편지 주고받고, 화단을 가꾸며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깨칠 수 없는 진리를 깨쳤다”고 썼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예찬일 뿐 감옥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최고 권력을 쥐어본 이들에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역대 대통령 중 수감 생활을 한 이는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이명박, 윤석열 대통령. 속칭 ‘범털’들은 입소 초기엔 음식 때문에 고생한다. 박 전 대통령은 구치소 음식이 짜서 맨밥만 먹다가 나중에는 컵라면을 사서 물을 많이 부어 먹었다고 한다. 전, 노 두 전직 대통령이 안양교도소와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가 12·12와 5·18 사건 등으로 같은 법정에 출석해 처음 나눈 대화는 유명하다. “자네 구치소에선 계란프라이 주나?” “안 준다.” “우리도 안 줘.” ▷수감 생활 중 병원 신세를 지는 경우도 많다. 건강을 핑계로 쉽게 탈옥한다는 비난이 제기되지만 고령인 탓이 크다. 구치소에선 튼튼한 장정도 1년 지나면 몸이 망가지기 십상이라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구속된 지 4개월 만에 수면 무호흡과 당뇨로 입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건강이 나빠져 형 집행정지를 두 차례 신청했지만 검찰이 모두 불허했다.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이던 시절이다. 결국 법무부 결정으로 외부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법원의 구속 취소 결정으로 석방된 윤 대통령은 “잠을 많이 자니 더 건강해졌다” “구치소는 대통령이 가도 배울 게 많은 곳이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밤중 계엄 선포로 밤잠 설쳐가며 나라 걱정하는 사람들이 듣기엔 불편한 말이다. 윤 대통령은 응원해준 국민들에게 감사하고, 내란 혐의로 구속된 계엄군의 석방을 기도한다고 했다. 좌우 할 것 없이 어려움과 분열을 겪는 모든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화합을 당부했어야 하지 않나. 배울 게 많은 곳에서 무엇을 배웠다는 걸까. ▷윤 대통령은 그동안 구속 기소했던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났다며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을 언급했다고 한다.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사법농단 의혹 수사를 지휘하며 구속시킨 이들로 양 전 대법원장은 1심에서 무죄, 임 전 차장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만 콕 집어 지목하자 ‘보수층 외연 확장을 노린 발언’ ‘재판을 앞두고 법원에 선처를 호소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의 수감 생활은 52일, 이 중 8일은 헌법재판소, 하루는 내란죄 법정에 출석했다.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배움을 얻기엔 갇혀 지낸 시간이 길지 않았던 듯하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12·3 비상계엄 사태 후 논란이 끊이지 않는 정부 기관 중 하나가 국가인권위원회다. 지난달 10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 방어권을 보장하라는 권고를 의결한 데 이어 18일엔 구속 기소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 등 장군들에 대해 신속한 보석 허가와 접견 제한 해제를 권고해 “내란죄 피의자 변호인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최근에는 국제인권기구에 헌법재판소를 비판하는 서한을 보내 논란이다.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에 보낸 답변서에서 ‘국민의 50% 가까이가 헌재를 믿지 못한다’ ‘헌재가 형사소송법 적용을 일부 배제하는 등 불공정한 재판을 하고 있다’ ‘헌법재판관이 정치 성향에 따라 재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서 국내 인권 단체들이 ‘계엄을 옹호하는 안건을 의결했다’며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에 인권위에 대한 특별 심사를 요청하자 안 위원장이 심사 관련 실무를 맡고 있는 사무소에 반박 답변서를 보낸 것이다. ▷한국갤럽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헌재를 ‘신뢰한다’는 답변은 52%, ‘신뢰하지 않는다’는 40%였다. 윤 대통령 지지층을 중심으로 헌재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진 건 사실이지만, 비상계엄 이후 시행된 국가기관별 신뢰도 조사 4건 모두에서 헌재는 정부 국회 검경 등 다른 국가기관보다 높은 신뢰도 1위였다. 윤 대통령 탄핵 심리는 8인 재판관 전원이 합의한 절차에 따라 마무리돼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재판관들이 정치적 성향에 따라 기계적으로 판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안 위원장이 잘 알 것이다. 보수성향인 그는 헌재 재판관 시절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인용 결정을 내렸다. ▷인권위는 대통령 방어권 보장을 권고하며 “신분을 이유로 인권 보호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인권위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려 했던 계엄 선포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약자를 위한 기관이 대규모 변호인단의 도움을 받는 대통령 방어권만 챙기니 ‘윤권위’란 비아냥이 나오는 것이다. 대통령이 지명한 상임위원은 “대통령을 탄핵한다면 헌재를 흔적도 남김없이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다. 인권위는 위원 11명 중 6명을 대통령과 여당이 지명해 여권 편향적이라는 지적이 간혹 제기됐지만 이번엔 도를 한참 넘었다. ▷세계국가인권기구연합은 5년마다 118개 회원기구를 심사한다. 2001년 출범한 인권위는 2004년 최초 심사부터 가장 최근의 2021년 심사까지 줄곧 A등급을 받아왔다. 다음 심사에서 A등급을 유지할 수 있을까. 최근 해외 기관의 민주주의 성숙도 평가 결과 한국은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하락했다. 어려운 때일수록 인권위 같은 국가기관이 중심을 잡아야 할 텐데 오히려 내부 분열과 국격 추락을 부추기는 듯해 유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