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언

김태언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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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태언 기자입니다.

beborn@donga.com

취재분야

2026-01-09~2026-02-08
문화 일반73%
인사일반18%
문학/출판9%
  •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의리있고 당당했던 ‘깡수연’

    “기력이 있는 한 배우를 하고 싶어요. 75세가 됐을 때 영화 ‘집으로…’의 할머니 같은 역할을 하면 정말 좋겠어요.”(2010년 동아일보 인터뷰) 7일 오후 3시경 향년 56세로 별세한 한국 최초의 ‘월드 스타’ 강수연은 늘 그랬듯 영화에 오롯이 헌신하고자 했다. 올해 공개하는 넷플릭스 영화 ‘정이’로 복귀한 뒤 연기를 본격적으로 재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뇌출혈에 따른 심정지로 5일 쓰러진 그는 결국 병상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을 8일 찾은 임권택 감독은 “좋은 연기자를 만난 행운 덕분에 내 영화가 더 빛날 수 있었다. 워낙 영리한 배우라 숱한 세월을 함께했음에도 촬영에 지장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감사한 배우”라며 비통해했다. 봉준호 감독은 “영정사진이 영화 촬영 소품같이 느껴질 정도로 실감이 안 난다”고 말했다. 고인이 걸어온 길은 한국 영화사와 맥을 같이한다. 1969년 세 살 때 길거리 캐스팅으로 데뷔한 후 초등학생 때 어린이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1976년)과 ‘정의의 번개돌이’(1978년)에 출연하며 아역 스타로 떠올랐다. 고교 시절인 1982년 영화 ‘깨소금과 옥떨매’, 1983년 드라마 ‘고교생 일기’에 출연하며 TV와 스크린을 넘나들었다. 정식 영화 데뷔작은 1976년 ‘핏줄’이다. 이후 영화 ‘별 3형제’(1977년), ‘어딘가에 엄마가’(1978년)에 아역으로 출연했다. 1985년 김수형 감독의 ‘W의 비극’,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2’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본격적인 도약을 예고했다. 배 감독은 “아역 시절부터 재능이 특출해 눈여겨봤는데 성인이 돼서도 그 참신함이 여전하더라. 발랄하고 매사에 적극적이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회고했다. 20대 초반에 ‘젊은 거장’ 배우가 된 데에는 임권택 감독의 공이 컸다. 고인은 1987년 임 감독의 ‘씨받이’에서 주인공 ‘옥녀’ 역을 맡아 그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한국 배우가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한 건 처음이었다. 1989년 임 감독의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명실상부한 ‘월드 스타’로 떠올랐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은 “1997년 인도 트리반드룸에서 열린 영화제에 참석했는데 현지인들이 ‘영화 ‘씨받이’를 봤다. 강수연 연기가 정말 좋았다’고 말해 깜짝 놀랐다”며 “고인은 한국영화와 한국 배우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고인은 2011년 방송에서 “당시 모두가 노출 연기에만 관심을 가져 큰 상처를 받았다. 상을 타고 나니 갑자기 다들 ‘너 어쩌면 그렇게 연기를 잘하느냐’고 물어 상처가 싹 치유됐다”고 했다. 영화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경마장 가는 길’ ‘그대 안의 블루’ 등 1980, 90년대 화제작에 다수 출연했다. 특히 1990년대에는 ‘처녀들의 저녁식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강조하거나 여성이 겪는 차별을 들여다본 작품에 출연했다. 2000년대 드라마 ‘여인천하’(2001∼2002년)의 주인공 정난정 역으로 압도적인 연기를 펼쳐 연기대상을 받았다. 공개되지 않은 ‘정이’를 제외하면 가장 최근작은 2013년에 개봉한 단편영화 ‘주리’다. 시드니국제영화제 심사위원(2013년),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심사위원(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2015∼2017년)을 역임하며 국내외 영화계 발전에도 기여했다. 고인은 영화에 대해 “끊임없이 답을 안 주는 짝사랑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쓰러지기 3주 전까지 ‘정이’ 후시녹음을 하며 한순간도 영화를 손에 놓지 않았다.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른다. 김동호 전 위원장이 장례위원장을, 임 감독과 배우 김지미 박중훈 안성기 박정자 등이 장례 고문을 각각 맡았다. 10일 오후 10시까지 조문을 받은 뒤 11일 오전 영결식을 한다. 영결식은 영화진흥위원회 유튜브 채널로 생중계한다. 영화 ‘베테랑’ 명대사의 원작자스태프 챙기는 인간적인 면모 유명비구니역 삭발-겨울 얼음물 입수 등“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배우”“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 영화 ‘베테랑’(2015년)에서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내뱉은 이 대사의 원작자는 배우 강수연 씨다. 스태프를 챙길 때나 사석에서 이 말을 자주 한 고인은 류승완 감독과 만나 농담처럼 말했다. 이 말이 ‘베테랑’에 나오며 돈의 유혹에도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의 명대사로 회자되고 있다. 고인은 의리 있고 인간적인 면모로 유명했다. 그를 월드 스타에 오르게 한 임권택 감독에 대해서는 특히 각별했다. 2008년 부산 동서대가 임권택영화예술대학을 출범시키자 고인은 특강 강사들을 다 섭외했다. 임 감독은 2010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강사료로) 몇백만 원은 줘야 하는 배우나 스태프들을 수연이가 다 데려온다”고 했다. 카리스마 있고 불의 앞에서 단호히 행동해 ‘깡수연’으로도 불렸다. 과거 제작자가 나쁜 의도로 그를 호텔에 불렀을 때 주저 없이 뺨을 때렸다. 그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하는 건 나이와 지위를 막론하고 못 받아들인다”라고 잘라 말했다. ‘말술’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영화계 유명한 애주가들도 그를 술로 이겨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삭발 투혼’은 뗄 수 없는 단어.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 비구니 역을 위해 삭발하던 모습은 한국영화사의 역사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고인은 당시 “머리는 또 자라는 법”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드라마 ‘여인천하’(2001∼2002년)에선 얇은 소복만 입고 한겨울 얼음물에 장시간 들어가 화제가 됐다. 배우 손숙은 “강수연이야말로 배우다. 다른 수식어가 없다. 오롯이 인생을 거기에 바친 사람”이라고 했다. 고인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고등학교 때부터 사실상 가장 역할을 했다. 이에 “가정환경 때문에 결혼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는 “독신주의자는 절대 아니다”라며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싶지만 결혼은 인연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답했다. 당당함은 고인을 표현하는 말이었지만 그 이면엔 여린 모습이 있었다. 고인은 “언제 가장 외롭냐”는 질문에 “당당한 척할 때, 그때가 가장 외롭다”고 했다.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 202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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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유신독재에 저항… “행동한 참여시인”

    시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으로 잘 알려진 시인 김지하가 8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토지문화재단 관계자는 이날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김 시인이 8일 오후 4시경 강원 원주시 자택에서 타계했다”고 밝혔다. 고인과 함께 살던 차남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부부가 임종을 지켰다. 고인의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는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이름처럼 고인은 과거 독재정권에 맹렬하게 저항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1941년 전남 목포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이듬해 4·19혁명에 참여했다. 당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남쪽 대표로 활동했다.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한 ‘서울대 6·3 한일 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 소속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4개월간 수감됐다. 한때 수배를 피해 항만 인부나 광부로 일하며 도피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고인은 참여시인이자 민중시인이었다. 1969년 시 ‘황톳길’과 ‘비’를 발표하며 등단한 후 1970년 월간지 ‘사상계’에 ‘오적(五賊)’을 발표해 구속됐다. ‘오적’은 300줄 남짓한 풍자시로 독재시대 부정하게 부를 축적한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댔다. 고인을 비롯해 사상계 대표와 편집장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그해 구속됐다. 이어 고인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민주화 이후 2013년 민청학련 사건 재심에서 39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어 2014년 법원은 고인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며 15억 원의 국가배상 판결을 내렸다. 1987년 제주 4·3사건을 다룬 시 ‘한라산’을 발표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된 이산하 시인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오적’을 읽고 이것이 진짜 시이고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꽁꽁 얼어붙은 유신시대에 뜨거운 피를 가진 문학청년들에겐 충격적인 영향력을 준 시를 쓴 분이다. 책상에 앉아서 글만 쓰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 참여 시인”이라고 평했다. 구모룡 문학평론가는 “학문하는 사람들이 지식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고인은 1970년대 저항운동을 하며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산 분”이라며 “자신이 터득한 사상을 글로 표출했다는 점에서도 큰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고인은 1980년대 이후 생명사상을 정립하는 데 몰두했다.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서적을 탐독하면서 생명사상을 깨쳤다. 고인은 “처음에는 생태학을 파고들었는데 그것만 가지고서는 세계와 삶의 진화를 이해하기에 인간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심오했다”며 “선(禪)과 불교에 관한 깊은 내면적 지식과 무의식적 지혜를 갈구하게 됐다”고 했다. 1990년대에는 절제의 분위기가 배어나는 내면의 시 세계를 보여줬다. ‘중심의 괴로움’(1994년), ‘비단길’(2006년), ‘새벽강’(2006년), ‘못난 시들’(2009년), ‘시김새’(2012년) 등 시집을 꾸준히 펴냈다. 2018년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고인은 많은 지인들과 후배들로부터 “데모대 선두에 서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마다 “이제 정치가 아닌 다른 일을 찾고 있다. 더 이상 데모는 안 한다”고 거절했다. 변절, 배신, 반동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고인은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진 사건에 항의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르자 한 일간지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고인은 “민중을 지도하겠다는 사람들이 목숨을 경박하게 버리는 반민중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으며 자기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민중을 선동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고인은 10년 뒤 ‘실천문학’ 여름호 대담에서 이 칼럼에 대해 해명하고 사과의 뜻을 표시했다. 진보 진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계속 견지했다. 고인은 2008년 한 언론사 기고문 ‘좌익에 묻는다’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은 아예 읽은 일도 없고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자들이 정권을 틀어쥐고 앉아 왔다갔다 나라 경제를 몽땅 망쳤다”고 지적했다. 진보 문학평론가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근배 시인(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1970년대 시인뿐 아니라 논객조차도 군부세력을 비판하는 글과 시를 못 쓰던 시절, 고인은 시 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오적’을 발표한 고인은 유신 시대의 지성이다. 정치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당시 고인만큼 폭발적인 문인은 없었다”고 말했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은 “대시인이자 세계적인 시인이 떠나갔다”고 애도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김원보 작가와 차남 세희 이사장이 있다. 고인의 부인으로 대하소설 ‘토지’를 쓴 고 박경리 선생의 외동딸 김영주 씨는 2019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강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발인은 11일 오전 9시. 김지하, 박경리 딸과 결혼… 朴 “글 잘쓰는 젊은이에 호감”朴, 金 민청학련 구속때 옥바라지고 김지하 시인은 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1926∼2008)의 사위로, 그가 걸어온 길뿐만 아니라 가족사 역시 한국 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970년 ‘오적’을 사상계에 발표한 김 시인은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후 경찰과 중앙정보부로부터 몸을 피하기 위해 평소 종종 들렀던 서울 정릉 인근의 박경리 선생 집을 찾아 숨겨 달라고 청했다. 선생은 그의 부탁을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외동딸 김영주(전 토지문화재단 이사장·1946∼2019)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김영주는 “어머니가 혼자 살다 보니 성격이 그렇다. 이해해 달라”며 사과했다. 이후 김 시인이 숨어 있던 강원 원주시 집에 선생과 김영주가 찾아와 그를 돌려보낸 것을 미안해했다. 생전 선생은 김 시인과의 첫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현대문학’ 김국태 씨(편집장)가 지하와 함께 왔어요. ‘오적’을 읽고 싶었는데 구하질 못해 읽어보지는 못했던 때였죠. (글을 쓰는 내가) 글 잘 쓰는 젊은이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통한 김 시인과 김영주는 1973년 4월 서울 명동대성당 반지하 묘역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김 추기경은 부부간의 예절과 함께 김 시인의 앞길을 예감한 듯 비상한 결심과 각오를 강조했다. 부부는 두 아들 김원보(작가), 김세희(토지문화재단 이사장)를 낳았다. 결혼 이듬해 김 시인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수감되자 선생은 직접 면회를 가며 그를 챙겼다. 6·25전쟁 때 부역자로 몰린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자 추위가 매서운 겨울 날마다 옷 보따리를 들고 흑석동 집에서 서대문까지 걸어 면회를 다닌 선생이 사위의 옥바라지까지 하게 된 것이다. 선생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 시인을 살리기 위해 정권을 자극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 조용히 백방으로 뛰었다. 김영주는 “남편은 어떤 의미에서는 장모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암 투병을 하다 2019년 눈감은 김영주는 김 시인이 20년간 12번이나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두 아들 양육부터 집안 살림, 간호까지 모든 것을 책임졌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맞서 홀로 딸을 키운 선생의 삶과 겹쳐지는 부분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 202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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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정치 등 각계 인사들 애도…강수연 빈소에 조문 행렬

    ‘영화계 원조 월드스타’ 고 강수연의 장례가 나흘간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별세 이틀째인 8일 배우 강수연 씨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는 영화인 등 각계 인사들의 조문 발길이 이어졌다. 고인이 평소 아버지처럼 따랐던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전날에 이어 이날 오전 9시 반쯤 가장 먼저 빈소를 찾아 자리를 지켰다. 김 전 위원장은 “(고인은) 영화계 최초의 ‘월드 스타’로서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역할을 했고, 그 뒤에 부산국제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영화계와 한국 영화산업에도 크게 기여한 사람”이라고 고인을 평가했다. 배우 강수연을 월드스타로 만들어준 영화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연출한 임권택 감독도 아내 채령씨와 함께 한걸음에 달려왔다. 전날도 빈소를 찾았던 임 감독은 거동이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내내 굳은 표정을 지었다. 임 감독은 “(너무 슬퍼) 할말이 없다”면서도 “살면서 더 활동할 수 있는 나이인데 먼저 세상을 떠나 아깝다. 워낙 영리한 배우라 숱한 세월을 함께 했음에도 영화 촬영 과정에서 지장을 준적이 한번도 없었다. (강수연이라는) 좋은 배우를 만나 내 영화가 좀 더 빛날 수 있었다. 감사한 배우”라고 회고했다. 빈소를 찾은 봉준호 감독은 “몇 달 전에도 만나 뵀는데 실감이 안난다”며 “종종 뵙고 이야기도 길게 나누곤 했다. 그래서인지 빈소의 영정사진도 영화촬영 소품같이 느껴질 정도로 실감이 안난다”며 애통해 했다. 장례위원회 고문을 맡은 배우 박정자는 “과거 영화 ‘웨스턴 애비뉴’란 작품을 같이 출연하며 본 강수연은 아주 똑부러지는 배우였다”며 “지나치게 똑소리나고 잘나서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 (떠나는 그를) 많이 응원하고 또 사랑해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빈소를 찾아 고인을 애도했다. 황 장관은 “강수연 씨의 존재감이 너무 컸기에 (사망 소식이) 너무 충격적이었다”며 “앞으로도 대한민국 영화사에 크게 역할을 하실 분인데 너무 일찍 가셔서 안타깝다. 정부는 올 겨울에 훈장을 추서하려고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온라인에서도 추모가 이어졌다. 고인의 유작이 된 영화 ‘정이’를 연출한 연상호 감독은 전날 빈소를 찾은데 이어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선배님 편히 쉬세요. 선배님과 함께한 지난 1년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라고 애도했다. 영화 ‘경마장 가는 길’에서 상대 배우로 출연한 배우 문성근은 “강수연 배우, 대단한 배우, 씩씩하게 일어나기를 기도했는데 너무 가슴 아픕니다. 명복을 빕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배우 김규리는 2015년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고인을 만난 일화를 전하며 “저희에게, 저에겐 등대 같은 분이셨습니다. 빛이 나는 곳으로 인도해주시던 선배님을 아직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라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김부겸 국무총리,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배우 엄앵란 안성기, 박기용 영화진흥윈원장 등은 조화를 보내 고인을 추모했다. 영화인장으로 치러지는 고인의 장례식의 장례위원장은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집행위원장이 맡았고 동료 영화인 강우석 강제규 봉준호 설경구 등 49명이 장례위원으로 참여했다. 영결식은 11일 오전 10시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거행될 예정으로, 영화진흥위원회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생중계될 예정이다.손효주기자 hjson@donga.com김태언 기자beborn@donga.com}

    • 2022-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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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로잉부터 조각까지… 팀 버튼의 모든 상상력 보러오세요

    빨강, 노랑, 파랑의 구형 생명체가 전시장 흰 벽을 뚫고 나타났다. 줄무늬 다리를 꿈틀거리며. 여러 개의 눈으로 사방을 뒤살피며.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 ‘팀 버튼 특별전: The World of Tim Burton’ 전시장 입구에 놓인 이 조형물은 팀 버튼(바른 표기는 팀 버턴) 감독(64)이 올해 만든 새로운 캐릭터다. 조형물은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유작인 DDP에서 꼭 전시를 열고 싶었다”던 버튼이 DDP 디자인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제작했다. 버튼이 한 도시에서 한 번만 전시를 여는 것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이 조형물은 한국을 위한 선물처럼 느껴진다. 버튼은 2012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월드투어 프로젝트 ‘팀 버튼 전’을 연 바 있다. 그럼에도 서울에서 10년 만에 두 번째 전시를 연 이유에 대해 그는 “10년 전 광장시장에서 먹은 부침개와 시장 사람들의 따뜻한 정 때문”이라고 밝혔다. 10년 만에 서울을 다시 방문해 선보인 이번 전시는 일러스트, 회화, 사진, 조각 등 출품작만 522점에 이른다. 브랜디 폼프렛 팀버튼프로덕션팀 총괄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버튼이 해온 52년간의 작업이 총망라돼 있다. 어디서부터 버튼의 창작이 시작됐고 어떻게 작품을 만들었는지 전 과정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버튼 영화의 팬이라면 전시장 곳곳에 대표작 ‘비틀쥬스’(1988년), ‘크리스마스의 악몽’(1993년) 등의 원천이 된 드로잉과 스토리보드, 대본을 살펴보는 재미가 상당할 것이다. 영화와 관련된 작품만 있는 건 아니다. 전시의 시작은 10대 시절 그린 드로잉 원본들로 구성돼 있다. 스스로를 “언어 구사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평하는 버튼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렸다. 알을 깨고 나오는 괴생명체와 커다란 비행접시를 그린 ‘비행접시와 외계인들’(1972∼1974년)을 보면 그의 상상은 초기부터 남달랐다. 공상가였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고향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연말에 열리는 카니발이었다. 그의 작품세계의 주제를 담은 작품들도 눈에 띈다. ‘유머와 공포’(카니발레스크) 주제가 대표적이다. 절제의 시간인 사순절 직전에 축제가 벌어진다는 모순은 그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다. 기괴한 거미를 그린 ‘무제―비정상적인 역사: 거미 선인장’(1994년)에서 볼 수 있는 튀어나온 눈동자, 꼬인 혓바닥이 대표적인 표현 방식이다. 버튼의 상상이 매번 현실이 됐던 건 아니다. 전시 후반부에는 실현되지 못한 영화, TV, 도서 프로젝트도 가감 없이 공개됐다. 눈과 발이 여러 개인 괴물과 꼬마의 이야기를 담은 드로잉 ‘무제―사탕 안 주면 장난칠 거예요’(1980년)가 눈길을 끈다. 버튼은 언제나 창작을 즐겼고, 아이디어를 메모하는 게 습관이었다. 종이가 없으면 냅킨을 사용했다. 출품작인 냅킨 드로잉 90점은 한 장 한 장이 다른 캐릭터로 채워져 있다. 실수로 흘린 붉은 소스까지도 그림의 일부로 활용됐다. 그의 열정은 전시 마지막에 재현한 영국 런던 작업실에서도 드러난다. 6∼9m² 남짓한 이 공간의 책상과 벽면 곳곳에는 그의 드로잉 작품이 빼곡히 걸려 있다. 올해 넷플릭스에서 공개하는 버튼의 TV 시리즈 ‘웬즈데이’를 엿볼 수 있는 그림들도 이 공간에서 관람이 가능하다. 9월 12일까지. 1만3000원∼2만 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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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세기 내내 그려진 화가의 기억 속 한 장면[영감 한 스푼]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태언 기자입니다.여러분, 혹시 어제 노을을 보셨나요? 저는 평소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대를 좋아하는데요. 오늘 소개할 화가 윤중식(1913~2012) 덕에 요즘 저도 노을 진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곤 합니다.지난달, 윤중식 화백의 유족은 성북구립미술관에 고인의 작품과 자료 500점을 무상 기증했습니다. 윤중식은 박수근 이중섭 등과 가깝게 지냈고, 살아생전 함께 단체전을 열었을 정도로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 이름이 낯선 분들이 훨씬 많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우선 ‘석양의 화가’라는 타이틀을 기억해두시면 됩니다.그는 생애 내내 석양 풍경을 그렸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레퍼토리를 고수하는 것은 드문 예인데요. 대체 윤중식에게 석양은 무엇이었던 걸까요?답하기에 앞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석양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각자의 답을 안고 윤중식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다, 그날 그 순간을윤중식1. 윤중식은 반세기 내내 석양 풍경을 그린다. 이는 실제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어릴 적 보았던 기억 속 고향의 석양을 떠올리며 그린 것이었다.2. 그의 고향은 평양이다. 윤중식은 월남 도중 아내, 두 딸과 영영 헤어진다. 다시는 볼 수 없는 가족과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석양을 그리는 동력이었다. 반복적으로 석양을 그리며 그는 인생의 무게를 거둬들여 나갔다. 3. 그는 자신의 그림을 너무나 아낀 나머지 시장에 잘 내놓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생전 대중의 주목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죽는 날까지 석양을 그리다 간 ‘석양의 화가’라는 공고한 타이틀을 갖게 된다.○눈앞에서 맞닥뜨린 가족과의 생이별평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윤중식의 삶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달라집니다. 1951년 1·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오던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는데요.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그의 장남 윤대경 씨(75)와의 대화를 잠깐 살펴봅시다.기자 : 월남 도중 가족이 이산했다고 들었습니다.윤대경 : 피난길에 갑자기 폭격이 가해지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께서는 젖먹이 둘째 여동생을 업고, 한 손으로는 제 손을 잡은 채 달리기 시작하셨죠. 어머니는 첫째 누나와 함께 반대 방향으로 피신했고요. 그 후로 영영 두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셋이서 내려가다 둘째 여동생도 죽었어요. 젖먹이었거든요. 1·4 후퇴 피난길은 겨울길이었고, 우리는 먹을 게 없었죠.기자 : 두 분이 도착한 곳은 어디인가요?윤대경 : 부산이 첫 피난지였습니다. 이후에 대구를 거쳐서 1953년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당시 부산에는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던 이중섭 선생이 먼저 자리 잡고 계셨어요. 우리보다는 형편이 나아서 이중섭 선생이 “걱정 말고 우리 집에 가자”며 챙겨주셨어요. 그런데 만나기로 한 날, 이중섭 선생이 항구 바닥에 만취해 계셔서 저희는 결국 이모 집으로 가 지냈습니다. 알고 보니 선생이 아내를 만나러 일본으로의 밀항을 요구하면서 술을 걸치셨다고 하더이다. 하하.이런 사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윤중식의 작품은 모두 그가 남하한 후의 작품뿐입니다. 작품을 들고 전쟁길을 걸을 순 없었을 테니 말이죠. 대신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피난길의 순간을 그린 드로잉을 볼 수 있습니다. 윤중식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낡은 종이와 수채물감을 구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드로잉 시리즈 28점에는 총을 쏘는 인민군, 울부짖는 피난민들, 정신없이 죽을 먹는 아들의 모습 등이 담겨있습니다.제가 가장 오래도록 봤던 드로잉은 1번 작품이었습니다. 불타는 고향을 등지고 온 가족이 남으로 떠나는 모습입니다. 5명이 함께 했던 마지막 장면을, 가족과 헤어지고 난 뒤 그렸을 윤중식의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윤중식은 추후 서울 시내 보육원을 헤집고 다녔다고 합니다. ‘헤어진 첫째 딸을 찾을 수 있진 않을까’하는 마음에 발톱이 다 빠지도록 말이죠.○반세기 내내 그린 석양그는 1953년 서울로 온 지 1년 만에 첫 개인전을 엽니다. 이때 이경성 비평가로부터 ‘석양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는데요. 그로부터 내내 윤중식의 개인전에서는 석양을 볼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이 석양은 그가 직접 어딘가에 사생을 나가 본 풍경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어릴 적 고향에서 봤던 노을 진 풍경을 마음속으로 떠올린 것이죠. 실제 윤중식은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석양을 그렸다고 합니다. 즉 그에게 석양은 곧 향수였습니다. 도로 갈 수 없는 고향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던 것이죠. 이번 전시의 제목 ‘회향’의 한자가 ‘回向’(돌아올 회·향할 향)가 아니라 ‘懷鄕’(품을 회·시골 향)인 이유기도 합니다. 그는 자기 삶이 가장 온전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몇 번이고 마음의 눈으로 그때를 되새김질했습니다.“붉은 태양이 서쪽 산으로 기울어질 때면 석양은 찬란한 빛과 신비의 세계로 물들고 다양한 변화에 가슴마저 울렁거리게 된다. 너무나 순간적인 빛과 색을 바라보는 찰나 강한 빛과 색은 사라지고 안식과 침묵에 고요한 적막으로 변해버린다.” -윤중식의 에세이 ‘석양’그의 작품이 따뜻한 색감을 갖고 있지만 아련함과 쓸쓸함을 동반하는 이유겠지요. 하루를 비추던 해가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 찬란한 주홍빛 하늘을 볼 수 있는 것도 잠깐. 그리고 가족과 행복했던 시절도 윤중식에게는 너무나 짧게 느껴졌을 겁니다. 하지만 짧았던 이 순간을 그는 가장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성북동에서 사랑하는 빠렛트와 함께석양은 그가 남기고 간 아틀리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장에는 그의 아틀리에를 재현해놓은 공간이 있습니다. 미술관은 그가 1963년부터 살았던 성북동 아틀리에의 물품들을 그대로 옮겨왔는데, 그의 팔레트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사랑하는 빠렛트/2011년 8, 2일/현재 98세/“사용 중”그 팔레트를 사용해 마지막까지 그린 작품도 의자 앞에 놓인 석양 그림입니다. 작고하기 약 10년 전부터 눈이 잘 보이지 않았던 탓에 색감도 형태도 뭉개져 있습니다.윤중식은 별세 전날까지 이 앞에 서서 그림을 그렸고, 일어나 아침 우유 한 잔을 마신 뒤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이번 전시를 담당한 김경민 성북구립미술관 학예연구사와의 대화를 통해 윤중식이 남기고 간 삶의 흔적을 살펴봅시다.기자 : 윤중식 화백의 아틀리에 공개는 처음 아닌가요?학예사 : 윤중식 선생님은 가족들조차도 작업실에 잘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어요. 그러니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도 처음이 맞습니다. 작업실에 놓인 물건들을 보면 선생님께서 얼마나 그림 그리는 것 자체를 사랑하셨는지 아실 수 있습니다. 값이 비싼 캔버스 천을 구하기 힘들 때에는 도자기와 조개 위에도 그림을 그리셨어요. 기자 : 일상품이 캔버스셨네요.학예사 : 그렇죠. 실제로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중 약 15점만 캔버스에 그려졌고 나머지는 하드보드지, 종이(캔트지), 박스지 등에 그려진 것들입니다. 작업실 한편에 놓아뒀던 항아리를 그린 출품작 ‘무제’도 케이크 받침대에 그린 그림입니다. 전시에 출품되진 않았지만 목가구의 문짝이나 과일포장 스티로폼, 심지어는 양파링 과자 포장지에도 그린 그림들이 있었죠.기자 : 재현 공간 입구에 놓인 그림 ‘무제’ 속 모델은 누구인가요?학예사 : 부인입니다. 윤중식 선생님은 서울에 정착하신 뒤 새로 가정을 일구셨어요. 전쟁통에 두 딸을 잃었지만 재혼한 부인 덕에 두 딸을 다시 얻게 되죠. 이 초상은 재혼한 부인의 얼굴인데요. 윤중식 선생님께서 별세하시기 한 달 전에 그린 그림입니다. 부인께서는 교통사고로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고, 윤중식 선생님은 거의 눈이 보이지 않으셨지만 그림은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기자 : 풍경화만 그리신 건 아니신가봅니다.학예사 : 풍경이 윤중식 선생님 작품의 주를 이루는 건 맞지만, 실내 정물과 인물화도 즐겨 그리셨어요.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셔서 주로 작업실에서 보낸 시간이 많다보니 그런듯합니다. 인물화의 모델도 대개가 손녀, 부모님, 부인 등 가족입니다.기자 : 작업량이 적지 않은데 왜 대중에 덜 알려졌던 걸까요?학예사 : 미술시장에 유통된 작품이 적기 때문이에요. 선생님께서는 작품을 판매하는 걸 꺼리셨어요. 작품이 흩어지는 걸 원치 않으셨거든요. 대신 선생님께서는 작품을 작업실에 손수 모아놓으셨습니다. 물론 상경 후 초반에는 몇몇 작품을 파시긴 했는데 그때마다 정말 안타까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여러 전시회에 초대되어도 응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오롯이 작업에만 몰두하셨고요. 팔레트 글귀에서 볼 수 있듯 선생님께서는 정말 그림 그리기 자체를 사랑하셨던 분이셨습니다.이곳 아틀리에는 여전히 성북구에 존재합니다. “평양이란 고향을 떠나왔는데, 다신 갈 수 없으니 새로운 고향을 만들어야 했다”던 장남 윤대경 씨의 말처럼 성북동은 윤중식에게 제2의 고향이었습니다. 윤중식이 50년 넘게 성북동에 살았던 이유도 언덕 위의 석양과 산새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고요.그는 끊임없이 석양을 그리면서 때론 추억에 잠겨 미소 짓고, 또 때론 그리움에 서글펐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인생의 하중을 받아들여나갔을 겁니다. “그의 그림에 불안과 회한 같은 것이 노골적으로 표출되지 않은 것은 풍랑 치는 시기를 지나 이제는 그것마저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커다란 도량과 경륜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는 서성록 평론가의 말처럼요. 여러분께서는 이 화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자 떠오르는 장면이 있나요? 기억 속에 오래 자리하고 있는 장면이요. 평생을 바쳐 곱씹어도 좋을, 언제든 다시 재회하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지금 눈을 감고 찬찬히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전시 정보 윤중식10주기 추모전 《회향懷鄕》2022.03.20~2022.07.03성북구립미술관(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성북로 134)작품수 140여 점※‘영감 한 스푼’은 국내 미술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아래 링크로 구독 신청을 하시면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뉴스레터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영감 한 스푼 뉴스레터 구독 신청 링크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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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행스님 “지도자 반목은 국난 자초, 통합 힘써야”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사진)이 부처님오신날(5월 8일)을 앞두고 미리 배포한 봉축사에서 “선거라는 합법적인 대결의 장이 끝나면 지도자들은 상호 존중과 화합을 통해 국민 통합에 힘써야 한다”고 밝혔다. 원행 스님은 “우리 역사를 보면 국민의 마음이 하나로 모였을 때 전쟁을 비롯한 어떤 위기도 모두 극복해 냈지만 지도자들이 분열하고 반목하면 민중의 삶이 피폐해지고 국난을 자초했다”고 말했다. 이어 부처님오신날 이틀 뒤에 열리는 대통령 취임식을 비롯해 6월 지방선거, 9월 총무원장 선출 등을 언급하며 “이런 중대한 일들을 모두 희망의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며 “국가의 중대사와 우리 종단의 중대사가 모두 한 단계 성장과 발전을 이루는 화쟁의 역사, 희망의 역사가 되도록 힘써 주시기를 당부드린다”고 덧붙였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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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팀 버튼, 서울서 전시 두번 여는 이유가 광장시장 부침개 때문?

    “10년 만에 돌아왔네요. 시간이 많이 걸렸는데 다시 만나 기쁩니다.” 29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기자들과 만난 미국 영화감독 팀 버튼(64)이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30일 ‘팀 버튼 특별전: The World of Tim Burton’ 개막에 앞서 이날 한국을 찾았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대표작 ‘비틀쥬스’(1988년), ‘가위손’(1991년), ‘찰리와 초콜릿 공장’(2005년), ‘유령 신부’(2005년) 등과 관련된 일러스트, 회화, 사진, 조각 등 총 522점을 선보인다. 이 중 150여 점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전시는 ‘유머와 공포’ 등 그의 작품세계를 설명하는 10가지 주제로 구성됐다. ‘The World of Tim Burton’ 전시는 그의 두 번째 월드투어 프로젝트다. 2012년 그가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공동 기획한 전시는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등을 거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다. 그는 한 도시에서 한 번만 전시를 여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그럼에도 두 번째 서울 전시를 연 데 대해 그는 “10년 전 광장시장에서 먹은 부침개와 시장 사람들의 따뜻한 정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전시가 열리는 DDP에 큰 관심을 보였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유작인 DDP에서 꼭 전시를 열고 싶었다. 우주선 같은 곳에 들어오니 집에 들어온 것처럼 편안하다”며 웃었다. 그는 DDP 디자인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제작한 캐릭터 조형물을 전시장 입구에 설치했다. 그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밖으로 분출할 수 있도록 창의력을 갖고 있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9월 12일까지. 1만3000원~2만 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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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술 입은 상업사진, 작품이 되다

    상업사진은 흔히 세속적인 사진으로 취급받는다. 국내 첫 상업사진 스튜디오를 설립한 한국 상업사진의 대부 김한용(1924∼2016)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 사진에 완성이란 없다. 다만 완성에 근접하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할 뿐”이라고 밝혔다. 상업사진 한 장을 남기기까지 그가 기울인 노력을 헤아릴 때 선뜻 ‘상업사진이 예술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언커머셜(UNCOMMERCIAL): 한국 상업사진, 1984년 이후’는 국내 상업사진의 미적 특성을 조명한다. 국내 대표 상업사진가 29명의 작품 150여 점이 출품돼 상업사진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다. 전시는 ‘비주얼 패션 매거진’을 표방한 잡지 ‘월간 멋’이 창간된 1984년을 상업사진의 기점으로 삼는다. 엘르, 보그 등 해외 유명 패션잡지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 발간된 ‘월간 멋’은 프랑스 패션 잡지 마리끌레르와 제휴해 서울의 패션 세계를 조명해 왔다. 1전시실은 1세대 상업사진가로 꼽히는 김중만 구본창 김용호 김영수 등의 주요 작품을 선보인다. 이들은 대개 해외유학파로 1984년 무렵 속속 귀국했다. 유학 당시 최신 장비를 활용해 작업한 이들이 귀국해 활동하면서 국내 상업사진은 발전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두 남성이 서울 용산구의 한 창고에서 포즈를 취한 구본창의 ‘알렉시오’(1988년)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의 작업은 마치 영화 스틸컷 같다. 선례가 없어 더욱 실험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보정 기술이 흔치 않아 순수한 사진의 힘으로 브랜드를 알렸다. 김영수의 ‘에스콰이아 포트폴리오’(1991년)는 카메라 렌즈에 수증기를 뿌려 구두의 은은한 느낌을 살렸다. 2, 3전시실에선 상업사진의 특징인 ‘거대한 자본력, 화려함, 분업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2000년대 이후 상업사진은 패션 잡지를 통해 공개돼 왔다. 대중문화 시장이 커지면서 상업사진가들은 음반 화보나 영화 포스터에도 참여했다. 목정욱의 ‘누메로 러시아’(2020년)는 프랑스 패션잡지 누메로의 러시어판을 장식한 모델 정호연을 담은 작품. 한국 모델이 해외 잡지 표지에 등장하고 한국 사진가가 해외 잡지 표지를 찍는 변화를 상징한다. 스타일링, 헤어 담당자가 모델을 단장하며 촬영을 준비하는 장면을 담은 안상미의 ‘하퍼스 바자’(2021년)는 협업이 필수인 상업사진의 특징을 보여준다. 양복점에서 일상을 찍은 듯한 레스의 ‘아레나 옴므 플러스’(2018년)나 가수 이효리를 촬영한 김태은의 ‘더블유’(2017년)는 단조로움을 부각해 상업사진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낸다. 6월 26일까지. 5000∼7000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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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7년 베니스비엔날레 역사를 뒤엎다, 최고상 휩쓴 흑인 여성들[이번주 미술계]

    ○ 베니스비엔날레 휩쓴 흑인 여성들올해 베니스비엔날레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흑인 여성 작가들이 휩쓸었습니다. 베니스비엔날레 조직위원회는 23일(현지시간) 공식 개막과 함께 시상식을 열었는데요. 미국의 조각가 시몬 리(55)가 본 전시 부문 황금사자상(최고 작가상), 영국관 대표작가 소냐 보이스(60)가 국가관 부문 황금사자상을 받은 겁니다. 두 사람은 각각 미국과 영국 국가관 대표작가로 선정된 최초의 흑인 여성작가입니다. 역사적으로 소외 받아온 흑인 여성의 정체성을 주제로 한 작품을 내놨죠. 리는 눈을 가린 대형 흑인 여성 청동 조각 ‘브릭하우스’를 본 전시에서 선보였습니다. 보이스는 영국관에 사운드 설치 작품 ‘Feeling Her Way’를 통해 영국 음악사에서 비주류였던 여성 뮤지션을 부각했습니다.○ 프랑스 아를에 문 연 이우환 미술관한국 생존 작가 중 작품가가 가장 높은 예술가 이우환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이달 15일 프랑스 아를에 세워졌습니다. 이곳은 일본 가가와현 나오시마와 한국 부산에 이어 세계 세 번째 이우환미술관이죠.아를 시는 로마제국 유적이 많고, 반 고흐가 머물면서 다양한 작품을 남긴 곳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우환미술관은 16~18세기에 지어진 베르농 호텔에 개관했습니다. 일본의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협조로 완성된 곳이죠. 25개의 방이 있는 옛 3층 주택이며, 연면적 1350㎡ 규모라고 합니다.외신에 따르면 1층에 10점의 설치작품과 30점의 회화가 전시돼 있고 2층에선 특별 전시가 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음악을 전시한다는 백남준의 꿈, 61년 만에 현실로음악을 듣는다가 아닌 전시한다. 백남준이 20대에 꾼 꿈입니다. 그가 만든 악보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이 국내 최초로 시연되고 있습니다. 이 악보에는 음계나 음표로 이뤄져있지 않습니다. 웬 지시문만 있지요.전시 완벽한 최후의 1초―교향곡 2번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7팀이 그의 지시문을 보고 해석해 시각화한 전시입니다. 이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듣는 것에 한했던 음악에 대한 통념은 사라집니다.▶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0425/113054899/1※‘이번 주 미술계’는 한 주 간 눈 여겨 볼만한 미술 소식을 정리해드리는 코너로 매주 금요일 발송되는 뉴스레터 ‘영감한스푼’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영감한스푼’은 국내 미술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창의성의 사례를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아래 링크로 구독 신청을 하면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뉴스레터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영감 한 스푼 뉴스레터 구독 신청 링크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51199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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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려함-분업화-자본력 갖추자…상업사진, ‘예술’로 성장했다

    국내 최초로 상업사진 스튜디오를 설립한 한국 상업 사진의 대부 김한용(1924~2016)은 생전 한 인터뷰에서 “내 사진에 완성이란 없다. 다만 완성에 근접하기 위해 노력하고 실천할 뿐”이라 말했다. 흔히 상업사진은 세속적인 사진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김한용의 말을 보면 ‘상업 사진이라고 예술적이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선뜻 ‘맞다’고 답할 수 없다.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언커머셜(UNCOMMERCIAL): 한국 상업사진, 1984년 이후’는 국내 상업사진 속 독자적인 미적 특성을 조명한다. 전시가 상업사진의 계보를 따라가기 때문에 국내 상업사진가 29명의 작품 150여 점이 대거 출품됐다. 1984년을 기점으로 잡은 것은 그해 국내 상업 사진계에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주얼 패션 매거진’을 표방한 잡지 ‘월간 멋’이 그해 5월 창간했다. 엘르, 보그 등 현재 유명 잡지사들이 국내에 들어서기 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온 ‘월간 멋’은 프랑스 패션 잡지 ‘마리끌레르’와 제휴해 서울에 글로벌한 패션을 소개했다.이 즈음 1세대 상업 사진가들이 해외 유학 후 최신 장비를 습득해 귀국하면서 상업사진의 발전은 더 박차를 가했다. 1전시실은 그러한 상업 사진 동향을 이끈 김영수, 구본창, 김중만, 김용호의 주요 작업물을 선보인다. 구본창의 ‘알렉시오’(1988) 등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의 작업은 마치 영화 스틸컷 같다. 전형이라 불릴 만한 선례가 없어 더욱 실험적일 수 있었다. 특히나 가공이나 보정 기술이 부재하던 때였기에 순수 사진의 힘으로 브랜드를 알렸다. 일례로 김영수의 ‘에스콰이아 포트폴리오’(1991)는 카메라 렌즈에 수증기를 뿌려 구두의 은은한 느낌을 살린 작품이다.장서영 일민미술관 에듀케이터가 꼽은 상업사진의 특징 ‘거대한 자본력, 화려함, 분업화’는 2~3전시실에서 두드러진다. 2000년대 이후 상업사진은 패션 잡지를 매개로 공개됐으며, 대중문화 시장이 성장하면서 상업 사진가들은 음반 화보나 영화 포스터에도 참여했다. 목정욱의 ‘누메로 러시아’(2020) 등은 한국 모델이 해외 잡지 표지에 등장하거나 한국 사진가가 해외 잡지 표지를 찍는 변화를 상징한 예이며, 안상미의 ‘하퍼스 바자 코리아’(2021)는 협업과 분업을 필수로 하는 상업사진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와중에 일상 모습을 찍은 듯한 레스의 ‘아레나 옴므 플러스’(2018)나 이효리를 모델로 한 김태은의 ‘더블유’(2017)는 단조로움을 부각해 상업 사진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전시는 6월 26일까지. 5000~7000원.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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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을 전시한다’는 백남준의 꿈, 61년 만에 현실로

    ‘귀로 듣는 음악을 전시한다.’ 백남준(1932∼2006)이 20대에 꿈꿨던 목표다. 1961년, 백남준은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이란 이름의 악보를 만들었다. 오선지에 음계나 음표를 적어놓는 여느 악보들과는 다르다. 사각형 모양의 선 위로 ‘X선 촬영실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 붉은 전등’ ‘신비스러운 향’ ‘재잘거리는 아기 소리’ 등 음표의 기능을 대신하는 지시문만 빼곡히 적혀 있다. ‘듣는 것’에 한했던 음악에 대한 통념을 깬 백남준의 실험적 시도였다. 살아생전 연주된 적 없던 이 교향곡이 61년이 지난 지난달 24일 국내 처음 시연됐다. 경기 용인시 백남준아트센터가 올해 탄생 90주년을 맞은 백남준을 기리며 준비한 특별전에서다. 전시 ‘완벽한 최후의 1초―교향곡 2번’은 사운드,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7개 팀이 백남준의 악보를 해석해 시각화했다. 전시장은 개별 방처럼 구획을 나눠 악보별 지시문을 이행한다. 1번 악보에는 ‘매우 여리게/물이 흐른다/낡은 괘종시계가 시끄럽게 울린다/테이프 녹음기…’라고 적혀 있다. 권용주 작가는 물이 가득한 드럼통을 만들고, 송선혁 작가는 백남준이 지시한 소리들을 채집해 테이프에 담는 식으로 지시문을 구현했다. 백남준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언급하기도 했다. 3번 악보 ‘우리 안에 살아 있는 닭/조명 100W/부드럽고 신비스러운 향’이 대표적이다. 이는 사람 외의 생명체와 사물이 내는 소리 또한 음악이 될 수 있다는 백남준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전시의 특징은 의도된 떠들썩함이다. 악보별로 방의 경계는 존재하지만, 옆방의 소음을 완벽히 차단하는 벽체가 없어 많은 소리가 한데 뒤섞여 있다. 한누리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사는 “교향곡은 관객에게 한 방향의 음악을 듣게 하는 데 비해 백남준의 교향곡은 악장이라 볼 수 있는 사각형이 순서를 가늠할 수 없게 펼쳐져 있다. 시간순이 아니라 동시에 진행되는 백남준의 음악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했다. 다방향성(多方向性)으로 정의되는 백남준의 음악세계는 관객 참여가 중요하다. 백남준은 사각형 위에 구체적인 모양을 그리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텍스트만을 보고 각자 다른 형태를 상상해 악보를 완성시킨다. 작가들만이 아니다. 각 방 중간중간에는 피아노, 축음기 등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다. 백남준이 1962년에 쓴 ‘음악의 전시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나는 청중이 자유롭게 행동하고 즐기기를 바란다”고 밝힌 것처럼 그의 악보를 넘기는 주체, 즉 방을 넘나드는 관객이 누구냐에 따라 음악이 달라진다. 6월 19일까지. 무료.용인=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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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곧고 푸른… 대나무를 닮은 고장에 대해

    전남 담양군에는 가사문학(歌辭文學)면이 있다. 면 단위 행정구역의 이름이다. 관동별곡부터 사미인곡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가사문학 작품에는 유독 담양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많다. 이른바 ‘담양 18가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 인터뷰 연재로 유명한 현직 언론인과 오랫동안 문화재 분야를 취재한 전직 언론인인 교수가 함께 쓴 이 책은 담양을 현지 답사한 뒤 쓴 기행문이다. 앞서 두 사람은 경기 남양주시의 역사를 해설한 ‘왕들의 길, 다산의 꿈 조선 진경 남양주’(컬처룩)도 같이 썼다. 이번에는 담양의 가사문학을 비롯해 고택과 대나무, 누각과 정자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풀어냈다. 담양의 상징인 대나무는 빼놓을 수 없는 소재. 담양 관광 1번지 죽녹원과 유엔식량농업기구(FAO)의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된 삼다리 대나무숲 및 만성리 대나무밭, 대나무 공예 장인을 통해 대나무의 역사와 미래를 짚는다. 양곡 창고를 고쳐 지어 대나무 파이프오르간 연주를 들려주는 담빛예술창고를 특히 자세하게 묘사했다. 옛것뿐 아니라 새롭고 역동적인 문화가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장소에 대한 정보도 담았다. 담양 금성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 거점이었고, 동학농민군과 항일의병의 격전지였다. 다채로운 사진과 함께 생동감 있는 글을 읽다 보면 어느덧 담양 여행을 떠올리게 될지 모른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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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TS, 라스베이거스를 ‘보라해거스’로 만들다

    “라스베이거스는 사막의 기적이라 말한다. 아미는 내가 기적을 느끼게 한다.”(RM)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아미가 있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최고의 뷰.”(뷔) 9일(현지 시간) 방탄소년단의 ‘퍼미션 투 댄스 온 스테이지―라스베이거스’ 공연이 펼쳐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얼리전트 스타디움은 온통 방탄소년단을 상징하는 색인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이날 ‘ON’을 시작으로 ‘DNA’ ‘피 땀 눈물’ 등을 이어가던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라스베이거스 관객분들의 텐션이 높다”고 외치자 열기가 한층 고조됐다. 방탄소년단은 8, 9일에 이어 15, 16일에도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이번 콘서트를 기점으로 라스베이거스 스트립 지역 인근에서 방탄소년단과 관련된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졌다. 방탄소년단 사진전, 대규모 팝업스토어, 방탄소년단 테마 객실, 방탄소년단이 즐겨 먹는 한식 요리를 코스로 제공하는 식당, 방탄소년단 음악이 나오는 벨라지오 분수쇼가 도시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일명 ‘더 시티’ 프로젝트로, 202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렸던 ‘맵 오브 더 솔’ 오프라인 콘서트 때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팬데믹으로 미뤄지다 이번에 라스베이거스에서 비로소 시작됐다. 라스베이거스관광청은 공식 트위터 계정 이름을 ‘보라해거스(BORAHAEGAS)’로 바꾸며 방탄소년단의 방문을 뜨겁게 환영했다. 보라해거스는 방탄소년단 팬클럽인 아미의 은어 ‘보라해’(무지개의 마지막 색인 보라색 뒤에는 다른 색이 없는 만큼 서로 믿고 오래오래 사랑하자는 뜻)와 라스베이거스의 합성어. 7일 보라색 배경에 흰색 영문으로 ‘보라해거스’라고 적힌 전광판이 시내 곳곳에서 빛을 비춰 라스베이거스는 보랏빛 물결로 일렁였다. 8일 오전 사진전과 팝업스토어가 열리는 멀티콤플렉스 ‘에어리어(AREA)15’에는 긴 줄이 만들어졌다. 캐나다에서 온 캐시(37)는 “서울 콘서트를 준비했던 과정을 사진으로 보니 방탄소년단과 교감하고 있는 느낌”이라며 “많은 아미를 콘서트장이 아닌 곳에서 만나고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17일까지 진행된다. 김태호 하이브 최고운영책임자(COO)는 9일 기자간담회에서 “공연 관람 여부와 관계없이 팬과 지역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미국 등에서 지속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날 열린 공연의 구성은 지난달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열린 콘서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차이점은 아미의 함성 소리였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Make some noise!”를 여러 차례 외쳤고, 멤버들이 “아미들 목이 걱정된다”고 할 정도로 아미는 큰 함성으로 화답했다. 무함성으로 진행된 서울 콘서트와 달리 이날 공연장에선 마스크를 착용하되 함성은 가능했다. 빅히트뮤직에 따르면 총 네 차례 콘서트의 표는 모두 매진됐다. 각각 5만 명씩 입장할 수 있어 모두 20만 명이 관람한다. 그래미 어워즈 수상이 불발된 데 대해 멤버 지민은 “정말 많이 아쉬웠다. 그래미에 크게 의미를 가졌던 게, 한국인으로서 저희 음악이 어디까지 닿는지 궁금했고 팬들의 응원에 보답하고 싶어 꼭 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진은 “그래미는 언제든 도전이 가능하니까 최대한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했다.라스베이거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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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브 “BTS 병역문제, 국회서 조속한 결론을”

    방탄소년단의 군 복무에 대해 소속사 하이브가 국회에서 조속히 결론을 내려달라고 촉구했다. 이진형 하이브 커뮤니케이션총괄(CCO)은 9일(현지 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MGM그랜드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방탄소년단의 병역에 대한 논의가 이번 국회에서 정리됐으면 좋겠다. 불확실성이 어려움을 주는 게 사실이다”고 말했다. 이 CCO는 “2020년 이후 병역 제도가 변화하고 있고 현재 병역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라 이를 주시하고 있다. 방탄소년단 멤버들도 입대 시점 등이 불확실한 상태가 지속되니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그는 “방탄소년단은 병역과 관련한 업무를 회사에 일임한 상태”라며 “멤버들은 그간 ‘국가의 부름에 응하겠다’고 밝혀 왔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덧붙였다. 현재 국위를 선양한 대중문화예술인이 봉사활동 등으로 병역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한 병역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2020년 대중문화예술 분야 우수자의 군 징집 및 소집을 만 30세까지 연기할 수 있도록 한 병역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1992년생인 방탄소년단 멤버 진은 올해 말까지 군 입대가 연기됐다. 병역법이 개정되지 않으면 진은 내년에 입대해야 한다.라스베이거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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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름 모를 이들의 가장 깊숙한 이야기…‘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전시장에 들어서면 나직이 벨소리가 들려온다. 수화기를 들면 누군가의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다음주에 짝을 바꿔요. 그때 꼭 1번이 되게 해주세요.” “엄마, 엄마 딸 여자친구 있어. 이렇게라도 말하고 싶었어. 사랑해.” 목소리의 주인공은 몇날 며칠 전, 전시장에 놓인 공중전화부스에 비밀을 털어놓고 간 또 다른 관람객이다. 수화기를 매개로 관객은 이름 모를 이의 가장 깊숙한 이야기를 듣는다. 설은아 작가(47·사진)가 기획한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전시 이야기다. 설 작가는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석파정 서울미술관, 소다미술관 등에서 여덟 차례 해당 전시를 해왔다.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만 10만 여명의 관람객을 기록하는 등 전시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렇게 3년간 모인 통화만 9만7934통. 설 작가는 이 목소리들 중 가장 애정 하는 450개의 통화 내용을 모아 지난달 25일 동명의 책(수오서재)을 발간했다. 1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만난 설 작가는 관련 전시에 대해 “가장 중요한 건 내가 나에게 억누르고 있었던 말을 꺼냈다는 것”이라며 “내 안에 드는 모든 마음에 친절했으면 좋겠다는 의도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일지라도 세상 누군가는 선입견 없이 듣는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도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실험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전시가 발화자를 위한 공간이었다면, 책은 청취자를 위한 물건이다. 설 작가는 “힘들 때 위로가 되는 건 ‘괜찮아 힘내’가 아니라 내가 겪고 있는 아픔이 보편적인 아픔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며 “(관객이)수많은 이야기 중에 자신과 공명(共鳴)하는 이야기들을 선물처럼 가지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프로젝트는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작가는 전시 기간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내뱉을 수 있도록 ARS 번호를 열어놓고 있다. 아직도 하루에 적게는 30통, 많게는 7000통까지 음성 메시지가 온다. 물론 다수의 전화는 내내 침묵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침묵도 하나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작가의 역할은 지구 반대편 세상의 끝인 듯한 공간에 그 목소리들을 놓아주는 것까지다. 그는 2018년 첫 전시를 마치고 2019년 아르헨티나 최남단의 마을 우수아이아에 가 관객들의 음성 메시지를 틀어놓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모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전했다. 설 작가는 2019년부터 모인 목소리들을 놓아주러 지난 5일에도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으로 떠났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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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치다가도 격정에 휩싸여 작업” 권진규, 사물 너머 ‘영원성’ 담다

    “인생은 공(空), 파멸.” 조각가 권진규(1922∼1973)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전 유서에 남긴 말이다. 생전 개인전을 세 번밖에 열지 못했던 그는 사후에야 ‘근대 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며 재평가받았다. 그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는 회고전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의 회고전 중 최대 규모로, 1950∼1970년대 조각 137점과 회화, 드로잉, 아카이브 등 총 173점을 시기별로 선보인다. 유족의 기증작과 함께 이건희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고려대박물관, 리움을 비롯한 기관과 개인 소장자에게 대여 받은 작품들로 구성됐다. 방탄소년단 멤버 RM이 소장한 조각품 ‘말’(1965년)도 포함됐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 여인상이다. 전시 제목 중 ‘노실(爐室·가마가 있는 방)’은 권진규의 아틀리에를 의미한다. 그가 아틀리에를 짓고 작품 활동에 전념했던 시기에 가장 많이 만든 것도 여성 흉상이다. 여인상의 제목은 모델의 실명이다. 대개 권진규가 미술대 강사일 때 만난 제자들의 모습을 담았다. 대표작 ‘선자’(1966년), ‘지원의 얼굴’(1967년), ‘현옥’(1968년)을 보면 신체 부위가 단순화돼 있다. 머리카락이나 옷 장식이 생략돼 관람객은 여인상의 얼굴만을 똑바로 마주한다. 권진규의 작품에 기가 서려 있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옥’ 소장자 김현옥 씨(75)는 모델로 섰던 때를 떠올리며 “선생은 긴장과 안도를 동시에 느끼게 했다”고 말했다. 말이 많지 않고 담백한 사람이기도 했다. “두 달간 작업실을 드나들었는데 거리를 둬 비밀스러우셨어요. 제 얼굴 한쪽을 빚다가 ‘현옥이는 고생을 참 안 했나 보구나’ 농을 치기도 하셨죠. 집중하는 순간순간 얼굴에 분노나 격정이 보였고요.” ‘불상’(1971년), ‘흰소’(1972년)에서 볼 수 있듯 동물상, 불상, 탈 가면 등 다양한 형상을 만들었다. 그중 초기작 ‘기사’(1953년)는 그가 석조 조각의 맥을 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젊은 여인과 말의 형상을 담았다. 다섯 개의 면으로 이뤄져 각 면마다 각기 다른 형상을 띠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애제자였던 김정제 씨(71)는 “선생은 작품을 자식이라 불렀다”고 회고했다. “선생은 이따금씩 ‘정제야, 너는 현실과 타협하며 살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권진규 스스로는 당대 추상 조각의 유행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 자신만의 색깔을 작품에 담았다. 권진규는 후기로 갈수록 모델의 내적 세계를 담는 데에 천착했다. 자신을 승려로 형상화한 ‘가사를 걸친 자소상’(1969∼1970년), 예수의 번뇌를 담아낸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970년)가 대표적이다. 한희진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권진규는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영혼, 사라지지 않는 영원성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전시 공간은 권진규의 정체성을 곳곳에 반영했다. 전시장에는 우물과 가마를 떠올리게 하는 모양의 좌대가 삼공블록과 벽돌로 만들어져 있다. 1965년 신문회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권진규가 삼공블록과 벽돌을 이용해 자기 작업실을 형상화한 데서 착안했다. 5월 22일까지. 무료.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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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스럽지 않아서 더 특별한 곳, 진흙으로 빚어낸 담백함을 만나다

    서울시립미술관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 전시장에 들어서면 동그란 원형 좌대와 따로 마련된 네모난 공간이 눈에 띈다. 우물과 가마의 형상이다. 이 둘은 권진규와 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가 주로 썼던 기법인 테라코타(흙으로 빚어 불에 굽는 방식)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그의 아틀리에 안에는 실제로 그가 작업하며 썼던 우물과 가마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렇듯 이 전시 공간은 권진규의 정체성을 곳곳에 반영하고 있다. 전시장을 건축한 김세진 지요건축사사무소장은 “별스럽지 않음”을 이 공간의 특징으로 꼽았다. 지난해 9월, 김 소장이 권진규 아틀리에에 처음 방문했을 때 느낀 느낌이기도 하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문, 가공되지 않은 벽, 특별한 물성이 느껴지지 않는 면들, 무덤덤한 선반…. 모든 것이 보편적이고 별스럽지 않았다”는 것. 김 소장은 그런 담백함을 전시 공간에도 그대로 투영했다. “요즘은 전시장 자체가 재밌게 꾸며진 공간들이 많지만, 이 공간만큼은 작품을 위한 배경을 자처하고 싶었다”는 김 소장의 의도는 좌대에서부터 드러난다. 좌대는 무광에 흰색이다. 심심해보일 정도로 특징이 없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권진규 조각의 질감과 색을 부각시킨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좌대 밑을 바치고 있는 것들이 삼공블럭과 벽돌이란 것이다. 이는 1965년 신문회관에서 1회 개인전을 열었을 때 권진규가 삼공블록과 벽돌을 이용해 자기 작업실을 형상화한 데서 착안했다고 한다. 전시장에서 주로 볼 수 없었던 재료는 이질감을 주기도 한다. 김 소장은 “블록과 좌대 사이에 공백이 있다. 날것의 재료처럼 보이는 블록이 완성 이전의 단계를 뜻한다면, 좌대부터는 온전히 작품을 위한 무대처럼 보이도록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각 뒤로 벽을 세워 다른 작품으로의 시선을 차단한 것들은 은연중에 중요함을 내포한 작품들이다. 자신을 예술가 이전에 장인이라 생각했던 권진규의 의지를 살펴볼 수 있는 ‘손’(1963년), 중·고교 교과서에도 실린 ‘지원의 얼굴’(1967년), 한 교회가 제작을 의뢰해놓고 누추하다는 이유로 반려해 평생 작가의 작업실에 있었다는 조각상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970년) 등은 그의 예술 세계에 빠질 수 없는 작품들이다. 이중 가장 넓은 공간을 홀로 차지하고 있는 작품은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승려로 자신을 표현한 말기 작품 ‘가사를 걸친 자소상’(1969~1970년)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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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리 “혼자서도 존재감 낼 수 있는 캐릭터가 좋아”

    “죄송해요. 제가 수다쟁이가 됐네요.” 지난달 31일 화상으로 만난 배우 김태리(32·사진)는 해맑은 소녀를 연상시켰다. 화면 밖으로 뻗는 큰 동작과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내내 이어졌다. “아직도 애처럼 주체를 못 하고 이럴 때가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한숨을 쉬기도 해요. 그게 희도랑 닮았어요.” 희도는 3일 종영한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그가 맡은 주인공인 18세 펜싱 국가대표 선수. 드라마는 1998년을 배경으로 청춘의 방황과 성장을 그렸다. 김태리는 방송을 보고 “희도를 더 바보 같고 멋있고 예쁘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고 했다. 그는 “희도는 애써 말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사랑스럽고 건강하고 빛나는 아이다. 이 정도로 사랑받을 줄은 몰랐다. 뭘 해도 다 용서해주시니 ‘더 해도 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희도는 개구쟁이지만 누구보다 단단한 캐릭터. 김태리가 이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다. 김태리는 “다른 것에 기대지 않고 혼자서도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 캐릭터가 좋다”고 했다. 귀족 아가씨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하녀로 접근하는 소매치기 숙희(영화 ‘아가씨’)나 양반가 규수에서 의병 총잡이가 되는 고애신(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등 그가 앞서 연기한 캐릭터도 주체적이다. 그는 현재 영화 ‘외계+인’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는 고려 말과 외계인이 출몰하는 현재 사이에 시간의 문이 열리며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이어 그와 류준열이 각각 남녀 주인공으로 출연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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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男 조각상 만들어 총으로 쏜 작가의 사연[영감 한 스푼]

    안녕하세요. 김태언 기자입니다. 여러분, 기사나 책을 통해 ‘예술로 아픔을 승화한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문자로만 놓고 보면 조금 따분한 말이지요. 오늘 소개드릴 작가는 이 진부한 문장을 인생에 걸쳐 증명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출신 대표 현대예술가 니키 드 생팔(1930~2002)인데요. 화려한 문양으로 뒤덮인 풍만한 여성상 ‘나나’로 유명한 작가입니다.지금 롯데갤러리 본점 4층에 가면, 나나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담은 판화 시리즈 ‘나나 파워’가 곳곳에 배치돼있습니다. 생기 넘치는 색과 움직임에 기분 좋은 에너지를 얻게 되는 작품들입니다.그런데 사실 나나가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늘은 니키가 어떻게 나나를 만들어냈는지 그 일대기를 따라가봅시다.남들 다 그리는 ‘사랑’ 이야기가 어려웠던 작가니키 드 생팔1. 니키 드 생팔은 유년 시절 아버지로부터 성적학대를 당했다. 치료 목적으로 본격 미술에 입문하면서 짓눌렀던 공포와 두려움을 해소한다.2. 초기에는 남성이나 가부장 사회를 향한 공격적인 작업을 했다. 작업하며 분노를 표출했고, 그렇게 그는 세상과 본인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둬나갔다.3. 결혼, 사랑, 임신 등에 대한 비관은 차츰 긍정으로 바뀌어갔다. 행복한 여성상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조각과 드로잉에 나타나는데, 이것이 그의 대표작이 됐다.숨구멍이 된 미술아버지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아버지와 나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았다. 사랑이었던 모든 것이 증오로 변했다. 나는 살해되었다고 느꼈다.니키 드 생팔은 64세가 되던 1994년, 회고록 ‘나의 비밀’에서 자신의 과거를 처음 밝힙니다. 11살이 되던 해 친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이죠.그는 이 사건을 오래도록 말할 수 없었습니다. 성장기를 홀로 고통 속에서 보낸 거죠. 퇴학과 전학을 되풀이하던 그는 17세에 가출했고 생계를 위해 모델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어린 시절 친구였던 해리 매튜스를 만납니다. 과거의 기억을 잊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거라는 기대로 19살이 되던 해 해리와 결혼을 하고 21세에 딸 로라를 낳았죠. 그러나 힘겹게 모른 척 해왔던 마음의 상처가 잊힐 리 없죠. 그는 깊은 우울감에 빠집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 등 증세가 심각해지자, 23살이 되던 해 정신병원에 입원합니다. 이때 니키는 치료를 위해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하는데요. 그는 그림을 통해 공포와 두려움을 표현하면서 예술에 조금씩 의지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나는 분노에 찬 젊은 여성이었다. 우리 주변에는 분노에 찬 많은 젊은 남성과 여성들이 있지만 그들이 모두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떠한 대안도 없었기 때문에 예술가가 됐다. 예술은 나의 구세주였다.결국 니키는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는데요. 그런 그에게 또 한 번의 전환기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장 팅겔리(1925~1991)와의 만남입니다. 스위스 출신이지만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조각가 장은 당시 이미 유명한 작가였습니다. 니키와 장은 컬렉터와 작가로 처음 만났지만, 둘은 1956년 함께 작업을 시작하면서 서로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이후 니키는 해리와 이혼한 후 장과 교유하면서 미술계에 전면 뛰어들게 됩니다.세상을 향해 총구를 겨누다니키의 초기작은 매우 공격적입니다. 그의 예술세계를 회고할 때 빠뜨릴 수 없는 1961년 활동을 살펴봅시다. 그는 프랑스 파리에 있던 갤러리제이에서 첫 개인전 ‘마음대로 쏴!’를 열고 퍼포먼스를 선보입니다.작가는 관객에게 총을 주고 캔버스나 조각상을 향해 쏘라고 합니다. 남성 조각상이나 그림의 한 모퉁이에는 물감 봉지가 달려 있었는데요. 총을 맞으면 물감이 흐르면서 무작위로 뿌려지는 겁니다. 사격회화(슈팅페인트)라고 불렸죠.사격회화의 시초라 볼 수 있는 작품 ‘내 사랑의 초상화’(1961)도 시사하는 바가 명시적입니다. 넥타이를 맨 남성용 와이셔츠를 나무에 붙인 뒤 다트 핀을 던지고 물감을 쏴 만든 작품입니다. 표창을 던짐으로써 남성들을 상징적으로 처벌하는 작품이었죠.불만을 가졌던 대상을 향해 총이나 표창을 쐈던 것은 관객에게 사회문제를 직시하게 하는 행위기도 했지만, 작가에게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행동이기도 했습니다.나는 아버지를 향해 쏘았다. 모든 남자들, 중요한 인물들, 나의 오빠, 사회, 학교, 수도원, 나의 가족, 나의 어머니까지. 그리고 다시 아버지와 나 자신까지도 겨누어 쏘았다.작가는 이렇게 분노를 표출하면서 신경쇠약을 많이 극복했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거부하지 못했던 성 위계구조에서 해방되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으니까요.현재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작품인 신부 연작(1963년)도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일침입니다. 멀리서 보면 신부가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신부 옆으로 징그럽게 붙어있는 수많은 아기 인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다 여기는 사회에 대한 반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거죠.눈 감을 때까지 행복한 여성을 그리다이렇게 약 4년간 니키는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내면의 멍울을 가라앉혔습니다. 이 이후로는 작업 방향이 조금 달라집니다. 과거에는 남성으로 대변되는 기성 사회에 대한 부정을 온몸으로 표현했다면, 이때부터는 여성에 대한 존중감을 작품 속에 드러내지요.1966년 스웨덴 스톡홀름 근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를 살펴볼까요? 길이 28m, 폭 9m, 높이 6m. 딱 보아도 거대해 보입니다. 관람객들은 다리를 벌린 여성의 몸 안으로 들어가는데요. 그 안에는 우유 바, 천체관측대, 12석짜리 극장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관람객들은 자신이 태아였을 때를 상상하면서 그 공간을 누비게 되죠. 이 작품 이름은 ‘Hon’, 스웨덴어로 ‘여자’라는 뜻입니다. 여성의 성기는 성적 대상이기 이전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신성한 곳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앞선 작품 ‘신부’처럼 혼인이나 출산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던 작가가 이렇게 생각을 달리한 데에는 한 친구의 역할도 컸습니다. 니키는 미국 작가 래리 리버스, 그의 아내 클라리스와 친밀했던 사이였는데요. 어느 날 래리 리버스가 임신한 클라리스를 그린 드로잉을 보게 됩니다. 임신한 클라리스는 엉덩이도 크고 배도 불룩했는데 니키는 거기에서 편안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거죠. 깡마른 잡지 모델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던 건강한 생명력, 풍부한 몸의 곡선들을 말이죠.그래서 탄생한 형상이 ‘나나’입니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나나 파워(1970년)는 니키가 1965년부터 조각하고 그려온 나나를 17개의 그림 시리즈에 담은 작품입니다. 판화 곳곳에는 춤을 추며 삶을 찬미하는 듯한 행복한 여성상이 있습니다. 그림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김영애 롯데백화점 아트비즈실장과 대화해보았습니다.기자 : 나나 파워는 17점의 판화로 이뤄져 있습니다. 17점을 순서대로 봐야 하는 걸까요?실장 : 그림마다 번호가 있긴 하지만 어디서부터 보든 큰 상관은 없습니다. 대신 자세히 보시길 추천합니다. 중간중간 엉뚱해 보이는 그림들을 발견하실 수 있을 텐데요. 예를 들면 11번 그림 하단에는 ‘The Witches tea party’라는 글과 함께 두 여성이 그려져 있는데요. ‘마녀들이 차를 마신다’는 동화적 상상력이 묻어나는 그림입니다. 이런 글씨와 그림을 보면 니키가 일러스트나 디자인 분야에서도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있었단 걸 알 수 있습니다.기자 : 17점이 하나의 서사를 가진 건 아닌가 보네요.실장 : 네 맞습니다. 동화책 삽화처럼 하나의 이어진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각각의 판화를 뜯어보면 니키의 사랑 이야기이라는 걸 금세 아실 수 있을 겁니다.기자 : 중간에 울고 있는 여성도 있던데요. 니키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실장 : 재밌는 포인트입니다. 니키의 두 번째 남편인 장 팅겔리가 나중에 다른 여성을 좋아하게 됩니다. 니키는 그림 속에 우는 여성을 그리면서 “자기야, 나랑 함께했던 밤을 기억해?” 묻죠. 또 어떤 그림은 사랑을 나누는 남녀 모습을 그렸습니다. 어찌 보면 신파 같은 그림들이라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이 부분이 묘한 감동을 줍니다. 어릴 적부터 남성들로부터 성적대상으로 취급받아와 사랑이나 성에 대한 이야기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던 작가가 오히려 이걸 유쾌하게 그려냈다는 건 굉장한 변화니까요.기자 : 그래서 작품 이름이 ‘나나 파워’인 거군요.실장 : 네. 이 작품 자체가 힘든 과거에 지지 않았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결과물이었으니까요. 작품 속 여성은 더 이상 남성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예쁜 여성의 모습을 띠지 않습니다.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또 찬미하는 자존감 있는 여성의 여러 모습이죠. 그래서 니키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희망을 줍니다.나나 형상은 니키의 마지막 작품인 타로 조각 공원 조성 작업(1972~1998년)에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됩니다. 니키는 평생의 소원이었던 이 조각 공원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마련하고 4년 뒤에 사망합니다. 눈을 감을 즈음 니키는 본인의 암울했던 유년기보다는 행복했던 근래의 기억들을 더 많이 떠올리지 않았을까요?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보다도 우선 자신을 위해, 자신의 행복과 안정을 위해 예술을 했던 작가는 모든 작품에 진심이었을 겁니다. 총을 쏘아대던 퍼포먼스도, 생기발랄한 나나도 말이죠.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한 작품들은 자연스럽게 세상의 공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여러분은 무엇을 할 때 마음이 편한가요? 또 무엇을 할 때 즐거운가요? 저는 니키의 작품을 보면서, 그것을 찾아나가는 것부터가 예술에 한 발 더 다가가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전시 정보REJOICE : Bulletproof!2022. 2. 18 ~ 2022. 04. 25롯데백화점 본점 4층(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81)작품수 17점※‘영감 한 스푼’은 국내 미술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아래 링크로 구독 신청을 하시면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뉴스레터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영감 한 스푼 뉴스레터 구독 신청 링크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51199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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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네안데르탈인은 그저 무력하게 도태되지 않았다

    1856년 독일 뒤셀도르프 지역의 네안데르 계곡에서 두개골 화석이 발견됐다. 사람의 뼈와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여러 점이 달랐다. 오늘날 인류보다 머리는 더 크고 키가 작지만 몸은 우락부락했을 것으로 보이는 뼈였다. 인간 이외의 호모(Homo) 중에서 가장 처음 발견된 종, 네안데르탈이었다. 과학기술과 고고학 연구를 통해 네안데르탈인이 45만 년 전에 등장해 4만 년 전에 멸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멸종 이유에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지금으로선 명쾌한 해답이 없다. 그렇다 보니 네안데르탈인에게는 ‘인류의 족보에서 탈락한 종족’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호모 사피엔스와의 경쟁에서 밀려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종족처럼 그려진 것이다. 고고학자인 저자는 20세기부터 현재까지 네안데르탈인 발굴의 역사와 수천 개의 학술 연구를 정리한 이 책을 내놓으면서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이런 오명을 일축한다. 저자는 ‘네안데르탈인은 무력하게 멸종을 기다린 종족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엄청난 기후 변화 속에서 수십만 년간 성공적으로 생존했다. 또 네안데르탈인의 번식에 대해 설명하며 기존 통념을 깬다. 고고학계에 따르면 현재 사하라 사막 이남 혈통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한 전 세계인의 경우 누구나 1.8∼2.6% 비중으로 네안데르탈인 DNA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과거에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이종교배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혼혈아들은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고 다시 자손을 낳았다. 그들과 호모 사피엔스의 만남은 또 하나의 생존법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현재 지구에 남은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하나다. 누군가는 “살아남을 운명이었기에 살아남았다”고 자아도취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다시 한번 지구의 유일한 주인이 호모 사피엔스가 아님을 알려준다. 네안데르탈인 역시 역동적인 삶의 주인공이었다. 그들의 역사를 살피며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 2022-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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