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효림

손효림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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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손효림 기자입니다.

aryssong@donga.com

취재분야

2025-11-29~2025-12-29
문화 일반52%
문학/출판23%
연극13%
교육3%
무용3%
산업3%
학술3%
  • NLL 사수 긴장감 풀어주는 ‘책 읽는 가족오락관’

     “우와∼ 되게 좋다!” 경기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해군 2함대 해군아파트 단지에 자리한 ‘원정 작은도서관’이 지난해 12월 30일 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어린이방으로 돌진했다. 푹신한 소파에 앉거나 연두색, 주황색으로 동그랗게 구멍을 낸 곳으로 냉큼 들어가 책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했다. 145m²(약 44평) 규모에 책 3400여 권이 꽂힌 도서관을 둘러보는 부모들과 아이들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장병과 가족들은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과 KB국민은행이 만든 도서관의 개관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입을 모았다. 2함대는 북방한계선(NLL)부터 백령도, 연평도 등 서해 5도를 비롯해 전북 군산시 어청도까지 수호한다. 제1·2연평해전, 대청해전 등이 벌어진 최전방에서 근무하는 까닭에 장병과 가족들은 늘 팽팽한 긴장감 속에 지낸다. 2함대 사령부의 안보공원에는 폭침으로 두 동강 난 천안함 선체와 천안함 46용사를 기리는 ‘천안함 기념관’이 마련돼 이들이 수행하는 임무의 엄중함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책은 장병과 가족들의 꽉 조여진 마음을 다독여주는 좋은 친구다. 부대 내 도서관은 주말이면 장병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가족들은 자유롭게 책을 볼 곳이 없어 아쉬움이 컸다. 이날 원목 책장과 책상을 비롯해 소파, 탁자 등이 갖춰진 도서관을 둘러보던 장병 가족들 사이에서는 “진짜 잘됐어”라는 탄성이 계속 터져 나왔다. 소설책을 좋아한다는 원유애 씨(50)는 “책을 보려면 인터넷으로 구입하거나 차를 타고 도서관이 있는 포승산업단지까지 가야 했는데 이제 아이들과 언제든 편하게 와서 볼 수 있게 됐다”며 반겼다. 남편도 군인인 황철인 중사는 딸 공나윤 양(7)과 함께 도서관을 찾았다. 황 중사는 “나윤이가 도서관을 꼭 봐야 한다며 오늘 유치원까지 빠졌다”고 귀띔했다. ‘소금을 조심해’를 읽던 공 양은 “어린이집에서 읽었던 ‘바빠요 바빠’도 또 볼 거예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요”라며 활짝 웃었다. 바로 옆에서 박준성 군(6)은 ‘와! 공룡 뼈다’를 읽고 있었다. 박 군의 어머니인 김민정 씨(36)는 “학원 몇 군데 외에는 아이들을 보낼 곳이 없어 항상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김 씨는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하원 시간이 30분 정도 차이가 나, 추우나 더우나 상가에서 아이들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아늑한 공간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국방부와 해군본부가 운영을 지원하는 이 도서관은 장병뿐 아니라 지역 주민도 이용할 수 있다. 이은우 병장(22)은 “출타하거나 복귀할 때 시간이 남아도 할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자투리 시간도 알뜰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고 말했다. 2함대는 장병과 군무원을 대상으로 독후감 공모전을 열어 포상하고 매달 500번째 도서관 이용자에게 도서상품권을 증정하고 있다. 부석종 2함대사령관은 해상에 출전하는 지휘관에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와 팀워크 구축 방법을 담은 ‘하이파이브’를 선물한다. 부 사령관은 “메마른 정서를 순화하는 데 칭찬만큼 좋은 건 없고 승리를 위해 탄탄한 팀워크는 필수적이다”며 “칭찬하고 기를 북돋워 주라는 당부를 책을 통해 한 번 더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도서관에 많은 이들이 드나들면서 사랑방 역할도 할 것이라는 주변의 기대감도 크다. 2함대는 이곳을 각종 문화 활동 공간으로도 활용할 예정이다.평택=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 2017-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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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새해에 담아갈 2016년 마지막 책의 향기는…

     《올 한 해도 수많은 책이 출간됐다. 한 권 한 권에 저자와 많은 사람의 수고가 담겨 있음을 잘 알지만 지면이 한정되다 보니 충분히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못한 책도 있다. 동아일보 ‘책의 향기’팀은 2016년을 정리하며 ‘눈길 한번 더 가는 책’을 꼽아 봤다. 책과 함께하는 풍요롭고 따뜻한 연말연시가 되길 기원한다.》 ●대학 존재의 이유에 대한 근본적 성찰왜 대학에 가는가 앤드루 델반코·문학동네·1만5000원 취업이 잘되는 학과에 학생이 몰리고 대학도 돈이 되는 학과만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현실에서 대학이 존재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통렬하게 환기시켜 준다. 미국 컬럼비아대 영문과 교수인 저자는 대학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사색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의 경험이 포함된 다양한 사례는 오늘날 대학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확인시켜 준다. 현학적이지 않으면서 정제된 언어로 써내려간 저자의 깊은 사유는 현실에 단단히 발을 내딛고 있다. 그래서 맵고 강하다. 학생과 학부모, 교육계 종사자들이 꼭 읽어 보기를 권한다. ●현실처럼 다가오는 원전 사고의 공포천공의 벌 히가시노 게이고·재인·1만8800원 원자력발전소를 파괴하라고 요구하는 헬기 납치범을 소재로 1995년에 발표한 소설. 당시에는 공상으로 치부됐지만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터지면서 재난과 테러에 취약한 원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에 책이 출간된 9월 12일은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있는 경북 경주시에서 강진이 발생한 날이었다. 테러를 재난으로 바꿔 읽으면 소설이 아닌 현실을 마주하는 듯하다.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선사한다. ●“백신 접종은 질병 막는 효과적인 방법”면역에 관하여 율라 비스·열린책들·1만5000원 오염된 물질과 접촉하지 않으면 질병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의 몸은 태어날 때부터 화학물질과 미생물, 병균 등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들과 어울리며 건강하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 백신의 부작용에 대해 불안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저자는 백신 접종이 안전하게 살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를 키우며 어머니로서 갖게 된 궁금증을 명료하고도 흥미로운 지식이 가득 찬 책으로 승화시켰다. ●‘우리 애는 왜 이럴까’ 구체적 사례로 공감 이끌어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 오은영·코리아닷컴·1만6800원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가 아이를 키우며 숱하게 맞닥뜨리는 속 터지는 상황을 구체적인 사례로 보여주며 공감을 이끌어낸다.  아이의 입장과 부모의 입장을 각각 헤아려 서로를 이해하게 만든 후 설득력 있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극도의 분노를 느끼는 부모의 심리와 그 원인을 조목조목 분석해 화를 다스리는 법을 알려준다. 입담 좋고 친절한 안내자를 만난 듯하다. ●쓸쓸하지만 뜨겁게 담아낸 시인의 절실함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문학과지성사·8000원 1992년 독일로 건너가 꾸준히 작품을 쓴 시인이 5년 만에 내놓은 시집. ‘얼마나 오래/이 안을 걸어 다녀야//나는 없어지고/시인은 탄생하는가’(‘눈’)라고 자문하며 이국의 거리, 광장, 역을 거닌다.  시편들에선 먼 나라에서도 모국어로 노래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절실함이 뜨겁게 담겨 있다. 다소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공허하지는 않다. 한층 깊어진 시인의 상상력을 음미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인간은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 클라우스 슈밥·새로운현재·1만5000원 올해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였던 4차 산업혁명을 화두로 제시한 저자가 첨단 과학기술과 다양한 분야의 융합으로 대변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세계 전반을 뒤흔드는 거대한 물결의 흐름을 정리해 이미 우리 삶 속으로 성큼 들어온 패러다임의 변화를 숙지하게 만든다.  기술이 발전해도 조타기를 쥐고 있는 건 인간이기에, 어떤 미래를 만들지는 결국 우리가 결정한다는 당부는 꼭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자존감 회복을 위한 정신과 의사의 처방전자존감 수업 윤홍균·심플라이프·1만4000원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낮은 자존감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제시하는 처방전. 저자 스스로도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아 한결 친근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자기혐오, 죄책감, 무시, 냉소 등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감정을 짚어내고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버려야 할 습관과 구체적인 실천 방안도 차근차근 알려준다. 쉬우면서도 다정한 글은 자주 우울해지고 자괴감에 빠지는 이들을 다독여 주고 용기를 낼 수 있게 도와준다. ●더 나은 인류를 위해 발로 뛴 35명의 삶가만한 당신 최윤필·마음산책·1만5000원 현직 기자인 저자가 부고 기사를 통해 여성 할례 금지에 앞장선 에푸아 도케누, 흑인 인권 투쟁 현장을 누빈 존 마이클 도어 등 35명의 뜨거운 삶을 조명했다. 인권, 페미니즘, 표현의 자유까지 다양한 주제를 두루 접할 수 있다.  ‘삶의 완전한 연소’를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함께 가만한 당신’은 같은 형식으로 쓴 후속작이다.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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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청계천 책방]당신의 책 한줄은…

     책과 어울리고 때론 씨름하다 보니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됐다. 하루하루는 길었던 것 같은데 일 년은 왜 이리도 빨리 지나가는 걸까. 머릿속에 맴도는 시구가 하나 있다. ‘덜 것도/더할 것도 없다./살았다.’ 김용택 시인이 생을 회고한 시 ‘그동안’의 마지막 부분이다. ‘울고 들어온 너에게’(창비·8000원)에 실렸다.  시를 읽다 이 구절에 한참 시선이 멈췄다. 지나온 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꽤 괜찮게 살아온 인생이 아닐까. 지금까지 보낸 시간을 돌아봤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도 가늠해 봤다. 긴 시간이 지난 후 이토록 담백하게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마음에 담아 둘 글 한 자락을 만난 게 작은 위안이 된다. 그 무엇이 됐든 삶을 지탱해 줄 버팀목 하나를 발견해 낸다면 좀 더 든든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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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답게 사는 게 뭘까… 잠시 멈춰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삶의 방향을 찾는 일을 함께 고민해주는 이들이 있다. ‘퇴사학교’ 교장인 장수한 씨(31)와 ‘한국갭이어’ 대표 안시준 씨(31)다. 최근 ‘퇴사학교’(RHK)와 ‘여행은 최고의 공부다’(가나출판사)를 각각 출간한 두 동갑내기를 23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며 금세 친해졌다. 장 씨는 4년간 다닌 삼성전자를 퇴사하고 1년가량 방황한 후 올해 5월 ‘퇴사학교’를 설립했다. 자아 탐색에 대한 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글도 써보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는 “‘퇴사학교’는 퇴사를 권하는 곳이 아니라 일과 삶의 균형을 고민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곳”이라며 “6개월간 1500여 명이 프로그램을 수료했는데 회사를 그만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했다.   ‘갭 이어(gap year)’는 학업이나 일을 잠시 중단하고 여행, 봉사 등을 하며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말한다. 미국, 호주 등에서 정착된 제도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장녀 말리아가 하버드대에 입학하기 전 ‘갭 이어’를 가진다고 밝혀 주목받기도 했다.   다섯 차례 국내 무전여행을 한 안 씨는 이후 16개월간 39개국을 누비다가 ‘갭 이어’를 알게 됐다. 갭 이어를 통해 삶을 스스로 설계하는 이들을 보며 문화적 충격을 받아 2012년 ‘한국갭이어’를 설립했다. 연간 1000여 명이 ‘한국갭이어’를 통해 국내외에서 인턴, 봉사, 여행, 교육 활동 등을 하고 있다.  안 씨는 “초반에는 상처가 있는 분이 많이 왔는데, 요즘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 때문에 힘들다고 호소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고 말했다. 10대에는 입시를, 20대에는 입사를 위해 전력 질주하다 취업한 후 허무함을 느끼고 기대했던 것처럼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단다.  두 사람은 “사람들을 만나 보니 내가 누구인지, 진짜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고민해 본 경험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고 입을 모았다.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필요한 건 시간이란다.  “찬찬히 돌아보면 억눌려 있던 욕구를 발견할 수 있어요. 사회가 정해 놓은 틀이나 부모님이 제시한 기준에 맞춰 사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처럼 욕망을 짓누르는 장애물을 하나씩 제거해 보면 내면의 욕구가 보이죠.”(안 씨) “준비가 안 된 채 사표를 내려는 사람은 말려요. 좋아하는 일을 먼저 찾으라고 당부하고 함께 답을 찾아가죠. 맛집을 좋아하는 건 취미에 그치지만 세계의 맛집을 다닌 후 책을 내면 직업이 될 수 있어요.”(장 씨)  이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가는 문화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에도 ‘갭 이어’가 문화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자녀가 ‘갭 이어’를 간다고 하면 부모가 지지해주는 날이 오길 꿈꿉니다.”(안 씨) “회사에서 자기계발을 위한 휴직이 의무화되길 바랍니다. 덴마크처럼 평생 공부하고 배우면서 일의 가치와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시스템이 한국에도 자리 잡았으면 좋겠어요.”(장 씨)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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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룸/손효림]마음의 세포 깨우는 법

     “정직한 노동이잖아요.” 최근 인터뷰한 ‘대리사회’의 저자 김민섭 씨는 대리운전을 하는 지금이 대학 시간강사를 하던 때보다 훨씬 행복하다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는 “대학은 강의, 행정을 시간강사와 조교에게 많이 의존하지만 제대로 보상해 주지 않고 그들을 ‘숨은 노동자’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반면 대리운전은 애쓴 만큼 벌 수 있단다. 김 씨는 지난해 출간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통해 터무니없는 보수에, 재직증명서도 발급받지 못해 은행 대출은 꿈도 꿀 수 없는 시간강사의 현실을 고발했다.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올해 5월 말, 책 당일 배송 현장을 취재하느라 반나절을 함께 다닌 택배기사 강종원 씨가 떠올랐다. 강 씨도 “열심히 뛴 만큼 버는 ‘정직한 노동’이라고 선배가 권유해 택배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직접 일을 해보니 그 말에 동의하게 됐는지 물었다. 강 씨는 “아직까지는 그렇다”며 씩 웃었다.  김 씨가 대리운전을 시작한 뒤로 아내는 아이의 장난감, 옷의 가격에 대해 “저건 대리 한 번 해야 살 수 있고, 저건 두 번 해야 살 수 있다”고 말한단다. ‘1대리’, ‘2대리’가 새로운 화폐단위가 되었다는 것.  강 씨도 마찬가지였다. 꽤 더웠던 그날, 책 배송을 마친 후 땀을 식히고 목도 축일 겸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커피 두 잔을 시켰다. 잔에 든 얼음을 빨대로 휘휘 저으며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 씨는 “물건을 볼 때마다 택배 몇 개를 배달해야 살 수 있는지 무의식적으로 계산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강 씨 역시 ‘1택배’, ‘2택배’라는 화폐단위가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었다. 두 사람은 작은 일에 감사했다. 김 씨는 대리운전 후 시내로 복귀할 방법을 고민하다 우연히 마주친 다른 대리기사에게서 버스 정보를 얻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단다. 강 씨는 가구별 호수가 적혀 있지 않은 다세대주택에서 주문자가 전화를 받지 않아 난감해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문 앞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에게 주문자를 아느냐고 여쭈었다. “손녀인데요”라는 답이 돌아오자 너무나 반가워했다. 강 씨는 “다시 오지 않아도 돼 진짜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분초를 다투기에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곧바로 와도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이들을 보며 몸을 수고롭게 하는 노동이 육체는 물론 마음의 세포까지 하나하나 깨워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감사한 마음을 하루에 그토록 여러 번 갖게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이들도 수시로 상처받고 부정적인 감정도 느끼지만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을 덧셈 뺄셈 해본다면 결론은 플러스였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김 씨는 대학 연구실보다 거리에서 더 많이 배우고 느낀다고 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거리를 누비는 두 사람을 만나며 기자 역시 배웠다. 자신의 일이 ‘정직한 노동’이라 여기는 이들의 믿음이 앞으로도 깨지지 않기를 바란다.  손효림 문화부 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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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상위 0.1%… 미국판 ‘강남 엄마’ 생태 관찰기

     아파트 구매 신청서에 부부의 대학 성적은 물론이고 부부와 그들의 부모, 아이들이 다닌 학교까지 모조리 적어 넣고, 입주민 대표들과 면접도 봤다. 두 살 아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기 위해 에세이를 쓰고, 장난감 하나 달랑 있는 방에 아이들을 오래 둔 채 스트레스 반응을 확인하는 면접도 치러야 했다.  미국 최상류층이 사는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의 파크애비뉴에서 저자가 겪은 일이다. 예일대에서 문화연구와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작가로 활동하는 저자는 뉴욕 다운타운에서 이곳으로 이사했다. 9·11테러가 터지자 안전한 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파크애비뉴의 독특한 생태계를 목격한 저자는 인류학자가 원숭이, 침팬지, 열대우림의 부족을 관찰하듯 6년간 엄마들을 지켜보고 차츰 동화(同化)됐던 경험을 정리했다.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최상류층의 생활을 인간 이외 영장류나 조류 등의 행태와 연결시켜 분석한 방식은 신선하다. 때때로 웃음이 터진다.  저자는 가까스로 아들을 좋은 어린이집에 보내는 데 성공하지만 왕따 신세를 면치 못한다. 반전은 예상치 못한 데서 일어났다. ‘반장 엄마’가 마련한 칵테일파티에서 맨해튼 금융계의 거물인 ‘우두머리 수컷’과 저자가 유쾌하게 대화를 나눴는데, 그가 저자의 아들을 놀이모임에 초대한 것이다! 이후 다른 엄마들은 급속히 상냥하게 굴며 놀이 약속을 청해 왔다.  한정 생산돼 돈이 있어도 사기 힘든 에르메스 버킨백을 구입하려 저자가 친구의 어머니에게 읍소하고 아시아로 출장 간 남편을 닦달해 기어코 가방을 손에 넣는 장면은 한 편의 희극 같다. 이유는 있다. 저자가 바나나, 우유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길을 걷다 비싼 핸드백을 든 여성이 곧장 돌진해 가방으로 왼팔을 치며 비웃음을 날리는 바람에 얼어붙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서열이 아래인 여성을 기선 제압하는 이곳 여성 특유의 행동이다). 버킨백은 자신을 보호해 줄 ‘부적’이었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피부와 몸매 관리, 패션에만 연간 1억 원 이상을 투자하는 엄마들은 신선놀음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리며 신경안정제와 술을 달고 산다. 다이어트와 운동에 매달려 늘 허기져 있고, 돈줄을 쥔 남편에게 이혼 당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아이가 명문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건 공포 그 자체다. 그들 세계에서 규정한 완벽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기에. 운동 경기 중 아이가 넘어져 치아 하나가 까맣게 변색되자 한 엄마는 울고 또 울었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강남 엄마들이 떠오른다.   경쟁심과 질투심, 비굴함과 오만함으로 가득 찬 것 같은 이들에게도 뜻밖의 모습이 있었다. 셋째 아이를 임신한 저자가 6개월 차에 유산한 후 고통스러워하자 평소 말도 섞지 않고 e메일, 문자도 한결같이 ‘씹던’ 엄마들이 먼저 손을 내밀기 시작한 것. 그들은 유산하거나 사고로 아이를 잃은 경험을 털어놓으며 저자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같이 아파했다. 별난 종족일 뿐이라 여겼던 그들도 결국 어미였던 것이다.  맨해튼 상류층 청춘들의 화려하고도 속물적인 삶을 그린 미드 ‘가십걸’의 ‘엄마 버전’ 같은 책이다. 이 책은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다. 최상류층이 애용하는 패션·디저트 브랜드, 피트니스센터, 휴양지를 알아가는 재미는 덤이다. 원제는 ‘Primates of Park Avenue’.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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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청계천 책방]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야

     한 해가 저물면 힘들 때 곁에 있어 주고, 방향을 잃었을 때 같이 머리를 맞대준 사람들이 생각난다. 그림책 ‘친구에게’(김윤정 지음·국민서관·2만8000원)는 친구를 위하는 마음을 투명한 OHP필름을 사용해 마술처럼 표현했다. 왼쪽 페이지에 파란 옷을 입은 아이가 홀로 앉아 있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이 있다. 그 사이에 투명한 필름이 끼워져 있다. 이 필름 위에는 연두색 옷을 입은 아이가 그려져 있다. 처음엔 연두색 옷을 입은 아이가 아이들 무리와 함께 있지만 필름을 왼쪽으로 넘기면 연두색 옷을 입은 아이가 파란 옷을 입은 아이 옆에 앉게 된다. ‘네가 혼자라고 느낄 때도 나는 항상 네 편이야’라는 문장과 함께. 필름 하나로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상황으로 바꾸다니! 저자의 통통 튀는 아이디어가 놀랍다. 필름을 넘길 때마다 친구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점점 더 진하게 전해져 온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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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영무 “법 농단하고 법치 운운 기가 막혀”

     “개인의 국정 농단으로 헌정 질서는 물론 안보, 경제, 민생까지 위협받고 있습니다. ‘갑질’과 비리가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감히 글을 썼습니다.” 신영무 변호사(72)는 서울 종로구 신영기금회관에서 19일 열린 자서전 ‘올바름이 힘이다’(나남) 출간 기념간담회에서 현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법무법인 세종의 창립자인 그는 2014년 반부패·법치주의 확립과 교육 개혁을 추구하는 시민단체인 ‘바른사회운동연합’을 설립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에서 제목을 딴 책에는 그가 걸어온 길과 나라에 대한 생각, 앞으로의 계획이 담겨 있다.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판사를 지낸 그는 미국 예일대에서 법학 석·박사 학위를 땄다. 미국 로펌 시스템을 눈여겨보고 미국 금융기관에서 연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종을 창립해 금융 분야에 특히 강한 로펌으로 성장시켰다. 65세가 되면 창업자도 물러나도록 정관을 만들어 스스로 이를 실천했다.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낼 때는 받은 수당을 새터민을 위한 재단에 기부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무료 법률 지원에도 앞장섰다. 그는 “당시 공익을 위해 일하는 데서 느끼는 보람이 크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바른사회…’를 만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법을 농단한 고위층 인사들이 자기가 필요할 때만 법치를 말하면 누가 따르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으로 전망하는지 묻자 말을 아꼈다. 하지만 대통령에 대한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망하는 나라 대부분은 관료들이 윗사람의 눈치만 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더 소통하고 자질을 갖춘 인물을 뽑아 신나게 일하게 하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쉽습니다.” 교육 제도에 대한 쓴소리도 이어졌다. “공교육이 무너져 사교육에 잠식당했는데도 교육 개혁이 안 되는 건 ‘교육계 4대 마피아’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육계를 장악하고 진심 어린 비판을 방어하는 데만 급급해요.” 그가 말하는 교육계 4대 마피아는 서울대 교육학과, 진주교대, 공주교대, 교육부 출신을 일컫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 변호사는 기업이 뇌물을 주고 이권을 얻어 돈을 벌면 이를 처벌하고 수익보다 더 많이 토해내도록 법을 바꿔야 한다고 덧붙였다. ‘바른사회…’는 정부나 기업의 후원을 받지 않고 개인의 후원금만 받는다. 다음 달 13일에는 서울 중구 전국은행연합회관에서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 박경재 변호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난국을 타개할 방안을 모색하는 토크 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젊은이들이 실력을 쌓기보다 힘센 이와 연줄을 맺으려 애쓰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고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고 싶습니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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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식주의자’가 지핀 문학열기… 문단 성폭력이 ‘찬물’

    《 2016년 문화계는 참으로 ‘오락가락’했다. 행복이 가고 나면 슬픔이 몰려왔고, 아픔이 아물면 기쁨도 돋아났다. 새로운 한 해의 ‘오는 즐거움(樂)’을 맞이하기 위해 지난 한 해 동안 문화계에서 있었던 ‘가는 즐거움(樂)’을 총결산한다. 》   ‘채식주의자’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뜨겁게 살아난 해였다. 페미니즘과 죽음을 성찰한 책이 강세를 보였다. 가수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깜짝 수상은 놀라움을 선사했다. 하지만 국내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이 잇달아 터져 나오면서 충격을 줬다. 올해 출판계 이모저모를 정리했다. ○ ‘채식주의자’ 맨부커상 수상 소설 ‘채식주의자’를 쓴 한강 작가와 번역자 데버러 스미스 씨가 5월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다. 동물적 폭력에 저항해 햇빛과 물만으로 살아가며 식물이 되고자 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맨부커상 수상은 침체된 한국문학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2007년 출간된 ‘채식주의자’는 올해에만 60만 권 넘게 판매되며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한국문학 부활  ‘채식주의자’ 열풍은 다른 한국소설로도 번졌다. 스타 작가의 새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큰 사랑을 받았다. 조정래 작가의 ‘풀꽃도 꽃이다’(전 2권)는 40만 권,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은 18만 권이 각각 판매됐다.  시집의 부활도 주목할 만하다. 복간본 시집이 지난해부터 계속 화제몰이를 한 가운데 올해 나온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최승자) ‘울고 들어온 너에게’(김용택) ‘유에서 유’(오은)가 각각 1만 권가량 판매됐다. 한국문학의 르네상스가 다시 열리는 게 아니냐는 조심스러운 관측도 나왔다.○ 문단 성폭력 한국문학에 대한 열기에 ‘문단 성폭력’이 찬물을 끼얹었다. 10월부터 트위터를 통해 문인들의 성폭력 실태와 가해자를 실명으로 고발하는 일이 잇달았다. 시인과 소설가 10여 명이 언급됐다. 문학을 가르쳐 주겠다며 스승과 제자 관계로 만나 성폭력이 벌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권력관계를 악용한 문인들의 행태는 매서운 질타를 받았다. 가해자로 지목된 문인들 상당수가 사과문을 냈고 출판사들은 작품을 출고 정지하거나 절판시켰다.  ○ 페미니즘 책 열풍 5월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이후 공포에 떨던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페미니즘 책 판매가 급증했다. ‘나쁜 페미니스트’(록산 게이)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이민경)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치즈코) ‘여자다운 게 어딨어’(에머 오툴)가 주목받았고, 다양한 페미니즘 책이 쏟아졌다. ‘페미니즘 책은 안 팔린다’는 출판계의 고정관념은 깨졌고 성차별에 대한 논의가 확산됐다.○ 죽음 다룬 책 주목  ‘숨결이 바람 될 때’(폴 칼라니티) ‘온 더 무브’(올리버 색스) ‘고맙습니다’(〃) 등 죽음을 마주한 이들이 생을 묵직하게 성찰한 책은 살아있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환자들의 마지막을 지켜본 의사의 사유를 깊이 있게 담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아툴 가완디) ‘참 괜찮은 죽음’(헨리 마시)도 꾸준히 판매됐다. 1인 가구가 증가하는 가운데 혼자서도 안심하고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시스템을 고찰한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우에노 치즈코)도 눈길을 끌었다.○ 인공지능, 4차 산업혁명 화두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누르자 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인공지능을 다룬 책을 앞다퉈 찾았다. ‘인간은 필요없다’(제리 카플란)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김대식) ‘로봇의 부상’(마틴 포드)이 주목받았다. 4월 방한한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교수는 “다른 나라와 달리 인공지능에 대해 집중적으로 묻는 현상이 흥미롭다”고 말하기도 했다. 과학기술 발전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큰 물결이 다가오고 있음을 분석한 ‘제4차 산업혁명’(클라우스 슈밥)을 필두로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미래를 예측한 책들이 줄줄이 나왔다.  ○ 밥 딜런 노벨 문학상 깜짝 수상 가수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전 세계가 술렁였다. 스웨덴 한림원은 딜런의 가사가 “귀를 위한 시”라고 했지만 “가장 믿기 힘든 노벨상 수상”(영국 작가 하리 쿤즈루)이라는 등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딜런은 수상 발표 후 2주가 지나서야 입을 열었고, 시상식에도 불참해 미국대사가 연설문을 대독하는 등 이례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김지영 기자}

    •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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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토 히로시 작가 “내가 쓴 동화인데 영화보고 울컥했다”

     까만 고양이 ‘루돌프’와 덩치 큰 얼룩무늬 고양이 ‘많이있어’가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는 이야기를 그린 애니메이션 ‘루돌프와 많이있어’가 28일 개봉된다. 동명의 원작 동화를 쓴 일본 사이토 히로시 작가(64·아시아대 교수·사진)를 e메일로 만났다.  그는 데뷔작인 ‘루돌프…’로 1986년 ‘고단샤 아동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일본에서 100만 권 넘게 판매됐다. 한때 집고양이였지만 길고양이 신세가 된 루돌프와 ‘많이있어’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앙증맞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가슴을 울린다. 국내에서는 최근 문학수첩리틀북에서 출간됐다. 사이토 씨는 “영화를 보고 울 뻔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그는 대학 시간강사 시절, 신사(神社)에 살던 검은 고양이를 보며 작품을 구상했다. “시간강사라는 불안정한 상태 때문에 버려진 존재에게 눈길이 갔어요. 그동안 키웠던 고양이는 모두 5마리예요. 첫 고양이 ‘당고’가 겉모습은 루돌프, 성격은 ‘많이있어’ 같았죠.” 루돌프는 궁금한 건 못 참는다. 동네 보스인 ‘많이있어’는 글을 읽을 줄 알고 거칠어 보이지만 속정이 깊다. 책에는 나무를 타거나 공중에서 뛰어내릴 때의 몸놀림과 식성 등 고양이의 특징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그는 “고양이를 키운 경험과 동네 고양이들을 유심히 관찰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많이있어’는 “교양 없는 고양이는 정말 싫다”, “글을 조금 안다고 모르는 녀석을 업신여기는 건 교양 있는 고양이가 할 행동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독서도 강조한다. 그는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을 삶에 반영하는 교양의 중요성을 전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많이있어’는 얼떨결에 도쿄에 오게 돼 고향 기후 시를 그리워하는 루돌프가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주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위험에 처하고 루돌프는 ‘많이있어’를 위해 큰 결심을 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면서도 가슴 뭉클하게 하는 장면이다.  “작품 속 고양이들은 저마다 자립을 향해 나아가면서 서로 돕습니다. 사람들도 그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그는 연간 쓰는 작품이 평균 15, 16편이나 된다. 전철에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유심히 들으며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늘 ‘어떤 일이 일어나면 재미있을까?’를 고민합니다. 독서는 유익함보다는 즐거움이 훨씬 중요해요. 독자들이 제 이름보다는 루돌프, ‘많이있어’ 등 작품 속 주인공의 이름을 오래 기억해 주면 고맙겠습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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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동아일보 선정 ‘올해의 책’

     한국 소설의 힘을 보여준 해였다. 죽음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한 책도 주목받았다. ‘책의 향기’ 팀이 출판사와 서점 대표, 학자, 평론가 등 42명으로부터 5권씩 추천받아 ‘올해의 책’을 선정한 결과다. 악의 본성을 집요하게 파헤친 소설 ‘종의 기원’은 15명의 추천을 받아 1위에 올랐다. 세월호 침몰의 진실 규명을 촉구한 ‘거짓말이다’, 입시 지옥을 비판한 ‘풀꽃도 꽃이다’는 소설 형식으로 한국 사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두 의사가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한 에세이 ‘숨결이 바람 될 때’ ‘온 더 무브’도 호평을 받았다. 동점을 받은 책이 많아 모두 12권이 뽑혔다.  동아일보 ‘책의 향기’ 팀은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채식주의자’를 ‘명예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다. 2007년에 출간됐지만 한국 문학을 세계에 알리고 독자들에게 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애쓴 모든 분에게 감사와 응원을 보낸다.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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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드뉴스]우리는 모두 대리 인생을 산다

    #01.우리는 모두 대리 인생을 산다.대리 사회 출간한 김민섭씨#02.지난해 시간강사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로 유명해진 김민섭 씨. 올해 5월부터 대리 기사가 된 그는 최근 대리 사회를 출간해 또 주목을 받고 있죠. #03."대학에서 조교와 시간강사로 보낸 8년은 주체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 유령의 시간이었습니다" "대리 기사가 된 지금 비로소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됐죠"#04.시간강사와 맥도널드 알바를 그만두고 그가 선택한 일은 대리운전.대리 기사가 되고 나서야, 그는 "그동안의 삶이 대리 인간이었음을알았다"고 고백합니다. #05."지독한 방귀를 계속 뀌면서도 절대 창문을 열지 않는 손님을 만날 땐 나는 내 코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귀가 찢어질 정도로 크게 태국 랩을 틀어놓은 손님을 겪을 땐 나는 내 귀의 주인이 아님을 알게 됐죠"김민섭 씨#06.타인의 운전석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검열하는 을의 공간 이었습니다. "제 의지대로 손을 댈 수 있는 건 브레이크, 액셀러레이터, 깜빡이뿐이었죠" #07."많은 사람들이 대리 기사 옆에서 반말 등을 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려 하죠. 그런 사람조차 실제로는 누군가의 대리인일 뿐이에요" 김민섭 씨#08."우리 모두는 타인의 운전석에 앉은 대리 기사에요. 박대통령 역시 천박한 욕망을 대신 수행한 대리 대통령이죠." #09."대리 운전을 하다 어느 회사의 화장실을 이용했어요. 남들보다 두 배 더 일하고 노력한다는 사훈이 있더군요. 그런데 월급을 두 배 더 준다는 말은 없었어요." #10.그는 대리 운전을 계속하면서 한 개인을 대리 인간으로 만드는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글을 쓸 계획입니다. "거리의 언어를 몸으로 익히고 사회의 균열을 관찰하며 기록할 겁니다." #11.이 거대한 대리들의 사회에서 온전한 나로 존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김민섭 씨와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2016.12.15 목 원본 | 손효림 기자 기획·제작 | 하정민 기자·조성진 인턴}

    • 20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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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민섭 “우리 모두는 대리인생을 살고 있다”

     “대학에서 조교와 시간강사로 보낸 8년은 주체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 ‘유령의 시간’이었습니다. 대리기사가 된 지금, 비로소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조교와 강사에게 터무니없는 대우를 하는 대학의 민낯을 고발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지난해 11월 출간)로 주목받았던 김민섭 씨(33)는 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올해 5월부터 대리기사로 일한 경험을 담아 책 ‘대리사회’(와이즈베리)를 최근 출간했다. 가족이 있는 강원 원주시에서 일하다 경기 파주를 거쳐 현재는 서울 합정역 인근에서 일하며 주말부부로 살고 있다. 대리기사가 된 그는 냄새가 지독한 방귀를 계속 뀌면서도 절대 창문을 열지 않는 손님을 만나며 ‘나는 내 코의 주인이 아님’을 깨달았다. 귀가 찢어질 정도로 크게 태국 랩을 틀어놓은 손님을 겪으며 ‘나는 내 귀의 주인이 아님’을 알게 됐다. 정치, 종교 등 갖가지 주제에 대해서도 무조건 손님의 의견에 맞장구를 쳐야 했다. 그가 손댈 수 있는 건 브레이크, 액셀러레이터, 깜빡이뿐이었다. 그는 이렇게 밤길을 달리면서 국가와 사회 구조에 의해 언어, 행동, 사유를 통제받는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타인의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임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타인과 사회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애쓰는 데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어요. 박근혜 대통령 역시 천박한 욕망을 대신 수행한 ‘대리 대통령’이죠.” 우리 사회는 어릴 적부터 가훈, 급훈, 교훈, 사훈에서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사고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노력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하는 데는 인색하다고 비판했다. “대리운전을 하다 어느 회사의 화장실을 이용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남들보다 두 배 더 일한다’, ‘우리는 남들보다 두 배 더 노력한다’ 등의 사훈이 5개 적혀 있더라고요. 그런데 월급을 두 배 더 준다는 말은 없었어요.”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내에게 육아의 짐을 오롯이 지운 것을 미안해했다. “아이가 걸음마하는 과정을 제대로 못 봤어요.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에 아내에게 몇 년만 고생하면 보상해 준다고 말했죠. 아내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저의 대리 인간으로 만들었어요.” 박사 논문을 절반가량 쓰고 멈춘 것이 아깝지 않은지 물었다.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전혀요”라고 답했다. “정직한 노동을 하고 주체적으로 사고하며 글을 쓰는 지금이 훨씬 행복합니다. ‘나는…’이 울면서 쓴 책이라면 ‘대리…’는 웃으면서 쓴 책이에요.” 그는 아내가 아이를 키우는 시간을 ‘하루보다 더 긴 하루’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그가 홀로 육아를 체험해 보면서 ‘몸으로 길어 올린 언어’라고 했다. 그는 책 출간 후 인터뷰, 강연 때문에 대리기사 일을 간헐적으로 하고 있다며 빨리 대리기사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게 노동의 힘이에요. 거리의 언어를 몸으로 익히고 사회의 균열을 관찰하며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할 예정입니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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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러스트로 만나는 명작 소설들 세계 유명작가들의 명품그림 수록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고전 소설을 자기만의 시각으로 해석해 그린 삽화를 담은 ‘새로 그린 고전 소설’ 시리즈(스윙밴드)가 출간됐다. 미국의 디자인 전문 출판사인 록포트 출판사가 펴낸 ‘그림 형제 환상 동화’, ‘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셜록의 모험’(사진)의 한국어판이다.  ‘그림…’에는 프랑스 일러스트레이터인 얀 르장드르가 그린 환상적인 분위기의 작품이 실렸다. 이탈리아 출신의 올림피아 차뇰리는 ‘오즈…’에 강렬한 원색과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이뤄진 삽화를 담았다. 미국 작가인 안드레아 대퀴노는 ‘이상한…’에서 서정적인 수채화를, 독일 출신인 소피아 마르티네크는 ‘셜록…’에서 특정 상황을 재치 있고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을 각각 선보였다. 이수은 스윙밴드 대표는 “유명 작가들의 개성 있는 그림을 통해 고전 소설을 색다르게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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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청계천 책방]미리 만나는 산타클로스

     그 어느 해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살금살금 다가와 딱 보름이 남았다!  산타 할아버지가 떨어뜨린 선물을 대신 전하려는 눈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크리스마스 선물’(강산 지음·한솔수북·1만2500원)과 많은 아이들이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이유를 깜찍한 상상력으로 풀어낸 ‘백만 억만 산타클로스’(모타이 히로코 지음·마리카 마이야라 그림·우리나비·1만2000원)는 마음을 포근하게 데워준다.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라면’(허은미 지음·이명애 그림·풀빛·1만2000원)은 한번쯤 상상해봤을 법한 소망을 그렸다. ‘삐삐 롱스타킹’으로 유명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쓴 동화 ‘에밀의 크리스마스 파티’(비에른 베리 그림·논장·9000원)에는 마을 사람들이 벌이는 소동이 유쾌하게 펼쳐진다. 반짝이는 전구와 캐럴이 없어도 책으로 만나는 크리스마스는 정겹다.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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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엄마의 절규 “나도 아내가 있으면 좋겠다”

     “진이 다 빠져서 퇴근하면 아이도, 남편도 온통 해 달라는 것 투성이야. 나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어.” 맞벌이를 하는 친구가 호소했다. 친구도 자신을 챙겨줄 존재가 절실히 필요하단다. 바로 아내다. 호주의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고위직에 오르는 여성이 여전히 부족한 건 가사노동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주당 70시간을 일해야 성공할 수 있는 직업군에서 남성들은 아이를 키우고 살림하는 아내가 있기에 업무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벌이를 해도 집안일 대부분을 떠안아야 하는 여성이 승진할 확률은 낮을 수밖에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14년 여성은 하루 평균 4시간 33분 가사노동을 하는 데 비해 남성은 2시간 21분으로 절반에 그친다. 한국은 격차가 더 크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여성이 집안일을 한 시간은 3시간 14분이었지만 남성은 5분의 1인 40분에 불과했다.  저자는 여성의 승진을 제한하는 유리천장이 아니라 남성이 일터에서 집으로 향하는 것을 가로막는 ‘유리 비상계단’에 대해 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새롭지 않다. 그럼에도 이를 어렵게 하는 사회구조를 촘촘히 짚어내고 자신의 경험과 각종 사례를 발랄한 문체로 맛깔스럽게 버무려내 설득력을 높인 것이 이 책의 강점이다.  세 자녀의 엄마인 저자는 캥거루 봉제인형과 함께한 활동을 사진 찍어 스크랩하는 아이의 과제를 깜빡 잊고 챙기지 못했을 때 ‘인간으로서 실패한 것 같았다’고 토로한다. 커피숍에 가려 해도 분유, 기저귀, 손수건 등 온갖 물건을 ‘우주탐사’하듯 챙겨야 하고, 집에서 일하더라도 집요하게 저자의 콧구멍에 시리얼을 집어넣는 아이를 상대해야 한다. 출장으로 집을 비울 때는 오전 7시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도 오전 1시까지 식사를 미리 준비해 놓고 가야 뭔가 속죄하는 기분이 든단다.  남성이 집안일을 하려면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거나 원하는 시간에 근무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근무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늘리기보다는 현재 있는 직원에게 더 많은 업무를 안긴다. 노동운동 역시 정규직 유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꼬집는다.  근무시간을 줄이거나 원하는 시간에 일하는 탄력 근무를 지원하는 남성은 승진할 생각이 없는 인물로 간주된다. 아이를 학교에서 데려오기 위해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근무하는 남성은 퇴근할 때마다 동료에게서 “일찍 가서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전업주부 남성을 바라보는 시선도 따갑다. 사람들은 “취직이 안 돼요?”, “언제 복직해요?”라고 묻거나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며 어색해한다. 한 전업주부 남성은 아이의 담임교사로부터 “학부모 모임에서 다른 엄마들이 굉장히 불편해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남성 스스로도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여성 변호사의 전업주부 남편은 이따금 발을 동동 구르며 “나는 부엌데기 남편은 되지 않을 거야”라고 절규한단다.  하지만 아빠에게도 아이가 태어나서 걷기 시작하고 말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볼 권리가 있다는 대목은 가슴을 울린다. 최고경영자부터 육아휴직을 사용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실현될 날이 올지는 미지수지만 행복한 삶을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아내가 되어주는 건 꼭 필요한 일이다. 원제는 ‘The Wife Drought’. 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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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 딜런이 쓴 유일한 소설 ‘타란툴라’ 20일 출간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수 밥 딜런(75)이 쓴 유일한 소설이 국내에 소개된다. 문학동네는 딜런이 25세였던 1966년 완성한 소설 ‘타란툴라’(사진)를 20일 출간할 예정이라고 8일 밝혔다. 이 작품은 시, 산문, 노랫말을 결합한 소설로,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 없이 대중문화와 사회에 대한 관점을 47꼭지에 담았다. 문학동네는 딜런의 가사를 한 권에 모은 ‘밥 딜런: 시가 된 노래들(1961∼2012)’도 함께 출간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출판을 고려해 쓴 책은 ‘타란툴라’와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뿐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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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판계 촛불마케팅… 시국 서적 봇물 

      ‘대통령은 없다’, ‘바꾸어라, 정치’,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촛불집회에서 나온 구호가 아니다. 최근 출간된 책 제목이다. 현 시국을 비판하거나 시국과 직접 관련되지 않아도 이를 활용해 제목을 달거나 홍보를 하는 책들이 적지 않다. 출판사들이 ‘분노 마케팅’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것이다.  21세기북스는 대통령의 리더십을 다룬 ‘대통령의 조건’(월러 R 뉴웰·2012년)의 내용은 그대로 둔 채 제목만 ‘대통령은 없다’로 바꿔 최근 다시 내놓았다.  이 책은 링컨, 루스벨트, 닉슨, 케네디, 클린턴 등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공과(功過)를 분석해 대통령이 지녀야 할 덕목을 제시했다. 김수현 21세기북스 편집자는 “대통령이 갖춰야 할 여러 자질을 살펴볼 때 한국에 과연 그런 대통령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담아 새 제목을 정했다”고 말했다. 스페인에 정치 개혁 바람을 몰고 온 마누엘라 카르메나 마드리드 시장이 쓴 ‘바꾸어라, 정치’(푸른지식)도 나왔다. 원제는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이지만 현 정국을 반영해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책 띠지에는 ‘들어라, 시민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라는 문구까지 넣었다. 출판사는 지난달 말부터 다음 스토리펀딩에서 책 내용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모두 500여 명이 공감을 표했다.  연재물을 읽은 독자들은 ‘조속히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 ‘광장의 촛불이 흐지부지 흘러버리는 가벼운 정치 이슈처럼 묻히지 말길’ 등의 댓글을 달고 있다.  ‘정상인간’(김영선)은 현 정부가 주요 모토로 내건 ‘비정상의 정상화’를 비꼰 제목이다. 장시간-저임금 노동이 일상화된 현실을 정상이라고 여기게 만든 사회 구조를 비판했다. 이 책을 출간한 박재영 오월의봄 대표는 “‘정상인간’은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이기도 하지만 너무나 비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면서도 그것이 ‘정상’이라고 외쳤던 현 정부를 풍자하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이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역할도 못 하면서 국가의 명예와 성장만을 앞세운 현실을 질타한 ‘국가 이성 비판’(김덕영·다시봄)도 나왔다. 출판사는 ‘이게 나라냐?’라는 물음에 답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이게…’는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많이 들고 나온 피켓 글귀 가운데 하나다. 불신과 절망만을 안기는 사회구조를 뜯어고치려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엄기호·창비)는 노력한 만큼 성취할 수 없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쳐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서 필요한 건 ‘리셋’이라고 주장한다. 출판계에서는 출판사들이 현 시국에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콘텐츠로 독자를 공략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민들의 관심이 정치로 급격히 쏠리면서 책 판매량이 ‘반 토막’ 나자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주제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독자들의 속내를 직설적으로 반영한 책이 각광받고 있다”며 “시대의 변화를 담은 책은 더 많아지고 출간하는 속도도 한층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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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재엽씨 “무너진 나를 다시 세운 건 문학의 힘”

     나락으로 떨어진 건 한순간이었다.  서울 강남 8학군에서 초중고교를 나와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뉴욕대 의료경영석사 학위를 딴 정재엽 씨(42)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제약회사에 합류해 일하던 중 2013년 부도를 맞았다.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아버지는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으로 수감됐다.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던 삶의 밑바닥에서 그가 절박하게 부여잡은 건 문학이었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이런 경험을 담은 ‘파산수업’(비아북)을 출간한 그를 최근 서울 서초구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정 씨는 기적적으로 회사를 회생시켜 매각한 후 올해부터 직원 3명을 두고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수입하는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올해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아버지도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채권자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쏟아지는 욕설을 들으면서도 어떻게 틈틈이 책을 읽는 게 가능했는지 궁금했다.  “제 주머니에 꽂힌 책을 본 채권자들이 ‘뻔뻔한 거니? 아니면 강한 거니?’라며 어이없어 했어요. 하지만 저는 책이 주는 에너지 때문에 말 그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어요.”   ‘금수저’에서 하루아침에 파산자가 되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벌레로 변해 경제력을 잃은 주인공 그레고르가 바로 자신이었기에.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며 늘 어렵기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됐다. 암 투병 중에도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이해인 수녀의 시집 ‘희망은 깨어 있네’,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을 보며 세상을 버리려 했던 마음도 되돌렸다. “제가 사라져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책은 상황에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거리를 두게 만들어 줬어요.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지음)을 보며 제 처지가 세 살 때 버림받은 모모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얻기도 했고요.”  ‘파산수업’에서 이해인 수녀의 시집을 인용하고 싶어 일면식도 없는 이 수녀에게 원고를 보냈다. 이 수녀는 흔쾌히 수락한 것은 물론이고 휴대전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해 테레사 수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파산수업’ 부제의 아이디어도 제안하고 추천사까지 보내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깜짝 놀랐어요. ‘무너진 우리를 다시 세우는 문학의 힘’이라는 부제는 수녀님 말씀의 일부분이 반영된 거예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어요.” 부도 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봤던 그는 올해 2월 ‘안데르센 자서전’ 중고책을 샀다. “새 책은 못 사지만 중고책이라도 3년 만에 살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울컥하더라고요. 역경을 많이 겪었던 안데르센의 일생에 공감을 느껴 꼭 갖고 싶었거든요.”  그는 이제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붙잡고 일어설 수 있는 무언가를 꼭 찾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게는 그게 책이었어요. 공황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에 바람막이가 돼 주고 에너지를 준 책이 없었다면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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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수저’서 하루 아침에 파산…그를 일으켜 세운 건 ‘문학’ 이었다

    나락으로 떨어진 건 한 순간이었다. 서울 강남 8학군에서 초중고교를 나와 한국외국어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뉴욕대 의료경영석사 학위를 딴 정재엽 씨(42)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제약회사에 합류해 일하던 중 2013년 부도를 맞았다. 집은 경매에 넘어갔고 아버지는 부정수표단속법 위반으로 수감됐다.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던 삶의 밑바닥에서 그가 절박하게 부여잡은 건 문학이었다. 그래야만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이런 경험을 담은 '파산수업'(비아북)을 출간한 그를 최근 서울 서초구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정 씨는 기적적으로 회사를 회생시켜 매각한 후 올해부터 직원 3명을 두고 의약품과 의료기기 수입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사무실의 한 벽면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채권자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쏟아지는 욕설을 들으면서도 어떻게 틈틈이 책을 읽는 게 가능했는지 궁금했다. "제 주머니에 꽂힌 책을 본 채권자들이 '뻔뻔한 거니? 아니면 강한 거니?'라며 어이없어 했어요. 하지만 저는 책이 주는 에너지 때문에 말 그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어요." '금수저'에서 하루아침에 파산자가 되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벌레로 변해 경제력을 잃은 주인공 그레고르가 바로 자신이었기에.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보며 늘 어렵기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됐다. 암 투병 중에도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이해인 수녀의 시집 '희망은 깨어 있네',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을 보며 세상을 버리려 했던 마음도 되돌렸다. "제가 사라져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책은 상황에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거리를 두게 만들어 줬어요.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 지음)을 보며 제 처지가 세 살 때 버림받은 모모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얻기도 했고요." '파산수업'에서 이해인 수녀의 시집을 인용하고 싶어 일면식도 없는 이 수녀에게 원고를 보냈다. 이 수녀는 흔쾌히 수락한 것은 물론 휴대전화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비롯해 테레사 수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며 힘내라고 격려했다. '파산수업' 부제의 아이디어도 제안하고 추천사까지 보내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깜짝 놀랐어요. '무너진 우리를 다시 세우는 문학의 힘'이라는 부제는 수녀님 말씀의 일부분이 반영된 거예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어요." 부도 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봤던 그는 올해 2월 '안데르센 자서전' 중고책을 샀다. "새 책은 못 사지만 중고책이라도 3년만에 살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울컥하더라고요. 역경을 많이 겪었던 안데르센의 일생에 공감을 느껴 꼭 갖고 싶었거든요." 그는 이제 다시 회사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붙잡고 일어설 수 있는 무언가를 꼭 찾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제게는 그게 책이었어요. 공황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고통스러웠던 그 시절에 바람막이가 돼 주고 에너지를 준 책이 없었다면 절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겁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2016-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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