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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데뷔 때만 해도 일부가 즐기는 콘텐츠로 여겨지던 웹툰이 이제는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어 무척 기쁩니다. 코스튬까지 하고 온 만화 마니아들의 열정이 축제를 더욱 신나게 만드네요.” 30일 경기 부천시 한국만화박물관에서 개막한 제25회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에서 만난 구아진 작가(36)는 수많은 관람객이 몰린 축제 현장을 보고 놀라워했다. 구 작가는 웹툰 ‘미래의 골동품 가게’로 올해 부천만화대상을 받았다. 부천국제만화축제는 1998년부터 시작된 국내 최대의 만화축제다. 2019년 축제가 열린 뒤 신종 코로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줄곧 비대면으로 개최되다가 3년 만에 다시 오프라인으로 개최됐다. 올해 축제의 주제는 ‘이:세계’. 판타지만화 장르의 주요 키워드인 이(異)세계와 웹툰을 의미하는 e세계의 의미를 동시에 담았다고 한다. 축제 현장은 주제처럼 별천지였다. 만화가 원작인 미국 영화 ‘트랜스포머’에 나오는 범블비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관람객들과 손바닥을 마주치며 흥을 돋웠다. 슈퍼마리오와 스파이더맨 등 남녀노소에게 친숙한 캐릭터들이 관객을 맞았다. 부천국제만화축제 관계자는 “3년 만에 열린 축제다 보니 개막일에만 1000명 이상 몰리는 등 분위기가 뜨거웠다. 앞으로도 모두가 함께 즐기는 축제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했다. 축제는 3일까지 이어진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남자는 여자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갔지만 여자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기만 했다. 남자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분노가 밀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여자를 칼로 수차례 찔러 죽였다. 남자는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 칼로 저지른 살인, 우발적 범행 주장….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읽고 ‘신당역 스토킹 살해범’ 전주환(31·구속)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영국에서 26년간 100여 건의 살인 사건을 조사한 법정신의학자 리처드 테일러 박사가 참여한 ‘자비에르 살인사건’이다. 남자는 영국에서 일하는 건축가 자비에르(가명)다. 런던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수지(가명)에게 반해 스토킹을 지속해 왔다. 자비에르는 수지를 살해한 뒤 자수하면서 “사건 직후 썼다”며 경찰에 자신의 유언장을 건넸다. 하지만 경찰이 자비에르의 컴퓨터를 조사한 결과 자비에르는 사건 일주일 전에 이미 유서를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계획적 살인이었던 셈이다. 법원은 자비에르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테일러 박사는 스토킹 범죄를 ‘사랑의 병적인 확장’이라고 부른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할 때 배신감, 질투, 시기 등 여러 감정을 복합적으로 겪는다. 대부분은 이 감정을 잘 소화하지만 일부는 그러지 못한다.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이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어떻게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 난 거절할 수 없는 매력을 지녔는데….” 결국 “넌 나한테만 충실해야 해” “난 널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라는 합리화를 통해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다. 저자인 테일러 박사는 살인자의 동기를 주목한다. 수사기관이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찾는다면 테일러 박사가 파고드는 건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다. 특히 살인자의 약 30%가 감형을 위해 범행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사법체계에서 법정신의학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캠든 리퍼’ 사건이다. 영국 연쇄살인마 남성 앤서니 하디는 2003년 성매매 종사자 등 3명의 여성을 성폭행한 뒤 죽였다. 하디는 시신을 절단해 검은색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버리는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수사기관 조사에서 그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경찰은 연쇄살인에 초점을 맞췄지만 테일러 박사는 성폭행에 주목했다. 하디의 집에서 포르노 비디오테이프, 다양한 체위를 묘사한 그림이 발견돼 왜곡된 성적 인식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테일러 박사는 하디에겐 특히 성적인 갈망뿐만 아니라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평가절하하는 마음도 있었다고 분석한다. 법원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하디에게 종신형을 선고한다. 말 못 하는 어린 자식을 죽인 부모, 푼돈을 노리다 엉겁결에 살인을 저지른 강도, 종교적 믿음에 빠져 끔찍한 테러를 저지른 테러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살해를 한 정신이상자…. 테일러 박사는 끔찍한 사건들을 책에 담은 건 “살인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고백한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을 만든 건 사람들이라는 뼈아픈 지적이다. 특히 스토킹 범죄의 배경으로 ‘여성 혐오’와 ‘가부장 문화’를 짚는 테일러 박사의 말을 오래 곱씹게 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제가 만화를 그리게 된 건 다른 세계를 그리고 싶어서였어요. 2008년 데뷔 때만 해도 일부가 즐기는 콘텐츠로 여겨지던 웹툰이 이제는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어 무척 기쁩니다. 코스튬까지 하고 온 만화 마니아들의 열정이 축제를 더욱 신나게 만드네요.” 9월 30일 경기 부천시 한국만화박물관에서 개막한 제25회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에서 만난 구아진 작가(36)는 수많은 관람객이 몰린 축제 현장을 보고 놀라워했다. 구 작가는 웹툰 ‘미래의 골동품 가게’로 올해 부천만화대상을 받았다. 부천국제만화축제는 1998년부터 시작된 국내 최대의 만화축제다. 2019년 축제가 열린 뒤 신종 코로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줄곧 비대면으로 개최되다가 3년 만에 다시 오프라인으로 개최됐다. 올해 축제의 주제는 ‘이:세계.’ 판타지만화 장르의 주요 키워드인 이(異)세계와 웹툰을 의미하는 e세계의 의미를 동시에 담았다고 한다. 축제 현장은 주제처럼 별천지였다. 만화가 원작인 미국영화 ‘트랜스포머’에 나오는 범블비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관람객들과 손바닥을 마주치며 흥을 돋웠다. 슈퍼마리오와 스파이더맨 등 남녀노소에게 친숙한 캐릭터들이 관객을 맞았다. 부천국제만화축제 관계자는 “3년 만에 열린 축제다보니 개막일에만 1000명 이상 몰리는 등 분위기가 뜨거웠다. 앞으로도 모두가 함께 즐기는 축제로 만들어나가겠다”고 했다. 축제는 3일까지 이어진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직장 다니느라 15년 동안 시를 한 편도 안 쓴 적이 있어요. 저는 한때나마 시를 버렸던 시인인데, 시는 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처럼 제 손을 잡고 50년이나 이끌어준 시에게 감사 인사부터 드립니다.” 정호승 시인(72)은 9월 29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등단 50주년 기념 북토크’에서 시란 존재에게 고마움부터 표했다. 1972년 등단해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창비·1979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1998년) 등으로 한국 서정시의 큰 획을 그은 시인이지만, 가정을 이루고 생업에 쫓기며 시 쓰기를 놓았던 지난날부터 고백했다. “시를 50년 썼다는 것보다 나이가 일흔 살이 넘었다는 게 더 충격입니다, 하하. 특히 최근 10년 동안 뭐했나 싶은데, 시집 몇 권 쓴 것 말곤 매일 밥 많이 먹은 것뿐이네요.” 농과 달리 시인은 여전히 시에 진심이다. 9월 23일 14번째 시집인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를 펴냈다. 2020년 ‘당신을 찾아서’(창비) 이후 2년 만이다. 이날 정 시인은 직접 시집에 담은 시를 차분히 낭송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 독자는 눈을 감은 채 시를 음미했고, 젊은 여성 독자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촬영했다. 나이도 성별도 달랐지만 시인의 목소리로 시를 듣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하나였다. “슬픔이 택배로 왔다/ 누가 보냈는지 모른다/ 보낸 사람 이름도 주소도 적혀 있지 않다/ 서둘러 슬픔의 박스와 포장지를 벗긴다/ 벗겨도 벗겨도 슬픔은 나오지 않는다.”(시 ‘택배’에서) 이번 시집엔 유독 눈에 띄는 글자가 하나 있다.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시 ‘낙과’에서) 등 시 6편에 ‘떨어질 락’(落) 자가 들어있다. 시인은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다 바닥에 떨어진 채 향기를 내며 썩어가는 모과를 보고 썼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 인생은 어떻게 져야하는가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여러분, 시를 찾고 싶으면 인생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직접 쓰지 않아도) 삶 속에 시가 있습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000은 끝나는 수지만 1001은 이어지는 수다.” 1998년 6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소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 방문길에 올랐다. 그는 4개월 뒤인 같은해 10월 501마리의 소를 추가로 끌고 방북 길에 올랐다. 추가로 500마리가 아니고 501마리를 끌고 간 것에 대해 질문이 쏟아지자 이렇게 답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남북 협력이 끝나지 않고 쭉 이어지길 바라는 그의 소망이 이런 작은 부분에도 세심하게 반영돼 있었다”며 “정주영은 단순히 돈을 많이 번 기업가가 아니다. 그는 철학자였다”고 회고한다. 저자는 정주영 회장이 서울에서 정착할 당시 직원으로 일했던 쌀집 주인아주머니 차소둑 할머니의 장손이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총장을 지낸 저자는 정주영 회장의 팔색조 같은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수많은 일화를 담았다. 저자만이 알고 있는 비사는 물론 1997년 대선에도 출마하려고 했다는 내용 등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에피소드를 모았다. 정주영 회장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현대그룹 비서, 현대 계열사 사장, 대한체육회 사무총장, 농구단 실무자도 직접 인터뷰했다. 쌀집 점원,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대한체육회장, 반값 아파트 공급을 내세운 대선 주자, 비상한 아이디어와 혜안이 가득했던 사업가 정주영의 모습이 담겨 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남자는 여자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갔지만 여자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기만 했다. 남자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분노가 밀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여자를 칼로 수차례 찔러 죽였다. 남자는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 칼로 저지른 살인, 우발적 범행 주장….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읽고 ‘신당역 스토킹 살해범’ 전주환(31ㆍ구속)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영국에서 26년 간 100여 건의 살인 사건을 조사한 법정신의학자 리처드 테일러 박사가 참여한 ‘자비에르 살인사건’이다. 남자는 영국에서 일하는 건축가 자비에르(가명)다. 런던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수지(가명)에게 반해 스토킹을 지속해왔다. 자비에르는 수지를 살해한 뒤 자수하면서 “사건 직후 썼다”며 경찰에 자신의 유언장을 건넸다. 하지만 경찰이 자비에르의 컴퓨터를 조사한 결과 자비에르는 사건 1주일 전에 이미 유서를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계획적 살인이었던 셈이다. 법원은 자비에르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테일러 박사는 스토킹 범죄를 ‘사랑의 병적인 확장’이라 부른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할 때 배신감, 질투, 시기 등 여러 감정을 복합적으로 겪는다. 대부분은 이 감정을 잘 소화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한다.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이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어떻게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 난 거절할 수 없는 매력을 지녔는데….” 결국 “넌 나한테만 충실해야 해”, “난 널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라는 합리화를 통해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다. 저자인 테일러 박사는 살인자의 동기를 주목한다. 수사기관이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찾는다면, 테일러 박사가 파고드는 건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다. 특히 살인자의 약 30%가 감형을 위해 범행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사법체계에서 법정신의학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캠든 리퍼’ 사건이다. 영국 연쇄살인마 남성 앤서니 하디는 2003년 매춘부 등 3명의 여성을 성폭행한 뒤 죽였다. 하디는 시신을 절단해 검은색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버리는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수사기관 조사에서 그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경찰은 연쇄살인에 초점을 맞췄지만, 테일러 박사는 성폭행에 주목했다. 하디의 집에서 포르노 비디오테이프, 다양한 체위를 묘사한 그림이 발견돼 왜곡된 성적 인식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테일러 박사는 하디에겐 특히 성적인 갈망뿐 아니라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평가 절하하는 마음도 있었다고 분석한다. 법원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하디에게 종신형을 선고한다. 말 못하는 어린 자식을 죽인 부모, 푼돈을 노리다 엉겁결에 살인을 저지른 강도, 종교적 믿음에 빠져 끔찍한 테러를 저지른 테러범, 우울증에 시달리다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살해를 한 정신이상자…. 테일러 박사는 끔찍한 사건들을 책에 담은 건 “살인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고백한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을 만든 건 사람들이라는 뼈아픈 지적이다. 특히 스토킹 범죄의 배경으로 ‘여성 혐오’와 ‘가부장 문화’를 짚는 테일러 박사의 말을 오래 곱씹게 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민진 작가(54)의 ‘파친코’와 비교되다니 제겐 큰 영광이죠. 다만 ‘파친코’가 가족을 위한 생존 소설이라면, ‘작은 땅의 야수들’은 나라를 위한 투쟁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김주혜 작가(35·작은 사진)의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다산북스·큰 사진)이 28일 국내에서 출간됐다. 출간을 맞아 이날 열린 영상간담회에서 김 작가는 이민진 작가와의 비교에 고마워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을 한껏 드러냈다. 두 작품은 실제로 닮은 점이 상당히 많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민중의 삶을 다룬 ‘작은 땅의…’는 지난해 12월 미국에서 출간돼 아마존북스 ‘이달의 책’으로 뽑혔다. 평화 증진을 위한 문학작품에 주는 ‘데이턴 문학 평화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미국에서 2017년 발간된 ‘파친코’ 역시 일제강점기가 배경으로 장기간 뉴욕타임스(NYT)와 아마존북스 베스트셀러였고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였다. ‘작은 땅의…’는 일제강점기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기생이 된 여성 옥희가 주인공. 경성에서 기생집을 운영하는 예단과 독립군을 결성한 명보, 일본군 이토 등과 엮이며 굴곡진 근대사를 헤쳐 나간다. “백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외할아버지 얘기를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어요. 그런 외할아버지를 부모님은 언제나 자랑스러워하셨죠. 그 덕에 한국 역사책이나 소설도 즐겨 읽으며 자랐습니다. 그게 한국 배경 소설을 쓰게 된 가장 큰 원동력 같아요.”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난 김 작가는 아홉 살에 미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이민 갔다. 프린스턴대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뒤 출판사에서 일했는데 인종차별, 성차별로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한 상사가 “넌 하인이야”란 말까지 내뱉자 회사를 박차고 나와 소설에 매진했다. 저축해 둔 돈이 없어 99센트짜리 콩과 오트밀을 사 먹으며 버텼지만 김 작가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소설 완성에 6년이 걸렸습니다. 미국에서 여러 차별을 겪었지만 언제나 제가 가진 (한국계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여겼어요. 그런 자긍심이 한국 역사소설을 쓰는 버팀목이 됐다고 믿습니다. 차기작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발레리나를 다루려 해요. 한국에 가본 게 20년 전(2002년)인데, 조만간 가서 국립발레단 공연을 보고 싶네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파친코’와 비교되는 건 큰 영광이에요. 다만 ‘파친코’가 가족을 위한 생존 소설이라면 ‘작은 땅의 야수들’은 나라를 위한 투쟁 소설입니다.” 28일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다산북스)을 펴낸 한국계 미국 작가 김주혜(35)는 같은 날 화상으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제강점기 제국주의와 독립운동사, 민중의 삶을 다룬 ‘작은 땅의…’가 일제강점기 고향을 떠난 재일교포 3대를 그린 이민진 작가(54)의 장편소설 ‘파친코’를 연상시킨다는 평가에 겸손함을 내비치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강조한 것이다. ‘작은 땅의…’는 일제강점기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 기생이 된 여성 옥희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경성에서 기생집을 운영하는 예단, 독립군을 결성하는 명보, 일본군 이토 등 다양한 인물이 역사의 질곡 속에서 고군분투한다. 지난해 12월 미국 출간 직후 미국 온라인 서점 아마존북스에서 ‘이달의 책’에 올라 화제가 됐다. 12개 국가에 판권이 수출됐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문학 작품에 수여하는 ‘데이턴문학 평화상’ 최종 후보에 선정됐다.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을 도와 독립운동을 한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란 게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게 만든 원동력 같아요. 독립운동가 자손들은 보통 가족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는 편인데 부모님은 달랐죠. 한국 역사책과 한국 소설을 즐겨 읽은 것도 소설 집필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1987년 인천에서 태어나 9세에 가족과 함께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로 이주했다. 프린스턴대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한 뒤 출판사에서 일했지만 인종, 성별 차별에 부딪혔다. 어느 날 상사로부터 ‘너는 하인이야’라는 말까지 듣곤 퇴사한 뒤 집필에 매달렸다.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한 때만 해도 돈이 없어 캔으로 된 99세트짜리 콩과 오트밀을 사 먹었고, 4달러짜리 빵을 사 먹을 수 없었다. “소설을 쓰는 데 총 6년이 걸렸습니다. 인종차별을 겪으면서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랑스럽다고 생각한 게 결국 한국 역사에 대한 소설을 완성하도록 한 것 같아요. 차기작은 러시아와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발레리나 이야기입니다. 한국에 간 건 2002년이 마지막인데 한국에 가서 국립발레단 공연을 보고 싶네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노벨 문학상 수상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지금까지 쓴 작품들보다 더 좋은 소설을 쓰는 것이죠. (목표는) 세계의 독자들이 지금까지 읽어본 적이 없는 작품을 쓰는 것입니다. 아마 젊은 세대들은 (중년 작가의) 압박감과 긴장감을 상상하시기 어려울 거예요, 하하.” 옌롄커(閻連科·64)는 옌롄커였다. ‘중국의 반골’로 불리는 그는 다음 달 6일(현지 시간) 발표하는 노벨 문학상 수상 가능성에 대해 “3번이나 질문을 하니 답변을 하긴 하겠다. 별 생각 안 하고 있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위화(62), 모옌(67)과 함께 ‘중국 3대 현대소설가’로 거론되고, 해마다 노벨 문학상 주요 후보로 거론되지만 그는 “상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그가 한국을 찾은 건 2019년 이후 3년 만이다. 제6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2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했다. 서울 은평구가 주최하는 이 문학상은 실향민 출신으로 불광동에서 50년 넘게 살며 분쟁과 평화에 대한 소설을 썼던 이호철 작가(1932∼2016)를 기리고자 2017년 제정됐다. 주최 측은 “정부의 지식인 탄압을 비판하고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을 담은 장편소설 ‘사서’(2011년)를 비롯해 옌롄커의 작품들은 이호철의 문학세계에 잘 부합한다”고 평했다. 옌롄커는 중국 문화혁명 시기 군부대에서 벌어지는 사랑을 다룬 장편소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2005년), 정부의 매혈 운동으로 마을에 에이즈가 퍼진다는 내용으로 판매금지 조치를 받은 장편소설 ‘딩씨 마을의 꿈’(2006년) 등 중국 사회의 은폐된 진실을 담은 작품을 꾸준히 써 왔다. ―많은 상을 받았는데 이호철통일로문학상 수상을 가장 뜻깊어했다고 들었다. “정말 의미가 크다. 먼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3년 동안 움직일 수 없었는데 신선한 공기를 맡아서 좋다.(웃음) 또 심사위원들이 내게 매우 중요한 책인 ‘사서’를 좋게 평가해줘서 기쁘다. 작가로서 영예를 뒤좇지 않고, 문학 그 자체를 위한 순수한 글쓰기를 하려 한다. 부조리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인류의 보편적 사랑이며 이상적인 문학을 지키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 것이다.” ―‘사서’ 등 대표작들이 중국에서 출간되지 못했다. “출판되느냐, 독자가 읽을 수 있느냐는 큰 문제가 아니다. 작가에게 중요한 건 마음속에 있는 걸 표현할 수 있느냐이다. 중국에서도 일부 작품은 출간됐다. 독립 출판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홍콩이나 대만에서 중국어로 출간되기도 했다.” ―중국 내 정치적 상황이 심각하다.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나는 정치보단 생활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누가 국가주석이 되는지, 정치가 어떤지보다 인민의 생활이 더 중요하다. 3년 동안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면서 서민들의 생활이 심각하게 어려워졌다. 전 세계적으로 비슷하지만 중국의 농촌 생활은 한국인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세계적인 정치적 혼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의 분단에 대해서는 이해가 깊지 않다. 다만 언젠가 꼭 통일이 되길 바란다. 대만과 우크라이나 상황도 평화롭게 해결됐으면 좋겠다. 지금 (세계의) 정치가들이 지혜롭지 못해 평화롭지 못한데 우리가 모두 평화로운 세계에 살아가길 바란다. 작가가 현실에 대해 써도 국가나 사회가 바뀌진 않는다. 다만 나는 내 마음에 있는 것을 진실하게 표현할 뿐이다. 내가 겪는 것을 진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어떻게 지냈나. “중국 고대문학에 대해 새롭게 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 2년 동안 프랑스와 영국의 희곡들을 탐독했다. 희곡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 소설을 쓰려고 하고 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달 미국 에미상 6관왕을 차지한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미 대중문화잡지 롤링스톤이 뽑은 ‘가장 위대한 TV 프로그램 100’에 이름을 올렸다. 롤링스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TV 프로그램 100편 가운데 ‘오징어게임’을 95위로 선정했다”고 26일(현지 시간) 밝혔다. 롤링스톤은 “오징어게임은 이번 순위에 오른 작품 가운데 가장 최신작이자 유일한 비영어권 작품”이라며 “온라인 스트리밍 시대에 콘텐츠의 장벽을 허문 상징성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또 “막대한 상금을 걸고 아이들의 놀이를 통해 죽음의 경쟁을 하는 내용을 다룬 매혹적인 스릴러이자 무자비한 사회경제적 풍자가 담겼다”며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정재의 훌륭한 쇼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롤링스톤은 2016년에도 ‘위대한 TV 프로그램 100’을 선정했다. 이번에는 배우와 드라마 관계자, 비평가 등의 자문을 거쳐 새롭게 100편을 선정했다. 1위는 미국 마피아 가족의 삶을 다룬 걸작 드라마 ‘소프라노스’(1999∼2007년)가 차지했으며, 2위에는 1989년 시즌1을 방영해 30년 넘게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애니메이션 시리즈 ‘더 심프슨’(국내 방송 제목 ‘심슨 가족’)이 올랐다. 3위는 시한부 고교 교사의 마약 사업을 다룬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2008∼2013년)가 뽑혔다. 오징어게임을 비롯해 ‘더 크라운’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작품이 상당수 포함됐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이달 미국 에미상 6관왕을 차지한 넷플릭스 한국드라마 ‘오징어게임’이 미 대중문화잡지 롤링스톤이 뽑은 ‘가장 위대한 TV프로그램 100’에 이름을 올렸다. 롤링스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TV프로그램 100편 가운데 ‘오징어게임’을 95위로 선정했다”고 26일(현지 시간) 밝혔다. 롤링스톤은 “오징어게임은 이번 순위에 오른 작품 가운데 가장 최신작이자 유일한 비영어권 작품”이라며 “온라인 스트리밍 시대에 콘텐츠의 장벽을 허문 상징성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또 “막대한 상금을 걸고 아이들의 놀이를 통해 죽음의 경쟁을 하는 내용을 다룬 매혹적인 스릴러이자 무자비한 사회경제적 풍자가 담겼다”며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정재의 훌륭한 쇼 케이스”라고 설명했다. 롤링스톤은 2016년에도 ‘위대한 TV프로그램 100’을 선정했다. 이번에는 배우와 드라마 관계자, 비평가 등 자문을 거쳐 새롭게 100편을 선정했다. 1위는 미국 마피아 가족의 삶을 다룬 걸작 드라마 ‘소프라노스’(1999~2007)가 차지했으며, 2위에는 1989년 시즌1을 방영해 30년 넘게 세계적인 사랑받고 있는 애니메이션 시리즈 ‘더 심슨(국내 방송 제목 ’심슨 가족‘)이 올랐다. 3위는 시한부 고교 교사의 마약 사업을 다룬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2008~2013)가 뽑혔다. 오징어게임을 비롯해 ‘더 크라운’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작품이 상당수 포함됐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제가 쓰는 언어는 한국말도 영어도 아닌, 그 중간의 어떤 것이죠. 전 어쩌면 ‘모국어를 갖지 못한 사람’이자 ‘추방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에요.” 시인은 근심이 많았다. “걱정되고 두렵다”는 말을 반복했다. 모국인 한국에서 과연 자신의 영혼을 담은 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한국을 떠난 뒤 줄곧 아버지의 국어사전을 지니고 탐독했다”는 그에게선, 아직 세상을 모르는 열 살배기 소녀의 불안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재미교포 시인인 최돈미(60)의 시작(詩作)은 다르다. 고통이 묻어나되 올곧고, 묵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공감대가 넓다. 이방인이자 노마드(유목민)의 시선으로 새겨 넣은 그의 시집 ‘DMZ 콜로니’는 2020년 미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전미문학상’을 받으며 국내외에서 화제를 모았다. 서울 마포구의 한 호텔에서 23일 만난 최 시인은 “아직 한국에서 시집도 나오지 않았는데 서울국제작가축제(23∼30일)에 초대받아 너무 기쁘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998년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공부했지만 여전히 한국어가 서툴다”며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 걸 사과하기도 했다. “1972년 열 살 때 한국을 떠났어요. 아버지가 동아일보 사진기자셨는데, 이후 미 ABC, CBS 방송 아시아특파원으로 4·19혁명, 베트남전쟁 등을 취재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홍콩과 독일 등을 떠돌며 ‘왜 난 고국에서 살 수 없나’를 고민했죠. 칼아츠(미 캘리포니아예술대)에 다닐 때, 한 교수님이 저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시로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셨어요. 그때 저는 나의 뿌리인 한국에 대해 쓰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죠.” 시집 ‘DMZ 콜로니’에는 비무장지대(DMZ)를 소재로 삼은 시 ‘하늘의 번역’이 실려 있다. 시인은 DMZ와 위도가 비슷한 미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날아가는 흰기러기를 보며 한반도의 허리를 끊은 38선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담았다. 해당 시집에는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 한국의 현대사를 두루 고찰한 시가 많다. “아버지는 저에게 한국에 대해 자주 얘기해 주셨죠. 그런 한국에선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서 공부하고 시를 썼습니다. 예를 들어, 5·16군사정변을 다룰 땐 당시 독재정권의 피해를 입었던 분들을 직접 만나 얘기를 듣기도 했어요. 저에게 시는 취재와 고민의 산물입니다.” 최 시인은 서울예대 명예교수인 김혜순 시인(67)과 인연이 깊다. 미국에서 2016년 출간한 김 시인의 시집 ‘전 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와 2018년 ‘죽음의 자서전’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문학번역가협회의 ‘루시엔 스트릭 아시아 번역상’을 두 번이나 함께 받았다. ‘죽음의 자서전’으로는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도 공동 수상했다. “1998년에 김 선생님의 시를 읽고는 순식간에 홀려버렸어요. 그렇게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넘치는 시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본 적이 없어요. 한국 여성의 고통을 담은 시를 보며 한국에 더 관심이 커졌어요. 김 선생님의 시를 번역하며 제 시가 더 깊어졌다고 믿습니다.” 김 시인은 차기작으로는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 말 출간할 계획으로,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가하기 전 짬을 내서 며칠 동안 광주에도 다녀왔다. 시인은 “당시 아버지도 특파원으로 광주 현장을 취재하셨다”며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계엄군에게 목숨을 잃은 윤상원 열사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그에게 한국은 멈춰 있는 시계가 아니다. 함께 살아 숨쉬는 가족이자 생명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972년 당시 10세였던 재미교포 시인 최돈미(60)는 한국을 떠났다. 동아일보 사진기자 출신으로 미국 ABC, CBS 방송 아시아 특파원으로 일하며 4·19혁명, 베트남전쟁을 보도했던 아버지가 신변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최돈미는 특파원으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홍콩, 독일에 살며 자신이 왜 고국에 돌아갈 수 없는지 고민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예술대(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 진학한 뒤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들던 그에게 어느 날 교수가 말했다.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긴 시를 써보면 어떻겠냐”고. 그때 그는 그가 뿌리인 한국에 대해 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23일 서울 마포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그는 해외 작가로서 한국에서 열리는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가했다는 사실에 흠뻑 감동해 있었다. 그는 어눌한 한국어와 유창한 영어를 번갈아 쓰며 자신의 기분을 털어놨다. “제 시집에 대해, 번역 작업에 대해 어떤 질문이 나올까 걱정되고 두려워요. 전 한국을 떠난 뒤 아버지가 가지고 다니셨던 국어사전을 탐독하고, 1998년엔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공부하기도 했지만 아직 한국어가 부족합니다. 제가 쓰는 언어는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그 사이의 어떤 것이죠. 저는 모국어를 갖지 못한 사람, 추방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에요.” 그는 비무장지대(DMZ)를 소재로 한 시집 ‘DMZ 콜로니’로 2020년 미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전미도서상을 수상하며 화제에 올랐다. 그는 ‘DMZ 콜로니’에서 남과 북을 가르는 38선이 국가의 허리를 끊었다고 외치고, DMZ와 위도가 비슷한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흰기러기가 날아가는 장면을 바라보며 슬픔을 털어놓는다.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사진, 비전향 장기수가 자신이 고문당했다는 사실을 털어놓는 노트를 다양하게 활용하며 한국사를 냉철하게 들여다본다. “아버지는 항상 한국에 대해 이야기하셨죠. 왜 내가 이렇게 여러 나라를 떠돌 수밖에 없었는지, 한국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 시를 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독재의 피해를 입은 분들을 직접 찾아가 만나 이야기를 듣기도 했죠. DMZ 콜로니는 취재와 고민의 산물입니다.” 그는 시인 김혜순 시집 ‘전 세계의 쓰레기여, 단결하라!’(2011)와 ‘죽음의 자서전’(2016)을 번역해 미국문학번역가협회 루시엔 스트릭상을 2차례 받았다. ‘죽음의 자서전’으로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을 수상했다. 20년 넘게 시를 번역해온 영혼의 단짝인 김혜순에 대해 묻자 그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1998년 처음 김혜순 선생님의 시를 읽고 홀렸어요. 창의적이고 상상력인 넘치는 이런 시는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거든요. 특히 한국 여성의 고통을 이야기한 선생님의 작품을 읽으며 한국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됐죠. 시처럼 새롭게 언어를 만드는 작업인 번역을 하면서 제 시가 더 깊어진 것 같습니다.” 서울국제작가축제가 끝난 뒤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차분히 답했다. “축제에 참가하기 전 며칠 동안 광주를 다녀왔어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특파원으로 광주를 취재하던 아버지가 시민군 대변인으로 옛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 총탄에 맞아 숨진 윤상원 열사에 대해 해준 이야기가 있어서 이를 더 알아보려고요. 아마 올해 말 5·18을 다룬 시집을 출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호재기자 hoho@donga.com}

○ 우리 손으로 만든 머내여지도(머내여지도팀 지음·한울아카데미)=경기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과 고기동(머내 지역)의 역사와 지리 이야기를 담았다. 1919년 3월 이 지역에서 벌어진 머내만세운동과 1970년대 머내 지역 난개발 과정을 들여다보며 지역 역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3만8000원.○ 롤러코스터를 탄 미얀마(이상화 지음·박영사)=2018∼2020년 주미얀마 대사를 지낸 저자가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듯 보였던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벌어진 뒤, 미얀마가 어두운 터널에 갇힌 과정을 분석했다. 중국의 일대일로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부딪치는 장이 된 미얀마 상황을 한국이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1만7000원.○ 화이트 타운(문경민 지음·은행나무)=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땅을 사들여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남자의 삶을 그린 범죄 스릴러 장편소설. 부동산 투자에 집착하는 주인공을 통해 한국 사회의 욕망과 민낯을 보여준다. 많은 이들이 왜 부동산에 휘둘리는지 묻는다. 1만5000원.○ 위험한 철학(미하엘 슈미트잘로몬 지음·안성철 옮김·애플씨드)=진화생물학 심리학 뇌과학 실험 결과를 근거로 현대사회의 도덕 개념을 파고든다. 특정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고 이들에게 차별과 혐오를 퍼붓는 기득권을 비판하고, 편견에 가득 찬 이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2만1000원.○ 꽃을 끌고(강은교 지음·열림원)=깊은 성찰이 담긴 작품을 써 온 시인이 시 83편을 고르고 이에 맞는 산문을 덧붙인 시 산문집. 50여 년 동안 시를 써온 경험을 털어놓으며 시란 무엇인지, 시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묵직하게 파고든다. 1만5000원.○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조제프 쇼바네크 지음·이정은 옮김·현대지성)=여섯 살까지 말을 못 했던 저자가 자폐인으로서 세상을 보는 관점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 독학으로 10개 언어를 배우고 프랑스 명문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천재 자폐인’이란 수식을 거부한다. 인사하거나 카페에 들어가는 게 버겁다고 털어놓으며 사람은 한 가지 설명에 가둘 수 없다고 말한다. 1만6500원.○ 라이어 라이어 라이어(마이클 레비턴 지음·김마림 옮김·문학수첩)=태어나 세 번 거짓말한 걸 빼고 29년간 진실만 말했다는 저자가 거짓말이 주는 행복에 대해 썼다. 솔직함을 광적으로 신봉하는 가정에서 자란 그는 이제 거짓말을 하면서 살기로 했다며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관계에서 거짓과 진실이 작동하는 법을 말한다. 1만4000원.○ 다이버시티 파워(매슈 사이드 지음·문직섭 옮김·위즈덤하우스)=영국 출신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다양한 관점과 경험의 중요성을 다뤘다. 능력주의와 다양성이 공존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이민자들이 창업에 성공하는 사례 등을 근거로 다양성이 조직과 사회에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2만1000원.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드라마 ‘오징어게임’처럼 피비린내 나는 넷플릭스에 지친 걸까. 자극적인 내용이 가득한 유튜브에 질린 걸까. 요즘 유난히 여백이 많고 담백한 콘텐츠를 자주 찾는다. 책도 마찬가지다. 서사가 빽빽하게 가득 찬 것보단 숨 쉴 구멍이 있는 책에 손이 간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이병률 시인이 2년 만에 펴낸 산문집이다. “사람을 진정 사람이게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그리움”이라는 글귀에 위로받고, 그윽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을 찍은 사진을 보고 여러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책을 썼는지 궁금해 16일 이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한국에 없다고 했다. 봄엔 유럽을 돌아다녔고 최근 책을 다 쓴 뒤엔 미국 뉴욕에 머물고 있단다. 그는 혼자 뉴욕의 거리를 다니며 낯선 사람에게 눈인사도 하고 대화하다 글감을 찾기도 한다고 했다. “시만 썼으면 안 그랬을 텐데 산문을 쓰면서부터 듣는 귀를 열고 다녀요. 여행할 때 노트북이나 휴대폰도 잘 안 쓰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지도 않죠. 열차나 버스 정류장에 가만히 있다 눈이 마주치면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걸어와요. 자신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털어놓죠. 그 이야기를 글로 옮겨요.” 그는 어느 늦여름 밤 제주의 한 바닷가에서 후배 시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새로 작업하는 것이 있냐는 후배의 질문에 “사랑 이야기를 한 권 쓸까?” 하고 무심결에 대답했다가 이 책을 쓰게 됐다. 1년 동안 조금씩 썼고 일부 글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보내 연재했다. 가수 이소라가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한 이 시인의 경력 때문일까. 그의 글은 유난히 낭독하기 좋다. 신작엔 사랑 이야기가 많다. 그는 “긴 시간 동안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최고의 기억을 담아라. 중요한 건 사랑한 만큼의 여운”(‘아무 날도 아닌 날에’)이라고 사랑에 대해 예찬한다. 하지만 그가 그리는 사랑이 항상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그대로 한 사람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당신이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이고, “우리는 사랑하다가도 어긋나고, 이어보려 해도 고스란히 해진 자국을”(‘어떤 날에 문득 그런 사람이라면’) 남긴다며 사랑의 실패를 그린다. “사랑은 언젠가 함몰되거나 상하죠. 하지만 분명 그 이후엔 진화와 성장이 있어요. 사랑이 끝나더라도 사랑을 하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계속 쌓고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이 책에 너무 빈 공간이 많다고, 후루룩 읽으면 30분 만에 다 읽는 책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었다. 여백이 있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시인이 쓰는 산문의 장점이 그런 것이 아닐까. “제 산문집을 시집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전 그 어떤 것으로 부르든 괜찮아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진은영 시인(52)은 최근 10년 가까이 안팎으로 많은 부침을 겪었다. 2017년 심장 수술을 받은 뒤 한동안 건강 악화로 고생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고 유예은 양(단원고 2년)을 위한 시 ‘그날 이후’를 썼고 2015년엔 유가족을 상담한 정혜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대담집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도 펴냈다. 그는 2013년부터 한국상담대학원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심리상담사 지망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15일 전화 인터뷰한 진 시인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시란 무엇일까 고심했다. 시가 지녀야 할 사회적 역할을 돌아본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시인은 “지금도 몸이 썩 좋지 않아 직접 만나 인터뷰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고민의 세월이 헛되지 않은 것일까. 지난달 31일 출간한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문학과지성사·사진)는 나온 지 약 3주 만에 1만 부가 팔렸다. 시집으로는 이례적으로 온라인서점 알라딘의 종합순위 10위에도 올랐다. “2012년 ‘훔쳐가는 노래’(창비) 이후 10년 만에 내놓은 시집이에요. 비장하고 우울한 시가 많은데, 젊은 세대의 반응이 뜨겁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다 보니 그들의 언어와 가까워진 게 아닐까요. 슬픔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고백에 20, 30대가 많이 공감해준 거 같기도 하고….” 진 시인은 그간 깊은 철학적 사유를 담아내는 시를 쓴다는 평을 받아왔다. 이화여대에서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를 분석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신작에 실린 42편은 접근하기 다소 높았던 작품의 문턱을 한껏 낮췄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청혼’), ‘내 모든 게 마음에 든다고/너는 말했다’(‘사랑합니다’) 등 담백하고 편안한 문장이 돋보인다. 시인 역시 “독자들이 이번 시집은 함께 슬퍼할 수 있는 ‘슬픔의 공동체’로 여겨준 것 같다”며 “시가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니 시인으로서는 정말 다행이다”라고 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이 대놓고 얘기하더군요. ‘교수님 시가 너무 어려워요’라고요. 문학적 성취보다 상담 치료를 위해 시를 배우는 학생들인지라 더 깊게 와 닿았습니다. 시인들이 지닌 감성적, 지성적 위계의식을 깨야 한다는 목표가 생겼어요. 누구나 공감하는 사랑이란 주제를 많이 쓴 것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시인에게 세월호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과제다. 유 양을 위한 시 ‘그날 이후’는 물론이고 덤덤해서 더 시리고 아픈 시 ‘아빠’도 이번 시집에 담았다. 몸이 아픈 와중에도 유가족을 위한 문학행사인 ‘304 낭독회’에는 꾸준히 참석했다. 낭독회는 304명의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기리며 시를 낭송하는 모임으로 매달 한 번 열린다. “유가족도 아닌데 세월호 관련 시를 쓰는 건 조심스럽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겪은 고통을 100% 전달할 수 있겠어요. 그저 그분들에겐 여전히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시집을 낸 뒤 몇몇 유가족에게 연락드렸는데 ‘큰 위로가 된다’고 말씀해 주셔서 가슴을 쓸어내렸어요.” 진 시인은 다작을 하는 시인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거북이”라 불렀다. 느리게 읽고, 오래 고민하며, 천천히 쓴다. “달마다 딱 한 편씩 쓰려고 해요. 매너리즘에 빠지지도, 자기표절도 하지 않는 시인이 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시인에게 필요한 건 한 가지입니다. 계속해서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죠.”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영국 남부에 있는 사유지 ‘넵 캐슬’. 찰리 버렐과 이저벨라 트리는 2000년 2월 3500에이커(약 1416만3000m²)에 이르는 이 땅에서 운영해온 농장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해당 농장은 1987년 찰리가 조부모로부터 물려받았을 때부터 만성 적자였다. 부부는 최신 농기계를 들여 밀 수확량을 늘리고 양도 새로 키워봤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하는 초대형 농장이나 해외 수입 곡물과 경쟁 자체가 되질 않았다. 이쯤 되면 부부가 땅 판 돈으로 런던에 금싸라기 건물이라도 사서 유유자적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들의 선택은 사뭇 달랐다.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이 거대한 땅을 ‘자연’으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나무를 풍성하게 심거나 예쁜 꽃들이 가득한 수목원을 만든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잡초 가득한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야생 쪽으로’는 진짜 제목대로 농장이던 땅을 야생으로 바꾸는 노력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재야생화(rewilding)’란 용어를 사용한다. 환경 운동가이자 여행 작가인 부인이 책을 집필했고, 2018년 미국 스미스소니언재단이 발행하는 ‘스미스소니언 매거진’ 선정 10대 과학서로 뽑혔다. 부부는 들판을 휴경지로 만들며 조금씩 농장을 없애갔다. 엑스무어 조랑말이나 탬워스 암퇘지 등 영국 토종 동물을 키워 땅의 재야생화를 촉진시킨다. 이런 방법은 정부에서 파견한 과학자 자문위원회의 조언을 따랐다. 변화는 놀라웠다. 영국에 5000쌍밖에 없는 멧비둘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서구에서 사라져가던 나이팅게일은 물론이고 종달새, 꼬마도요, 큰까마귀 등 희귀 야생동물들도 빠르게 번성했다. 작은멋쟁이나비 등 276종의 희귀 나비가 서식하고, 비버처럼 영국에서 쉽게 보기 힘든 포유동물도 이곳에 자리 잡았다. 넵 캐슬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생태학의 보고이자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선의의 노력이 항상 좋은 방향으로 흐르는 건 아니다. ‘화이트 스카이’는 인류가 호기롭게 환경 보호에 나섰다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사건들에 주목했다. 미 뉴욕타임스(NYT)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2015년 ‘여섯 번째 대멸종’(처음북스)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자는 꼼꼼히 현장을 훑으며 냉철한 시각으로 실패 사례들을 분석한다. 미국에서 20세기 초 ‘아시아잉어’가 범람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미시간 호수 주변은 이제 막 유입되기 시작한 외래종인 아시아잉어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당국은 애초에 약품을 이용해 잉어 수를 줄이려 했지만 환경운동가들에게 막혀 실현하지 못했다. 때마침 미시간 호수의 수질을 개선하기 위한 토목공사가 기름을 부었다. 시카고강을 역류시켜 일리노이강으로 보냈다가 아시아잉어가 3군데 모두로 급속히 퍼져버렸다. 한반도의 황소개구리처럼 강과 호수의 포식자가 돼 토종 생태계를 박살내 버렸다. 뒤늦게 어류 차단용 전기 장벽까지 세워봤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하지만 저자는 희망을 놓기엔 이르다고 강변한다. 실패담을 보여줬지만 여전히 인류에게 필요한 건 “제대로 된 노력”이라 얘기한다. 물론 환경 보호는 워낙 복잡하고 예측이 쉽지 않다. 하지만 다양한 의견을 듣고 종합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하느니만 못한’ 일들이 반복된다. 갈수록 병들어 가는 지구에 인류는 빚을 지고 있다. 이를 어떻게 갚을지 ‘부채 탕감 계획’을 제대로 짜야 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영국 남부에 있는 사유지 ‘넵 캐슬.’ 찰리 버렐과 이저벨라 트리는 2000년 2월 3500에이커(약 1416만3000㎡)에 이르는 이 땅에서 운영해온 농장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해당 농장은 1987년 찰리가 조부모로부터 물려받았을 때부터 만성 적자였다. 부부는 최신 농기계를 들여 밀 수확량을 늘리고 양도 새로 키워봤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하는 초대형농장이나 해외수입곡물과 경쟁 자체가 되질 않았다. 이쯤 되면 부부가 땅 판 돈으로 런던에 금싸라기 건물이라도 사서 유유자적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들의 선택은 사뭇 달랐다.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이 거대한 땅을 ‘자연’으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나무를 풍성하게 심거나 예쁜 꽃들이 가득한 수목원을 만든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잡초 가득한 황무지”로 만들어버렸다. ‘야생 쪽으로’는 진짜 제목대로 농장이던 땅을 야생으로 바꾸는 노력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재야생화(rewilding)’란 용어를 사용한다. 환경 운동가이자 여행 작가인 부인이 책을 집필했고, 2018년 미국 스미소니언재단이 발행하는 ‘스미소니언 매거진’ 선정 10대 과학서로 뽑혔다. 부부는 들판을 휴경지로 만들며 조금씩 농장을 없애갔다. 엑스무어 조랑말이나 탬워스 암퇘지 등 영국 토종동물을 키워 땅의 재야생화를 촉진시킨다. 이런 방법은 정부에서 파견한 과학자 자문위원회의 조언을 따랐다. 변화는 놀라웠다. 영국에 5000쌍 밖에 없는 멧비둘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서구에서 사라져가던 나이팅게일은 물론 종달새, 꼬마도요, 큰까마귀 등 희귀 야생동물들도 빠르게 번성했다. 작은멋쟁이나비 등 276종의 희귀 나비가 서식하고, 비버처럼 영국에서 쉽게 보기 힘든 포유동물도 이곳에 자리 잡았다. 넵 캐슬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생태학의 보고이자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로 탈바꿈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선의의 노력이 항상 좋은 방향으로 흐르는 건 아니다. ‘화이트 스카이’는 인류가 호기롭게 환경 보호에 나섰다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사건들에 주목했다. 미 뉴욕타임스(NYT)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2015년 ‘여섯 번째 대멸종’(처음북스)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자는 꼼꼼히 현장을 훑으며 냉철한 시각으로 실패 사례들을 분석한다. 미국에서 20세기 초 ‘아시아잉어’가 범람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미시간 호수 주변은 이제 막 유입되기 시작한 외래종인 아시아잉어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당국은 애초에 약품을 이용해 잉어 수를 줄이려 했지만 환경운동가들에 막혀 실현하지 못했다. 미시간 호수의 수질을 개선하기 위한 토목공사가 기름을 부었다. 시카고 강을 역류시켜 일리노이 강으로 보냈다가 아시아잉어가 3군데 모두로 급속히 퍼져버렸다. 한반도의 황소개구리처럼 강과 호수의 포식자가 돼 토종 생태계를 박살내버렸다. 뒤늦게 어류 차단용 전기 장벽까지 세워봤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하지만 저자는 희망을 놓기엔 이르다고 강변한다. 실패담을 보여줬지만, 여전히 인류에게 필요한 건 “제대로 된 노력”이라 얘기한다. 물론 환경 보호는 워낙 복잡하고 예측이 쉽지 않다. 하지만 다양한 의견을 듣고 종합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하느니 못한’ 일들이 반복된다. 갈수록 병들어가는 지구에 인류는 빚을 지고 있다. 이를 어떻게 갚을지 ‘부채 탕감 계획’을 제대로 짜야 한다.이호재기자 hoho@donga.com}

“40여 년 전에 정말 거식증과 가스라이팅(심리적 지배)에 대해 이야기했단 말인가?”(캐나다 문학연구가 리사 아피냐네시) 최근 서점가에서 문학비평서 1권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북하우스)는 1168쪽에 이르는 두툼한 ‘벽돌 책’인 데다 가격도 5만5000원으로 만만치 않다. 그런데 7일 출간되자마자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 이달 첫째 주 종합판매 2위에 올랐다. 1979년 미국에서 출간된 ‘다락방의…’가 다루는 내용은 ‘클래식’하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1797∼1851)와 ‘제인 에어’의 작가 샬럿 브론테(1816∼1855),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브론테(1818∼1848) 등 19세기에 활동한 영국, 미국 여성 작가의 일생과 작품에 대한 해설서. 심지어 2009년 이미 국내에 출판됐으나 큰 반응 없이 절판됐다. 책이 재출간된 건 최근 이 책을 찾는 이가 늘었기 때문이다. 주로 여성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며 중고 책이 한때 20만 원에 거래됐다고 한다. 현재 새로 나온 책의 구매자 역시 62.8%가 20, 30대 여성이다. 허정은 북하우스 기획편집부 팀장은 “출간 1주일 만에 4000부가 다 나가 추가 제작에 들어갔다. 기대보다 반응이 더 폭발적이다”라고 말했다. 이 책의 매력은 뭘까. ‘다락방의…’는 미국에서 1980년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를 정도로 “마스터피스(걸작)”(소설가 조이스 캐럴 오츠)로 대접받아 왔다. 저자인 샌드라 길버트 미 캘리포니아주립대 명예교수와 수전 구바 인디애나대 명예교수도 여성학자로 명성이 높다. 하지만 문학비평서가 이 정도 반향을 일으킨 건 이례적이다. 전문가들은 ‘여성 작가’가 최근 여성 독자들의 핫이슈가 된 현상이 크게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20, 30대 여성들이 무거운 비평서부터 가벼운 에세이까지 해외 여성 작가를 다룬 다양한 책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다락방의…’는 아피냐네시의 말처럼 요즘 여성들의 관심이 큰 주제라 ‘공감’ 점수도 높다. 아피냐네시는 “지금껏 ‘이류’로 취급됐던 여성 작가들의 생과 작품에 집중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했다. 해외 여성 작가의 소설이나 그들의 삶을 조명한 에세이의 인기는 더욱 높아지는 분위기다. ‘여성 작가 클래식’(앤의 서재) 시리즈나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와 비타 색빌웨스트(1892∼1962)가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서간집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큐큐)도 인기다. 지금껏 국내에선 생소했던 ‘프랑스 여성 작가 소설’(열림원) 시리즈나 덴마크 시인 토베 디틀레우센(1917∼1976)의 회고록 ‘코펜하겐 삼부작’(을유문화사)도 반응이 좋다. 김경민 을유문화사 편집장은 “기존 세계문학전집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독특한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찾는 경향이 커져 출판사들도 이를 적극 반영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40여 년 전에 정말 거식증과 가스라이팅(gaslighting·상대를 세뇌시켜 지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단 말인가?”캐나다 문학연구가 리사 아피냐네시는 7일 국내에 재출간된 문학비평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북하우스) 서문에 이렇게 썼다. 1979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이 최근 독자들이 관심 있는 주제를 다뤘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리사는 “아무도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삶을 한 권의 방대한 책에 담은 적이 없었다”며 “이 책은 ‘이류’로 취급됐던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다룬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했다.이 책은 ‘프랑켄슈타인’의 메리 셸리(1797~1851), ‘제인 에어’의 샬럿 브론테(1816~1855), ‘폭풍의 언덕’의 에밀리 브론테(1818~1848) 등 19세기에 주로 활동한 영미권 여성 작가의 일생과 작품을 해설한 고전이다. 국내엔 2009년 출간됐다 절판됐지만 최근 해외 여성 작가들의 삶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늘며 재출간했다. 한때 중고 책 가격이 20만 원까지 치솟았다고 한다. 1168쪽에 이르는 ‘벽돌책’이지만 온라인 서점 알라딘 9월 첫주 종합 2위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다. 구매자의 62.8%가 20, 30대 여성이다. 허정은 북하우스 기획편집부 팀장은 “출간 1주일 만에 4000부가 소진돼 추가 제작에 나섰다”며 “예상보다 반응이 폭발적이라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최근 해외 여성 작가들의 소설이나 그들의 삶을 조명한 책들이 주목받고 있다. 올 3월부터 시작된 ‘여성 작가 클래식’(앤의 서재) 시리즈는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장편소설 ‘오만과 편견’ 등 여성 작가들의 유명 작품을 재출간해 화제를 끌었다.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와 비타 색빌웨스트(1892~1962)가 주고받은 편지를 선별해 묶어 지난달 20일 펴낸 서간집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큐큐)처럼 여성 작가들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책도 인기다. 상대적으로 지명도가 낮았던 여성 작가들을 다룬 책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7월부터 시작된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열림원) 시리즈는 쥬느비에브 브리삭(71) 등 국내에선 생소했던 프랑스 현대 여성 소설가들을 소개해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달 20일 출간된 덴마크 시인 토베 디틀레우센(1917~1978)의 회고록 ‘코펜하겐 삼부작’(을유문화사)처럼 유럽에서도 최근 발굴된 작품을 소개하는 책도 여럿이다.20, 30대 여성들의 구매력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해외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찾는 경향은 앞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김경민 을유문화사 편집장은 “기존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지 않은 독특한 작가들의 작품을 찾는 경향이 짙어진 만큼 출판사들도 시각을 바꾸려 하고 있다”고 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무거운 비평서부터 가벼운 에세이까지 다양한 책을 찾는 수요가 늘어난 만큼 더 많은 해외 여성 작가들이 소개될 것”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