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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부재,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 등 오랜 시간 천착해 온 주제 의식은 여전하지만 서사의 힘이 더 강해졌다. 이승우 소설가(58)의 열 번째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문학동네)은 인간의 내면을 심연까지 파고들면서도 이야기가 지닌 흥미로움을 놓치지 않았다.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15일 그를 만났다. 최근 3년간 책에 담긴 8개 단편을 쓴 그는 “내게 다가온 절실한 순간들을 포착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대통령 탄핵 등 사회적 이슈가 스며들었다는 것. 책에는 전횡을 저지른 시장의 퇴진운동에 앞장서던 중고교 시절 피해를 준 친구를 만나 죄책감에 시달리는 교수, 권력자의 아들에게 짓밟힌 가족이 나온다. 외국인 노동자가 늘어난 현실도 투영됐다. 무료 와이파이를 사용하기 위해 밤마다 집 주변을 맴도는 외국인 노동자 때문에 두려움이 증폭되는 여성, 찰스라는 말레이시아 남성 때문에 성가신 일을 겪는 김철수 교수의 이야기가 그렇다. “젊을 때는 경험이 적다 보니 다소 관념적으로 썼던 것 같아요. 세월이 흐르며 여러 사건을 접하고 이야기도 듣다 보니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걸 느낍니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거나 어머니에게 고통만 주고 떠난 아버지에게 얽힌 사연을 짚어 가는 과정은 그가 항상 붙잡고 있는 화두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늘 ‘왜?’라는 질문을 하며 글을 씁니다. 인물이 무엇을 했느냐보다는 행동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복잡한 내면을 분석하면서 조금씩 나아가죠.” 그의 문장은 단단하고 논리 정연하다. 그가 국내에서보다 프랑스 독일 등 해외에서 더 유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신학을 전공한 그의 글에 서구 독자들이 매료되는 이유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간 내면에 대한 논리적인 사유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올해 2월 프랑스에서 출간된 장편소설 ‘지상의 노래’를 비롯해 현지에서 큰 사랑을 받은 ‘식물들의 사생활’과 ‘생의 이면’까지 프랑스에 소개된 작품은 일곱 권이나 된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는 좋아하는 한국 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가능성이 있는 작가로 황석영 씨와 함께 그를 꼽았다. 이에 대해 그는 얼굴이 살짝 빨개지며 “한국 문학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것 같다”며 쑥스러워했다. 올해로 등단한 지 36년이 되는 그는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왔다. 지칠 때는 없었을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슬럼프는 정점에 섰던 사람이 겪는 거잖아요. 저는 한국 문학의 중심에 있었던 적이 없어요. 항상 서 있긴 했지만 가장자리였죠. 슬럼프가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요.”(웃음) 요즘 그는 대공포가 설치된 서울의 빌딩 옥상에 근무하는 병사들을 소재로 한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을 중심으로 경계의 의미를 담은 장편소설을 쓰기 위한 자료도 모으고 있다. “글을 쓸 때 존재의 이유를 느낍니다. 인생에 복무하는 방식이자 결핍을 채워주는 게 글쓰기니까요. 멈추지 않고 언제나 글을 쓰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호랑이는 토끼가 맡긴 돌떡 중에서 가장 큰 걸 꿀꺽 삼켰어요. ‘아이쿠 뜨거워!’ 호랑이는 돌떡이 너무 뜨거워 시냇가로 뛰어갔답니다.” 13일 경기 포천시 일동면 ‘일동승진작은도서관’에서 기연호 성우(67)가 ‘꾀 많은 토끼’를 구성진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었다. 20여 명의 어린이는 호랑이 연기를 실감나게 하는 그를 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구연동화 수업은 이날 작은도서관의 정식 개관을 기념해 열렸다.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KB국민은행의 후원으로 육군 5군단 관사 내에 만든 이 도서관은 군인 가족은 물론이고 지역주민이 함께 이용할 수 있다. 191m²(약 58평) 규모로 4000여 권의 책이 비치됐다. 서가와 열람실, 어린이공부방 등 세 곳으로 널찍하게 구성됐다. 국방부는 내년부터 도서관 운영을 지원할 예정이다. 도서관은 정식 개관에 앞서 주민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지난달 1일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예전에는 책을 보려면 10km가량 떨어진 일동도서관에 차를 타고 가거나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야 했다. 주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한정은 씨(40·여)는 “도서관이 문을 연 후 초등학교 2학년인 딸 수빈이가 독서량이 두 배가량 늘어나 일주일에 5권 이상 읽고 있다”며 반겼다. 초등학교 2학년인 김유찬 군은 이날 ‘와이(WHY)?’ 시리즈를 세 권째 꺼내 읽고 있었다. 김 군은 “학교를 마친 후 매일 도서관에 와서 학원에 가기 전까지 책을 본다”며 “새로 나온 책을 실컷 볼 수 있어 신난다”고 말했다. 권동오 군(6)은 “어린이집 마치고 매일 오는데 그림이 예쁜 책이 많아서 좋다”며 웃었다. 도서관에는 어린이들이 수시로 찾아와 책을 보고 숙제를 하기도 한다. 엄마들은 자녀들을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보낸 후 도서관을 찾는다. 오후 7시까지 문을 여는데 저녁을 일찍 먹고 함께 오는 가족도 많다. 김란희 양(6)은 “아빠는 역사책을 보고 나는 그림책을 많이 본다. 도서관이 예뻐서 참 좋다”고 말했다. 배경영 씨(49·여)는 “도서관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북적여 동네 사랑방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는 사단법인 ‘작은도서관…’이 운영하는 이동도서관인 ‘책 읽는 버스’를 지원하고 작은도서관을 공공도서관과 연계해 책을 대출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신명숙 문체부 도서관정책기획단장은 “작은도서관이 지역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포천=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 대표인 김수연 목사(71)가 혹독한 시련을 겪은 후 절박한 마음으로 독서 운동에 뛰어든 과정과 결실을 담은 산문집 ‘약속’(마중물)이 최근 출간됐다. 2008년 펴낸 ‘내 생애 단 한 번의 약속’의 개정판이다. 승승장구하던 방송사 기자였지만 화재 사고로 책을 좋아했던 아들을 하늘로 떠나보낸 후 목사가 돼 30여 년간 전국에 작은 도서관을 짓고 이동형 도서관인 ‘책 읽는 버스’로 산간 오지를 누빈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잠 한숨 자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 살아갈 이유를 찾고 ‘책 할아버지’로 불리기까지, 그의 지난한 인생 역정을 확인할 수 있다. 김 목사는 “미미하지만 세상 한 구석에서 외치는 작은 독서 운동이 메아리가 돼 계속 퍼져 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첫 책을 낸 후 겪었던 일과 소회를 추가해 개정판을 냈다”고 밝혔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소설가 한강(47)이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로 이탈리아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말라파르테상’ 수상자로 14일(현지 시간) 선정됐다. 이 상은 ‘쿠데타의 기술’ ‘망가진 세계’로 유명한 이탈리아 작가 쿠르초 말라파르테(1898∼1957)를 기리기 위해 1983년 제정됐고, 이탈리아 문학계의 거장 알베르토 모라비아 주도로 창설돼 세계 문학에 활기를 불어넣는 외국 작가들에게 수여돼 왔다. 역대 수상자로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 소설가 솔 벨로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소설가 네이딘 고디머가 있다.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 미국 작가 수전 손태그 등도 이 상을 받았다. ‘소년…’은 5·18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계엄군에 맞서다 숨진 중학생 동호와 주변 인물들의 내면을 담은 작품으로 산 자와 죽은 자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참혹한 고통과 깊은 슬픔을 처연하게 그렸다. 이 작품은 정부가 공공도서관에 비치할 우수 도서를 선정해 지원해주는 세종도서 사업에서 ‘문제도서’로 분류돼 지원 대상에서 빠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문학상 심사위원회 측은 수상자를 발표하며 “‘소년…’의 살아있는 이미지들이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고 다 읽을 때까지 손을 떼지 못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이탈리아 출판사 아델피는 이 책을 ‘아티 우마니’(‘인간적인 행위’라는 뜻)라는 제목으로 최근 현지에서 펴냈다. ‘채식주의자’를 번역해 한 작가와 맨부커상을 받은 데버러 스미스 씨(30)가 영어로 옮긴 것을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다. 심사위원회는 이 책이 현지에서 공식 출간되기 전에 번역본을 읽어본 후 한 작가를 수상자로 선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상식은 말라파르테가 머물렀던 나폴리 인근 카프리섬에서 다음 달 1일 열린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미국 시카고 흑인 빈민가에 사는 여학생이 있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면 아이들이 괴롭혔고 프린스턴대에 진학하겠다고 하자 교사들은 성적에 비해 눈이 너무 높다고 했다. 여학생은 혼란에 빠졌지만 당당히 대학에 합격했고 하버드대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가 됐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 부인이 됐다. 미셸 오바마(53)다. 워싱턴포스트 기자로 일한 뒤 노스웨스턴대 교수가 된 저자는 가난한 흑인 소녀가 백악관의 안주인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세밀하게 엮었다. 당시 시카고는 인종 차별의 뿌리가 깊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행진을 한 후 “남부 전역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시카고처럼 적개심에 가득 찬 행위는 보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다행히 미셸과 오빠는 교육열 높은 부모 덕분에 꿈을 갖고 자랄 수 있었다. 전업주부였던 어머니와 정수장에서 일하며 퇴근 후 야구, 농구, 축구, 미식축구를 함께하는 아버지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그리고 강조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면 너 역시 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선택뿐이다.” 저자는 방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미셸의 개인사와 사회·정치적 성취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미셸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긴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지기 싫어했던 미셸은 늦은 밤은 물론 새벽 4, 5시에도 일어나 공부하던 악바리였다. 키 180cm로 육상 선수로 잠깐 활동했지만 키 큰 소녀도 다른 걸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운동을 더 하지 않았다. 미셸은 프린스턴대에 들어간 후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BMW를 운전하는 성인조차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차를 몰고 다니는 학생을 보며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 시카고 빈민가를 개선하기 위해 풀뿌리 정치 운동을 하던 버락 오바마와의 만남은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그래도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한 법. 학생 봉사 활동 사무실을 이끌며 집안일을 하고 두 딸을 키우는 ‘독박 육아’에 지친 미셸이 버락에게 “당신은 자기 자신만 생각해”라며 따지는 모습은 여느 직장맘과 다름없다. 버락의 대선 출마를 허락하며 미셸이 내건 조건은 금연이었다. 골초였던 버락은 니코틴 패치 없이 담배를 끊은 비결에 대해 “마누라가 무서워 죽겠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빠듯한 형편에 정치에 필요한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지 고민하고, 백악관 입성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간 과정과 미국 대선이 치러지는 분위기도 실감나게 그렸다. 강하고 화끈한 그의 성격도 확인할 수 있다. 유세 논조가 부정적이고 신랄하다는 비판에 참모들이 어투를 순화해야 한다고 조심스레 말하자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분개하는 모습이 그렇다. 이어 “선거운동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변하고 싶다”고 말할 때는 정치인의 아내 역할을 운명처럼 받아들인 듯하다. 미셸은 아주 낮은 가능성이라도 끈질기게 붙잡으려 애쓰라는 당부를 자신이 걸어온 길을 통해 웅변한다. 흑인을 비롯해 가난하고 어려운 학생들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 뒤 일일이 포옹하며 꿈을 심어준 건 그가 뿌린 가장 의미 있는 씨앗이 아닐까. 원제는 ‘Michelle Obama: A Life’.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아, ××, 더러운 세상 잘 떠났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지 2년 만에 돌연 사망한 마광수 교수의 영혼이 중얼거린다. 5일 별세한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66)가 쓴 단편소설 ‘마광수 교수, 지옥으로 가다’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다. 고인의 단편 28편을 모은 유고 소설집 ‘추억마저 지우랴’(어문학사)가 14일 출간됐다. 책 표지에는 1991년 출간한 ‘즐거운 사라’ 표지 삽화를 색깔만 바꿔 실었다. 이 삽화는 고인이 직접 그린 것. 책에는 ‘허무한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고인이 그린 삽화도 함께 담았다. 보통 삽화는 마 교수가 선택했지만, 이번 책은 마무리 단계에서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출판사에서 골랐다. ‘추억마저…’에서 저자는 페티시즘과 마조히즘, 그룹섹스 등을 등장시키며 성에 대한 특유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과감하게 풀어냈다. 마 교수가 간 지옥에는 투명한 망사 브래지어를 하고 티팬티를 입은 염라여왕이 미소년, 근육질 꽃미남과 함께 있다. 그곳에서 마 교수는 온몸에 피어싱을 해 한층 더 야해진 사라를 만난다. 작품 곳곳에는 고인이 느꼈던 외로움도 짙게 배어 있다. ‘고독의 결과’의 주인공은 같은 꿈을 반복해 꾸며 외로움에 야위어 간다. 고인이 죽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했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대목도 있다. ‘고독의 결과’는 주인공이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우리 사회의 위선을 직설적으로 비판한 대목도 있다. ‘절망적인, 너무나 절망적인’에서는 ‘초초초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학생이 “사람들은 극단적인 도덕주의에 세뇌돼 겉으로만 도덕적인 척하며 살고 있고, 자유주의 사상은 범죄로 취급돼 정신훈련소에 감금된다”고 말한다. 자신을 단죄했던 법을 풍자하기도 한다. 박영희 어문학사 대표는 “고인은 기존에 써 놓았던 성에 대한 작품은 올해까지만 출간하고 내년부터는 순수 문학 작품을 쓰겠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추억마저…’는 초판 1000권을 찍었다. 서점에 배포한 물량은 평소보다 50% 늘렸다. 올해 1월 출간한 시선집 ‘마광수 시선’(페이퍼로드)은 하루 10권가량 판매됐지만 저자가 별세한 후 100∼200권이 나가 최근 1000권을 더 인쇄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신춘문예 공고가 언제 나오나요?” 더위가 가실 무렵이면 회사로 이런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신문춘예는 11월 초 공고를 내고 12월 초에 마감한다. 계간 시 전문지 ‘미네르바’는 가을호에 특집 좌담 ‘한국 문단 등단 제도 이대로 좋은가?’를 실었다. 등단의 주요한 두 축인 신춘문예와 문학잡지의 신인상 제도에 문제점이 있다는 오랜 비판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기획이다. 유성호 평론가는 박노해 장정일 씨는 시집 출간으로 시인이 됐다며 등단 제도를 다양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제도를 없애기보다는 운용의 미를 발휘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신달자 시인은 “여러 폐단에도 불구하고 등단에 대한 열망이 우리 문학의 큰 에너지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신춘문예에 투고된 원고가 차곡차곡 쌓여 높다란 탑을 이룬 광경은 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온도계 같다. 올해도 신춘문예를 향한 열병을 앓으며 글을 쓰고 있을, 얼굴 모르는 수많은 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시인 수녀와 로커. 너무나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은 이들이 10년 넘게 우정을 나누고 있다. 이해인 수녀(72)와 그룹 ‘부활’의 리더인 김태원 씨(52)다. 2006년 강연을 하러 필리핀에 간 이 수녀는 그곳에서 자폐증세가 있는 아들을 키우는 김 씨의 집에 초대받은 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두 사람이 7일 서울 용산구 ‘성 분도 은혜의 뜰’에서 만났다. “선글라스가 태원 씨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요즘 건강은 좀 어때요?” 이 수녀가 근심 어린 눈으로 안부를 물었다. 김 씨는 지난해 패혈증에 걸려 중환자실에 입원한 적이 있다. “몸이 안 좋으면 누워 있고 좋으면 걸어 다니고, 수녀님 뜨시면 나타나죠.” 김 씨의 재치 있는 답변에 이 수녀가 깔깔깔 웃었다. 단정하고 수수한 이 수녀와 긴 머리를 질끈 묶고 가죽바지를 입은 김 씨는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노래가 된 시 부활의 11집 앨범(2006년)에 첫 번째로 담긴 ‘친구야 너는 아니’는 이 수녀의 시에 김 씨가 곡을 붙인 노래다. 마음을 다독이는 시어와 서정적인 곡은 절묘하게 어우러져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가톨릭 신자인 김 씨는 “시가 성가처럼 와 닿으며 멜로디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이 수녀는 시에 곡을 쓰게 해달라는 김 씨의 요청을 수락했지만 속으로는 불안했단다. “로커가 곡을 쓰면 얼마나 시끄러울까 걱정했어요. 앨범이 나온 뒤에도 안 듣고 있다가 궁금해서 어느 날 들어보고는 눈물이 났어요. 저런 외모에 이런 감성이 있다니!”(이 수녀) “수녀님, 제 ‘솔(soul)’은 외모와 다르게 생겼어요.(웃음) 수녀님 시로 노래 한 곡 더 만들고 싶어요.”(김 씨) 이 수녀는 “나 죽고 나서 장송곡으로 쓰지 말고 얼른 만들어서 살아 있을 때 기쁨을 달라”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이들은 시 노래 콘서트도 함께 하고 있다. 올해 11월 3일에도 ‘성분도 은혜의 뜰’에서 콘서트를 연다.○ 창작의 고통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기에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안다. “어떤 분들은 시가 팝콘처럼 튀어나오는 줄 알지만, 오래 진통하고 숙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시가 탄생해요. 포도주가 익어야 향기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죠.”(이 수녀) “아, 그 심정 진짜 잘 알아요. 제가 한 곡을 쓰는 데 2년이 걸렸어요. 멤버들이 ‘진짜냐’고 물어서 702번까지 녹음한 음성 파일을 보여주니 놀라더라고요. 얼마나 많이 만들고 또 부숴야 하는데요….”(김 씨) 이 수녀도 시 ‘석류’를 쓰는 데 3년 걸린 게 과장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힘들수록 오뚝이처럼 이 수녀는 직장암, 김 씨는 위암으로 투병했다. 하지만 꺾이지 않고 씩씩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김 씨는 다음 달 싱글 앨범을 낸다. 내년은 이 수녀가 수도서원을 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 이를 기념해 절기별 기도시를 모은 ‘사계절의 기도’에 시 150편을 추가해 모두 300편이 담긴 시집을 올해 11월 출간할 예정이다. 수필과 칼럼 등을 모은 산문집도 같은 시기에 내기로 했다. 이 수녀는 젊을 때는 코스모스, 민들레 등 수수한 꽃이 좋았는데 요즘에는 장미가 좋다고 했다. 김 씨는 “직접 그린 부활의 로고가 장미일 정도로 저 역시 장미를 좋아한다”며 맞장구쳤다. 식성도 비슷하다. “투병할 때 아무것도 못 먹겠는데 유일하게 짜장면만 들어가더라고요.”(김 씨) “나도 항암 주사 맞을 때 소면 국수만 넘어갔어요. 가족들과 부산 성베네딕도 수녀원에 놀러 와요. 내가 맛있는 밀면 사줄게요.”(이 수녀) 김 씨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이들은 ‘집단 토크쇼’라는 문패가 딱딱하다며 다른 이름으로 바꾸면 좋겠다고 했다. 골똘히 생각하던 이 수녀가 “‘우정 토크쇼’ 어때요?”라고 제안했다. 김 씨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 수녀가 손뼉 치며 웃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아이 같았다. ▼“기나긴 투병생활, 이제는 ‘선물’로 받아들여”▼詩-멜로디 뒤에 말못할 고통“고통과 아픔 자체는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과정을 겪고 나니 아픈 사람들을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됐죠. 인생관, 세계관, 종교관 등 삶의 모든 시선을 넓혀줬어요. 고통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의 기회로 삼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이해인 수녀) 이들의 아름다운 시와 노랫말 뒤에는 말 못할 고통이 있었다. 이해인 수녀는 2008년 직장암 발병을 확인하고 기나긴 투병생활을 거쳤다. 그룹 ‘부활’의 리더 김태원 씨는 2011년 KBS ‘남자의 자격’에 출연하며 우연히 위암 발병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해엔 패혈증까지 겹쳐 현재도 병마와 싸우고 있는 중이다. “정말 죽을 고비를 넘겼어요. 지금은 대부분의 균을 치료하고, 간 등 일부 치료만 진행하면 됩니다.”(김 씨) “갑자기 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을 땐 마음이 겸허해지고, 묵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꾸 반복되니까 당황스럽더라고요. 그래도 지금은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습니다.”(이 수녀) 김 씨는 자신의 투병뿐 아니라 자폐증세를 앓는 아들 우현 군(17) 등 가족의 아픔도 돌봐야 하는 상황이다. 50여 년간 수도자의 삶을 살아온 이 수녀 역시 홀로 고통을 극복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시간을 오히려 ‘선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사는 중이에요. 가족이 없었다면 제 인생은 30대 때 끝났을 겁니다. 사랑의 책임을 져야죠. 다행히 우현이도 필리핀에서 완전히 적응해 건강하게 지내고 있답니다.”(김 씨) “수도자에겐 ‘선종’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죠. 내 안에 살아있는 자존심을 꺾어야 육체적으로 더 순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요.”(이 수녀)손효림 aryssong@donga.com·유원모 기자}

간절히 손에 넣고 싶은 비밀이 있다. 이를 알아내기 위해 어느 정도의 대가를 치를 용의가 있는가. 봉인 해제를 위한 제단에 바쳐야 하는 것이 거짓말이라면 이에 응하겠는가. 이 미스터리 판타지 장편소설은 인간의 마음속 깊숙이 도사린, 금단의 열매를 따고 싶은 욕구에 대해 정면으로 질문을 던진다. 다윈이 ‘종의기원’(1859년)을 발표한 지 10년 가까이 지난 영국. 열네 살 소녀 페이스는 유명 화석을 발견한 과학자이자 목사인 아버지가 의문에 가득 찬 죽음을 맞자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나선다. 페이스가 맞닥뜨린 건 거짓말 나무였다. 거짓말을 듣고 열매를 맺어 이를 먹은 이에게 비밀을 알려주는 나무. 더 큰 거짓말일수록, 거짓말이 더 널리 퍼질수록 알아낼 수 있는 비밀의 무게도 커진다. 페이스는 나무에게 거짓말을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서서히 거짓말의 유혹에 빠져든다.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퍼뜨리며 쾌감을 느끼게 된 것. 진실을 밝히기 위해 거짓을 말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펼쳐지는 페이스의 모험을 따라가다 보면 어서 빨리 다음 이야기를 확인하고 싶어진다. 빅토리아 시대의 옷차림과 풍속, 거리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진화론과 창조론이 격렬하게 대립하던 당시 분위기도 확인할 수 있다. 남성은 두개골이 여성보다 더 커서 지능이 뛰어나고 여성은 똑똑하거나 숙련된 기술을 가질 수 없다고 굳게 믿던 시절, 페이스가 당차게 나아가는 모습은 소녀들에게 보내는 격려처럼 느껴진다. 거짓말에 대한 인간의 복잡 미묘한 심리와 욕망을 다층적으로 비추는 동시에 읽는 재미도 선사한다. 필립 풀먼의 ‘황금나침반’에 이어 청소년 소설로는 두 번째로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코스타상을 수상했다. 탄탄한 서사가 지닌 강력한 힘은 성인을 빨아들이기에도 충분하다. 영화 ‘오페라의 유령’, ‘어거스트 러쉬’ 등을 제작한 루이즈 굿실은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원제는 ‘The Lie Tree’.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6일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 병원에 마련된 마광수 전 교수의 빈소에는 고인의 동창과 제자, 문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올해 1월 ‘마광수 시선’을 출간한 페이퍼로드 출판사의 최용범 대표는 “고인은 책이 나올 때만 해도 소설과 시를 더 쓰고 싶다며 의욕을 보였지만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고인을 구속하고 강단에 서지 못하게 한 건 창작 의욕을 말살시켜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회적 타살이다”고 비판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가 이 책에 넣을 시를 선별할 때 “외설 시비에 걸릴 수 있는 작품은 모두 빼자”며 자기 검열을 심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즐거운 사라’는 작가 인생의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였다. 운명의 시계가 다른 쪽으로 움직였다면 그의 삶은 다른 날개를 달 수 있었을까? 새삼 이 작품을 둘러싼 당시 분위기와 재판 과정에 관심이 쏠린다.○ 주홍글씨가 된 ‘즐거운 사라’ 1995년 6월 16일 대법원은 “작품이 도착적이고 퇴폐적인 성행위 장면을 노골적으로 묘사해 문학의 예술적 한계를 벗어났다”며 마 전 교수를 ‘외설 작가’로 최종 판정했다. 법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 전 교수의 편을 들지 않았다. 앞서 1, 2심 재판부는 그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991년 7월 여대생 사라의 문란한 성생활을 다룬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가 출간됐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는 같은 해 9월 이 작품에 대해 “사라가 생면부지의 남자와 갖는 즉흥적 동침, 여자친구와 벌이는 동성애, 적나라하게 그려진 자위행위, 스승과 벌이는 부도덕한 성행위 등을 묘사한 퇴폐적 성애소설”이라며 제재 결정을 내렸다. 이 책을 처음 냈던 서울문화사는 즉각 출판을 중단하고 서점에 풀린 책을 거둬들였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92년 8월 ‘즐거운 사라’는 마 전 교수의 문단 동료인 장석주 시인(63)이 대표로 있던 청하출판사에서 다시 간행됐다. 간행물윤리위는 같은 해 9월 또다시 제재 결정을 내리고 검찰에 관련 내용을 통보했다.○ 운명의 시계, 세상의 시계 이 사건은 이른바 ‘대통령 하명(下命)’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정확하게는 확인되지 않는다. 검찰과 변호인, 감정인 등 당시 재판에 등장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즐거운 사라’를 둘러싼 사회적 관심과 논란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서울지검 3차장은 훗날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지낸 특별수사통 검사들의 대부(代父) 심재륜 전 고검장(73)이었다. 그는 2012년 한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즐거운 사라’에 대한 사법처리는 오롯이 나로부터 시작됐다”고 적었다. 마 전 교수가 언론 인터뷰에서 현승종 당시 국무총리가 자신에 대한 수사를 지시했다고 한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심 전 고검장은 ‘즐거운 사라’ 첫 페이지를 읽다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반인륜적, 반도덕적 소설”이라며 수사를 지시했는데, 검사들이 모두 손을 저었다. 결국 불교와 한학에 조예가 깊어 ‘도인’ 소리까지 듣던 김진태 특수2부 검사(65·전 검찰총장)에게 사건이 배당됐다. 처음에 수사 맡기를 주저하던 김 검사는 하루 만에 마 전 교수의 저서는 물론 ‘채털리 부인의 사랑’ 등 외설 논란에 휘말린 외국 서적까지 탐독한 뒤 “제가 하겠다”며 수사를 자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10월 29일 마 전 교수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하더니 마 전 교수에 이어 장 시인까지 구속했다. 김 검사는 당시 법정에서 “카타르시스의 그리스어 어원을 아느냐” “카타르시스는 육체적인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인 정화로 얻어지는 것”이라며 마 전 교수와 논박했다. 김 전 총장은 6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은퇴한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겠느냐”고 했다. 마 전 교수의 변론은 검사 출신의 대표적 인권변호사로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83)가 맡았다. 항소심에서는 문재인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가 낙마한 안경환 전 서울대 법대 교수(69)가 외설 여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감정인으로 참여했다. 당시 안 전 교수는 이 작품에 대해 “헌법이 보호하는 문학작품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단순한 ‘음란물’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반면 또 다른 감정인인 민용태 전 고려대 교수(74)와 소설가 하일지 씨(62)는 “‘즐거운 사라’는 음란하지 않다”며 마 전 교수를 옹호했다. ○ 25년 뒤 오늘… 문단과 출판계는 비통해하며 자성하는 분위기다. 고인이 구속되고 재판을 받을 때 침묵한 것을 반성한다는 문인이 많다고 한다. 이 사건을 기억하는 한 시인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창작품의 표현을 둘러싼 날선 공격과 여론을 앞세운 재판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배우 김수미 씨가 빈소에 술에 취한 채 찾아와 “마광수가 내 친구인데 너무 슬프다. 나도 죽어버리겠다”며 통곡하기도 했지만 지인이 아니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고인의 제자인 나희덕 시인은 “‘야하다’는 것은 단순히 관능적이고 퇴폐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문명화되면서 갖게 된 허위의식과 과잉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에 반대하는 원초적 생명력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가 떠난 이달, 새 소설집 ‘추억마저 지우랴’가 출간된다. 처음 발표하는 단편 21편이 수록됐다. 표지에는 고인이 그린 유화를 싣기로 했다. 어문학사 출판사는 고인이 중편, 장편 소설도 차례로 내자고 제안했으며 중편은 완성됐지만 아직 받지 못했다고 했다. 고인은 머리말을 대신해 ‘그래도 내게는 소중했던’이라는 제목의 서시(序詩)를 썼다. ‘시들하게 나누었던 우리의 키스/어설프게 어기적거리기만 했던 우리의 춤/시큰둥하게 주고받던 우리의 섹스//기쁘지도 않으면서 마주했던 우리의 만남/울지도 않으면서 헤어졌던 우리의 이별/죽지도 못하면서 시도했던 우리의 정사(情死)….’손효림 aryssong@donga.com·권기범·김윤수 기자}

소설가인 나는 얼굴에 심각한 화상을 입은 사회복지사 김정인을 우연히 만난 후 그의 사연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탄광촌에서 태어난 하얀 피부의 소녀 서희연은 집과 길은 물론이고 강물마저 시커먼 그곳을 떠나 새로운 미래를 그리지만 끔찍한 성폭행을 당하며 삶이 산산조각난다. 최근 출간된 장편소설 ‘거미집 짓기’(마음서재)는 두 개의 이야기가 2012년, 1963년이라는 다른 시간대를 배경으로 교차하며 전개된다.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이야기는 어느 순간 한 지점에서 겹쳐지며 뜻밖의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탄광촌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복지관 내부 등은 생동감 있게 그렸다. 단문으로 속도감 있게 써 내려간 글은 시선을 붙잡는다. 작가는 중편소설 ‘미스터리 존재 방식’으로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정재민 씨(41·사진). 대기업에서 9년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한 그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고 2014년 전업작가가 됐다. ‘거미집…’은 그가 내놓은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정 작가는 사실감 있는 작품을 쓰기 위해 탄광촌, 복지관 등을 직접 가보고 관련 자료들도 꼼꼼히 찾아봤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앞서 나온 내용을 다시 살펴보게 만든다. 작가는 촘촘하게 이야기 구조를 짠 후 곳곳에 실마리가 될 만한 장치를 숨겨 놓았다. 이를 되짚어 보는 건 작품이 선사하는 또 다른 매력이다. 정 작가는 “엔지니어로 일하며 프로그래밍 작업을 한 경험이 전체적인 틀을 구상하며 소설의 구조를 짜는 데 간접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거미집…’은 추리소설인 동시에 기구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떤 부분에 방점을 찍을지는 독자의 몫이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 어떤 틀도 씌우지 않겠다는 의미로 ‘작가의 말’을 싣지 않았다. ‘소설의 소임은 거짓의 거미줄 사이에서 진실을 찾는 것이다’라는 유명 소설가 스티븐 킹의 말을 첫 장에 소개한 것은 추리를 해 나가는 데 일종의 단서가 될 수 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소설가이자 시인, 비평가인 마광수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66)가 5일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후 1시 51분 마 전 교수가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숨져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경찰은 “같은 아파트 다른 층에 살며 왕래하던 누나가 오후 1시 35분경 발견하고 신고했다”고 밝혔다. 고인의 방 책상에는 A4 용지 한 장의 자필 유언장이 놓여 있었다. 지난해 9월 3일 작성된 것으로, 자신의 유산을 가족에게 남긴다는 내용이었다고 경찰은 전했다. 이날 고인의 누나는 “‘그동안 썼던 글들이 부질없다. 외롭다’는 말을 자주 했다”며 울먹였다. 고인의 고교 동창은 “평소 죽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다”며 “5일 오전 통화한 뒤 낮 12시 반경 ‘만나러 와줄 수 있냐’고 다시 전화해 찾아가던 중이었다. 황망하다”고 했다. 경찰은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고 있다. 마 전 교수는 한때 최고의 윤동주 연구자이자 문학뿐 아니라 미술에도 조예가 깊은 ‘천재 교수’로 불렸지만 시대와의 혹독한 불화를 겪었다. 연세대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고인은 박두진 시인의 추천을 받아 1977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윤동주 시인을 연구한 문학이론서도 주목받았다. 28세에 홍익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해 1984년 모교인 연세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문단과 학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성적 욕망을 자유롭고 파격적으로 표현한 책을 잇달아 출간하면서 외설적인 작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 장편소설 ‘광마일기’는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논란도 함께 불러일으켰다.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1991년)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1992년 이 작품이 미풍양속을 해치는 외설이라는 이유로 강의 중에 제자들 앞에서 긴급 체포됐고,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학교에서도 해임됐다. 1998년 사면을 받아 복직했지만 2000년 재임용 심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자 휴직계를 냈다. 2003년 다시 복직했다 지난해 8월 정년퇴임한 고인은 우울증 증세로 약물 치료를 받아왔다. 그는 “이 땅에서 살아가기가 싫다. ‘즐거운 사라’를 쓴 것을 후회한다”며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고인은 문학가로서 명예를 회복하겠다며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철학적 사유를 담은 소설 ‘미친 말의 수기’(2011년)와 불안하지만 아름다운 젊음을 그린 소설 ‘청춘’(2013년)을 출간했다. 그의 작품은 자주 논란에 휩싸였지만 자유로운 파격으로 가득했던 그의 강의실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매 학기 첫 강의마다 다양한 생각과 여러 경험을 해 보라는 의미에서 학생들에게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고 당부했다. 연세대 교훈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변형한 것. 하지만 그는 한 번 더 날아오르지 못한 채 자신의 시집 제목 ‘모든 것은 슬프게 간다’처럼 떠났다. 1985년 연극학과 교수와 결혼했지만 1990년 이혼했고 자녀는 없다. 유족으로는 누나가 있다. 빈소는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병원, 발인은 7일 오전 11시 반. 02-797-4444손효림 aryssong@donga.com·김예윤 기자}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는 5일 인촌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31회를 맞은 올해 인촌상은 교육, 언론·문화, 인문·사회, 과학·기술 4개 부문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4명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심사는 부문별로 권위 있는 외부 전문가가 4명씩 참여해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진행됐다. 수상자들의 소감과 공적을 소개한다. 》 ▼강의 약속 지키려 靑 오찬요청 거절… “조용히 나의 길 걸었을 뿐”▼[교육]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97)가 잠시 공연, 도서 윤리위원을 맡았던 때의 일이다. 당시엔 전두환 대통령과 신군부가 집권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위세였다. ‘대통령과 윤리위원들 오찬이 있으니 일주일 뒤 청와대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마침 그 시간에 다른 대학에 강의 일정이 있던 김 교수는 “학생들과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어 못 간다”고 했다. 오찬 거절 뒤 윤리위원에서 해임됐다는 전화가 왔다. “잘됐다”는 게 그의 답이었다. 평생을 교육자로 헌신한 김 교수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는 중앙중고교에서 연세대로 옮기면서 ‘다른 데 눈 돌리지 말고, 교수다운 교수로 평생을 살자’고 다짐했다. 연세대에서 보직을 맡아 달라는 총장의 요청에도 다른 교수를 그 자리에 추천하면서 자신은 사양했다. “중앙학교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선생을 5, 6년 동안 가까이 뵈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그중 중요한 게 전체를 위해 자신보다 유능한 사람을 밀어주는 것과 편 가르기를 경계하는 것이었어요. 그게 아무나 잘 안 되는데 왜 인촌 선생은 됐느냐, 애국심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도 그렇고요.” 김 교수가 중앙중고교와 대학에서 길러낸 후학들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 등 해외 유수 대학에서 학자로 성장했다. 중앙중 시절 제자들은 여든이 넘은 이들이 적지 않다. 제자들의 귀가 먼저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사제간의 정이 지금도 돈독하다. 책에 ‘○○군에게’라고 써서 제자에게 선물하면 여전히 어린애처럼 좋아한다는 게 노교수의 말이다. 대학에서 정년퇴직하면서 김 교수는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의 마음으로 사회에서 일하겠다”고 마음먹었고 강연과 저술을 통해 오늘날까지 ‘사회 교육’을 지속하고 있다. 근간 ‘백년을 살아보니’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을 뿐 아니라 올해, 내년, 그리고 한국 나이로 백 살이 되는 후년에도 각각 한 권씩 신간을 출간할 예정이다. “제자들이 70대 중반쯤 되니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기도 하더군요. 저는 그 나이 때가 삶에서 제일 좋은 성숙기였습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수상 소감을 묻자 김 교수는 “조용히 나의 길을 걸었을 뿐 별다른 업적이 없는데, 왜 나에게 상이 돌아왔는지…”라고 말했다. 이내 그는 “6·25전쟁, 4·19, 민주화… 내가 살아온 100년이 우리 민족에게도 참 어려운 시간이었는데, 그동안 사회에 여러 책임을 지고 사느라 고생 많았다고 인촌 선생이 위로해주시는 것 아닌가 싶다”며 눈시울을 살짝 붉혔다.● 공적 1947∼1954년 서울 중앙중고교에서 교사와 교감으로 재직했고, 이후 1985년까지 연세대 철학과 교수로 철학을 통해 한국 교육과 문화 발전에 헌신했다. ‘헤겔과 그의 철학’ ‘종교의 철학적 이해’ 등 저술 90여 권을 냈다. 타계한 안병욱 김태길 교수와 함께 ‘3대 철학자이자 수필가’로 불렸고 6·25전쟁으로 상처받은 국민과 젊은이들의 실존적 상처를 어루만지고 위로했다는 평가다. 중앙중고교 시절 설립자인 인촌 선생의 애민정신에 감명 받아 인촌의 교육 헌신을 현장에서 실천했다. 대학에서도 직책을 사양하고 후학 양성과 연구에 전념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앉아 있으면 학생이 되고, 서 있으면 선생님이 된다’는 신념으로 대학 강단을 떠난 뒤에도 사회의 강단에서 왕성한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대표’ 대관령음악제 산파… “내년엔 ‘인천뮤직’ 판 키울것”▼[언론·문화]강효 美 줄리아드음악원-예일대 음대 교수“최고 수준의 예술축제가 있는 나라는 매력과 힘이 있습니다. 시민들이 참여하고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강효 미국 줄리아드음악원 및 예일대 음대 교수(73)의 오랜 꿈은 2004년 강원도 평창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열매를 맺었다. 2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에서 만난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약 30년간 애스펀음악제에 교수로 참여하며 폐광촌 애스펀(미국 콜로라도주)이 세계적 음악도시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큰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가 예술총감독을 맡아 7년간 활동한 대관령국제음악제는 애스펀처럼 세계 수준의 음악가 공연을 소개하고 젊은 유망주들에게 레슨 기회를 주는 ‘국가대표 음악제’로 성장했다. 음악가의 꿈과 교육자로서의 소명이 마침내 앙상블을 이룬 것이다. 강 교수는 인촌상을 수상하게 된 소감에 대해 “문화와 인재 양성을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촌 선생의 이름을 딴 큰 상을 받게 돼 무척 영광”이라며 “음악 활동을 하면서 같이 일하고 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공을 돌렸다. 서울대 음대와 줄리아드음악대학원을 나온 강 교수는 1994년 한국을 비롯한 세계 정상급 젊은 연주자로 구성된 현악 실내악단인 세종솔로이스츠를 창단해 국내에 실내악 붐을 일으켰다. 세종솔로이스츠는 창단 이후 23년간 세계 120개 도시에서 500차례 이상 공연을 했다. 평창 겨울올림픽 초대 홍보대사로도 활동했다. 제자들의 성장 단계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강조하는 그는 음악 영재를 세계적 음악가로 키워내 ‘천재들의 스승’으로 불린다. 지금도 일주일에 사흘씩 뉴욕 줄리아드음악원과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의 예일대를 오가며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는 청년들을 위해 탄탄한 기초와 상상력을 키우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강 교수는 “마음가짐, 연주실력, 지식 등이 얼마나 준비됐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성장 시기가 다르다”며 “학생들을 가르치기 전에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보고 듣고 배우고 느낀 것만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상상력이 풍부해지면 하는 일이 재밌어집니다. 결과도 좋아지죠. 더 행복감을 느낄 수 있고요.” 강 교수는 올해 처음 열린 ‘인천 뮤직 힉 엣 눙크(hic et nunc·‘여기 그리고 지금’이라는 뜻의 라틴어)!’의 예술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음악계의 흐름을 소개하는 이 행사를 내년에 더 키워볼 계획”이라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공적40여 년간 바이올린 연주자, 교육자, 예술감독의 길을 걸었다. 길 샤함, 김지연, 장영주 등 음악영재를 세계적 음악가로 키워내 ‘바이올린계의 스승’으로 불린다. 1985년 동양인 최초로 세계적 음악 명문대인 줄리아드음악원 정교수가 됐고 2008년 예일대 음악대 정교수로 임용돼 1000여 명의 음악인을 길러냈다. 7년간 대관령국제음악제 예술총감독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대표 음악제로 키웠다. 1994년 현악 실내악단 세종솔로이스츠를 창단해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저변을 넓혔다. 미국 CNN은 세종솔로이스츠를 ‘세계 최고의 앙상블’ 중 하나로 평가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은 세종솔로이스츠 공연을 보고 감탄해 세 차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2003년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영미문학비평-사전학 큰 족적… “우리말에 깊은 관심 갖길”▼[인문·사회]이상섭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수상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받을 수 있는 상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아버지, 형제들과 우리말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1일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만난 이상섭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80)는 우리말 사전 편찬에 큰 획을 긋게 만든 동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교수의 아버지는 평양요한학교 교장, 연세대 신학과 교수를 지낸 이환신 목사(1902∼1984)로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정확히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수시로 우리말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덕분에 이 교수는 어려서부터 주변 사람의 말을 듣거나 가게 간판, 현수막, 글 등을 볼 때 유심히 살피는 게 버릇처럼 굳어졌다고 한다. 이 교수는 수상 소감으로 “인촌 선생은 먹고살기도 힘겨웠던 이 땅에 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수많은 씨앗을 뿌렸던 선각자였다”며 “말할 수 없이 기쁘면서도 이처럼 큰 상을 과연 내가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몇 번이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영미문학비평과 사전학, 언어학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활발한 비평 활동을 하며 문학비평용어를 우리말 의미를 잘 살려 엮은 ‘문학비평용어사전’을 편찬했다. 우리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실제 사례를 소개한 첫 사전인 ‘연세한국어사전’을 발간해 우리말 활용의 정확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학창 시절 영한사전 대신 영영사전을 보며 공부했어요. 옥스퍼드 사전과 달리 우리말 사전은 단어의 용례가 없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나중에 제대로 된 우리말 사전을 꼭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는 연세한국어사전을 만들기 위해 15년간 영국 학자, 출판인, 서점 관계자 등과 꾸준히 교류하며 조언을 구했다. 퇴직 후에는 10년간 매달린 끝에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을 완성했다. 기존 문어체 번역과 달리 네 글자씩 우리말 운율을 맞추는 4·4조를 창의적으로 자연스럽게 살려 옮긴 것. 출판계에서는 한국어판 셰익스피어 전집이 일본어판의 영향에서 벗어나 영어 문화의 정수를 맛보게 한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한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이나 낭송을 위해 작품을 썼어요. 내용 못지않게 리듬이 중요하죠. 문어체가 아니라 운율이 있는 글로 번역해야 원서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습니다.” 평생 연구와 글쓰기에 매진하며 학자로서 외길을 꼿꼿하게 걸어온 이 교수는 “우리말을 충실하게 잘 구사하다 보면 외국어를 익히는 데도 도움이 된다”며 “우리말에 대해 보다 깊은 관심을 갖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공적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에머리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지내며 자기만의 색깔이 또렷한 비평을 많이 남겼다. ‘언어와 상상’, ‘역사에 대한 불만과 문학’ 등 저서를 통해 언어 활용에 대해 고찰했다. 외국어 문학비평 용어를 우리말 특성에 맞게 정리한 결과를 엮어 ‘문학비평 용어사전’으로 편찬했다. 영문학자이면서도 우리말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우리말 사용의 실제 사례를 처음 넣은 ‘연세한국어사전’을 편찬했다. 국내 최초로 말뭉치 수집과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을 시작해 사전학과 언어학 발전에 기여했다. 정년퇴임 후 셰익스피어 전집을 우리말 운율에 맞춰 옮긴 것은 독창적이면서도 탁월한 성과로 평가받는다. 보관문화훈장, 대한민국문학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암세포 표적치료 획기적 성과… “항암제 부작용 크게 줄어들것”▼[과학·기술]김종승 고려대 화학과 교수“개인적으로 크나큰 영광이다. 연구팀 모두가 지난 10여 년간 한 분야만 연구한 결과를 인정해 주신 거라고 생각한다. 암과 싸우며 고통당하는 환자들에게 공헌할 방법을 찾기 위해 더욱더 노력하겠다.” 인촌상 과학·기술 부문 수상자인 김종승 고려대 화학과 교수(54)는 암 세포에만 약물을 정확히 전달하면서도 그 과정을 직접 모니터링할 수 있는 ‘약물 전달 복합체’ 연구로 세계 화학계에서 주목하는 연구자다. 그의 오랜 연구가 집약된 결과는 세계적 화학저널인 미국화학회지(JACS) 8월호에 표지논문으로 게재됐다. 암 세포를 치료할 물질을 담을 수 있는 약물 전달 복합체를 유기화학합성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김 교수는 “암 세포에만 항암제를 실어 나를 배를 만든 것으로, 모든 항암제에 적용 가능한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암에 걸린 사람에게 항암제 치료는 필수다. 그러나 정상 세포까지 공격하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지고 구역질이 나는 등의 부작용이 적지 않다. 부작용이 현격히 적은 표적치료제도 있지만 효과를 볼 수 있는 암 종류는 적다. 김 교수의 연구는 박사 과정 시절인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각종 가스나 병원균 등을 화학적으로 찾아내는 ‘화학센서’를 연구했다. 그러다가 10여 년 전 이런 탐색 기술을 의학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예 암 세포를 추적해 약물을 전달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했다. 암 진단과 치료를 동시에 할 수 있는 ‘테라그노시스(Theragnosis)’ 개념을 적용한 연구를 국내에서 처음 시작한 것이다. 테라그노시스는 ‘치료(Therapy)’와 ‘진단(Diagnosis)’의 합성어다. 암 세포를 추적하고 약물을 전달하는 표적치료 물질에 대한 연구는 2012년부터 조금씩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미국화학회지에 표지논문과 주목할 논문으로 관련 기술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2012년 당시에는 암 세포를 추적해 약물을 전달할 수 있는 물질의 가능성에 대해 발표했지만 5년이 지난 올해에는 그 약물 전달 물질을 유기화학합성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데도 성공한 것이다. 연구는 곧 실용화 단계에 들어갈 예정이다. 김 교수는 “5년 안에 임상시험을 종료하고, 10년 후에는 상용화까지 끝마쳐 병원에서 환자 치료에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공적공주대 화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충남대에서 화학석사 학위를, 미국 텍사스 테크대에서 화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건양대와 단국대 교수를 거쳐 2007년부터 고려대 교수로 재임 중이다. 2009년부터 정부의 연구개발사업단인 ‘발광센서 재료연구단’을 이끌고 있다.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저널에 논문 300여 편을 게재하고, 국내외 특허 40여 개를 출원하며 관련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이달의 과학기술자상’과 ‘지식창조 대상’을 2013년 3월과 11월에 잇달아 받았다. 2015년엔 김 교수의 연구 성과가 미래부 선정 ‘우수연구 100선’의 최우수 성과에 뽑혔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이자 대한화학회 부회장이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뉴욕=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전승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enhanced@donga.com ※ 제31회 인촌상 심사위원(가나다순)▽교육 △위원장 정진곤 전 민족사관고등학교장 △위원 나승일 서울대 교수, 신현석 고려대 교수, 조영달 서울대 교수▽언론·문화 △위원장 윤영철 연세대 교수 △위원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 우찬제 서강대 교수, 최맹호 전 동아일보 부사장▽인문·사회 △위원장 박찬욱 서울대 부총장 △위원 이재열 서울대 교수,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 주경철 서울대 교수▽과학·기술 △위원장 국양 서울대 교수 △위원 김기문 포스텍 교수, 유명희 KIST 책임연구원, 유진녕 LG화학 기술연구원 사장}

“‘와이(Why)?’ 책 주인공 이름이 뭐죠?” “엄지, 꼼지요!” 전북 완주군 구이면 대덕초등학교를 지난달 30일 방문한 이동도서관 ‘책 읽는 버스’에서 ‘와이?’ 책 시리즈의 그림 작가 이영호 씨(47)가 질문을 하자 학생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엄지는 책을 읽고 ‘엄지 척’ 하는 훌륭한 어린이가 되라는 의미에서, 꼼지는 큰 꿈을 펼치라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에요.” 어린이에게 인기가 뜨거운 와이 책을 14년간 그린 이 작가의 설명에 학생들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이들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진지한 표정으로 귀 기울이고 있었다. 이 수업은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이 문화체육관광부와 KB국민은행의 후원으로 마련했다. 이 작가가 책 만드는 순서를 설명한 후 그림 그리는 과정을 담은 영상을 보여주자 질문이 터져 나왔다. “책 한 권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나요?” “선생님 손목에 하신 건 뭐예요?” 이 작가의 설명이 이어졌다. 책을 만드는 데는 8개월이 걸린다. 편집부에서 주제를 정하면 이야기 작가가 글을 쓴다. 그림 작가가 그리는 작업에는 3, 4개월이 필요하다. 편집부가 말 풍선을 채우면 관련 분야를 전공한 교수가 감수한 후 인쇄에 들어간다. 이 작가는 “땀으로 손목이 끈적끈적해지면 선을 한 번에 매끄럽게 그리기 어려워 손목 보호대를 찬다”고 말했다. 이후 초록빛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캐릭터 그리기가 진행됐다. 이 작가가 화이트보드에 엄지, 꼼지, 삼촌을 슥슥 그렸다. 그런 다음 눈썹과 입 모양만 바꿨을 뿐인데 꼼지가 화난 표정이 되고, 엄지는 우는 모습으로 변신했다. 선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삼촌은 악당이 됐다. 펜이 움직일 때마다 “멋지다!” “대박이다!” 하는 감탄이 울려 퍼졌다. 수업이 끝나자 이 작가에게 좋아하는 캐릭터를 그려 달라며 아이들이 길게 줄을 섰다. ‘삼촌’이 그려진 스케치북을 받아 든 김반석 군(4학년)은 “한글을 익히자마자 제일 처음 본 책을 만든 선생님을 만나 신기하다”며 웃었다. 좋아하는 ‘케이’ 캐릭터 그림을 받은 송인우 군(4학년)은 “오늘이 빨리 오길 손꼽아 기다렸다”며 스케치북을 안고 신나게 달려갔다. 웹툰 작가를 꿈꾸는 서예준 양(6학년)은 상기된 표정이었다. 서 양은 “웹툰 작가 선생님을 만난 게 처음이라 기쁘고 뿌듯하다”며 만화 캐릭터를 한가득 그린 스케치북을 수줍게 보여줬다. ‘작은도서관…’은 2년 전 전교생이 70여 명인 이 학교의 도서관을 리모델링해 학생과 주민이 함께 이용하는 ‘학교마을도서관’으로 만들었다. 학생들은 등교 후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도서관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는다. 교사들은 독서와 관련된 여러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예림당 출판사는 이날 와이 책을 도서관에 기증했다. 박화선 교장은 “책과 관련된 다양한 경험을 할수록 독서에 대한 흥미가 커진다”며 “작가와의 만남은 책에 대한 호기심을 높여 학생들이 독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완주=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19세기 미국 남부. 흑인 노예 소녀 코라는 목숨을 걸고 농장을 탈출한다. 턱밑까지 바짝 추격해 오는 노예 사냥꾼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다행히 북부로 향하는 지하철도와 흑인 노예를 돕는 이들 덕분에 코라는 자유를 향해 조금씩 나아간다. 저자는 흑인 노예들의 탈출을 도왔던 비밀조직 이름인 ‘지하철도’를 실제 지하철도로 상상해 작품을 썼다. 당시 지하철도의 활동으로 10만 명이 넘는 노예가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저자는 어릴 적 이 이야기를 듣고 진짜 땅속에 있는 철도로 상상했다고 한다. 나중에 사실을 알고 살짝 화가 났지만. 그리고 실제 철도였으면 어땠을지 질문을 던지며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가슴 졸이는 추격전과 노예제도의 참혹한 실상을 세밀화 그리듯 펼쳐낸 글은 책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을씨년스러운 마을에서 코라가 마주한 노예들의 훼손된 주검은 지옥이 있다면 이런 풍경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여러 책과 영화를 통해 알고 있지만, 흑인 노예들이 하루하루 견뎌야 했던 잔인한 일상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럽다. 하지만 저자는 노예제도의 잔혹함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제도가 피부색에 관계없이 인간을 얼마나 황폐화하는지를 입체적으로 짚어낸다. 백인 농장주는 노예들을 벌레처럼 쉽게 죽이고 팔다리를 잘라내며 인간성을 잃어간다. 흑인 노예는 관리하는 이와 명령을 따르는 이들 사이에 격렬한 증오가 피어오른다. 손바닥만 한 텃밭을 뺏으려 노예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도 처연히 비춘다. 그럼에도 조금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한 명 한 명의 의지가 모여 어떤 힘을 만들어내는지를 일깨운다. 이 책은 2017년 퓰리처상, 2016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하며 미국에서 화제가 됐다. 탄탄한 작품성과 더불어 미국 내 흑백 갈등이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며 얼마나 심각한지를 또 한 번 확인시켜 주는 현상이다. ‘문라이트’의 배리 젱킨스 감독은 이 책을 드라마로 만들 예정이라고 밝혔다. 원제는 ‘The Underground Railroad’.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지난주 책을 받아 들고 가슴이 먹먹해 사흘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유명 화가인 김병종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64)는 ‘가수는 입을 다무네’(민음사·사진)를 손으로 가만가만 쓸어내리며 말했다. 간암 말기 선고를 받은 지 한 달 만인 올해 1월, 홀연히 세상을 떠난 아내 정미경 소설가(57)의 장편소설이다. 28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만난 그는 아내의 유작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책은 전설적인 밴드의 리더였지만 10여 년간 침체에 빠진 ‘율’을 대학생 이경이 촬영하는 과정을 정갈한 문장으로 풀어냈다.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선율을 붙잡으려는 예술가와 등록금, 생활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이의 몸부림이 다르지 않음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제목은 정 작가가 좋아했던 기형도 시인의 동명의 시에서 따 왔다. “정 작가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이 책의 제목에 집착하고, 소설 속 문장을 고치기를 거듭했어요. 가수가 입을 다문다는 건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는데, 돌이켜 보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 같아요.” 그는 아내를 평소 ‘정 작가’라고 불렀다. 서울대 동양화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한 잡지에 실린 아내(당시 이화여대 영문과 재학)의 소설을 읽고 편지를 보낸 것을 계기로 연인이 됐다. 대학가의 문학상을 휩쓸던 고인과 대학생 때 동아일보를 비롯해 신춘문예에 두 번이나 당선된 그가 주고받은 편지는 400여 통에 이른다. 아들 둘을 낳고 키우면서도 부부는 매일 아침 두 시간씩 문학, 그림, 건축,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예술적 동지였다. “정서적 교류가 하루아침에 끊어진 게 가장 힘들어요. 시간의 축적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요…. 3, 4년 정도 만났다 헤어진 것 같아요. 내 의식은 이화여대 앞을 서성였던 그 시절을 맴돌고 있어요.” 그는 아내에게 최초의 독자이자 마지막 비평가가 되겠다고 한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한 데 대해 죄의식을 느낀다고 했다. 요즘 아내의 작품을 다시 꼼꼼하게 읽고 손으로 문장을 한 줄 한 줄 써 보며 문학적 자취를 되짚고 있다. 고인이 19년간 머물렀던 반지하 원룸 작업실에 쌓여 있던 처절한 고뇌의 흔적인 습작 원고 더미도 정리 중이다. “정 작가에 대한 평전을 쓰고 있어요. 정 작가는 ‘나의 피투성이 연인’, ‘장밋빛 인생’,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등 치열하게 삶과 부딪쳐 깨지고 피 흘리면서도 삶에 대한 긍정의 물줄기를 담은 인물들처럼 살았어요.” 아내와 자신의 여행 에세이를 묶은 책도 준비하고 있다. 고인은 남녀 작가가 번갈아 가며 쓴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층위가 다른 온도의 글을 담은 여행 에세이를 함께 내자고 제안했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헤어질 때까지 찍은 사진에 글을 엮은 에세이도 출간하기로 했다. 이들 책 세 권은 고인의 1주기에 맞춰 선보일 예정이다. 유고 소설은 ‘목놓아 우네’를 포함해 두 권 더 출간된다. 1주기 행사는 글, 그림, 사진, 영상 등 장르를 가로지르는 형식으로 열 계획이다. 그는 고인의 글 더미를 정리할 때면 영혼으로 교감하는 것 같다고 했다. “누군가가 책을 읽는 한 정 작가의 문학적 삶은 계속되잖아요. 문학인은 떠나도 떠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얼굴이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빈방의 벽에 기대앉아 하염없이 울곤 하는 그가 조금씩 일어서고 있는 게 보이는 듯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김훈 정호승 은희경 박준 장강명…. 이들을 만날 수 있는 책 문화 축제인 ‘파주북소리2017’이 9월 15일부터 사흘 동안 경기 파주출판도시에서 열린다. 이 행사는 올해로 7회를 맞았다. 작품 낭독과 공연, 퍼포먼스가 결합된 ‘작가와 마주앉다―작가와의 만남’에는 정호승 이병률 박준 시인, 은희경 장강명 백영옥 소설가, 이기주 작가 등이 참여한다. 김훈 정이현 김연수 천명관 방현석 소설가와 함께하는 낭독 퍼포먼스도 열린다. 무라카미 하루키, 찰리 브라운이 주인공인 만화 ‘피너츠’를 쓴 찰스 슐츠의 작품 속에 나온 음악을 듣는 북 콘서트를 비롯해 단편소설을 연극과 뮤지컬 형식으로 읽는 공연이 열린다. 성우들이 소설을 들려주는 ‘라디오 소설극장’도 진행된다. ‘생각을 치다: 타자기와 작가’ 전시에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오스카 와일드, 헤르만 헤세 등 유명 작가들이 사랑한 타자기와 함께 타자기의 역사를 소개한다. 4가지 물건을 통해 독서 성향을 알아보고, 출판사들을 자유롭게 방문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자세한 내용은 파주북소리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 영화 ‘8마일’의 주인공 지미가 토해낸, 유명한 대사다. 유명 래퍼 에미넘이 지미로 출연해 자신의 실제 삶을 그린 작품이다. 저자는 ‘시궁창 현실’이 무엇인지 처연히, 그리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힐빌리는 미국 중서부와 북동부의 쇠락한 공업 지역인 러스트(Rust·녹) 벨트에 사는 백인 하층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디트로이트에서 알코올 의존증 환자인 어머니와 트레일러 집에 사는 지미, 오하이오에서 약물 중독자인 어머니에게 학대받으며 때로 생명의 위협마저 느꼈던 저자의 삶은 전형적인 힐빌리의 그것이다. 저자는 양육권을 포기한 친아버지 대신 초등학생 때부터 한 해가 멀다 하고 여러 남자를 아버지로 만났다. 밥, 칩, 스티브, 맷, 캔…. 이들 아저씨의 집으로 이사를 다니는 인생이 이어진 것. 약물에 찌든 간호사인 어머니가 간호협회에서 실시하는 약물 검사에 내야 한다며 아침부터 아들에게 소변을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건 수많은 상처 가운데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런 유년기를 보낸 저자는 예일대 로스쿨을 나와 현재 실리콘밸리에서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너무나 동떨어진 두 세계를 어떤 사다리를 타고 어떻게 이동했는지 궁금한가. 드라마틱한 그 과정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야기의 무게 중심은 성공담보다는 학습된 무기력에 젖어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힐빌리의 현실을 비추는 데 있다. 힐빌리에게서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는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술과 약물에 찌들고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걸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나마 누나와 이모가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 건 힐빌리가 아닌 다른 문화의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이란다. 러스트 벨트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역이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민주당 지지자였던 이들이 돌아선 이유를 알 수 있다. 노동의 가치를 믿던 이들은 일찍 일어나는 게 싫어 회사를 그만두고, 푸드 스탬프로 받은 음식을 팔아 술과 담배를 즐기는 ‘복지 여왕’들을 보며 환멸을 느꼈다. 그 결과 미국 정치 엘리트들과 현 체제를 불신하게 된 것. 저자가 삶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건 자녀는 방치했지만 손자만은 제대로 키우려 애썼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덕분이었다. 해병대 지원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됐다. 오하이오주립대를 졸업한 후 예일대 로스쿨에 간 그는 연일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지금 아내가 된 로스쿨 친구 우샤의 집에 갔을 때 가족들이 소리 지르지 않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그랬다. 로펌 입사 면접을 위한 연회장에서 ‘탄산수(Sparkling Water)’를 처음 보고 ‘반짝거리는 물’이 뭔지 몰라 한 모금 마시고 역겨워 내뿜는 모습에서는 올해 33세인 그가 얼마나 다른 세상에서 살았는지를 확인시켜 준다. 힐빌리의 삶은 미국의 빈곤층에 드리운 짙은 그늘을 영화처럼 세밀하게 조명한다. 그리고 그 그늘을 걷어내는 방법에 대한 현실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 한국 빈곤층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남자의 흥미로운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서 그가 걸어온 궤적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힐빌리에게 당부한다.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을 바꿔야 한다”고. 손자를 이렇게 키워낸 외할머니는 늘 외쳤다. “절대 자기 앞길만 막혀 있다고 생각하는 빌어먹을 낙오자처럼 살지 말거라.” 원제는 ‘Hillbilly Elegy’.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세월호 참사, 군대 내 가혹 행위, 전관예우, 대학 입시 비리…. 한국 사회의 부패와 비인간화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80)는 이 가운데서도 전관예우를 특히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개인적,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야 하는 판결이 퇴임한 선임 법관의 이익을 배려하느라 휘둘리는 건 공적 제도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최근 출간한 ‘법과 양심’(에피파니·사진)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인문학적으로 고찰했다. 이 책은 헌법재판소, 사법정책연구원, 사법연수원 등에서 강의한 내용을 엮었다. 양심은 법을 준수하게 하는 심리적 동기가 된다고 분석했다. 법이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관여할 수 없기에 양심은 법의 안과 주변은 물론이고 법을 넘어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윤리나 도덕에 의지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질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법에 의한 통치보다 덕(德)에 의한 통치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풍부한 역사적인 사례는 물론이고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공자를 비롯해 마이클 샌델 등 동서고금의 사상가와 학자의 이론을 종횡무진 펼쳐낸다. 김 교수는 좋은 사회란 여러 요소가 균형을 이룬 사회라며 법, 윤리, 양심, 도덕, 현실의 조화를 강조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소설가 22명이 참여한 손바닥 크기의 초단편 소설집 ‘이해 없이 당분간’(걷는사람)이 최근 출간됐다. 우리 사회를 다채롭게 조명한 작품들로 구성됐다. 작품별 분량은 원고지 30장가량. 집필 시기는 지난해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였다. 이 손바닥 소설을 쓰는 데 참여한 백민석(46) 조해진(41) 손보미 소설가(37)를 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초록 빛깔 표지의 책을 만지던 백 작가는 “한 시대의 기록 같은 책”이라며 입을 뗐다. 그는 작품 ‘눈과 귀’를 통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마님이란 존재를 비판한다. ‘빛의 온도’(조해진)는 촛불집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의 심리, ‘계시’(손보미)는 지진이라는 재난에 처한 사람의 심리를 묘사했다. 이들은 작품별로 제각각의 결을 지닌 게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집필 과정에서의 느낌도 달랐다. 조 작가는 “출판사에서 촛불, 광화문 등 여러 키워드를 제시했다. 교훈적이거나 작위적이지 않으면서도 문학적인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반면 손 작가는 “사회 문제를 직접 글에 녹이는 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하나의 이야기를 쓴다는 마음으로 부담 없이 작업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점점 책을 멀리하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소설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본질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게 소설의 역할이 아닐까요?”(조해진) “사람들이 세상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봐요.”(손보미) 소설가는 사회와 교감하며 이를 자기만의 언어로 풀어내는 존재이기에 자연스럽게 시대를 반영하게 된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람이 죽는 설정에 대해 고민하게 됐어요. 진정한 애도란 무엇일지 생각했고요. 여성 혐오 논란이 일면서 글에서 여성, 더 나아가 인간을 대상화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되묻고 있어요.”(조해진) “시대정신은 의식하지 않아도 글 속에 묻어나는 것 같아요. 존재의 얼룩처럼요.”(백민석) 글만 써서 생계를 꾸려 나가는 건 대다수 작가들에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들도 마찬가지다. 조 작가와 손 작가는 강의를 하고, 백 작가는 여행 에세이 등으로 장르를 확대하고 있다. 이들은 “글을 쓸 때가 가장 재미있다. 살아 있다는 걸 생생하게 느끼는 순간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10년간 절필했던 백 작가는 “처음에는 살 것 같고 진짜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글이 그리워졌다. 돌아오길 잘한 것 같다”며 웃었다. 글이 잘 안 풀릴 때는 독자로서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린단다. “내게 의미를 주는 문장을 발견하고, 어떤 곳에서 특정 작품을 떠올릴 때가 있어요. 누군가에게 그런 순간을 선사하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정말 벅찰 것 같아요.”(조해진) 백 작가와 손 작가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깊숙이 끄덕였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