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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미국 워싱턴은 술렁거린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탈북자 강제 북송 사건이 일어나면 워싱턴에서는 즉각 의회 청문회가 열리고 행정부는 대북 제재를 결정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북한 관련 청문회는 상원과 하원에서 번갈아 열린다. 청문회 열기는 언제나 후끈 달아오른다. 의원들은 전원 출석하고 방청객은 넘친다. 탈북자들이 출석해 북한 실상을 고발하고, 미국 유수 싱크탱크의 북한 관련 전문가들이 나와 해법을 제시한다. 미국 사회에서 북한 문제에 대한 관심은 의회와 행정부 등 정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북한, 특히 북한 인권 문제는 평범한 미국인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 살던 알링턴 근처 도서관에서 북한 강연회가 종종 열렸다. 한번은 강연회가 끝난 후 기획담당자를 만났더니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활짝 웃고 있었다. “올해 최고의 성공적인 행사예요. 북한 강연회는 언제나 인기 최고죠.” 기자가 참석했던 강연회는 북한 인권 책을 쓴 저자 4명을 1주일 간격으로 릴레이로 초청해 토론하는 행사였다. 북한을 무대로 한 소설 ‘고아원 원장의 아들(The Orphan Master’s Son)‘을 쓴 애덤 존슨 스탠퍼드대 교수, 탈북자 신동혁 씨 이야기를 다둔 ’14호 수용소 탈출(Escape from Camp 14)‘의 저자 블레인 하든 전 워싱턴포스트 기자 등이 강사로 나왔다. 네 차례 강연회 모두 주중 저녁 시간에 열렸는데 150여 명씩 참석해 강당이 꽉 들어찼다. 기획담당자는 도서관 예산이 없어 제대로 홍보도 못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릴 줄 몰랐다며 기뻐했다. 북한 인권 강연 시리즈 2탄을 열겠다는 야무진 포부도 드러냈다. 강연회에 모인 사람들은 워싱턴에서 열리는 북한 관련 세미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행정부 관료나 학자들이 아니었다. 기자가 살던 알링턴이 워싱턴 교외 중산층 도시인만큼 퇴근 후 시간을 내서 자녀 손을 잡고 온 ‘엄마 아빠 부대’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비록 북한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눈빛만큼은 진지했다. 북한 김정은 체제의 존속 여부에서부터 북한 주민들은 하루 몇 끼를 먹느냐 까지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강연회는 미국에서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이 정책 결정자뿐 아니라 사회 저변으로 폭넓게 퍼져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핵과 미사일 위협에 못지않게 기본적인 인권이 무시되는 억압의 땅으로서 북한의 실상을 들여다보고 비판하는 움직임이 미국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인권에 관심을 쏟는 미국인들을 보면서 한국과의 온도 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서 북한 문제가 터지면 집중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관심은 한번 쏟아졌다 그치는 ’소나기‘에 가깝다. 2004년 미국 북한인권법 통과에 큰 역할을 한 수잰 숄티 디펜스포럼재단 대표를 미국에서 자주 만났다. 그는 한국에서 북한 문제가 지속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답답함을 여러 번 토로했다. 정작 한국에서 북한 인권에 무관심하고, 심지어 냉대 분위기가 있는 것은 국가적 수치라는 것이었다. 2006년부터 미국에서 ‘북한 자유주간’ 행사를 개최해온 숄티 대표는 북한 인권 문제를 널리 알려야 할 곳은 한국이라는 생각에 2009년부터 아예 행사 장소를 한국으로 옮겼다. 강연회가 끝나고 존슨 교수와 하든 기자를 만났다. 자신들 저서의 한국어판 출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존슨 교수 책은 아직 한국어판 요청이 없고, 하든 기자는 겨우 한국어판 계약자를 찾았다고 했다. “ 한국어판 요청이 가장 먼저 들어올 줄 알았는데….” 두 저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존슨 교수도 나중에 겨우 한국어판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존슨과 하든, 두 미국인이 쓴 북한 책은 모두 한국에서 출간됐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두 명의 미국인이 평양의 한 식당 앞에서 티격태격 농담을 주고받고 있다. 한 명은 뉴욕의 묘기 농구단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소속 선수, 다른 한 명은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이다. 둘은 식당 입구에 놓인 뱀술을 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큰 술병에는 왕뱀 두 마리가 들어 있다. 다큐 감독이 “힘나게 하는 데 최고이니 한 잔 마시라”고 권하자 농구선수는 “무섭다” “징그럽다”를 연발하며 뒷걸음질을 친다. 둘 다 뱀술을 보고 신기해하는 표정이다. 4년 전 미 프로농구(NBA) 스타 데니스 로드먼과 할렘 글로브트로터스 농구팀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을 만나고 농구교실을 열었다. 로드먼 일행과 동행한 다큐멘터리 제작팀은 이들의 방북 활동과 북한의 생활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바이스(Vice·악)’라는 제목의 이 다큐는 로드먼 일행이 북한을 방문한 4개월 후 HBO 케이블 채널을 통해 미국에서 방송됐다. ‘바이스’는 원래 세계 곳곳의 위험 지역을 취재해 방송하는 미국 시리즈물이다. 10회에 걸쳐 방송된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회가 북한 편이었다. 당시 북한 편은 뉴욕에서 특별 시사회가 열렸다. 북한 편 이전의 9개 편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데 북한 편은 특별 시사회까지 열린 것을 보면 미국에서 북한이라는 주제가 화제의 대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동영상-바이스의 북한 다큐멘터리 ‘은둔의 나라’ 당시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던 필자는 밤 11시에 이 다큐를 챙겨봤다. 보기 전에는 다큐에 북한에 호의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생각했다. 당시 다큐 제작팀은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북한 당국의 정식 초청을 받아 방문했고 김정은까지 만나는 행운을 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프로그램 곳곳에는 북한에 대한 비판과 ‘북한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나라’라는 답답함이 여기저기 배어 있었다. 북한 측 인솔자는 제작팀이 도착하자마자 “우리 지시를 어기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경고를 하는가 하면 언제 카메라를 켜고 꺼야 할지 일일이 지시했다고 라이언 더피 감독은 밝혔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로드먼 일행이 북한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였다. 학생들은 모두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지만 마우스만 이러 저리 움직일 뿐 실제로 컴퓨터를 사용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자유롭게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경직된 표정으로 컴퓨터를 응시하고 있는 북한의 어린 학생들을 보니 왠지 오싹하기까지 했다고 더피 감독은 회고했다. 또 제작팀이 찾아간 수족관과 서양식 슈퍼마켓에서는 북한 주민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들이 본 북한의 모습은 외국인에게 보이기 위한 ‘설정된(staged)’ 모습이었다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로드먼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나오는 시간은 합쳐 봐야 5분도 되지 않는다. 로드먼은 다큐용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제작팀에 따르면 로드먼은 방북 이후 자신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자신이 나오는 분량을 줄여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농구 관람 후 김정은이 로드먼 일행을 위해 마련한 만찬에 카메라의 접근은 허용되지 않았다. 제작팀이 밝힌 뒷얘기에 따르면 로드먼이 프랭크 시내트라의 명곡 ‘마이웨이(My Way)’를 부르자 김정은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이어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등장한 북한 여성 록밴드는 미국 영화 ‘로키’의 주제가를 연주하며 흥을 돋웠다. 다큐는 “북한은 이율배반적 나라다. 길거리에는 ‘미국을 쳐부수자’는 구호가 가득한 나라에서 정작 최고 지도자는 미국 음악에 즐겁게 박수 치고 미국 스포츠에 열광한다. 이런 나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하는 내레이션으로 끝을 맺는다. ‘마이웨이를 들으며 김정은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밤에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후 기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 후회는 없다’는 가사의 ‘마이웨이’를 들으며 혹시 그는 핵무기 개발로 가는 길이 옳다는 자아도취에 빠지지는 않았을지….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미국 동부에는 봄에 폭설, 폭우, 강풍이 자주 발생한다. 흔히 ‘노리스터(Nor’easter)’로 불리는 이 괴물급 폭풍은 동부 해안 쪽에서 발달한 저기압이 강한 바람과 비 눈을 동반해 동부 지역에 많은 피해를 몰고 온다. 지난주에도 뉴욕, 워싱턴 등지를 강타해 정전, 교통 마비, 비행기 결항이 속출했다. 노리스터는 매년 봄만 되면 주기적으로 발생해 동부 지역 주민들은 3,4월에 폭설이나 폭우를 만나도 거의 놀라지 않는다. 워싱턴 특파원 시절에도 “4월에 눈이라니…”하고 툴툴거리며 수북이 쌓인 눈길을 차가운 칼바람을 맞으며 걸은 적이 여러 번 있다. 미국에서 봄에 발생하는 폭설은 별로 놀랄 만한 일이 아니지만 4년 전 3월 첫째 주 노리스터가 워싱턴을 강타했을 때는 흔치 않은 풍경이 벌어졌다. 폭설로 인한 교통마비를 뚫고 공화당의 거물급 상원의원들이 저녁 만찬 회동을 위해 워싱턴의 유서 깊은 호텔인 제퍼슨 호텔로 모여든 것이다. 존 매케인, 린지 그레이엄, 톰 코번 등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공화당 ’대표 선수‘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악천후 속에서도 결석한 의원은 없었다. 머리에 하얀 눈을 맞으면서 12명 전원 출석했다. 공화당 의원들을 초대한 사람은 다름 아닌 민주당 소속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당시는 연방정부 예산 자동감축(시퀘스터) 문제를 놓고 공화당과 민주당이 서로 잡아먹을 듯 치열하게 대립하던 때였다. 정국이 얼어붙었을 때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그는 이날 회동 전 참석 예정 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꼭 참석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이날 대화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호텔을 나서는 공화당 의원들은 웃는 얼굴 속에서 대통령과의 만남이 건설적이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왜 이런 자리가 더 빨리 마련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매케인 의원) “문제 해결을 위한 그랜드 바긴(대타협)이 가능할 것 같다”(그레이엄 의원) “그동안 우리도 대화하고 싶었다. 타협점을 찾아야 하니까”(코번 의원) 오바마 대통령은 상원의원들을 만나고 나서는 자신감이 생겼는지 그 다음 주에는 공화당 하원 행사에도 참석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비서실장을 통해 참석을 요청했고 공화당 소속 하원의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워싱턴에서는 화해의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처음부터 공화당과 사이가 좋은 대통령은 아니었다. 2009년 1기 집권 초기에 건강보험 개혁법안(오바마케어)을 야심차게 추진했을 때 공화당이 이를 극렬 반대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다. ’공화당과는 대화가 안 되니 어울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오바마의 기본적인 마인드였다. 공화당 의원들과는 만나지 않는 그는 ’외로운 늑대(lone wolf)‘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특히 2012년 재선 성공에 따른 자신감으로 오바마 대통령은 ’타협보다는 원칙을 지키겠다‘는 태도를 굳히면서 공화당과의 대치 국면은 더욱 악화됐다. 야당과 대화하지 않는 대통령, 냉랭한 정국을 풀려고 노력하지 않는 대통령. 시퀘스터 정국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해 초 50%를 넘었던 대통령 정책수행 지지율은 시퀘스터 대치 국면이 시작되자 40%대 초반으로 떨어졌다. 지지율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당황한 오바마 대통령은 대국민 설득 전략에 나섰다. 연설력이 뛰어난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며 ’단상 정치(Podium Politics)‘에 돌입했다. 체육관이나 대형 강당에서 지지자들을 모아놓고 단상에서 “정국 대치를 몰고 온 주범은 공화당”이라고 야당을 비판하는 일장 연설을 한 것이다. ‘야당 탓’을 주제로 전국 투어를 하는 대통령. 장외 여론전이 오히려 국민 불안만 가중시킨다는 비난이 높아졌다. 국민은 지지율 추가 하락으로 답했다. 오바마 지지율은 30%대까지 떨어졌다. 처참한 수준이었다. 국민은 시퀘스터 문제를 몰고 온 공화당보다 이 문제를 대화와 타협으로 풀지 못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미숙한 정국 운영에 더 화가 난 것이다. 이 같은 깨달음 속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마침내 공화당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불통‘을 타개하기 위해 타협의 정치력을 발휘한 그를 두고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호평이 줄을 이었다. 당시 회동에 참석했던 그레이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먼저 손을 내밀면 우리(야당)가 그 손을 잡는 것은 당연하다”며 “만약 정치권이 대화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 당시 한국에서도 ‘국회 탓’을 하는 대통령이 있었다. 야당에 먼저 손을 내미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먼저 타협의 악수를 청하는 것이 결국 이기는 것이라는 미국의 성숙한 정치 문화가 부러운 순간이었다.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I’m not a crook).’ 1973년 11월 17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플로리다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의 가장 유명한 발언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발언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바라기에 앞서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같은 명 발언과 어깨를 나란히 겨룰 정도로 미국인들의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다. 미국 언론은 매년 11월 17일이 되면 이 발언을 기념하는 특집 기사까지 실을 정도다. 그러나 케네디의 발언과 닉슨의 발언은 배경이 완전히 다르다. 케네디의 발언이 희망을 강조한 것이라면 닉슨은 절망 속에서 나온 말이다. 워터게이트 수사가 점점 자신을 조여 오자 자신의 비리를 은폐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이다. 닉슨은 이 말을 하면서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사기꾼이 아니라는 발언은 오히려 사기꾼이라는 이미지만 강화시켰다. 이 발언이 있기 한 달 전 닉슨은 워터게이트 특검을 해고하는 초강수를 뒀고 민심은 그의 곁을 떠났다. 민심이 이미 그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닉슨뿐이었다. 약 9개월 후 닉슨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탄핵당하는 대통령이 될 것인가, 최초의 하야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다 하야의 길을 택했다. 닉슨은 미국 역사상 가장 나쁜 대통령처럼 여겨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벌어진 1972년 재선 선거에서 닉슨은 60.7%라는 큰 지지를 받으며 37.5%를 얻은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을 가볍게 눌렀다 이렇게 잘 나가던 닉슨이 선거가 끝난 지 2년 만에 가장 추악한 대통령이 되어 쫓겨났다. 거짓말을 하며 정당한 사법적 절차를 방해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닉슨은 1974년 8월 8월 사임 연설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사임 연설은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대통령 업무에 매진할 수 없어 사임한다’는 극히 사무적인 내용이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미국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모든 시간을 직무에 쏟을 수 있는 대통령과 모든 시간을 직무에 쏟을 수 있는 의회를 필요로 하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여러 문제에 직면한 지금은 더욱 그렇다. 나의 개인적인 변론을 위해 몇 달씩 싸움을 계속하게 되면 대통령과 의회 모두의 시간과 관심이 거의 모두 빼앗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일 낮 12시를 기해 대통령직을 사임하려 한다.” 대통령이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미국 국민들은 마지막까지 배신감을 느꼈다. ▲ 동영상 : 닉슨 사임 연설 닉슨은 하야 결정을 내린 다음 날 백악관을 떠났다. 당시 미국 방송은 백악관을 떠나는 닉슨을 생중계했다. ‘마린 원’이라고 불리는 대통령 헬리콥터가 백악관에서 그와 가족을 태워 앤드류 공군기지로 데려갔다. 여기서 닉슨은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을 타고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닉슨으로서는 마지막으로 타는 에어포스 원이었다. 마린 원 기내로 들어가기 전 닉슨은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국민을 향해 활짝 웃으며 두 손을 크게 흔들었다. 과장된 몸짓 때문에 닉슨의 마지막 가는 길은 정말 ‘웃픈(웃기고도 슬픈)’ 모습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끝까지 거부하고 돌아선 닉슨 대통령.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 후 사저로 복귀한 한국 대통령도 그랬다. 그런 대통령의 뒷모습은 초라했고 동정조차 가지 않았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인용 결정이 나온다면 한국은 조기 대선 열풍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한국의 선거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마치 아이돌이 등장하는 화려한 쇼 같다. 백댄서 같은 지지자들의 요란한 사전 공연이 끝나면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몰고 다니는 후보가 등장해 화려한 말솜씨로 관중을 압도한다. 아이돌의 불안한 노래 실력이 그러하듯 화려한 수사로 포장된 공약은 뭔가 부실해보이고 터무니없기까지 하지만 별로 상관없다. 한국 선거에서는 인물이 중요하지 후보의 철학과 정책 비전은 그 다음이다. 미국 워싱턴 특파원을 하면서 한번의 대선과 2,3 차례의 지방선거를 경험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미국의 선거는 참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국가의 최고 리더를 뽑는 대통령 선거가 약간 흥행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한국의 스펙터클한 대선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 지역에서는 카지노가 최대 관심사예요.” 2012년 대선 때 인근 메릴랜드 주에 사는 친구에게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밋 롬니 공화당 후보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난데없이 카지노 얘기를 들고 나왔다. 그는 “대선 후보보다 주민투표의 최대 이슈인 카지노 개설 문제를 놓고 메릴랜드가 시끌시끌하다”고 했다. 당시 기자가 사는 곳에서도 TV 선거광고의 대부분은 이 카지노 이슈를 다루고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 미국 대선은 대통령은 물론 연방의회 상하원 의원도 함께 뽑는다. 이와 함께 주민투표도 진행된다. 주민투표는 각 지역의 핵심 이슈에 대해 주민들이 찬반 의견을 표시하는 것이다. 2012년 대선 때는 38개 주에서 176개 이슈에 대해 주민투표가 이뤄졌다. 주민투표는 ‘제안(Proposition) 1’ ‘질의(Question) 2’ 등의 이름으로 선거에 부쳐진다. 주민투표는 대선은 물론 중간선거, 지방선거 때도 함께 진행되고, 특정 선거 때가 아니더라도 단독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카지노 개설, 동성애자 화장실 혼용, 채권 발행 등 가벼운(?) 이슈에서부터 마리화나 합법화, 최저임금 인상, 사형제 폐지 등 언제나 논란을 몰고 다니는 이슈까지 모두 투표 대상이다. 당시 메릴랜드에서는 카지노 이슈가 ‘질의 7’로 통했다. 구체적으로 당시 메릴랜드에서는 5개가 있는 카지노를 1개 더 개설하느냐, 슬롯머신과 함께 룰렛, 블랙잭 등으로 도박 종류를 확대하느냐가 관건이었다. 메릴랜드에서는 카지노 문제를 놓고 수많은 공청회가 열렸다. 카지노가 핵심 이슈가 된 것은 교육문제와 연계되면서부터였다. 카지노로 인해 세수가 늘어나면 교육에 투자될 것이라는 찬성파와 카지노가 오히려 교육에 악영향만 미칠 것이라는 반대파가 팽팽히 맞서면서 당시 ‘질의 7’은 메릴랜드뿐 아니라 비슷한 카지노 문제를 안고 있는 인근 주들에서도 대선의 최대 관심사였다. 미국 대선 과정을 취재하면서 느낀 건 국민이 선거를 바라보는 관점이 한국과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 국민은 정책과 이슈 중심으로, 지역적 관점에서 투표권을 행사하는 경향이 높다. 대선과 함께 지역의 핵심 사안을 다루는 주민투표가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권자들은 이슈를 공부해서 투표장에 가고 어느 후보가 내가 사는 지역을 더 발전시킬지 고민해서 한 표를 던진다. 후보 개인의 인물 평가와 과거 행적 공방, 거대 비전에 치중하는 한국 대선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한국 대선이 인물 중심적, 중앙 집권적이라면 미국 대선은 이슈 중심적, 지방 분권적으로 진행된다. 또 한국 대선이 과거 지향적이라면 미국 대선은 현재 또는 미래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상호 비방과 음모론 등이 난무하는 흥미진진한 한국 선거판을 보다가 미국 대선을 보면 무미건조하고 극적인 요소가 별로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선거 중의 선거’로 통하는 미국 대선 현장을 살펴본 관전평은 우리보다 훨씬 내실 있고 기본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물론 정치 역사와 선거 문화가 다른 한국과 미국의 대선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미국의 선거 시스템은 과열선거, 금권선거 등의 오명을 벗기 힘든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미국에 두 번 살았다. 1990년대 유학 가서 공부할 때와 2010년대 전반 특파원으로 일할 때다. 우연히 모두 미국 민주당 정권 때다. 미국 같이 안정된 사회는 모든 것이 천천히 변한다. 길거리 모습도 사람들의 차림새도 언제나 비슷하다. 한국처럼 모든 게 휙휙 빨리 지나가는 사회에 살던 사람은 미국에 대해 ‘이렇게 정체된 사회가 어떻게 세계 최강 국가인가’하고 생각하기 쉽다. 아마 ‘미국의 기술은 변해도 원칙과 철학은 변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래도 1990년대 미국과 2010년대 미국은 크게 변한 게 있었다. 사회적 매너와 에티켓이 크게 줄었다는 거다. ‘생큐(Thank you·감사)’와 ‘쏘리(Sorry·미안)’의 나라라는 미국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친절보다 내가 편한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스타벅스에서 보면 10명 중 8명 정도는 그냥 ‘카페라테 달라’식의 명령식 주문을 한다. 문장 속에 부탁한다는 의미의 ‘플리즈(Please)’가 들어가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생큐’와 ‘플리즈’의 실종. ‘생큐’ 대신에 ‘갓 잇(알았다)’이라는 표현을 점점 더 많이 듣게 된다. “즐거운 쇼핑 하셨습니까.” 워싱턴 특파원 시절 집 앞 슈퍼마켓에서 계산대 점원으로부터 가끔 들었던 말이다. 이 때마다 놀라웠던 건 요즘 미국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이런 말을 듣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이(안녕)”하며 한마디 대화라도 나누면 그래도 나은 편. 손님과 점원은 거의 눈도 마주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점원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손님은 돈 낼 준비만 한다. 친절한 인사말을 건네는 점원을 만나면 오히려 손님이 더 당황하게 된다. 사회 예절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요즘 미국 사회를 이렇게 정의한다. 지난해 여론조사기관인 라스무센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6%는 “미국이 점점 더 무례하고 덜 친절한 나라가 돼가고 있다”고 답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미국이 격식을 차리지 않는 ‘캐주얼한 사회’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복잡해지는 사회에 대한 심리적 대응 메커니즘으로 사람들이 캐주얼한 옷을 입고 캐주얼하게 대화를 나누고 행동하는 추세가 강해지면서 예절을 생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생각으론 미국에서 매너가 사라지는 것은 험악하고 무례해지는 정치문화와 더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레그 스미스 조지아대 심리학 교수는 2000년대 들어 미국 정치권에서 갈등과 대립의 문화가 본격 형성되면서 예절을 경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9·11테러와 이에 따른 미국의 극심한 이념적 대립이 매너 실종 현상을 심화시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정치권에서 쏟아지는 갈등의 언어를 듣다 보면 ‘과연 어느 수준까지 낮아질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한번 논란이 생기면 찬성파와 반대파가 격렬하게 맞붙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을 벌이며 갈등을 확대 재생산한다. 사생결단식 대결에 질려 아예 정치를 포기하고 떠나는 정치인도 많다. 특히 선거 때가 되면 갈등의 수위는 한층 높아진다. 지도급 인사들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이를 지켜본 국민은 지금까지 당연하게 지켜왔던 사회적 예절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 된다. 국민은 처음에는 놀라지만 ‘저런 무례함도 통한다’는 학습 효과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예절 수준을 하향 조정해 나갈 것이다. 사회적 예절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나라의 국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이기도 하다. 막말과 갈등 조장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 미국의 예의범절 수준이 내려갈 것은 뻔하다. 한국은 조기 대선이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 준비 기간이 짧은 만큼 선거전은 과열되고 여러 부작용을 낳을 것이다. 앞으로 양국 정치권에서 펼쳐질 무례한 말과 행동의 향연이 국민 예절 수준 하락에 얼마나 기여할지 비교하며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왠지 서글픈 작업이 될 것 같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미국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19개의 박물관, 미술관, 동물원 등을 포함하고 있는 종합 역사 보존체다. 흔히 말하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은 대박물관 격인 자연사 박물관이다. 19개의 박물관 중에 아시아 문화를 전문으로 전시하는 곳이 있다. 프리어 새클러 미술관이다. 미국 기업자이자 자선가인 찰스 랭 프리어와 아더 새클러의 기부로 지어진 미술관으로 한국, 인도, 터키 등 다양한 아시아 국가의 문화 유품이 전시돼 있다. 필자가 워싱턴 특파원 시절 한국관에서 고려시대 문화재 특별전을 열린다고 해서 가 본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직접 본 적이 없는 고려청자를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관을 둘러보고 나가려는데 바로 옆쪽에 중국관이 눈에 띄었다. 들어가 보니 한국관의 3,4배 되는 면적에 한국관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다양한 문화재가 전시돼 있었다. 한국관은 주로 도자기 위주로 전시돼 지루한 감이 들었던 반면 중국관은 도자기는 물론 전쟁 도구, 왕실 물품 등이 전시돼 볼거리가 많았다. 중국관 옆쪽에 있는 일본관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중국관보다 더 큰 면적은 말할 것도 없이 조몬(繩文)부터 시작해 나라(奈良), 헤이안(平安), 에도(江戶), 메이지(明治)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역사 시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관람객도 가장 많았다. 프리어와 새클러가 애초에 이 미술관을 지은 것도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던 일본 문화재를 많은 미국인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물론 한국관이 만들어진 역사가 가장 짧으니 문화재가 풍부하지 못한 것은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한국관은 중국관과 일본관에 비해 너무 초라한 모습이어서 미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역사도 초라하게 보일 것 같아 씁쓸했다. 지난해 프리어 새클러 미술관에 걸려있는 동북 아시아 지도에 동해는 없고 일본해로 단독 표기돼 있다는 뉴스를 보고 ‘일본색이 강한 이 미술관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워싱턴 한복판의 미국 박물관에까지 속속 파고든 일본 문화 외교의 현장이었다.서울보다 따뜻한 워싱턴은 지금쯤 벚꽃이 서서히 꽃망울을 터뜨릴 때다. 워싱턴은 사실 삭막한 도시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연방 공공건물들이 촘촘히 들어선 회색의 도시다. 그런 워싱턴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봄이다. 워싱턴이 회색에서 연분홍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벚꽃 덕분이다. 다음달에는 성대한 벚꽃 축제가 열린다. 워싱턴에서는 특정 주제의 축제가 열리는 일이 거의 없는데 벚꽃 축제는 예외다. 벚꽃은 워싱턴의 명물이기 때문이다. 워싱턴은 매년 관광 수입의 35%를 벚꽃 축제 기간에 거둬들일 정도로 전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든다. TV에서는 미일관계 역사를 재조명하는 특별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벚꽃 퍼레이드, 연날리기 대회, 사케 시음식, 사쿠라 마쓰리 축제 등 일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행사가 줄을 잇는다. 잘 알려졌다시피 워싱턴의 벚꽃은 1912년 3월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 당시 도쿄 시장이 선물한 벚나무 묘목 3000여 그루가 시초였다. 당시 벚꽃을 미국에 들여올 때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해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의 부인 헬렌 여사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벚꽃 축제는 날로 규모가 커진다. 매년 일본 기업의 후원이 늘기 때문이다. 벚꽃 축제는 워싱턴 시당국이 주최하지만 행사 비용의 대부분은 일본 기업이 부담한다. 일본 외무성의 요청에 따라 축제를 지원하는 일본 기업의 기부가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벚꽃 축제를 축하하기 위해 고위급 일본 정치인의 워싱턴 방문도 줄을 잇는다. 일본 정치인들은 축제만 참석하지 않는다. 미국 정가를 방문하고 미국 싱크탱크에서 일본 세미나를 연다. 매년 봄만 되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카네기국제평화재단 등 워싱턴의 유명 싱크탱크에서 일본 외교안보 전략을 토론하는 행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린다. 벚꽃 축제 기간 중 워싱턴의 한 호텔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여성 인재 활용 정책인 우머노믹스를 토론하는 세미나가 열려 가본 적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정하는 아베 정부가 미국에 원정단까지 보내 자국의 여성 정책을 홍보하는 세미나를 연 것은 아이러니였다. 학술 교류 주제가 외교안보에 그치지 않고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여성 환경 인권 등의 이슈로 확대되고 있는 것은 일본의 문화 외교가 얼마나 치밀하게 진행되는지 보여준다. 일본은 2013년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딸인 캐럴라인 케네디가 주일 미국대사로 부임했을 때 떠들썩했다. 일본은 캐럴라인이 일본에 부임도 하기 전에 워싱턴 주미 일본 대사관에서 축하연을 성대하게 열어줬다. 이 자리에는 캐럴라인은 물론 당시 존 케리 국무장관까지 참석했다. 일본 시를 낭독하고 다다미방에서 함께 차를 마시는 등 철저히 일본 전통 문화 위주로 진행된 행사에서 케리 국무장관은 “일본 문화 멋있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교과서 동해 병기, 소녀상 건립 등 한일 역사 대결이 미국에서 펼쳐진지 오래다. 재미 한인사회는 역사 왜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지만 언제나 힘든 싸움이다. 평소 다져놓은 일본의 소프트 외교 덕분에 많은 미국인들의 머릿속에 언제나 일본은 한국보다 가까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한류 열풍 덕분에 열심히 따라잡고 있지만 아직 한국의 대미 소프트 외교 수준은 일본에 비해 수십 년 떨어져 있다. 그래서 워싱턴 포토맥 강변을 따라 흐드러지게 벚꽃을 보며 눈이 호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미국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 ‘롤 모델(모범 사례)’이 많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말할 것도 없고 하원의장 출신인 낸시 펠로시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패커드 최고경영자(CEO), 인드라 누이 펩시 CEO 등이 있다. 펠로시는 다섯 명의 자녀를 낳고 40대 중반에 정계에 데뷔해 의회 최고의 여성 지위에 올랐고, 피오리나는 유방암을 이겨내고 지난해 공화당 대선 경선에 뛰어든 집념의 여성이다. 누이는 인도 출신이라는 인종적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펩시를 이끌고 있다. 이렇게 많은 여성 롤모델을 배출했으니 미국의 성 평등 수준은 꽤 높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13년 세계경제포럼(WEF) 조사를 보면 미국의 성 평등 지수는 23위다. 대부분의 북·서유럽 국가뿐 아니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보다 낮다. 같은 해 세계경제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15~64세 미국 여성 중 직장을 가지고 있는 비율은 62.2%로 34개 회원국 중 중간 수준인 16위이다. 미국이 자국의 경제 규모에 비해 여성의 고용 평등 수준이 뒤처질 뿐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74.5%로 남성(67.4%)보다 높다. 500대 기업 신입사원 여성 비율이 41%에 이를 정도로 여풍(女風)이 센 것 같은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걸까. 몇 년 전 미국발(發) ‘알파걸’ 열풍이 세상을 뒤덮지 않았던가. 가장 큰 장애물은 ‘유리천장’이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미국 직장 여성들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매우 좁다. 미국 법대 졸업생 중 여성은 절반에 가까운 47%에 달하지만 법률회사 파트너까지 오르는 여성은 20%에 불과하다. 연방법원 여성 판사 비율은 23%에 그치고 있다. 의대를 졸업하는 여성도 48%에 달하지만 의대 학장이나 교수에 임명되는 비율은 13%에 불과하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경영대학원(MBA) 졸업생의 37%는 여학생이지만 500대 기업 중 여성CEO는 4%에 불과하다. 기업 3곳 중 1곳은 고위급 경영진에 여성이 한 명도 포함돼 있지 않다. 2014년 매킨지 컨설팅 조사에 따르면 기업 이사회 중 여성의 비율은 미국이 15%로 노르웨이(35%)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100대 기업 여성 CEO 비율도 유럽이 7%인 데 비해 미국은 2%에 불과하다. 정부 기관과 기업 이사회의 30¤40%를 여성 임원으로 채우는 쿼터제도 유럽에서는 이미 116개국에서 채택할 정도로 일반화됐지만 미국은 해당되지 않는다. 미국 기업인 여성을 위한 비영리단체 캐털리스트가 2012년 포천지 선정 5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사회에 진출했다 해도 이사회 회장을 맡은 경우는 3.3%에 불과했다. 유리천장은 유색인종 여성들에게 특히 높게 나타나는데 포천지 선정 500개 기업 중 3분의 2 이상 기업이 지난 5년간 이사회에 단 한 명의 유색인종 여성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미국 여성은 ‘피곤’하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적 메커니즘이유럽에 비해 크게 뒤지기 때문이다. 미국은 나라에서 지원하는 유급 출산휴가가 없다. 다른 복지 선진국들이 출산휴가 때 평균적으로 임금의 38%를 지원해 주는 것과 대조된다. 무급 출산휴가조차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법으로 정한 기간이 12주(3개월)에 불과해 북유럽과 같은 복지 선진국들의 평균인 57.3주에 훨씬 못 미친다. 그나마 이것도 종업원 50명 이상 기업에만 해당한다. 이 정책이 도입된 것도 1994년에야 제정된 가족의료휴가법에 의해서다. 유럽에서는 1~5세 어린이의 90%가 정부 보조를 받는 보육시설 혜택을 보지만 미국 내 정부 지원 육아시설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머지는 비싼 사립 보육시설에 맡기거나 개인적으로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또 기혼 여성들이 큰 혜택을 볼 수 있는 재택근무제를 채택하는 기업이나 기관도 20~30%에 불과하다. 그나마 2000년대 말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재택근무제는 더욱 위축됐다. 2014년 워싱턴포스트(1월 14일자)가 지적했듯이 미국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출산휴가와 같은 복지정책이 잘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성공을 막는 주요 이유다. 미국 기업들이 이처럼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여성을 위한 지원에 인색한 것은 수익 지향적 조직 문화와 관련이 있다. 성과주의 문화가 지배적인 미국 기업은 여성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을 투자가 아닌 비용으로 보기 때문이다. 힐러리가 국무장관 재직 때 국무부 정책국장이라는 ‘넘버3’ 요직에 앤마리 슬로터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는 장래 국무장관 감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사춘기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2011년 국무부 최초 여성 정책국장 자리를 그만두고 프린스턴대 교수로 돌아갔다. 주변에서, 특히 젊은 여성들로부터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성공한 여성 롤모델이 가정 때문에 일을 포기한다면 미국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겠느냐’는 질타였다. 그 후 슬로터 교수는 한 잡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가정과 직장에서 동시에 유능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는 여성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고 하소연했다. 그의 얘기다. “실적을 내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는 직원을 좋아하는 미국 직장이 학부모 모임에 참석한다며 오후 3시에 퇴근하겠다는 여성 직원을 어떻게 바라보겠는가. 가정을 택하는 여성을 실패자로 보는 주변 시선 때문에 우울증에 빠지기까지 했다.” 그러다보니 미국에서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도달하려면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게 아니라 여성 스스로 갖고 있는 자신감 부족, 성공 의지 결여를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다. 여성 개인의 노력과 의지로 성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이 같은 메시지를 설파하는 대표적인 인사로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 셰릴 샌드버그가 있다. 한국에도 번역된 그의 저서 ‘린 인’을 보면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야망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외부 요인을 탓하기에 앞서 여성 내부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과 성공을 위해서는 직장의 이해, 국가적 지원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2차적 과제이고 여성이 각성해서 뛰어드는 것(Lean In)이 가장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그러나 그의 책에는 성공 의지와 노력 모두 갖춘 여성이 보육과 가정 문제로 좌절할 경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은 없다. 개인적으로 미국 유학과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이 나라는 민주주의 제도, 사회적 풍요, 민도(民度) 등에서 어느 것 하나 뒤지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유독 여성 문제, 특히 일과 가정의 양립을 도와주는 제도 마련이나 사회적 인식은 뒤쳐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잘 하면 내 덕, 못해도 내 탓’이라는 미국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여성 자신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쪽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8년 동안 여성정책, 보육정책에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 분야에 관심도 없고 정책 의지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정책은 매우 늦은 속도로 변한다. 우리나라는 많은 분야에서 미국 정책을 롤모델로 삼아 발전했지만 여성정책, 보육정책은 미국의 영향권 내에 있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백악관이 있는 미국 워싱턴 펜실베이니아 대로(大路)는 미국의 정치 일번지이자 관광객의 거리다. 언제나 인파로 북적거리는 공간이다. 대로 앞쪽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샛길이 있다. 이 곳을 따라 걷다보면 더 많은 관광객을 볼 수 있다. 흔히 말하는 '투어리스트 스팟(여행객들이 많이 몰리는 장소)'이다. 사진을 찍으면 백악관 전경이 근사하게 나온다. 세계의 심장부 백악관. 워싱턴 특파원 시절 3,4번 백악관에 들어가 봤다. 생각만큼 들어가기 힘든 곳은 아니었다. 미국 연방정부 건물 대부분이 그렇듯 사전에 신상 정보 제출 후 승인을 받으면 백악관 검문검색을 통과하면 된다. 다만 검문검색이 더 까다롭다. 백악관에 들어간 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규모가 작다는 것이다. 백악관의 총면적은 7만3000m²(약 2만2000평)으로 청와대(25만3504m²)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다. TV 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브리핑룸은 덩치 큰 미국 기자들이 서로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다닥다닥 의자가 배열돼 있다. 백악관 담당 기자들이 모여 일하는 기자실은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웨스트윙 지하에 있는데 보일러실 분위기다. 미로처럼 연결된 데다 퀴퀴한 냄새까지 나서 '이곳에 미국 최고의 기자들이 모이는 곳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지난 달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 기자실을 없애고 브리핑도 안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불편한 환경 속에서 일하던 백악관 기자들이 화가 날 만도 하다. 백악관 전체 규모가 작으니 '오벌 오피스'로 불리는 대통령 집무실도 작다. 세계를 움직이는 결정들이 이뤄지는 미국 대통령 집무실이지만 면적은 76m²(약 23평)에 불과하다. 백악관 집무실 중앙에는 소파가 두개가 양쪽으로 배치돼 있는데 회의 때마다 소파 쟁탈전이 벌어지기로 유명하다. 소파에 앉을 수 있는 적정 인원수보다 회의 참석자가 않으니 회의 때마다 소파 쟁탈전이 벌어진다. 자리를 잡지 못한 참석자는 소파 손잡이에 걸터앉는다. 격식은 찾아볼 수 없다. 소파에서 서로 코앞에 마주보고 앉아 정책 논의를 하다 보면 회의 집중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백악관 집무실이 개방형이자 소통형으로 불리는 이유다. 우리는 청와대 국무회의 때마다 각료들이 큰 책상에 일렬로 앉아 고개를 숙이고 대통령 말씀을 열심히 받아쓰기를 하고 있는 모습에 익숙하다. 대통령은 잘 받아쓰고 있는지 각료들에게 확인도 한다고 한다. 활발한 토론이 아닌 톱다운 방식의 일방적 의견 전달 체제에서 어떻게 각료들이 용감하게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겠는가. 백악관 집무실이 소통형 구조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출입문 숫자로도 알 수 있다. 집무실은 외부로 통하는 문이 네 개나 된다. 동서남북 방향으로 비서실, 서재, 복도, 로즈가든으로 나가는 문들이다. 복도로 나가면 양쪽으로 부통령실 선임고문실 비서실장실 국토안보보좌관실 대변인실 등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집무실과 가장 가까운 선임고문실의 경우 대통령이 서재를 사이에 두고 소리쳐 부르면 대답할 수 있는 거리다. 대통령은 복도로 자주 나와 부통령실에 들르고 비서실장실 책상에 걸터앉아 정책을 토론한다. 기자회견이나 백악관 행사가 자주 열리는 정원인 로즈가든도 문 하나만 열면 바로 연결된다. 집무실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외국 정상들은 미국 대통령이 "자, 이제 기자회견을 하러 가시죠" 하면 놀라곤 한다.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집무실에서 로즈가든으로 향하는 문을 나서면 바로 야외에 기자회견장이 마련돼 있다. 로즈가든은 수상자와 가족을 함께 초청해 훈장 수여식을 여는 국민소통의 공간이기도 하다. 1999~2006년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백악관을 무대로 한 TV드라마 '웨스트윙'에서 대통령이 말단 직원들의 방에 들르거나 복도에서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과연 이 같은 일이 정말 백악관에서 일어날까.' 우리 한국인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미국인들의 궁금증이기도 했다. 이 드라마를 쓴 유명 작가 애런 소킨은 작품 취재를 위해 직접 백악관에 가서 이런 장면들을 보고 그대로 쓴 것이라고 한다. 드라마에서 그려진 격식 없는 대통령의 모습은 당시 별로 인기가 높지 못했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을 올리는 데 한몫하기도 했다. 미국은 대통령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의 리더의 사무실은 문이 열려 있는 경우가 많다. 리더가 '의견을 경청하겠다'는 메시지를 부하들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는 문을 꽉 닫고 일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그러면 집중은 잘 되겠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기는 힘들다. 백악관의 개방형 소통 구조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질서 없어 보이고 생산성이 낮아 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곳에서 민주적인 의견 개진이 가능하고 수평적 토론도 가능하다.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 구조 속에서는 소통도, 의견 경청도 힘들다. 어쩌면 비선이 등장하는 게 당연할 수밖에 없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미국 워싱턴 특파원 시절 “가장 많이 쓴 기사가 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한미관계도 아니고 미국 대통령에 관한 것도 아니다. 다름 아닌 ‘총기 사건’에 관한 것이다. 콜로라도, 코네티컷, 워싱턴 등 미국 곳곳에서 끊임없이 터지는 총기난사 사건에 관한 기사를 쓰느라 많은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냈다. 총기 기사는 쓰기도 쉽지 않다. 미국에서 유통되는 총기가 워낙 다양한지라 총기 관련 책을 뒤져봐도 아리송한 경우가 많아서다.미국에서 총을 가진 사람은 많다. 시골에서는 사냥용, 도시는 호신용, 갱들은 살상용으로 장식장, 서랍 속이나 베개 밑에 총을 두고 산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총기를 가진 미국인이 48% 정도로 2명 중 1명은 총을 가진 셈이다. 2015년 통계 자료를 보면 하루 29명이 다른 사람이 쏜 총에 사망했다. 총기로 자살하는 사람은 하루 55명을 넘는다. 하루 평균 80~90명이 총 때문에 목숨을 잃는 셈이다. 미국의 유명 하드보일드 작가 짐 톰슨이 말했듯 미국은 총에 미친 ‘건 크레이지(Gun Crazy)’ 문화 속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사람들이 미칠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총이고, 다른 하나는 차(車)라는 농담도 있다. 자동차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경우가 적지만 총은 타인 살상의 경우가 많아지고 있으니 규제는 당연하다는 의견이 최근 미국 사회에서 주류를 형성한다.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하면 미국 사회의 움직임은 대체로 비슷하게 흐른다. 대통령은 사건 현장을 방문해 무고한 희생자를 추도한다. 정치권에서는 총기 규제 법안이 신속하게 만들어진다. 언론도 미국의 총기 문화에 대한 다양한 기사를 쏟아낸다. 그러나 총기 규제 법안이 통과되는 경우는 없다. 사실 법안 자체도 큰 임팩트가 없는 누더기 법안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규제 대상이 되는 총기의 종류를 줄이고, 총기 구매를 위한 대기 시간을 단축시키려는 보수파 의원들의 의견이 대부분 관철된다. 의원들은 총기 규제 문제에 손을 담그기를 꺼린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은 강력한 총기 규제론자였지만 대선 기간 동안에는 총기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을 꺼렸을 정도다. 개인의 재산과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 소지는 정당화돼야 한다는 미국의 보수적 민심과 전미총기협회(NRA)의 막강한 로비 파워를 꺾고 총기 규제를 관철시킬 정치인은 미국에 별로 없는 듯 하다. 미국 공화당 행사를 취재할 당시 다른 로비 단체들은 조그만 부스 하나를 차려놓고 있는데 NRA는 1개 층 전체에 부스를 차리고 장난감 총을 나눠주며 홍보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NRA의 파워를 절감했다. 미국 사회에서 총기 규제가 왜 그리 어려운지는 미국의 헌법 정신과 독립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총기 옹호론자들이 과거 서부 개척시대 때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총기 소지권을 높은 범죄율과 총으로 인한 살상이 다반사인 현대 사회에서 그대로 유지하려고 고집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은 총기 규제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가 최대 관심을 기울인 2개 정책은 불법 이민자의 무분별한 추방 방지와 총기 규제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강력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여 성사시켰던 불법 이민 추방 유예 행정명령은 트럼프 시대가 열리자마자 폐지됐다. 트럼프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총기 소지 권리를 수차례 얘기했으니 총기 규제 완화 법안이 미 의회에 상정될 날도 멀지 않았다.필자가 정치 행사 취재를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의 흑인 밀집 지역 호텔에 묵었을 때였다. 밖에서 총 소리가 나서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다. 총 소리의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멀리서 나는 총 소리였지만 빨리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앞으로 미국에서 총기 규제가 느슨해지면 이곳 저곳에서 총소리가 들릴 날이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무고한 시민들이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매뉴얼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땅값이 많이 오른 곳은 어디일까요? 서울 '부자 동네'인 서울 강남 3구? 아닙니다. 지난해 제주도가 전년도에 비해 8.3% 포인트 올라 가장 많이 올랐다고 국토교통부가 25일 밝혔는데요. 그 뒤를 세종 4.78%, 부산 4.17%이 이었습니다. 서울은 2.97%, 경기는 2.23% 올랐네요. '최순실 게이트' 파문이 일었던 지역 중 하나인 강원 지역은 2.92%가 상승했습니다. 전국 평균 지난해에 비해 2.70% 포인트가 올랐고 수도권은 2.53%, 지방은 2.99% 각각 올랐습니다. 대부분 지역의 땅값이 오르긴 했지만 원래 땅값이 비싼 수도권 쪽이 실제로는 더 많이 오른 것으로 분석됩니다.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

2010년대 초반 미국 워싱턴 특파원 시절 일본과 중국 기자들을 여럿 만났다. 이들을 통해 양국의 외교적 특징을 비교할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국무부 취재 때 옆자리에 미국 여기자를 만났다. "어느 매체에서 왔느냐"고 물으니 "일본 교토통신 기자"라고 했다. 의아해 하는 필자에게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후에도 일본 매체에서 일하는 미국 기자들을 많이 만났다. 일본 매체는 미국에서 자란 일본인이나 일본어에 능통한 미국인을 많이 고용한다. 언어적 장벽을 줄이기 위해서다. 미국 정부를 상대로 취재할 때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면 무시당하거나 다른 기자들로부터 눈총을 받기 쉽다는 것을 일본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상황에서나 얄미울 정도로 유연하게 대처해 나가는 일본인의 습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일본 기자들도 국가적인 빅 이슈 앞에서는 눈총을 받는 것을 불사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독도 문제가 불거졌을 때가 그랬다. 일본 기자들은 국무부 브리핑룸에 단체로 등장해 미국 관리로부터 일본에 유리한 대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 질문 공세를 펼쳤다. 비슷한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면서 브리핑룸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그럼에도 일본 기자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미국 측은 "한일 양국이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 바란다"는 중립적 태도였지만 일본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계속되자 나중에는 짜증을 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은 미국을 '최고 파트너'로 인식하며 적극 대응한다.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은 미국 관리들을 초청해 자주 행사를 연다. 심각한 외교적 모임이나 세미나가 아니다. 시 낭송회, 다도(茶道) 축제 등 일본의 전통을 보여주는 행사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가장 먼저 미국에 달려가 회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꾸준히 일본을 알리기 위한 외교 노력을 펼쳤기 때문이다. 일본이 적극 대응파라면 중국은 전략적 무(無)대응파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워싱턴 국무부 건물 7층에는 언론 브리핑룸이 있다. 기자들이 미국 외교에 대해 듣고 질문을 하는 자리다. 매일 정오경 열리는 브리핑은 지역별 순서대로 진행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 곳곳의 이슈에 대한 중구남방식의 질문이 이어져 브리핑이 산만해지기 때문이다. 대략적으로 미국의 최대 관심 지역인 중동 및 이스라엘이 가장 앞서 다뤄지고 러시아, 유럽, 아시아가 뒤를 잇는다. 여기서 예외 대접을 받는 곳이 바로 중국이다. 순서대로라면 중국은 브리핑 후반부에서 다뤄져야 하지만 주요2개국(G2) 위상을 반영하듯 중국 관련 이슈는 브리핑 처음이나 초반에 다뤄진다. 미중 간 정상회담과 무역갈등, 사이버분쟁, 영유권 문제 등 중국과 관련된 미국의 외교 문제는 많고도 많다. 그런데 중국 기자들은 브리핑에 오지 않는다. 미국에 파견된 중국 기자가 1000여명을 넘고 중국 관련 이슈들이 넘쳐나지만 중국 기자는 브리핑룸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대개 특정 국가에 관련된 문제는 그 나라 출신 기자들이 많이 질문을 하는데 중국 문제는 다른 나라 기자들이 질문을 한다. 국무부 공보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도 있었다. 중국 기자들에게 전할 내용이 있는데 중국 기자들을 한 명도 모르니 아는 기자가 있으면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브리핑에도 오지 않고 국무부에 취재나 인터뷰 요청하는 중국 기자도 없다는 것이다. 중국과 미국의 언론관계가 얼마나 단절됐는지 알 수 있는 에피소드였다. 중국 기자들이 미 국무부 브리핑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브리핑에서는 자국의 입장을 알리고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경쟁관계인 미국의 입장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기자들은 어떤가. 필자 생각으로는 워싱턴 국무부 브리핑룸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의 외교적 스타일은 중국과 일본의 중간에 있으며, 일본 쪽에 더 가깝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한미일 3국의 대미(對美) 외교관계에 상당한 변화가 예고된다. 언제 어디서나 외교적 민첩성을 보이는 일본, 미국과의 '하드 바겐(유리한 조건의 협상)'에 능한 중국. 양국의 틈바구니에 있는 한국은 능수능란한 외교력도, 내세울만한 외교적 스타일도 없다. 북한 핵문제, 주한미군 비용 협상,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프레임 속에서만 한국을 바라보는 트럼프 정부에게 한국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대미(對美) 관계 구축 작업은 국내 우선순위에서 멀어진 듯 하다.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20일이면 버락 오바마에서 도널드 트럼프로 미국 백악관의 주인이 바뀐다. 지금쯤 오바마 대통령은 아마 짐을 다 싸고 휑한 웨스트윙 집무실에 앉아 지난 8년간을 되돌아보며 자기 성적표를 매기고 있을 것이다. 미국 언론이 매긴 오바마 대통령의 성적표는 평균 B+정도 되는 듯 하다. 오바마 행정부에 호의적이었던 '뉴욕타임스', 'CNN' 등은 A- 정도 점수를 줬고, '폭스뉴스'처럼 오바마 행정부와 각을 세웠던 언론은 C 정도의 박한 평가를 했다. 재임 내내 오바마 대통령의 골머리를 앓게 한 것은 국내적으로 오바마케어(건강보험 개혁), 총기규제 등이 있었고, 국제관계에서는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 철군, 시리아전 개입, 북핵 문제 등이었다. 그가 성공한 대통령인지, 실패한 대통령인지는 후세가 판단하겠지만 뉴욕타임스는 오바마 대통령의 최대 실정(失政)은 오바마케어도 이라크 철군도 아닌 사회 전반에 미국 쇠퇴론을 자리 잡게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초강대국 파워가 추락하고 있다는 논리는 베트남전 이후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 시절 큰 관심을 끌었다. 많은 학자들은 '미국은 과연 한물 간 나라인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포린어페스어스' 같은 외교 잡지는 특집호를 만들어 이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손을 떼고 다른 나라 분쟁에 개입을 하지 않으려는 소극적 외교정책과 큰 폭의 재정적자를 유발하는 오바마 행정부의 사회안전망 정책은 미국 쇠퇴론에 불을 당겼다. 이는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오바마 대통령은 급기야 2012년 국정연설에서 "미국은 절대 지고 있는 나라가 아니다. 미국의 영향력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고 강변했다. 미국 쇠퇴론이 힘을 얻게 된 것은 '중국의 급부상'과 관계가 있다. 2000년대부터 가속화된 중국의 경제적 팽창의 영향으로 오바마 대통령 시절부터 미국과 중국의 대결구도를 의미하는 '주요2개국(G2)'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쓰였다. 미국의 중국 전문가들은 '중국은 미국을 추월해 최강대국으로 올라설 것은 분명하다. 단지 몇 년이 걸릴 것인지가 문제'라는 전망을 속속 내놓았다. 지난해 미국 대선 당시 트럼프는 유권자의 '2등 국가' 불안심리를 잘 파고들어 대통령이 됐다. 트럼프의 예상대로 취임 전부터 '하나의 중국' 원칙 철회 가능성을 언급하며 중국을 압박했다. 과연 미국은 2등 국가로 전락할 것인가. 미국에서는 속속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을 초강대국을 만든 것은 단지 군사력, 경제력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치, 인권,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 같은 무형의 국가자산에서 아직 중국은 미국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된 '미국이 만든 세계'의 저자이자 신보수 진영의 거두인 로버트 케이건은 "중국이 미국을 따라 오려면 최소 반세기는 지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중국을 멀리 하겠다는 트럼프의 전략이 위대한 미국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그보다는 중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미국과 대등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트럼프가 말하는 위대한 미국의 정체가 뭔지, 트럼프의 미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해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없다. 다만 벌써부터 트럼프의 돌발행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성탄 전야인 24일 서울 도심에서 박근혜 대통령 즉각 퇴진을 촉구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9주째 이어졌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이날 오후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끝까지 간다! 9차 범국민행동-박근혜 정권 즉각 퇴진·조기 탄핵·적폐 청산 행동의 날' 촛불집회를 열었다. 주최 측은 집회에 55만 명이 참가했다고 추산한 반면 경찰은 3만6000명이라고 추산했다. 집회 참가 시민들은 박 대통령의 즉각 퇴진과 헌법재판소의 빠른 탄핵 인용, 황교안 권한대행 사퇴 등을 촉구했다. 오후 5시경 시작한 본 집회는 현 시국을 영상화한 가수 윤종신의 뮤직비디오 '그래도 크리스마스'로 시작했으며 광화문 일대에서 촛불 및 주변 빌딩을 소등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본 집회를 마친 시민들은 청와대, 총리공관, 헌재 방면으로 행진을 했다.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는 박 대통령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수갑을 선물하는 이벤트가 진행되기도 했다. 법원은 이날부터 내년 1월14일까지 4주 동안 매주 토요일 헌재 인근 안국역 5번 출구에서 약 50m 떨어진 지점까지 행진을 허용했다. 다만 시간은 오후 10시30분까지 제한했다. 행진을 마친 뒤 집회 참가자들은 광화문 광장으로 다시 모여 '하야 크리스마스 콘서트'에 참가했다. 행진에 앞서 광화문 일대에서는 오후 1시반부터 방송인 김제동이 진행하는 토크콘서트를 열렸으며 오후 4시부터는 퇴진콘서트 '물러나쇼(SHOW)'가 진행됐다. 보수단체 박 대통령 퇴진에 반대하는 보수단체들의 '맞불집회'도 열렸다. '새로운한국을위한국민운동'이 오후 2시부터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탄핵 무효를 주장하는 집회를 연 데 이어 오후 4시부터는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은 등 52개 보수단체로 구성된 '대통령탄핵기각을위한국민총궐기운동본부'(탄기국)가 대한문 앞에서 헌법수호를 위한 국민연대 행사 등을 개최했다. 탄기국 주최 측은 100만 명이 참여했다고 주장했고 경찰은 1만5000명으로 추산했다. 청와대는 이날 수석비서관을 비롯한 주요 참모들은 전원 출근해 밤늦게까지 대기하는 9주째 주말 비상근무 체제를 이어갔다. 직무정지 상태인 박 대통령은 외부 노출을 자제하고 관저에서 머물며 TV와 참모진 보고 등을 통해 집회 상황을 지켜볼 것으로 전해졌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24일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집회는 성탄 전야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탄핵의 무거운 메시지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행사들이 줄을 이었다. '박근혜정권 퇴진 청년행동' 소속 청년 300여명은 서울 광화문 KT 건물 앞에서 "시민들에게 성탄 선물을, 박 대통령에게는 수갑을 선물한다"는 이색 행사를 마련했다. 청년들은 산타클로스 복장으로 '아이들에게 선물을, 박근혜에게 수갑을' 등 구호를 외친 뒤 어린이들에게 동화책, 성탄 카드 등의 선물을 나눠줬다. 이들은 청와대 인근까지 행진에 참가해 박 대통령에게 수갑을 선물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본집회 전 콘서트 '물러나쇼'에서는 마야, 이한철, 에브리싱글데이 등이 출연했고 현 시국을 담은 윤종신의 뮤직비디오 '그래도 크리스마스'도 소개됐다. 청와대와 헌법재판소 방면으로 행진한 후 오후 9시까지 2차 행사가 이어진다. '하야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2차 행사에서는 서울재즈빅밴드 등이 출연해 캐럴을 들려준다. 기존 캐럴 노랫말을 현 시국에 맞게 바꿔 부르는 시간도 마련된다. 딸 아들과 함께 온 이정혁 씨(34·동작구 대방동)는 "다른 때 같았으면 썰매장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 이브였겠지만, 아이들에게 배움을 남기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어 함께 집회에 참여했다"고 말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성탄 전야인 24일 오후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9주째 이어지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린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끝까지 간다! 9차 범국민행동-박근혜 정권 즉각 퇴진·조기 탄핵·적폐 청산 행동의 날'이라는 촛불집회를 연다. 집회 후 오후 6시부터는 청와대와 총리공관, 헌법재판소 방향으로 행진을 벌인다. 법원은 헌법재판소 앞에서의 행진을 지난주보다 다소 멀어진 '룩센트 인코포레이티드' 앞까지 허용했다. 퇴진행동은 행진에 앞서 오후 1시30분부터 광화문 광장에서 방송인 김제동이 진행하는 토크콘서트를 열었으며 오후 4시부터는 퇴진콘서트 '물러나쇼(SHOW)'를 진행했다. 이밖에 '박근혜 퇴진 부산운동본부'는 오후 6시부터 부산 서면 중앙로에서 제8차 주말 시국대회를 열며 대구 대전 진주 청주 등에서도 박 대통령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린다. 앞서 새로운한국을위한국민운동 등 보수단체들은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탄핵 무효를 주장하는 '맞불집회'를 열었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잘못한 것도 많지만 잘한 일이 더 많다"며 대통령을 옹호했다. 청와대는 수석비서관을 비롯한 주요 참모들은 전원 출근해 밤늦게까지 대기하는 9주째 주말 비상근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직무정지 상태인 박 대통령은 외부 노출을 자제하고 관저에서 머물며 TV와 참모진 보고 등을 통해 집회 상황을 지켜볼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서울 영등포경찰서를 찾아 경찰과 의경들을 격려했다. 문 전 대표는 "연인원 1000만 명 가까운 시민들이 집회에 참여했는데도 지금까지 단 한 건의 폭력사태도 단 한 명의 체포자도 발생하지 않은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전대미문의 6곳 동시다발 테러로 문화도시 파리는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생존자들은 “도살장 같았다” “도처가 피바다였다”며 당시 처참한 상황을 전했다. 3개 팀으로 나뉜 테러범들은 거의 같은 시간대에 작전을 감행했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테러였다.○ 축구 경기장 세 차례 폭발 대참사의 출발점은 파리 동북쪽 외곽 생드니에 있는 축구장 ‘스타드 드 프랑스’였다. 마치 한일전처럼 프랑스인의 관심이 높은 독일과의 친선 축구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도 일찌감치 귀빈석에 자리를 잡았다. 전반전 시작 후 20분쯤 지난 오후 9시 20분경 경기장 밖에서 첫 번째 폭발음이 들렸다. 자살폭탄 조끼를 입은 테러범 1명이 경기장 입구에서 이뤄진 몸수색에서 발각되자마자 자살폭탄을 감행하면서 난 폭발음이었다. 올랑드 대통령은 이 사실을 경호팀으로부터 긴급 보고받고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안전지대로 몸을 피했다. 3분 후쯤 경기장 밖에서 또 한 번의 폭발음이 들렸다. 또 다른 테러범 한 명이 터뜨린 것으로 파악되나 정확한 경위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고 30분 후쯤 경기장 인근 맥도널드 매장 주변에서 세 번째 폭발음이 터졌다. 이 폭발들로 행인 1명이 사망하고 테러범 3명이 자폭했다. ○ 술집 식당 연쇄 총격 경기장의 첫 번째 폭발과 거의 같은 시간. 경기장에서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자동차로 20분 거리의 파리 도심 10구(區)와 11구에서는 연쇄 총격 소리가 이어졌다. 시작은 10구 알리베르 가의 술집 ‘카리용’ 바였다. 오후 9시 25분쯤 차에서 내린 남성 두 명이 마스크도 쓰지 않고 평범한 복장을 하고 식당으로 걸어갔다. 누가 봐도 식당에서 밥을 먹기 위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들은 식당 앞에서 AK-47 소총을 꺼내 들고 난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술집 맞은편 캄보디아 식당 ‘프티 캉보주’에서도 총격이 울렸다. 두 곳에서 민간인 15명이 사망했다. 여기서 식사를 하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아가트 모로 씨(24)는 “175cm가량의 건장한 남성 두 명이 AK-47 소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며 “그들은 얼굴은 북아프리카 타입이었지만 수염도 기르지 않았고 옷차림도 정숙한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다시 총성이 울린 곳은 ‘프티 캉보주’에서 2.4km 떨어진, 자동차로 7분 거리의 11구 샤론 가에 있는 술집 ‘벨 에키프’ 바였다. 테러범들이 식당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에게 난사해 19명이 숨졌다. 동시에 여기서 좀 떨어진 퐁텐 오 루아 가의 피자집 ‘카사 노스트라’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손님들도 총격을 받아 5명이 사망했다. 용의자 1명은 11구 볼테르 가의 식당 ‘콩투아르 볼테르’에서 자폭했다.○ “15초 마다 한명씩 죽였다” 오후 9시 40분쯤 울린 마지막 총성은 가장 처참하고 잔혹한 테러가 일어난 11구 볼테르 가에 있는 공연장 ‘바타클랑’이었다. 1월 테러가 발생했던 샤를리 에브도 사무실에서부터 500m가량 떨어진 이곳에서는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록밴드 ‘이글스 오브 데스메탈(EODM)’ 공연으로 좌석 1500석이 꽉 차 있었다. 공연 45분을 넘기면서 무대가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를 즈음 검은 옷을 입은 테러범 3명이 무대를 덮쳤다. 이들은 허공에 대고 총을 쏘아대며 프랑스어로 “너희 대통령 올랑드의 잘못이다. 프랑스는 시리아에 개입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소리를 질렀다. “신(알라)은 위대하다. 시리아를 위해”라는 아랍말도 터져 나왔다. 테러범들은 초반에는 관객들을 모아놓고 위협만 하다 두 시간가량 지난 뒤부터 학살극을 벌였는데 이는 축구장 테러가 실패하는 등 여타 테러 장소에서 기대한 만큼 사상자가 나오지 않자 단행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테러범들은 14일 0시 30분부터 10∼15분 동안 인질들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시작했다고 BBC방송은 전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인질들은 “테러범들이 ‘움직이면 쏜다’고 했다. 실제로 휴대전화가 울리거나 움직임이 포착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종교와 국적을 물은 뒤 15초마다 한 명꼴로 인간 사냥을 하듯 죽였다”고 증언했다. 겁에 질린 일부 관객들은 피바다가 된 객석에 엎드려 죽은 척을 하거나 스피커 뒤에 숨기도 했다. 칠레 국적인 다비드 괴팅거 씨(23)는 “테러범이 총을 겨누고 프랑스 사람인지를 물어봤다”며 “내가 ‘아니다’고 했더니 살려줬다”고 말했다. 프랑스 경찰이 진입한 것은 테러범들의 총기 난사 직후인 0시 45분쯤. 사망자는 89명에 달했다. 용의자 2명은 자폭했고 1명은 사살됐다. 정미경 mickey@donga.com·이유종 기자}
13일 저녁(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는 더 이상 문화와 예술의 도시가 아니었다. 공포의 현장이었다. 술집과 카페, 록 콘서트장, 축구 경기장에서 ‘불금’의 열기를 만끽하던 파리 시민들은 무자비한 테러범들의 총격과 폭탄 속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변했다. 전대미문의 6곳 동시다발 테러로 파리가 아비규환의 현장이 되는데 는 3시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마치 도살장 같았다” “도처가 피바다였다”며 당시 처참한 상황을 전했다. 테러범들은 3개 팀으로 나뉘어 거의 같은 시간에 작전을 감행했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이 없으면 불가능한 연쇄 테러였다.● 축구 경기장 세 차례 폭발 대참사의 출발점은 파리 동북쪽 외곽 생드니의 스타드 드 프랑스 경기장이었다. 경기장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의 친선 축구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프랑수와 올랑드 대통령도 일찌감치 귀빈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반전 시작 후 20분쯤 지난 저녁 9시 20분경 경기장 밖에서 첫 번째 폭발음이 들렸다. 프랑스 검찰의 프랑수아 몰랭 검사에 따르면 이 폭발은 테러범이 경기장으로 들어오려다 실패하자 자폭한 것이었다. 테러범은 경기 시작 15분 후쯤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려다 입구에서 이뤄진 몸수색에서 자살폭탄 조끼를 입은 사실이 발각되면서 제지당했다. 범인은 발각된 직후 보안 검색대에서 물러나면서 자살폭탄 조끼를 스스로 폭발시켰다. 첫 번째 폭발 직후 올랑드 대통령은 경호팀으로부터 긴급 보고를 받고 곧바로 안전지대로 몸을 피했다. 첫 번째 폭발을 신호로 3분 후쯤 경기장 밖에서 테러범들은 또 한번 폭탄을 터뜨렸고, 30분 후쯤 경기장 인근 맥도널드 매장에서 세 번째 폭발이 잇따랐다. 경기장 인근에서 발생한 3차례 폭발로 행인 1명이 사망하고 테러범 3명이 자폭했다. 폭발 소리에 관중이 동요하기도 했지만 경기는 계속됐고 프랑스팀이 승리했다. 경기가 끝나고 일부 출입구가 봉쇄되자 일부 관중은 경기장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만약 경기장 안에서 폭발이 있었다면 대량 살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연쇄 폭발에도 불구하고 관람객들을 피신시키지 않은 프랑스 보안당국의 조치가 적절했는지는 논란 소지가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 술집·식당 연쇄 총격 경기장 첫 번째 폭발과 거의 같은 시간. 경기장에서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자동차로 20분 거리의 파리 도심 10구(區)와 11구에서 연쇄 총격 사건이 발생했다. 총격은 10구 알리베르 가의 술집 ‘카리용’ 바에서 시작됐다. 저녁 9시 25분쯤 차에서 내린 두 명의 남성이 식당을 향해 접근했다. 마스크도 쓰지 않은 평범한 복장 차림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AK47 소총을 꺼내들고 난사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길을 건넌 테러범들은 술집 맞은편에 있는 캄보디아 식당 ‘프티 캉보주’에도 총격을 가했다. 두 곳에서 15명이 사망했다. 다음 표적은 10구 남쪽에 있는 11구의 샤론 가에 있는 술집 ‘벨 에퀴프’ 바였다. 저녁 9시 50분쯤 테러범들은 이 식당의 야외 테이블로 접근해 총을 난사했다. 인근 퐁텐 오 루아 가의 피자집 ‘카사 노스트라’의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손님들도 총격을 받아 5명이 사망했고 일본 식당 등도 공격을 받았다. ‘프티 캉보주’에서 식사를 하던 프랑스인 여학생 아가트 모로 씨(24)는 당시 상황에 대해 “175cm 가량의 두 명의 건장한 남자가 AK47 소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며 “그들은 얼굴은 북아프리카 타입이었지만, 수염도 기르지 않았고 옷차림도 정숙한 차림이었다”고 말했다. ‘카사 노스트라’에 있던 덴마크 출신 정신과의사 마크 콜클루 씨(43)는 “테러범이 총구를 이쪽 저쪽으로 돌리며 3~4발씩 발사했다. 그들은 전문가처럼 보였다”며 “15~20발의 총소리가 들렸고 이후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고 말했다. 저녁 시간 총소리는 파리 10구와 11구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10구에 사는 조세 비아나 씨는 거리에서 도망가는 생존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숨겨줬다. 그는 “집안에서 몇 시간동안 숨어 있어야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매우 공포스러웠다”고 말했다. ● 극장 인질극 최대 사망자 가장 처참하고 잔혹한 테러는 11구 볼테르 가에 있는 저녁 9시 40분쯤 공연장 바타클랑 극장에서 벌어졌다. 1865년 설립돼 150년의 역사를 가진 바타클랑 극장은 록콘서트, 코미디쇼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11구 최대의 문화공간으로 파리 젊은이들 사이에는 유명한 곳이다. 바타클랑 극장은 지난 1월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 공격을 받은 풍자 잡지 샤를리 에브도 사무실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이기도 하다. 이날 극장에서는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 록밴드 ‘이글스 오브 데스메탈(EODM)’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극장의 1500석 좌석은 열광하는 관중으로 꽉 차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테러범들은 공연장 뒤쪽으로 매우 조용히 들어왔다. 많아야 25세 정도로 매우 어려 보였고 술집 총격 때와 마찬가지로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곧바로 무대로 올라간 테러범들은 총을 허공에 대고 쏘아대며 “너희 대통령 올랑드의 잘못이다. 프랑스는 시리아에 개입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소리를 질렀다. 테러범 중 한 명은 아랍어로 “신(알라)은 위대하다, 시리아를 위해”라고 외쳤다. 이 때부터 공포의 2시간이 시작됐다. 테러범들은 극장 관객들을 모아놓고 인질극을 시작했다. 바로 극장 관객들에게 총격을 가하지 않는 것은 다른 테러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지 정보를 얻기 위해 기다린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테러범들은 계획대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자 인질들을 상대로 무차별 총격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고 BBC방송은 전했다. 총격이 시작된 것은 테러범이 침입하고 2시간 정도 지난 14일 오전 0시 30분이었다. 테러범들은 10~15분 동안 인질들을 향해 쉴 새 없이 총을 난사했다. 살아남은 인질들은 “테러범들이 인간사냥을 하듯 죽였다”는 증언했다. 인질들은 살아남기 위해 바닥에 누워 죽은 척을 하기도 했다. 극장에 있던 실뱅 라발랑 씨(42)는 “움직일 수 없었고 숨조차 쉬지 않으려고 애썼다”며 “사람들은 되도록 테러범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프랑스인이 아니라서 목숨을 건진 사람도 있었다. 다비드 프리츠 괴팅커 씨(23)는 테러범이 자신을 지목해 국적을 물었다고 털어놨다. 그가 칠레인이라고 답하자 테러범들이 총을 쏘지 않고 놓아줬다. 영국 대학생 한나 코벳 씨(21)는 “무장괴한이 무대 위에 나타나자 처음에는 ‘퍼포먼스’라고 생각했다”며 “그러나 밴드의 리드 싱어가 얼굴에 총을 맞았을 때 뭔가 잘못됐다고 깨달았다”고 말했다. 미국인 헬렌 윌슨 씨는 “테러범들이 장애인 구역까지 들어와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총을 난사했다”고 영국 텔레그래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경찰은 테러범들의 총기 난사 직후인 오전 0시 45분쯤 극장 안으로 진입했다. 용의자 3명은 입고 있던 폭탄 벨트를 터뜨려 자살했고, 나머지 1명은 경찰에 사살됐다. 이번 파리 테러로 희생된 129명중 가장 많은 99명의 사망자가 극장에서 발생했다. 이번 테러 사태로 부상당한 환자들을 돌봤던 필립 쥐벵 조르주퐁피두병원 응급센터장(51)은 “전쟁보다 참혹했다”고 털어놨다. 2008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의사로 근무했던 그는 “환자들이 전쟁터의 부상병들과 같았다”며 “그렇게 많은 부상자를 한 번에 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교토(京都) 청수사(淸水寺·기요미즈데라·778년 창건)를 찾는 관광객들은 매년 1000만 명이 넘는다. 교토를 찾는 5000만 명의 20%에 달하는 수치이다.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절은 올 3월 미셸 오바마 여사가 방문해 경내에 있는 큰 북을 치는 모습이 전해져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청수사는 고대 한일 교류사 측면에서도 매우 상징적인 사찰이다. 일본의 고승 엔친(延鎭) 스님과 백제계 도래인 후손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758∼811) 장군의 깊은 인연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 일본 건축술의 정수 4월 말 청수사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절까지 약 15분간 가파르고 비좁은 골목길을 오르는 동안 하도 사람이 많아 행인들과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발걸음 옮기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경내로 들어서자마자 약 11m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세워진 웅장한 본당이 위용을 드러냈다. ‘일본 목조 건축의 불가사의’로 평가받는 유명한 본당 마루는 일본말로 ‘부타이(舞台·무대)’로도 불리는데 못 하나 없이 139개의 대형 느티나무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청수사 학예연구원 사카이 데루히사(坂井輝久·67) 씨는 “한국말에 최선을 다한다는 뜻으로 ‘배수의 진을 친다’는 말이 있는데 일본 사람들은 ‘청수의 무대에서 뛰어내릴 각오’라는 말을 쓴다”고 했다. 본당 건물과 함께 유명한 것이 본당 안 깊숙한 곳에 자리한 십일면관음보살상이다. 33년에 한 번씩만 일반에게 개방되는 ‘비불(秘佛)’인 관음상이 마지막으로 공개된 때가 2000년 3월이었으니 다시 보려면 2033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자가 청수사를 찾았을 때에도 관음상 주변은 접근 자체가 금지돼 있었고 어두운 차양 막까지 쳐져 어렴풋이 실루엣만 확인할 수 있었다. 사카이 씨는 “일본인들은 평생 두 번만이라도 관음상을 볼 수 있으면 복권에 당첨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긴다”고 말했다. 이 관음상을 안치한 사람은 일본인 엔친 스님이지만 사찰 건물은 백제계 도래인 후손 다무라마로가 자신의 집을 헌납한 것에서 비롯한다. 하급 무사였던 다무라마로는 교토로 천도를 단행한 간무왕의 총애를 받아 북방 오랑캐 정벌을 총괄하는 장군직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한일 고대인들의 인연 758년 청수사가 있는 오토와 산 인근에서 태어난 다무라마로의 조상은 대대로 야마토 정권에서 군인으로 일하며 이 지역에서 군락을 이루고 살았다. 일본 역사서 ‘속군서류종(續群書類從)’에는 ‘다무라마로의 조상이 오진왕 20년(290년)에 건너온 백제 왕족 아치노오미(阿知使主·?∼?)’라고 적혀 있다. 12세기 일본 역사서 부상략기 등에 따르면 다무라마로는 아픈 아내를 위해 사슴피를 약으로 쓰려고 오토와 산을 헤매다 산에서 수행 중이던 엔친 스님을 만나 불법에 귀의한다. 그리고 엔친을 위해 자신의 집을 청수사 본당으로 바친다. 청수사에 얽힌 한일 교류 역사를 접하고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정작 사카이 씨는 “다무라마로는 후원자일 뿐이고 건립자는 엄연히 엔친 스님이다. 다무라마로가 한반도 도래계의 후손이라 해서 청수사가 한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청수사가 건립된 8세기 말은 한반도 도래인들이 현재로 치면 이민 3, 4세대가 되어 완전히 일본에 동화된 시기이다. 사카이 씨 말대로 그들을 굳이 한반도 도래인이라고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한국과의 연관성을 애써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할 일도 아닐 것이다. 기자가 그런 생각을 하며 서 있는데 사카이 씨가 한마디를 더 보탰다. “한국 사람들은 한국이 일본에 모든 문화를 전해 주었다며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 창조를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청수사 건립에서 다무라마로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려 했던 속내가 읽히는 말이었다. 그가 속 좁은 일본인들을 대변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하긴 했지만 우리도 이제 일본에 문명을 전해주었다는 것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어떻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체화했는지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려는 아량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한국에 없는 문화유산을 일본 사람들이 오히려 더 잘 간직하고 있는 곳들이 있으니 바로 교토 고산사(高山寺·고잔지)에 남아있는 원효와 의상대사의 흔적들이다.○ 원효와 의상대사 초상 고산사는 교토 서북쪽 도가노오(e尾) 산 속에 있는 사찰이다. 산골짜기에 있는 작은 사찰을 버스를 타고 1시간 반이나 걸려 찾은 이유는 신라 명승 원효(617∼686)와 의상대사(625∼702) 일대기를 그린 두루마리 그림과 초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절 살림을 맡고 있는 다무라 유교(田村裕行) 집사가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역시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절을 찾는 이들은 하루에 수십 명 수준. 이 중 30%가 한국에서 온 불자(佛子)라고 한다. 다무라 씨는 “일본인들은 경내를 구경하고 경치를 감상하기 바쁜데 한국인들은 합장하고 기도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고산사가 소장한 원효와 의상의 그림은 이들의 일대기를 그린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이라는 총 일곱 권짜리 에마키(繪卷·두루마리 그림)와 초상화 한 점씩이다. 모두 국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무라 씨에게 그림을 보여 달라 하자 “교토박물관에 있다”는 말이 돌아왔다. 2006년 교토박물관이 그림을 전시한 뒤 더 많은 관람객들에게 보이기 위해 임대 형태로 박물관에 남겼다는 것이다. 워낙 미술사적 가치가 높아 고산사에 소장되었을 때도 일반 공개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게 원효와 의상대사의 초상화가 일본 사찰에 있게 된 걸까. 관련 연구로 메이지(明治)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임중 메이지대 연구원은 “8세기경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화엄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원효와 의상대사”라며 “원효와 의상은 당시 일본뿐만 아니라 화엄종 종주국인 중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학식이 높은 고승들이었다”고 했다. 원효와 의상은 약간 다른 식으로 일본에 화엄종을 전했다. 원효는 저술을 많이 남겼고 의상은 제자를 많이 길러냈다.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별기’ 등 화엄사상을 집대성한 원효의 저서는 240여 권에 달하는데 이 중 상당수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의상이 길러낸 제자 중에 한 명인 심상(審祥)은 화엄종을 널리 알릴 목적으로 도일(渡日)해 740년 동대사(東大寺·도다이지)에서 화엄경을 처음 강연했다. 원효와 의상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일본 승려들이 많은데 가마쿠라 시대에 활동했던 묘에(明惠) 스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왕실의 적극적 후원 속에서 번성한 화엄종이 나라 시대 이후 왕권 약화로 쇠퇴하자 묘에는 고산사를 창건해 화엄종을 다시 일으키려 했다. 김 연구원은 “묘에가 자기 나라 일본이나 화엄종 종주국인 중국의 승려가 아닌 원효와 의상을 그린 것을 보면 당시 일본에서 이들의 명성이 높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존경받았던 원효와 의상 묘에의 명을 받아 두 고승에 관한 그림을 실제 그린 이는 묘에의 제자이자 당시 이름 높은 화승(畵僧)이었던 조닌(成忍) 스님이었다. 조닌은 중국 송나라 고승 전기인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나오는 원효와 의상의 일대기와 가르침을 토대로 그렸다. 두루마리 일곱 권 중 세 권이 원효도(元曉圖)이고 네 권이 의상도(義湘圖)이다. 원효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당나라 유학길에 동굴에서 자던 원효가 목이 말라 맛있게 먹은 물이 해골에 담긴 것이었음을 알고 큰 깨침을 얻는 대목이고 의상도에서는 당나라 유학을 하던 의상에게 반한 선묘 낭자가 귀국길에 오른 의상이 탄 배를 향해 몸을 날려 용이 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치밀하면서도 대담한 화법(畵法)을 구사한 두 고승의 초상화는 현재 남아있는 초상화 중 실제 이미지에 가장 가깝다는 평을 듣고 있다. 검은 수염을 기른 원효는 생전의 파격적 행보에 걸맞게 호방한 모습이고 의상은 인자하고 후덕한 모습이다. 다무라 씨는 “두 분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한국에 있던 원본을 일본 화가들이 베껴 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현재 초상화 원본은 한국에 남아있지 않다.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든 일본 화가들이 한국에 와서 존경받는 스님들의 초상화를 모사(模寫)해 갈 만큼 1200∼1300년대 한일 간 문화 교류가 매우 활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교토=정미경 mickey@donga.com·하정민 기자}

교토 서북쪽 변두리 우즈마사(太秦)에 있는 고류지(廣隆寺·광륭사) 역에 내리면 일본 영화산업의 요람인 도에이(東映)가 만든 테마파크가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사무라이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도에이가 1980년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모델로 해 만든 곳이다. 절 옆으로는 경찰서, 소방서, 구청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하야시야 다쓰사부로(林屋辰三郞) 교토대 사학과 교수가 “고류지는 온통 세상의 먼지에 뒤섞여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사찰 안으로 들어섰다. 절을 찾은 때는 5월. 마침 필리핀에서 북상한 태풍으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경내는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일본인들은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기도 한 고류지를 ‘불상(佛像)의 절’이라고 부른다. 국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불상만 50점에 달해 고류지 답사는 ‘불상 답사’라고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백미는 ‘목조미륵반가상’이다.○ 인간 실존의 진실을 표현한 불상 경내 고건축들 사이로 밝은 갈색의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 눈에 띈다. 불상들을 모아 놓은 신영보전(新靈寶殿)이다. 절 입장료는 무료이지만 이곳은 500엔을 따로 받고 있었다. 전시장 안은 극장 안처럼 어두웠다. 불상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도(照度)를 최대한 낮췄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문화재를 이렇게까지 소중히 다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조미륵반가상’은 전시장 가운데 있었다. 어둑한 실내에 반가상에만 따로 은은한 조명이 비치고 있어 주인공이라는 게 한눈에도 확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실내가 어두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데 반가상 앞에 서니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한국 사람들 중에는 오로지 이 불상 하나만을 보겠다며 절을 찾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굳이 불교 신자가 아니라도 시공이 멈춰 버린 절대 공간에서 미륵보살과 오롯이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1945년 이 절에 와서 불상을 바라보며 이렇게 적기도 했다. ‘이 불상만큼 인간 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이 없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실로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다.’ 불상은 등신대로 의자에 편안히 앉아 있는 반가부좌 자세였다.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인 채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에 올려놓고는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에 얹고 있었다. 오른쪽 뺨 아래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는 가볍게 원을 그리고 있었는데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깊은 사유에 들어간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 불상은 우리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상과 너무도 비슷하다. 우리 반가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데 비해 고류지 반가상은 지그시 감고 있다는 것, 모두 미소를 짓고 있지만 입 모양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만이 차이일 뿐이다. 두 반가상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 반가상의 재질(材質) 한일 미술사가들은 고류지 반가상의 국적을 놓고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1960년 교토 대학생이 불상의 아름다움에 홀려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고를 내는 바람에 전문가들이 부러진 손가락을 붙이려고 재질을 분석한 결과 아카마쓰(적송·赤松)라는 것이 판명됐다. 당시 일본 목조 불상들의 재질은 녹나무였는데 한국에서만 나는 적송으로 판명되자 불상이 한국에서 만든 것이라는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불상 허리띠 부분에 녹나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어 일본에서 제작됐다는 주장도 여전하다. 일각에서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일본에서 수리한 것이라는 주장도 한다. 어떻든 고류지 반가상은 현재 일본의 ‘국보 1호’다. 일본에서는 국보 번호가 편의상 매겨진 것이어서 별 의미는 없다고 하지만 일본 국보 1호의 국적이 한국이냐 아니냐가 논란이 될 정도라면 고대 한일 교류의 흔적이 얼마나 깊었기에 그런 것일까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반가상의 국적에는 이처럼 논란이 있지만 고류지를 지은 사람이 한반도 도래인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편이다. 그는 다름 아닌 신라에서 건너온 진하승이다. ○ 창건주는 신라인 진하승은 24회에서 자세히 소개했던 쇼토쿠(聖德·574∼621) 태자의 최측근이었음이 여러 일본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는 고류지가 있는 우즈마사 지역에서 갑부로 큰 존경을 받았는데 숭불파와 배불파 간에 벌어진 불교 전쟁 때 숭불파인 태자 편에 서서 큰 공적을 쌓아 이후 왕실 재정을 담당하는 ‘장경(藏卿·오늘날 재무장관)’ 직에까지 오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가 어느 날 군신들을 불러 놓고 “존귀한 불상을 갖고 있는데 누가 이 상을 모시고 공경할 것인가”라고 묻자 다들 머뭇거리는 사이 진하승이 나아가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면서 고류지 창건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즈음 일본 각지에서는 태자의 지시로 7개의 대형 사찰이 동시에 지어지는데 이 중 유일하게 교토에 세워진 것이 바로 고류지라고 한다. 반갑게도 신영보전 전시 불상들 끝에는 진하승 부부 조각상이 있었다. 조각상 속의 진하승은 한국에서 여러 자료를 접하며 머릿속에 그려 봤던 것과 비슷했다. 위엄이 있으면서도 날카로웠다. 부인은 후덕한 인상이었다. 고류지에서는 진하승의 또 다른 흔적이 있었으니 바로 우즈마사 신전이었다. 신전 안내문에는 ‘후인들은 진하승의 덕을 찬양하고 그를 신으로 모시면서 우즈마사 신명(太秦神明)이라고 칭했다’고 적혀 있었다. ○ 진하승의 무덤 고류지 근처에 진하승의 무덤이 있다고 해서 내친김에 찾아 나섰다. 고류지 역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걸어가니 주택가에 거대한 돌무덤이 나타났다. 바로 진하승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50여 개의 크고 작은 돌이 쌓여 있는 형태였는데 가장 큰 돌은 가로세로 4m에 높이가 2m나 됐다. 무덤 전체 길이가 17.8m나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곳을 뱀 무덤이란 뜻의 ‘헤비즈카(蛇塚)’라 부르고 있었다. 무덤 발견 당시 안에 뱀이 가득 서식하고 있었다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안으로는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조망이 감싸고 있었고 주택들이 원형을 이루며 무덤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안내문에는 이 무덤은 7세기 축조된 열쇠구멍 모양의 전방후원분으로 원래 길이가 70m를 넘었다고 적혀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네 번째로 큰 고분으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안내문에는 고대 수장급 인물의 무덤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 진하승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무덤을 둘러싼 집들을 둘러보다 어느 집 대문 앞에 ‘사적 헤비즈카 고분 보존회’라는 팻말이 걸려 있어 문을 두드려 보았다. 중년의 일본 남자가 나오더니 경계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고분에 대해 알고 싶어 온 한국 기자라고 명함을 건네자 그제야 반갑게 맞이했다.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와다 유키시게(和田幸重)라는 이름과 함께 ‘와다 염색’이라는 글귀도 있었다. 염색집을 운영하면서 무덤 보존도 하고 있다고 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고 하자 그는 흔쾌히 철조망 문을 열고 필자를 안내했다. 실제 본 무덤 속은 농구 코트 절반 크기일 정도로 컸다. 와다 씨는 “무덤에 쓰인 돌들은 인근 아라시야마 산에서 실어 온 것”이라며 “이 큰 돌들을 당시에 어떻게 옮겨 왔는지 나도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무덤 발견 당시 안은 도굴꾼들이 한바탕 털고 가 아무것도 없었지만 당시 이 일대가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였으며 고류지 창건주가 진하승이었던 것으로 미뤄 볼 때 무덤은 진하승의 무덤이란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했다. 와다 씨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곳 주민들은 진하승의 정기가 동네를 지켜 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무덤을 신성시하며 소중히 여기고 있다. 고대 교토를 이룩한 신라인들과 현대 교토인들은 1600여 년의 세월 동안 이렇게 영혼의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이다.”우즈마사=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