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주성하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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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관련 사이트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http://nambukstory.com)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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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분야

2026-02-26~2026-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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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살부터 도주까지 리재남이 기획”

    김정남 살해 사건의 배후 총책은 말레이시아를 수년간 사업 거점으로 삼으며 주요 인맥을 심어 온 리재남(57)인 것으로 알려졌다. 리재남은 리정철(47·체포)을 이용해 용의주도하게 공작원들을 탈출시킨 것으로 전해졌다. ○ “리재남이 막후 기획자” 말레이시아 현지 중문지 둥팡(東方)일보는 20일 경찰 조사 결과 리재남이 암살의 막후 기획자 역할을 했고 다른 북한 용의자들과 함께 북한으로 도주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20일 보도했다. 리재남은 몇 년 전 말레이시아에 건너와 현지 상인들에게 북한 건강보조식품과 인삼 등 약재를 판매하는 무역 파트너 업무를 했다. 그는 “사업에 활용한다”며 리정철을 포함한 북한인들을 추천해 데려왔다. 북한 공작원들을 은밀히 데리고 와 현지 곳곳에 심어둔 것이다. 경찰은 현재 리재남이 데려온 북한인들을 조사 중이다. 현지 소식통은 둥팡일보에 “리정철은 용의자를 차로 태워주는 운전 담당이자 연락책이었다”며 “리정철은 공항에 나타나지 않고 (경찰 시선을 분산시키는) ‘성동격서(聲東擊西)’ 방식을 썼기 때문에 나머지 용의자들이 출국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리정철이 평소 온라인에서 대남 정보활동을 하는 이른바 ‘사이버 공작원’으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정보당국에 따르면 북한은 말레이시아를 해외 사이버전의 거점으로 삼고 있다. 리정철은 건강보조식품을 취급하는 ‘톰보 엔터프라이즈’의 정보기술(IT) 부서에서 일했다고 한다.○ 작전 성패에 대한 평가 엇갈려 북한 공작기관 고위 간부 출신의 탈북민 A 씨는 20일 “북한으로선 목표를 달성했으니 성공으로 평가할 것”이라며 “해외 작전 경험도 많지 않아 신원 노출은 불가피한 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도 “일처리를 매끄럽게 마무리하지 못한 측면이 있지만 작전 자체를 실패했다고 단정 짓기 힘들다”고 말했다. 반면 북한군 출신인 김정아 통일맘연합 대표는 “공작원은 신분을 외부로부터 철저히 감춰야 하는데, 신분이 노출되면서 결과적으로 북한에 해를 끼쳤다”고 지적했다. 김정남 테러에 관여했던 공작원들의 향후 처우에 대해서도 “큰 포상을 받을 것”이란 의견과 “흔적을 그대로 남겨 처벌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이번 사건의 배후로는 정찰총국이 유력하게 지목되고 있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20일 국회 국방위원회 간담회에 참석해 “6, 7개의 전문국으로 구성된 정찰총국은 인민무력성 소속이지만 김정은이 직접 관할한다”고 보고했다. A 씨도 “북한 공작 편제에서 사람을 죽이는 테러는 정찰총국이 담당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 대남공작 기구인 내각 산하 문화교류국(옛 노동당 225국)의 소행으로 보는 탈북 인사도 적지 않다. 홍순경 북한민주화위원회 명예이사장은 “이한영 암살(1997년) 등을 주도해온 225국 소속 요원들일 확률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윤완준 zeitung@donga.com·주성하·김배중 기자}

    • 2017-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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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정철, 北대사관 자주 출입… 암살 장면 리재남 옆서 지켜봐

    말레이시아 경찰이 19일 김정남 살해에 북한 용의자 5명 이상이 가담했다고 밝힌 가운데 현지 경찰에 유일하게 체포된 리정철(47)은 이번 사건의 배후를 밝혀줄 핵심 인물로 꼽힌다. 리정철은 사건이 벌어지던 당시 현장에서 50m 떨어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식당에 테러 용의자 중 최고참인 리재남(57)과 같이 앉아 있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하지만 테러 직후 북한 국적 용의자들이 모두 신속히 탈출한 반면 리정철은 자택에서 체포되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점도 적지 않다.○ 집에서 체포된 리정철 리정철은 17일 오후 9시 50분경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중심가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슬랑오르 주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긴급 체포됐다. 중무장한 말레이시아 경찰 수십 명이 출동해 이웃 주민들에게 “무슨 소리가 나도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통보한 뒤 리정철의 집을 급습했다. 이웃들은 “현관문을 쾅쾅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꼼짝 마’라는 경찰의 고성과 여성의 비명이 이어졌다”고 증언했다. 경찰에 끌려 나온 리정철은 푸른색 티셔츠에 회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고 키 170cm가량의 다부진 몸매였다. 검거 현장에 있던 한 이웃은 “그는 경찰을 따라 순순히 경찰차에 탔으며, 아내와 자녀들 역시 크게 동요하지 않고 담담히 지켜봤다”고 말했다. 리정철 연행 후 가족은 잠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에 수년째 체류해 온 것으로 알려진 리정철은 약 1년 전 40대 부인, 10대 아들, 딸과 함께 이 아파트 4층에 이사 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 아파트는 경비가 삼엄하고 별도의 출입카드가 있어야 출입할 수 있다. 월세는 1500링깃(약 39만 원) 정도라고 한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리정철이 쿠알라룸푸르의 정보기술(IT) 회사에 취직해 일하고 있으며 화학 전문가라고 밝혔다. 리정철의 아내도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리정철은 평소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도 자주 드나든 것으로 밝혀졌다. 그가 체포된 다음 날 북한 대사관 관계자들이 그가 수사를 받고 있던 세팡 경찰서를 방문해 면담을 요구했지만 경찰이 거절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들 리정철은 조사 과정에서 “자신은 당일 공항에 가지 않았고 김정남 살해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지 중국계 신문 중국보(中國報)는 19일(현지 시간) 소식통을 인용해 실제 사건 현장 폐쇄회로(CC)TV에 찍힌 인물 4명 중 그는 없지만 말레이시아 경찰은 피살 당일 범인들이 공항으로 타고 간 차량번호를 통해 리정철의 신분을 알아냈다고 보도했다. 일부 외신은 그가 북한에서 해외 공작 업무를 맡은 정찰총국 소속 요원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하지만 다른 용의자들이 도주하는 동안 왜 혼자만 남아 있었는지, 왜 체포 당시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혔는지 등은 의문이다.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그가 외국인들을 모아 청부살인을 모의하는 데 관여했다는 것도 쉽게 납득이 안 된다. 중요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나온 공작원이 가족과 함께 현지에서 살고 있었다는 점도 이례적이다. 이 때문에 리정철이 영문을 모른 채 북한에서 온 테러조에 독극물을 전달하는 등 단순한 역할만 했을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어떤 역할이든 그가 이번 테러에 연루돼 있다면 북한 배후설은 더욱 선명해질 것으로 보인다.주성하 zsh75@donga.com·윤완준 기자}

    • 201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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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대사 “부검결과 부정할것” 말레이시아 “우리法 지켜라”

    “말레이시아 정부가 적대 세력과 공모해 뭔가 숨기려 하고 있다.” 17일 오후 11시 반경(현지 시간) 김정남의 시신이 안치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종합병원 앞. 강철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이같이 주장했다. 굳은 표정으로 관용차에서 내리자마자 길가에 서서 서툰 영어로 더듬더듬 말하는 그는 무척 다급해 보였다. 그는 ‘적대 세력’ ‘정치 스캔들’이란 비외교적인 표현을 섞어 가며 말레이시아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국 정부가 배후에서 수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식의 억지 주장도 폈다. 그는 13일 김정남 사망 이후 줄곧 언론을 피해 온 터라 이날 기자회견의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18일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 더스타에 따르면 강 대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성명을 통해 “말레이시아 정부의 부검 결과를 총체적으로 부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사망자는 북한 외교여권을 소지한 북한 국민인데 말레이시아 정부가 북한의 허락과 참관 없이 부검을 강행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강 대사는 이 성명에서 북한의 반대에도 말레이시아가 김정남 부검을 강행한 배경으로 한국을 지목했다. 그는 “남한 국민들은 보수 세력이 이번 사건(김정남 사망)을 활용해 박근혜 정권을 구하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밀어붙이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말레이시아와 짜고 김정남 암살 배후가 북한이라고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에 대한 외교적 선전포고도 나왔다. 강 대사는 “이번 조치는 기초적인 국제법과 영사법을 묵살하며 우리 국민의 인권을 극도로 침해했다. 우린 적대 세력의 움직임에 강하게 대응해 국제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북한에 우호적이던 말레이시아 정부는 북한의 잇따른 주장이 주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보고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아맛 자힛 하미디 말레이시아 부총리는 16일만 해도 “북한의 시신 인도 요청은 수사 절차에 따라 가능하게 될 것”이라며 북한의 시신 인도 요청에 호응하듯 말했다. 하지만 강 대사가 17일 밤 말레이시아의 부검 조작 의혹을 제기하자 수브라마니암 사타시밤 보건장관은 18일 “북한이 말레이시아법을 따라야 한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누르 라싯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부경찰청장도 19일 기자회견에서 단호한 어조로 “(김정남) 시신은 아내와 딸, 아들 등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인도된다. 과학적 증거로 가족임이 증명돼야 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북한이 긴급한 움직임을 보이는 데는 말레이시아 당국이 이번 살해사건의 배후로 북한을 지목할 경우 국교가 단절될 수 있다는 긴박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1973년 6월 30일 북한과 수교한 말레이시아는 북한의 핵심 해외 기지 역할을 해 왔다. 무비자 정책인 국가를 제외하고는 전 세계에서 북한 주민이 비자 없이 드나들 수 있는 나라는 말레이시아가 거의 유일하다. 이 때문에 북한은 말레이시아를 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 공작의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해 왔다. 말레이시아는 외교 거점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마약과 위폐 거래의 상당수를 떠맡았던 과거 노동당 작전부의 활동 지역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말레이시아는 북한의 비공개 금융거래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역인 것으로 알려졌다.조은아 achim@donga.com·주성하 기자}

    • 201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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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국적 암살용의자 4명 이미 평양 도착”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 암살 사건을 수사해 온 말레이시아 경찰이 이번 사건의 배후로 사실상 북한을 지목했다. 19일 오후 3시(현지 시간) 수도 쿠알라룸푸르 경찰청에서 열린 사건 관련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신원이 확인된 남성 용의자 5명이 모두 북한 국적이라고 밝혔다. 이 가운데 리정철(47)은 검거됐으나 리재남(57), 오종길(55), 리지현(33), 홍송학(34)은 사건 당일(13일) 모두 국외로 도주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외에도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있는 리지우(30)와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남성 2명을 포함해 이 사건과 관련된 북한 국적자는 모두 8명으로 드러났다. 참고인을 포함한 전체 관련자도 11명으로 늘었다. 경찰은 붙잡힌 리정철과 베트남인 도안티흐엉(29), 인도네시아인 시티 아이샤(25), 말레이시아인 무하맛 파릿 빈 잘랄루딘(26), 참고인 리지우 등을 상대로 사건 전모를 추적 중이다. 이번 사건은 북한 정찰총국 소속 전문요원으로 추정되는 리재남 등 4명이 치밀하게 계획해 지난해 8월 근로자 자격으로 말레이시아에 입국한 현지 정보기술(IT) 회사 직원 리정철과 동남아 여성 2명 등을 포섭해 실행한 암살 사건으로 보인다. 하지만 리재남 등 4명이 출국한 상태여서 수사에 난항이 예상된다. 현재까지 이번 사건에 침묵하고 있는 북한은 리재남 등이 북한인이라는 사실까지 부인하며 ‘모략 책동’이라고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 일본 교도통신은 싱가포르TV 방송을 인용해 리재남 등 4명이 러시아 등 3개국을 거쳐 17일 북한 평양에 도착했다고 전했다. 누르 라싯 이브라힘 부경찰청장은 김정남 사망 원인과 관련해 “현재 독성 검사가 진행 중이며 부검 보고서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부검이 진행된 지 4일이나 됐지만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아 범인들이 청산가리 같은 기존의 독성 물질 대신 인체에 남지 않는 신종 독성 물질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김정남의 시신을 인도받을 우선권이 ‘유가족’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단, 시신을 받으려면 가족이 직접 현지로 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말레이시아 경찰의 수사 결과 발표 직후 “이번 사건의 배후에 북한 정권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정준희 통일부 대변인은 정부를 대표해 발표한 논평에서 “용의자 5명이 북한 국적자임을 볼 때 이번 사건의 배후에 북한 정권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북한이 그동안 반인륜적 범죄와 테러 행위를 자행해 왔다는 점을 볼 때 우리와 국제사회는 무모하고 잔학한 이번 사건을 심각한 우려와 함께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뮌헨 안보회의 참석차 독일에 머물고 있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19일 기자들과 만나 “주요 20개국 외교장관회의 과정에서 김정남 피살 사건에 대해 관심 갖고 질문하는 참석자들이 꽤 많았다”며 “(이런 일을 저지르는) 북한 지도자의 스타일이 한반도 정세에 어떤 함의를 미치는지 의견 교환이 있었다”고 말했다. 고위 당국자는 “다음 달 초 예정된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이번 사건의 인권 문제, 주권 침해 문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한 처벌 문제 등이 포괄적으로 공론화될 것”이라고 말했다.쿠알라룸푸르=박훈상 기자·이세형 turtle@donga.com·주성하 기자 /뮌헨=동정민 특파원}

    • 201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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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행사-잠수함 승조원 등 특수보직 병사에만 지급

    “간식요? 밥도 없어 영양실조 환자가 속출하는데, 무슨 간식 같은 소릴….” 북한군 경험이 있는 탈북민에게 “북한군에서 간식을 먹어본 적 있느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군은 오래전부터 간식을 줘본 일이 없다. 다만 아주 극소수 특수 병종(병과)은 지금도 간식을 받는다. 비행사와 잠수함 승조원은 북한에서 최고 간식을 받는 병종이다. 이들은 평소 영양공급용으로 육류, 계란, 기름을 특별 공급받는 것 외에 초콜릿을 간식으로 받는다. 단, 초콜릿은 출격이나 잠항하는 날에만 졸지 말라고 지급받는다. 북한 내부 비공개 문서에 따르면 김정은은 2012년 한 공군 부대를 시찰하다 “초콜릿을 유통기한이 지나도록 쌓아두고 있다”고 질책하기도 했다. 이에 현지 지휘관들은 “출격하는 날엔 줘야 하는데, 초콜릿이 항상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보관해 둘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간식을 받는 둘째 병종은 군사분계선(MDL) 비무장지대를 지키는 민사행정경찰(민경)과 제1제대 군인들이다. 이들은 잠복근무 나가는 날 건빵 200g과 박하사탕 5, 6개가 들어 있는 ‘잠복간식’을 받는다. 민경 1개 소대는 약 40명인데, 하룻밤에 근무 나가는 인원은 9∼12명뿐이라 보통 3, 4일에 한 번씩 건빵 봉지를 받는 셈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민경에서 근무했던 주승현 박사는 “잠복근무 나가는 날도 소대장, 분대장 등이 몇 개씩 챙겨 가기 때문에 2명이 한 봉지를 나눠 받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북한은 2000년대 초반 “건빵 안에 박하사탕이 들어간 것은 (김정은의 어머니인) 고용희의 배려 때문”이라고 선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용희가 군인들이 졸지 않게 박하사탕을 건빵 안에 넣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 건빵 안에 박하사탕이 들어간 것은 1998년 때부터로 알려졌다. 한국의 특전사, 해병대, 공수부대 격이라고 볼 수 있는 북한 경보병, 해상육전대, 공군육전대 등 특수병종 역시 1년에 몇 차례 있는 정례 훈련 기간엔 건빵을 공급받는다. 그러나 해당 직종에 근무했던 탈북민들은 “그것도 위에서 다 떼먹고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외 북한군 병사들은 간식을 구경해 본 적이 없다. 북한군이 전군에 간식을 공급했던 시절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 70년대 김일성 경호를 맡은 호위국에서 복무했던 장해성 작가는 “1960년대만 해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 병사에겐 월 1통씩 사탕이 공급됐는데, 1970년대 들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했다. 1968년 김창봉 인민무력부장 등 군부 제일주의를 주장하던 장성들이 반당반혁명분자로 대거 숙청되면서 북한군에 대한 공급도 열악해진 것이다. 북한군 대위 출신의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는 “1980년대 말까진 전투식량으로 비축하고 있는 건빵을 2년에 한 번씩 교체했는데, 이때 유통기한이 지난 건빵이 일부 흘러나왔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고위 간부들이 다 빼돌리고 대위급도 몇 봉지 구경하기 힘든 실정이었다고 한다. 1990년대 북한군 간호장교로 근무했던 이순실 씨는 “힘든 훈련 나갈 때 가끔 부대별로 능력껏 옥수수나 콩을 볶아서 갖고 가는데, 볶은 옥수수나 콩이 군인들이 아는 유일한 간식이었다”고 말했다.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 주민의 생활형편은 좀 나아졌지만 군 보급은 여전히 열악하다. 북한에서 선호되는 국경경비대조차 최근 1인당 식량 300g밖에 공급받지 못하고, 부식물은커녕 소금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간식은 군인들에게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7-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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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 아버지 김정일의 ‘백두혈통론’ 무시한채 폭주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형제를 밀어내고 살해하는, 역사책에나 나올 법한 일이 북한에서는 지금까지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북한 정권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바탕으로 인류의 가장 선진적 이상향을 세우겠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시간은 오히려 뒤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는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을 이미 뛰어넘었다.○ ‘곁가지’의 ‘원가지’ 숙청사건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 승계를 합법화하기 위해 각종 이론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1970년대 김정일이 만든 ‘백두혈통론’은 ‘장자승계론’과 다르지 않다. 김정일은 ‘곁가지’라는 용어를 만들어 자기 이복형제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외국에 보내 권력의 주변에서 제거했다. 그런데 백두혈통론에 따르면 김정은은 철저히 곁가지이다. 김정남은 첫째 부인의 자식이자 장자이다. 반면 김정은은 셋째 부인의 자식이고 3남이다. 이런 김정은이 13세나 나이 많은 형 김정남을 살해한 것은 곁가지가 원가지를 없애버린 김씨 왕조의 ‘반역’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김일성의 권좌를 물려받기 위해 1960년대 후반부터 권력 싸움에 뛰어든 김정일은 두 개의 산을 넘어야 했다. 첫 번째는 삼촌 김영주였고, 두 번째는 계모 김성애와 그의 아들들이었다. 김정일은 생모라는 지원군은 없었지만 장남이란 무기를 효과적으로 이용해 삼촌은 물론이고 살아있는 권력인 계모와 자식을 밀어낸 뒤 왕좌를 차지했다. 반면 김정은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모친 고용희라는 살아있는 권력을 이용해 권좌에 올랐다. 이후 실세인 고모와 고모부를 제거한 뒤 생모가 없는 장남까지 끝내 제거한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북한의 상황에 대입시켜 보면 김성애의 막내아들 김영일이 삼촌 김영주를 제거하고 장남인 김정일을 살해한 셈이 된다. 이렇게 김정은은 아버지가 만든 ‘혈통론’과 ‘후계자론’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유훈정치를 강조하는 북한에서 최고의 반역자가 된 것이다.○ 해외를 떠도는 김정일의 이복동생들 김정일은 권력 투쟁에 패배한 혈육을 죽이지는 않았다. 물론 1994년까지 김일성이 살아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이 사망한 후엔 이미 권력이 공고했고 주변이 정리된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혈육을 제거할 필요가 없었다. 김정일의 첫 번째 경쟁자였던 삼촌 김영주는 제풀에 쓰러졌다. 조카와의 권력 경쟁이 불러온 스트레스 때문에 ‘식물성 신경 부조화증’이란 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나중에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김정일은 ‘휴양’을 핑계로 삼촌을 가족과 함께 조선시대 유배지였던 자강도로 보냈고 1993년에야 평양에 불러들였다. 두 번째 경쟁자였던 김성애는 강적이었다. 김일성을 구슬려 “김성애 동지의 지시는 나의 지시입니다”라는 ‘교시’까지 받아냈다. 김성애는 남동생 김성갑, 김성호를 요직에 등용시켜 김정일을 견제했다. 그렇게 김정일보다 12세 어린 김평일이 자랄 때까지 버틸 심산이었다. 김정일은 죽은 듯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김성애와 형제들은 오만해졌다. 김성갑은 김일성이 가장 아끼던 평양의 노른자위 땅에 자기 집을 지었고 여자들을 불러 마약까지 하며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그제야 김정일은 반격을 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김성애 비리 자료를 들고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분노한 김일성은 김성애의 모든 권력을 빼앗았다. 김정일의 이복형제인 김평일은 1979년 주유고 북한대사관 부무관으로 쫓겨난 뒤 지금까지 해외를 떠돈다. 그의 남동생 김영일은 해외에서 술로 울분을 다스리다 2000년 독일 베를린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여동생 김경진도 남편이 오스트리아 대사로 발령 나 25년째 평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로열패밀리로 태어난 죄 김정일의 복수는 소심하면서도 치밀했다. 이복동생 가족들에게 주석궁 옆 2층 대리석 주택을 주었다. 큰 공로를 세운 항일투사들과 똑같은 규모의 집이다. 공급물자 역시 북한에서 최고급으로 보장해주었다. 명절 때마다 자식과 손자들을 주석궁으로 불렀던 김일성을 의식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김성애 역시 주석궁 안 대궐 같은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들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평생 외롭게 늙어가야 했다. 김성애 일가와 만난 사람들은 즉시 국가보위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김성애 일가의 저택 앞엔 호위국 부대를 주둔시켜 아침저녁으로 김정일 찬양가를 목청껏 합창하게 했다. 호위국 소속 여성 대위가 각 저택에 식모로 파견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김정은의 보복은 아버지와 비교할 수 없이 잔인하다. 아예 살려두지 않는다. 고모부 장성택은 만고의 역적으로 공포된 뒤 비참하게 처형됐고, 고모 김경희는 생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말레이시아에서 김정남을 살해한 데에도 김정은이 개입했을 것으로 의심된다. 이뿐 아니라 장성택이 부장으로 있던 노동당 행정부는 과장 이상급까지 모두 처형했고, 나머지는 가족과 함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김정남과 친했던 사람들도 이미 오래전에 숙청됐다. 그들에 대한 작은 기억조차 남겨두지 않고 지워버리겠다는 뜻이다. 만약 김정남에게 권력욕이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래서 김정일이 김일성에게 그랬듯이 갖은 수를 써서 부친의 환심을 산 뒤 권력을 차지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랬다면 지금쯤 김정은이 형 정철, 동생 여정과 함께 해외를 떠돌며 분노의 술잔을 들이켜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김정은은 죽음을 피해 한국으로 망명해 형 김정남을 단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의 로열패밀리로 태어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자가 감당해야 할 비극적 운명이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7-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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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김정남, 평소 ‘누군가 나를 위협한다’면서도 혼자 다녀”

    피살된 김정남은 평소 신변 불안을 느끼면서도 수행원 없이 혼자 동남아 지역을 여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친분이 깊지 않은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복동생 김정은이 권력을 틀어쥔 북한에 들어가지 못하고 해외를 떠돌아야 하는 외로운 심경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김정남이 생전 교류했던 사람들을 접촉해 그의 행적과 심리 상태를 들어봤다. ○ “주로 혼자서 동남아 여행” 싱가포르에 사는 현지 국적의 A 씨는 “김정남은 평소 ‘누군가가 나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혼자 여행을 다녔다”고 16일 말했다. A 씨는 5년 전 싱가포르의 한 클럽에서 처음 김정남을 만났다고 밝혔다. 김정남은 피살될 때에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별다른 수행원 없이 혼자 있다가 변을 당했다. 김정남이 동남아 등지에서 수행원과 다니지 않았다는 점은 수년 전 싱가포르에서 그를 목격한 사람의 증언(본보 16일자 A4면 참조)과도 일치한다. 김정남은 2012년 김정은 집권 후 마카오에 주로 거주하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등 동남아 등지를 떠돌며 살았다. A 씨는 “김정남은 싱가포르에 올 때마다 최소한 며칠, 길게는 2주 동안 머물렀다”면서 “싱가포르 방문지가 어디인지 말하지 않았으며 그가 보낸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정남이 이처럼 홀로 동남아 국가를 오간 것은 자신의 동선이 노출되는 걸 꺼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남광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는 “2001년 김정남이 위조 여권을 갖고 사람들과 무리지어 일본을 방문했다가 발각돼 후계자에서 멀어진 점도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 떠돌이 생활에 외로움 느꼈나 김정남은 처음 보거나 친분이 두텁지 않은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눴다. 테러 위협 속에 홀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외로움을 많이 느낀 탓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싱가포르에 사는 교포 B 씨는 2014년 현지 도심에 위치한 고급 재즈바를 찾았다가 김정남을 만났다. B 씨는 처음에 김정남이 누군지 몰랐다. 한 종업원이 “핵무기 만드는 북한의 김정일 아들”이라며 그에게 김정남을 소개했다. 김정남은 종업원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는 등 별다른 거부감 없이 B 씨와 인사를 나눴다. 김정남은 이전에도 싱가포르의 한 술집에서 여성 종업원들과 술에 취한 채 대화하는 모습이 노출되기도 했다. 수년 전 김정남이 머물렀던 싱가포르 숙소의 사장인 현지인 C 씨도 “우리 숙소에는 4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 머물렀다”며 “시가를 자주 피우며 말이 굉장히 많았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고 전했다. 여러 목격담을 종합하면 김정남의 성격과 행동은 엇갈린다. 전문가들은 김정남이 자신의 외향적인 성격을 억지로 숨기며 살았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김혜숙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신은 외향적인 성향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혼자 다니면서 외로움이 커졌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치에 거리 두던 김정남 취재팀이 접촉한 김정남의 친구들은 “그는 ‘좋은 친구’였으며 정치와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고 입을 모았다. A 씨는 “그는 공손하고 성격 좋은 친구였다. 만약 김정남이 집권했으면 북한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정남이 어린 시절 다녔던 스위스 제네바국제학교의 친구들도 그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다고 입을 모았다. 그의 한 급우는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정치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편 김정남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사진을 놓고 누리꾼 사이에서는 “안타깝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김정남의 페이스북 계정은 그의 위조 여권상 이름과 같은 ‘김철(Kim Chol)’로 등록돼 있다. 해당 사진은 다람쥐 한 마리가 먹다 남은 당근을 앞에 두고 눈을 감은 채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누리꾼들은 “던져주는 당근을 두고 돌아서지 못하는 다람쥐 같은 자신의 신세를 상징하는 것 같아 짠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호재 hoho@donga.com·황성호·주성하 기자}

    • 201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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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범행시간 딱 5초… 기획자 지시 수행한 ‘청부암살단’에 무게

    김정남 살해 용의자 2명이 체포됐지만 여전히 누가, 왜 김정남을 살해했는지는 베일에 가려 있다. 북한의 공작기관이 개입한 청부살인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공범들이 모두 붙잡혀야 사건의 전모가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 어설픈 여성 용의자 16일 현지 언론과 경찰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6명의 일당이 공모해 치밀하게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이들이 각기 다른 호텔에 머무르다 범행 전날 같은 호텔에 함께 투숙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때 범행이 모의됐을 가능성이 높다. 경찰에 체포된 2명의 여성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베트남 국적의 여성 도안티흐엉은 “장난인 줄 알고 일행인 남성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네시아 국적 여성 시티 아이샤도 경찰 조사에서 “쿠알라룸푸르의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며 (몰래카메라 같은) 장난 비디오에 출연하면 100달러를 주겠다고 하기에 ‘인기인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범행에 가담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고 현지 중국계 신문 중국보(中國報)가 보도했다. 하지만 이들은 범행을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흐엉은 범행 뒤 공항 택시 정류장으로 급히 달아났다. 당시 흐엉은 왼손에 검은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가 범행 당시 장갑을 끼고 있었다는 점은 자신이 독극물을 만진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흐엉이 택시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포착된 폐쇄회로(CC)TV 화면에서는 장갑이 없었다. 도주 중 장갑을 버린 것이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 장갑을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또 이들 일당은 김정남이 6일 말레이시아 입국 뒤 13일 마카오로 출국하려고 하기까지의 일정과 동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여성들이 체포된 과정은 너무 어설프다. 이들은 도주 시도조차 하지 않고 체포됐다. 이 때문에 이번 사건이 북한이 ‘외국용병’을 매수해 사주한 사건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북한이 이런 방식으로 요인을 살해한 것은 이례적이다. ○ 배후 숨기려 청부살인 가능성 북한이 해외 테러리스트를 고용해 테러를 저지른 전례는 있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 당시 북한은 팔레스타인 테러조직 ‘아부 니달’ 조직원을 서울에 보내 김포공항에서 폭탄테러를 일으켜 5명을 사망케 했다. 이때 북한은 500만 달러를 지불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여성 용의자들은 훈련된 조직원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 이런 까닭에 이번 범죄는 기획자가 따로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에서 해외 공작 업무를 맡고 있는 정찰총국이 관여하면서 배후가 드러나지 않도록 외국인들을 고용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말레이시아 당국도 이번 암살을 막후 기획집단이 따로 있는 청부암살단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수사당국이 정찰총국 소속일 가능성이 있는 40세 북한 남성을 추적 중인 것도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현지 중문지 둥팡일보는 현지 고위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말레이시아 수사당국은 테러에 연관된 6명은 김정남 암살을 청부받고 임시로 구성된 조합이지만 특정 국가 정보기관 소속의 공작원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들 암살단이 임무가 없을 때에는 일반인처럼 생활하다가 일단 지령을 받으면 암살자로 활성화된다고 전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이번 김정남 살해 모의를 계획하고 의뢰한 막후 집단, 또는 지시 국가도 어느 정도 파악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아직까지 배후를 특정하지는 않고 있다. 일부 탈북민은 김정남을 살해한 방식이 북한의 공개처형을 모방해 섬뜩하다는 반응도 보였다. 북한에선 죄수를 공개처형할 때 눈을 가리고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죽인다. 김정남의 경우도 조용한 장소에서 독침을 찌르는 대신 굳이 사람이 많은 국제공항을 택했고, 헝겊으로 얼굴을 덮고 죽였다면 북한의 공개처형 방식에 가깝다는 것이다.○ 5초 만에 끝난 테러 공항에서 김정남을 살해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5초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레이시아 일간 뉴스트레이츠타임스가 16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김정남은 13일 오전 9시(현지 시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내 저비용항공사 전용 터미널에 도착했다. 진한 푸른색 폴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김정남은 키오스크(셀프 체크인 기기)로 향해 줄을 섰고, 그를 지켜보던 여성 두 명이 그에게 다가갔다. 여성 한 명이 앞에서 김정남의 시선을 끄는 사이 다른 한 명이 뒤에서 김정남의 목을 조이며 순식간에 범행을 실행했다. 공항 CCTV에 찍힌 범행 시간은 5초였다. 이 신문은 김정남의 시신에는 아무런 주사 자국이 없었다고 전했다. 범인들이 독극물을 얼굴에 스프레이로 뿌리거나 독극물이 묻은 헝겊으로 살해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보는 김정남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15m를 뛰어와 공항직원에게 도움을 청하며 “너무 아프다. 누군가 내게 액체를 뿌렸다”고 호소했다고 전했다.주성하 zsh75@donga.com·황인찬 기자}

    • 201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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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 최근 외교관 통해 김정남에 ‘자진 귀국’ 종용 편지 전달…”

    김정남이 지난해 연말부터 올 2월 초까지 동남아 지역에서 북한 외교관들과 3번의 만남을 가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16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북한 고위 소식통들을 인용해 “김정은이 해외에 머물고 있는 김정남을 국내로 불러오라고 국가보위성에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소란을 피우지 말고 본인 스스로 귀국하도록 설득하라는 것이 김정은의 지시 내용이었다”고 보도했다. 국가보위성은 김정은의 지시에 따라 1월 20일 경 마카오에서 김정남과 만났지만 김정남은 북한으로 귀국하라는 김정은의 권고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달라. 시간이 필요하다”고 답변했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 그는 이어 “이 때문에 김정은은 송환지시를 받은 김정남이 신변에 위험을 느껴 미국이나 한국으로 망명할 수 있음을 우려했을 것”이라며 “김정남이 해외에서 망명할 경우를 염려해 사전에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다른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이 지난 연말과 올해 초 해외에 파견된 외교관들에게 두 차례 김정남을 만나도록 했다”며 “라오스에 있는 외교관이 직접 김정남을 만나 김정은의 서신을 전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식통은 “김정은이 김정남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북한으로 귀국을 회유한 것으로 짐작된다”며 하지만 “생명에 위협을 느낀 김정남이 분명한 확답을 주지 않은 것이 김정은에게 살해를 지시하도록 만든 동기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김정은의 서한까지 받은 김정남이 시간을 끌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자신을 돕는 측근들과 함께 해외로 망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북한 당국이 서둘러 김정남을 제거하는 작전에 착수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 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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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女용의자, 베트남行 비행기 타려고 공항 나타났다 체포돼

    말레이시아 경찰이 15일 김정남 살해에 가담한 여성 1명을 체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미궁에 빠질 뻔했던 이번 사건의 전모를 밝힐 단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사건 배경과 범행 주체가 누군지 등에 대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 ○ 범행 현장으로 돌아온 용의자 말레이시아 경찰에 따르면 이날 체포된 사람은 조안 티 흐엉이라는 이름의 베트남 국적 여성으로, 인구 16만 명이 사는 베트남 북부 소도시 남딘 출신으로 알려졌다. 그는 베트남 여권을 소지하고 베트남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15일 오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저비용항공사(LCC) 전용 제2터미널에 나타났다 8시 20분경 체포됐다. 셀랑고르 주 범죄조사국 부국장 파드질 아흐마트에 따르면 김정남은 이틀 전 바로 이곳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마카오행 여객기 탑승을 기다리던 중 피습됐다. 경찰에 따르면 공항 출국 대기장에서 기다리던 김정남에게 여성 두 명이 접근했고, 이 중 한 명이 김정남을 낚아채고 다른 한 명이 독극물을 얼굴에 뿌린 것으로 폐쇄회로(CC)TV 분석 결과 드러났다. 여성은 급히 자리를 떴고 김정남은 고통을 호소하며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다가가 “누군가 뒤에서 잡고 얼굴에 액체를 뿌렸다”며 도움을 호소했다. 김정남은 즉각 공항 내 치료소로 이송됐다. 아흐마트는 “김정남은 기절하기 직전이었으며 두통을 호소했다. 공항 내 치료소로 옮겨진 뒤에는 약한 발작 증세도 보였다”고 설명했다. 김정남은 공항 인근 푸트라자야 병원으로 이송되던 구급차 안에서 사망했다. 이후 이 여성은 공항에서 차로 15분 거리인 반다르 바루 살락 팅기 지역의 한 호텔에 이틀 동안 머물렀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이 여성이 김정남 살해를 실행한 인물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 공작원이라고 단정하기엔 어설픈 대목이 적지 않다. 북한 최정예 공작원 출신으로 여러 차례 남파 임무를 수행한 경험이 있는 A 씨는 “북한이라면 김정남 살해를 이미 몇 달 전부터 설계했을 것이고, 테러에 가담한 여성들도 이미 한두 달 전에 현지에 침투해 예행연습을 거듭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북한 공작원이라면 이미 말레이시아를 빠져나갔을 것”이라며 “만약 여성 공작원들이 발각된다면 자결을 선택할 확률이 높아서 생포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A 씨의 설명에 따르면 김정남 살해 같은 중요한 공작은 유인조, 암살조, 철수조 등으로 분리돼 움직이기 때문에 작전 수행과 철수 루트가 매우 정밀하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체포된 여성은 다시 버젓이 범행 현장에 나타났고 순순히 체포됐다. 사전에 충분히 준비한 공작원으로 보기에는 무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건을 수사 중인 탄 스리 칼리드 아부 바카르 경찰 수사팀장은 “김정남 살해 후 현장의 CCTV에 ‘LOL’이란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던 여성이 맞다”고 확인했다. LOL은 ‘laughing out loud’의 약자로 ‘크게 웃는다’는 뜻이다. ‘너를 죽이며 비웃어주마’란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체포된 여성은 현재 인근 셀랑고르 경찰 수사본부에 구인돼 심문 중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회교 언론 ‘오레엔탈 데일리’는 “체포된 여성 용의자는 경찰에 자신이 베트남의 유명 인터넷 스타라고 주장했으며, 패러디 영상을 찍기 위해 말레이시아에 왔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스프레이 뿌린 여성은 누구? 이 여성이 베트남인으로 신분을 숨긴 북한 공작원일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1987년 한국 KAL기를 폭파한 김현희 역시 한국에 송환된 뒤 일본인 행세를 했다. 김현희는 대외 정보 수집 및 테러에 가담한 노동당 35호실(당시 대외조사부) 소속이었다. 35호실은 세계를 대상으로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공작원 선발 시 지적 능력과 외국어 수준을 특히 중시한다. 공작원 가운데 절반 이상이 김일성종합대 외국어문학부나 외국어대 출신이며 적대국에서의 원활한 첩보활동을 위해 2, 3년간 어학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북한이 김정남 살해의 책임을 벗고 단순 살해로 만들기 위해 외국인을 매수하거나 외국 범죄 조직에 테러를 위탁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반인이 구하기 어려운 독극물로 김정남을 살해했다는 점에서다. 이병호 국가정보원장은 15일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간담회에서 북한 당국이 약 5년 동안 지속적으로 김정남 암살 기회를 엿보며 준비했다고 말했다. 북한이 외국 용병을 고용했을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던 셈이다. 또 실제로 스프레이를 뿌린 사람은 이 여성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조안 티 흐엉은 손수건으로 김정남의 얼굴을 가리는 역할만 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또 다른 여성 용의자 한명의 신병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스프레이를 뿌린 여성이 북한 국적이라는 보도도 있지만 최종 확인되지는 않았다. 아직 범행 당시 장면이 담긴 CCTV 화면은 공개되지 않았다. 진실을 규명할 남은 중요한 열쇠는 김정남 부검 결과와 나머지 용의자 4명의 체포 여부다. 부검 결과 살해에 사용한 독극물이 일반인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물질일 경우 테러 전문 조직이 개입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 현지 경찰은 여러 국적을 가진 인물들이 이번 사건에 개입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나머지 용의자들이 15일 체포된 베트남 여성처럼 차례로 경찰에 체포된다면 이들의 자백에 따라 사건 배후의 윤곽이 보다 뚜렷하게 밝혀질 가능성이 있다.주성하 zsh75@donga.com·황인찬 기자}

    • 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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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남, 5차례 암살 모면… 김정은에 “살려달라” 애원편지도

    김정남은 자신을 제거하려는 이복동생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과거 김정은에게 충성맹세 편지까지 보냈지만 끝내 이국땅에서 객사하는 쓸쓸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가정보원은 15일 국회 정보위원회 간담회에서 “2012년 4월 김정남은 김정은에게 ‘저와 제 가족을 살려달라’는 서신을 발송한 바 있다”고 보고했다. 이 서신에서 김정남은 “저와 가족에 대한 응징 명령을 취소해 주길 바란다”며 “갈 곳도 없고 피할 곳도 없으며 (이 삶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살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하소연했다고 한다. 이는 본보가 2013년 보도한 김정남이 김정은에게 보낸 편지와 같은 내용으로 보인다(본보 2013년 1월 19일자 A1면 참조). ‘존경하는 세자 저하 전상서’로 시작되는 편지에서 김정남은 “우리 가족은 건강을 특히 주의해야 한다”며 김정은의 안부를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남의 애원은 김정은에겐 통하지 않았다. 김정남은 해외를 떠돌면서 끊임없이 암살 위협에 노출됐고, 알려진 암살 시도설만 5건이다. 최초의 암살 시도설은 2004년에 보도됐다. 그해 11월 김정남은 이종사촌 누이를 만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암살 위협에 처했지만 정보를 입수한 오스트리아 정보기관이 북한에 항의하고 밀착 경호를 해 위기를 넘겼다는 것이다. 2009년 4월에는 평양에서 이른바 ‘우암각 사건’이 벌어져 김정남 측근들이 모두 숙청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정은이 김정일에게서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보위성) 지휘권을 넘겨받은 지 2개월 만에 이복형 세력 제거부터 나선 것이다. 2010년 9월에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김정남 살해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에는 국가안전보위부가 마카오를 찾아가 김정남을 살해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관영 관차저왕(觀察者網) 등은 “당시 보위부 요원들과 김정남 보디가드들이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을 벌였고, 김정남은 보디가드들의 보호로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전했다. 국가정보원은 2012년 초에도 김정은이 김정남을 제거하려 했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정남은 한국 망명을 선택하지 않았다. 2013년 말까지는 평양에서 자신을 걱정해 주는 고모 김경희와 고모부 장성택이 있었다. 장성택 숙청 이후에도 망명하지 않은 것은 베이징과 마카오, 프랑스 등지에 흩어진 가족을 한꺼번에 몰래 빼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 이한영 암살 사건으로 ‘한국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김정남은 어린 시절 김정일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1996년 서방 국가로 망명한 김정남의 이모 성혜랑은 2000년에 펴낸 회고록 ‘등나무집’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김정일은 아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았다. 이 세상의 어느 아버지보다도 아들을 사랑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저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놀라웠다.” 김정일은 아들 전용 영화 촬영소를 꾸려주는가 하면 15호 관저에 990m²(약 300평)짜리 놀이방도 만들었다. 매년 생일에 맞춰 놀이방을 새로운 놀이기구로 완전히 바꿔줬는데 김정남이 새 장난감들을 잠깐씩 만져보는 데 하루 이상 걸렸다고 성 씨는 밝혔다. 한 탈북 간부는 “1980년 전국에서 청소년이 모여 벌이는 ‘배움의 천리길’ 행사가 진행됐을 때 아홉 살 김정남이 대열의 제일 앞에서 걸어갔는데 수천 명이 그 뒤로 아이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어갔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김정남이 스위스 유학을 마치고 1989년 귀국하자 김정일은 장남을 점차 멀리하기 시작했다. 고용희와의 관계를 장남에게 들키는 것이 두려웠고 이미 어린 김정은 형제들에게 마음을 뺏겼기 때문이다. 김정남이 외국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란 것도 김정일에겐 짐이었다. 김정남은 생전에 이복형제인 김정은을 직접 만난 일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남이 후계자로 살았을 때는 김정은이 ‘곁가지’였지만 2000년대 들어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한 뒤에는 처지가 뒤바뀌었다. 그리고 끝내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됐다.주성하 zsh75@donga.com·강경석 기자}

    • 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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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년 피살모면說 등 김정은과 권력다툼… 이명박 정부때 南망명 타진후 신변 위협 커져

    북한 당국에 의해 살해된 김정남은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북한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김정일의 후계자였다. 김정남은 1971년 김정일과 여배우 성혜림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정남에 대한 김정일의 사랑은 대단했다. 이한영 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은 우유병을 들고 아들의 오줌을 직접 받아냈고, 해마다 생일이면 100만 달러 이상어치의 장난감을 사와 김정남에게 안겨주었다. 이런 성장 배경을 가진 김정남은 혈통과 정통성이란 측면에서 열세 살 어린 김정은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장점을 갖고 있다. 김정은은 김일성에게 철저히 숨겨진 손자였지만, 김정남은 김일성과 함께 찍은 수많은 사진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김정은의 콤플렉스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김정은이 제거될 경우 ‘대타’로 등장할 수 있는 김정남의 존재는 김정은에게 커다란 위협 요인이 된다. 1990년대 말까지도 김정남은 김정일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다. 김정일은 세 번째 부인 고영희의 자식인 김정철과 김정은, 김여정을 외부의 시선 때문에 2000년 초반까지 스위스에 숨겨두었지만 김정남은 1990년대 말 평양 고려호텔에서 총기 난사까지 벌이는 등 황태자의 지위를 누렸다. 김정남은 2001년 5월 일본에 밀입국했다가 적발돼 강제 추방되면서 김정일의 눈 밖에 났다고 알려졌다. 김정남은 2000년대 중반부터 마카오에 살면서 사실상 북한을 떠났다. 그러나 이때에도 고모인 김경희와 고모부인 장성택의 비호를 받으며 북한에서 연간 50만 달러 정도의 생계비를 지원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오스트리아에서 김정남 피살 시도설, 2009년 평양에서 김정남 일파에 대한 습격설이 나올 정도로 형제간의 권력 다툼은 심각했다. 김정남은 해외에 살면서 한국과도 비밀 접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김정남은 2005년부터 수년간 박근혜 대통령이 이사로 있던 유럽코리아재단과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남북 소통 창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달 11일 당시 주고받은 일부 메일과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한국 정보기관이 김정남 망명 공작을 폈다는 사실이 국내 한 매체를 통해 공개되면서 김정남은 심각한 위협에 노출됐다. 당시 김정남은 망명에 동의했지만, 그가 부른 가격이 너무 높아 한국 정부가 손을 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김정남이 이 보도 공개 이후 위협을 느껴 한국 등지로 망명할 가능성을 조기에 차단하기 위해 암살했을 가능성이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7-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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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청산가리 5배 독성물질 담은 ‘볼펜형 독침’ 주로 사용

    북한은 그동안 독극물을 이용한 테러 방식을 자주 사용했다. 소지가 간편하고 은밀하게 범행이 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북한 공작원 소행으로 추정되는 독극물 이용 테러는 3건이 알려져 있다. 1996년 10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한의 위조지폐와 마약 밀매 유통을 추적하던 한국영사관 최덕근 영사가 북한 공작원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에게 독극물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이어 2011년 8월 21일에는 중국 단둥(丹東)에서 대북 선교활동을 해오던 김창환 선교사가 독침 공격으로 숨졌다. 다음 날인 22일 중국 옌지(延吉)에서도 10여 년간 대북 인권활동을 해온 강호빈 목사가 독침에 찔려 중태에 빠졌다. 강 목사는 기적적으로 소생했지만 이듬해 5월 27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검사 결과 피해자들의 몸에선 모두 ‘브롬화네오스티그민’이 검출됐다. 네오스티그민은 부교감 신경흥분제로 가공하는 경우 청산가리(시안화칼륨)보다 무려 5배나 더 독성이 강한 독극물로 변한다. 인체에 10mg만 투여해도 호흡정지나 심장마비로 숨진다. 주로 독침을 만년필이나 볼펜으로 위장해 갖고 다니다 테러 대상물 주변을 지나가며 찌른 뒤 도주하는 것이 북한의 수법이다.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테러를 당한 김정남도 이런 방식으로 독극물에 공격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7-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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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극 상공 날아 美타격’ 의도로 ‘북극성-2’ 명명

    북한은 12일 발사한 탄도미사일을 ‘북극성-2형’이라고 명명했다. 스스로 개발한 미사일에 별 이름을 붙이는 북한의 오랜 관행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외부에선 북한의 미사일에 ‘대포동’ ‘무수단’ ‘노동’ 등의 명칭을 붙여 부르지만 북한 내부에선 미사일 종류별로 별 이름을 사용한다. 대전차 미사일의 명칭은 수성(나중에 불새로 개칭), 대함 미사일은 금성, 이동식 지대지 미사일은 화성, 고정식 탄도미사일은 목성이라 부른다. 종류가 가장 많은 미사일은 화성이다. 북한이 자체 제작한 스커드-B 개량형은 화성 5호, 스커드-C 개량형은 화성 6호, 노동 1호 미사일은 화성 7호, 무수단 미사일은 화성 10호로 부르는 식이다. 신형 미사일을 만들 때마다 태양계 행성의 이름을 순서대로 붙인 북한의 미사일 작명 관행을 따른다면 지난해 8월 발사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에는 토성이란 이름이 붙어야 한다. 그러나 북극성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는 이 미사일을 신포급(2000t) 잠수함에 싣고 북극해를 지나 미국 워싱턴을 겨냥하겠다는 최종 목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최후 결전을 위해 북극성이 빛나는 북서항로를 지나갈 미사일이란 뜻이다. 12일 발사된 지대지 미사일에 북극성이란 이름을 단 것도 결국 알래스카 상공을 가로질러 미국까지 날아갈 미사일이란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앞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북극성 계열로 발전시켜 나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번 미사일 발사에 앞서 김정은이 이틀이나 현지에 머무르며 용기를 북돋았다고 주장했다. 북극성은 김정은 시대에 새롭게 개발되는 미사일 계열이어서 김정은이 어느 때보다 큰 관심을 보였던 것으로 분석된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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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12일 신형 핵전략무기 ‘북극성 2형’ 시험 발사, 성공” 발표

    북한이 12일 발사한 탄도미사일이 “새로운 전략무기체계이자 강위력한 핵전략무기인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북극성 2호”라고 13일 발표했다. 북한 중앙통신 등 관영매체들은 이날 “우리 식의 새로운 전략무기체계인 지상 대 지상 중장거리 전략탄도탄 북극성 2형 시험발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북한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김정은이 직접 발사를 지켜보는 가운데 지난해 8월 함경남도 신포 인근 해상에서 발사됐던 잠수함발사미사일(SLBM) 북극성 1호와 똑같이 생긴 미사일이 화염을 뿜으며 발사됐다. 북한은 이번 시험 발사가 “새로 개발한 대출력 고체발동기(엔진)를 이용하는 중장거리 전략탄도탄과 리대식자행발사대(이동식 발사차량)를 비롯한 무기체계 전반에 대한 기술적 지표를 확증하는데 목적을 뒀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시험발사를 통해 “지상에서의 냉발사 체계의 믿음성과 안정성, 대출력고체발동기의 시동 특성을 확증했으며, 능동구간 비행시 탄도탄의 유도 및 조종특성, 대출력고체발동기들의 작업특성, 계단분리특성들을 재확인하였다”고 밝혔다. 북한 중앙통신은 김정은이 “우리의 위력한 핵공격수단이 또 하나 탄생한데 대하여 더없는 만족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북한의 주장을 종합하면 전날 발사된 미사일은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핵무기 탑재 가능한 신형 중장거리 미사일(IRBM)이란 뜻이다. 이 미사일의 사거리는 2400~5500㎞ 정도로 추정되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의 전단계로 볼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고체연료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북한은 스커드 계열과 노동 계열의 미사일을 갖고 있지만 KN-2 미사일을 제외하면 모두 액체연료 방식을 사용한다. 액체연료 방식은 연료주입에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주입 이후 일주일 내로 발사하지 못하면 연료를 다시 뽑아야 한다. 하지만 고체연료는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발사의 신속성과 은밀성을 보다 높일 수 있다. 이번 발사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북한이 “자체의 힘과 기술, 지혜로 리대식탄도탄자행발사대차”를 만들었다고 발표한 점이다.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차량의 경우 엔진과 바퀴 등을 중국에서 수입해야 하기 때문에 북한이 차량을 무한정 늘이기엔 제한이 있었다. 현재 북한이 보유한 미사일 발사차량은 100여대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날 사진에 공개된 북극성2호 발사차량은 무한궤도 방식의 차량으로 과거 북한이 열병식 때 공개했던 미사일 발사차량과는 차이를 보였다. 무한궤도 방식은 먼 거리 이동에는 상당히 약점이 있지만 가까운 거리를 기동하며 발사하기엔 무리가 없다. 북한이 발사 차량을 자체로 대량 생산할 경우 전국 곳곳에 숨겨놓았다가 동시다발적으로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경우 현재 한미연합군이 보유한 요격 자산으로는 대응이 어렵게 된다. 북한 중앙통신은 김정은이 발사날짜를 직접 정해주고 현지에서 이틀이나 머무르며 조립단계에서 발사단계까지 지켜봤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공개한 여러 장의 사진에는 김정은이 발사 과정을 지켜보고, 발사 후 관계자들과 환하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이 담겼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7-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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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영호 “제네바합의는 빌 클린턴-김정일 사기 합작품”

    “북-미 제네바 합의는 빌 클린턴과 김정일의 ‘사기 합작품’이다.” 태영호 전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사진)가 9일 북한과 미국이 각각 핵 사찰 허용과 경수로 제공을 합의한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태 전 공사가 학술회의에 참가해 발언한 것은 처음이다. 태 전 공사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주최 세미나에서 “북한 외무성에서 처음부터 제네바 합의가 이행될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김정일은 대량 아사와 경제난 속에 미국이 (북한을) 치지 못하게 시간을 벌어야 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북한 외무성이 당시 진단한 클린턴의 속셈은 ‘북한이 곧 무너지니 붕괴될 때까지 안정적으로 관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라며 “결국 제네바 합의는 이런 두 속셈이 만든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태 전 공사는 어떤 인센티브를 제공하더라도 ‘북한과 한미의 내부 요인 때문에’ 김정은 정권을 비핵화로 이끌 수 없다고 주장했다. 먼저 북한에서는 “1000억 달러를 준다 해도 이를 대가로 핵무기를 폐기해 경제를 살리자는 말을 할 사람이 없고, 있다면 당장 처형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도 북한을 샅샅이 강제 사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합의문이라도 서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과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김정일과 모스크바에서 만나 밤새 보드카를 마시며 ‘한반도 종단 가스관 및 철도 건설을 하면 북한이 단번에 부자가 된다’고 설득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이해관계가 얽히는 것이 두려운 김정일은 끝내 넘어가지 않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7-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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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외 없이 토사구팽 당한 북한의 ‘저승사자’들

    “올 것이 왔구나. 나만은 예외일 거라고 간절히 믿고 싶었건만.” 평양의 비밀 장소에서 취조를 받은 김원홍 북한 국가보위상은 지금 이런 심정이 아닐까. 사실 그의 숙청은 오래전부터 예고된 일이다. 필자도 2년 전에 이 칼럼에서 “보위부 수장이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전망했다. 김원홍은 기적을 기다릴 것이다. “아직은 해임일 뿐. 내가 김정은을 위해 묻힌 피가 얼마인데 이렇게 죽일 리가 없다.” 노동당 조직지도부는 김원홍을 처형해 그가 갖고 있을 자신들의 약점을 영원히 묻고 싶을 것이다. 살려두면 언젠가는 복수할지 모른다. 김정은에겐 김원홍의 숙청은 매우 골치 아픈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 말 한마디로 죽인 수많은 간부와는 달리 김원홍만큼 김정은 체제에 기여했던 인물도 없다. 그를 죽이면 김정은을 위해 다시 칼을 들겠다는 인물이 나오지 않을지 모른다. 당장 후임 보위상 임명부터 골치가 아프다. 심지어 “죽을 자리에 임명됐으니 내가 먼저 김정은을 제거해야겠다”고 역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보위 기관의 수장은 김씨 가문의 저승사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지만 예외 없이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또 수장이 숙청될 때 다수의 부하도 순장조처럼 함께 처형됐고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다. 1973년 국가정치보위부 출범 이후 초대 보위부장이었던 김병하는 토사구팽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그는 1970년대 김정일의 후계 구도에 방해되는 인물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해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북한의 모든 권력을 움켜쥔 뒤 김정일은 김병하의 무소불위 권력이 두려워졌다. 김병하는 당의 조사를 받던 중 1980년 자살했다고 알려졌다. 그의 심복들도 대거 처형되면서 기세등등하던 보위부는 쑥대밭이 됐다. 김정일은 “김병하는 애매한 군중을 마구 처형하고 잡아가 당과 대중을 이탈시킨 반당 반혁명 종파”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보위부에 잡혀간 사람이 석방된 일은 없다. 2대 보위부장인 이진수는 1987년 황해도 시찰 중 자다가 ‘밤나무 가스’ 중독으로 의문사했다. 이후 김정일은 한동안 보위부장 자리를 공석으로 비우고 1부부장에게 조직을 통솔하게 했다. 3대 보위부 수장인 김영룡은 김정일의 대학 동창이었지만, 그도 1998년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낙인찍혀 음독자살했다. 이후 10년간 보위부는 사회안전성과 군 보위사령부의 기세에 눌려 존재감을 잃었다. 그랬던 보위부는 2000년대 말 류경 부부장이 김정일의 눈에 들면서 서서히 존재감을 회복했다. 남북회담을 통해 우리에게도 알려졌던 류경은 해외 반탐(방첩) 분야를 담당하면서 이중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던 머리가 비상한 인물이었다. 김정일은 보위부 간부 중에서 류경만을 수시로 독대하며 신임했다. 이러는 바람에 류경은 김창섭 정치국장 등 보위부 간부들과 장성택의 행정부, 이제강의 조직지도부에서 동시에 미움을 샀다. 김정일은 죽음이 닥쳐 온다는 것을 예감하자 아들에게 권력뿐 아니라 돈도 물려주고 싶었다. “무조건 100억 달러를 유치해 오라.” 김정일은 이런 특명을 주어 2010년 12월 류경을 남쪽에 비밀 특사로 파견했다. 비슷한 시기 가신이나 마찬가지인 이수용(가명 이철) 합영투자위원회 위원장을 중국에 보냈다. 이수용은 무산광산 철광으로 갚을 테니 100억 달러의 차관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중국 측에서 “무산의 생산 인프라를 고려할 때 갚으려면 100년이 걸리겠다”는 야유까지 받았다고 한다. 류경이 가져왔던 제안은 지금까지 비밀이지만 정상회담과 경제협력을 미끼로 대규모 차관을 얻으려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2010년 류경이 서울에 와서 남북 정상회담을 합의했지만, 북한의 요구가 지나쳐 무산됐다”고 밝혔다. 류경은 평양에 돌아가자마자 반탐 계열의 심복 10여 명과 함께 처형됐다. 내막을 깊이 알고 있는 북한 전직 고위 간부는 “서울에서 고급 여성 코트 등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를 보고하지 않았던 것도 문제가 됐다”고 회상했다. 류경이 빠뜨린 선물 목록은 함께 서울에 동행했던 여성 수행원이 보고하면서 드러났다. 고위급 간부들에게 전달된 류경의 처형 사유는 “파벌을 형성하고 망탕짓을 했다”는 것이다. 해외 반탐 수장으로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 나가 부화방탕하게 놀았다는 것. 그러나 이것 역시 표면적 이유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김정일은 어린 김정은에게 물려주기엔 류경이 지나치게 야심만만해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김원홍은 이런 보위부 비극의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정은은 김정일과는 다를지 모를 것이란 한 가닥 기대를 걸어보진 않았을까. 하지만 세습 독재 체제의 속성은 3대가 아니라 10대가 가도 변하지 않는다. “세력이 커진 자는 반드시 죽는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7-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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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성공단 폐쇄 1년… 대선 주자-입주 기업들, 재가동 요구하는데 대북제재 맞물려… 재가동 가는 길 험난

    “뿔뿔이 흩어진 직원들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식당에서 일하면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 김운규 화인레나운 대표(65)는 개성공단에서 북측 근로자 724명과 남측 주재원 17명을 두고 의류가공업체를 운영하며 재작년 연매출 87억 원을 올렸다. 하지만 지난해 개성공단 가동 중단 이후에는 대체 생산 공장이 없는 상태로 1년을 허송세월했다. 김 대표는 “베트남 현지 답사를 4차례나 갔지만 인건비가 낮고 물류 조건이 맞는 곳은 이미 다른 기업들이 선점해 마땅한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지금은 개성공단이 다시 열리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 “北, 개성공단 자산 밀반출 정황 있다” 10일이면 개성공단이 전면 가동 중단된 지 1년이 되지만 입주기업들의 시계는 1년 전 그날에 멈춰 있다. 여전히 기업들은 공단 가동을 중단한 정부를 원망하며 실질적 손실을 보상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7일 통일부는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밥솥 등 일부 제품을 중국에 판매하려고 한 정황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 측 관계자들이 중국 현지에서 밥솥 완제품의 사진을 보여주며 거래를 시도했고, 중국 측에서 불법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거절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개성공단 기업들은 그간 북측이 남측 기업들의 자산을 청산하지 않은 것을 개성공단 재개 의지로 해석하며 희망의 끈을 잡고 있었다. 정기섭 개성공단기업 비상대책위원장은 “아직까지 북측의 큰 움직임이나 반출을 의심할 만한 차량 이동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해당 밥솥을 생산한 기업은 “중국 현지에서 그런 얘기가 들려 확인 중”이라며 말을 아꼈다. 해당 기업은 개성공단에서만 한 달에 8만∼10만 개의 전기밥솥을 생산했고 개성공단 폐쇄 당시 상당량을 현지에 두고 온 것으로 전해졌다. ○ 고작 3분의 1 보상 vs 충분히 지원 개성공단 기업들은 피해액 산정과 보상을 둘러싸고 1년이 다 되도록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다. 개성공단 비대위가 추산한 123개 기업의 피해액은 1조5000억 원이 넘는다. 이들은 정부의 지원금이 실제 피해액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반발하고 있다. 정부가 투자자산과 유동자산만 보상해 주었을 뿐 영업 손실이나 위약금, 현지 미수금, 영업권 상실 피해 등은 전혀 지원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인 의류업체 D사 최모 대표는 “피해액은 28억 원인데 보상금은 9억 원에 그쳤다. 베트남에서 공장을 임차해 생산을 이어가고 있지만 협력업체에 제때 대금을 못 주고 있을 정도로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런 불만에 대해 정부는 “2015년 개성공단 기업들이 낸 보험료는 14억 원에 불과하지만 정부는 3000억 원이 넘는 보험금을 지급해 최대로 지원했다”며 문제가 없다는 반응이다. 정부 당국자는 “피해 보상에 국민의 세금을 투입하는 상황에서 100% 지원은 보험 제도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문제”라고 일축했다. 개성공단 비대위가 “입주 기업 과반의 매출이 반토막이 났다”고 한 주장에 대해 정부는 “개성공단 폐쇄 전인 2015년 매출액의 79%를 회복했다”고 반박한 것도 양측의 큰 입장 차를 보여준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상당수 대선 주자가 개성공단 재가동에 동의하고 있지만 실제 재가동이 되려면 난관이 많다. 정부는 개성공단 재개 문제가 논의되기 위해서는 북핵 상황에 의미 있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통일부 당국자는 7일 “개성공단 임금 사용에 대한 대내외적 우려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성공단 가동을 재개한다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 논란을 야기할 수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국제사회에 대한 설득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정민지 jmj@donga.com·주성하 기자}

    • 2017-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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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복을 빕니다]서영훈 前 대한적십자사 총재

     “한국 사회에 큰 족적을 남기셨다. 개인적으론 친아버지처럼 저를 많이 지도해주신 분이었다.” 5일 오후 서울 강남구 일원로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된 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한적) 총재(사진)의 빈소를 찾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서 전 총재의 부인 어귀선 여사와 이야기를 나누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았다. 반 전 총장이 1962년 미국 적십자사 초청 외국학생방미프로그램(VISTA) 대표로 선발돼 존 F 케네디 당시 미 대통령을 만나고 외교관의 꿈을 키우게 된 데도 고인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반 전 총장은 “귀국 후 연락을 드렸지만 어 여사가 ‘상당히 위중하셔서 지금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라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우리 시대의 선각자였고 국민들한테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이라며 고인을 애도했고, 황우여 전 새누리당 대표는 “혼탁한 세상에서 맑은 샘물 같은 정신적 지주였다”고 평가했다. 박원순 서울시장, 남경필 경기도지사, 천정배 나경원 의원, 김한길 전 의원,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등 각계 인사들도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시민사회운동의 원로인 서 전 총재가 4일 오전 9시경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1923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6년 홀로 월남했다. 이후 정의사회구현협의회 상임공동대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등 20여 개의 크고 작은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했다. 특히 1953년 3월 청소년국장으로 한적에 몸을 담은 이후 청소년적십자(RCY)를 만들기도 한 고인은 한적을 고향처럼 여기고 활동했다. 한적 사무총장 시절인 1980년 민주화운동이 벌어지자 직접 앰뷸런스를 타고 포위망을 헤쳐 광주 시내로 혈액을 날랐던 이야기는 지금도 회자된다. 고인을 오랫동안 보좌한 이병웅 한적 중앙위원(76)은 “광주의 실상을 본 뒤 서울로 돌아와 ‘다친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당국에 산소통을 요구하던 서 전 총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남북회담의 시초인 1972년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을 시작으로 평생 많은 남북회담에 대표로 나서는 등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각별한 노력을 쏟았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의 대표를 맡아 첫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는 데에도 역할을 했다. 군사정권 시절인 1983년 고인은 흥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본부 강당을 민주화운동 단체의 집회와 기자회견장으로 제공했다.  서 전 총재는 청렴과 청빈을 평생 신조로 삼고 살아왔다. 민주당 대표 시절 그의 지갑을 열어보니 2000원뿐이었다는 이야기, 한적 사무총장 시절 집에 전화가 없어 그를 찾느라 진땀을 흘렸다는 일화 등을 남겼다. 민주당 대표 시절 ‘3만 원 이상 점심 안 먹기 운동’을 펼치며 정치 문화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유족으로는 어 여사와 아들 홍석 유석 경석 씨, 딸 희경 씨 등 3남 1녀가 있다. 발인은 7일 오전 9시. 02-3410-6903 주성하 zsh75@donga.com·최지연·조건희 기자}

    • 2017-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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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성택 처형주도한 김원홍 보위상, 지난달 3계급 강등뒤 전격 해임

     북한의 핵심 실세로 꼽히는 김원홍 국가보위상(사진)이 지난달 전격 해임됐다고 통일부가 3일 밝혔다.  통일부 정준희 대변인은 이날 “김원홍은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조사를 받고 대장에서 소장으로 3계단 강등된 뒤 보위상에서 해임됐다”고 발표했다. 조직지도부가 보위성에 대한 검열을 계속 진행 중이어서 김원홍의 처벌 수위가 앞으로 더 높아질 수도 있다. 이번 검열로 이미 보위성 부상 1명을 포함해 여러 명의 보위성 간부가 처형된 것으로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  김원홍의 해임 원인은 표면적으론 보위성이 자행한 고문 등 인권유린, 월권, 부정부패 등이다. 하지만 김원홍의 숙청은 오래전부터 예상돼 왔다.  북한 정권이 공안기관을 앞세워 권력 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인사들을 숙청한 뒤 나중에 공안기관 수장도 처형하는 ‘토사구팽’의 역사는 김일성 시절부터 되풀이돼 왔다. 최근 사례로는 2000년 처형된 채문덕 당시 사회안전부 정치국장이 대표적이다.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 사망 뒤 채문덕을 내세워 2만5000여 명의 간부를 숙청한 뒤 채문덕과 그의 부하들을 모두 죽였다. 1972년 설립된 보위성의 역대 수장들도 모두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김정일 사망 직후인 2012년 4월 보위상에 오른 김원홍은 그동안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등 핵심 실세들을 처형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김정은의 권력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면서 입지가 좁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원홍은 당 실세들의 비리를 상세히 알고 있어서 회생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반면 김원홍이 일단 소장 직위는 유지한 만큼 향후 복권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2017-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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