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

김민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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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국제부 기자입니다. 예술가의 이야기를 따로 모아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kimmin@donga.com

취재분야

2025-11-25~2025-12-25
미술38%
연극20%
문학/출판13%
칼럼7%
인사일반7%
언론3%
문화 일반3%
사고3%
사회일반3%
사건·범죄3%
  • 동산방 특별전서 만나는 한국현대미술

    한국화 표구 대가이자 동산방화랑 설립자인 동산 박주환(1929∼2020)은 1980년대부터 미술관을 만들기를 꿈꿨다. 서울 종로구 환기미술관 옆 조그마한 부지도 마련하고, 표구 연구소와 전시장을 조성할 구상도 했지만 사립미술관 운영이 만만치 않은 현실에 부딪혀 끝내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결국 미술관에 담고자 했던 작품들은 서울 종로구 동산방화랑 6층 수장고에 줄곧 보관되었고, 아들 박우홍 대표(71)가 2021년, 2022년 두 번에 걸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면서 최근 관객을 만났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리는 ‘동녘에서 거닐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 특별전’을 통해서다. 아버지가 남긴 작품 209점에 이어 최근 15점을 추가 기증하기로 한 박 대표를 13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만났다. 그는 “수장고를 정리하다가 배접만 한 상태로 말려 있던 작품을 새로 발견해 기증하게 됐다”고 말했다. 노석 신영상(1935∼2017)과 1970년대 서울대 출신 여성 작가 3명의 그룹전인 ‘삼인행’에 출품됐던 작품 등이다. 추가 기증은 현재 심의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동산 박주환 컬렉션’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작품은 한국화 154점, 회화 44점, 조각 6점, 판화 4점, 서예 1점이다. 여기에는 김규진(1868∼1933)부터 현대 미술가 유근택까지 한국화 주요 작가의 다양한 작품이 포함됐다. 전시에서는 동산이 197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청전 이상범의 ‘초동’을 포함해 90여 점을 선보인다. 박 대표는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 4학년이었던 1976년부터 동산방화랑에서 일했다. 그는 ‘군대 3년을 제외하고 40여 년을 아버지 밑에서 심부름한 입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말년에 편찮으실 때 ‘기증을 해도 활용이 안 되면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난다”며 “그 말은 너무 부담 갖지 않고 작품을 팔아도 된다는 의미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뜻을 지키고 싶었다는 그는 “다행히 미술관에서 화상으로서는 처음으로 기증을 받아줬고, 또 특별전까지 열게 돼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2월 12일까지. 무료.과천=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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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산청과시장서 ‘이브의 사과’ ‘로봇 감자 나르기’ 구경해요”

    매일 새벽 청과물이 모이는 도매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주제로 한 예술 전시가 열리고 있다. 마산청과시장의 다섯 번째 예술 프로젝트 ‘소과도전(蔬果圖展)’이 9일 경남 창원내서농산물도매시장 2층 아트스튜디오에서 개막했다. 전시에서는 권순철 서용선 이강우 이기진 작가가 각자의 시선으로 해석한 채소와 과일을 작품으로 선보인다. 권순철 작가는 과일을 탄생과 죽음을 겪는 생명체로 바라본 ‘어느 과일의 넋’과 역사 속 사과의 의미를 극적으로 풀어낸 ‘이브의 사과’를 내놓았다. 이강우 작가는 명절을 앞두고 인파로 가득 찬 시장의 모습을 수차례 오가며 사진으로 포착했다. 상인들의 생활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을 담고자 했다.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이자 가수 씨엘의 아버지로 유명한 이기진 작가는 화려한 색채의 ‘로봇 감자 나르기’ 등 작품을 선보인다. 서용선 작가의 ‘수박’은 시장에서 판매되기 위해 라벨이 붙은 수박의 겉모습을 담았다. 서 작가의 ‘마산정물’은 2016년 이곳 시장에서 머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을 때 그린 작품이다. 마산청과시장은 2016년부터 예술가가 머물며 작업하는 레지던시를 운영하고, 전시회도 열고 있다. 전시는 2019년까지 열렸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으로 중단됐다가 올해 다시 시작됐다. 지역에서 보기 드문 전시를 이어오는 데에는 안성진 대표의 노력이 있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서울대사범대부설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가업을 이어받은 안 대표는 “백남준이 만든 사카모토 류이치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예술에 빠져들었다”며 “경영에 창의성이 중요해지고 있는 만큼 예술을 가까이하며 영감을 얻으려 한다”고 했다. 7월 1일까지.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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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의 역사 들춘 거장… ‘잿빛으로 변하는 금빛 들판’ 작품 꺼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빛이 바랜 금빛의 들판 한가운데 검은 공터가 펼쳐져 있다. 이 공터의 안에는 불에 그슬린 지푸라기가 타다 남은 머리카락처럼 납작하게 붙어 있다. 가장자리에는 가느다란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 마치 남은 금빛 들판도 조금씩 천천히 삼킬 듯이…. 독일 출신의 현대미술 거장 안젤름 키퍼(78)가 1981년 그린 작품 ‘너의 잿빛 머리칼, 슐라미트’(슐라미트)가 갤러리 거고지언 홍콩에서 처음 공개됐다. 거고지언 홍콩은 8월 5일까지 키퍼의 개인전 ‘hortus conclusus(닫힌 정원)’를 열고 있다. 키퍼가 홍콩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것은 2012년 이후 11년 만이다.● 독일의 어두운 역사 들춘 ‘슐라미트’ 거고지언 홍콩에서 지난달 30일 만난 닉 시무노비치 거고지언 홍콩 시니어 디렉터는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들을 프랑스 파리 근교 크루아시쉬르센에 있는 작업실에 직접 찾아가 키퍼와 함께 선정했다”고 말했다. 갤러리에는 키퍼의 대형 작품 8점이 걸려 있었다. 그중 ‘슐라미트’는 아시아 갤러리 전시에서 보기 힘들었던 1980년대 작품이다. 그는 “키퍼가 이번 전시를 위해 슐라미트를 출품하기로 하면서 이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슐라미트’는 키퍼가 루마니아 출신 시인 파울 첼란(1920∼1970)의 시 ‘죽음의 푸가’에서 영감을 얻었다. 유대인 출신의 첼란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홀로코스트를 겪었다. ‘죽음의 푸가’는 강제 수용소 내 죽음의 공포와 불안을 표현한 작품으로, ‘전후 유럽 문학의 게르니카’로 불린다. 키퍼는 이 시를 인용해 독일의 어두운 역사를 주제로 한 작품을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점 제작해 왔다. ‘슐라미트’도 그중 하나다. 특히 ‘죽음의 푸가’에는 ‘너의 금빛 머리칼 마르가레테’, ‘너의 잿빛 머리칼 슐라미트’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금빛은 독일인, 잿빛은 유대인을 상징한다. 슐라미트는 유대인 여성들이 많이 쓰는 이름이다. 금빛 지푸라기에 불꽃이 일고, 이미 불에 타 잿빛으로 변한 지푸라기를 교차한 키퍼의 작품은 고통스러운 역사를 끄집어내 독일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슐라미트’도 그런 맥락에 놓인 작품이다.● 역설적 아름다움 담은 예술 세계키퍼의 예술은 어두운 역사를 고발하거나 단편적으로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숨은 이중성과 인간의 면모를 복합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는 역사, 예술, 철학, 과학 등 심층적 해석이 덧붙여지고 키퍼는 그것을 시각 언어로 종합한다. ‘슐라미트’에 금빛과 잿빛이 한데 뒤엉켜 묘사된 것처럼. 이번 전시에선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낫이 있는 밀밭’(2014년),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곰팡이를 주제로 한 ‘Ignis Sacer(성 안토니오의 불·2016년)’도 볼 수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게르하르트 리히터, 게오르그 바젤리츠 등 독일 작가들과 함께 20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한다. 2007년에는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 조르주 브라크(1882∼1963)에 이어 생존 예술가로는 역사상 두 번째로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해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두칼레 궁전에 최초로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했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는 독일 영화감독 빔 벤더스가 키퍼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발표하기도 했다.홍콩=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3-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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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두아르 마네가 사랑한 삶의 순간들[영감 한 스푼]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우리가 살면서 행복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요?누구나 쉽게 갖지 못하는 걸 쟁취했을 때,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나를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일까요?그런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그런 때에 느끼는 감정은 행복함 보다는 우월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우월감은 이내 다른 사람들의 질투 어린 시선 속에 외로움으로 변하기도 하죠.행복하고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건 의외로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보다 일상의 잔잔한 순간에서 올 때가 있습니다.비가 내린 뒤 물이 가득해 찰랑이는 호수에 햇볕이 내리쬐는 걸 바라볼 때, 밤새 펑펑 내려 무릎까지 쌓인 눈을 처음으로 밟을 때,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좋아하는 사람과 광화문광장에서 캔맥주 한 잔을 들이킬 때….오늘은 19세기 인상파를 이끌었던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아름다운 삶의 한 순간에 관한 그림을 살펴보겠습니다.맥주 두 잔을 손에 든 여자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무엇인가요?바로 맥주 두 잔을 손에 들고 있는 여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대를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그녀만 관객을 향해 얼굴을 보이고 있죠. 거기에 그녀가 들고 있는 맥주잔의 반짝이는 질감과, 앞치마와 소매의 흰 천을 칠한 거친 붓터치가 더욱 시선을 끌어당깁니다.이 그림은 원래 마네가 19세기 중반 파리에서 모든 계층이 즐겨 찾았던 카페 겸 공연장인 ‘카페 콩세르’를 그리려고 한 것입니다. 마네가 1870년 새로 마련한 작업실이 이런 카페 콩세르에 가까웠는데요. 1872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883년까지 로컬 식당, 카페, 카페 콩세르를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합니다.그런데 이 작품은 원래 그렸던 그림의 오른쪽 절반입니다. 작업을 하던 마네가 작품을 절반으로 뚝 잘라버리기로 결심한 건데요. 그림을 자세히 보시면 수정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화면 중앙에 푸른 스모킹 양복을 입은 남성의 옷을 살펴볼까요. 오른쪽 부분에 직선처럼 색이 달라지는 부분이 있죠? 마네가 그림을 그리다 이 부분을 캔버스를 덧대어 추가한 영역입니다.즉 원래 작품에서는 맥주잔을 든 여자가 오른쪽 구석에 있었지만, 오른쪽 부분을 더하면서 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 것이죠.마네는 파리의 한 카페 콩세르에서 ‘맥주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여러 손님에게 재빠르게 술잔을 건네는’ 웨이트리스의 기술에 감탄하고 그녀를 그리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카페 콩세르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에게 포즈를 취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웨이트리스는 자신의 ‘보호자’가 함께 대동하고, 모델료를 받는 조건으로 그의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해주었습니다. 그림 속 푸른 스모킹 양복을 입은 남자가 그 보호자였다고 합니다. 마네는 왜 맥주잔을 든 여자를 이렇게 크고 멋지게 그린 걸까요?시간을 초월하는 몸짓이 그림에서 더 흥미로운 건 단순히 맥주잔을 그린 여자를 그렸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선 마네가 오른쪽 캔버스 조각을 더하면서, 여자가 든 맥주잔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면서 여자의 시선을 따라 관객의 시선은 오른쪽으로 흐르고, 흰 앞치마를 따라 남자의 뒷모습으로 넘어갑니다.그리고 이 남자가 들고 있는 파이프 담배를 따라가면 무대로 시선이 흐르죠. 그리고 그 사이에는 회색 모자를 쓴 남자, 머리 장식을 한 여자, 또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사람들로 분주한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여기에 무대 위 서 있는 무용수가 막 몸을 돌릴 것처럼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죠.즉 웨이트리스는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른손으로 테이블에 맥주잔 하나를 놓으면서, 왼손에 놓인 두 개의 맥주잔을 어디에 놓을지 쳐다보고 있죠.즐기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일에 몰두한 모습입니다. 마네는 그러한 웨이트리스의 모습에 감명을 받고, 그녀를 그림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그러한 몸짓을 마치 스냅샷 사진을 찍은 것처럼 남기기로 결정했습니다.이러한 결정의 배경을 단순하게 말한다면, ‘인상파 회화가 순간을 포착하는 사조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상파 이전의 회화는 왕의 대관식, 전쟁에서 승리한 순간, 신과 성인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 등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진 것만 그렸고, 인상파는 이것에 반기를 든 것이기 때문이죠.그러나 단순히 반기를 든 것을 넘어 마네는 이런 삶의 몰두하는 순간 속에 아름다움과 불멸이 있다고 믿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왕관과 권위와 명예, 이런 것들은 죽음과 함께 스러지는 것이며, 생존을 위해 동물적 감각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몸짓에서 마네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이죠.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도 비슷한 대목이 등장합니다. 불멸은 작가가 우연히 본 60대 여성의 몸짓에서 시작합니다. ‘그 몸짓 덕택에,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매력의 정수가 촌각의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감동했다. 그 때 나의 뇌리에 아녜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그리고 이 독특한 몸짓 속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엮어가며 소설은 전개되죠. 그러면서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구구절절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순간 뇌리에 강렬하게 박힌 이미지인가를 탐구합니다.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불멸을 꿈꾸지만 언젠가는 끝을 맞이합니다.그런 가운데 영원히 남겨지는 것은 살아있는 순간 함께했던 찰나의 기억들이라는 것.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이미지라는 것.마네는 그런 솔직하고 현실적인 인생의 순간들을 캔버스에 아름답게 남기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마네의 작품 ‘카페 콩세르의 한 구석’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전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

    • 2023-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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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제는 뉴노멀… 유연근무를 위한 지침서

    팬데믹 기간 동안 미국인의 42%는 원격 근무를 했다. 그간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업무를 하는 것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원격 근무의 실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 때문에 많은 직장인들은 일과 생활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외출도 못 하는 상태에 놓이면서 오히려 집이 아닌 ‘사무실에서 갇혀 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두 저자는 팬데믹 이전부터 원격 근무 가능성을 시험했다. 2017년 사무실이 있었던 뉴욕 브루클린을 뒤로하고 미국 서북부 몬태나주에 정착해 재택 근무를 했다. 그 결과 원하는 시간대에 일을 할 수 있는 유연성은 얻었지만, 업무량은 더 많아졌다고 회고한다. 일터의 배경이 좀 더 아름다워졌을 뿐 뉴욕에서 했던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현실적 선택지가 되어버린 재택 근무를 유용하고 효과적으로 만들 방법을 탐구한다. 사무실 근로자, 관리자, 경영자, 연구자, 컨설턴트를 인터뷰하고 학계 연구 결과와 다양한 회사의 사례도 참고했다. 이를 통해 재택 근무, 원격 근무, 하이브리드 근무 등 유연 근무제의 현실과 가능성, 장점을 파헤쳤다. 그 결과 유연 근무를 위해서는 업무 유연성, 생산성, 효율성에 대한 경영자의 태도와 사고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과거의 노동 유연화는 그 혜택이 전부 회사의 몫으로 돌아갔지만, 2020년대에는 꼭 해야 할 업무와 그렇지 않은 것을 따져보고 그 선택지를 근로자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 차원에서 업무와 일상을 구별하는 튼튼한 ‘가드레일’을 설치하고, 유연근무 관련 담당자를 배치하며, 효율적인 협업 툴을 활용해 직원들의 업무 시간을 줄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누군가가 집안일을 대신해 줄 수 있는 남성을 전제로 한 오전 9시∼오후 6시 근무 형태가 아니라, 여성 등 양육자도 오전에 아이를 보고 한낮과 저녁 시간 이후에는 일을 할 수 있는 등 다양한 구성원을 배려하는 회사가 앞으로는 업무 효율을 달성하고 이익을 낼 수 있다는 것. 창의성과 다양성이 중요한 미래에 유연한 근무를 위한 장기 투자에 나서라고 제안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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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긍정 에너지가 사회 변화시킨다”… 30대 韓여성 3인 기획전

    “우리 사회는 폭력, 파괴 등 부정적인 것은 잘 묘사하지만 기쁨과 긍정적 에너지를 논하는 것은 어색해합니다. 기쁨은 재미, 행복과는 또 다른 좀 더 복잡한 개념이죠.”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즐겁게! 기쁘게!’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추스 마르티네스의 설명이다. 스위스 북서부응용과학대(FHNW)의 아트인스티튜트 학장인 그는 스위스 작가 하이디 부허(1926∼1993) 전문가로, 부허의 회고전과 맞물려 한국의 젊은 여성 작가를 초청한 기획전을 만들었다. 기쁨을 전면에 내세운 전시의 주인공은 박론디, 박보마, 우한나 작가다. 모두 30대 여성인 이 작가들에 대해 마르티네스는 “오롯이 변화해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변신’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친밀함과 긍정의 에너지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박보마의 ‘결혼식의 영혼’은 헝클어지고 무너진 버진 로드를 형상화했다. “아무리 뻔한 결혼식이라도 참석하면 눈물이 나는 경험이 신기했다”는 작가는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온 의례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는다. 마르티네스는 “남녀의 결혼식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예술가와 사회 등 다양한 것들의 결합으로 의미가 확장될 수 있다”고 했다. 우한나는 천을 주재료로 여성의 신체 기관을 모티프로 한 조각 작품 ‘블리딩7’, ‘젖과 꿀―3’을 선보인다. 산뜻한 색채의 거대한 조각들은 숨기거나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졌던 신체를 전면으로, 부드럽지만 강하게 내세운다. 가로로 긴 캔버스에 달리는 말과 그 위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그린 박론디의 회화 ‘나는 지치지 않아. ∼생각했다’는 노동에 잠식되면서도 강박적으로 일하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담았다. 이 회화 옆에는 손목시계를 올려놓은 ‘반복하는 Y2K’를 뒀다. 두 작품을 통해 때가 되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는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고찰한다. 25일까지. 5000∼1만 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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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장 넘어 아시아 미술 중심지 꿈꾸는 홍콩[영감 한 스푼]

    홍콩은 아트페어와 글로벌 갤러리, 경매까지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심지로 여겨집니다. 수년 전 아트페어 취재차 홍콩을 방문했을 때 정작 좋은 미술품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꽤 당황한 기억도 있습니다. 최근 홍콩을 가보니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품을 볼 수 있는 ‘홍콩고궁문화박물관’과 현대미술관인 ‘M+’가 시주룽(西九龍)문화지구에 문을 열었습니다. 시주룽문화지구는 홍콩을 아시아의 문화 허브로 만들겠다는 야심 아래 2000년대 초반부터 개발이 시작된 곳입니다. 최근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며 새로운 관광지로 떠올랐습니다. 이러한 홍콩의 분위기에 대해 현장에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 출신 큐레이터인 정도련 M+ 부관장, 그리고 백남준아트센터의 첫 번째 학예실장을 지냈던 토비아스 베르거 타이쿤 큐레이터입니다.“M+, 아시아의 첫 글로벌 시각 문화 뮤지엄” 정도련 부관장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 한국인 최초로 뉴욕 현대미술관(MoMA) 큐레이터로 일했고, 10년 전부터 M+에 합류해 준비부터 개관까지 함께했습니다. 정 부관장은 M+에 대해 “시각 미술뿐 아니라 건축·디자인, 영상 등 세 분야를 다룬다는 점에서 아시아 최초의 시각 문화를 다루는 글로벌 미술관”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직접 찾은 M+ 미술관은 영국 테이트모던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헤어초크&드뫼롱’이 맡았는데 인상적인 전시 공간이 돋보였습니다. 그에게 소장품, 전시 기획, 프로그램 중 M+가 중점을 두는 부분을 묻자 “다 중요하지만 역시 소장품이 기본”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M+는 지금 이곳이 황무지였던 2012년부터 소장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1970년대 중후반부터 최근까지 중국 현대미술의 태동과 발전의 궤적을 보여주는 울리 지크(중국 현대미술을 세계에 소개한 것으로 유명한 스위스 출신 컬렉터) 컬렉션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각 문화’에 관한 미술관이기 때문에 홍콩 영화 황금기의 대중문화와 관련된 것도 수집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만 특정 국가나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는 홍콩에서 시작해 중국 전체를 보고, 그 후 동북아, 동남아, 남아시아와 서아시아까지 넓게 퍼져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M+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한국인으로 홍콩 미술관을 이끌게 된 사연도 궁금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미술사 개론 수업을 들었다가 빠져들었습니다. “어릴 때 그림에 소질이 있어 ‘예술고등학교에 가라’는 말도 들었죠. 그러다 미술사 수업에서 ‘이미지를 언어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마술처럼 느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학자의 길이 외롭다고 느끼던 차에 미술관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되면서 큐레이터의 길을 갑니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워커아트센터, MoMA를 거쳐 M+까지 오게 된 것이죠. 그는 글로벌 미술계로 진출하고 싶은 젊은 예술가와 큐레이터에게 “중요한 기관들의 움직임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또 개인의 커리어를 넘어 넓은 시야로 좋은 프로젝트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감옥을 개조한 미술관, 타이쿤다음으로 찾은 장소는 문을 연 지 5년 된 복합문화공간 ‘타이쿤’이었습니다. 홍콩 센트럴에 위치한 이 장소는 옛 경찰서와 교도소를 리모델링한 독특한 곳입니다. 타이쿤의 현대미술 전시장에서는 호주 출신 작가 퍼트리샤 파치니니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베르거를 만났습니다. 베르거는 개관 전 M+에서도 일했고, 홍콩의 유명한 비영리 예술 공간인 ‘패라 사이트’에도 있었습니다. 경매장과 갤러리의 예쁘고 얌전한 작품을 보다 타이쿤에서 파치니니의 조각을 보니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감각을 자아내는 조각들은 독특한 시각 언어로 ‘모성’과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전시가 열리는 장소가 과거에는 여성 감옥이었다는 점도 특별했죠. 베르거는 5년간 1200만 명이 타이쿤을 찾았고 대부분이 10, 20대 젊은 관객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공간이 주는 특별함, 빌딩 숲으로 빽빽한 홍콩에 몇 안 되는 야외 공간이 있다는 점, 문화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했습니다. 홍콩의 미술 기관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베르거는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일본 도쿄 현대미술관 등 나라마다 여러 기관이 있지만 국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며 “M+를 비롯한 홍콩의 기관들은 향후 아시아 내 여러 지역과 연결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국 미술계를 잘 알고 있는 그는 “1990년대부터 좋은 전시를 선보인 아트선재센터처럼 되는 것이 타이쿤의 목표”라며 “문화적으로 봐야 할 차세대 도시를 누군가 물으면 서울이라고 답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은 ‘대안공간 루프’를 비롯한 비영리 공간에 대한 지원이 오래전부터 활발했다”며 “공간 중심인 홍콩보다 한국이 더 시스템을 잘 만들어 가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금요일 오전 7시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하시면 이메일로 먼저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 20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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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파엘로부터 마네까지… 서양 미술사 명작들 한자리에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귀에는 흰 꽃을 꽂은 소년이 아픈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다. 화들짝 놀란 소년의 왼손은 허공을 움켜쥐고, 갑자기 움직인 듯 옷자락도 휘날린다. 고통스러운 듯 구부러진 소년의 오른손 세 번째 손가락에는 도마뱀이 매달려 있다. 과일을 탐내다 뜻밖의 공격을 받은 순간을 포착한 카라바조(1571∼1610)의 명작 ‘도마뱀에 물린 소년’이다.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최고의 거장 카라바조뿐 아니라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터너, 마네, 모네, 고갱 등 서양 미술사에서 중요한 거장들의 작품이 한국을 찾았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일 개막한 특별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을 통해서다. 이 전시는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명화를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 르네상스, 바로크 명화 국내 최초 공개영국 내셔널갤러리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거장부터 인상주의까지, 13세기∼20세기 초 유럽 회화의 명작들을 소장한 기관이다. 전시장에서 1일 만난 크리스틴 라이딩 내셔널갤러리 학예실장은 “우리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을 엄선해 ‘내셔널갤러리 미니어처’를 만들고자 노력했다”며 “미술사의 중요한 흐름, 중요한 예술가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내셔널갤러리를 그대로 보여주려 했다는 말처럼 전시는 한 지역이나 사조에 국한하지 않고, 르네상스부터 인상주의까지 다양한 시대의 주요 작품들을 52점에 압축적으로 담았다. 특히 국내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 명화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어 애호가들은 물론이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도 의미 있는 교육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르네상스 시기 회화로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성 제노비오의 세 가지 기적’, 라파엘로의 대표적 스타일을 볼 수 있는 ‘성모자와 세례 요한’, 조반니 벨리니의 ‘성모자’, 야코포 틴토레토의 초상화 ‘빈첸초 모로시니’ 등이 있다. ‘도마뱀에 물린 소년’은 바로크 거장 카라바조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 순간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안정과 조화를 강조했던 르네상스와 달리, 종교개혁과 맞물려 감정을 폭발시키고 극적 효과를 강조한 카라바조의 회화는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한 소년의 표정, 몸짓과 함께 정물의 세부를 훌륭하게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신에서 사람으로…서양 미술 흐름 보여전체 전시는 1부 ‘르네상스, 사람 곁으로 온 신’, 2부 ‘분열된 교회, 서로 다른 길’, 3부 ‘새로운 시대, 나에 대한 관심’, 4부 ‘인상주의, 빛나는 순간’으로 구성된다. 각각 르네상스, 종교개혁 이후 예술, 18∼19세기 작품, 인상주의를 다룬다. 서양 미술의 흐름이 종교와 신에 대한 관심에서 사람으로 흘러간 과정을 보여준다. 덕분에 유명 사조는 물론이고 국내에선 다소 생소한 미술적 경향도 볼 수 있다. 메인더르프 호베마의 풍경화 ‘작은 집이 있는 숲 풍경’ 등 17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유행한 풍경화와 일상 풍속화, 안토니 반 다이크의 ‘존 스튜어트와 버나드 스튜어트 형제’ 등 18세기 영국 상류층에서 유럽 여행이 유행했을 때 귀족들이 의뢰한 초상화도 선보인다. 전시의 대미는 인상주의 작품이 마무리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카페 콩세르의 한구석’, 빈센트 반 고흐의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 클로드 모네의 ‘붓꽃’ 등을 볼 수 있다. 10월 9일까지. 7000∼1만8000원.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3-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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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장 넘어 아시아 미술 중심지 꿈꾸는 홍콩[영감 한 스푼]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홍콩은 아트페어와 갤러리, 그리고 경매까지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심지로 생각되곤 합니다. 수 년 전 아트페어 취재를 위해 홍콩을 방문했다가, 정작 좋은 미술품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은 없다는 걸 알고 당황한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홍콩을 가보니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품을 볼 수 있는 ‘홍콩고궁문화박물관’과 현대미술관인 ‘M+’가 서구룡문화지구에 새롭게 문을 열었습니다. 서구룡문화지구는 홍콩을 아시아의 문화적 허브로 만들겠다는 야심으로 2000년대 초반부터 개발이 시작된 곳입니다. 최근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관광지로 떠올랐습니다. 이러한 홍콩의 새로운 분위기에 대해 두 미술계 전문가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 분 다 한국 미술과 인연이 있습니다. 한국 출신 큐레이터인 정도련 M+ 부관장, 그리고 백남준아트센터의 첫 번째 학예실장을 지냈던 토비어스 베르거 타이쿤 큐레이터입니다.“M+, 아시아의 첫 글로벌 뮤지엄” 정도련 M+ 부관장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한국인 최초 뉴욕 현대미술관(MoMA) 큐레이터로 일했고, 10년 전부터 M+에 합류해 준비 과정부터 개관까지 맞았습니다. 정 부관장은 M+가 “시각 미술뿐 아니라 건축·디자인, 영상 등 세 분야를 다룬다는 점에서 아시아 최초의 현대 시각 문화를 다루는 글로벌 미술관”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직접 찾은 M+ 미술관은 영국 테이트 모던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헤르조그&드뫼롱이 맡아, 인상적인 전시 공간이 돋보였습니다.그에게 소장품, 전시 기획, 프로그램 중 M+가 중점을 두는 부분을 묻자 “다 중요하지만 역시 소장품이 기본”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M+는 지금 이곳이 건물도 없는 황무지였던 2012년부터 소장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1970년대 중후반부터 최근까지 중국 현대미술의 태동과 발전의 궤적을 보여주는 울리 지그 컬렉션이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각 문화’에 관한 미술관이기 때문에, 홍콩 영화 황금기의 대중문화와 관련된 것도 수집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만 특정 국가나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향후에는 홍콩에서 시작해 중국 전체를 보고, 그 후 동북아, 동남아, 남아시아와 서아시아까지 넓게 퍼져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M+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한국인으로 홍콩 미술관을 이끌게 된 사연도 궁금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미술사 개론’ 수업을 들었다가 빠져들었습니다.“어릴 때 그림에 소질이 있어 ‘예고에 가라’는 말도 듣곤 했어요. 그러다 미술사 수업에서 ‘이미지를 언어로 바꿀 수 있다’는 게 마술처럼 느껴졌죠.” 그러나 아시아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학자의 길이 외롭다고 느끼던 차에 우연히 미술관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되면서 큐레이터의 길을 가게 됩니다.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워커아트센터, MoMA를 거쳐 M+까지 오게 된 것이죠. 그는 글로벌 미술계로 진출하고 싶은 젊은 예술가·큐레이터들에게 “중요한 기관들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또 글로벌 커뮤니티에서 좋은 프로젝트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해주었습니다.감옥을 개조한 미술관, 타이쿤다음으로 찾은 장소는 문을 연지 5년 된 복합문화공간 ‘타이 쿤’이었습니다. 홍콩 센트럴에 위치한 이 장소는 옛 경찰서와 교도소를 리모델링한 독특한 곳입니다. 이곳의 리모델링 역시 헤르조그&드뫼롱이 맡았습니다. 타이 쿤의 현대미술 전시장에는 호주 출신 작가 패트리샤 파치니니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토비어스 베르거를 만났습니다. 베르거는 개관 전 M+에서도 일했고, 홍콩의 유명한 비영리 예술 공간인 ‘파라 사이트’에도 있었습니다. 경매장과 갤러리의 예쁘고 얌전한 작품을 보다, 타이 쿤에서 파치니니의 조각을 보니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어딘가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감각을 자아내는 조각들은 독특한 시각 언어로 ‘모성’과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전시가 열리는 장소가 과거에는 여성 감옥이었다는 점도 특별했죠. 베르거는 지난 5년 간 1200만 명이 타이쿤을 찾았고, 대부분이 10~20대 젊은 관객이라고 했습니다. 우선은 감옥과 경찰서였던 공간이 주는 특별함, 그리고 빌딩숲으로 빽빽한 홍콩에 몇 안 되는 야외 공간이 있다는 점, 또 문화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했습니다. 홍콩의 미술 기관에 대해서도 물었는데요. 베르거는 “한국에 국립현대미술관, 일본 도쿄 현대미술관 등 여러 기관이 있지만 국가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며 “M+를 비롯한 홍콩의 기관들은 향후 아시아 내 여러 지역과 연결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습니다.다만 한국 미술계에도 경험이 많고 사정을 잘 알고 있는 그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좋은 전시를 선보인 아트선재센터처럼 되는 것이 타이쿤의 목표”라며 “문화적으로 봐야할 차세대 도시를 누군가 물으면 서울이라고 답한다”고 했습니다.이유에 대해 묻자 “한국에서는 ‘대안공간 루프’를 비롯한 비영리 공간에 대한 지원이 오래 전부터 활발하게 이어졌다”며 “공간 중심인 홍콩보다 한국이 더 시스템을 잘 만들어 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뉴스레터 구독 신청 김민기자 kimmin@donga.com}

    • 20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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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시장과 창작’…제9회 미술사학대회 3일 개최

    한국미술사학회는 3일 오전 10시 반부터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대강당에서 제9회 미술사학대회 ‘미술시장과 창작’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학술대회는 서양미술사학회, 한국미술사교육학회, 한국미술이론학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한국연구재단과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후원으로 열린다. 이번 학술대회는 미술작품의 제작과 소비에서 역할이 점차 커지고 있는 미술시장에 주목한다. 1부에서는 서양 고대부터 중국 근대까지 미술시장이 창작에 미친 영향을 다룬 논문 4편이 발표된다. 주제는 ‘아테네 도기화와 고전기 그리스 도기 시장’(조은정·목포대),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 사회적, 종교적, 심미적 요구를 충족시킨 수완가’(한유나·서울대), ‘불석제 불상의 조성과 이운을 통해 본 조선후기 불상 조성의 일면(유대호·조계종 총무원), 19세기 상하이 미술시장과 창작의 대중성 모색(이희정·명지대) 등이다. 2부에서는 20세기 후반부터 2020년까지 한국과 홍콩 아트페어에 관한 주제 발표 4편이 이어진다. ‘한국 현대미술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한 예술성의 변화와 확장 사례 연구’(김민아·앨라배마대), ‘아시아의 미술시장과 수묵화의 당대성’(문정희·국립타이난예술대), ‘경매 재거래로 본 이우환의 작품값 경향’(조상인·서울경제), ‘미술작품에서 미술콘텐츠로: 미술시장과 미술산업’(장수희·덕성여대) 등이다.   한국미술사학회는 “이번 학술대회는 동서고금 미술시장이 작품 창작이나 생산에 미친 양상을 살펴보며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기 위한 행사”라며 “향후 미술시장과 관련한 제도나 정책을 논의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김민기자 kimmin@donga.com}

    •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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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리스티 ‘하이브리드 경매’… 29개국 760만명 ‘생중계 참여’

    “4650만(홍콩달러), 4750만, 4800만!” 지난달 28일 홍콩 완차이구 하버로드 컨벤션센터의 크리스티 경매장. 일본 작가 구사마 야요이의 회화 작품 ‘꽃’을 두고 치열한 경합이 벌어지자 장내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작품은 하나지만 원하는 사람은 여럿. 높아진 가격에도 50만, 100만 홍콩달러씩 호가가 계속 올랐다. 경매사는 객석을 향해 “저녁 약속이 있다면 (늦어져서) 미안하다”고 농담을 건넸다. 결국 ‘꽃’은 5845만5000홍콩달러(약 98억 원)에 주인을 찾았다.● 바스키아-쿤스 블루칩 최고가 주도지난달 28, 29일 열린 크리스티홍콩의 ‘20·21세기 미술 경매’에서는 구사마에 대한 아시아의 여전한 사랑이 돋보였다. 경매에 나온 구사마의 작품은 모두 낙찰돼 총 2억1600만 홍콩달러(약 365억 원)를 기록했다. 20·21세기 미술 경매 낙찰가 총액은 12억 홍콩달러(약 2026억 원)였다. 지난해 5월(18억 홍콩달러)에 비하면 다소 주춤한 수준이다. 지난해는 팬데믹과 경기 부양으로 미술 시장이 달아올랐으며, 이 때 기록은 크리스티 아시아 역사상 두 번째로 높았다.이번 경매에서 최고가 순위를 이끈 건 ‘서양 블루칩 작품’이었다. 장미셸 바스키아의 ‘블랙’은 6260만 홍콩달러(약 105억 원)에 낙찰됐다. 이어 제프 쿤스의 ‘성스러운 하트’(6087만5000홍콩달러·약 102억 원),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의 산책로’(5119만5000홍콩달러·약 86억 원) 순이었다. 크리스티안 알부 20·21세기 미술 공동 대표는 “아시아 경매에서 처음 선을 보인 쿤스와 마그리트 작품이 모두 아시아 컬렉터에게 팔렸다”고 밝혔다. ● 온·오프라인 경매 결합 실험이번 경매는 홍콩이 팬데믹 이후 올해 3월 국경을 완전히 개방하고 나서 열린 것이다. 프랜시스 벨린 크리스티 아시아태평양 총괄 사장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모델을 본격적으로 실험하게 됐다”고 말했다. 현장에서는 온라인 경매 참가자를 위한 세심한 연출이 눈길을 끌었다. 경매사는 물론이고 전화 응찰을 위한 좌석에도 방송국 스튜디오를 연상케 하는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생중계에 나올 것을 대비해 남성 직원도 화장을 하라거나, 카메라가 비추면 미소를 지으라는 지침도 내려온다고 한다. 이번 경매의 온라인 생중계는 29개국에서 760만 명이 시청했다. 경매 신규 구매자 중 절반은 밀레니얼세대(1981∼1996년생)컬렉터였다. 중국 본토 구매자도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 두 배로 늘었다. 출품작 전시 공간에는 오프라인 고객을 위해 쿤스와 구사마의 조각을 비롯해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이 미술관처럼 화려하게 배치됐다. 이학준 크리스티코리아 대표는 “작품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함께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큐레이팅에도 많은 공을 들인다”고 말했다. 이번 경매에서 한국 작품으로는 미국 컬렉터 제럴드 파인버그가 소장했던 이우환의 ‘다이얼로그’가 관심을 모았다. 이 작품은 경합 끝에 1126만5000달러(약 19억 원)에 판매돼 ‘다이얼로그’ 시리즈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 박서보의 ‘묘법 No. 15-76’(약 13억 원), 김창열의 ‘물방울’(8억5000만 원), 이우환의 ‘조응’(5억7000만 원), 정상화의 ‘무제’(1억6000만 원)도 낙찰됐다.“사람-자본-물건 흐름 자유로운 홍콩에 내년 자체 경매장” 프랜시스 벨린 크리스티 아태총괄“亞구매자들 제네바 파리 뉴욕대신홍콩서 작품 보고 살수 있게 할 것” 크리스티, 필립스, 소더비 등 세계 3대 경매사는 홍콩의 정치 불안정과 코로나19로 인한 봉쇄에도 불구하고 최근 홍콩에서 사옥을 확장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크리스티는 내년 여름 홍콩 센트럴 지역에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더 헨더슨’ 타워로 옮겨 4개 층, 4645㎡(약 1405평) 공간을 이용할 예정이다. 그간 홍콩 컨벤션센터를 며칠간 임대해 경매를 열었는데 이제는 자체 건물에서 경매를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프랜시스 벨린 크리스티 아시아태평양 총괄사장을 28일 만나 사옥을 확장 이전하는 이유에 대해 묻자 “아시아 구매자들이 쓰는 금액의 절반 이상이 아시아 밖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지난해 아시아 구매자가 쓴 돈이 18억 달러라면, 그중 절반은 제네바 런던 파리 뉴욕에서 사용했다”며 “그 작품들을 아예 홍콩으로 가져와 언제든 보고 사고팔 수 있도록 하려 한다”고 했다. 크리스티홍콩은 2019년부터 뉴욕 런던 파리처럼 홍콩에 자체 경매장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다만 코로나19 등으로 일정에 변동이 생겼다. 벨린 사장은 “홍콩의 관습에 따라 풍수지리 전문가도 불러 사옥 장소를 보여주었고 아주 좋은 위치라고 확인받았다”며 “평면도를 보고 나의 자리가 어디인지까지도 세세하게 봐주었다”며 웃었다. 그에게 홍콩의 이점에 대해 묻자 자유로운 흐름과 두터운 컬렉터 층을 꼽았다. “홍콩에서는 사람들의 이동은 물론이고 자본과 물건의 흐름이 굉장히 자유롭습니다. 서구룡문화지구를 포함한 미술 생태계도 성장하고 있고요. 게다가 중국 광둥성, 홍콩, 마카오와 대만에 두터운 컬렉터 층이 있어 아시아 미술 시장을 공략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입니다.” 서울도 프리즈 아트페어를 유치하는 등 아시아의 미술 허브를 꿈꾸고 있다. 그는 서울 역시 홍콩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흐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서울도 여러 강점이 있지만 수입세와 부가가치세가 없는 상업 중심지를 찾기는 굉장히 힘듭니다. 뉴욕에서 월요일에 보낸 작품을 화요일 오후 홍콩 경매장에 전시하고, 목요일에 다시 뉴욕에 보내는 것을 홍콩에서는 최소한의 서류로 할 수 있죠. 홍콩은 자유항이니까요.”홍콩=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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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색이 기쁨을 의미했던 예술을 만나다[영감 한 스푼]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오늘은 그간 소개드렸던 예술과는 완전히 다른, 아주 독특한 지역의 예술을 준비했습니다. 바로 인도 북부 우다이푸르 지역의 18~19세기 회화입니다.종이에 그려진 이 그림들은 워싱턴 국립아시아미술관 새클러갤러리에서 특별 전시로 공개가 되었는데요. 보존을 위해 이번에 전시가 되면 몇 년 동안은 다시 밖으로 나오기 힘든 것들이라고 합니다.제가 전시 종료 2주 전 방문해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특별한 작품이어서 사진으로라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도 인도 예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큐레이터 투어를 통해 알게 된 이야기를 최대한 전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새로 살게 된 수도를 찬양하다 위 작품은 인도 북부 우다이푸르 지역에서 이전까지 그려진 것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회화입니다. 어떤 점이 다르냐면 첫 번째, 실제로 존재하는 도시를 그렸다는 점, 두 번째는 인물 중심이 아닌 풍경이라는 점입니다. 이전까지 이 지역에서는 종교적인 이야기를 묘사하는 그림이나, 지난주 살펴 봤던 다빈치의 작품 같은 초상화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에 보이는 그림은 사람은 아주 작게 그려져있고 마치 지도처럼 풍경이 잘 보이죠.위 그림은 호수 위에 왕이 만든 궁전을 아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궁전의 구조가 어떻게 됐는지 또 어떤 나무가 있었는지를 마치 기록하듯 사실적으로 표현했죠.그림을 크게 확대해서 보시면 궁전 속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물론, 물 속에 헤엄치는 물고기까지 자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그렇다면 왜 이 때부터 우다이푸르 지역의 왕족은 사실적인 그림을 주문하기 시작한 걸까요? 바로 이곳이 왕국의 새로운 수도였기 때문입니다.우다이푸르가 수도가 된 것은 16세기 입니다. 이곳은 과거 수도보다는 비가 불규칙하게 내렸지만 산이 있어 침략을 막기에 유용했습니다.왕국 사람들은 불리한 날씨를 극복하기 위해 호수와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최대한 저장했죠. 그리고 이 때 만든 호수 위에 하얀 성도 짓습니다. 그림 속 궁전이 바로 이 성이죠.왕과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이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물이 가득한, 건조한 북서부 인도의 오아시스가 되었습니다.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이곳 사람들은 풍족해진 수도의 아름다움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회색은 기쁨의 색 건조한 지역이었던 만큼 언제 비가 오느냐가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전시된 작품을 보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회색’이 우중충한 어둠이 아니라 아주 즐겁고 기쁜 감정을 나타내는 색이었다는 점입니다. 위 그림은 비가 마구 내리는 우기(몬순)에 왕이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비가 오기 때문에 하늘은 잔뜩 흐리고, 건조했던 지역이 검은 물로 가득 차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불편하거나 위험한 모습이 아니라, 아주 만족스럽고 흐뭇한 광경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까지 세세하게 그어 내려서 묘사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유난히 비가 풍족하게 내린 우기에는 왕을 찬양하고 축복하는 회화가 그려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색채라는 것이 문화와 지역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예로 서양 문화권에서는 노랑색을 두려움이나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도 있죠.감정을 공유하며 결속을 다지다그런데 이 때 우다이푸르의 왕족이 현실을 담은 그림을 그렸던 이유가 또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로 미학적 이유와 정치적 이유로 설명할 수 있는데요.첫 번째 미학적 이유는, 인도 예술의 역사와 관련이 됩니다. 인도의 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예술이 어떠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분위기’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봤다고 합니다.즉 종교에 관한 이야기나 인물이 아니라, 특정 지역의 지형과 색채를 더욱 현실적으로 반영하면서 이 때 회화는 그곳 사람들이 공유하는 분위기를 담게 됩니다.분위기뿐 아니라 그 지역에서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며 땅에 대해 갖는 끈끈한 연결고리를 인도에서는 ‘바바’(bhava)라고 합니다. 새 수도를 사람들이 사랑하게 만드는 것을 예술이 해 주고 있었던 것이죠.또 인도 철학자들은 안목이 있는 사람이 좋은 작품을 보면 ‘바바’를 느끼고, 더 나아가서는 최고의 미적 경험인 ‘라사’를 맛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작품에 완전히 몰입해 본질에 닿는 경험이 바로 ‘라사’이죠. 인도의 엘리트와 지성인들은 예술을 통해 이것을 경험하는 것을 가치있는 일로 생각했습니다.두 번째 이유는 당시 인도의 정치적 변화입니다. 18세기 북부 인도는 무굴 제국(1527~1857)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그들과 힘겨루기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우다이푸르 같은 지방 정부는 도시를 건설하고 예술을 움직여 새로운 동맹과 귀족들의 충성을 확보하려고 했죠.위 그림에서 묘사된 것은 왕과 귀족들이 형형 색색의 안료를 뿌리며 즐기는 ‘홀리 축제’의 장면입니다. 이렇게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도 유대 관계가 생겼겠죠. 그런데 축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이 축제를 궁정 화가가 그림으로 기록하고, 그림이 완성되면 참석자들은 궁전 내 갤러리로 모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왕과 귀족들이 한 자리에서 그림을 감상했던 것이죠. 행복했던 기억을 담은 그림을 다시 한 번 보면서 참석자들은 감정을 되새깁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을 글로 담아 그림 뒷면에 기록했다고 합니다.이런 모습은 사실 지금 현대인의 일상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도 즐거운 기억을 사진과 ‘인증샷’으로 남기고 되새김질을 하니까 말이죠. 물론 이 때 그림은 아주 값비싼 것이었지만 말입니다.왕과 주변 사람들을 끈끈하게 연결해주는 이미지의 힘을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뉴스레터 구독 신청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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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행용 캐리어로 옮겨진 다빈치 작품의 사연[영감 한 스푼]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오늘은 미국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미술관을 둘러보던 중 유난히 관객이 많은 방을 발견했는데요. 그곳 한 가운데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가 별도의 유리장에 전시되어 앞 뒷면을 모두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이 작품은 미국에서 공개적으로 전시된 유일한 다빈치의 그림입니다. 즉 미국에서 다빈치를 보려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린다는 이야기죠. 어떤 작품이고 또 어떤 스토리가 있는지 들려드리겠습니다.문밖 자연으로 나온 여인이 작품은 그려진 당시의 관점에서 두 가지 차별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옆모습이 아닌 측면을 비스듬히 보고 있는 여인의 자세이고, 두 번째는 그 배경이 실내가 아닌 야외라는 점입니다.이때 보통 초상화는 완전히 측면에서 본 것이 흔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치 인물이 내 앞에 앉아있는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 더 극명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성이 혼자 외출하는 것이 드문 시기였는데, 드넓은 자연 속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가 됐죠. 도대체 그림의 주인공이 누구길래 이런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걸까요?그림 속 여인은 피렌체의 부유한 은행가의 딸 지네브라 데 벤치(1457~1521)로 추정됩니다. 이 그림은 그녀가 16세일 무렵 그려졌고, 당시 다빈치는 22세였습니다. 다빈치 역시 아직 젊은, 베로키오 공방의 조수이자 견습생에서 별도의 주문을 받기 시작할 때였죠. 그럼에도 입체적인 얼굴과 머리칼, 또 나무와 자연의 사실적 묘사가 다빈치 특유의 기교를 보여줍니다.그럼 다빈치는 왜 지네브라의 초상을 그렸을까? 답은 간단합니다. 이때 대부분의 화가는 의뢰받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작품 역시 인생의 특별한 때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 주문되었습니다.우리가 지금도 생일이나 졸업, 결혼 등 중요한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 이 그림은 지네브라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남긴 ‘셀피’와도 같습니다.연구에 따르면 이 작품은 지네브라의 약혼을 축하하며 그려졌습니다. 지네브라의 곱슬머리 뒤로 펼쳐진 나무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요. 당시 여성의 미덕을 상징했으며, 지네브라의 이름과도 발음이 비슷한 향나무(juniper)입니다.이 그림의 뒷면에는 ‘아름다움이 미덕을 빛낸다’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덕을 갖춘 지네브라가 아름답기까지 해 빛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문구를 감싸고 있는 나뭇가지는 월계수와 종려나무인데요. 이 두 나무는 당시 피렌체 주재 베네치아 외교관인 베르나르도 벰보의 상징이라고 합니다.데 벤치와 벰보가 시를 편지로 주고받은 기록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이에 따라 그림 속에는 두 사람의 우정도 담겨 있다고 연구자들은 봅니다. 데 벤치에 대한 애정으로 그림을 다 빈치에게 의뢰한 사람이 벰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이 작품은 즉 아름답고 지적인 데 벤치의 약혼을 축하하는 외교관의 선물이었던 것이죠. 다 빈치는 그런 그녀의 지성을 과감한 구도와 풍경으로 돋보이게 만들고 있습니다.여행 가방으로 실어 온 작품작품의 내용만큼이나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이 미국으로 오게 되기까지의 스토리입니다. 이 미술관의 큐레이터 데이비드 앨런 브라운이 2018년 현지 언론에 밝힌 바에 따르면, 이 작품은 미술관이 1967년 구매해 무려 ‘아메리칸 투어리스터’ 캐리어에 담아 가져왔다고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그 이유는 작품을 최대한 조용히 가져오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원래 유럽 리히텐슈타인의 왕족이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다빈치의 작품, 특히 유화는 세계적으로 몇 점 없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50년대에 발견된 ‘살바토르 문디’가 2017년 경매에서 5000억 원에 팔려 세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죠.내셔널 갤러리는 이 작품을 약 500만 달러(약 60억 원)에 구매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재정난을 맞이했던 리히텐슈타인 왕가가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빈치의 그림을 팔았다고 하네요. 오랫동안 이 작품에 눈독을 들였던 내셔널갤러리가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왕족이 돈이 부족해 판 그림을 떠들썩하게 가져올 수는 없었습니다. 미술관은 이 작품을 캐리어에 담아 비행기로 가져옵니다. 물론 화물칸에 싣는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캐리어를 위한 별도의 비행가 좌석을 구매했고, 그 옆을 큐레이터가 지키며 그림을 조용히 모셔 왔다고 전해집니다.그리고 이때 미술관의 결정은 다빈치를 보기 위해 수백만 명의 관객이 찾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미술관을 짓는 것은 쉽지만, 좋은 소장품과 전시로 사람들이 오게 만드는 것은 단시간에 이뤄지는 일이 아닙니다.우리는 미술관에서 어떤 작품을 보고 싶을까? 그것을 걸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뉴스레터 구독 신청 김민기자 kimmin@donga.com}

    • 20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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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들이 기획한 엄마의 첫 개인전… 푸근한 일러스트 눈길

    서울 종로구 초이앤초이 갤러리에서 영국 화가 캐서린 안홀트의 개인전 ‘사랑, 인생, 상실’이 열린다. 이 전시는 2021년 개인전을 위해 한국을 찾은 화가 톰 안홀트가 최선희, 최진희 대표에게 “내가 존경하는 훌륭한 화가가 있다”며 자신의 어머니 캐서린을 소개하면서 시작됐다. 두 대표는 톰의 이야기를 듣고 직접 영국 데번의 작업실을 방문했고 작품에 반해 전시를 열기로 했다. 갤러리 1층에는 아들 톰의 정물화 4점과 엄마 캐서린의 작품이 마주 보고 걸려 있다. 전시 큐레이팅도 아들이 직접 맡아, 자신의 작품이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임을 이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그는 “캐서린의 작품은 푸딩처럼 따뜻하고 푸근하다”며 “그녀는 한없이 베풀 줄 아는 사람이기에 그림에서도 보는 이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캐서린은 몇 차례 그룹전에 참여한 적은 있지만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신 책 200여 권을 낸 유명 동화 작가인 남편 로렌스 안홀트의 책에 삽화를 그리며 협업해 왔다. 부부가 만든 그림책 ‘반 고흐와 해바라기 소년’은 2019년 창작 뮤지컬로 만들어져 한국에서 공연됐다. 전시에서 볼 수 있는 20여 점의 신작은 인상파 스타일의 일러스트다. 데번 시골길 풍경과 여행을 다니거나 미디어를 통해 본 사람들의 일상을 밝은 색채로 담았다.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담은 초상에서는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6월 24일까지.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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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박두진 시인의 화두 ‘내일의 너’… 화폭에 담은 아들

    박영하 개인전, 학고재 신관서 개막 박영하 화가의 개인전 ‘내일의 너’가 서울 종로구 학고재 신관에서 17일 개막했다. 박 작가는 박두진 시인(1916∼1998)의 삼남이다. 16일 기자간담회에서 박 작가는 “아버지의 삶을 통해 작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10년 만의 국내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회화 34점과 드로잉 8점 등 총 42점을 선보인다. 전시된 작품의 제목은 모두 ‘내일의 너’이다. 이는 부친이 던져준 화두로 영원히 새롭게 작업하라는 의미가 담겼다. 박 작가는 “예술가는 사회보다 한발 앞서야 하고, 이를 통해 회화의 본질을 고민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작품은 어두운 색조의 물감을 두껍게 올렸고 그 위로 붓이 지나간 자국이 드러나 질감이 두드러진다.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물감과 안료 분말을 섞어 색칠했다. 특정 사물을 묘사하기보다는 회화 자체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고 작가는 말했다.獨 샤이비츠 개인전도 본관서 열려 같은 날 학고재 본관에서는 독일 작가 토마스 샤이비츠의 개인전 ‘제니퍼 인 파라다이스’가 시작됐다. 회화 21점과 조각 2점을 선보이는 전시는 이 시대에 회화의 문법이 어떻게 구성되는지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제니퍼 인 파라다이스’는 컴퓨터 프로그램 포토샵에 관한 그림이다. 포토샵을 개발한 놀 형제가 만든 합성 사진을 변형한 회화로, 기하학적 형상과 수직·수평으로 가로지르는 선들이 구획을 나눈다. 작가는 포토샵의 등장으로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복사하고 붙여 넣으며, 형태를 변형할 수 있는 것이 시각 언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고민을 회화에 담았다. 전통적 미술사 속 이미지는 물론 만화, 대중매체, 게임, 그래픽 디자인 등 다양한 영역에서 소재를 차용한 것도 특징이다. 컴퓨터 게임에서 나올 법한 색채와 과거 미술 작품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녔던 토끼가 한 작품 안에 함께 있는(작품 ‘에픽 게임즈’) 식이다. 두 전시 모두 6월 17일까지. 무료.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3-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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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억 바나나 꿀꺽 서울대생 용서’… 논란으로 주목도 노린 예술가들[인사이드&인사이트]

    《지난달 27일 미술 기자들에게 단체 메일이 도착했다. ‘서울대에서 미학을 전공하는 제 지인이 리움미술관 카텔란의 작품을 먹었습니다’라는 내용과 함께 사진과 영상이 첨부돼 있었다. 주인공은 대학생 노현수 씨. 영상에서 그는 바나나를 은색 테이프로 벽에 붙여 만든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을 떼어내 먹고 있었다.노 씨의 행동은 여러 언론사에서 보도되면서 화제가 됐다. ‘창의적이지 않다’거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카텔란의 바나나가 관객의 먹잇감이 된 사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9년 미국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한 예술가가 ‘배가 고팠다’며 바나나를 먹어 언론의 관심을 받은 바 있다. 노 씨도 “아침을 안 먹고 와서 배가 고팠다”고 말했다.노 씨의 행동을 둘러싸고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인 것이 어떤 예술적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어떤 작업까지 예술이 될 수 있는지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바나나, 출발은 개념미술미술관 혹은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건드려서는 안 된다. 관객이 만져볼 수 있는 작품도 최근엔 등장하지만 극소수다. 그런데 작품을 만지는 것도 모자라 먹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바나나 자체가 아니라 작가가 그것을 붙이기로 한 아이디어가 중요한 것이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 대목에서 마르셀 뒤샹의 작품 ‘큰 유리’를 떠올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유리 패널 두 개로 구성된 이 작품은 1927년 전시를 위해 운송되던 중 충격을 받아 금이 가고 말았다. 조각 작품이 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고였는데, 뒤샹은 오히려 “작품이 더 좋아졌다”며 그대로 전시했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작가의 아이디어가 작품을 결정짓는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이렇게 세상이 정한 가치가 아니라 나의 기준과 논리에서 중요한 것도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 바로 ‘개념미술’이다. 뒤샹이 남성용 소변기를 미술관에 놓고 전시한 작품 ‘샘’(1917년)이 대표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카텔란의 ‘코미디언’은 이미 100년 전 발표돼 미술사에 기록된 작품을 패러디하고 있다. 두 작품의 차이점은 이에 대한 반응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뒤샹의 ‘샘’은 전시 직후 미술계의 분노를 샀고,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변기가 예술이라는 그의 도발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그러나 카텔란의 ‘코미디언’은 미술관에 자연스럽게 입성해 보호를 받는다. 최종철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뒤샹의 샘은 미술관이라고 하는 예술 제도의 권위를 공격해 예술을 혁신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카텔란은 오히려 제도와 결탁해 자신의 명성과 작업의 가치를 높이려는 의도가 다분하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이번 해프닝에 대해 다른 해석도 제시했다. 그는 “대학생의 치기 어린 행동 때문에 바나나의 진부함이 가려져 안타깝다”며 “그의 행동을 통해 오히려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되는 동시대 미술의 모순적 현상에 대해 고민해 볼 계기가 생겼다”고 했다. 이어 “해당 작품에 우리 사회가 주목할 만한 의미가 있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센세이셔널리즘과 미디어사람들에게 충격을 줘서 주목을 받는 ‘센세이셔널리즘’을 시도한 작가들은 최근 50년간 늘어났다. 거대한 상어 사체를 포르말린 용액에 담가 전시한 데이미언 허스트, 자신의 피를 뽑아 두상 조각을 만든 마크 퀸 등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Ba·젊은 영국 미술가들)가 그들이다. 1980년대 말 공장에 이들 작품이 전시되자 ‘이렇게 엽기적인 것도 예술이냐’며 논란과 화제를 일으켰다. 마크 퀸의 피 두상 작품 ‘셀프’는 작가가 조금씩 뽑은 피를 모아 얼려 5년마다 한 점씩 제작해 냉동 상태로 전시했다. 1996년 만든 ‘셀프’ 작품은 청소부가 실수로 냉동 장비의 전원 코드를 뽑는 바람에 녹아서 사라지면서 또다시 화제가 됐다. 이 작품을 소장했던 사람이 바로 yBa를 키운 화상이자 광고 재벌인 찰스 사치다. 사치는 20대에 광고회사 ‘사치 앤드 사치’를 설립했고, 영국 보수당의 선거 슬로건 ‘노동당은 일하지 않는다(Labor is not working)’ 등을 히트시키며 회사를 글로벌 대기업으로 키웠다. 이런 미디어적 전략을 활용해 그는 충격적인 작품을 내세워 yBa들을 알리고 그 가치도 높였다. 그 후로 처음의 충격을 넘어설 만한 작품이 나오지 못하면서 yBa에 대한 관심도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 다만 이러한 ‘센세이셔널리즘’ 전략은 그 후로 여러 예술가들이 활용했다. 카텔란도 2016년 구겐하임 미술관에 18K 금으로 만든 변기를 전시해 주목받았다. 영국 출신 예술가 뱅크시는 2018년 경매에서 낙찰된 자신의 작품을 절반만 파쇄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제프 쿤스는 1989∼1991년 포르노 배우와 성관계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과 조각으로 발표했다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작품 가격, 시대-미학적 가치 등에 따라 변화그렇다면 센세이셔널리즘을 선보이는 모든 작품이 주목을 받는 것일까? 카텔란, 쿤스, yBa를 비롯한 작가들의 관련 작품들이 지닌 공통점은 ‘유명하게 비싼 가격’이다. 이번 해프닝에서도 단순한 바나나가 아니라 ‘1억 원짜리 바나나’를 먹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총 3개 에디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카텔란의 ‘코미디언’은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12만 달러(약 1억5000만 원)에 팔린 것으로 전해진다. 비싼 작품이기 때문에 가치 있고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술 작품의 가격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19세기 인상파 작가들이 활동하던 프랑스에서는 아카데미의 가장 권위 있는 화가였던 윌리암아돌프 부그로의 작품이 컬렉터들이 가장 원하는 작품이었고, 당연히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보다 훨씬 비쌌다. 그러나 모네가 그린 작품들은 지금 수백억∼수천억 원에 거래되지만 부그로의 작품은 억대에 그친다. 미술 작품의 가격을 결정짓는 요소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미술 작품은 크게 미술사적 가치, 미학적 가치, 미디어적 가치, 감성적 가치 등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 센세이셔널리즘에 기댄 작품들은 이 중 대중의 주목을 받으며 화제가 되는 ‘미디어적 가치’로 가격이 형성된다. 만약 이 작가들이 향후에도 새롭고 신선한 작품을 내놓아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면 이 가치는 유지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의 관심이 시들해지는 순간 작품의 가치도 하락한다. 즉, 지금 비싼 작품이라고 해서 꼭 중요한 작품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예술 작품에 대한 미학적 판단은 가격이나 유명도와 꼭 동일한 것은 아닌 별도의 영역”이라며 “우리 사회가 이런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려면 작품에서 어떤 감동을 받았고 미학적 통찰을 얻는지를 진지하게 토론하고 기준을 세워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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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멘트 공장 소년에서 미술관을 만든 남자로[영감 한 스푼]

    1905년 12월 어느 날. 당시 미국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는 찰스 랭 프리어(1854∼1919)로부터 편지를 받습니다. 미국의 수도라는 위상에 걸맞은 미술관을 워싱턴에 짓는 것을 돕고 싶으며, 이를 위해 미술품과 건물을 기증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5개월의 협상 끝에 프리어의 뜻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가 이 무렵까지 수집한 미국과 아시아 미술품 2250점을 포함해 사망하기까지 모은 미술품들을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프리어가 세상을 떠난 뒤인 1923년, 그가 남긴 9500여 점의 미술품을 토대로 아시아 미술 전문 기관인 ‘프리어 갤러리’가 워싱턴에 세워졌습니다.학교 대신 시멘트 공장 갔던 소년프리어는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많은 아시아 미술품을 수집하고 그것을 정부에 기증한 것일까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는 미국이 한창 개발되던 19세기 말, 기차 제조 사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재력가였습니다. 그러나 타고난 부자가 아닌 자수성가한 인물이었습니다. 1854년 미국 뉴욕 킹스턴 지역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4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중학교를 다 마치지 않았을 때 시멘트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었죠. 그러다 철도 사업을 하던 상사의 눈에 띄어 관련 업계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술품 수집을 시작한 것은 1890년 무렵. 이때 미국의 경제 사정 악화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프리어는 신경 쇠약을 앓게 됩니다. 1899년 은퇴한 그는 여행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예술에 눈을 떴습니다.제임스 휘슬러와의 만남이달 초 방문한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NMAA)은 100주년을 맞아 프리어가 일생 동안 교류했던 사람들에 관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했던 것은 미국 출신 화가 제임스 휘슬러와의 만남이었습니다. 미술관의 미국 미술 담당 큐레이터 다이애나 그린월드는 “프리어의 소장품 중 1000여 점이 휘슬러의 작품이며,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휘슬러 컬렉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휘슬러의 작품에 반한 프리어는 그가 있는 영국 런던을 직접 찾아가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 미술에 큰 관심을 가졌던 휘슬러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프리어의 휘슬러 사랑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미술관에 영구 설치된 ‘피콕 룸’입니다. 피콕 룸은 1876년 런던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영국의 운수 사업가 프레더릭 릴랜드의 의뢰로 만들어졌지만 릴랜드는 최종 디자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당초 약속했던 값의 절반만 휘슬러에게 지불했습니다. 이후 1904년 경매에 나온 이 방을 프리어가 구매했고, 27개 상자에 해체해 담아 미국으로 옮겨와 이때 엄청난 화제가 되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방에 청화백자를 놓았지만 프리어는 이것이 너무 뻔하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그 대신 프리어는 휘슬러의 작품 속 안개가 낀 풍경처럼 어딘가 낡은 듯한 분위기를 좋아했고, 자신의 취향에 맞게 아시아 각 지역의 도자기들을 다시 배치했습니다. 여기에는 고려청자도 포함되었습니다. 1908년 사진을 복원해 당시 현장을 지금 워싱턴에서 볼 수 있습니다.예술로 유산을 남기다이 피콕 룸을 비롯한 수많은 유산을 프리어는 미국 정부에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 기증이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라 아주 자세한 조건을 달았다는 점이 또 다른 흥미로운 점입니다. 프리어는 기증 서약을 할 무렵 2000여 점의 미술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사망한 후에는 이 기증품이 9000여 점으로 불어났습니다. 자식이나 아내가 없었던 그는 자신이 가졌던 재산의 대부분을 미술관 운영비에 쓰도록 합니다. 건물은 물론이고 미리 작품과 어울릴 법한 모양을 구상하고 알맞은 건축가를 만나 의뢰해 두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산이 아시아 미술을 연구하는 데 쓰이도록 했으며, 새롭게 세워질 미술관에 전문 큐레이터를 채용하는 것도 조건으로 삼았습니다. 프리어가 기증한 건물 내에 소장품 외 다른 것을 전시하거나 외부로 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도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습니다. 또 프리어 갤러리는 그가 기증한 것 외에 다른 기부를 받지 않고 있으며, 이사회의 승인을 거쳐 작품을 구매하는 방식으로 소장품을 늘리는 것만 가능합니다. 프리어가 자신의 컬렉션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죠. 특히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휘슬러의 작품을 중심으로 예술의 맥락을 선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 같다고 그린월드 큐레이터는 이야기했습니다. 삶에서 이룰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성취 가운데, 프리어는 예술로 자신의 유산을 남기길 원했고 그것을 얼마나 철저히 추구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미국 시민들은 프리어의 기증을 통해 아시아의 수많은 명품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이고 관련 자료 연구까지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도록 혜택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술에 대한 사랑이 여러 사람의 기쁨으로 번져 나가는 것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워싱턴에서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금요일 오전 7시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하시면 이메일로 먼저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 202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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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첩-스크랩북-사진… 우리가 몰랐던 김환기의 예술세계

    “김환기(1913∼1974·사진)는 최근 몇 년간 경매 소식으로 유명했고 정작 작품 세계를 조명할 기회는 많지 않았습니다. 소개되지 않았던 김환기를 보여주려 합니다.”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18일부터 열리는 기획전 ‘한 점 하늘…김환기’에 대해 전시를 담당한 태현선 리움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이 15일 이렇게 말했다. 호암미술관이 1년 반 동안의 내부 재단장을 마친 후 첫 전시에서 선택한 이는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화가 김환기다. 호암미술관의 1, 2층 전시실 전관에서 작품 약 120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에서는 1930년대 중반부터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1970년대까지 생애 전반에 걸쳐 그의 예술세계를 살펴본다. ● 사위 윤형근 집에서 기록 발견전시에는 지정문화재로 등록된 ‘론도’(1938년)부터 전면 점화를 처음 알린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6-IV-70 #166’(1970년), 2019년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당시 환율로 약 132억 원에 낙찰돼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낙찰 기록을 세운 ‘우주’(Universe 5-IV-71 #200) 등 대표작이 포함됐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김환기의 유품과 편지, 청년 시절 사진, 스크랩북 등의 자료 100여 건이다. 이 자료는 김환기의 장녀이자 윤형근 화백(1928∼2007)의 부인인 김영숙이 자택에 보관하던 것으로, 전시 준비 과정에서 발견됐다. 태 실장은 “유족이 김환기가 소장했던 달항아리를 보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가 자료의 존재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관련 자료를 그저 할아버지가 남긴 물건으로 생각했던 유족들은 2018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윤형근 회고전을 계기로 그 중요성을 깨달았다. 전시 이전에는 윤형근과 김환기의 자료가 뒤섞여 있었는데, 준비 과정에서 이들을 분류하고 확인한 것. 윤형근의 아들 내외가 스크랩북과 편지의 존재를 알려주는 등 미술관 측에 도움을 주면서 이번 전시에 미공개 유품과 자료가 공개될 수 있었다. 태 실장은 “그간 제작 연도가 미상이었던 ‘여인들과 항아리’ 관련 기록을 발견했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고 말했다. 작은 수첩에 ‘늦도록 벽화. 달걀 두 개 먹고 종일 제작. 나대로의 그림으로 밀고 가자’란 짧은 글이 적혀 있었고 1960년에 기록된 것이어서 자연스레 제작 연도가 파악됐다. 그는 “김환기가 신문에 그린 삽화가 꼼꼼히 기록된 스크랩북과 스케치북도 4권이나 나와 향후 연구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시대 아우르는 기획전 개최소장품 전시가 주를 이뤘던 호암미술관이 내부를 재단장한 건 이곳에서 전시했던 ‘이건희 컬렉션’ 고미술품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데 따른 것이다. 전시실 층고를 최대한 높이고 다양한 전시가 가능하도록 조명과 구조를 바꿨다. 이번 전시를 마친 뒤 올해 말 두 달간 소장품 기획전을 열고, 내년부터 상·하반기 두 차례 기획전을 열 계획이다. 고미술은 물론이고 국내외 현대미술을 아우르는 다양한 기획전을 선보인다. 현재는 미술관 앞 정원인 ‘희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앞으로 전시만으로도 미술관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게 한다는 것.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리움과 호암미술관은 ‘하나의 미술관, 두 개의 장소’로 전시 및 프로그램을 통합 기획·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9월 10일까지 열리며 관람 2주 전부터 온라인 예약을 받는다. 현장 발권도 가능하다. 1만4000원.용인=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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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멘트 공장 소년에서 미술관을 만든 남자[영감 한 스푼]

    안녕하세요.오늘은 국립아시아미술관(NMAA)을 만든 장본인, 찰스 랭 프리어(1854~1919)의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국립아시아미술관은 미국 워싱턴에 처음으로 생긴 미술관으로(1923년 설립), 올해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미술관이 생기도록 소장품은 물론 건물까지 기증한 사람이 바로 찰스 랭 프리어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만나보겠습니다.1905년 12월 어느 날.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찰스 랭 프리어로부터 편지를 받습니다. 미국의 수도라는 위상에 걸맞은 미술관을 워싱턴에 짓는 것을 돕고 싶으며, 이를 위해 미술품과 건물을 기증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5개월의 협상 끝에 프리어의 뜻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그가 이 무렵까지 수집한 미국과 아시아 미술품 2250점을 포함해 사망하기까지 모은 미술품들을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프리어가 세상을 떠난 뒤인 1923년, 그가 남긴 9500여 점의 미술품을 토대로 아시아 미술 전문 기관인 ‘프리어 갤러리’가 워싱턴에 세워졌습니다.학교 대신 시멘트 공장 갔던 소년프리어는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많은 아시아 미술품을 수집하고 그것을 정부에 기증한 것일까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는 미국이 한창 개발되던 19세기 말, 기차 제조 사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재력가였습니다. 그러나 타고난 부자가 아닌 자수성가한 인물이었습니다.1856년 미국 뉴욕 킹스턴 지역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4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중학교를 다 마치지 않았을 때 시멘트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었죠. 그러다 철도 사업을 하던 상사의 눈에 띄어 관련 업계에 종사하게 되었습니다.그가 예술품 수집을 시작한 것은 1890년대 무렵. 이 때 미국의 경제 사정 악화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프리어는 신경 쇠약을 앓게 됩니다. 1899년 업계에서 은퇴한 그는 여행을 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예술에 눈을 떴습니다.제임스 휘슬러와의 만남현재 워싱턴 국립아시아미술관은 100주년을 맞아 프리어가 일생 동안 교류했던 사람들에 관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미국 출신 화가 제임스 휘슬러와의 만남이었습니다.미술관의 미국 미술 담당 큐레이터 다이애나 그린월드는 “프리어의 소장품 중 1000여 점이 휘슬러의 작품이며,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휘슬러 컬렉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휘슬러의 작품에 반한 프리어는 그가 있는 영국 런던을 직접 찾아 만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 미술에 큰 관심을 가졌던 휘슬러의 영향을 받았습니다.프리어의 휘슬러 사랑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미술관에 영구 설치된 ‘피콕 룸’입니다. 피콕 룸은 1876년 영국 런던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영국의 운수 사업가 프레데릭 리랜드의 의뢰로 만들어졌지만, 리랜드는 최종 디자인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당초 약속했던 값의 절반만을 휘슬러에게 지불했습니다. 이후 1904년 경매에 나온 이 방을 프리어가 구매했고, 27개 상자에 해체에 담아 미국으로 옮겨왔고 이 때 엄청난 화제가 되었습니다.영국에서는 이 방에 청화백자를 놓았지만 프리어는 이것이 너무 뻔하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대신 프리어는 휘슬러의 작품 속 안개가 낀 풍경처럼 어딘가 낡은 듯한 분위기를 좋아했고, 자신의 취향에 맞게 아시아 각 지역의 도자기들을 다시 배치했습니다. 여기에는 고려 청자도 포함되었고, 1908년 사진의 모습을 복원한 현장을 지금 워싱턴에서 볼 수 있습니다.예술로 유산을 남기다이 피콕 룸을 비롯한 수많은 유산을 프리어는 미국 정부에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 기증이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라 아주 자세한 조건을 달았다는 점이 또 다른 흥미로운 포인트입니다. 프리어는 기증 서약을 할 무렵 2000여 점의 미술품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사망한 후에는 이 기증품이 9000여 점으로 불어났습니다.자식이나 아내가 없었던 그는 자신이 가졌던 재산의 대부분을 미술관 운영비에 쓰도록 합니다. 건물은 물론 미리 작품과 어울릴 법한 모양을 구상하고 알맞은 건축가를 만나 의뢰해 두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산이 아시아 미술을 연구하는 데 쓰이도록 했으며, 새롭게 세워질 미술관에 전문 큐레이터를 채용하는 것도 조건으로 삼았습니다.프리어가 기증한 건물 내에 소장품 외 다른 것을 전시하거나 외부로 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도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습니다. 또 프리어 갤러리는 그가 기증한 것 외에 다른 기부를 받지 않고 있으며, 이사회의 승인을 거쳐 작품 구매를 통해 소장품을 늘리는 것만 가능합니다. 프리어가 자신의 컬렉션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죠.특히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휘슬러의 작품을 중심으로 예술의 맥락을 선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 같다고 그린월드 큐레이터는 이야기했습니다. 삶에서 이룰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성취 가운데, 프리어는 예술로 자신의 유산을 남기길 원했고 그것을 얼마나 철저히 추구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었습니다.결국 미국의 많은 시민들은 프리어의 기증을 통해 아시아의 수많은 명품 미술품을 감상하는 것은 물론 관련 자료 연구까지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도록 혜택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술에 대한 사랑이 여러 사람의 기쁨으로 번져 나가는 것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뉴스레터 구독 신청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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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장거리 비행땐 뇌 둘로 나눠 반쪽씩 잔대요

    계절에 따라 오고 가는 철새를 보며 인간은 감상에 젖는다. 한 장소에서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사는 사람과 달리 저 멀리 나는 철새에게 부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한데 어떤 철새는 인간이 마라톤을 126회 연속으로 달리는 정도의 거리를 난다는 것을 아는가. 유년 시절부터 새 관찰을 50년 넘게 해 온 저자는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장거리를 나는 새들의 놀라운 능력에 관한 최신 연구를 유려하게 풀어낸다. 오랫동안 조류 연구는 새들이 둥지에 머무는 번식기에 집중됐다. 그러나 과학 기술의 발달로 철새의 다리에 초소형 위치 추적기를 붙이고, 세계 곳곳에서 확보한 정보를 온라인으로 한데 모으는 빅데이터 수집이 가능해지면서 철새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철새들은 필요에 따라 뇌를 반으로 나눠 반쪽씩 번갈아 잠을 자며 몇 달 동안 이어지는 비행의 수면 부족을 해결한다. 또 300km 떨어진 곳의 불빛을 볼 수도 있으며, 극심한 기아 상황에 몰려도 건강을 유지하기도 한다. 저자는 철새를 연구하는 방법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풀어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새들의 놀라운 능력을 위협하는 건 역시 인간이다. 2006년 새만금 방조제가 생긴 뒤 붉은어깨도요새 7만 마리가 자취를 감췄고, 환한 도시의 불빛은 새들의 방향 감각을 해친다. 저자는 철새를 보호하려는 움직임도 현장 탐사를 통해 함께 전한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20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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