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가장 먼저 해야할 건 줄거리를 쓰는 게 아닙니다. 독자들 성향 분석이 먼저예요.” 지난달 25일 A PD와 작가 8명이 모인 화상회의에서 PD가 말을 꺼내자 채팅방에 “알겠습니다”는 답이 이어졌다. 이후 의견을 조율했고 독자가 읽고 싶은 얘기가 최우선이란 점에 다들 동의했다. B 작가는 “처음하는 경험이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화상회의는 최근 웹소설계에서 주류로 자리잡은 집단 창작을 위한 모임. 집단 창작은 소설가 1명이 글을 쓰는 순수소설과 달리, 여러 웹소설 작가들이 협업해 작품을 쓰는 방식이다. 동아일보는 웹소설 ‘마이 윈터, 눈 속에서 깨어날 때’ 집단 창작을 위한 회의에 직접 참여했다. 10명이 모인 회의는 PD의 지시에 따라 독자 분석부터 시작했다. 기자도 나이대와 남녀로 분류된 엑셀 파일에 해당 독자들이 좋아할만한 소재를 적어넣었다. “10대 남성은 게임과 교우 관계, 20대 여성은 소셜미디어와 판타지, 회귀물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냈다. C 작가는 “20대 여성은 로맨스, 30대 남성은 직업물을 선호한다”고 주장했다. 줄거리도 함께 정했다. PD가 모험, 복수, 유혹 등 14개의 키워드를 제시하자 작가들은 짧은 이야기를 만들었다. 주인공이 어떻게 숨지는가에 대한 토론에서 기자는 “사회 현안을 녹여내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모두 동의했고, 한 작가가 최근 벌어진 ‘공장 노동자 사망’을 모티브로 떠올렸다. 25일부터 진행된 회의는 28일까지 기획을 다듬고 줄거리 및 캐릭터를 정하는 데 총 10시간이 걸렸다. 진행은 모두 온라인으로 했다. 본격적인 창작은 이런 모든 과정이 결정된 뒤 진행된다. 지금까지 결정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르는 요즘 웹소설에서 가장 핫한 주제인,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다시 태어나는 회귀물. 20대 여성 독자를 겨냥해 여성이 주인공인 로맨스 판타지 장르로 정했다.‘22세 여성 인아는 공장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간다. 인아의 유일한 낙은 웹소설 읽기. 기계를 청소하며 몰래 소설을 읽던 인아는 실수로 사고가 벌어지며 숨을 거둔다. 그런데 눈을 뜬 인아는 자신이 그동안 읽던 웹소설 속 백작(伯爵)의 막내딸 아드리안 아리엔으로 환생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미 소설 내용을 알고 있는 인아는 이 세계에서 천하무적. 인아는 대공(大公)의 후계자 비엘 카이언을 도와 권력의 핵심부에 다가간다.’ 이런 집단 창작을 통해 히트친 웹소설이 많다. 누적 조회 수 1억8000만 회를 넘긴 ‘전지적 독자 시점’은 작가 부부가 공동 작업했다. 작가 6명이 참가한 ‘이혼도 A/S가 되나요?’처럼 집단 창작은 일상화됐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최근 집단창작 시스템으로 유명한 북미 웹툰 플랫폼 ‘래디쉬’를 5000억 원에 인수하며 집단창작 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웹소설에서 집단 창작이 보편화된 건 효율성 때문이다. 웹소설은 거의 매일 연재해야 해 작가는 하루 5000자 이상, 한 달에 15만 자 넘게 쓴다. 이로 인해 체력이 떨어진 작가들이 연재를 포기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다. 한 웹소설 작가는 “집단 창작은 작품 집필 속도가 1인 창작보다 훨씬 빨라 ‘펑크’ 날 일이 적다”고 했다. 또 다른 작가는 “혼자 할 때보다 다양하고 신선한 의견이 많이 나온다”고 말했다. 때문에 집단 창작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저작권에 대한 갈등을 막기 위한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김학수 웹소설PD협회장은 “창작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이견(異見)을 조율하는 제작사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를 반영하되 작가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절연’(絶緣)이라는 단어로 아시아 젊은 작가들이 한 권의 소설집을 써보면 어떨까요?” 2020년 가을, 드라마로도 제작돼 화제가 된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2015년·민음사)을 쓴 정세랑 작가(38)는 일본 유명 출판사 쇼가쿠칸(小學館) 편집자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일본에서 정 작가의 책을 다수 펴낸 쇼가쿠칸이 정 작가에게 “일본 작가와 책을 써보자”고 요청하자 오히려 정 작가가 더 큰 기획을 말한 것이다. 정 작가는 “한일 문학계 교류를 아시아로 확대하자. 우정의 범위를 넓혀보고 싶다”고 쇼가쿠칸을 설득했다. 그렇게 2년이 걸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홍콩 티베트 베트남 태국 싱가포르 작가 9명이 함께 소설집을 펴냈다. 5일 출간되는 ‘절연’(문학동네)이다. 지난달 29일 전화로 만난 정 작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사람들의 인연이 끊기면서 ‘절연’이란 단어가 떠올랐다”고 했다. ‘절연’이라는 키워드가 각지에 떨어져 살던 작가들 간의 연결을 만들어낸 셈이다. “다른 나라 작가들은 나보다 더 재밌는 작품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작가 섭외에만 1년이 걸린 대형 프로젝트입니다.” 작가들은 ‘절연’이란 단어를 다양하게 해석한다. 일본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 문학상 중 하나인 아쿠타가와상을 2016년 수상한 일본 작가 무라타 사야카는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청년들이 등장하는 단편 ‘무(無)’로 일본 젊은 세대의 방황을 그린다. 정 작가는 ‘절연’에서 성추행 논란에 휘말린 직장 동료를 감싸는 또 다른 직장 동료와 인연을 끊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주인공을 통해 한국 사회의 첨예한 논쟁을 그린다. “불쾌한 일과 불법적인 일 사이에 복잡한 스펙트럼이 있잖아요. 모호한 구석이 있는 사건의 경우 그걸 해석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갈리게 되는데 그 상황을 그리고 싶었어요.” 중국에 대한 비판이 담긴 작품도 눈에 띈다. 공상과학(SF) 소설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휴고상을 2016년 받은 중국의 하오징팡(학景芳)은 부정적 감정을 지닌 시민이 구치소에 격리되는 ‘긍정 벽돌’로 정부를 비판한다. 홍콩의 홍라이추(韓麗珠)는 ‘비밀경찰’에서 당국의 감시로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계를 묘사한다. 싱가포르의 알피안 사아트, 태국의 위왓 럿위왓웡사, 티베트의 라샴자, 베트남의 응우옌응옥뚜, 대만의 롄밍웨이도 모두 신선한 작품을 선보인다. 프로젝트의 가장 큰 수확이 뭐냐는 질문에 정 작가는 담담하게 답했다. “다른 나라 작가들 입장에선 자국에서 출간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을 쓴 것 같아요. 책은 한국과 일본에만 출간되는데요, 다른 나라에도 출간되면 좋겠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절연’(絶緣)이라는 단어로 아시아의 젊은 작가들이 한 권의 소설집을 써보면 어떨까요?”2020년 가을, 드라마로도 화제를 모은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2015·민음사)을 쓴 정세랑 작가(38)는 일본 유력 출판사 쇼가쿠칸(小學館) 편집자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일본에서 정 작가의 책을 다수 펴낸 쇼가쿠칸이 정 작가에게 “일본 작가와 책을 써보자”고 요청하자 오히려 정 작가가 더 큰 기획을 말한 것이다.정 작가는 “한일 문학계 교류를 아시아로 확대하자. 우정의 범위를 넓혀보고 싶다”고 쇼가쿠칸을 설득했다. 그렇게 2년이 걸려 한국, 일본, 중국, 대만, 홍콩, 티베트, 베트남, 태국, 싱가포르 작가 9명이 함께 소설집을 펴냈다. 5일 출간되는 소설집 ‘절연’(문학동네)이다.지난달 29일 전화로 만난 정 작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사람들의 인연이 끊기면서 ‘절연’이란 단어가 떠올랐다”고 했다. ‘절연’이라는 키워드가 각지에 떨어져 살던 작가들 간의 연결을 만들어낸 셈.“다른 나라의 작가들은 나보다 더 재밌는 작품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작가 섭외에만 1년이 걸린 대형 프로젝트입니다.”작가들은 ‘절연’이란 단어를 다양하게 해석한다. 일본 문학계 최고 권위의 양대 문학상 중 하나인 아쿠타가와상을 2016년 수상한 일본 작가 무라타 사야카는 자신의 이름마저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청년들이 등장하는 단편 ‘무(無)’으로 일본 젊은 세대의 방황을 그린다. 정 작가는 단편 ‘절연’에서 성추행 논란에 휘말린 직장동료를 감싸는 또 다른 직장동료와 인연을 끊어야하는지 고민하는 주인공을 통해 한국 사회의 첨예한 논쟁을 그린다.“불쾌한 일과 불법적인 일 사이에 복잡한 스펙트럼이 있잖아요. 모호한 구석이 있는 사건의 경우 그걸 해석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갈리게 되는데 그 상황을 그리고 싶었어요.”중국에 대한 비판이 담긴 작품도 눈에 띈다. 공상과학(SF) 소설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휴고상을 2016년 받은 중국의 하오징팡은 부정적 감정을 지닌 시민이 구치소에 격리되는 단편 ‘긍정 벽돌’로 정부를 비판한다. 홍콩의 홍라이추는 단편 ‘비밀경찰’에서 당국의 감시로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계를 묘사한다. 싱가포르의 알피안 사아트, 태국의 위왓 럿위왓웡사, 티베트의 라샴자, 베트남의 응우옌 응옥 뚜, 대만의 롄밍웨이도 모두 신선한 작품을 선보인다.프로젝트의 가장 큰 수확이 뭐냐는 질문에 정 작가는 담담하게 답했다.“다른 나라 작가들 입장에선 자국에서 출간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을 쓴 것 같아요. 책은 아직 한국과 일본에만 출간되는데요. 다른 나라에도 출간되면 좋겠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나는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했지만 누구보다 행복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고생이었기에 행복했죠.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허허.”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102)는 2일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에세이집 ‘100세 철학자의 행복론’(열림원) 출간 기념 간담회에서 여전히 활짝 웃는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걸어 들어오며 처음엔 살짝 부축을 받긴 했지만 곧고 정정했다. 여유 있게 발걸음을 디뎠고, 목소리에선 힘이 느껴졌다. 의자에 앉은 뒤엔 다리를 꼰 채 2시간 가까이 열정적으로 자신의 행복론을 설파했다. 지난달 28일 출간된 에세이집은 김 교수가 그동안 행복을 주제로 쓴 글들을 골라 묶었다. 그는 책에서 “행복을 느끼기 위해선 목표가 아니라 과정을 즐겨야 한다”며 “고생했더라도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받았다면 행복한 삶”이라고 전한다. “누구나 행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행복은 내가 어떤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느냐에 달려 있어요. 결국 내 인격만큼 행복을 누리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행복해지기 위해선 인격을 갈고닦아야 합니다.” 김 교수는 “인간은 나이에 따라 다른 행복을 느낀다”고도 했다. 중요한 건 “상대방의 행복을 인정하는 태도”라고도 조언했다. “젊었을 땐 돈과 사랑, 즐거움이 행복과 동의어예요. 50, 60대가 되면 성공이 행복의 척도가 되죠. 70∼90세쯤 되면 보람을 추구하며 행복을 찾습니다. 90세 이후에는 베푸는 걸 행복으로 여기게 되죠. 100세가 넘으니 남들에게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는 요즘 들어 ‘오래 살면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고 한다. 김 교수는 “아무래도 95세 이후엔 몸이 쉽사리 피곤해지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인다”며 “건강은 몸이 아니라 정신력에 달렸다”고 강조했다. “오래 사는 게 그리 좋은 건 아니에요.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 힘든데, 밤에 잠을 청하면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이젠 오래 잠들 때가 된 것 같아요. 다만 지금 하는 작업들은 끝내고 싶습니다. 아마 내년에도 책이 더 출간될 수 있을 것 같네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저도 웹소설이나 써볼까요? 하하.” 최근 만난 소설가 A 씨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렇게 말했다. A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얘기하다 최근 내놓은 신간 판매량을 걱정했다. 종이책 시장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지나 급격히 성장한 웹소설 업계에 대한 부러움을 표현했다. 괜스레 민망해져 겸연쩍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요. 저도 웹소설 써볼까요?” ‘소설엔 마진이…’는 출판사 작가정신이 창립 35주년을 맞아 기획한 에세이집이다. 한국 소설가 23명이 자신의 ‘작가정신’이 무엇인지를 솔직히 적었다. 소설을 쓸 때의 마음과 창작 과정, 작가의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주제가 다양하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작가들의 수입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한기 작가는 최근 한 선배로부터 온라인 쇼핑 플랫폼인 스마트스토어로 월 매출 3억 원을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이익이 20%나 돼 한 달에 6000만 원을 벌었다는 말에 크게 좌절했다. 오 작가는 며칠 뒤 소설 쓰기를 관두고 스마트스토어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선배에게 조언까지 구하고 여러 사업 자료를 찾다가, 갑자기 그는 포기한 뒤 스스로 묻는다. “따지고 보면 나는 3억 원 대신 소설을 택한 셈이다. 그런데 내가 소설을 썼을 때 이익은 얼마일까? 순수하게 나에게 남는 건 뭘까?”(‘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 중) 소설가들이 마진에 대해 생각하는 건 아마도 소설이 들이는 노력과 시간에 비해 경제적 보상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정용준 작가는 “써야만 한다”는 짧은 문장 하나를 노트에 적어 넣고는 어떤 문장도 더 쓰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정지돈 작가는 첫 책을 내고서도 아버지한테 돈 버는 직업을 구하라는 타박을 들었다고 한다. 소설을 쓸 때마다 입가가 찢어진다는 한은형 작가의 토로는 창작에 들어가는 고통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그럼에도 소설가들이 글을 쓰는 건 ‘마진 너머의 기쁨’ 때문이 아닐까. 박민정 작가는 “소설이 결국 나를 먹고살게 했고 자신의 더 나은 미래를 도모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수줍게 털어놓는다. 손보미 작가는 “글을 완성해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고도 했다. 이들은 소설을 쓰는 기쁨이 뭔지 명확하게 밝히진 않지만, 자발적으로 이 직업을 택했다고 강조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문학을 좋아할 것. 무엇이 와도 그 마음을 훼손당하지 말 것. 나는 내 삶을 선택했다. 그러니까 소설이 있는 쪽으로.”(조경란 작가의 ‘작가의 말과 신발’ 중) 물론 순수문학 작가들이 웹소설 작가보다 더 중요하다든가, 순수문학이란 이유만으로 다른 콘텐츠보다 더 의미 있다는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 “소설이면 다 똑같은 소설이다. 자신(순수문학)과 다르다고 무시하고 차별할 이유는 없다”는 백민석 작가의 말처럼 창작자라면 누구나 고군분투하니까. 다만 마진이 훨씬 덜 남는데도 펜을 놓지 못하는 작가들을 응원하고 싶을 뿐이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게다가 지름길 꼭 오르막이지/마치 내 삶처럼’(시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중) 황인숙 시인(64·사진)은 최근 출간한 9번째 시집 ‘내 삶의 예쁜 종아리’(문학과지성사)에서 서울 용산구 해방촌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1986년 집세가 저렴한 곳을 찾아 해방촌에 들어왔고, 지금은 작은 옥탑방에 살고 있다. 언덕이 많은 동네, 가파른 골목길을 매일 오르락내리락하느라 굵어진 종아리를 보고 그는 역설적으로 “예쁘다”고 표현한다. 전화로 28일 만난 그는 “해방촌 언덕을 오르내리다 보면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담담히 말했다. “평지에 세워진 아파트에서 태어나 잠깐 해방촌에 놀러 오는 관광객은 몰라요. 노인이 폐지가 담긴 수레를 끌고, 상인이 무거운 상자를 옮기는 이 언덕엔 삶이 묻어난다는 걸요.” 그가 시집을 펴낸 건 ‘아무 날이나 저녁때’(현대문학·2019년) 이후 3년 만이다. 그는 신작에 해방촌의 뒷모습을 담아냈다. 시인은 퇴근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보고 ‘짙고 짙은 암갈색/환영처럼 앉아 있었다’(‘어둠의 빛깔’ 중)라고 썼다. 물건을 팔기 위해 소리 지르는 시장 상인을 보곤 ‘뒤집힌 풍뎅이처럼 자빠져/바둥거리는 맛도 있다우’(‘장터의 사랑’ 중)라고 풀어냈다. 1984년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로 등단한 그는 매일 오후 7시부터 이튿날 오전 3시까지 해방촌을 돌며 길고양이에게 밥을 준다. 그러나 ‘동네 한 바퀴 돌고/돌아오는 길에 보니/고양이 밥그릇이 사라졌다’(‘봄의 욕의 왈츠’ 중)는 일도 벌어지는 게 현실. 해방촌에 언제까지 살 것이냐고 묻자 그는 조용히 답했다. “제가 돌보는 고양이만 80마리에 가깝습니다. 집세를 못 내서 쫓겨날 때까지 이곳에 살 겁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발목이 더 굵어지고 종아리가 미워진다면/ 얼마나 더 싫을까/ 나는 얼마나 더 힘들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 게다가 지름길 꼭 오르막이지/ 마치 내 삶처럼’(시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중) 황인숙 시인(64)은 최근 출간한 9번째 시집 ‘내 삶의 예쁜 종아리’(문학과지성사)에서 서울 용산구 해방촌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1986년 집세가 저렴한 곳을 찾아 해방촌에 들어왔고, 지금은 작은 옥탑방에 살고 있다. 언덕이 많은 동네, 가파른 골목길을 매일 오르락내리락하느라 굵어진 종아리를 보고 그는 역설적으로 “예쁘다”고 표현한다. 28일 전화로 만난 그는 “해방촌 언덕을 오르내리다 보면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담담히 말했다. “평지에 세워진 아파트에서 태어나 잠깐 해방촌에 놀러 오는 관광객은 몰라요. 노인이 폐지가 담긴 수레를 끌고, 상인이 무거운 상자를 옮기는 이 언덕엔 삶이 묻어난다는 걸요. 시집에 해방촌의 모습을 담고 싶었습니다.”그가 시집을 펴낸 건 ‘아무 날이나 저녁때’(2019·현대문학) 이후 3년 만이다. 그는 64편의 시가 실린 신작에 해방촌의 뒷모습을 담아냈다. 시인은 퇴근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보고 ‘서남아 사람인 듯 거무튀튀한/ 오십줄 사내가 어깨를 움츠리고/ 외투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긴 의자에 혼자/ 짙고 짙은 암갈색/ 환영처럼 앉아 있었다’(시 ‘어둠의 빛깔’ 중)고 담백하게 관찰기를 쓴다. 물건을 팔기 위해 소리를 지르는 시장 상인을 보곤 ‘세상엔/ 미끄러지고 나동그라지고/ 뒤집힌 풍뎅이처럼 자빠져/ 바둥거리는 맛도 있다우// 누군 죽어 지내는 맛도 있다지만/ 나는 그런 맛 몰라’(시 ‘장터의 사랑’ 중)라고 능청스럽게 노래한다. 1984년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로 등단한 그는 매일 오후 7시부터 새벽 3시까지 해방촌을 돌며 길고양이에게 밥을 준다. 그러나 ‘동네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고양이 밥그릇이 사라졌다’(시 ‘봄의 욕의 왈츠’ 중)는 일도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1개월에 길고양이 사료만 240kg를 삽니다. 언덕을 오르내리며 고양이들 밥을 주죠. 그런데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슬픈 일이죠.” 해방촌에 언제까지 살 것이냐고 묻자 그는 조용히 답했다. “제가 돌보는 고양이만 80마리에 가깝습니다. 이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가 없어 해방촌을 못 떠날 것 같아요. 집세를 못 내서 쫓겨날 때까지 이곳에 살 겁니다.”이호재기자 hoho@donga.com}

“여러분의 삶이 보잘것없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실은 하나하나가 소중합니다.” 노경실 동화작가(63)는 올해 4월 7일 서울 종로구 ‘쪽방촌’에 사는 주민 8명을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60, 70대인 주민들은 하나같이 삶의 거친 굴곡을 지나온 이들. 장애를 지녔거나 기초생활수급자인 사람도 있었다. 그런 주민들에게 노 작가가 권한 건 ‘글쓰기’였다. 노 작가는 “글 쓰는 게 어렵게 느껴지면 그냥 말로 인생을 얘기해보라”고 했다. 처음엔 손사래를 치던 주민들도 만남이 늘어가며 조금씩 변해갔다. 타인과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자신감이 없던 한 주민은 용기를 내 글자를 써내려갔다. 글을 모르던 한 어르신도 찬찬히 입을 열고 자신의 과거를 들려줬다. 15일 출간된 그림에세이집 ‘우리들의 인생 책’(서울특별시립 돈의동쪽방상담소)은 4월부터 10월까지 쪽방촌 주민 8명이 노 작가의 도움을 받아 쓴 책이다. 최선관 돈의동쪽방상담소 행정실장이 현대엔지니어링의 후원을 받아 노 작가에게 글쓰기 강의를 부탁해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노 작가는 23일 통화에서 “처음엔 마음을 열지 못하던 주민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한번 써보라고 하자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이분들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돌아보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엔 모두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잖아요. 그걸 깨달으면 인생을 돌아볼 용기가 생기는 것 같아요. 차분히 기다렸더니 하나둘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았어요.” ‘우리들의 인생 책’엔 그런 주민들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주민 A 씨는 결혼해 가정을 꾸렸던 40대까진 행복했지만, 50대부터 불행이 시작됐다고 한다. 그는 자세한 얘기를 꺼리면서도 “돌아보면 쓴웃음이 난다”며 시 한 편을 지었다. ‘지나온 과거를 묻지 마세요/흘러간 세월에 눈물짓지 마/서러운 시간 속에 이슬이/지내온 과거를 이제는/떨쳐버리고 웃으리.’(시 ‘내 인생의 노래’ 중) 어렵사리 슬픔을 마주한 이도 있었다. 주민 B 씨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손가락 하나도 작두에 잘려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왔다. 스물네 살에 시집갔지만 남편은 노름에 빠져 재산을 탕진했다. 빚에 시달리다가 아이를 데리고 도망친 뒤 홀로 식당 일을 하며 아이를 키웠다. 모아둔 돈도 집도 없어 여기까지 흘러들었다. 하지만 B 씨는 “그럼에도 희망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돈의동 쪽방촌은 정이 넘치고 따스함이 있다. 가족에게서도 받지 못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내 인생도 활짝 꽃이 필 것 같다.’(에세이 ‘돈의동과 나, 나의 돈의동’ 중) 친부모에게 버려진 뒤 오래도록 방황한 C 씨. 그는 동물에게 받았던 기억을 발판 삼아 동물들을 돌보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몰락한 집안 사정에 절망했던 D 씨는 “앞으로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품어주며 살겠다”고 노래했다. 알코올의존증에 빠졌던 과거를 털어놓은 이도, 떠나간 부인에게 사죄의 글을 실은 이도 있다. 이제 어엿한 저자가 된 주민 E 씨에게 25일 전화를 걸었다. 프로젝트 이전만 해도 사람을 꺼렸다는 그는 차분하게 책을 펴낸 소감을 말했다. “글 쓰는 동안, 방에 있는 작은 거울에 제 과거가 비치더군요. 거울 속에 있는 제 모습은 삶의 희비(喜悲)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남은 인생은 웃으면서 살고 싶습니다. 이젠 그래도 되지 않을까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여러분 삶이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모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올 4월 7일 노경실 동화작가(63)는 처음 만난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촌 주민 8명에게 이렇게 말했다. 60, 70대인 쪽방촌 주민들은 모두 삶의 거친 굴곡을 경험한 이들. 장애를 지닌 이도, 기초생활수급자도 있다. 노 작가가 주민들에게 권한 건 ‘글쓰기’다. 노 작가는 “글을 쓰기 어려우면 내게 말로 인생을 불러 달라”고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손사래를 치던 주민들도 조금씩 변했다. 글을 읽을 수 없는 주민은 말로 자신의 과거를 풀어냈고, 타인과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자신감 없던 주민은 자신의 인생을 적었다.이달 15일 출간된 에세이 ‘우리들의 인생책’(서울특별시립 돈의동쪽방상담소)은 4월부터 10월까지 돈의동 쪽방촌 주민 8명이 노 작가의 도움을 받아 쓴 책이다. 최선관 서울특별시립 돈의동쪽방상담소 행정실장이 노 작가에게 글쓰기 강의를 요청해 이 프로젝트가 성사됐다. 출간은 현대엔지니어링이 후원했다. 어떻게 주민들의 마음을 열었냐고 묻자 노 작가는 25일 통화에서 담담히 말했다.“처음엔 주민들에게 이름을 써보라고 했어요.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에 아름다운 뜻이 담겼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인생을 돌아볼 용기가 생기거든요. 그 다음에 귀를 열고 있었더니 주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더라고요.”신간엔 쪽방촌 주민들의 인생 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A 씨는 결혼생활을 했던 40 대까진 행복했지만 50대부터 불행이 시작됐다고 고백한다. 그는 “인생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지을 때가 있다”며 자신이 직접 지은 시 한 편을 책에 실었다.‘지나온 과거를 묻지 마세요/ 흘러간 세월에 눈물 짓지 마/ 서러운 시간 속에 이슬이…/ 지내온 과거를 이제는/ 떨쳐버리고 웃으리’(A 씨의 시 ‘내 인생의 노래’ 에서)용기 있게 슬픔을 마주한 이도 있다. B 씨는 어릴 적 어머니를 잃고 작두에 손가락 하나가 잘려 장애인으로 살아왔다. 스물네 살에 시집갔지만 남편은 노름에 빠졌다. 빚에 시달리다 아이를 데리고 도망친 뒤 혼자서 식당 일을 하며 아이를 키웠다. 고생이 끝났다 싶었지만 모아둔 돈도, 집도 없어 집세가 싼 돈의동으로 오게 됐다. 그럼에도 B 씨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돈의동 쪽방촌은 정이 넘치고 따스함이 있다. 가족에게서도 받지 못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내 인생도 활짝 꽃이 필 것 같다.”(B 씨 에세이 ‘돈의동과 나, 나의 돈의동’에서)친부모에게 버려져 방황했다는 한 주민은 동물에게 사랑을 받은 기억을 발판삼아 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새 꿈을 고백한다. 집안 경제 사정이 힘들어져 절망했다는 다른 주민은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품어주는 인생이 되고 싶다고 노래한다. 알코올중독에 빠진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한 이도, 지금은 헤어진 아내에게 사죄의 글을 실은 이도 있다. 자신을 못살게 굴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털어놓은 이도 있는 반면 지금 키우고 있는 강아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이도 있다.25일 한 주민에게 전화로 ‘글쓰기’ 소감을 물었다. 이 주민은 어엿한 작가처럼 말했다.“글 쓰는 동안 거울에 제 과거가 비치더군요. 거울 속 제 모습은 희비(喜悲)가 엇갈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남은 인생은 웃으며 살아보고 싶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키가 1.2m, 뇌 크기는 자몽처럼 작다. 손은 쥐는 동작에 유리하고 엄지 근육은 강인하다. 송곳니는 침팬지보다 작다. 발 측면에는 직립보행에 적합한 관절이 있다. 침팬지보다 입은 덜 튀어나왔고 머리 모양도 침팬지와 전혀 다르다. 이 생명체의 이름은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아르디). 440만 년 전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 살았던 인류의 조상이다. 한때 인류의 조상으로 알려졌던 30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루시)보다 과거에 존재했다. 아르디의 뼛조각은 1994년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발견됐고, 2009년 전체 골격이 공개됐다. 2009년 세계적 과학저널 사이언스에서 ‘올해의 발견’으로 선정할 정도로 인류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아르디는 인류가 어떻게 직립보행을 시작했고 정교한 손을 진화시켰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증거였다. 초기 인류 조상이 놀라울 정도로 침팬지와 다른 모습이었음을 보여줘 학계를 뒤흔들었다. 올 9월 국내 출간된 ‘화석맨’(김영사)은 아르디 발굴 과정을 한 편의 소설처럼 그려냈다. 저자 커밋 패티슨은 아르디 발굴을 주도한 고인류학자인 팀 화이트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생물학과 교수(72)를 8년 동안 취재해 책을 썼다. ‘화석맨’의 주인공 화이트 교수를 서면으로 만났다. ―‘화석맨’은 인류의 기원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왜 당신은 인류의 기원을 추적하나. “인간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알고 있나? 내 생각에 정답은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정답을 찾는 유일한 길이 고인류학이다. 과거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는 뼛조각을 발굴하고 이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고 싶었다.” ―아르디 발굴로 201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나 혼자 한 일이 아니다. 5, 6명이 한 일도 아니다. 700명이 넘는 동료들과 함께 아르디를 발굴하고 연구했다. ‘화석맨’의 저자가 나를 부각하는 극적인 서사로 글을 쓰느라 많은 동료들의 공헌을 다루지 않았을 뿐이다.” ―3년간 이어진 발굴과 15년 동안 지속된 연구를 통해 뼛조각의 정체를 아르디로 밝혀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모든 현장 연구가 어려운 조건에서 수행된다. 포기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난 오직 고난을 헤쳐 나갈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현재 인류의 조상은 누구인가. “찾는 중이다. 다만 현대 인류 전엔 고대 영장류가 있었고, 그 이전엔 고대 포유류가, 더 이전엔 고대 어류가 있었다. 지구에서 생명이 탄생한 순간부터 생명체는 꾸준히 진화해 왔다.” ―현재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문화유적관리청에서 일하고 있다. 매일 동료들과 뼛조각을 세척하고 분석한다.” ―세월의 풍파에 부서지고 흩어진 작은 뼛조각을 찾고 분석하느라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나. “우주를 탐사하는 우주과학, 심해를 조사하는 해양과학에 드는 비용을 생각해 보라. 고인류학은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든다. 뼛조각은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증거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키가 1.2m, 뇌 크기는 자몽처럼 작다. 손은 쥐는 동작에 유리하고 엄지 근육은 강인하다. 송곳니는 침팬지보다 작다. 발 측면에는 직립보행에 적합한 관절이 있다. 침팬지보다 입은 덜 튀어나왔고 머리 모양도 침팬지와 전혀 다르다. 이 생명체의 이름은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아르디). 440만 년 전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 살았던 인류의 조상이다. 한때 인류의 조상으로 알려졌던 30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루시)보다 과거에 존재했다.아르디의 뼛조각은 1994년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발견됐고, 2009년 전체 골격이 공개됐다. 2009년 세계적 과학저널 사이언스지에서 ‘올해의 발견’으로 선정할 정도로 인류학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아르디는 인류가 어떻게 직립보행을 시작했고 정교한 손을 진화시켰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증거였다. 초기 인류 조상이 놀라울 정도로 침팬지와 다른 모습이었음을 보여줘 학계를 흔들었다.올 9월 국내 출간된 교양과학서 ‘화석맨’(김영사)은 아르디 발굴 과정을 한 편의 소설처럼 그려냈다. 저자인 작가 커밋 패티슨은 아르디 발굴을 주도한 고인류학자인 팀 화이트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생물학과 교수(72)를 8년 동안 취재해 책을 썼다. ‘화석맨’의 주인공 화이트 교수를 서면으로 만났다.―‘화석맨’은 인류의 기원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왜 당신은 인류의 기원을 추적하나.“인간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알고 있나? 내 생각에 정답은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정답을 찾는 유일한 길이 고인류학이다. 과거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는 뼛조각을 발굴하고 이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고 싶었다.”―세월의 풍파에 부서지고 흩어진 작은 뼛조각을 찾고 분석하느라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나.“우주를 탐사하는 우주과학, 심해를 조사하는 해양과학에 드는 비용을 생각해보라. 고인류학은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든다. 뼛조각은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증거다.”―현재 인류의 조상은 누구인가.“찾는 중이다. 다만 현대 인류 전엔 고대 영장류가 있었고, 그 이전엔 고대 포유류가, 더 이전엔 고대 어류가 있었다. 지구에서 생명이 탄생한 순간부터 생명체는 꾸준히 진화해왔다.”―아르디 발굴로 201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나 혼자 한 일이 아니다. 5, 6명이 한 일도 아니다. 700명이 넘는 동료들과 함께 아르디를 발굴하고 연구했다. 고인류학자들은 뼛조각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발굴, 세척, 보존, 촬영 등 길고 고된 연구 과정을 거친다. 책의 저자가 나를 부각하는 극적인 서사로 글을 쓰느라 많은 동료들의 공헌을 다루지 않았을 뿐이다.”―3년 간 이어진 발굴과 15년 동안 지속된 연구를 통해 뼛조각의 정체를 아르디로 밝혀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모든 현장 연구가 어려운 조건에서 수행된다. 포기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난 오직 고난을 헤쳐 나갈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현재 뭘하고 있나.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문화유적관리청(Ethiopian Heritage Authority)에서 일하고 있다. 매일 동료들과 뼛조각을 세척하고 분석한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네가 최근 트위터에서 하는 활동에 대해 알고 있어. 한번 (방송에) 출연해볼 생각 있어?”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온 한겨울. 방송작가 지민은 옛 연인 현우에게 장문의 e메일을 쓴다. 소셜미디어에서 사람들이 음식 사진을 보내면 그 식당 이름을 맞히는 것으로 유명해진 현우를 방송에 섭외하기 위해서다. 지민은 “네가 먹는 데 집착이 있기는 했다”고 비꼬면서도 “회사에서 (섭외하라고) 쪼아서 연락해본다”고 구차하게 변명한다. 그렇게 지민은 PD, 후배 작가와 함께 현우를 만나 인터뷰한다. 오랜만에 마주한 옛 연인 사이는 어색하기 그지없다. 쉬는 시간마다 조금씩 얘기를 나누다가 지민과 현우는 과거 크리스마스이브에 함께 부산에 갔던 추억을 회상한다. 연애에 어설펐지만 감정엔 진실했던 시절을 떠올리고 나서야 지민은 진심으로 현우의 행복을 빌 수 있게 된다. ‘크리스마스 타일’은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2018년·창비) ‘복자에게’(2020년·문학동네) 등으로 팬층이 두꺼운 작가가 2009년 등단 뒤 처음 선보인 연작소설집. 작가는 7개 단편에서 성탄절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인심 좋은 산타클로스처럼 꺼내 선물한다. 모든 작품은 앞서 소개한 단편 ‘크리스마스에는’ 속 지민과 같은 방송작가들과 그들의 가족, 지인들로 이어져 나간다. ‘은하의 밤’은 지민의 동료 방송작가 은하가 주인공. 은하는 유방암 항암 치료를 받은 뒤 오랜만에 방송국에 복귀했다. 은하가 열심히 만든 새로운 예능프로그램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방영되기로 했지만 갑작스러운 사고로 취소된다. 은하는 절망했을까. 아니다. 라면을 후후 불어 먹으며 다음 프로그램은 뭘 찍을까 동료와 대화를 나눈다. 어떤 절망이 와도 좌절하지 않는 것, 어쩌면 그거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크리스마스의 기적 아닐까. ‘데이, 이브닝, 나이트’는 사랑 얘기다. 방송작가 소봄의 남동생인 대학생 한가을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선배 경은의 초대를 받고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에 간다. 안타깝게도 경은은 한가을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한가을 곁엔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미진이 어느새 다가온다. 짝사랑을 떠나보냈지만 새로운 사랑을 찾는 행운이 찾아오는 설렘이 성탄절 흰눈처럼 온몸을 덮는다. 직장생활에 지친 소봄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스스로를 다독이며 눈을 맞는 ‘첫눈으로’와 첫사랑과 얽힌 크리스마스 추억을 떠올리는 진희의 크리스마스를 그린 ‘하바나 눈사람 클럽’에선 연말 분위기가 물씬하다. 유학생 옥주가 중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맞는 ‘월계동(月溪洞) 옥주’, 20년을 키운 반려견을 떠나보낸 세미의 크리스마스를 그린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 등 다채로운 이야기도 펼쳐진다. 크리스마스에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는 주제는 진짜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만 있어도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처럼 벽난로 앞에서 언 손을 녹이는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어느 해보다 가슴이 뻥 뚫린 이들에게 소설처럼 올해 크리스마스는 따뜻한 일만 일어나길 기도해본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네가 최근 트위터에서 하는 활동에 대해 알고 있어. 한번 (방송에) 출연해볼 생각 있어?”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온 한겨울. 방송작가 지민은 옛 연인 현우에게 장문의 e메일을 쓴다. 소셜미디어에서 사람들이 음식 사진을 보내면 그 식당 이름을 맞추는 것으로 유명해진 현우를 방송에 섭외하기 위해서다. 지민은 “네가 먹는 데 집착이 있기는 했다”고 비꼬면서도 “회사에서 (섭외하라고) 쪼아서 연락해본다”고 구차하게 변명한다. 그렇게 지민은 PD, 후배 작가와 함께 현우를 만나 인터뷰한다. 오랜만에 마주한 옛 연인 사이는 어색하기 그지없다. 쉬는 시간마다 조금씩 얘기를 나누다 지민과 현우는 과거 크리스마스이브에 함께 부산에 갔던 추억을 회상한다. 연애에 어설펐지만 감정엔 진실했던 시절을 떠올리고 나서야 지민은 진심으로 현우의 행복을 빌 수 있게 된다.‘크리스마스 타일’은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2018·창비) ‘복자에게’(2020·문학동네) 등으로 팬층이 두터운 작가가 2009년 등단 뒤 처음 선보인 연작소설집. 작가는 7개 단편에서 성탄절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인심 좋은 산타클로스처럼 꺼내 선물한다. 모든 작품은 앞서 소개한 단편 ‘크리스마스에는’ 속 지민과 같은 방송작가들과 그들의 가족, 지인들로 이어져나간다.‘은하의 밤’은 지민의 동료 방송작가 은하가 주인공. 은하는 유방암 항암 치료를 받은 뒤 오랜만에 방송국에 복귀했다. 은하가 열심히 만든 새로운 예능프로그램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방영되기로 했지만, 갑작스러운 사고로 취소된다. 은하는 절망했을까. 아니다. 라면을 후후 불어 먹으며 다음 프로그램은 뭘 찍을까 동료와 대화를 나눈다. 어떤 절망이 와도 좌절하지 않는 것, 어쩌면 그거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크리스마스의 기적 아닐까.‘데이, 이브닝, 나이트’는 사랑 얘기다. 방송작가 소봄의 남동생인 대학생 한가을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선배 경은의 초대를 받고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에 간다. 안타깝게도 경은은 한가을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한가을 곁엔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미진이 어느새 다가온다. 짝사랑을 떠나보냈지만 새로운 사랑을 찾는 행운이 찾아오는 설렘이 성탄절 흰눈마냥 온몸을 덮는다. 직장생활에 지친 소봄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스스로를 다독이며 눈을 맞는 ‘첫눈으로’와 첫사랑과 얽힌 크리스마스 추억을 떠올리는 진희의 크리스마스를 그린 ‘하바나 눈사람 클럽’에선 연말 분위기가 물씬하다. 유학생 옥주가 중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맞는 ‘월계동(月溪洞) 옥주’, 20년을 키운 반려견을 떠나보낸 세미의 크리스마스를 그린 ‘당신 개 좀 안아봐도 될까요’ 등 다채로운 이야기도 펼쳐진다. 크리스마스에 서로를 위로할 수 있다는 주제는 진짜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만 있어도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마냥 벽난로 앞에서 언 손을 녹이는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어느 해보다 가슴이 뻥 뚫린 이들에게 소설처럼 올해 크리스마스는 따뜻한 일만 일어나길 기도해본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제우스가 성대한 파티를 연 어느 날. 저승의 신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감정에 치우친 하데스는 그만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보다 예쁘다”고 실언하고…. 화가 난 아프로디테는 둘이 이어지지 못하게 계략을 꾸민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친숙한 이 일화는 2018년부터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되는 만화 ‘로어 올림푸스’에선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 웹툰에서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게 아니라 정중하게 구애를 펼친다. 대인기피증을 앓는 하데스나 부모의 과잉보호를 벗어나려는 페르세포네란 설정도 새롭다. 평범한 남녀처럼 서로를 조금씩 이해해가며 상처를 치유해가는 서사는 수준 높은 로맨스 영화 한 편을 마주한 기분이 든다. 작품을 그린 이는 뉴질랜드 만화가 레이철 스마이스(36). 데뷔작인 ‘로어 올림푸스’는 한국어와 영어, 스페인어 등 7개 언어로 연재되며 누적 조회 수 12억 회를 넘어서는 대박을 터뜨렸다. 지난해부터 미국의 양대 만화상으로 꼽히는 ‘하비상’과 ‘아이스너상’을 휩쓸며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스마이스 작가를 최근 e메일로 인터뷰했다. ―독자와 평단의 호평이 끊이지 않고 있네요. “감사해요. 특히 올해 상을 많이 받았네요. 모든 게 작품을 연재하며 들인 노력에 대한 ‘보너스’처럼 느껴져요.” ―고전인데 현대적 설정이 재밌습니다. 아프로디테는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에로스에게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더군요. “신화를 재해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가급적 원전의 흐름을 지키면서 젊은 독자도 공감할 수 있도록 새로운 설정이나 해석에서 균형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데스는 파란색으로 우울한 느낌을, 페르세포네는 핑크빛으로 발랄하게 표현했어요. 이런 고유한 색을 부여한 이유가 뭘까요. “색이 각자의 감정을 전달하는 언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또 여러 가지 색을 띤 캐릭터는 눈에 잘 띄고 기억에도 남잖아요. 컬러는 이 작품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마케팅 도구인 셈이죠.”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로어 올림푸스’의 성공이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스마트폰 웹툰 관람이 늘어난 세태를 반영했다”고 분석했어요. “맞아요. 제 작품이 화제라는 건 미국에서 웹툰이란 장르의 인기가 높아졌다는 걸 뜻한다고 봐요. 요즘 우린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읽고, 영화를 보고, 식사를 주문합니다. 미국 독자들에게도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보는 게 하나의 일상이 되어가는 거죠.” ―원래 그래픽디자이너였다가 웹툰 작가가 됐다면서요. “네. 한국의 유명한 웹툰 ‘기기괴괴’(오성대 작가)를 보고 웹툰에 빠졌어요. 네이버가 운영하는 아마추어웹툰플랫폼 ‘캔버스’에 작품을 올렸다가 정식 연재 제안을 받았습니다. 작품이 갈수록 화제를 모아 정식으로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죠. 낯선 경험이었지만 새로운 도전에 신이 났어요.”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는데, 한국을 포함해 세계 곳곳에서 인기가 높아요. “여러 나라에서 ‘로어 올림푸스’를 본다는 건 너무 뿌듯한 일이에요! 영어로 쓴 작품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것도 놀랍고요. 이야기가 가진 공감의 힘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은 게 아닐까요. 참고로, 제 컴퓨터 바탕화면은 한국 팬이 직접 그린 ‘로어 올림푸스’ 팬아트예요.”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당분간 ‘로어 올림푸스’ 연재에 집중하고 싶어요. 언젠가 소설도 쓰고 싶지만, 아직 구체적인 건 없어요. 지금 제일 바라는 일은…, 일단 낮잠을 길고 오래 자고 싶네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영화감독 박찬욱(59)과 배우 강수연(1966∼2022)이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4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2022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을 열고 훈장을 수여했다. 보관문화훈장은 배우 송강호, 드라마 ‘아들과 딸’ 등을 집필한 작가 박진숙, 작가 허영만이 받았다. 성우 홍승옥, 연주자 변성용, 배우 김윤석, 가수 김현철, 작가 박해영, 음악감독 고(故) 방준석 등 6명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국무총리 표창은 배우 이성민, 가수 장필순, 희극인 박명수, 그룹 자우림, 감독 연상호, 제작자 김지연, 가수 지코, 작가 김보통에게 돌아갔다. 성우 김영선, 뮤지컬 배우 김선영, 제작자 한승원, 배우 전미도, 희극인 홍현희, 안무가 아이키, 가수 폴킴,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에스파는 문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어느 날 주신(主神) 제우스는 신들을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연다. 지하 세계의 신 하데스는 파티에 갔다가 여신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여신의 이름은 페르세포네. 하데스는 그만 “솔직히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보다 페르세포네가 예쁘지 않아?”라고 실언한다. 화가 난 아프로디테는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이어지지 못하게 계략을 벌이는데…. 과연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사랑은 이뤄질 수 있을까. 이 이야기는 그리스·로마 신화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웹툰 ‘로어 올림푸스’의 해석은 조금 다르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선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지만 ‘로어 올림푸스’에선 하데스가 정중하게 구애한다. 하데스가 과거 겪은 가정폭력으로 인해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고, 페르세포네가 부모의 과잉보호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쓴다는 설정도 추가됐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서로를 이해해가며 상처를 치유하는 서사는 요즘 로맨스 작품 같다. 뉴질랜드 출신 작가 레이철 스마이스(36)가 2018년부터 네이버웹툰 영어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이 작품은 최근 미국의 대표적인 만화상인 하비상(2회), 아이즈너상, 링고상을 휩쓸었다. 영어뿐 아니라 한국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인도네시아어, 일본어, 독일어 7개 언어로 연재됐고 조회 수 12억 회를 넘겼다. 작가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대중성과 작품성 모두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 특히 많은 상을 받은 것 같다. 모든 것이 작품을 연재하며 들인 노력에 대한 보너스처럼 느껴진다.”―아프로디테가 에로스에게 스마트폰 메시지를 보내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사이를 갈라놓으라고 지시하는 것처럼 다양한 현대적 설정이 가미됐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재해석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가급적 그리스·로마 신화를 따르면서 젊은 독자도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해석과 설정에 균형점을 찾으려 노력했다.”―하데스를 파란색으로 칠해 우울함을, 페르세포네를 분홍색으로 칠해 발랄함을 표현했다. 이처럼 신들에게 고유한 색을 부여한 이유가 무엇인가.“색을 각 신들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언어로 사용했다. 또 여러 색으로 표현된 캐릭터는 눈에 띄고 기억에 잘 남지 않나. 색을 ‘로어 올림푸스’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마케팅도구로 쓰려했다.”―미국 뉴욕타임스는 ‘로어 올림푸스’가 상을 휩쓴 것에 대해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스마트폰으로 보는 웹툰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것을 반영한 현상”이라고 보도했다.“‘로어 올림푸스’의 인기는 미국 내 웹툰 인기를 반영한다. 우리는 매일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고, 뉴스를 읽고, 저녁 식사를 주문한다. 젊은 미국 독자들은 만화를 모두 스마트폰으로 웹툰 본다.”―그래픽 디자인 분야에 일하다가 웹툰 작가가 됐다.“한국 공포 웹툰 ‘기기괴괴’를 본 뒤 웹툰에 빠지기 시작했다. 네이버웹툰의 아마추어 웹툰 플랫폼 ‘캔버스’에 작품을 올렸다가 정식 연재 제안을 받았다. 네이버웹툰 영어 홈페이지에서 작품이 10위 안에 들자 웹툰 작가를 정식으로 한번 해 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낯선 일이었지만 새로운 도전에 신났다.”―그리스·로마 신화에 상대적으로 덜 친숙한 한국 독자도 ‘로어 올림푸스’에 빠져들었다.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로어 올림푸스’가 읽힌다는 것은 매우 뿌듯한 일이다. 영어로 처음 연재된 웹툰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라 놀랍다. 이야기의 힘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 넘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지금 내 컴퓨터 바탕화면은 한국 팬이 직접 그린 ‘로어 올림푸스’의 팬아트(유명 그림을 팬들이 따라 그린 그림)다.”―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현재로선 ‘로어 올림푸스’ 연재에 집중하고 싶다. 언젠가는 소설도 써보고 싶은데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우선은 낮잠을 길게 오래 자고 싶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많은 한국 사람들이 서울대에 입학하길 꿈꾸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제가 서울대에서 강연을 하게 돼 기쁩니다. 저도 여기서 공부하고 싶어지네요(웃음).” 서울 관악구 서울대미술관 오디토리엄에서 22일 열린 북토크에서 장편소설 ‘파친코’를 쓴 이민진 작가(54)는 단상에 오르자마자 서울대 학생 200여 명에게 농담을 던졌다. 이날 ‘소설 파친코의 저자, 이민진 작가와의 대화’는 삼성행복대상, 부천디아스포라문학상 시상식 참석을 위해 한국에 온 그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가 초대해 열렸다. 그가 한국에 온 건 올해 8월 후 3개월 만이다. 그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어떻게든 순두부찌개를 먹으려 한다”는 글을 올리며 방한에 대한 기대감을 밝혔다. 그는 이태원 핼러윈 참사에 대한 위로로 강연의 말문을 열었다. “짧은 시간에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속상했습니다. 참담했고요. 왜 어린 친구들이 희생됐는지, 왜 사람들이 모이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게 됐는지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학생들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고 이 작가는 솔직하게 답했다. 한 남학생이 ‘파친코’에서 재일교포에 대한 남북의 지원 문제를 다루지 않은 이유를 묻자 그는 “다루고 싶었다. 하지만 인터뷰한 재일교포들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아 그 의사를 존중했다”고 말했다. ‘파친코’는 한국계 미국인인 그가 2007년 남편이 일본에서 근무할 때 재일교포들을 인터뷰한 뒤 쓴 작품이다. 한 여학생이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면서 차별당한 적이 있냐고 질문하자 그는 “그렇다. 하지만 이민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다”고 했다. 또 다른 여학생이 “‘파친코’를 쓰는 데 30년이나 걸렸는데 그 세월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나. 난 매번 무언가를 하다가 관두고 싶다”고 묻자 그는 학생을 바라보며 차분히 답했다. “다들 ‘파친코’로 성공한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는데요, 전 20대 후반에 변호사로 일하다 그만두고 남들이 모두 말리는 작가의 길을 선택했어요.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꿈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경험한 것과 느낀 것, (재일교포에 관한) 역사에 대해 쓰고 싶다는 꿈이요.” 그는 현재 집필 중인 장편소설 ‘아메리칸 학원(American Hagwon)’에 대해 말하며 학생들에게 숙제 같은 말을 던졌다. “교육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보다 새 작품을 쓰게 됐어요. 여러분이 학원에 가는 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잖아요. 그런데 그 목표가 정말 자신이 원하는 건지 생각하는 일도 중요하지 않을까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경남 하동군에 사는 오인태 시인(60·사진)은 저녁이면 손수 밥상을 차린다. 씨감자를 쪼개 넣고 바지락을 듬뿍 넣은 뒤 쑥을 올리면 밥 한 그릇은 뚝딱 비울 수 있는 바지락감자쑥국 완성. 따끈한 밥과 함께 두릅을 데쳐 초장에 찍어 먹으면 금상첨화다. 그런데 어쩐지 오 시인은 행복하다가도 밥상 앞에서 울컥 목이 멘다. 씨감자가 귀했던 어릴 적 보릿고개도 떠오르고, 혼자 밥 먹는 것도 서글퍼서다. 그럴 때마다 오 시인은 차린 밥상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리며 글도 썼다. 오늘 난 이렇게 밥상을 차려 먹었다고. 떨어져 있더라도 함께 밥 먹는 것처럼 함께 살아가자고. 지난달 에세이 ‘밥상머리 인문학’(궁편책)을 펴낸 오 시인은 10일 전화 인터뷰에서 “멀리 사는 친구들과 함께 밥 먹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2012년부터 소셜미디어에 저녁 밥상을 찍어 올렸다”고 했다. 1991년 등단한 오 시인은 36년 동안 객지를 떠돌며 초등학교 교사와 장학사 등으로 일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직업이 교사다 보니 경남 거창군과 남해군, 하동군 등에서 가족과 떨어져 떠돌이 생활을 많이 했어요. 덕분에 여러 고장 제철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도 있었죠. 한국인은 인사말로 ‘밥이나 먹자’고 하잖아요? 음식을 차린 뒤 친구들에게 같이 밥 먹자란 인사를 건네고 싶었습니다.” 책에는 오 시인이 2012년부터 차린 수천 개의 밥상 가운데 52개를 골라 이에 대한 단상을 정리했다. 결을 살려 찢은 송이를 넉넉히 넣어 송잇국을 끓이곤, 호박잎으로 겹겹이 싸서 송이를 구워주던 아버지의 사랑을 회고한다. 멸치를 우려 낸 뒤 다진 마늘, 쪽파, 통깨, 고춧가루를 넣고 양념장을 만들어 올린 잔치국수를 차려낸 뒤 잔치국수 먹으니 잔칫날이라고 너스레 떤다. 개다리소반 위에 소담하게 올린 밥상을 보다 보면 오 시인의 진솔한 마음이 전해진다. “혼자 밥상을 차리다 보면 들에서 일하다 돌아와 앞치마를 두르고 서둘러 저녁 밥상을 차리던 어머니가 생각나요. 어머니를 보면서 사랑을, 인생을 배웠죠. 함께 밥을 먹으며 두런두런 얘기 나누던 옛날처럼 밥상을 매개로 공동체 의식도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오 시인은 현재 전교생이 35명인 하동군 묵계초 교장으로 아이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니 그는 다시 밥상 얘기를 꺼내 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가장 좋은 교육은 밥상을 차려주고 함께 밥 먹으며 이야기 나누는 겁니다. 아이들에게 다른 것보다 먼저 아침밥부터 챙겨주세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오인태 시인(60)은 저녁이면 손수 밥상을 차린다. 씨감자를 쪼개 넣고, 바지락을 듬뿍 넣은 뒤 쑥을 올리면 밥 한 그릇은 뚝딱 비울 수 있는 바지락감자쑥국 완성. 따끈따끈한 밥과 함께 두릅을 데쳐 초장에 찍어 먹으면 금상첨화다. 그런데 어쩐지 오 시인은 밥상 앞에서 울컥 목이 멘다. 씨감자가 귀했던 어린시절 보릿고개도 생각나고,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서글퍼서다. 그럴 때 마다 오 시인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밥상 사진을 찍어 올리며 글을 썼다. 오늘 나는 이렇게 밥상을 차려먹었다고, 떨어져있더라도 함께 밥을 먹는 것처럼 살아가자고. 최근 에세이 ‘밥상머리 인문학’(궁편책)을 펴낸 오 시인은 10일 전화 인터뷰에서 “떨어져있는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2012년부터 SNS에 저녁 밥상을 찍어 올렸다”고 했다. 그는 1991년 등단한 시인이자 36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 장학사로 일한 교육자다. “교사라는 직업 때문에 경남 거창군, 남해군, 하동군, 진주시 등 홀로 떠돌이 생활을 많이 했어요. 덕분에 여러 고장의 제철음식을 맛보고 차려먹게 됐죠. 한국 사람들이 인사말로 ‘밥이나 먹자’고 하듯 음식을 차리곤 친구들에게 같이 밥 먹자 해보고 싶었습니다.” 신작엔 그가 2012년부터 쓴 수백 개의 밥상 중 52개 밥상과 이에 대한 단상이 담겼다. 그는 결을 살려 찢은 송이를 넉넉히 넣어 송잇국을 끓이곤 호박잎으로 겹겹이 싸서 송이를 구워주던 아버지의 사랑을 회고한다. 멸치를 우려 낸 뒤 다진 마늘, 쪽파, 통깨, 고춧가루를 넣어 양념장을 만들어 올린 잔치국수를 차려낸 뒤 잔치국수 먹는 날이 잔칫날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개다리소반 위에 밥, 반찬, 국 한 그릇만 올린 밥상을 보다보면 오 시인의 진솔한 마음이 전해진다. “혼자 밥상을 차리다보면 들에서 일하다 돌아와 앞치마를 두르고 서둘러 저녁 밥상을 차리던 어머니가 생각나요.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사랑을, 인생을 배웠죠. 함께 밥을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옛날처럼 밥상을 매개로 공동체 의식도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전교생이 35명에 불과한 경남 하동군 묵계초 교장으로 아이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니 그는 다시 밥상을 꺼내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가장 좋은 교육방법은 밥을 차려주고 함께 밥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이들에게 다른 것이 아니라 아침밥부터 챙겨주세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1944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군 병사 빌리는 낙오된다. 추위에 떨면서 독일군을 피해 다니던 빌리는 나무에 기대 잠시 쉬다 갑작스레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한다. 빌리는 1945년 포탄이 쏟아지는 독일 드레스덴에 숨어 있다가, 1955년 미국 뉴욕에서 성공한 사회인으로 대중 연설을 하고, 1976년 병원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다가 다시 1944년 12월로 돌아온다. 빌리는 자신이 어느 시공간으로 흘러갈지 통제할 수 없다. 다음에 인생의 어떤 부분이 펼쳐질지 알 수 없기에 빌리는 늘 두려워한다. 이 황당한 이야기는 미국 소설가 커트 보니것(1922∼2007)이 1969년 발표한 장편소설 ‘제5도살장’의 내용이다. 전쟁을 겪은 사람은 전쟁이 끝나도 고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전쟁에 갇혀 있다는 점을 ‘시공간 여행’으로 표현한 것이다. 전쟁의 야만성을 고발한 ‘제5도살장’은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시위가 미국에서 한창이던 때 발표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명작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빌리가 마치 정신분열을 겪는 것처럼 서술돼 읽기 난해한 작품으로도 불렸다. 하지만 ‘제5도살장’을 기반으로 만든 이 책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만화와 소설의 중간인 그래픽노블 형식을 취하면서 직관적으로 이야기를 각색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각 등장인물의 성격은 에피소드가 담긴 세 컷의 만화로 표현한다. ‘롤런드 위어리’라는 인물이 과거에 타인을 때렸던 사건을 보여주면서 폭력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점을 전달하는 식이다. 그림 역시 훌륭하다. 흰 눈이 가득한 벌판을 초록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걸어가는 쓸쓸한 모습, 연합군의 폭격 직후 드레스덴이 달 표면처럼 황폐하게 변해버린 끔찍한 광경은 원작자의 글만큼 생생하다. 빌리가 갑작스럽게 외계 행성의 동물원에 전시되고, 외계인들이 빌리와 대화하는 장면처럼 원작자의 독특한 상상도 그림으로 그럴듯하게 살아났다. 최근 작품성은 높지만 가독성이 낮았던 명작의 그래픽노블이 국내에 출간되는 것도 이 같은 장점 때문일 것이다. 미국 소설가 프랭크 허버트(1920∼1986)의 ‘듄 그래픽노블’(황금가지)은 지난해 2월 1권에 이어 지난달 14일 2권이 소개됐다. 러시아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죄와 벌 그래픽노블’(미메시스)도 지난해 11월 국내에 출간돼 화제를 모았다. 최근 출간되는 그래픽노블은 ‘만화로 만든 ○○○’ 같은 책과는 다르다. 글의 분량이 만만치 않아 읽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작화 역시 수준이 높다. 어린이, 청소년보다는 성인 독자를 타깃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해외에선 이미 주류로 자리 잡은 그래픽노블이 국내 출판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명작 그래픽노블이 속속 출간돼 인기 끌기를 기대해본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