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난방비 문제 해결 방안으로 ‘횡재세’를 거론했다. 이 대표는 25일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현 제도를 활용해 정유사에 부과금을 매기는 방안을 먼저 언급한 뒤 “차제에 다른 나라들이 다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횡재세 제도도 확실하게 도입하는 것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일부 민주당 의원은 해당 법안까지 국회에 발의해 놓은 상태다. 우선 “다른 나라들이 다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횡재세”라는 이 대표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미국 중국 일본에는 횡재세가 없다. 횡재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유럽에서 주로 도입되거나 논의되고 있다. 영국이 특히 선도적인데, 한국과는 환경 자체가 크게 다르다. 영국은 세계 3대 유종(油種) 중 하나인 ‘브렌트유’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산유국이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BP, 셸, 하버에너지 등 글로벌 석유메이저들까지 여럿 거느리고 있다. 횡재세는 이 업체들이 북해유전에서 원유와 가스를 뽑아 올리면서 얻는 초과이윤에 대해 매기는 세금이다. 영국과 달리 한국에는 자체 유전을 갖고 원유를 생산하는 ‘석유회사’가 없다. 100% 수입으로 들여온 원유를 정제해서,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 석유제품의 형태로 파는 ‘정유회사’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정유사업은 노다지나 횡재와는 거리가 있다. 원유가 등락에 따른 리스크를 고스란히 져야 하고 설비와 기술에 막대한 투자를 해야 한다. 그래서 영국도 정유사업이나 석유제품 소매를 통해 벌어들인 이윤에는 횡재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이 대표와 민주당이 또 하나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은 정유산업이 한국의 주력 수출산업이라는 사실이다. 지난해 국내 정유사들의 석유제품의 수출액은 570억 달러로 전체 품목 중 반도체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한국 정유사들의 매출 60%는 수출에서 나온다. 이런 국제 경쟁력을 갖추기까지는 사활을 건 설비투자와 기술개발, 마케팅 노력이 있었다.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통해 창출한 영업이익에 ‘횡재’라는 딱지를 붙여 국가가 거둬간다면 투자와 고용은 위축되고 경쟁력도 추락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올 초부터 횡재세가 한층 강화되자 관련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을 줄이는 계획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한국 수출산업은 가뜩이나 간판 주자인 반도체의 부진으로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다. 이런 마당에 정유산업마저 ‘세금 폭탄’으로 팔다리를 묶을 수는 없다. 횡재세는 세제 원리로 봐도 ‘나쁜’ 세금에 속한다. 명확성과 예측가능성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재무장관을 지낸 비토르 가스파르 국제통화기금(IMF) 재정국장은 유럽연합(EU)의 횡재세 도입 논의와 관련해 “세제의 안정성을 해치는 문제적 발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형평성도 문제다. 정유는 대상이 되고 반도체 자동차 방위산업 금융은 안 되는 근거는 뭔가. 난방비가 문제라고? 그럼 정유사가 아니라, 한국지역난방공사가 정확한 ‘번지수’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의 여파로 석유 수요가 급감하자, 한때 선물(先物)시장 원유가격이 배럴당 마이너스 37.63달러까지 떨어진 일이 있다. 원유를 돈을 받고 파는 것이 아니라 돈을 주고 팔아야 했다. 그해 상반기 한국 정유사들도 약 5조 원의 손실을 냈다. 앞으로 유사한 상황이 생기면 정부가 나서서 보전해주도록 할 셈인가. 반도체는? 자동차는? 철강은? 이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기본소득 재원 마련 방안으로 처음에 국토보유세를 들고나왔다. 그러나 여론의 역풍이 만만치 않자 다시 탄소세를 대안으로 내놨다. 기업들을 대상으로 연간 법인세의 절반, 또는 총액과 맞먹는 금액을 거둬들인다는 구상이었다. 이런 일이 만약 현실이 된다면 한국 기업들은 법인세를 두 번 내는 셈이 된다. 그나마 이 꼴 저 꼴 참아가며 국내에 남아 있는 기업들마저 전부 짐을 싸서 나가라고 등을 떠미는 꼴이다. 국토보유세, 탄소세, 횡재세에는 동일한 ‘스토리 라인’이 있다. 먼저 악당이 그려진다. 국토보유세에는 투기에 눈먼 땅 주인, 탄소세에는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 횡재세에는 과도한 이윤을 탐하는 기업이 악당으로 등장한다. 그러면서 정치는 스스로를, 약자를 대변하는 로빈 후드로 포장한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국민들도 진부한 ‘로빈 후드 스토리’에 이골이 난 지 오래다. 횡재세 논의는 이쯤에서 접는 것이 좋다. 기업 때리기로 정치적 ‘횡재’를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일본 히로시마현 구레(吳)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초대형 전함 ‘야마토’를 건조한 공창(工廠)이 있던 항구다. 이곳에서는 현재 길이가 248m에 이르는 대형 호위함 ‘가가’를 개조하는 작업이 8개월 넘게 진행되고 있다. 개조 작업이 끝나면 가가는 최신예 수직이착륙 스텔스 전투기 F35B를 탑재하는 항공모함으로 변신하게 된다. 가가의 자매 격인 ‘이즈모’는 2021년 6월 F35B 이착륙이 가능하도록 갑판 개조 작업을 마쳤다. 이즈모와 가가의 당초 용도는 헬리콥터 탑재용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전투기 탑재용 항공모함으로의 개조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라는 의혹이 줄기차게 제기됐었다. 일본 정부는 자위대 여성 간부용 방이라고 주장했지만, 함재기 조종사와 정비사를 위한 공간으로밖에 안 보이는 선실이 100개 가까이 만들어져 있는 등 의심스러운 대목이 많았다. 일본 정부의 본심이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2018년 말 이즈모와 가가를 항공모함으로 개조한다고 공식화했다. ‘공격용인 항공모함을 보유하는 것은 평화헌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 등에 대해 당시 일본 정부의 한 관계자가 내놓은 답은 “재해 대응 등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너무나도 옹색한 변명에, 일본의 재무장에 민감한 중국에서는 “F35B를 재난 구조에 쓰는 나라는 일본뿐”이라는 등의 비아냥이 쏟아졌다. 이즈모와 가가의 사례에서 보듯 일본 정부는 ‘공격 받을 때만 최소한으로 자위력을 행사한다’는 ‘전수방위(專守防衛) 원칙’을 교묘한 구실과 논리를 동원해 형해화시켜 왔다. 다만 지금까지는 슬금슬금, 야금야금 행동에 옮겨 왔다. 그러나 작년을 전환점으로 노골적인 ‘전수방위 이탈’과 군사대국화에 나서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1% 범위 안에서 억제하도록 돼있던 방위비 지출을 GDP의 2%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계획을 내놨고, ‘적 기지 공격능력 보유’를 3대 안보 문서에 명기했다. 물론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이 굳건한 이상 ‘적 기지 공격능력 보유’가 한국을 겨냥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방위비 증액도 현재로선 중국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한 성격이 짙다. 일본 정부 싱크탱크에서는 ‘공격하는 측은 방어하는 측보다 병력이 3배 많아야 한다’는 ‘공자(攻者) 3배’의 법칙을 방위비 증액의 명분으로 세우기도 한다. 현재 일본 국방비가 중국의 6분의 1 수준이기 때문에 GDP 대비 비율을 2배로 올려야 중국의 공격에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즈모와 가가의 항공모함화만 하더라도 중국과 영토 갈등을 빚고 있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게 일본 정부 안팎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한국이 일본의 군사대국화에 대한 경계심을 늦출 수 없는 이유는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몰고 가려는 일본의 도발 수위가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적 기지 공격능력’을 명기한 3대 안보 문서에는 “일본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명칭)에 대해 일본의 일관된 입장에 기초해 의연히 대응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직전 문서인 2013년 판 ‘국가안보전략’에는 ‘다케시마’라고만 표기했으나 이번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수식어가 추가됐다. 독도를 둘러싼 갈등으로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다. 2006년 4월 한국 측의 독도 주변 해류조사를 둘러싸고 양국은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갈 뻔했다. 이때는 한국 해경과 일본 해상보안청이 대치 전면에 나섰지만, 2018년 12월에는 우리 군과 자위대가 갈등의 당사자가 됐다. 일명 ‘초계기 갈등’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독도를 끊임없이 분쟁지역화하려는 일본이다. ‘전수방위’ 원칙이 완전히 무너지고 일본 정치의 우경화가 심화한다면, 이즈모와 가가를 센카쿠열도에는 보내고 독도 해역에는 안 보내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도 웬만한 돌발 악재에는 흔들리지 않도록, 탄탄한 우호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이 중요하다. 원활한 소통채널도 구축해야 한다. 하지만 마냥 상대방의 선의에만 기댈 수는 없는 것이 안보다. ‘설마’에 기대서도 안 된다. 윤석열 대통령은 11일 “일본도 이제 머리 위로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이 날아다니니까 방위비 증액하고, 소위 반격 개념을 국방계획에 집어넣기로 했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하지 않는 게 나았을 말이다. ‘공격할 수 있는 나라 일본’에 꽃길을 깔아줬다간 언제 우리에게 부메랑이 될지 모른다. 역사가 말한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프로 스포츠 선수들의 세계에는 ‘2년 차 징크스(sophomore jinx)’가 있다고 한다. 데뷔 첫해 펄펄 날던 선수들도 2년 차가 되면 성적이 곤두박질치는 사례가 흔하게 나타난다. 자초한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한국의 대통령들도 집권 2년 차에 정권의 명운이 달린 위기와 봉착하는 징크스를 겪어 왔다. 2000년 이후 선출된 대통령들은 거의 예외가 없었다. 2003년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3월 국회로부터 탄핵을 당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2년 차인 2009년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된 시기다. 세월호 침몰은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 2년 차에 벌어진 참사다. 문재인 대통령이 팬데믹 위기와 처음 맞닥뜨린 것은 집권 3년 차 12월이지만, 경제 정책의 간판인 소득주도성장이 좌초한 것은 2년 차일 때다. 2년 차 징크스는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예외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경제 위기 징후가 심상치 않다. 지난해 밀려든 고물가·고환율·고금리의 파도는 전주곡 정도로 느껴진다. 윤석열 정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정부가 작년 말 ‘2023년 경제전망’을 발표하면서 내놓은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1.6%다. 한국 경제가 2%에도 못 미치는 성장률을 보인 것은 1980년 오일쇼크, 1998년 외환위기,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위기 등 4번뿐이라고 흔히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과로 나타난 수치이고, 그 직전 해 정부가 내건 전망 또는 목표치는 그렇게 낮지 않았다. 2020년은 2.4%, 2009년은 3% 안팎, 1980년은 1∼4%였다. 심지어 한국경제가 역대 최악의 위기를 겪었던 1998년(―5.1%)을 목전에 두고 직전 해 정부가 잡았던 성장목표도 3%였다. 당초 5%를 제시하려 했지만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위해 성장률을 2%로 낮춰야 한다는 국제통화기금(IMF)과 타협점으로 찾은 것이 3%였다. 비단 수치만의 문제도 아니다. 앞서 4번의 위기는 각각 고(高)유가, 외환 고갈, 미국의 파생금융상품 부실, 코로나 팬데믹 등 분명한 원인이 존재했고 해법 또한 단순했다. 위기 극복은 방법이 아닌 의지의 문제에 가까웠다. 하지만 올해 한국 경제가 맞닥뜨린 위기는 미중 디커플링,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인한 에너지·식량난, 글로벌 인플레이션,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인한 경기 침체 등 원인마저 복합적이다. 윤 대통령이 어제 신년사 대부분을 경제 문제에 할애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윤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내놓은 경제 위기 해법은 크게 두 줄기다. 단기적 처방으로는 ‘해외 수주 500억 달러 프로젝트’를 포함한 수출산업 집중 지원을, 중장기적 해법으로는 노동·교육·연금 등 3대 개혁의 추진을 제시했다. 이 중 각 계층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히는 데다 법 개정까지 필요한 3대 개혁의 경우는 협치, 양보, 타협, 통합 없이는 추진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여든 야든 어느 한쪽만의 이념이나 철학을 고집해서는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유연성과 실용주의가 결합하지 않고는 해결 불가능한 과제들이다. 노동개혁만 해도, 파시즘과 공산주의 모두로부터 영국을 지켜낸 윈스턴 처칠 총리의 실용주의적 태도는 좋은 참고가 된다. 처칠은 국가 경제를 볼모로 한 파업에 대해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도 강경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한편으로는 최저임금제도의 강력한 옹호자였고 실업수당의 전신인 실업보험을 처음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최초의 직업소개소를 세우는 데도 기여했다. 윤 대통령 스스로도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3대 개혁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부와 국회 시민사회가 초당적, 초정파적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말했다. 대선 후보 시절 언론 인터뷰에서는 협치를 언급하면서 “거대 야당 인사가 청와대에 올 수 없다고 한다면 내가 밖으로 찾아가 만나겠다. 국회의사당 식당도 좋다”고 했다. 윤 대통령의 집권 3년 차인 내년에는 22대 총선이 있다. 내년 말경이면 임기가 반환점을 돌아 집권 초반에 비해 급속히 힘이 빠질 가능성이 크다. 윤 대통령이 협치를 하려고 해도 올해를 넘기면 기회 자체가 소멸할 수 있다. ‘야당 인사’들에 대한 식사 초대가 너무 늦어지면 의미가 없다. 장소도 기왕이면 국회의사당 식당보다는 한남동 관저가 좋겠다.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는 늘 두 가지 문제가 있다. 급한 것과 중요한 것. 그런데 급한 것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급하지 않다.” 이 말은 행동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긴급성과 중요성의 딜레마’라는 화두를 던졌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사람들은 무엇을 우선할까. 대부분 급한 쪽을 택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의 가치가 훨씬 클 때도 그렇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영학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사고(思考) 도구가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다. 이 매트릭스는 할 일의 모든 목록을 4개 그룹으로 나눈다. ‘급하고 중요한 일’,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 ‘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 그것이다. 이 중 뒤의 2개는 부하에게 위임하거나(Delegate) 업무 목록에서 지워버리라(Delete)는 게 전문가들의 처방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핵심은 ‘급하고 중요한 일’과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의 우선순위 또는 황금비율 결정에 있다. 국가든 기업이든 리더가 전자보다 후자에 더 큰 관심을 쏟아야 그 조직은 성공할 수 있다. ‘급하고 중요한 일’은 크게 강조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아서 스스로 챙기지만,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은 한 조직 안에서 소명감과 책임감이 남다른 사람, 즉 리더가 아니면 아무도 챙기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이 소홀히 다뤄지는 예를 찾는다면 저출산·고령화 대책이나 연금개혁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나라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안들이지만 지금 일을 하거나 안 하는 효과가 10년 뒤, 20년 뒤 나타나기 때문에 어느 정권도 명운을 걸고 덤비지 않는다. 대형 재난을 예방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고, 국민연금 폭탄 돌리기이며, 이태원 압사 참사다. 지난 7개월간 윤석열 정부의 국정 운영을 놓고는 이것저것 많이 벌이는 것 같긴 한데 뭘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굵직한 국정 어젠다도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다.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의 경계와 균형이 무너진 탓일 것이다. ‘선택과 집중’이 없다. 15일 TV로 점검회의 모습이 생중계된 120대 국정과제도 비근한 예 중 하나일 것이다. 유연하고 효율적인 정부 체계 구축, 공정한 경쟁을 통한 시장경제 활성화,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 구현, 풍요로운 어촌 활기찬 해양… 등등.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 것이 120대 국정과제 리스트다. 손에 잡히는 구체성도, 이 정부만의 정체성도 보이지 않는다. 굳이 대통령실에 현황판을 걸어놓지 않더라도 각 부처가 알아서 챙겨야 할 기본 책무들이다. 대통령에게 가장 소중한 자원은 ‘시간’이다. 대통령은 거의 무한정에 가까운 인적, 물적 자원을 쓸 수 있으나 시간만은 예외다. 위임할 것은 위임하고, 지울 것은 지워버려야 중요한 어젠다에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연금·노동·교육 등 3대 개혁과 저출산·고령화 대책 같은 것이 국가의 미래가 걸린 그런 어젠다다. 이런 일들은 대통령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윤 대통령이 15일 3대 개혁에 대해 강한 실천의지를 밝힌 것은 기대되는 대목이다. 아쉬운 점은 여전히 어떤 부분은 ‘수사(修辭)를 위한 수사’로만 읽힌다는 점이다. 연금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연금개혁에 대해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에는 연금개혁 완성판이 나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정부는 안(案)만 만들고 실행은 다음 정부에 넘기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그러나 연금개혁은 안이나 아이디어가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다. 3대 개혁과 저출산·고령화 해결의 확실한 단초만 마련해도 윤 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다. 이런 일들이 ‘대통령의 시간’을 집중 투자해야 할 일들이다. ‘긴급하고 중요한 일’들은 끊임없이 밀려오기 때문에 적당히 덜어내지 않으면 ‘번 아웃(탈진)’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 시간관리 전문가인 스티븐 코비의 이야기다. 탈진 상태가 가까워지면 ‘중요하지 않은 일’에서 도피처를 찾고, 결국은 실패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시행착오를 피하려면 윤 대통령의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장기 과제를 우선순위에 두고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이 위임하고 더 많이 지워야 한다. 무엇보다 대통령 집무실에 설치된, 보기에도 숨 막히는 ‘120대 국정과제 현황판’은 ‘책임총리’의 집무실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미국 서부 항만 물류를 장악하고 있는 국제항만창고노조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견줄 만큼 막강한 독점적 지위와 위세를 자랑한다. 미국 총수입물량의 40%가량이 이곳을 통과하다 보니 가벼운 분규 시늉만 해도 미국 경제가 경기(驚氣)를 일으킨다. ‘부두의 귀족들(Lords of Docks)’이 노조원들의 별칭이다. 이런 항만노조도 두려워하는 게 하나 있다. 파업이 국가 경제·안보를 위협할 경우 대통령이 법원 허가를 받아 노동자의 직장 복귀를 명령할 수 있도록 한, 이른바 직장복귀명령제다. 2002년 항만노조의 파업이 길어지자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 명령을 발동해 사태를 종결지었다. 윤석열 정부가 이번 화물연대 파업에서 사상 처음으로 발동한 업무개시명령의 원조가 이것이다. 이 제도가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2002년 미 서부 항만파업이 있었던 그 다음 해, 노무현 정부에서다. 이런 연관 고리 외에도 화물연대의 파업에는 윤 대통령과 노 대통령 간에 묘한 공통점이 보인다. 취임 후 처음으로 맞닥뜨린 초대형 이슈가 화물연대 파업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평행이론을 연상시킬 정도다. 2003년 5월 화물연대 포항지부의 파업이 시작되자 노 정부는 허둥지둥했다. 미국을 방문 중이던 노 대통령이 파업 진행 상황을 챙기기 위해 청와대로 전화를 했으나 당직자들이 잠을 자느라 전화를 안 받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준비 안 된 노 정부는 화물연대에 백기투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계는 기세가 올랐다. 곧이어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도입에 반발하는 전교조의 연가투쟁 선언이 터져 나왔다. 이런 배경에서 나왔던 게 “대통령을 제대로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발언이었다. 화물연대의 1차 파업에 대한 윤 정부의 대응도 오십보백보였다. 윤 대통령은 파업 초기 “노사관계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수수방관했다. 그러다가 파업으로 인한 손실이 2조 원에 육박하는 등 파장이 커지자 사태를 부랴부랴 미봉했다. 합의를 놓고 국토부는 “안전운임제 일몰제를 한시 연장하기로 했다”고 하고, 화물연대는 “일몰제를 폐기하기로 했다”고 딴소리를 했을 정도다. 큰 불씨를 남겨 2차 파업을 자초한 셈이다. 윤석열-노무현 평행이론은 여기까지다. 윤 대통령의 경우는 아직 취임 후 200여 일이 지났을 뿐이다. 나머지는 가능성의 영역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노사관계에 관한 한 노 대통령보다 훨씬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과거에 비해 크게 떨어진 데다, 문재인 정부 5년간 노사관계가 노동계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기 때문이다. 문 정부는 2020년 12월 해고자와 실직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노조전임자의 급여 지급을 허용하는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어 지난해 4월 노동자의 권리를 크게 강화하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3개를 추가로 비준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ILO 핵심 협약 8개 중 7개를 비준한 나라가 됐다. 제조업 경쟁관계에 있는 미국 중국 일본보다 수가 많은 것까지는 그렇다고 칠 수 있다. 심각한 문제는 ‘파업 시 대체 근로 허용’ 등 노사관계의 균형을 잡기 위한 경영계의 요청은 깡그리 무시됐다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강경투쟁의 선봉에 선 민노총은 문 정부의 친노조 정책을 업고 급속하게 세를 불렸다. 잦은 파업과 생산 손실은 고질병이 됐다. 임금근로자 1000명당 연평균 근로손실일수는 일본의 100배가 넘는다. 신발 속에 이렇게 큰 ‘돌덩이’를 넣어 둔 채로는 윤 대통령이 규제혁신전략회의를 백날 열어 봐야 성장 엔진이 되살아나지 않는다. 대화가 필요할 때는 대화로, 원칙을 세워야 할 때는 원칙으로 우선 눈앞의 민노총 총파업 공세를 헤쳐 나가야 하겠지만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윤 대통령의 과제는 입법을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근본적으로 바로잡는 것이다. 여소야대라는 여건상 당장의 입법이 어렵다면 최소한 내후년 총선에서 핵심 공약으로 내놓고 유권자의 판단을 물어볼 수 있는 준비를 지금부터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진보를 자처했던 노 대통령조차도 노동계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업무개시명령과 같은 입법 유산을 남겼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가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윤 대통령이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15대 국회는 1999년 초반 ‘환란 조사 특위’를 구성해 청문 활동을 한 뒤 339쪽 분량의 국정조사 결과보고서를 채택했다. 보고서는 ‘환란 극복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외환위기의 원인과 발생 과정, 책임 소재, 교훈, 대책 등을 포괄적으로 담았다. 보고서는 환란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위기 당시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의 무능함과 안이함,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늑장 보고를 꼽았다. 보고서는 또 무모한 환율방어로 인한 외환보유액 소진, 종금사 인허가 남발, 성급한 대외개방, 소극적인 산업 구조조정 등 보다 구조적인 정책 실패도 광범위하게 지적했다. 보고서만 일별해도 외환위기의 본질을 얼추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수사를 통한 책임 추궁은 실패 그 자체였다. 환란 원인 중 지엽적인 한 부분에 해당하는 ‘정책 담당자(강 부총리와 김 수석)들의 늑장보고’에 대해서만 기소·재판이 진행됐다. 범죄 구성요건을 갖춘 행위에 대해서만 객관적인 증거를 토대로 엄밀한 인과관계를 따지는 형사소추의 성격상 그 이상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법원의 판단은 1심, 2심, 3심 모두 무죄였다. 수사·재판만으로는 온전한 책임 규명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은 비단 환란 같은 ‘정책 참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1989년 영국 사우스요크셔 셰필드 힐즈버러 축구경기장에서 발생한 압사 참사, 2001년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에서 벌어진 불꽃놀이 압사 참사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건은 모두 중립적인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 현지 지방경찰 지휘부의 책임이 컸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형사재판의 결과는 딴판이었다. 힐즈버러 참사의 현지 경찰 책임자에 대해 영국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내려진 것은 사고 후 30년이 지난 2019년 11월의 일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혐의에 대해 영국 프레스턴왕실법원의 배심원단이 내놓은 평결은 무죄였다. 아카시 참사의 현지 경찰 책임자에 대한 일본 사법부의 최종 결정은 사고로부터 약 12년 뒤 나왔다. 경찰 수사 결과 과실치사 혐의로 송치된 아카시경찰서의 서장과 부서장에 대해 검찰은 “혐의 없음”으로 불기소 처분을 했다. 유족들의 반발로 길고 지루한 불복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서장은 사망했고, 부서장은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이유로 면소(免訴) 판결을 받았다. 이태원 압사 참사에 대한 경찰의 수사가 시작된 지 20일 가까이 지났다. 경찰 수사의 칼날은 주로 현장 지휘관들을 향하고 있다. 지난 17일 행정안전부와 서울시, 서울시 자치경찰위원회 등을 압수수색했지만 여론에 등 떠밀리듯 이뤄진 ‘뒷북 수색’이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나 윤희근 경찰청장,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에 대해 경찰이 제대로 된 수사 의지를 갖고 있다는 흔적이나 징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설령 경찰이 강력한 수사 의지가 있더라도 ‘윗선’의 사법적 책임을 규명하기까지는 보통 험난한 길이 아니다. 수사와 재판만 쳐다보고 있다가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책임 규명이 제대로 안 되면 재발 방지 대책인들 제대로 된 것이 나올 리 없다. 증거가 ‘오염’되거나 증인들의 기억이 시간에 ‘침식’되지 않은 초기 단계에 경찰 수사가 철저하고 신속하게 진행돼야 한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태원 참사와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면 사법적 책임과는 별개로 정책적, 행정적 책임 등을 규명할 수 있는 별도의 조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여야가 대립 중인 국정조사와 관련해서는 환란조사 특위 등의 전례를 참고해서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야당만의 반쪽 국조는 소모적인 정치공방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국조를 피해서는 안 된다. 중립적인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진상조사도 서둘러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거와 증언이 착종(錯綜)하고 흐릿해지는 것은 수사의 어려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영국 힐즈버러 참사에 대한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에 한 유족은 이렇게 절규했다. “그럼 누가 96명을 무덤 속에 밀어 넣었단 말이냐. 대체 누구 책임이라는 것이냐.”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유족들에게도 이런 한을 남기지 않으려면 수사는 수사, 국조는 국조, 전문가 조사는 전문가 조사대로 사고 원인과 책임 소재를 철저하게 밝혀내야 한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초등학생도 알 수 있게 쉬운 말을 쓸 것, 문장을 45자 전후로 짧게 쓸 것, 복문을 쓰지 말 것. 접속사를 사용해서 단문을 이어 붙일 것, 영어처럼 결론부터 말할 것, 구와 구 사이에는 1초 이상,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2초 이상의 간격을 둘 것….” 일본 효고(兵庫)현 경찰본부가 2002년 제작한 ‘혼잡 인파 경비 매뉴얼’ 한 페이지에 실린 내용 중 군중 안내·통제 멘트의 작성지침에 해당하는 대목이다. 매뉴얼은 이 밖에도 사고예방을 위한 상세한 요령을 107쪽에 걸쳐 담고 있다. 이 매뉴얼이 만들어진 계기는 2001년 7월 효고현 아카시(明石)시에서 발생한 불꽃놀이 관람객 압사 참사다. 양방향에서 밀려든 인파 때문에 육교 위에서 불꽃놀이를 보던 관람객 11명이 목숨을 잃고 200여 명이 다쳤다. 아카시 참사는 축제의 규모나 성격에서 이태원 참사와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당시 아카시 시경(市警)은 관람객 15만 명이 몰릴 것으로 예상하고 경찰관 349명을 현장에 배치했다. 이 중 인파 관리를 맡았던 경찰관은 36명에 불과했다. 190명은 폭주족 단속, 102명은 축제 현장 범죄 단속이 임무였다. 서장과 부서장은 경찰서에 앉아서 현장을 지휘했다. 아카시 참사와 이태원 참사 모두 경찰은 범죄 단속에만 신경을 쓰고 안전관리는 방치했다. 총괄책임자가 현장에 없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일본에서는 아카시 참사 후 11일 만에 법률·위기관리·건축·방재·구급의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위원회는 6개월간 독립적인 조사 활동을 한 끝에 142쪽 분량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아카시 불꽃 축제는 시(市)가 주최를 했고 137명의 인력을 투입해 경비를 담당했던 민간 전문업체가 별도로 있었지만, 보고서는 참사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곳으로 경찰을 지목했다. “현장에서 관람객에게 강제력을 갖고 대응할 수 있는 것은 제복 입은 경찰관과 기동대인 것이다. 혼잡 인파 경비의 경우 자체 경비가 원칙이라지만 그것을 조직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경찰에게만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찰의 책임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보고서는 경찰의 잘못과 관련해서는 컨트롤타워 공백을 큰 문제로 꼽았다. “총괄지휘를 해야 할 서장과 부서장이 현장 텐트가 아닌 경찰서에 있었다. 이래서는 사고가 일어나기 직전, 사고 발생 순간, 사후 대응에 이르기까지 경찰력을 집중하기 곤란했다.” 통일된 지휘계통과 치밀한 사전 시뮬레이션만이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보고서는 강조한다. “사고가 발생한다는 전제를 세워 놓고, 어떤 시나리오에 따라 일어날지를 예측하는 것, 이른바 시나리오 기법을 활용해 ‘위험 포인트’를 추출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소할지 사전협의를 진행해야 한다.” 20년 전 작성된 이 보고서가 지적하고 있는 점들이 이번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서는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서울시경과 용산경찰서, 서울시와 용산구청은 “주최자가 없는 축제”, “축제가 아닌 현상”이라는 이유 등을 들어 안전관리에 손을 놨다. 압사 위험을 호소하는 112전화가 줄을 잇는 다급한 상황에 용산경찰서장은 걸어서 10분 거리인 곳을 차로 이동하느라 1시간 가까이 허비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1일 고강도로 수사와 감찰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랬던 장본인이 압사 사고 희생자들이 앰뷸런스와 길 위에서 생사를 넘나들던 시간에 술을 마시고 잠들어 있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참사 다음 날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일찌감치 지휘부의 책임론에 선을 그은 것이다. 윤 청장이나 이 장관의 발언에 내비치는 의도대로 수사·감찰이 진행된다면 총경 몇 명과, 현장에서 몰려드는 인파를 통제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목이 터지게 부르짖던 현장 경찰관들에게만 책임이 돌아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임기응변을 제대로 하지 못한 죄일 것이다. 앞서 아카시 참사 조사위원회 보고서는 아카시 참사를 포함해 일본에서 있었던 6건의 대형 혼잡 인파 참사를 분석한 결과를 이렇게 요약했다. “이상의 사고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사고 발생 직전 현장에서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일본 와세다대 도도 야스유키 교수는 중국 등 해외발 공급망 위기가 발생했을 때 일본 경제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게 될지를 연구해 왔다. 세계 최고 성능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100만 개 일본 기업의 공급망 데이터를 분석했다고 한다. 대중(對中) 수입 80%가 두 달간 끊겼을 때 자동차, 전자, 식품 등 전 산업 분야에 걸쳐 53조 엔에 이르는 생산 소실(消失)이 발생한다는 게 도도 교수의 결론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이런 내용을 ‘제로 차이나가 되면…’이라는 제목 아래 소개했다. 53조 엔은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10%에 이르는 금액이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정해서 고민하는 일본이 별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연구의 동인(動因)은 과거 일본이 실제로 겪은 쓰라린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일본은 2010년 9월 중국-일본 간 분쟁 수역에서 자국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실랑이를 벌이던 중국 어선을 나포해 선장을 기소하려는 직전 단계까지 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희토류 수출 물량을 삭감하는 보복 조치를 단행하자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하고 20여 일 만에 ‘백기’를 들었다. ‘제로 차이나’는 일본만의 리스크일까. 그렇지 않다. 한국도 무풍지대가 아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국 봉쇄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무기로 반도체를 활용하고 있다. 제조장비와 기술 측면에서는 미국에 ‘을(乙)’이고, 제품 판매 면에서는 중국에 ‘을’인 한국으로선 언제 어느 칼날에 ‘제로 차이나’와 같은 위기를 맞을지 모른다. 반도체가 아니라 전기자동차와 디스플레이 등의 핵심 소재인 희토류 쪽에서 칼이 날아들 가능성도 있다. 중국 공산당 산하의 한 관영지는 최근 미국에 대한 희토류 수출 제한을 공공연하게 거론했다. 중국의 희토류 무기화가 현실화하고 그 불똥이 조금만 튀어도, 희토류 70% 이상을 중국에서 사다 쓰는 한국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대만 문제도 심각한 변수다. 마이클 길데이 미국 해군참모총장은 19일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2027년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올해나 내년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이 대만 침공을 결행한다면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했던 것 이상의 제재를 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한국도 당연히 제재 대열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중국도 가만히 앉아서 당할 리는 없다. 올 3월 상하이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늘어나 ‘제로 코로나’ 정책이 위협을 받자 시 전체를 두 달 넘게 봉쇄했던 중국이다. 훨씬 더 민감한 영토 문제에 관해서는 훨씬 더 극단적인 조치가 나올 것이다. 아직 한국에는 도도 교수가 한 것과 같은 심층 연구가 없지만, ‘제로 차이나’의 충격이 일본보다 작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국과 일본 모두 전체 수출입에서 대중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5% 선이다. 하지만 일본은 내수 중심 경제이고 한국은 수출 중심 경제다. 해외발 충격에 대한 저항 체력이 전혀 다르다. 전체 GDP에서 대중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일본은 6.5% 수준인 데 비해 한국은 16.5% 수준이다. 단순계산으로는 일본보다 두 배 이상 큰 충격이 올 수 있다. 상시화한 공급망 위기의 근원에 해당하는 미중 디커플링은 이미 몇 년째 진행 중이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위기의식이 없다. 신구 정권이 다르지 않다. 지난해 10월 ‘중국산 요소수 사태’ 당시 보여줬던 안일한 뒷북 대처 행태가 최근 미국의 ‘인플레감축법’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도 그대로 반복됐다. 정부는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금지 조치 이후 일본 소재·부품·장비(소부장)에 대한 의존도를 낮춘다며 부산을 떨었지만, 일본 의존이 중국 의존으로 바뀌었을 뿐 제대로 된 성과는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지금까지 10차례에 걸쳐 ‘비상경제민생회의’를 주재했지만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피상적인 논의와 백화점식 해법의 나열이 공감을 부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27일로 예정된 11번째 비상경제회의는 TV 카메라를 앞에 두고 90분간 생방송으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행여라도 빈약한 경제성과를 포장하거나, 공허한 말잔치로 현실을 호도하는 자리가 돼선 안 된다. 이번만큼은 ‘제로 차이나’ 등 한국 경제가 맞닥뜨린 본질적인 위기에 대한 진단과 제대로 된 해법을 국민 앞에 내놓기 바란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한국은 유엔무역개발회의가 공인한 선진국이다. 1인당 국민소득은 인도네시아보다 7.5배, 태국보다 4.7배가 많다. 경제적 풍요뿐 아니라 공공부문의 투명성, 사회적 안정성도 크게 앞선다. 어디를 봐도 세 나라를 하나로 묶기가 쉽지 않을 것 같지만,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름하여 ‘환란 3국’이다. 1997년 발생한 동아시아 외환위기는 많은 나라에 타격을 줬지만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구제금융까지 받은 나라는 3곳뿐이다. 달러가 초강세를 보이면서 아팠던 환란의 기억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달 26일 ‘위기 수준의 위험’을 거론하면서 가장 취약한 통화로 한국 원화, 필리핀 페소화, 태국 밧화를 지목했다. 과거 환란 3국 중 인도네시아는 거론되지 않았다. 한국 원화가 인도네시아 루피아화보다 ‘위험한 돈’이라는 평가를 받은 셈이다. 이를 일부 애널리스트와 언론의 편견으로 치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원화 가치의 추락 속도를 보면 그러기가 쉽지 않다. 올해 원화는 달러화 대비 16%가량 떨어졌다. 이에 비해 루피아화는 6% 하락에 그쳤다. 비단 루피아화뿐이 아니다. 원화 가치는 인도 루피화, 말레이시아 링깃화, 태국 밧화, 필리핀 페소화에 비해서도 더 가파르게 떨어졌다. 주가를 보더라도 올 들어 한국 코스피가 25% 떨어지는 동안 인도네시아 증시지수가 5% 오른 것을 보면 한국 경제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길이 없다. 정부는 과거보다 크게 늘어난 외환보유액 등을 들어 위기 가능성을 부인한다. 하지만 첨단산업 강국임을 자부하는 한국의 통화가 동남아시아 개발도상국들보다 약세를 보이고 있는 현상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어쩌다 한국의 원화가 동남아 여러 나라들의 통화보다 불안정하다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일까. 도널드 트럼프 이전의 세계 경제는 주요 2개국(G2)의 국제 분업에 기초해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해 왔다. 미국의 자본과 기술이 중국으로 건너가 14억 인구를 먹여살릴 일자리를 만들고, 중국은 저가의 공산품을 통해 인플레이션 없는 미국 경제를 뒷받침했다. 한국은 이 같은 세계화 흐름을 가장 잘 활용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반도체·화학제품 같은 중간재의 대중(對中) 수출이 IMF 이후 한국 경제를 견인한 주력 엔진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에서 시작된 ‘미중 신냉전’이 조 바이든 대통령 들어 더 가속화하면서 한국은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 중에서도 가장 고달픈 신세가 됐다. 한국 경제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통째로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이런 위기에서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를 잃지 않으려면 바뀐 글로벌 환경에 맞게 경제구조를 뿌리부터 개혁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변화를 이끌어야 할 정치권과 정부는 위기의식 자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집권여당은 경제를 아예 내팽개친 채 새 대통령의 임기 초기 석 달을 집안싸움으로 허비했다. 과반의석을 차지한 제1 야당은 기초연금 인상, 쌀 시장 격리 의무화 등 재정 축내기 정책으로도 모자라 과격한 파업을 조장하는 ‘노란 봉투법’까지 강행하려 한다. 제조업 기반을 아예 초토화시킬 셈인가. 더 큰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다. 한국 경제가 생존이 걸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초당적 대처가 필수인데도 윤 대통령은 최소한의 협치를 이끌어낼 리더십조차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고도의 경제안보 전략을 논의해야 할 국회를 ‘날리믄-바이든’과 같은 저급한 공방의 무대로 만들어 놓은 데도 윤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국민적 에너지를 하나로 결집시킬 비전이나 어젠다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진영·세대를 넘어 인재를 구하고 머리를 빌리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최근 인도네시아 경제의 선전(善戰)에는 자원부국이라는 배경이 깔려 있다. 하지만 정치나 정부의 리더십이 없이 경제가 저절로 잘되기는 어렵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2045년까지 세계 4대 강국에 진입한다는 그랜드 청사진을 내걸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이를 위한 정치적 추진 동력을 얻기 위해 두 번의 대선에서 맞붙은 최대 정적을 자신의 내각에 참여시켰다. 30대 벤처기업가를 교육문화부 장관으로 발탁하는 파격도 보였다. 이런 모습들을 보다 보면 원화가 루피아화보다 저평가를 당하는 현실이 자존심은 상할지언정 꼭 억울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던 시절 미국의 한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하던 후배로부터 갑작스러운 e메일을 받은 일이 있다. 꼭 읽어야 하는 영어 논문에 “일본을 알려면 ‘kashi’ 문화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앞뒤 문맥을 아무리 뜯어봐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kashi’는 일본어의 ‘貸し(가시·빌려줌)’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이다. 뒤에 ‘만든다’가 따라붙어서 남에게 호의를 베풀거나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가시(貸し)’를 만든 사람은 나중에 돌려받겠다는 의지나 기대를 갖고 있고, 상대는 언젠가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는다는 점에서 ‘통 크게 도와주고 통 크게 잊어버리는’ 우리와는 차이가 있다. 이렇게 답을 했었다. ‘가시(貸し)’는 일본인들의 사적인 대인관계뿐 아니라 정치·외교 문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키워드다. 일본에서는 내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에 대한 국장이 열린다. 분신을 하며 항의를 하는 사람이 나올 만큼 반대 여론이 거세다. 그 바람에 두어 달 전만 해도 60%대이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 지지율이 20%대까지 곤두박질쳤을 정도다. 그런데도 기시다 총리가 아베 국장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가시(貸し)’를 만들기 위해서다. 나카키타 고지 히토쓰바시대 교수(정치학)가 내놓은 분석이다. 여당인 자민당 안에서 입지가 좁은 기시다 총리가 최대 파벌인 아베파에 ‘정치적 가시(貸し)’를 만들려는 노림수라는 것이다. 이번 한일 정상 외교의 득실을 계산할 때도 ‘가시(貸し)’는 중요한 잣대다. 일단 겉으로 드러난 결과만 보면, 한일 정상 외교에서 적잖은 성과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2년 9개월간이나 끊어져 있던 두 나라 정상 간의 소통 채널을 다시 복원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있다. 일본 측 발표문을 보면 양국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데 일치했다”는 표현이 있다. ‘미래지향’은 일본이 2019년판 외교청서에 일부러 삭제했던 표현이다. 과거사에 발목이 잡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던 한일 관계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공감대는 일단 다시 살려낸 것이다. 이런 성과가 있었으니 앞으로 강제징용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우리는 일본의 전향적 양보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22일자 아사히신문에 실린 기사다. 신문이 전한 일본 측 참석자의 발언은 이렇다. “아무 성과도 없는 중에 만나고 싶다고 하니까, 이쪽은 안 만나도 좋은데도 불구하고 만났다. 일본은 한국에 ‘가시(貸し)’를 만들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일본인들이 ‘가시(貸し)’를 만들었다고 할 때는 그 대가를 돌려받겠다는 의지나 기대를 담고 있다. 강제징용 문제에 대해 일본은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양보를 한국에 요구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아사히신문이 전한 이 참석자의 발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당연히 다음에는 (한국 측이) 성과나 진전을 가지고 오겠죠.” 강제징용 문제의 근원에는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모를 일본의 ‘적반하장’식 태도가 있다. 하지만 윤 대통령 외교 참모들의 조급증과 한건주의가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정상 회동까지의 과정을 돌이켜 보면 대통령실 관계자가 이달 15일 “한일 정상회담이 흔쾌히 합의가 됐다”고 설익은 발표를 한 것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일본 측이 합의 사실을 부인하고 자국 언론을 통해 불쾌감을 공공연히 나타내면서 한일 정상 회동은 우리가 ‘통사정’을 해서 만나는 형식이 됐다. 그런 데다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가 주최하던 행사장까지 찾아가 만나는 대목에서는 자존심도 체면도 없게 됐다. 양국 국기도 내걸리지 않은 채 이뤄진 만남에 대해 ‘한일 정상 약식 회담’이라며 ‘회담’이라는 표현에 집착한 것도 ‘간담’이라고 한 일본과 대비되면서 스타일을 구기는 결과가 됐다. 윤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와의 만남에 앞서 가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사·경제·안보 등 양국의 모든 의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포괄적으로 해결하는 ‘그랜드 바겐(일괄 타결)’ 구상을 밝혔다. 이런 식의 ‘통 큰’ 외교는 지나칠 정도로 디테일과 대차(貸借)대조표를 따지고, 실무 차원에서 차곡차곡 논의를 쌓아 윗선으로 올라가는 상향식 일본 외교에 뒤통수를 맞기 십상이다. 비싼 수업료는 이번 한 번으로 족해야 한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좋지 않은 성적표와 국제 경제위기 상황에서 우리 정권이 출범했지만 국제 상황에 대한 핑계, 전 정권에서 물려받았다는 핑계가 이제 더 이상은 국민에게 통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한 말이다. 인사 실패 등 뼈아픈 지적이 나올 때마다 “전 정부와 비교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방어막을 치곤 했던 윤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유한(有限)책임이 아닌 ‘무한(無限)책임의 리더’라는 뒤늦은 자각에서 나온 말이라면, 의미 있는 변화다. 만시지탄일 따름이다. 윤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많은 부분에서 1981∼89년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로널드 레이건을 벤치마킹했다. 윤석열 정부가 내건 규제 완화, 세금 감면, 작은 정부가 모두 레이거노믹스의 뼈대에 해당하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연찬회 발언에는 한편으로 ‘전 정권에서 좋지 않은 성적표를 물려받았다’는 데 대한 억울함도 상당 부분 배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레이건과 비교하면 그럴 일도 아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할 당시 물가상승률은 두 자릿수까지 치솟은 상태였고, 연준 금리는 20%를 넘었다. 인플레이션 퇴치를 위해 연준이 급속히 금리를 올린 결과 사상 초유의 스태그플레이션의 먹구름도 몰려오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레이건은 재임 기간 중 성장·물가·고용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물가는 12%대에서 5%대로, 실업률은 7%대에서 5%대로 떨어졌고, 일자리 1700만 개가 새로 창출됐다. 윤 대통령이 주목해야 할 점은 레이거노믹스가 여소야대라는 불리한 정치 지형에도 불구하고 의회 입법을 통해 실현됐다는 점이다. 레이건이 집권했을 당시 상원은 여당인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하원은 민주당이 243석으로 192석인 공화당을 압도했다. ‘큰 정부’와 ‘넓은 복지’를 정책 골간으로 삼는 민주당이 레이거노믹스에 격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리란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건이 한 선택은 야당 지도부를 포함한 개별 의원들에 대한 지속적인 접촉과 설득, 협상이었다. 취임 이튿날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정상과 통화를 한 레이건이, 3일째에 한 것이 민주당 의원 4명과 만나 규제 완화에 대해 논의한 일이다. 취임 70일째에 존 힝클리의 흉탄이 레이건의 폐를 뚫었지만 그의 야당 설득 행보는 멈춤이 없었다. 70세의 고령이던 그가 수술을 받고 백악관에 다시 출근한 4월 24일부터 레이거노믹스가 구현된 정책을 담은 법안이 통과되는 7월 29일까지 백악관 기록에 나타난 그의 행적을 보자. 5월 4일 4그룹의 민주당 의원 28명과 토론. 5월 6일 다른 그룹의 민주당 의원들과 토론. 5월 11일 공화·민주 양당 하원의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 5월 14일 양당 상원의원 초청 리셉션. 6월 4일 보수적 성향의 민주당 의원들과 미팅. 7월 17일 민주당 의원들과 만나 법안에 대해 상의. 7월 26일 민주당 의원 15명을 캠프 데이비드로 초청해 바비큐 파티. 7월 27일 법안 통과를 호소하는 대국민 연설을 한 후 양당 의원들과 개별 접촉. 7월 28일 양당 의원 43명과 만나 법안 통과를 설득. 하루에 몇 시간씩 전화통을 붙잡고 야당 의원을 설득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법안은 238 대 195로 하원을 통과했다. 찬성표 중 48표가 민주당에서 나온 것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달 법인세와 부동산세 부담을 낮추는 내용의 세제개편안을 내놨다. 또 이달 26일에는 규제혁신전략회의를 열고 경제형벌 완화 청사진을 밝혔다. 하지만 감세든 규제 완화든 거대 야당이 지배하는 국회의 벽을 넘지 못하면 공허한 ‘입 잔치’에 불과할 뿐이다. 야당이 현 정부의 발목을 잡아 경제 살리기가 지연될 경우, 야당은 야당대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야당의 발목 잡기’가 윤 대통령의 실패에 대한 면책 사유가 될 수는 없다. 야당을 설득해서 정책을 성공시키는 것까지가 윤 대통령이 짊어진 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쌍방이 모두 지는 게임이다. 문제는 야당을 어떻게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고 설득할 것이냐다. 여론을 등에 업고 야당을 압박하는 전략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지지율 20%대 정부에는 공상일 뿐이다. 윤 대통령이 ‘경제대통령’으로 성공하기 위해 당장 시급히 배워야 할 것은 경제이론보다 ‘위대한 설득자(The Great Persuader)’, ‘위대한 소통자(The Great Communicator)’로서 레이건의 면모일 것이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1868년 5월 조선 해안을 기웃거리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은 쇄국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더 재촉한다. 그해 일본은 조선과는 정반대로 전면적인 개방과 근대화에 나선다. 메이지유신이 그것이다. 급속한 개혁으로 서구열강을 따라잡은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1945년 패망 때까지 폭압적 지배 아래 두게 된다. 1868년부터 1945년까지의 77년만큼, 한 시기의 선택으로 두 나라의 부침이 이처럼 극명하게 엇갈렸던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광복 77주년. 1945년 해방으로부터 1868년까지 시곗바늘을 되돌린 만큼의 물리적 시간이 흘러 2022년 광복절 아침이 왔다. 이제 한국은 경제 활력이나 생활수준 면에서 일본을 전혀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만한 위치가 됐다. 앞의 77년을 생각하면 뒤의 77년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변신이다. 일본 자민당의 한 정치인은 지난 4일 “한국은 어떤 의미에서는 형제국. 확실히 말해서 일본이 형님뻘”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한 대다수 일본인들의 반응은 세상 물정 모르는 헛소리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한일관계와 관련해서 일본의 시사 잡지에 실리는 기사를 봐도 ‘한일 역전(逆轉)’이라는 화두가 단연 눈에 띈다. ‘한국에 경제지표로 참패 연속이어도 “일본이 풍요롭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현실도피병’(다이아몬드 온라인 8월 4일자), “엔저로 ‘일본이 한국보다 가난해졌다’ 충격의 사실”(동양경제 온라인 7월 24일자), ‘일본경제가 한국에 추월당한 납득 가능한 이유’(동양경제 온라인 3월 7일자) 등이다. 대부분 양국 경제를 깊이 연구한 전문가들이 객관적인 통계자료와 탄탄한 논리에 근거해 써내려간 글들이다. 1990년까지만 해도 한일 사이에 놓인 경제력 격차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으로 여겨졌다. 당시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의 11배, 1인당 GDP는 3.8배였다. 하지만 지금은 GDP가 2.7배, 1인당 GDP가 1.1배 수준까지 좁혀졌다. 실질적인 구매력을 감안하면 1인당 GDP는 이미 한국이 앞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무엇이 지난 30년간의 성과를 이렇게 갈랐을까. 많은 일본 경제전문가들이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대형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력과 내성(耐性)을 꼽는다. 일본은 고통을 수반하는 구조조정을 하는 대신 재정 확대와 금융 완화 등 ‘진통제’ 대책으로 일관했다. 반면 한국은 기업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사업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과감한 신규 투자와 신시장 개척에 나섰다는 것이다. 일례로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일본의 GDP는 7% 감소했으나 한국은 4% 증가했다. 2007∼2010년 기간 중 일본의 간판기업인 도요타의 판매 대수는 95만 대가 줄어든 반면 현대·기아차의 판매 대수는 178만 대가 늘었다.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신흥국 시장의 문을 과감히 두드린 결과였다. 삼성전자가 소니를 완전히 따돌리고 ‘가전(家電) 왕좌’에 오른 것도 외환위기 직후다. 외환위기 국면에서 씨를 뿌리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현재 진행되는 글로벌 경제의 복합 위기는 1998년과 2008년의 위기에 비해 결코 만만하지 않다. 인플레이션과 침체가 동시에 진행되는 스태그플레이션만으로도 유례가 드물거니와, 미중 간의 ‘디커플링(공급망 분리)’은 간발만 헛디뎌도 ‘거대한 크레바스’에 추락할 수 있는 대지진에 비견할 만한 격변이다. 미중 디커플링이 진행되는 한, 한국은 CHIP4(미국·일본·대만+한국) 동맹 참여처럼,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 상황에 수시로 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선택이어도 위축될 이유는 없다.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입증된, 우리의 강한 위기 극복 유전자를 믿어야 한다. 미중 디커플링은 위기인 동시에 한국이 일본을 결정적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도 하다. 진짜 위기는 현상유지가 주는 안심감에 취해 CHIP4 참여와 같은 어렵고 도전적인 결단을 회피하거나, 애매하게 중간에만 서 있으면 될 것이라는 낙관에 빠질 때 시작된다. 내가 눈을 감으면 눈앞의 위협도 사라질 것이라는 착각, ‘쇄국의 뇌피셜’이 다른 껍데기를 쓰고 되살아나는 순간 과거를 향한 뒷걸음질이 시작될 것이다.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지난해 12월 하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게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른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윤 후보는 “어려운 분들을 더 도와드려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명했지만 더불어민주당 등으로부터 ‘역대급 망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이재명 민주당 후보도 신경림 시인의 시 ‘가난한 사랑 노래’를 인용해 “가난한 이가 어찌 자유를 모르겠는가”라고 일갈을 가했다. 민주당 대표 경선에 나선 이재명 의원이 지난달 29일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한 말 때문에 논란에 휩싸였다. 여당은 물론 당내 대표 경선 후보들로부터도 “위험한 발상”, “이분법 정치”라는 지적을 받은 문제의 발언은 이런 내용이다. “고학력·고소득자들, 소위 부자라고 불리는 분들이 우리 지지자가 더 많습니다. 저학력에 저소득층이 국힘 지지자가 더 많아요. 안타까운 현실인데… 언론 때문에 그러지.” 이어지는 안팎의 비판에 대해 이 의원은 “발언의 취지와 맥락을 무시한, 왜곡된 정치공세”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발언을 뒷받침하는 3월 24일자 한 일간지 기사를 SNS에 링크했다. ‘월소득 200만 원 미만 10명 중 6명, 尹 뽑았다’는 제목이 붙은 이 기사는 동아시아연구원(EAI)이 대선이 끝난 직후 설문조사를 통해 분석한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이므로 자신의 발언에는 문제가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EAI의 조사가 설령 정확하다 하더라도 이것만을 근거로 ‘민주당은 고학력·고소득층 지지자가 많고, 국민의힘은 저학력·저소득층 지지자가 많다’고 일반화한 것은 너무 나간 것이다. 노동자계층이나 빈곤층이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해준다고 주장하는 진보정당이 아니라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것을 정치학 용어로 ‘계급배반투표’라고 한다. 과거에도 이런 현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착시현상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지금까지의 대체적인 연구결과다. 6·25를 직접 경험했거나 전후 이어진 첨예한 남북대치 상황에서 살아온 고령층은 보수성향이 강하다. 이들은 50대 이하 세대에 비해 성장과정에서 교육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복지제도의 틀이 갖춰지기 전에 현역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빈곤율 또한 높다. 이런 요인을 기술적으로 제거하고 분석하면 학력이나 소득은 지지정당과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의원의 발언 내용 중 더 문제가 있는 대목은 뒷부분의 ‘남 탓’, ‘언론 탓’이다. KBS MBC TBS 등 공영방송이 민주당에 여전히 유리한 지형을 이루고 있고 보수·진보 할 것 없이 수천 개의 인터넷 매체가 난립하는 상황에서 저학력·저소득층만 유독 민주당에 불리한 정보를 주입당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두 집단을 가르는 차별적인 인식이나 편견이 없고서는 나오기 힘든 발상이다. EAI의 조사만 보더라도 ‘남 탓’ 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의원이 링크한 기사는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인 블루칼라층에서도 이 후보가 42.2% 대 53.9%로 윤 후보에게 패배한 점을 지적하며 그 배경으로 두어 가지를 든다. 첫째는 이번 대선이 부동산 선거로 치러졌다는 점이다. 지지후보 결정 이유를 묻는 질문에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꼽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이 두 번째 이유로 꼽은 것은 대장동 특혜 의혹과 배우자의 법인카드 논란 등이었다고 한다. 결국, 원인은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과 대선 후보였던 이 후보 자신이었던 것이다. 이 후보는 지난해 12월 초 대선 과정에서 자신의 가족사가 논란이 됐을 때 “비천한 집안이라 더러운 게 많이 나온다. 저를 탓하지 말아 달라”고 말해 조카살인사건 변론이나 형수욕설까지 ‘출신 탓’이냐는 지적을 받았다. ‘남 탓’이 잦아지면 병이 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정치인들의 언어 속에 학력·소득 수준과 같은 비논리적이고 차별적인 잣대로 국민을 가르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에 더해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까지 ‘이대남’ ‘이대녀’로 갈라서게 만들고, 이제는 저학력·저소득층과 고학력·고소득층까지 갈라 친다면 국민통합은 더욱더 요원한 숙제가 될 것이다. 그새 잊었는지 모르지만 앞서 이 의원이 인용한 신경림 시인의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전례도, 출구도, 우군도 안 보이는 경제위기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경제 지표와 병증은 일단 40여 년 전을 가리킨다. 미국의 전년 동월 대비 6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41년 만에 최고치를 찍었고,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진행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유령’이 40년 만에 기지개를 켜고 있다.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스태그플레이션 위기는 각국의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물가가 상승 행진을 하는 가운데 중동 전쟁으로 인한 2번의 오일쇼크가 덮친 것이 원인이었다. 각국이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을 위해 막대한 재정 지원 보따리를 풀어 놓은 와중에, 우크라이나 전쟁발 에너지·식량 인플레이션 복병을 만나 촉발된 이번 위기와 닮은 점이 있다. 혹자는 유가가 10배가량 뛴 1970년대 위기와, 유가가 2배 오른 지금의 위기를 비교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위기에는 훨씬 복잡 미묘한 지정학적 위기가 이중삼중으로 얽혀 있어서 유가 오름폭이 작다고 안도할 상황이 아니다. 철의 장막이 쳐져 있던 당시 중국·소련은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고려 요인이 아니었고 인도 브라질 등 신흥국도 존재감이 없었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등 G7만으로도 전 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위기대응 리더십이 작동했다. 이때의 경험이 밑천이 돼서 G20이 탄생했고, G20은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돌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의 G20은 회원국 간 갈등으로 빈껍데기만 남았다. G7도 러시아 제재의 예기치 않은 역풍을 만나 각자도생에 급급한 처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치솟는 물가에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면서 11월 중간선거가 위태롭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6월 하원 선거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영원한 제조업 강국’ 독일은 31년 만에 처음으로 월간 무역적자를 냈다. 독일 국민들은 올겨울 에너지난에 대비해 땔감을 사 모으는 중이다.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는 사임 위기에 몰려 있다. 상습적인 거짓말이 주된 원인이지만 고물가와 증세로 공격을 받은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이미 사임을 발표했다. 든든한 내수시장이 있는 미국 일본 유럽연합(EU)과는 달리, 한국은 우크라이나발 인플레이션 말고도 큰 우환거리가 하나 더 있다. 빈약한 내수시장과 자원시장의 빈틈을 메워준 중국이다. 30년간 한국경제의 디딤돌 역할을 해온 대중무역은 5월부터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섰다. 미중 간 공급망 전쟁이 격화하면 희토류를 독점하고 있는 중국의 자원무기화 ‘칼끝’이 언제 한국을 향할지 모른다. 전기차와 디스플레이 등 첨단제품의 필수 재료인 희토류의 공급 중단은 요소수 품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경제적 대재앙을 뜻한다. 프로레슬링에는 ‘라스트 맨 스탠딩(Last man standing)’이라는 경기방식이 있다. 어느 한쪽이 ‘KO’ 돼서 일어설 수 없을 때까지 싸우는 가혹한 룰이다. 경제에도 곧잘 쓰이는 비유인데, 지금 한국을 비롯한 세계경제가 맞닥뜨린 위기가 딱 이런 형국이다. 1979년 미국 연준 의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는 당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연 12% 수준이던 정책금리를 3개월 만에 22%까지 끌어올렸다. 볼커의 전례를 보면 올 5월 연준이 보여준 빅스텝(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은 ‘소박한 시작’일 가능성이 크다. 연준이 본격적인 금리인상 행진을 시작하면 한국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물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따른다. 한국의 가계부채와 기업부채는 모두 연간 GDP 규모를 웃돌 정도로 위험수역에 들어가 있다. 금리 인상 과정에서 ‘빚투 가계’와 ‘한계 기업’들은 피가 튀고 살이 튈 것이다. 그래도 한국은 연준을 쫓아가지 않을 수 없다. 한미 간 금리 차가 크게 벌어지면 스리랑카 꼴이 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이 잡힐 때까지 무한인내를 발휘하지 못하면 한국은 피투성이 패자가 될 것이다. 제한시간도 없는 ‘라스트 맨 스탠딩’ 매치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다. 그런데 위기 극복에 앞장서야 할 대통령과 여당, 입법으로 뒤를 떠받쳐야 할 거대 야당은 언제까지 링 밖의 구경꾼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위험할 수 있다” “스스로 판 무덤이 될 수도 있다” “원고를 안 읽으면 사고가 난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공식 일과로 굳어져 가고 있는 ‘출근길 약식회견’(도어스테핑)을 놓고 야권에서 나온 반응이다. 차례로 더불어민주당의 우상호 비상대책위원장과 윤건영 의원, 박지원 전 국정원장의 말이다. 이들의 부정적 전망에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도어스테핑이 ‘100% 리스크’라고만 볼 일은 아니다. 해외를 보면 성공 사례가 적지 않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와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비근한 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막후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파벌정치 관행을 과감히 깨고 국민에게 직접 다가가는 ‘극장 정치’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당내 비주류였던 그가 자민당 주류의 거센 저항을 이겨내고 굵직굵직한 개혁 작업을 완수할 수 있었던 무기 중 하나가 도어스테핑이었다. 고이즈미식 도어스테핑의 특징은 간결과 함축이었다. 질문 수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지만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대개 8초를 넘기지 않았다. 방송 편집 과정에서 자신의 발언 영상 일부가 잘려 나가 메시지가 왜곡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짧은 문구 안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아낸 것. 이는 ‘One Phrase Politics(한 문구 정치학)’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고이즈미식 도어스테핑에 정략적인 구석이 없지 않다면, 트뤼도식 도어스테핑은 정치 지도자가 국민에 대한 ‘설명 의무’를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경우다. 트뤼도 총리는 팬데믹 초기이던 2020년 3월부터 관저 문 앞에서 아침 도어스테핑을 시작했다. 장소만 도어스텝(문간)이었을 뿐 실제 내용은 공식 기자회견에 가까웠다. 두툼한 노트를 들고 나온 트뤼도 총리가 코로나 관련 주요 현안에 대해 먼저 설명을 하고 온라인으로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다 보면 30분을 훌쩍 넘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트뤼도 총리는 2020년 3월 이후 110일 동안 80차례나 도어스텝 회견을 했다. 이는 코로나 극복 과정의 한 상징이 됐고, 그가 지난해 9월 조기 총선을 치르고 3연임을 하는 데 중요한 동인 중 하나가 됐다. 이에 비하면 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은 갈 길이 멀다. 고이즈미식 절제와 여운도 없고, 트뤼도식 성실함과도 거리가 멀다. 전략 부재에, 메시지는 뒤죽박죽이다. 물론 1년에 한두 번 하는 기자회견조차도 이 핑계 저 핑계 들어가며 안 하려고 한 전임자들에 비하면 윤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은 신선한 충격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한국보다 정치 문화가 후진적인 일본에서조차 20년째 이어지고 있는 도어스테핑을 놓고 언제까지 “신선” 운운하면서 자기만족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참가에 의의’ 수준에서 벗어나 질적인 업그레이드를 서둘러야 할 때다. 우선 도어스테핑은 도어스테핑일 뿐이다. 한국은 이미 세계 10위 경제대국이고 사회 각 분야가 급속히 다원화된 나라다. 대통령이 발걸음을 잠깐 멈춰 세우고, 불쑥 날아드는 질문에 일도양단으로 답할 수 있는 수준의 현안은 많지 않다. 이런 사실을 망각하면 ‘주 52시간제’와 같은 중대 현안을 대통령이 나서서 꼬이게 만드는 일들이 수시로 재연될 것이다. 단답형 도어스테핑은 그것대로 하되, 복잡한 현안을 다루는 고밀도 소통은 약식이 아닌 정식 기자회견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점은 윤 대통령의 입이 향해야 할 ‘청중’은 야당도 아니고, 눈앞의 기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청중을 눈앞의 기자로 착각하면 “대통령은 처음이라… 어떻게 방법을 알려주시라” 같은 엉뚱한 답변이 나온다. 입이 야당을 향하면 “과거에 민변 출신들이 아주 뭐 도배를 하지 않았습니까”와 같은 문제 발언이 나온다. 청중이 국민이라고 생각했다면, ‘민변 도배’ 같은 짓을 하지 말라고 선거에서 소명을 부여받은 대통령의 입에서 과거 정권을 구실 삼아 똑같은 행태를 되풀이하겠다는 말이 나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이 의식해야 할 청중은 오직 국민뿐이다. 단 한순간도 카메라 너머 있는 국민들의 눈과 귀를 놓쳐선 안 된다. 그래야 도어스테핑이 심각한 정치적 리스크로 비화하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과거 대선이 끝나고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자주 등장하곤 했던 담론 중 하나가 뗏목론이다. 금강경의 ‘사벌등안(捨筏登岸)’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언덕에 오르려면 강을 건널 때 썼던 뗏목을 버려야 하듯이, 국정운영에 짐이 될 것 같은 공약은 과감히 파기하라는 것이다. 일단 당선되고 보자는 식의 공약(空約)이 난무하는 우리 정치의 현실을 감안하면 뗏목 버리기는 필요악 같은 측면이 있다. 그리고 뗏목 버리기는 어느 대통령 때고 예외 없이 행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최저임금 1만 원’ 공약과 ‘광화문 시대 개막’ 공약을 파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65세 이상 모든 노인 대상 월 20만 원 기초노령연금 지급’ 약속을 깼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반도 대운하, 행정수도 세종시 이전, 동남권 신공항 건설 공약을 줄줄이 폐기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정치권에는 여야를 불문하고 공약 파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김건희 여사의 조용한 내조와 제2부속실 폐지’ 공약을 둘러싸고도 야권 일각에서조차 파기를 권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은 “제2부속실을 설치하지 않겠다고 공약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제2부속실을 만들어 김 여사를 서포트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우선 김 여사가 아무리 조용한 내조를 하더라도 대통령 부인으로서 반드시 수행해야 할 업무가 있고, 여기까지는 공적 라인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사적인 인연으로 얽힌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김 여사 주변에 어른거리면서 내는 잡음과 혼란을 생각하면 꼭 필요한 조치다. 하지만 ‘조용한 내조’와 동전 앞뒷면 관계에 있는 ‘제2부속실 부활’은 이런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제2부속실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70년대 초다. 1973년 11월 일명 ‘가짜 중앙정보부 요원 구타 사건’을 놓고 이후락의 중정과 육영수 여사의 제2부속실이 ‘충돌’한 적이 있다. 결과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정의 완패였다. 물론 그 전부터 다른 요인들이 첩첩이 쌓여 있기는 했지만 정권 2인자로 행세하던 이후락 정보부장은 이 사건으로부터 한 달 뒤 권좌에서 밀려났다. 누가 옳았는지를 떠나서 제2부속실 권력이 얼마나 막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그것이 악용됐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박근혜 대통령이 생생하게 보여줬다. 박 대통령은 배우자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제2부속실을 존치시키면서 “소외계층을 살피는 민원창구로 활용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공언과 달리 제2부속실은 최서원(최순실)이 막후에서 국정을 농단하는 비밀통로이자 가림막으로 쓰였다. 이런 ‘흑역사’를 가진 제2부속실의 문패를 다시 꺼내 쓸 이유가 없다. ‘조용한 내조와 제2부속실 폐지’ 공약에 실린 무게도 중요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김 여사의 허위 경력 의혹이 집중적으로 제기되자, 그달 22일자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제2부속실을) 폐지하는 게 맞다고 본다. 대통령 부인은 그냥 가족에 불과하다”고 했다. 또 이로부터 4일 뒤 김 여사는 공식 사과회견을 하면서 “앞으로 남은 선거 기간 동안 조용히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겠다. 남편이 대통령이 되는 경우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약속했다. 20대 대선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도 여야 유력 후보의 ‘배우자 리스크’가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했던 선거다. 따라서 조용한 내조와 제2부속실 폐지는 윤 대통령이 내놓은, 그렇고 그런 수백 개의 공약 중 하나가 아니다. 윤 대통령 부부가 국민에게 한 가장 중요한 약속 중 하나다. 넥스트리서치가 8, 9일 SBS 의뢰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김 여사의 행보에 대해 “내조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60.6%)이 “대통령 부인으로서 공적 활동을 하는 편이 낫다”는 의견(31.3%)을 크게 앞선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제2부속실 폐지만 약속했던 것이 아니다. “청와대 직원을 30% 줄이고 수석비서관을 없애 청와대를 기구 중심이 아니라 일 중심, 어젠다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다짐도 했다. “내가 집권하는 한 검찰공화국이 될 일은 없다”고도 했다. 이런 약속들은 선거가 끝났다고 해서 ‘함부로 버려도 되는 뗏목’으로 치부돼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윤 대통령이 다른 뗏목을 버리고서라도 올라야 할 ‘언덕’이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문민정부 탄생부터 시작하면 지금까지 총 22번의 전국 규모 선거가 있었다. 7명의 대통령 중 정권 출범 직후인 허니문 기간에 첫 선거를 치른 대통령은 김대중(DJ), 이명박(MB), 윤석열 등 3명이다. DJ는 취임 후 99일 만에 제2회 지방선거를, MB는 44일 만에 18대 총선을, 윤 대통령은 22일 만에 이번 제8회 지방선거를 치렀다. 나머지 대통령들은 모두 취임한 지 한두 해가 지난 시점에 첫 선거를 맞았다. 총선과 지방선거는 성격이 많이 다른데도 3번의 ‘허니문 선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낮은 투표율이다. DJ의 허니문 선거는 당시로서는 역대 최저인 48.9%를 기록했다. 이 기록을 아래로 다시 깬 것이 MB의 허니문 선거(46.1%)다. 이번 6·1선거가 역대 8번의 지방선거 중 두 번째로 낮은 투표율을 보인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둘째, 모두 여당이 이겼다. 2회 지방선거에서는 DJP연합이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모두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을 눌렀다. 특히 수도권에서는 일방적인 압승을 거뒀다. 18대 총선은 극심한 공천 갈등으로 친박 세력이 당을 뛰쳐나간 가운데 치러졌으나 한나라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범보수 진영은 200석을 넘겼고 제1야당은 겨우 81석을 건졌다. 인물, 이슈, 정치적 환경이 완전히 달랐음에도 이런 공통점이 보이는 것은 ‘이제 막 시작하는 대통령에게 제대로 한번 일해 볼 기회는 주자’는 것이 우리 유권자들의 정서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 낮은 투표율은 ‘표는 줄 수 없지만 그래도 기회는 줘 보자’는 야당 지지자들의 존재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대선에 지고도 ‘졌지만 잘 싸웠다’는 ‘뇌피셜’에 안주한 더불어민주당이 참패를 자초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원래 유리할 수밖에 없는 선거에 ‘야당 복’까지 겹쳤으니 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윤 대통령이 행여 ‘내가 잘해서’ 또는 ‘여당이 잘해서…’라는 착각에 빠지면 지금의 민주당 꼴이 나기 십상이다. 불행히도 앞서 두 번의 허니문 선거에는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 DJ는 허니문 선거 후 679일 만에 열린 총선에서 야당에 패배했다. MB는 784일 만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충격적인 수준으로 참패했다. 윤 대통령의 허니문 선거와 다음 총선 사이의 간격은 679일. 두 대통령에게 주어졌던 골든타임과 똑같거나 거의 비슷한 기간이다. 윤 대통령이 허니문 선거의 세 번째 징크스에 붙들리지 않으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윤 대통령 주변에는 김대기 비서실장 등 MB 정권 인사들이 많다. ‘7·4·7(성장률 7%, 소득 4만 달러, 7대 경제강국) 공약’을 앞세웠던 MB노믹스의 운명을 기억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MB노믹스는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과 고유가·고물가 위기를 연이어 만나 ‘리만(李萬·이명박 대통령과 측근인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조합한 것) 브러더스 사태’라는 조롱 속에 막을 내렸다. 그런데 윤 대통령 앞으로 몰려들고 있는 위기는 MB가 맞닥뜨렸던 것보다 결코 약하지 않다. 미국과 중국 간의 신냉전으로 인한 ‘공급망 요동’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및 곡물 가격의 폭등 사태는 14년 전의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훨씬 구조적인 데다 중국 및 러시아와의 복잡한 국제정치가 얽혀 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다음 달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만날 예정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워싱턴포스트에 칼럼을 쓰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를 암살한 배후라고 바이든 행정부가 공식 지목한 인물이다. 또 바이든 행정부는 마약 밀매 혐의로 미국 사법 당국에 기소된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과도 관계 개선을 추진 중이다. 다 국제유가 때문이다. 인권과 가치관을 중시한다는 바이든 행정부가 ‘살인교사범’과 ‘마약사범’을 따질 여유조차 없는 게 지금의 인플레이션 위기다. 윤 대통령이 존경하는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을 일컬어 “한 사회를 파멸시킬 수 있는 병폐”라고 했다. 윤 대통령은 3일 지방선거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경제 위기를 비롯한 태풍에 들어와 있다. 정당의 정치적 승리를 입에 담을 상황이 아니다”라고 했다. 바른 인식이다. 다만 “집 창문이 흔들리고 마당에 나뭇가지 흔들리는 것”보다 태풍이 훨씬 가까이 와 있다는 점 한 가지를 빼고는.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아시아 순방을 할 때 일본부터 가는 것은 관례다.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2002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모두 그랬다. 그래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첫 방문지로 한국을 선택하고, 80세라는 나이와 장시간 비행 사실을 잊은 듯 공항에 내리기 무섭게 반도체공장으로 달려가는 것은 무척 낯선 풍경이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이 그간 미국에서 보여 온 행보를 곰곰이 돌이켜보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닌 것 같다. 미국 대통령은 매해 연초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 참석해서 연두교서 연설을 한다. 올해 바이든 대통령의 초청 명단에는 미국 최대 반도체 기업인 인텔의 팻 겔싱어 CEO가 있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설의 상당 부분을 인텔이 오하이오주에 지으려는 첨단 반도체공장에 대해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연설 도중 겔싱어 CEO를 가리키며 의원들의 기립 박수를 유도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바이든 대통령은 인텔의 투자를 지원하기 위한 ‘초당적혁신법안’을 빨리 통과시켜 달라고 의원들에게 호소했다. 이 법안은 양원에서 각각 다른 명칭으로 통과된 뒤 현재 병합심사가 진행 중이다. 여기에는 앞으로 5년간 반도체 관련 분야에 520억 달러를 지원하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이 밖에도 바이든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반도체 관련 회의를 직접 주재하거나 의회에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에 이렇게 공을 들이는 이유는 중국과의 안보·경제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반도체가 핵심 중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바이든 행정부 고위 관료들의 입에서 “반도체가 석유보다 중요하다”는 말까지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인텔의 공장 예정지를 ‘꿈의 땅’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산업계에는 인텔의 꿈이 한낱 ‘꿈’으로 끝날 수 있다는 비관론도 적지 않다. 인텔이 7나노의 벽에 가로막혀 있는 사이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는 5나노, 4나노를 넘어 이제 3나노 양산을 서두르고 있다. ‘초(超)격차’가 놓여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20일 삼성 반도체에서 서명한 웨이퍼의 지름은 300mm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웨이퍼를 ‘서울∼부산 거리의 지름을 가진 웨이퍼’로 확대한다고 가정할 때 그 안에 있는 개미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3나노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다. 신기(神技)에 근접한 이 기술을 우리와 대만만 갖고 있다. 더구나 삼성이 두 정상에게 선보인 웨이퍼는 세계 최초로 ‘GAA 기술’을 적용한 제품이다. 3나노까지는 기존 기술로도 가능하지만 2나노 이하는 GAA 없이는 못 나간다. TSMC는 3나노는 기존 기술로 가고, 차세대인 2나노부터 이를 적용한다는 전략이다. 비메모리 분야에서 TSMC에 밀리기만 해온 삼성으로서는 모처럼 역전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는 웨이퍼에서만 승부가 나는 산업이 아니다. 패키징 등 부가기술, 마케팅력, 소재·장비 등 연관 산업, 용지·용수·전력·세제 환경, 전문 인력 양성 및 공급 능력 등 사실상 한 나라의 총체적 역량에 의해 성패가 갈린다. 삼성과 TSMC, 고수끼리의 승부에서는 기술력보다 나머지 변수가 더 크다. 이전 문재인 정부는 이런 사실을 바이든 대통령이 작년 4월 ‘반도체화상회의’를 주재하면서 웨이퍼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 불현듯 깨달은 것 같다. 문 대통령이 나서서 “반도체 강국을 위해 기업과 일심동체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여당은 특위까지 만들어 반도체특별법을 제정한다며 뒤늦은 부산을 떨었다. 그러나 올 1월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여야 의원들과 정부 부처 관료 등 강고한 ‘규제 기득권 세력’의 손을 타면서 누더기가 된 조문들로 채워져 있다. ‘대기업 특혜 불가론’ ‘지방 균형 발전론’ 등으로 포장된 규제 논리를 앞세워 마구 칼질을 해댄 결과였다. 껍데기만 남은 지원법으로 미국 중국 일본 대만이 사활을 걸고 덤비는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겠다는 것은 몽상일 뿐이다. ‘쭉정이 특별법’은 없느니만 못하다. 백지 상태에서 다시 만들어야 한다. 또 한번 ‘누더기 입법 공정’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윤 대통령이 디테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챙겨야 한다. ‘반도체 대통령’이라는 소명감이 필요하다. 국회가 장애물이 되면 수십 번이라도 설득하고 호소해야 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좋은 모델이다. 바이든에게는 없는 ‘신기(神技)’를 썩혀선 안 된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저는 정치를 끝내기에는 아직 젊습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대선 코앞에 이 말을 했을 때부터, 그의 복귀는 확정적으로 예견됐던 일이다. 다만 3월 10일 새벽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다”며 패배를 승복하던 모습을 기억하는 유권자들로서는 빨라도 너무 빠른 그의 복귀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일 것이다. “대선 패배에 대해 성찰하고, 그것을 계기로 좀 더 성숙하고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58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다른 곳도 아닌 민주당 내부에서 나오는 지경이다. 14대 대선에서 YS에게 지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DJ는 2년 7개월이 지난 뒤에야 정치무대에 공식 복귀했다. 15대, 16대 대선에서 연이어 패배한 이회창 후보가 정치 전면에 다시 나서기까지는 각각 8개월과 4년 11개월이 걸렸다. 18대 대선의 패자인 문재인 후보도 2년이 넘는 긴 잠행 기간을 가졌다. 물론 이 고문 동렬의 ‘초고속 복귀’가 없진 않았다. 17대 대선의 패자인 정동영 후보는 대선 후 3개월 만에 총선에 출마했다. 19대 대선의 패자인 홍준표 후보는 41일 만에 당 대표 출마선언을 하고, 그로부터 13일 뒤에 대표로 선출됐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모두 결과가 좋지 않았다. 정 후보는 그해 총선에서 낙선해 체면을 구겼고, 홍 후보는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서 ‘0선’인 윤석열 후보에게 쓴잔을 마셨다. 당장은 속성 복귀의 실리가 커 보이겠지만 긴 안목에서도 그럴지는 의문이다. 결과는 이 고문 자신의 몫일 테니 복귀 타이밍은 그렇다고 치자. 문제는 0.73%포인트, 지근거리까지 대권에 다가갔던 유력 주자의 행보치고는 너무 구차하고 옹색한 복귀 명분과 ‘가오’다. 이 고문에게는 자신을 대권후보로 키워준 정치적 터전인 성남 분당갑이라는, 그다지 명분이 나쁘지 않은 선택지가 있다. 그런데도 아무 연고도 없는 인천 계양을을 택했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5선을 할 정도로 잘 닦아놓은 ‘문전옥답’이라는 정치공학의 작동 외에는 달리 설명이 안 된다. 사정기관의 수사에 대한 ‘방탄용 배지’를 손에 넣기 위해 쉬운 길을 택해 정치 재개의 노정에 올랐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의 정치행로에 훈장일까, 주홍글씨일까. 이 고문은 대선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름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작년 8월 말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함께 찍은 대담 영상에서 “제가 정치를 하게 만든 분이 사실은 노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두 달 뒤 노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했을 때는 방명록에 “대통령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따라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끝까지 가겠습니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 고문의 선택은 ‘노 전 대통령의 그 길’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정치권의 아웃사이더였던 노 전 대통령이 대권 도전에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발판이 만들어진 것이 2000년 4월의 16대 총선이었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서울 종로라는 ‘좋은 밭’을 굳이 마다하고 ‘자갈밭’이나 다름없는 부산 북-강서을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노 전 대통령의 자서전 ‘운명이다’에 잘 나와 있다. “정치 1번지라는 종로에서 당선된 명예로운 국회의원이면서도 내심 몹시 불편했다. 부산에서 도망쳐 나와 안락한 곳에 피신하고 있는 것 아닌가, 자책감이 들었다.” “‘동서 통합을 위해서 부산으로 갑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내심 ‘이익을 위한 정치’와는 다른 ‘희생의 정치’로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95년경에도 경기도지사 여론조사에서 여러 차례 1위를 했었다. 하지만 연고가 없다는 이유로 마다하고, ‘험지’인 부산을 택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연고 있는 분당갑을 마다하고 연고 없는 계양을을 선택한 이 고문과는 대비되는 행보다. 앞서 이 고문과 대담 영상을 찍은 적이 있는 박 전 장관은 계양을 출마가 공표된 7일 페이스북에 ‘정치는 명분일까 실리일까’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는 민화에 나오는 고양이 탈을 쓴 호랑이보다 단원 김홍도의 기백이 넘치는 호랑이를 너무나 당연시했나 보다. 이 혼란의 시대에 김홍도의 호랑이를 닮은 ‘이 시대의 노무현’은 찾기 힘든 모양이다.” 인천으로 간 이재명과 부산으로 간 노무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

한국갤럽이 지난주 발표한 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응답은 42%에 그쳤다. 윤 당선인이 대선에서 얻은 득표율에서 6.56%포인트가 빠졌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보다도 2%포인트 낮은 수치다. 우리나라에서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퇴임 대통령보다 낮은 지지율로 취임식을 맞은 대통령은 한 명도 없다. 퇴임 대통령의 마지막 3개월 지지율과 신임 대통령의 첫 3개월 지지율을 비교한 배수를 보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11.8배, 문재인 대통령은 6.8배, 김영삼 전 대통령은 5.9배(*)였다. 박근혜 이명박 노무현 전 대통령도 1.8∼2.5배 수준이었다. 수시로 등락하는 지지율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172석 거대야당이라는 벽과 마주하고 있는 윤 당선인에게 낮은 지지율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의석수도 의석수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검수완박’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당리당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도부가 장악하고 있는 당이다. 이런 야당을 움찔이라도 하게 만들려면, 국민의 지지를 업지 않으면 안 된다. 갤럽 조사에서 윤 당선인이 직무를 잘못 수행하고 있다고 한 응답자 중 가장 많은 26%가 ‘인사’를 이유로 꼽았다. 윤 당선인의 ‘서오남(서울대·50대 이상·남자) 인사’가 국민들로부터 이 전 대통령의 ‘고소영 인사’나, 박 전 대통령의 ‘성시경 인사’보다 결코 나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별반 다를 게 없다. 윤석열 1기 내각 장관 후보자들의 평균재산은 38억8000만 원으로 박근혜 1기 내각의 2배 수준이다. 19명의 국무위원 후보자 중 ‘아빠찬스’ ‘엄마찬스’ ‘세금탈루’ ‘위장전입’ ‘사외이사 회전문’ 등 크고 작은 의혹이나 논란에 휩싸이지 않은 후보자는 한두 명뿐이다. 이런 인사들만으로 채워진 내각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집 한 채가 있다는 이유로 80대 노모와 50대 아들이 복지 사각지대에서 쓸쓸하게 죽어가야 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까. 윤 당선인은 자신의 인사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능력주의’를 든다. 하지만 성과를 절대적 가치로 삼는 민간 기업들조차도 이제는 다양성 존중이나 균형인사가 능력주의와 양립 불가능하다거나, 실적을 훼손한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보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사회의 구성이 다양한 기업의 실적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뛰어난 실적을 낸다’는 것이 맥킨지나 딜로이트 같은 글로벌 경영컨설팅 기업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놓은 실증분석 보고서의 내용이다. 능력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다양성이 아니다. 사사로운 정이나 관계에 이끌리는 정실(情實)주의나, 편한 사람만 골라 쓰는 페이버리티즘(favoritism)이다. 윤 당선인이 아무리 능력주의를 강조한들 40년 지기라는 점 외에는 달리 인선 배경을 설명하기 힘든 인물이 보건복지부 장관 자리를 꿰차고, 당선인의 옆자리가 과거 검찰에서 편하게 부렸던 부하들로 채워진다면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다. 윤 당선인은 최근 한 TV 예능에 출연해 “대통령은 고독한 자리라고 생각한다”면서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 ‘모든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는 글귀가 적힌 패를 임기 내내 책상 위에 놓아뒀던 이야기를 언급했다. 그러나 뭐에 한번 꽂히면 뒤도 안 보고 직진하는 스타일인 윤 당선인에게 약이 될 만한 트루먼의 어록은 따로 있는 것 같다. 트루먼 전 대통령은 1959년 컬럼비아대에서 한 강연에서 ‘효율적인 정부란 독재 정부밖에 없다’라고 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배운 것이 많은, 동질한 집단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말귀 밝은 오랜 측근들로 비서진을 짜면 ‘효율’이 높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트루먼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국무위원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아직 막도 오르지 않았고, 각 부처 차관이나 비서진 인선도 이제부터 시작이다. 부적격 장관 후보자들을 솎아내고, 균형 잡힌 인선으로 지나친 능력주의 인사의 폐해를 바로잡을 기회가 윤 당선인에게는 남아 있다. 윤 당선인이 퇴임 대통령보다 지지율이 낮은 첫 신임 대통령이라는 멍에만은 지지 않기를 바란다. 취임식까지 남은 보름은 길다고 보면 얼마든지 긴 시간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 두 번째 분기 수치와 비교. 천광암 논설실장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