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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억명의 성장하는 시장, 베트남에서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자동차 브랜드는 뭘까요. 도요타? 현대자동차? 아닙니다. 바로 빈패스트(VinFast)이죠. 베트남 토종의 순수 전기차 제조회사입니다.‘베트남 기술력으로 만든 전기차가 팔리겠어?’라는 조롱에도 내수시장에서 질주하는 빈패스트. 그 중심엔 베트남 최고 부자 팜 녓 브엉(Pham Nhat Vuong) 빈그룹 회장이 있죠. 한때 ‘베트남의 도널드 트럼프’로 불리던 부동산 재벌이 이젠 ‘베트남의 일론 머스크’를 꿈꾸며 전기차에 ‘올인’ 중인데요. 빈패스트의 무모한 도전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국내 판매 1위 달성했지만‘베트남 자동차 산업의 역사적인 이정표’, ‘이전엔 아무도 생각한 적 없는 기적’.지난달 중순 10월 자동차 판매 통계가 발표되자, 베트남 언론이 들썩였습니다. 1~10월 판매량에서 처음으로 베트남 유일 자동차 제조사 빈패스트가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죠. 빈패스트는 이 기간 약 5만1000대 차량을 판매했는데요. 도요타(4만9000대), 현대차(4만8000대)를 제친 겁니다.빈패스트가 설립된 지 7년밖에 되지 않은 데다, 2년 전부터는 순수전기차만 생산한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더 주목받았습니다. 아직 전기차 인프라가 부족한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1, 2위가 모두 빈패스트 전기차(VF3, VF5)였으니까요.빈패스트 전기차가 왜 베트남에서 잘나갈까요. 일단 싸기 때문이죠. 소형 전기차 VF3는 가격이 1327만원(2억4000만 동)부터 시작합니다. 휘발유 소형차와 비교해도 가격 면에서 경쟁력 있는데요.빈패스트가 6월 말 내놓은 공격적인 마케팅도 한몫했습니다. 모든 신차 구매 고객에 계열사(V-그린) 충전소에서 1~2년 동안(모델 따라 다름) 무료 충전을 제공하고요. 모회사 빈그룹이 속한 모든 장소(쇼핑몰·호텔 등)에서 하루 5시간씩 무료 주차도 2년간 제공합니다. 게다가 각종 사은품까지. 여기에 베트남 정부의 전기차 등록비 100% 면제 정책까지 얹어졌죠.베트남 언론은 빈패스트 전기차의 경제성을 강조합니다.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하노이시의 한 택시 운전사는 “예전 택시는 하루 운행하는데 평균 30만동(1만6500원)이 들었는데, 빈패스트의 VF5 플러스로 바꾼 뒤엔 그 절반 이하”이라며 “전기차가 휘발유차보다 훨씬 경제적”이라고 말하죠.글로벌 평가는 냉정하기만그리고 빈패스트와 베트남 언론은 얘기하지 않는(하지만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결정적인 비결이 있습니다. 바로 내부 거래이죠.빈패스트 전기차는 가장 크고 확실한 고객을 잡고 있는데요. 지난해 탄생한 베트남 전기 택시회사 GSM입니다. 이 회사의 택시는 100% 빈패스트 전기차(또는 전기 오토바이)로 운영되죠. 그럼 GSM 지분 95%를 보유한 대주주는? 팜 녓 브엉 빈그룹 회장입니다. 즉, 브엉 회장의 개인회사가 빈그룹 계열사인 빈패스트 전기차를 왕창 사주고 있는 거죠. 참고로 지난해 팔린 빈패스트 전기차 3만5000대 중 70%를 GSM이 사줬습니다.이 정도면 전기차 팔아주려고 택시회사 차린 것처럼 보일 정도인데요. 물론 대기업 계열사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거야 익숙한 이야기이긴 합니다. 다만 회장 개인회사로 일감을 몰아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니 좀 특이하죠.또 치명적이지만 역시 베트남 언론에선 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운 빈패스트 전기차의 약점이 있습니다. 품질과 성능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가격이 그렇게 많이 저렴한 건 아니란 점입니다.베트남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전기차 VF5를 볼까요. 최소 구매 가격이 2588만원(4억6800만동, 플러스 버전)으로 나오는데요. 이건 배터리를 뺀 차량 가격입니다. 배터리 가격은 별도라는 뜻이죠. 빈패스트는 독특하게도 전기차 배터리에 마치 정수기처럼 ‘렌탈(구독)’ 개념을 도입했는데요. 배터리 렌탈을 선택하면 차값은 저렴해지는 대신 매달 120만~270만동(약 7만~15만원)의 구독료를 자동차 회사에 내야 합니다(충전비는 별도). 주머니가 가벼운 구매자의 초기비용을 낮추기 위해 이런 방식을 도입한 건데요.그럼 배터리가 포함된 VF5 플러스 가격은 얼마냐. 3030만원(5억4800만동)입니다. 경쟁 차종인 중국산 BYD 돌핀(베트남 판매가 3544만원)보단 저렴하지만, 대신 완충 시 최대 주행거리가 300㎞와 405㎞로 차이가 꽤 큽니다. 싼 게 비지떡이죠.빈패스트는 이미 혹독한 품질 논란을 겪었습니다. 지난해 5월 야심 차게 미국 시장에 진출한 빈패스트는 첫차로 중형 전기 SUV VF8을 출시했었죠. 이때 자동차 전문지의 리뷰가 쏟아져 나왔는데요. 좀처럼 보기 힘든 수준의 혹평 일색이었습니다. 제목만 한번 볼까요.모터트렌드 ‘2023 빈패스트 VF8 첫 번째 테스트 드라이브: 발신자에게 반환’로드앤트랙 ‘첫 번째 주행:2023 빈패스트 VF8은 받아들일 수 없다’인사이드 EVs ‘2023 빈패스트 VF8 씨티 에디션 첫 주행 리뷰: 으악’에어컨, 내비게이션, 방향지시등, 승차감, 조립 마감 등등. 너무 많고 심각한 품질 문제와 함께 예상보다 별로 싸지 않은 가격, 짧은 주행거리가 약점으로 지적됐습니다. 빈패스트는 당시 상징적으로 999대의 VF8 차량을 베트남 하이퐁에서 미국 캘리포니아로 운송해 왔는데요. 수백 대 차량이 이후 몇 달 동안 항구에 주차돼 있었다고 전해지죠. 지금도 빈패스트는 북미 지역 판매량은 따로 공개하지 않습니다.위대한 도전인가 위험한 도박인가한마디로 빈패스트가 ‘베트남 시장 1위’ 타이틀을 획득하긴 했지만, 거기엔 많은 물음표가 따라붙습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자동차 제조사로서 평판을 쌓기까진 갈 길이 구만리이죠. 당연히 빈패스트는 설립 이후 줄곧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해까지 7년 누적 손실이 약 10조원에 달하고요. 올해 3분기까지도 적자행진을 이어갑니다.그에 비해 공격적인 해외 확장을 추진하면서 벌여놓은 사업은 여기저기 너무 많습니다. 이미 북미, 유럽, 인도,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동 시장에 진출했고요. 인도와 인도네시아에는 생산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도 공장을 짓기로 했는데, 어려워진 시장 상황을 이유로 2028년으로 연기한 상황이죠.글로벌 전기차 시장이 ‘캐즘’에 빠지면서 찬 바람이 부는 요즘. ‘베트남판 테슬라’라는 빈패스트의 꿈은 그냥 한바탕 꿈으로 끝나는 게 아닐까. 이런 회의론이 당연히 나옵니다. 특히 빈패스트 주가가 지난해 8월 나스닥 상장 직후 700% 상승했다가, 다시 단숨에 95% 폭락하는 유례없는 널뛰기를 벌인 터라, 더더욱 시장의 의심이 커지죠. 지난해 한때 장중 90달러를 넘기도 했던 주가는 현재 4달러 언저리에 머뭅니다.하지만 빈패스트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이 빈패스트에 올인 중이니까요. 빈그룹 창업자이자 베트남 최대 부자인 팜 녓 브엉 회장입니다. 브엉 회장과 빈그룹은 빈패스트에 이미 100억 달러 가까운 투자금을 쏟아부었는데요. 지난달 추가 자금지원을 발표했습니다. 빈그룹은 빈패스트에 2조원을 추가 대출해 주고, 브엉 회장은 개인 자산으로 2조8000억원을 제공한다고 하죠.빈그룹은 수년 전부터 자동차 제조업에 온 역량을 집중해 왔습니다. 이를 위해, 슈퍼마켓(빈마트)을 포함한 소매업을 통째로 매각하고 항공업과 TV·스마트폰 제조업에선 과감하게 철수했죠. 빈패스트를 그룹의 최우선으로 둔 건데요.전기차 제조업은 본래 돈 벌기가 쉽지 않은 산업이죠. 테슬라조차 흑자를 내기까지 17년이 걸렸으니까요. 이러다 빈패스트 때문에 빈그룹까지 휘청거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지만, 브엉 회장은 확고합니다. 지난 6월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언제까지 빈패스트를 더 지원할 거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죠. “돈이 바닥날 때까지요.”화끈한 승부사의 과감한 베팅브엉 회장은 왜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도전할까요. 그의 기업가로서의 행보 자체가 기회 포착과 과감한 베팅의 연속이었습니다.브엉 회장의 사업 인생은 소련 붕괴 직후 혼란기였던 1993년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됐습니다. 소련 유학을 마친 뒤, 우크라이나에서 작은 베트남 국수가게를 하던 그는 값싼 인스턴트 라면에 대한 수요를 감지하고 모든 걸 걸었죠. 엄청난 이자율(월 8%)로 빚을 내서 라면 공장을 세웠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그의 라면 브랜드 ‘미비나’는 그야말로 대박이 났고요. 그는 단숨에 성공한 기업인이 됐습니다.이어 그는 빠르게 성장하던 베트남으로 눈을 돌립니다. 2001년 여행 간 해변도시 냐짱(나트랑)에서 럭셔리 리조트 개발이란 사업 아이디어를 얻은 건데요. ‘바다에 돈을 쏟아붓는다’는 조롱을 받으며 개발한 ‘빈펄리조트 냐짱’이 대성공을 거뒀고요. 이후 하노이부터 호찌민까지 베트남 전역에 호텔·리조트·고급빌라·오피스빌딩·아파트 등, 가장 큰 부동산 프로젝트를 빈그룹이 휩쓸게 됩니다. 브엉 회장은 2013년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포브스 선정 ‘빌리어네어(자산 10억 달러 이상)’에 올랐고요. 그에겐 ‘베트남의 도널드 트럼프’란 별명이 붙었습니다(트럼프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동산 재벌이었지만,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시절 얘기입니다). 물론 빈그룹이 헐값에 요지의 땅을 확보할 수 있었던 데는 정부의 지원이 있었으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고요(물론 회사 측은 특혜를 받은 적 없다고 부인합니다).그리고 이제 브엉 회장은 전기자동차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돌진합니다. 일단 기회를 잡으면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죠. 온갖 회의론이 난무하지만 그는 이를 모두 “근거 없다”고 일축합니다. 그는 지난 4월 연례주주총회에서 이런 비장한 비유를 들며 말했죠. “70년 전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투(인도차이나전쟁에서 베트남군이 프랑스연합군을 상대로 거둔 최대의 승리)의 ‘모두가 최전선을 위해, 모두를 위해 승리’라는 슬로건처럼 우리는 빈패스트를 결코 놓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즈니스 스토리가 아닙니다.”내로라하는 경쟁자들도 고전 중인 글로벌 전기차 시장. 브엉 회장의 승부사 기질이 다시 한번 빛을 발할 수 있을까요. 결과는 예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가 모든 걸 걸었다니 좀더 예의주시해 보려 합니다. By.딥다이브전기차 제조업을 키우는 건 베트남 정부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온 나라가 팍팍 밀어주면 세계적인 전기차 브랜드 하나쯤 키울 수 있으려나요. 결말이 궁금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베트남 유일의 자동차 제조사 빈패스트가 1~10월 내수 판매량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라며 베트남 언론이 환호합니다. -판매량 급증의 비결은 싼 가격+퍼주기식 마케팅, 그리고 내부거래입니다. 팜 녓 브엉 빈그룹 회장이 소유한 전기택시회사가 대놓고 빈패스트 전기차를 밀어주고 있죠. 빈패스트 전기차의 품질에 대한 혹평도 해외에선 파다합니다. -하지만 빈패스트는 공격적 해외 확장을 멈추지 않고 있죠. 이러다 빈그룹까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지만, 베트남 최고 부자 브엉 회장은 “돈이 바닥날 때까지” 빈패스트를 지원할 거라는데요. 늘 “공격이 최선”이라던 그의 도전이 계속됩니다.*이 기사는 3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관세 시한폭탄’ 타이머를 작동시켰습니다. 이미 ‘캐나다·멕시코에 25%, 중국엔 추가 10%’ 관세 예고장 날렸고요. 선거 공약이었던 모든 수입품 10~20% ‘보편관세’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전 세계가 그의 SNS 글 한 토막에 벌벌 떨고 있는데요.미국을 더 강하게 만들겠다며 보편관세라는 초강수를 뒀던 미국 대통령. 이전에 또 있었죠. 바로 1971년의 리처드 닉슨입니다. 닉슨의 팬으로 유명한 트럼프가 53년 전 닉슨 정책을 그대로 따라 한다는 점이 흥미로운데요. 트럼프가 왜 관세에 집착하는지를 알려주는 사례, 닉슨의 보편관세를 들여다봅니다. *이 기사는 2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미국을 강하게, 달러를 약하게미국이 다시 제조업을 위대하게 만들고 수출을 늘려 무역적자에서 탈출하기 위해 꼭 필요한 건 뭘까요. 트럼프 당선인에 따르면 바로 ‘달러 약세’입니다. 왜냐고요? 강달러가 미국산 제품의 수출 경쟁력을 끌어내리는 결정적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죠. 그는 지난 6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우리는 큰 통화 문제가 있습니다. ‘강한 달러-약한 엔, 약한 위안’ 등 환율 문제가 심각합니다. 저는 (과거 대통령 재임 시절) 그들과 싸웠는데 그들은 항상 통화 약세를 원했죠. 저는 더 이상 통화 약세를 유지하면 관세를 부과할 거라고 말하며 싸웠죠. 그것(강달러)은 다른 나라에 트랙터 등을 팔려고 하는 미국 기업들에 엄청난 부담입니다”미국산이 안 팔리는 게 제품 경쟁력 때문이 아니라 불리한 환율 탓이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지만, 이는 1960년대 후반부터 꽤 확고하게 자리 잡은 사고방식입니다. 그 시절 미국에선 무역흑자가 급감한 게 독일과 일본이 수출을 위해 통화가치를 일부러 낮게 유지한 탓이라고 봤죠.급기야 미국의 연간 무역수지가 19세기 이후 처음으로 적자로 돌아선 1971년. 미국 재무장관 존 코널리가 난국을 타개할 경기부양책을 닉슨 대통령에 보고합니다. 대책 중엔 그 유명한 금태환 정지(외국이 달러를 가져오면 미국이 금으로 바꿔 지급해 주던 걸 중단)와 함께 물가·임금 동결이 있었고요. 아울러 이게 포함됩니다. 모든 수입품에 일시적으로 10% 관세를 추가 부과할 것.처음 이 안을 보고 받았을 때, 닉슨 대통령은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백악관 집무실 녹음테이프엔 이런 그의 발언이 남아있죠. “수입 관세는 다른 나라에 반격하고 양보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라 날 기쁘게 하네.” (더글러스 어윈 다트머스대 경제학 교수의 ‘40년 후의 닉슨 쇼크: 수입 할증료 재검토’ 논문 참고)관세는 대중에 인기 있는 정책모든 수입품에 일제히 관세를 추가로 부과하는 ‘보편관세’는 미국에서도 1930년 이후엔 한번도 없었던 일입니다. 1971년 8월 13일 금요일,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닉슨 대통령 주재의 비밀회의에 참석한 주요 경제 참모들은 이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입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관세 인상의 부작용을 지적했습니다. 관세 탓에 수입이 줄면 미국 달러화 가치가 되레 더 뛸 수 있다는 거였죠.하지만 코널리 재무장관은 추가 관세가 다른 나라를 압박해 양보를 이끌어내는 데 효과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아울러 국내에서도 정치적으로 인기를 끌 거란 점을 강조했죠. “미국 국민에게 국경세 부과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세금이 환율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결국 참석자들은 상대국을 압박하는 협상카드로써 일시적인 추가 관세 안에 합의합니다.1971년 8월 15일 일요일 저녁,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역사에 ‘닉슨 쇼크’로 기록된 유명한 특별메시지를 발표합니다. 전 세계를 쇼크에 빠뜨린 핵심 내용은 금태환 정지였지만, 관세 인상도 있었습니다.“저는 달러를 보호하고, 국제수지를 개선하고, 미국인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합니다. 일시적인 조치로 저는 오늘 미국으로 수입되는 상품에 10%의 추가 세금을 부과합니다. 이는 불공정한 환율로 인해 미국 제품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불공정한 대우가 종료되면 수입세도 종료될 것입니다.”관세 정책은 역시나 대중에게 인기 있었습니다. 당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1%는 추가 관세에 찬성했죠. 반대는 14%뿐이고 15%는 잘 모르겠다고 답합니다.무역 상대국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곧이어 미국 재무부가 각국에 환율 조정 요구 사항을 들이밀었습니다. 미국 달러화를 18% 평가 절하하고, 특히 일본 엔화는 24% 평가 절상하라는 요구였죠. 한마디로 미국이 다른 나라에 이런 식으로 협박한 겁니다. ‘10% 관세 계속 얻어맞을래? 아니면 너희 통화가치 18% 이상 올릴래?’ 마치 조폭 같은 행태인데요. 당시는 지금과 달리 고정환율제로 정부가 공식 환율을 정하던 시절이었죠. 미국은 이런 협박이 쉽게 들어 먹힐 거라 여겼습니다.하지만 예상과 달리 상대국의 저항이 거셌습니다. 특히 일본이 세게 버텼죠. 엄청난 규모의 외화보유액을 달러 매입에 쏟아부으면서, 외환시장에서 엔화 가치를 낮게 유지하려고 애썼습니다.한 달쯤 지나서도 협상에 별 진전이 없자 국가 안보 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가 나섭니다. 그는 이런 자극이 국제적 긴장을 높이고, 상대국 보복을 불러올 거라고 우려했는데요. 하지만 추가 관세를 철회하자는 키신저 제안을 닉슨 대통령은 거부했습니다. “어려워요, 헨리. (관세는) 국내에서 인기가 너무 높아서, 무언가를 얻기 전엔 끝낼 수 없어요. 국민이 이 관세를 지지하고 있어요. 맙소사, 그냥 포기할 순 없죠.”닉슨의 승리? 미국 경제의 패배미국은 포기하지 않았고 협상을 이어갑니다. 마침내 1971년 12월 18일, 미국 워싱턴DC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10개국 재무장관이 모여 합의를 이뤘죠. 금에 대한 미국 달러 가치는 7.9% 평가절하됐고(온스당 35달러→38달러), 일본 엔화는 달러화 대비 16.9%, 독일 마르크화는 13.5% 평가절상됩니다. ‘스미스소니언 협정’이죠.한동안 버텼던 일본 정부도 ‘10% 추가 관세보다는 차라리 엔화 평가절상이 낫다’는 자국 기업들의 아우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 정도 달러화 가치 하락은 이미 외환시장에선 반영돼 있던 수준이었고, 단지 이를 각국 정부가 공식화한다는 의미이긴 했지만요.목표를 달성한 닉슨 대통령은 협정 체결 이틀 뒤인 1971년 12월 21일 10% 추가 관세를 폐지합니다. 보편관세를 협상 카드로 사용하는 실험이 4개월 만에 막을 내린 거죠.여론은 어땠을까요. 당시 타임지 기사는 스미스소니언 협정으로 얻어낸 달러화 평가 절하를 “조용한 승리”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는 닉슨과 코널리에게 승리입니다. 평가절하를 감수한 그들의 용기는 대중과 양당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그런데 말이죠. 이게 정말 미국 경제의 승리였을까요? 단기적으론 그런 것처럼 보이긴 했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엔화 절상 요구에 굴복했고, 미국은 그토록 소망하던 ‘싼 달러 시대’를 열었고, 닉슨 대통령은 이듬해 11월 압도적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으니까요.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 이후에 펼쳐집니다. 달러화 평가절하는 고스란히 미국 내 수입 물가 급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정부의 가격 통제 정책이 끝나고, 중동발 오일쇼크까지 닥치면서 1973년부터 미국 물가는 미친 듯이 급등합니다. 경기침체와 고물가가 결합한이 펼쳐지죠.또 잠시 흑자로 돌아서나 싶었던 미국의 무역수지는 1976년 다시 적자로 돌아서 지금껏 해마다 적자 행진을 이어갑니다. 이후에도 미국은 약달러 정책을 폈지만(예-1985년 플라자합의), 무역적자에서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합니다.왜 또다시 보편관세인가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트럼프 정책을 볼까요. 그는 11월 26일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내년 1월 20일 취임하자마자 “펜타닐과 불법 이민자의 침공이 멈출 때까지” 멕시코와 캐나다산 모든 제품에 25%, 중국에 10%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했죠. 미국의 1, 2, 3위 교역국을 한꺼번에 겨냥했는데요. 관세를 협상 무기화한 겁니다. ‘관세 맞을래, 요구사항 들어줄래’라는 협박이 53년 전 닉슨의 정책과 매우 유사한데요.그때와 크게 달라진 건 미국의 교역 상황입니다. 1971년 미국의 상품 수입은 GDP의 3.4%에 그쳤지만, 지난해엔 12.7%에 달합니다. 그만큼 미국 경제의 수입 의존도가 높고 관세 영향이 크단 뜻이죠. 자칫 미국 기업, 소비자가 타격을 입을 수 있는 겁니다.게다가 주요 교역 상대국이 협박한다고 호락호락 말 들을 것 같지도 않죠. 중국은 이미 2018년 트럼프 1기가 관세를 올렸을 때 인민은행이 위안화 가치를 떨어뜨려서 관세를 무력화한 적 있습니다. 위안화가 지금보다 더 약해지는 것(즉, 미국 달러가 상대적으로 더 강해지는 것)은 트럼프의 희망 사항과 정반대되는 일이기도 합니다.물론 그걸 다 알고도 트럼프는 관세라는 무기를 쉽게 놓진 않을 겁니다. 이미 ‘보편관세’를 선거공약으로 외쳐 당선됐으니, 앞으로 다른 나라로 더 범위를 넓혀갈지도 모르죠. 그 나라를 협상장에 앉히기 위해서라면 말입니다.그리고 관세는 정치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미국 제조업을 살리고 일자리를 구한다’는 목표야 같지만, 대중에겐 바이든식 당근(보조금)보단 트럼프식 채찍(관세)이 더 소구하는 법입니다. 50여 년 전 닉슨 전 대통령 사례가 이를 입증해주죠. 참고로 트럼프는 1980년대부터 닉슨과 깊은 친분을 나눈 닉슨 팬이기도 합니다(둘의 성향이 많이 닮았죠).최근 여론조사도 이를 확인해 줍니다. 11월 중순 CBS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트럼프의 관세 정책에 대해 응답자의 52%는 긍정적이라고 답했고요. 특히 트럼프를 찍은 유권자는 83%가 이를 선호했습니다. 경제학자들이 뭐라 하든(UBS ‘보편관세 10% 부과하면 물가 1.7% 상승’ 전망), 실제 무얼 얻어낼 수 있든, 관세는 정치적으로 좋은 무기입니다. 폴 크루그먼의 말대로 나쁜 경제 아이디어는 죽기를 거부하나 봅니다. 관세의 무기화라는 좀비 아이디어가 다시 활개 칩니다. By.딥다이브아직 취임이 50일 정도 남았지만 전 세계 경제계가 온통 트럼프 이야기만 하는 듯합니다. 관세 폭탄은 과연 터질까요.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모든 수입품에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보편관세. 이를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 경제에서 유일하게 부과한 사례가 있습니다. 1971년 8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입니다. -당시 미국은 무역적자의 원인이 강달러에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10% 보편관세를 부과한 뒤, 교역 상대국에 달러 평가절하를 요구했죠. 4개월의 협상 끝에 마침내 스미스소니언 협정으로 목표를 달성합니다. -‘관세의 무기화’는 정치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닉슨은 재선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정작 달러 평가절하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면서 미국 경제는 심각한 침체를 겪었죠. 이제 다시 트럼프 당선인이 관세를 협상 무기로 꺼내들었습니다. 왜 나쁜 경제정책은 죽지 않고 살아날까요. *이 기사는 2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자산이 99조원에 달하는 아시아 2위 부자인 인도인이 있습니다. 바로 가우탐 아다니(Gautam Adani). 인도 아다니 그룹의 창립자이자 회장이죠. 무케시 암바니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 회장(순자산 134조원)과 함께 인도 경제를 대표하는 거물인데요.이 아다니 회장이 미국 연방 검찰과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의해 기소당했습니다. 혐의는 뇌물 공여와 증권 사기. SEC는 아다니 회장에 대한 소환장을 발부했죠.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솔직히 놀랍지 않지만, 이 사건의 파장이 어디까지일지가 궁금합니다. 아다니의 뇌물스캔들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자수성가의 신화. 비결은 친구?10년 전만 해도 인도 3대 대기업 하면 타타그룹·릴라이언스그룹·비를라 그룹이 꼽혔습니다. 각각 1868년, 1958년, 1857년 설립된 전통 있는 기업들이었죠. 1988년 설립된 아다니 그룹은 그때만 해도 아직 인도에서 10위권 안팎에 머물렀는데요.이제 아다니는 인도 경제를 얘기할 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3대 대기업이 됐습니다. 항만·광산·공항·발전소·에너지·시멘트·부동산을 포함하는 거대한 제국이죠. 아다니는 인도 최대 민간 전력기업이자 최대 태양광 발전단지 운영업체이고, 인도에서 두 번째로 큰 시멘트 제조사입니다. 아다니의 13개 항구는 인도 컨테이너의 거의 절반을 운송하고, 7개 공항은 매년 9000만명 이상이 이용합니다. 인도에서 가장 긴 고속도로 건설과 인도의 가장 큰 빈민가 재개발을 하는 기업이기도 하죠.작은 직물상의 아들 가우탐 아다니는 어떻게 자수성가로 인도 경제를 대표하는 거물로 성장했을까요. 무역업체로 시작된 아다니 그룹이 도약 발판을 마련한 건 1995년. 구자라트주 정부로부터 문드라 항구 운영 계약을 따내면서부터입니다. 당시 문드라는 작고 오래된 적자투성이 항구였습니다. 하지만 아다니 회장은 직관적으로 항만사업이 돈이 된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500명 넘는 개인 토지 소유자와의 협상 끝에 주변 습지와 목초지를 사들이고, 철도와 도로를 연결해 항구를 대폭 확장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 문드라 항구가 이젠 인도 최대의 민영 항구로 성장했죠.성장 궤도에 오른 아다니 회장은 그의 생애 가장 중요한 인물을 만납니다. 바로 나렌드라 모디, 현 인도 총리이죠. 2001년 모디가 구자라트 주지사로 취임한 뒤, 아다니는 구자라트주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약속하며 모디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합니다. 이에 모디도 2003년 문드라를 경제특구(SEZ)를 지정하며 아다니 그룹에 날개를 달아줬죠. 20년 넘게 끈끈하게 이어지는 모디-아다니 파트너십이 탄생합니다.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 있죠. 2014년 선거 승리로 총리직에 오르게 된 모디가 비행기에 올라타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는 장면인데요. 그 옆에 ‘adani’ 글자가 또렷하게 보입니다. 선거 기간 내내 모디가 이용했던 아다니의 개인 제트기였죠.모디 정부에서 아다니의 사업 무대는 한층 넓어지고 확장엔 불이 붙습니다. 국가 계약·허가가 필요한 항구·공항·발전소 같은 인프라 분야에서 아다니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죠. 인프라와 신재생에너지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는 모디의 경제정책 방향은 아다니 그룹 포트폴리오와 너무나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정부 규제도 아다니 편이었죠. 2018년 정부가 공항 소유권 규제를 풀자마자 아다니는 단숨에 7개 공항 운영권을 확보하게 됩니다.모디의 총리 취임에 맞춰 아다니는 글로벌 확장에도 시동을 겁니다. 스리랑카·말레이시아·방글라데시·베트남 같은 아시아는 물론, 탄자니아·케냐·이스라엘까지. 각종 해외 인프라 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는데요. 인도 언론 스크롤에 따르면 아다니의 이런 글로벌 사업 대부분이 모디 총리가 그 나라를 방문하거나 그 나라 지도자와 만난 지 몇 달 안에 양해각서가 체결됐습니다. 참 절묘한 타이밍이죠.모디 정부와 아다니 그룹의 유착관계를 두고 인도 야당은 ‘정실 자본주의’라며 비난합니다. 특히 2022년 아다니가 정부 비판 매체였던 NDTV(뉴델리TV)를 적대적으로 인수한 건 정경유착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데요(물론 인수 뒤 NDTV의 논조는 180도 달라짐).솔직히 이런 정경유착, 한국 경제에서도 꽤 오랫동안 고질적인 문제였어서 그리 놀랍진 않습니다. 사실 어느 정도 짐작했던 바죠. 문제는 아다니 그룹이 그동안 너무 빠르게 성장하는 바람에 이제 글로벌 시장이 주목하는 인도 대표 기업이 되어버렸단 점입니다. 굵직한 인프라 사업을 벌이다 보니, 해외 자금 의존도가 높기도 하고요. 그만큼 보는 눈이 많아진 겁니다.2년 전 힌덴버그발 충격 있었지만2022년 말, 무섭게 뛴 아다니 그룹 주가는 천장을 뚫을 기세였습니다. 그룹의 중심인 아다니 엔터프라이즈 주가가 2년 반 만에 30배로 치솟았으니까요. 그 시기 가우탐 아다니 회장은 제프 베저스 아마존 창업자와 세계 2위 부자 자리를 두고 겨룰 정도의 거물이 돼 있었습니다.그리고 2023년 1월, 미국 공매도 투자업체 힌덴버그 리서치의 100쪽짜리 보고서가 아다니 제국을 강타합니다. 아다니 그룹이 “수십년간 뻔뻔한 주가조작과 분식회계에 관여했다”는 내용이었죠. 주가는 폭락했고 한 달 만에 그룹 시총의 76%, 1500억 달러나 날아갔습니다. 인도 증시 전반을 휘청거리게 만든 엄청난 충격이었는데요.더 놀라운 건 그다음 이야기입니다. 아다니 그룹은 힌덴버그 주장을 전면 부인하고 413쪽짜리 반박 보고서를 내며 역공을 펼칩니다. 인도 집권여당도 ‘외국 자본의 부당한 간섭’이라며 비판에 열을 올렸죠. 인도 투자자들의 민족주의적 투자+저가 매수 움직임도 가세했습니다. 그 결과 주가는 상당 부분 회복됩니다.인도증권거래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사했지만, 올해 7월 되레 힌덴버그가 보고서를 “고의적·선정적으로 왜곡했다”며 부정거래 혐의로 제소했죠. 아다니에 대해선 아직 아무 조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잠시 떠들썩했던 힌덴버그와의 싸움은 사실상 아다니의 판정승으로 끝나고 묻히는 듯했습니다.“아다니 회장을 뇌물 공여로 기소한다”이제 투자자들 기억에서 힌덴버그 보고서 기억이 희미해지던 지난주. 미국 뉴욕동부 연방 검찰청의 수요일 오후 발표가 바다 건너 인도의 목요일 새벽을 깨웁니다. “인도 대기업 회장과 7명의 고위 기업 임원을 뇌물 공여와 증권사기 혐의로 형사기소한다”는 내용이었죠. 공개된 피고인 명단 맨 위가 가우탐 아다니였습니다.기소장 내용은 구체적입니다. 아다니그룹의 두 재생에너지 기업(아다니그린에너지와 애저파워글로벌) 최고경영진들은 지난 4년 동안 태양광 에너지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인도 정부 관리들에게 2억6500만 달러(약 3700억원)의 뇌물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정부가 시장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전기를 구매해 주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두 기업은 미국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을 때, 회사가 뇌물방지 원칙을 준수한다고 거짓말했습니다.미국 법에 따르면 미국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외국기업이 해외에서 뇌물을 주는 건 불법이고요. 미국 투자자들에게 허위 진술로 자금을 모으는 것도 불법입니다. 인도 기업이 인도에서 저지른 뇌물공여 사건이 미국 사법기관 관할인 이유입니다. 검찰에 따르면 피고인들은 유죄판결을 받으면 수년간 감옥에 갇히게 될 겁니다.아다니 그룹은 쑥대밭이 됐습니다. 이 발표 이후 아다니 엔터프라이즈 주가는 20%, 아다니그린에너지는 30% 넘게 급락했죠. 그룹 계열사는 임박했던 6억 달러 규모 채권 매각을 취소해야 했습니다. 그룹 측은 미국 검찰 기소가 “근거가 없고 우리는 모든 법률을 완벽하게 준수한다”고 혐의를 전면 부인했는데요. 하지만 상대는 무려 미국 검찰입니다. 기소의 여파가 전 세계적일 수밖에요.가장 먼저 움직인 건 케냐입니다. 미국 검찰 발표가 나오자마자 케냐 대통령이 아다니 그룹과 맺었던 공항 확장, 송전설 건설 계획을 전면 취소했죠. “부패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서요.프랑스 기업 토탈에너지SE는 24일 발표한 성명에서 “결과가 명확해질 때까지 아다니 그룹에 대한 새로운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밝힙니다. 이 기업은 아다니그린에너지의 주요 주주이자 합작투자 파트너이죠. 아다니 그룹의 해외 자금줄이 막히기 시작한 겁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이번 사태가 “그룹 신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경고도 내놨죠.결정권은 트럼프 법무부에?자, 그럼 이제 어떻게 될까요. 미국 SEC가 아다니 자택으로 소환장을 발부했다는데요. 설마 이대로 아시아 2위 부자가 미국에서 체포되는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을까요.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은 작아 보입니다.일단 아다니가 제 발로 미국 검찰에 출두할 리야 없고요. 남은 방법은 미국 법무부가 범죄인 인도 절차에 돌입하는 건데요. 물론 인도 정부가 설마 순순히 아다니를 넘겨주지도 않겠지만, 더 중요한 건 지금 미국이 대통령 교체기라는 점입니다. 아다니의 인도를 요구하느냐 마느냐, 기소를 유지하느냐 마느냐 결정이 내년 출범할 트럼프의 법무부에 달려있죠.트럼프 대통령 당선자 입장에선 이 얼마나 좋은 협상카드인가요. 아마도 인도와 거래할 기회로 볼 겁니다. 안 그래도 인도는 중국 견제를 위해 미국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가니까요. 아다니 회장도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2주 전 그는 X를 통해 “미국의 에너지 안보와 인프라 프로젝트에 100억 달러를 투자하고 최대 1만5000개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공개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웬 깜짝 발표인가 싶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미국 검찰 발표에 앞서 선수 친 거였죠. 미국 싱크탱크 윌슨센터의 남아시아 연구소 소장인 마이클 쿠겔만은 이렇게 내다봅니다. “트럼프는 아다니를 동맹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트럼프를 칭찬하고 모디와 친하며 미국에 투자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한 동료 사업가니까요.”물론 아다니 그룹의 해외 사업 야망은 흔들리고 있습니다. 해외 자금 조달에서도 차질이 빚어질 수 있죠. 그렇다 해도 아다니가 인도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당장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겁니다. 인도 경제의 너무 많은 부분이 아다니가 진행 중인 각종 개발 프로젝트에 달려있기 때문이죠. 이미 인도에서 아다니는 ‘실패하기엔 너무 큰’ 존재입니다.더 크게 흔들리는 건 경제보단 정치입니다. 이미 야권지도자 라훌 간디는 “총리가 부패에 연루돼 있다”며 모디 총리를 맹공격하고 나섰고요. 25일에도 야당 지지자들은 뉴델리 국회 앞에서 “모디와 아다니는 하나”, “모디의 우정이 나라를 거덜 낸다”며 항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쉽사리 잦아들 사건이 아닌 듯한데요.기업친화적 정책을 기반으로 한 인도 경제의 고도성장은 모디 총리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으로 꼽혀왔죠. 하지만 이제 그 성장의 밝음에 가려졌던 부패와 정경유착의 짙은 그림자가 그를 덮치고 있습니다. 모디 총리는 어떻게 정치적 난관을 돌파할까요. 모디와 아다니의 20년 우정이 이제 정치적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By.딥다이브가우탐 아다니 회장은 두차례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인물로도 유명하죠. 1998년엔 차에 탄 채 무장 괴한에 납치됐었고, 2008년엔 뭄바이 호텔에서 테러리스트의 인질로 잡혔었는데요. 어쩌면 이번이 그의 기업인 인생에 있어선 가장 큰 위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아시아 2위 부자, 아다니 회장은 창업 30여년 만에 경제계 거물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공격적인 기업 확장 배경엔 지난 20여년 동안 모디 총리가 있었습니다.-무섭게 성장한 아다니 그룹은 2023년 1월 공매도 세력 힌덴버드 리서치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비호와 인도 투자자의 지지 속에 아다니는 큰 충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엔 미국 검찰이 나섰습니다. 뇌물 공여 혐의로 아다니 회장을 기소하며 소환장을 발부했습니다. 다만 그가 체포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이는데요. 대신 아다니 그룹의 거침 없는 해외 확장에 제동이 걸리고, 공고했던 모디-아다니 파트너십에 균열이 생길지도 모릅니다.*이 기사는 2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국가부채 디폴트를 낸 나라. 선진국에서 한순간에 ‘망한 나라’로 전락해 조롱받던 나라. 어디인지 아시겠죠. 바로 그리스입니다.그리스 경제가 10여 년 만에 되살아났다는 얘기 들어보셨을 겁니다. 요즘 그리스는 유로 경제의 최고 모범생으로 칭찬받죠. 그럼 그리스는 어떻게 기적적으로 부활했을까요. 뼈를 깎는 긴축정책이 경제를 살린 걸까요. 흔히 그렇게 생각하지만, 진짜 그리스 경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좀 다른데요. 오늘은 그리스의 반전 경제학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없었다먼저 과거를 좀 돌아볼게요. 2001년 유로존 가입 이후 한동안 그리스 경제는 초호황을 누렸습니다. 통화가 유로화로 바뀐 덕분에 그리스 경제력엔 맞지 않게 조달금리가 확 낮아졌거든요(6~7%→3~4%). 정부는 빚내서 공공지출 늘리기 바빴습니다. 무상 의료와 후한 연금제도도 국가부채를 키웠고요. 부동산 시장엔 대규모 투기 붐이 일어납니다.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2004년 아테네 올림픽도 치렀죠.하지만 파티는 갑자기 끝났고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집니다. 경제를 떠받치던 관광·해운 산업은 직격탄을 맞았고, 투자자들은 부채비율 높은 그리스에서 발을 빼기 바빴죠. 거품이 빠르게 꺼졌습니다.경기침체로 나라가 뒤숭숭했던 2009년 9월, 선거 유세에서 당시 제1 야당 대표였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는 역사에 남을 유명한 발언을 합니다. “돈이 있습니다.” 재정적자가 심각하다고 그리스 경제가 손가락질당하던 상황에서 ‘그거 해결할 돈 있거든’이라며 자신감을 보인 건데요.그렇게 경제회복 열망에 힘입어 총리직에 오른 파판드레우. 취임 몇주 만에 전 세계를 경악케 할 깜짝 자백을 합니다. 집권하고 나서 까보니, 국가 통계가 완전히 엉터리였다는 거죠. 실제론 재정적자가 기존 발표치의 몇 배라며 통계를 수정 발표해 버립니다(GDP의 3.7%→12.7%로 수정, 나중에 15.4%로 최종 정정됨).있는 줄 알았던 돈은 없다, 외부 수혈 없인 버틸 수 없다는 게 드러난 건데요. 결국 2010년 4월 파판드레우 총리가 아름다운 카스텔로리조 항구를 배경으로 유럽연합(EU)·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고 발표합니다. “침몰할 준비가 된 배”처럼 보이는 그리스는 “명예와 신용이 없는 나라”가 됐다면서 말이죠. 그리스 경제사의 굴욕적인 순간입니다.이것이 총 세 차례(2010년, 2012년, 2015년)에 걸쳐 집행된 3200억 유로(약 471조원) 구제금융의 시작이었습니다. 구제금융 대가는 혹독했죠. IMF와 EU는 뼈를 깎는 듯한 긴축을 요구합니다. 공공병원은 문을 닫고, 공무원은 해고되고, 임금과 연금은 3분의 1이 깎이고, 세금은 치솟았습니다. 기업과 은행이 줄줄이 폐업했고, 실업률은 30%에 육박했고, 특히 청년(15~24세) 실업률은 54%로 뛰었죠. 이 기간 그리스 실질 GDP가 4분의 1이나 사라졌을 정도인데요. 이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나라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의 타격이었습니다. 1930년 미국 대공황과 맞먹는 정도였죠.먹고 살기 어려워진 국민은 가혹한 긴축안에 분노했고, 나라는 총파업과 시위로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2015년 이런 분노를 바탕으로 집권한 포퓰리즘 정당(급진좌파연합 시리자)은 EU를 상대로 벼랑 끝 전술을 펼쳤죠. 긴축을 요구하는 구제금융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부결을 이끌어냈고요. 채무 탕감 안 해주면 ‘디폴트+유로존 탈퇴’로 가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한 건데요. 하지만 이럴수록 EU 다른 국가는 더 완고해졌고, 결국 그리스는 백기를 들고 맙니다. 전보다 한층 더 혹독한 긴축 요구를 담은 추가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여야 했죠.너무 독한 약을 썼다국제 채권단(EU와 IMF)의 그리스 경제 신탁통치 체제는 2018년 8월에야 막을 내립니다. 무려 8년에 걸친 고난의 행군은 일단락됐는데요.그렇다고 그리스 경제가 아직 제대로 살아난 건 전혀 아니었습니다. 비유하자면 간신히 링거 바늘 빼고 입원실에서 퇴원하는 수준이었죠. 당시 국가부채는 GDP의 180%에 달했고(EU 최대), 실업률은 20%에 육박했고, 국가 신용등급은 B+(22단계 중 14번째)의 투자부적격 등급이었으니까요.하지만 이즈음엔 채권단도 깨달았습니다. 독한 약(가혹한 긴축)의 부작용이 너무 크다는 것을요. 재정적자라는 급한 불은 껐지만, 구조적 개혁으로 이어지진 않았고 오히려 약자의 희생만 키웠기 때문입니다. IMF에서 그리스 구제금융을 담당했던(그래서 그리스에서 엄청 미움을 받았던) 폴 톰센은 2019년 이런 반성을 담은 연설을 합니다.“우리(IMF)는 조정(긴축)이 성장에 비우호적이고 지속 불가능한 방식이란 우려를 점점 느꼈습니다. 지출은 잠재 성장과 기본 공공서비스 제공을 방해하는 수준으로 삭감됐습니다. 우리는 재정통합이 GDP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했습니다. 특히 지나치게 낙관적인 가정으로 인해 노동자에 과도한 부담을 줬고, 그 결과 프로그램(구제금융안)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었습니다.”그리스 구제금융 협상을 이끌었던 장클로드 융커 전 EU 집행위원장도 2022년 인터뷰에서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 시민들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많습니다. 그들은 이 끔찍한 기간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고, 존엄성을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그리스 사회에 부과된 조치는 너무 엄격했습니다. 실수의 일부는 유럽 연합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IMF, 중앙은행, 그리고 제가 몇 년 동안 위원회에서 맹목적인 긴축 예산을 시행했기 때문이죠. 그것은 실수였습니다.”긴축의 부작용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세금 분야입니다. 그리스 경제가 위기에 빠진 이유로 복지정책과 국유화를 많이 꼽지만, 그 못지않게 심각했던 문제가 탈세였죠. 자영업자 비중(32%)이 워낙 높은 영향인데요.이런 상황을 바로잡지 않고 긴축을 위해 세율을 대폭 높이자 어떻게 됐을까요. 가뜩이나 낮았던 세금 징수율이 뚝 떨어집니다(2010년 65%→2017년 41%). 고소득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탈세를 한 거죠. 그렇게 부자들은 이리저리 빠져나간 반면, 저소득 노동자는 실업과 최저임금 삭감으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그리스 경제의 기적이 시작됐다2019년 그리스 국민은 더 이상 포퓰리즘 정당에 표를 몰아주지 않았습니다. 성장을 외치는 친기업 성향의 중도우파 정당을 선택했죠. 하버드 경영대학원과 매켄지 출신의 엘리트 정치인,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가 총리에 오릅니다.그리고 지난 5년간 그리스가 이룬 변화는 놀랍습니다. 전 세계가 ‘그리스의 기적’이라며 찬탄하죠. 일단 지표상으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볼까요. 그동안의 성과는 이렇습니다.EU 국가 중 실업률이 가장 빠르게 감소했습니다(18→9.3%).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이 가장 크게 감소했습니다(207→153%).임금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평균임금 5년간 20.2% 인상).개인 소비 증가율이 유럽 평균보다 높습니다(23.4%).1인당 실질 GDP가 5년간 7.7% 증가해 EU 평균(3.3%)을 크게 웃돕니다.팬데믹에서 벗어난 2021년부터 관광업이 살아나면서 그리스는 3년 연속으로 양호한 성장률(2021년 8.5%, 2022년 5.6%, 2023년 2.0%)을 기록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데이터센터를, 화이자가 연구개발 허브를 그리스에 구축 중이기도 하죠. 떠났던 투자자가 다시 돌아오고, 소득과 소비가 살아나고, 재정건전성은 강화되고 있습니다.2019년부터는 빚도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몇 차례 조기 상환 끝에 IMF 대출금은 전액 상환했고요. 유로존 국가에서 빌린 ‘그리스 대출 기구(GLF)’ 대출금도 올해 말이면 다 갚을 거라고 합니다. 내년엔 만기가 아직 많이 남은 장기부채 중에서도 50억 유로어치를 조기 상환한다는 계획도 밝혔죠.모두가 회생이 쉽지 않다고 봤던 그리스 경제가 놀랍게도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경제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해 선거에서 미초타키스 총리는 각종 정치적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재집권에 성공했고요. S&P와 피치는 그리스 국가 신용등급을 12년 만에 ‘투자 적격’으로 올렸습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2023년 올해의 국가’로 그리스를 선정했죠.성장을 위한 경제학자, 그럼 미초타키스 정부는 그리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무엇을 했을까요. 고통스러운 긴축도, 포퓰리즘도 모두 아닙니다. 대신 이런 걸 했습니다.①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합니다.그리스는 2019년 이후 네 차례에 걸쳐 최저임금을 인상했습니다. 그 결과 월 650유로(약 96만원)였던 최저임금이 830유로(약 122만원)로 28% 인상됐죠. 이 기간 물가상승률(16%)을 크게 웃도는 겁니다. 구제금융 기간 긴축을 한다며 최저임금을 싹둑 삭감했던 것과 비교하면 극적인 변화인데요. 그리스 노동사회보장부 장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생산된 부가 정의에 따라 분배돼야 하기 때문에 최저임금을 인상합니다. 선거 전 공약한 대로, 재정 안정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2027년까지 최저임금을 950유로로 올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여기서 이렇게 반문할 분 많을 겁니다. 최저임금 인상? 그거 부작용 큰 퍼주기 정책 아니야?한번 봅시다. 보통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논리가 뭘까요. 임금이 올라가면→고용주 부담이 늘어나니까→고용이 감소하고 실업이 늘어날 거라고 보기 때문이죠.그런데 그리스에서 실제 나타난 경제학 작동방식은 달랐습니다. 이 기간 고용은 50만명 늘어났고, 실업률은 꾸준히 감소했죠. 최저임금을 받는 저임금 계층의 살림살이는 나아졌고요. 저소득가구는 소비성향이 높기 때문에 늘어난 소득이 소비 증가로 쉽게 이어지는 법입니다. 이로 인해 소비가 살아나고 물가도 적당히 뛰면서 GDP 증가에 기여했죠. 최저임금 인상이 가져온 선순환입니다.사실 ‘최저임금 인상이 일자리 감소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작다’는 건 데이비드 카드 미국 UC버클리대 교수가 1992년 연구에서 밝힌 바 있죠. 이 연구는 그에게 2021년 노벨경제학상까지 안겨줬는데요. 하지만 여전히 최저임금 인상은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주장이 완전히 엇갈리는 뜨거운 주제입니다.그래서 IMF도 그리스가 최저임금을 인상한다고 했을 때 많이 우려를 표했습니다. FT의 마틴 울프 칼럼니스트는 “정책의 후퇴는 위협”이라며 경고했죠. 하지만 그리스는 정부위원회에 참여한 런던정경대 연구팀 조사 결과를 신뢰했습니다. 당시 연구팀은 “최저임금의 신중한 인상은 임금 불평등 감소에 도움이 되고, 노동 수요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정도일 것”이라고 결론 내렸죠.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실제로 그랬습니다.②법인세를 포함한 세금을 깎아줍니다.그리스 경제정책의 또 다른 큰 축은 감세입니다. 위기 시절 그리스는 재정 흑자를 위해 법인세를 대폭(20→29%) 끌어올렸는데요. 미초타키스 총리는 취임 이후 세 차례에 걸쳐 법인세율을 22%까지 끌어내립니다.그뿐 아니라 배당소득세 인하(10→5%) 등, 긴축 시절 인상됐던 50가지 세금을 이미 없애거나 내렸는데요. “점진적이면서도 재정적으로 지속 가능한 감세는 우리의 핵심 선택”이라고 미초타키스 총리는 말합니다. 기업 활동을 장려하고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린다면, 세율을 낮춰도 세수는 오히려 늘어난다는 거죠.이렇게 세율을 대폭 낮추는 동시에 그리스 정부가 집중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탈세와의 싸움입니다. 전자송장 의무화, POS 사용 확대 같은 ‘거래의 디지털화’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죠. 마치 과거 한국이 ‘신용카드 소득공제’ 정책으로 지하경제를 줄였던 것과 비슷한 발상인데요. 실제로 이런 조치의 세수 증대 효과가 쏠쏠하다고 합니다. 만약 세금 누수를 더 단단히 틀어막을 수 있다면 지금은 24%나 되는 부가가치세까지 인하할 수 있을 겁니다.어떠신가요. 최저임금 인상과 세금 인하의 결합이라니.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를 당혹스럽게 하는 정책 조합인데요. 달리 보면, 가혹한 긴축은 없었지만 재정적인 책임감을 가졌고요. 불평등을 바로잡으면서도 포퓰리즘으로 빠지진 않았습니다.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어떻게 경제를 살릴지에만 초점을 맞췄죠.미초타키스 총리는 올 2월 이코노미스트 기고문에서 “경제에 있어서 우리는 성장에 집중했다”고 말합니다. “포퓰리즘에 맞서는 것은 공평한 경제 성장을 창출하는 것과 관련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포퓰리즘 정치가 휩쓸고 있는 전 세계에 그리스 경제 부활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By.딥다이브그리스 경제에 대해 ‘어떻게 망했는지’는 자세히 다루면서, 정작 ‘어떻게 다시 살아나고 있는지’는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더군요. 이젠 부활의 스토리에도 집중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유로존 가입 이후 초호황기를 누렸던 그리스 경제는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고 고꾸라졌습니다. 국가통계 조작까지 겹치며 금융시장 신뢰를 잃었고, 결국 국제 채권단의 구제금융을 받아야했죠. -8년이나 이어진 긴축은 가혹했지만 구조개혁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고통은 가난한 자에 집중됐습니다. 이젠 당시 맹목적인 긴축을 요구했던 게 실수였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2019년 그리스 국민은 포퓰리즘 대신 중도파를 선택했습니다. 최저임금 인상과 법인세 감면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을 펼치면서 그리스 경제는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있죠. 긴축도, 퍼주기도 아닌 경제 성장에 집중한 결과입니다. *이 기사는 2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노스볼트(Northvolt)라는 스웨덴의 전기차용 배터리 제조 스타트업을 아시나요. 모르는 분이 많을 듯하지만, 이래 봬도 ‘유럽 최대 배터리 제조업체’입니다. 아시아 기업이 점령한 배터리 시장에서 유럽의 자존심을 세워줄 희망으로 촉망받아온 기업이죠.이 노스볼트가 유동성 위기로 인해 파산 직전 상황에 놓였습니다. 동시에 이게 다 ‘중국 협력업체의 방해공작 탓’이란 음모론도 파다한데요. 단순히 ‘캐즘의 저주’라고만 보긴 어려운 노스볼트 추락 스토리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현금 바닥났다, 파산 위기올해 초만 해도 노스볼트는 순항 중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2021년 말 첫 번째 배터리셀 생산으로 유럽을 설레게 만들었던 이 기업은 스웨덴 기가팩토리 규모를 4배로 확장하기 위한 공사에 한창이었죠. 독일과 캐나다에서도 새 배터리셀 공장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EU와 독일 정부로부터 10억 유로, 캐나다와 퀘벡주 정부에선 20억 달러를 지원받기로 했죠.조만간 IPO(기업공개)에 나설 거란 소식도 있었습니다. 시장에선 기업가치가 200억 달러(약 28조원)에 달할 거라고 기대했죠. 폭스바겐·골드만삭스·BMW와 스웨덴 연기금을 대주주로 둔 이 배터리 제조 기업은 유럽에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받아놓은 주문량만 550억 달러어치(약 77조원)에 달할 정도였죠. 앞날이 창창한 ‘될성부른 떡잎’으로 여겨졌습니다.하지만 몇 달 전,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순수 유럽 혈통’ 배터리 업체라는 허울에 가려졌던 적나라한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축구장 70대 크기라는 스웨덴 셸레프테오 공장의 배터리셀 생산량이 터무니없이 적었습니다. 연간 예상 생산량이 16GWh(기가와트시)인 공장이 지난해 실제 공급한 배터리셀은 80MWh(메가와트시). 고작 200분의 1에 그쳤죠. 그만큼 생산라인이 엉망이고 수율(정상제품 비율)이 형편없단 뜻입니다. 주문은 넘쳤지만, 고객사는 언제 배터리를 받을지 기약이 없었죠.주요주주인 BMW가 가장 먼저 손절에 나섰습니다. “인내심을 잃었다”며 6월 노스볼트와 맺었던 20억 달러 규모의 배터리셀 공급 계약을 해지하고, 삼성SDI로 갈아탔죠.7월 공개된 2023년 노스볼트의 연간 적자는 12억 달러. 전년의 4배로 불어났습니다. 여기저기 벌여놓은 공사는 산더미인데, 배터리셀을 제대로 만들어내질 못하니 현금이 빠르게 고갈됐습니다. ‘죽음의 골짜기’가 노스볼트에 닥친 건데요. 8월엔 미국 캘리포니아의 연구개발 자회사를 폐쇄했고, 이어 스웨덴의 양극재 생산시설을 닫습니다. 이러다 직원 월급도 내기 어렵겠다는 말이 나오던 9월엔 스웨덴 직원 4분의 1인 1600명 해고를 발표했죠. 스웨덴 공장 확장 공사는 중단됐고, 공사를 맡았던 건설 자회사는 파산 신청에 들어갑니다.그리고 11월. 현금이 바닥난 노스볼트는 이제 생존이 위태로울 지경입니다. 스웨덴 정부가 나설 거란 기대도 꺾였죠. 이 나라 재무부 장관은 15일 “노스볼트를 정부가 소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현지 언론은 노스볼트가 미국에서 챕터11 파산보호를 신청하는 것을 검토 중이라고 전합니다. 정말 며칠 남지 않았다, 이번 주가 고비란 보도도 이어집니다. 유럽 전기차 산업에서 희망의 등불로 통했던 노스볼트 불꽃이 이대로 사그라지는 걸까요.중국 기업에 사기 당한 스웨덴?“광범위한 산업적 ‘기후 역풍’에 대응해야 합니다.”지난 9월, 노스볼트 CEO 피터 칼슨은 대규모 정리해고를 발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회사가 어려워진 이유를 전 세계적인 전기차 수요 둔화로 돌린 거죠.그런데 냉정히 따져보면 그건 핑계일 뿐입니다. 노스볼트 위기는 주문이 줄어서가 아니라, 배터리 생산을 빨리 늘리지 못했기 때문이니까요. 도대체 왜 첫 번째 셀을 생산한 지 3년이 다 되도록 여태껏 생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지가 핵심입니다.노스볼트가 매일 뉴스 헤드라인에 오르는 스웨덴에선 이와 관련해 특히 관심을 끄는 주장이 있습니다. 바로 이게 다 노스볼트 1공장의 장비 공급을 맡은 중국 기업 ‘우시리드(Wuxi Lead)’ 때문이라는 주장입니다.지난 9월 이런 주장을 처음 펼친 건 스웨덴의 작가이자 유명 블로거인 라스 윌더란그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제보라며 이렇게 공개했죠.“노스볼트는 중국 우시리드로부터 배터리 제조 장비를 구입했지만, 배송된 문서는 일부 지워져 있었습니다. 스웨덴 현장에서 장비를 사용하려면 우시리드의 중국 작업자가 있어야만 했습니다. (장비에 대한) 지식 전달이 부적절했습니다.”그리고 이런 주장을 덧붙입니다. “우시리드는 처음부터 사업을 방해했습니다. 그 의도는 노스볼트를 파산시켜 중국 기업이 이를 매입하게 하는 것으로 의심됩니다.” 즉 “순진한 스웨덴인”이 중국 기업에 일종의 사기를 당했다는 음모론이었습니다.물론 그의 글 어디에도 구체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게 다 공산당과 손잡은 중국 기업의 유럽 시장 장악을 위한 음모’라는 해석은 꽤 설득력이 있었나봅니다. 스웨덴 언론도 이 주장을 받아 확대 재생산했죠. 스웨덴 경제잡지 아파르스발든(affarsvarlden)은 전현직 노스볼트 직원을 인용해, 우시리드가 초래한 현장 혼란을 자세히 전합니다.“기계 작동용 메뉴는 중국어였어요. 우린 기계 작동법을 이해하려고 구글 번역을 사용해야 했죠. 현장엔 중국인 근로자가 수백명이었는데, 영어를 한마디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기계가 중국산이었는데 결함이 많았어요. 기계 전체가 집 차고에 있을 법한 전선으로 제작돼 결코 작동할 수 없었죠. 중국산 장비는 표준 이하에요.”불량 장비? 구매 프로세스가 엉망!중국 협력업체가 노스볼트를 파괴했다는 소문은 점점 더 구체성을 띠며 퍼져나갔습니다. 급기야 우시리드 담당자가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해야 했을 정도이죠.(“우리가 (장비 사용법을) 가르치고 싶어 하지 않았단 주장은 완전히 잘못된 겁니다.”)자, 여러분이 보기엔 어떠신가요. 중국이 유럽의 배터리 야망을 훼방 놓기 위해 일부러 노스볼트를 망쳤다는 해석, 그럴듯한가요.그런데 궁금합니다. 우시리드는 CATL은 물론 테슬라와 폭스바겐에도 장비를 공급한 이 분야 선두 기업인데요. 사업을 포기할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고객사를 그렇게까지 방해할 수가 있을까요. 또 만약 그런 조짐이 보였다면 노스볼트 측이 얼마든지 미리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당연히 스웨덴에선 이런 논쟁이 크게 일었고, 현재도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스볼트 자체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에 대한 전현직 직원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오는데요. 먼저 레딧의 ‘무엇이든 물어보세요(AMA)’ 게시판에 익명의 노스볼트 엔지니어가 올린 답변을 볼까요.일단 우시리드와의 협업에 문제가 많았던 건 사실입니다. 특히 전선을 포함한 장비 품질 문제가 심각했죠. 하지만 그 진짜 원인은 엉망진창인 노스볼트의 조달 프로세스에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노스볼트는 우시리드에 형편없이 작성된 모호한 사양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우시리드)은 충분히 좋다고 생각하지만, 유럽에선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저렴한 전선을 설치했죠. 노스볼트 직원은 장비 허가를 위해 중국으로 가서 이를 확인하고도 ‘배송 가능’으로 서명합니다. 마감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어쨌든 승인한 거죠.”그는 나머지 각종 문제-도면 등을 문서로 주기를 꺼리고, 매뉴얼 번역이 엉망이고, 영어가 잘 통하지 않은 것-가 있지만, 기업 문화 차이+영어실력 부족 때문이지 ‘음모’까진 아니라고 봤습니다.유럽 매체 ‘더 로컬’과 인터뷰한 직원 반응도 이와 비슷합니다. “노스볼트의 경험 부족으로 인해 계약서가 제대로 작성되지 않았습니다. 계약서는 아무 가치도 없었죠. 실제로 무엇을 공급해야 하는지, 일정과 요구사항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중국 기계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그들(노스볼트 경영진)이 진짜 기술적 실사 없이, 모든 것을 엉성하게 조립했기 때문이죠. 그저 끔찍하게 잘못 관리한 겁니다.”거품이 초래한 비현실적 야망의 결말과연 중국이 노스볼트를 차지하기 위한 큰 그림이 있었는지, 그 음모론을 확인하기란 어차피 불가능하니 넘어가고요. 가장 이상한 건 이 부분입니다. 노스볼트 공동창업자이자 CEO인 페테르 칼슨(Peter Carlsson)는 구매 전문가입니다. 소니 에릭슨과 NXP반도체에서 구매를 담당했고, 창업 직전엔 테슬라의 공급망 책임 임원으로 일했죠. 그런데 왜 노스볼트는 구매에 있어서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실패했을까요.FT는 노스볼트의 너무 빠른 성장과 경험 없고 무능한 임직원을 핵심 원인으로 지적합니다. FT와 인터뷰한 익명의 직원은 이렇게 말하죠. “전 이렇게 많은 관리자와 임원이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분야에 경험이 부족한 직원이 많아요. 관리자, 엔지니어, 생산직, 심지어 임원까지.”노스벨트 CEO 페테르 칼슨은 야망이 크고 대담하며 공격적인 스타일의 경영자입니다. 스웨덴 첫 공장의 배터리셀 양산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바로 캐나다와 독일에 공장을 추가로 짓겠다고 나섰습니다. 또 나트륨이온배터리와 항공기용 배터리 개발, 폐배터리 재활용으로도 나아갔죠. 너무 빨리, 많은 것을 하려고 했습니다.정작 생산 현장에선 경험 없는 인력들이 불량장비와 씨름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이 회사는 2년 경력의 25살 대졸자가 부서 책임자를 맡을 정도로 인력난이 심각했습니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합니다. 유럽에서는 다룬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제품과 공정이니까요.그럼, 노스볼트는 능력도 부족하면서 왜 그렇게 확장에만 열을 올렸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이 많다고 봤기 때문이죠. ‘유럽 최대 배터리 제조사’, ‘유럽 최초 배터리셀 생산’이란 화려한 타이틀 덕분에 그동안은 돈이 쉽게 따라왔습니다. EU나 독일과 캐나다 정부의 보조금, 각종 녹색 대출, 그리고 연기금 같은 기관의 투자까지 말이죠. 배터리셀을 잘 만드는 실력보다는 녹색투자 열풍의 한가운데 서있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겁니다.결국 과대포장된 일종의 거품이었습니다. 스웨덴 옌셰핑 국제경영대학원 교수인 크리스티안 샌드스트롬은 “정부가 녹색 버블을 위한 비옥한 토양을 만들었다”고 지적하죠. “노스볼트는 자본조달 대부분을 자기자본이 아닌 부채를 끌어들여 이뤘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기업엔) 아무 리스크가 없는 환경을 만들었죠. 터무니없지만, 정치 자본가(political capitalists)엔 기회였습니다.” By.딥다이브노스볼트의 위기는 한국 배터리 3사엔 기회가 될까요. 그런 해석이 없진 않지만, 노스볼트가 국내 장비 제조업체 여러 곳의 주요 고객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유럽 배터리의 희망이었던 노스볼트가 파산 위기에 처했습니다. 배터리셀 생산이 끔찍하게 부진한 탓에 납품이 지연되면서 현금이 바닥 났습니다. -생산 부진의 원인 중 하나는 중국산 불량장비로 인한 혼란입니다. 이를 두고 스웨덴에선 ‘중국 기업이 일부러 노스볼트를 망가뜨리고, 이를 인수하려고 한다’는 식의 음모론이 판칩니다.-하지만 노스볼트의 구매 프로세스의 허술함이 중국산 장비를 둘러싼 대혼란을 초래한 진짜 원인일지 모릅니다. 배터리셀 만드는데 집중하기보다는 너무 빨리 사업을 확장하려고만 한 비현실적 야망이 벽에 부딪혔습니다. 기업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는 비옥한 환경이 거대한 녹색 거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기사는 19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폭스바겐 그룹. 연간 900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세계 2위 자동차 기업이죠. 이 폭스바겐의 위기가 요즘 독일 경제의 가장 큰 이슈입니다. 얼마 전엔 사상 처음 독일 공장을 폐쇄할 거라고 해 충격을 줬는데요.전기차에서 길을 잃은 폭스바겐이 반전의 카드를 꺼냈죠. 미국 전기차 스타트업 리비안과의 합작 발표입니다. 뒤처진 소프트웨어 기술력을 리비안을 통해 한방에 만회하겠단 전략인데요. 이 파격적인 행보가 폭스바겐을 구할진 두고 봐야겠지만, 독일 경제엔 상징적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은 리비안과 손잡은 폭스바겐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비상 경영 중 나온 8조원 베팅폭스바겐, 요즘 어렵습니다. 자동차 판매가 줄고 영업이익이 급감하면서 비상 경영을 선언했죠. 올해 1~3분기 영업이익률은 고작 2%. 1937년 설립 뒤 87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 공장 10곳 중 최소 3곳을 폐쇄한다고도 밝혔습니다.왜 이렇게 어렵냐.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그동안 폭스바겐을 먹여 살려온 가장 큰 시장인 중국에서 판매가 급감했기 때문이죠. 중국에선 전기차, 특히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가 대세인데요. 폭스바겐은 여전히 내연기관차 중심이고, 경쟁력 있는(기술과 가격 모두에서) 전기차 모델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이 거대 독일 자동차 기업은 전기차 경쟁에서 한참 뒤처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6월 폭스바겐이 미국 전기차 스타트업 리비안과의 합작에 50억 달러(약 7조원)를 투자한다고 밝혔을 때, 업계는 놀라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두 회사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할 ‘윈윈’이란 점에서 말이죠.그리고 12일 폭스바겐은 리비안과의 합작회사 출범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총투자금은 58억 달러(8조1500억원)로 더 늘었고, 합작회사 CEO는 리비안 최고소프트웨어책임자(CSO)와 폭스바겐 최고기술책임자(CTO)가 공동으로 맡기로 했죠. 양사 엔지니어 1000명으로 구성될 합작사는 전기차 컴퓨터시스템(아키텍처)과 소프트웨어를 개발합니다. 이 기술을 탑재한 전기차는 리비안이 2026년, 폭스바겐이 2027년에 출시할 계획이죠.겉으로만 보면 이 거래는 절대적으로 리비안에 유리합니다. 돈은 모두 폭스바겐이 대고, 리비안은 기술과 지식재산권만 기여하니까요. 리비안은 그동안 전기 SUV와 픽업트럭이 제품력에선 호평받았지만, 연간 생산량이 고작 5만7000대 수준에 그쳐 심각한 적자에 빠져 있었죠. 현금이 바닥났던 리비안엔 단비 같은 투자입니다.달리 보면 폭스바겐에 이 거래가 그만큼 절실했단 뜻이죠. 폭스바겐은 전기차에서 발목을 잡아 온 결정적인 문제, 전기차용 소프트웨어 기술을 이 미국 스타트업에 맡기기로 한 겁니다. 소프트웨어 자체 개발이 어렵다는 걸 인정한 셈이죠. 리비안이 최근 석 달 만에 생산해 낸 프로토타입 전기차를 두고 폭스바겐 연구개발 책임자 마이클 슈타이너는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밤낮으로 일하더라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자동차에 이것을 설치하고 작동시킬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폭탄이 된 소프트웨어내연기관차가 수만개 부품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복잡한 기계장치라면, 전기차는 커다란 스마트폰에 모터와 바퀴를 단 것에 더 가깝습니다. 소프트웨어가 그만큼 핵심 중의 핵심인데요.그동안 폭스바겐 전기차 소프트웨어는 어땠을까요. 2019년 폭스바겐의 순수 전기차 ID.3는 출시와 함께 ‘실패작’으로 평가됐죠. 심각한 소프트웨어 오류로 인해 터치스크린은 종종 먹통이 되고, 이유 없이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는가 하면, 잘못된 경고음이 시도 때도 없이 울린다는 소비자 보고가 쏟아졌는데요. 무엇보다 무선으로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할 수 없다는 점이 지극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업데이트하려면 딜러에 차를 맡겨야만 했죠. 참고로 테슬라는 2012년부터 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제공했습니다.이어 2021년 출시된 전기 SUV ID.4는 이전보다 확실히 업그레이드됐지만, 여전히 소프트웨어 문제-스마트폰 연결이 너무 오래 걸리거나, 화면이 검게 변하거나, 주행 충 주차센서가 작동하거나-로 말이 많았습니다. 전기차 판매가 신통찮은 주요 원인이었죠. 소프트웨어 문제는 폭스바겐 그룹 프리미엄 브랜드의 발목도 잡았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서 아우디 Q6 e-트론, 포르셰 마칸 EV 같은 전기차 신모델 출시가 3년이나 지연됐죠.여기서 놀라운 건 폭스바겐이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간과하거나, 투자에 소극적이었던 건 아니란 점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죠. 2020년 폭스바겐은 각 브랜드에 흩어져있던 엔지니어들을 모아 거대한 소프트웨어 자회사 카리아드(Cariad)를 설립했습니다. 그룹 안에 일종의 실리콘밸리 스타일 기업을 새로 만든 거죠. 당시 그룹 CEO 허버트 디스는 “소프트웨어 중심의 모빌리티 기업으로 변신하겠다”고 선언했고요. 카리아드를 ‘선도적인 소프트웨어 회사’로 키우기 위해 ‘디지털 전문가’ 직원을 1만명까지로 늘리겠다고 약속합니다(현재 직원 수 약 6000명). 실제 테슬라 같은 미국 IT 기업 출신 엔지니어도 적극 영입했고요.그동안 폭스바겐이 자체 전기차 소프트웨어 구축을 위해 카리아드에 투자한 금액은 무려 120억 유로(17조8000억원)에 달합니다. 하지만 그룹을 위한 미래 기술을 자체 개발해 디지털 경쟁력을 끌어올린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됐고, 카리아드는 그룹 내부에서 ‘시한 폭탄’으로 불리는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관료주의라는 함정바로 이 지점에서 의문이 제기됩니다. 폭스바겐을 구원할 줄 알았던 카리아드는 어쩌다 구제 불능 문제아로 전락했을까요. 단순히 독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실력이 미국이나 중국보다 떨어져서는 아닐 텐데요(카리아드는 90개국 이상 국적의 엔지니어가 일한다고 자랑합니다).다양한 문제점이 제기되지만(예-부서 간 경쟁, 브랜드별 제각각인 요구사항, 최고경영자의 변덕 등) 가장 많이 지적되는 이유는 이겁니다. 폭스바겐의 지독한 관료주의. 전 카리아드 직원은 FT에 이렇게 말했죠. “카리아드엔 정말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있지만, 그들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건 결코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인 문제입니다.”관료주의? 문화적 문제? 구체적으론 어떤 걸까요. 카리아드 직원을 직접 인터뷰하긴 어려워서 독일권 직장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카리아드 직원의 리뷰를 살펴봤습니다. 그중 몇 가지 눈에 띄는 걸 뽑아보면 이렇습니다.“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아닌 사람들이 소프트웨어에 대해 결정을 내립니다. 문화의 대부분이 폭스바겐과 아우디의 기존 경영진에 의해 정의됩니다. 그들은 오래된 공급업체와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테슬라를 이긴다고 얘기하죠.”“환상적인 워라밸입니다. 회사가 공룡의 속도로 돌아가기 때문에 저는 일주일에 10시간 정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젊은 엔지니어 경력엔 사형선고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업무가 거의 없고 관료주의가 너무 많습니다.”“최고경영진은 소프트웨어가 아닌 기계 제조 전공입니다. 많은 경직성과 레거시 프로세스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여러분은 그냥 하세요’라는 태도입니다. 작은 위험조차 감수하길 싫어합니다.”이것은 독일 경제의 위기인가물론 일부 직원이 익명으로 남긴 리뷰를 얼마나 신뢰할 만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뭐였는지, 왠지 알 것만 같긴 하죠. 그런데 궁금합니다. 폭스바겐은 소프트웨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스타트업 스타일의 별도 회사까지 설립했잖아요. 그럼 좀 자율성을 주고 맡겨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요. 이와 관련해 독일의 경제 잡지 ‘매니저 매거진’ 분석에서 힌트를 찾았습니다. 이에 따르면 문제는 폭스바겐이 오래된 기계공학적 구조에 디지털 기술을 내장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소프트웨어 자체를 ‘살아있는 시스템’으로 보는 테슬라와는 애초에 접근법이 달랐죠. 하드웨어 중심의 낡은 사고의 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과거의 성공 공식에 갇혀 달라진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 과연 폭스바겐 같은 내연기관 자동차 기업만의 문제일까요. 독일 싱크탱크 뮌헨연구소(ISF 뮌헨)의 안드레아스 보에스 대표는 기고문(‘카리아드의 실패는 독일의 약점을 보여준다’)에서 이것이 독일 경제 전반의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가장 뼈 때리는 건 이 문단이었죠.“새로운 산업생산 방식을 향한 역사적 패러다임 전환을 숙달하는 데 있어서 우리(독일)는 ‘개발도상국’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은 우리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것을 배웠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고 미래의 도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산업화 1단계에서 얻은 이점이 이제 2단계의 장애물이 되었습니다.”순탄한 결혼 가능할까이제 폭스바겐 그룹은 자체 소프트웨어 개발 대신 리비안과의 합작을 택했습니다. 카리아드라는 거대 폭탄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밝히지 않지만, 아마도 해체될 가능성이 커 보이죠.물론 폭스바겐과 리비안의 결혼생활이 얼마나 순탄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폭스바겐 노동자 협의회 의장인 다니엘라 카발로는 이미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이것(리비안과의 합작투자)이 다음번 수십억 유로짜리 무덤이 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이런 회의론이 그럴듯해 보이는 건 독일 자동차 제조사가 유독 다른 나라 기업과의 통합에 서툴렀던 역사가 있기 때문이죠. 9년 만에 처참한 실패로 파경을 맞이한 다임러와 크라이슬러 합병(1998~2007년)이 그랬고요. 무려 4년에 걸친 이혼 소송전(국제중재 재판)을 벌였던 폭스바겐과 스즈키의 제휴(2009~2015년)도 있었습니다.그래도 아직은 허니문 기간입니다. 지금이야 기업문화의 차이조차 매력적으로 보이죠. 리비안 최고경영자인 RJ 스카린지는 폭스바겐이 리비안의 “빠르고 민첩하며 결단력 있고 관료주의적이지 않은” 업무문화를 합작법인에서도 유지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부디 그 마음 변치 않아야 할 텐데요.폭스바겐은 리비안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고 전기차 시장의 강자로 우뚝 설 수 있을까요. 공장 폐쇄와 인력 구조조정으로 비용을 쥐어짜는 가운데도 쏟아붓는 58억 달러 투자는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움직임이 독일 경제와 자동차 산업의 시대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임은 확실해 보입니다. By.딥다이브폭스바겐을 포함한 독일 자동차 업계에서 위기론이 나온다는 소식, 1년 전쯤 전해드린 적 있죠(). 그 사이에 위기는 더욱 현실로 다가왔고, 살길을 모색하던 폭스바겐이 파격적인 제휴에 나섰습니다. 이런 급박한 움직임을 보니, 정말 자동차 업계가 대격변기로구나 실감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유럽 최대 자동차 제조사 폭스바겐이 미국 전기차 스타트업 리비안의 손을 잡았습니다. 전기차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합작회사 설립에 총 8조원을 투자합니다. 자체 소프트웨어 개발을 포기한 셈입니다. -이는 폭스바겐의 소프트웨어 자회사 카리아드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카리아드는 선도적인 소프트웨어 기업이 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그룹의 시한폭탄으로 전락했습니다. 폭스바겐의 지독한 관료주의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됐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과거의 성공에 머무는 낡은 사고방식이 패러다임 전환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는 디지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게 변화의 시작 아닐까요. 독일 경제도, 전통 자동차 산업도 대전환기에 놓였습니다. *이 기사는 1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최근 두 달 만에 지수가 28% 수직상승한 주식시장이 있습니다. 코스피(-1.5%)는 물론 S&P500(7.2%)보다도 성과가 훨씬 좋은데요. 어디인지 아시겠죠. 바로 중국입니다. 극도로 부진했던 중국 증시가 연이은 경기 부양책 발표에 힘입어 빠르게 살아나고 있죠.하지만 지난 8일 전인대(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발표는 투자자들을 실망시키기도 했습니다. 부동산과 소비 부양책이 빠져있었기 때문이라는데요. 도대체 지금 중국 경제는 어디쯤 와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투자자라면 기대할 점, 조심할 점은 무엇일까요. 19년 차 중국 담당 애널리스트인 김선영 DB금융투자 연구원을 8일 만나 인터뷰했습니다.*이 기사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경기 부양책, 이 한 방이 나와야-9월 말 인민은행의 깜짝 발표를 시작으로 중국 정부가 연이어 경기부양책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 시점엔 중국 정부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나설 줄은 시장에서 아무도 몰랐었죠?“몰랐어요. 사실 중국은 이렇게 돈 풀고 경기부양을 한 지가 4년 이상 됐습니다. 그런데 그동안은 돈이 잘 돌지 않았죠. 기업들은 ‘제2의 헝다가 되지 않겠다’면서, 대출을 받아도 고금리 채무를 갚아버렸고요. 개인 저축률은 여전히 43%로 높습니다. 1인당 가처분 소득이 올라가서 지갑에 쓸 돈이 있는데도, 쓰지 않고 저축해요. 왜냐면 불안하니까.즉, 소비·부동산·증시 부양책은 이전부터 나왔는데요. 9월 말부터 달라진 건 한꺼번에 이런 정책이 다시 다 나왔다, 그리고 이게 거의 매일 나오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또 가장 중요한 건 시진핑 주석이 실수했을 때도 책임지지 않게 세 가지 면책 사항을 얘기했단 점이죠. ‘이젠 제발 하는 척만 하지 말고 제발 좀 해’라고 메시지를 준 건데요. 그래서 전 부처별로 경기부양 정책을 써 내려가는 과정입니다.”-전인대 상무위의 경기부양책 규모에 투자자 관심이 쏠렸죠. 금융위기였던 2008년엔 중국이 4조 위안의 부양 패키지를 내놨었는데요.“4조 위안은 당시 중국 GDP의 12% 정도였어요. 지금 GDP는 그때의 4배 가까이 되죠. 그 당시의 중국이 3개 더 생겼다고 보시면 됩니다. 만약 지금 GDP의 12%가 되려면 15조 위안 정도를 풀어야 해요. 조금 과하긴 하죠.저는 중국의 부양책 규모가 10조 위안 이상이냐 아니냐보다는 그 중 얼마나 소비쿠폰 발행으로 갈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금 중국은 물가가 너무 낮죠. 레이 달리오가 말한 ‘아름다운 디레버리징’, 중국이 물가 걱정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돈을 풀면서 부채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는 핵심시기입니다.”(8일 오후 늦게 발표된 부양책 규모는 5년간 10조 위안(1936조원)이나 됐지만, 이는 모두 지방정부 부채 해결용이었다. 소비쿠폰 발행 같은 소비 부양책은 나오지 않아 글로벌 투자자를 실망시켰다.)-소비자들이 나가서 바로 돈을 쓰게 만들려면 소비쿠폰이 가장 효과적일까요?“현금을 나눠주면 그냥 저금하거든요. 만약 70만원을 주면 100만원어치를 구매할 수 있는 유효기간 2년짜리 소비쿠폰이 나온다면 어떨까요. 그런 식으로 바로 소비로 직결될 수 있게 하는 게 지금은 중요합니다.”-그렇게 소비를 살려서 디플레이션에 빠지는 것도 막고,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하겠군요.“시진핑이 2017년 10월 집권 2기를 시작할 때 뭐라고 했느냐. 앞으로 첫 번째 15년은 중산층을 늘리고 과학 기술력을 습득한다. 그리고 두 번째 15년은 국방과 우주에 투자해서 글로벌 넘버 1(GDP 기준 세계 1위)을 만들겠다고 했어요. 2047년이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100주년이거든요. ‘30년 뒤엔 세계 1등 할 거야’라고 지른 거예요. 1등(미국) 입장에선 기분 나쁘죠.미·중 무역분쟁은 이 30년의 싸움입니다. 누가 미국 대통령이든 앞으로 이 싸움은 계속될 거예요. 그럼 중국 입장에선 앞으로 계속 규제가 세질 텐데 살 길이 뭐가 있을까를 보니, 소비이죠. ‘우리는 14억 인구의 소비가 있구나. 그동안은 여기가 생산기지였는데 지금은 소비 기지구나’라는 겁니다.그래서 중국이 믿을 건 소비인데, 내수 부양을 해도 소비가 안 살아나고 저축해버리고 기업들도 안 움직이니까 지금은 좀 급해졌어요. 그걸 우리한테 들킨 상황이죠.부양책의 메인은 소비여야 하는데, 돈 좀 준다고 사람들이 갑자기 집이나 차를 사진 않죠. 대신 나가서 사 먹긴 할 거고(외식), 그동안 못 샀던 거(가전 등) 한번 사볼까 할 거고요. 또 여행을 많이 갈 거예요.지금 갑자기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나라에 무비자 입국을 허용한 것도 이와 관련 있습니다. ‘우리도 여행 많이 갈 테니, 너네도 여행 좀 와’라고 하는 거죠. 또 트럼프 새 내각의 대외정책이 구체화하기 전에 미국 우방 국가와의 관계를 좀 개선하려는 부분도 있고요.”중국 주식, 드디어 플러스?-중국 정부가 대대적인 경기부양으로 나아가기로 방향은 정한 거고, 앞으로 구체적인 정책이 쭉쭉 이어지겠군요. 그럼 이에 대한 국내외 투자자들 분위기는 어떤가요.“일단 증시 거래량이 폭증했습니다. 최근 한 달 상하이와 선전 거래소 거래량이 이전의 거의 두배로 치솟았죠. 또 그동안 중국 주식이 애물단지, 마이너스였는데 이제 플러스로 전환한 투자자들이 많죠. 제 중국인 지인은 해외에 체류 중인데, MTS 비밀번호를 계속 틀리니까 증권사 지점에 방문하려고 중국으로 들어갔다더라고요. 당장 중국 주식을 더 사기 위해서 말이죠.”-이전엔 중국 증시에 다들 시큰둥했는데, 이번엔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네요.“마침 미국도 금리를 내리고 글로벌 투자자들이 ‘이 돈은 어디로 갈까?’하고 있었는데 중국이 ‘여기로 와!’라고 한 거죠. 그때(9월) 분위기가 인도와 일본이 좋았는데, 거기서 돈을 빼서 ‘중국은 싸네. 이번엔 뭔가 좀 할 것 같다’면서 중국으로 많이 갔어요. 지금도 그 연장선인데요. (경기 부양을) 할 듯 말 듯 하지만, 사실은 하는 과정이죠. 중국은 지금부터 내년 3월 전국양회까지 정책이 만들어지고 발표될 거거든요. 기대했다, 실망했다가, 이번엔 나오겠지? 아니네, 다음이네. 이런 게 있겠지만, 그래도 나오기로 했으니 아직 관심이 꺼지지 않은 상황이죠.”-그래도 그 열기가 예전에 중국이 한창 핫했을 때만큼 뜨거운 건 아직 아니죠?“그동안 중국 증시는 한번 확 오르고 나면 장렬하게 전사했어요. 차트를 보여드리자면, 최고점에 상하이지수가 6000을 넘었죠(2007년 10월 장중 6124 포인트). 그리고 나서 무너졌고요. 이후 외국인에 주식시장을 개방하면서 다시 지수가 올랐다가(2015년 6월 5178) 떨어졌죠.비교해 보면 2015년 지수 상승의 높이는 2007년보다 좀 낮았고요. 상승하는 구간의 기간도 짧아졌어요. 그런데 대신 하단은 전보다 올라갔죠.”-그렇네요. 과거엔 1000이 하단이었는데, 점점 올라갔네요.“버블로 갔다가 지수가 빠졌는데, 하단은 계단식으로 올라갔어요. 이번에도 저는 상단은 감히 예상할 수 없고요. 그래도 빠질 때의 하단은 방어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중국의 시가총액 1위 종목은 공상은행입니다. 상하이지수 시총의 25%가 은행이죠. 한국에서 밸류업하니까 은행주가 좋았잖아요. 중국도 밸류업 정책(신(新) 국9조)으로 은행주가 오르면서 지수를 같이 끌어올리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중국 주식에 투자한다면) 지수 중심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미국의 트럼프는 관세와 감세 위주 정책을 예고하죠. 추가 관세를 실제 얼마나 매길진 아직 모르지만 중국은 GDP의 19%가 수출입니다. 만약 미국이 관세를 올린다면? 수출 기업을 먹여 살리기 위해 중국 정부가 환율을 어느 정도 약세로 가져가려 할 겁니다. 지금 위안화 환율이 달러당 7.1위안인데요(11일엔 7.2위안까지 상승). 어찌 보면 8자를 볼 수 있게 될지도 몰라요. 더더욱 내수 위주의 정책이 어쩔 수 없이 나와야 하는 상황이죠.”-위안화가 정말 달러당 8위안까지 절하된다면, 그건 한국 경제에도 큰일 아닌가요?“그렇게 단기적으로 가진 않고, 서서히 갈 거예요. 만약 위안화가 갑자기 확 약세로 가서 투기세력이 붙으면 ‘투매’가 나타나면서 외국인이 중국시장을 버리고 떠나버릴 수 있으니까요. (위안화 절하 때문에) ‘이제 한국 수출 어떻게 하나’라는 얘기 나오는 정도가 되는 건 2~3년 뒤 일이 될 겁니다.”중국에서 유망한 섹터는?-아까 중국 증시는 지수 중심으로 투자하는 게 낫다고 하셨는데요. 유망한 섹터는 특별히 없나요?“중국 증시는 지수가 밋밋해도 섹터별로 순환매가 계속 나타나곤 합니다. 내국인이 주관하는 시장이다 보니까, 예컨대 부동산 회의가 하나 잡히면 ‘뭐가 나올 건가 봐’라며 부동산주가 막 올라요. 그런데 막상 그 회의를 열어서 뭔가 나오면 이전 3~4일 동안 엄청 많이 올랐으니까 오히려 주식을 팔아요. 그래서 자칫 섹터 (매수) 방향을 잘못 잡으면 위험할 수 있죠.”-약간 한국 증시 같네요.“그런가요? ‘며칠 올랐으니까, 또는 오늘 정책 나왔으니까 들어가야지’라고 하면 안 되는 시장이에요. 지금은 경기와 증시를 부양하고 제조업 PMI(구매관리자지수)도 바닥 찍고 올라가는 시기이잖아요. 그럼 크게 손해 볼 건 없다고 보고, 지수로 접근하는 게 가장 편안하죠.어느 정도 지수 레벨이 올라간 뒤, 중기적 관점에서는 미국이 규제하는 데도 중국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분야가 유망합니다. 바로 바이오와 반도체이죠. 강하게 규제하는데도 중국이 계속 연구 개발하고, 관료층을 대거 과학기술자로 바꾸면서까지 목숨을 걸고 있어요.”-신흥국 카테고리로 보면 인도가 엄청나게 치고 올라오고 있고, 동남아시아는 제조업 기지로 커가고 있습니다. 길게 보면 중국은 고령화로 인구도 줄어들고, 기세가 점점 꺾여가지 않을까 싶은데요?“중국은 아마 ‘왜 우리랑 인도, 베트남을 비교해?’라고 생각할 거예요. GDP를 기준으로 순위를 매기면 미국 바로 다음이 중국이고 인도는 저 아래에 있으니까요. 물론 성장률은 인도가 7~8%로 훨씬 더 높게 나오지만, 지금 중국이 그리는 건 ‘G2’ 그림이죠.지난 몇 년을 돌이켜 보면 중국이 은근히 글로벌 입지를 다졌어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가 제재받자 ‘우리가 원유 사줄게’라면서 위안화 결제를 늘렸고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이 7년 만에 화해할 때도 중국이 자리를 만들어서 베이징에서 악수했어요. 나름대로 G2로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실리적 외교를 한 거죠.”-중국이라고 하면 ‘그냥 신흥국 중 하나’로 접근했는데, 말씀 들으니 중국에선 ‘우리와 겨룰 상대는 이제 미국밖에 없다’라고 하겠군요. 아까 질문과 반대로 생각하면 ‘이렇게 큰 나라인데, 어떻게 포트폴리오에서 무시할 수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미국이 수입하는 국가 중 중국이 1위였는데, 지금은 멕시코가 1위에요. 그 사이 중국이 멕시코로 나가서 공장을 지었기 때문이죠. 직접이냐, 간접이냐의 차이이지 중국의 자본 영향은 계속 커져 왔습니다. 유럽도, 한국에도 여전히 중국은 주요 교역국이죠. 워낙 우리 산업과도 밀접한 국가여서요. 어쩔 수 없이 미워도 포트폴리오에서 일정 부분은 가지고 가는 게 맞을 겁니다.” By.딥다이브돌이켜보면 중국 정부가 갑자기 인터넷 기업 옥죄고, 게임과 사교육 금지하고 하면서 글로벌 투자자들이 ‘여긴 시장 경제가 아니다’라며 대거 떠났던 게 2021년입니다. 이후 에버그란데(헝다) 사태와 제로 코로나 봉쇄를 거치며 중국 증시는 암흑기에 접어들었는데요. 오랜만에 되살아난 중국 증시가 왠지 낯설고 미심쩍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죠. 이번엔 좀 다를까요. 주요 인터뷰 내용을 요약하자면. -중국이 각성했습니다. 대대적인 경기부양책 투하가 9월 말부터 시작됐죠. 내년 3월까지 이어질 부양책 행진 중 주목할 건 내수에 불을 지필 소비쿠폰 정책이 얼마나 나오느냐입니다. 관세 파고가 높아지는 가운데, 중국 경제가 믿을 건 소비뿐입니다. -투자자 기대가 높아지면서 돈이 중국으로 몰립니다. 중국 증시는 오를 땐 화끈하게 올랐다가 또 무섭게 추락하곤 했죠. 대신 하단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 긍정적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지수 중심으로 접근하되, 좀더 길게 본다면 중국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술개발하는 분야에 주목하세요. 바이오, 그리고 반도체입니다. *이 기사는 1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돌아왔습니다. 자, 그럼 경제는 어디로 갈까요. 많은 이들이 전망한 대로 미국 금리 오르고 달러 강세 가나요. 한때 4.5%에 육박했던 미국 국채 10년물 이자율, 달러당 1400원을 찍은 환율을 보니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금융시장은 고금리·강달러 시대 도래를 기정사실화하는 듯한데요.돌이켜보면 8년 전 트럼프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도 그랬죠. 그런데 이후 4년 동안 어떤 상황이 펼쳐졌는지 기억하시나요. 오늘은 트럼프 2기의 경제정책과 전망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고금리·강달러라는 논리금융시장에선 왜 트럼프 재집권=고금리로 통할까요. 그가 내년 1월 취임 뒤 펼칠 경제정책 때문이죠. 중요한 정책은 너무 많지만 가장 큰 건 두 가지입니다. 관세 인상과 세금 감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①수입품 관세를 올리면→물가가 뛰니까→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려야 할 거다.②세금을 감면하면→세수가 줄고→재정적자가 커지니까→국채 발행이 늘어서→금리는 오를 수밖에 없다.이런 논리이죠. 미국의 고금리는 곧 달러 강세를 뜻합니다. 원래 돈은 금리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고, 다른 나라도 아닌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전 세계 자금이 그리로 쏠릴 테니까요. 미국 달러 수요가 늘면서 달러가치가 뛰겠죠.논리적으로는 딱딱 들어맞습니다. 게다가 이번 선거에서 미국 상원은 공화당이 과반을 확보했고, 하원 의석수에서도 현재까지 앞서 나가고 있죠(개표 완료까지 며칠 걸림). 행정부와 상·하원을 모두 공화당이 휩쓰는 레드 스윕(Red Sweep, 공화당 싹쓸이)이라면, 이 흐름을 아무도 막지 못할 것만 같아 보입니다.트럼프 1기엔 어땠더라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트럼프는 1기(2017년 1월 20일~2021년 1월 20일)도 지금과 매우 비슷한 정책 기조였거든요. 중국 견제를 위해 관세 줄줄이 올리고, 법인세를 대폭 감면(35→21%)했죠. 그래서 그때도 트럼프가 당선되자마자 금리가 급등세를 보였는데요. 하지만 트럼프 재임기간 전체를 보면 오히려 금리도, 달러가치도 모두 하락했습니다. 마지막 1년은 너무 예외적 상황(코로나 팬데믹)이었으니 빼고, 첫 3년의 기록만 봐도 마찬가지죠. ‘트럼프 트레이드’가 결과적으로는 맞아떨어지지 않은 겁니다.왜 그랬을까요. ‘①번 관세를 올리면 인플레이션이 온다’는 공식부터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미국 역사적으로 ‘관세 인상=소비자 물가상승’인 사례는 1930년 말고는 찾아보기 어렵다는데요. 언뜻 생각하기엔 수입품에 관세를 왕창 물리면 그만큼 소비자 판매 가격이 올라갈 것만 같죠. 그런데 물건을 팔아야 하는 수입회사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갑자기 판매가를 50~60% 올리면 제품이 안 팔릴 게 뻔하죠. 그러니까 제품 가격을 마음껏 올리진 못한 채 기업이 관세 부담을 상당 부분 지게 되고요. 수익성은 악화됩니다. 과거 트럼프 취임 2년 차였던 2018년 미·중 무역갈등이 본격적으로 불붙고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부과가 이어졌는데요. 그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 2.4%에 그쳤습니다. 대신 기업들이 원가 부담을 호소하면서 2018년 미국 주식시장은 부진했고(S&P500 -6.52%), 그해 11월 하원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패배했죠.보편 관세라는 폭탄은 터질까이번에도 트럼프는 대대적인 관세 폭탄을 예고합니다. 중국산에 60%, 나머지 국가엔 10~20%의 관세를 부과할 거라고 하죠. 산업재 중엔 현재 관세 면제인 제품도 많은데요. 예외 없이 모든 수입품에 ‘보편 관세’를 부과한다니 상당히 놀라운 공약입니다. 이게 시행되면 미국 소비자 물가지수가 얼마나 뛸지를 두고 여러 분석(예-블룸버그 이코노믹스 최대 4.3%, 모건스탠리 0.9%) 분석이 그동안 쏟아져 나왔죠.사실 관세는 의회 허락을 받을 필요 없이 대통령이 행정명령만으로 부과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마음먹는다면 사실상 막을 장치는 없죠. 그래서 곧 터질 폭탄이라도 되는 듯이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는데요.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유력한 재무장관 후보로 꼽히는 스콧 베센트는 FT 인터뷰에서 이런 입장(최대 20% 보편 관세)은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서 축소될 수도 있는 “최대치”라고 설명하죠. “트럼프는 결국 자유무역주의입니다.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확대하는 거죠(escalate to de-escalate). 트럼프의 다른 점은 그가 사업가라는 점입니다. 그는 경제를 이해합니다.”골드만삭스도 비슷한 의견인데요. 트럼프가 중국에 대한 관세를 60%가 아닌 20%포인트만 인상하고, 다른 나라에 대한 보편 관세는 없을 거란 전망입니다. 이 경우 1년 뒤 근원 인플레이션은 2.3%로 더 떨어지고, 연준은 금리 인하를 이어갈 거라는 결론이죠.감세로 재정적자 눈덩이?그럼 ②번 세금 감면 확대 공약은 어떻게 될까요. 일단 트럼프 1기인 2017년 통과시켰던 ‘감세와 일자리 법(법인세를 한시적으로 35%에서 21%로 인하하는 내용)’은 일몰(2025년 말) 전에 연장이 추진될 겁니다. 현재 21%인 법인세율이 다시 35%로 높아지는 걸 막을 거란 얘기죠. 이에 대해 미국 의회예산국은 10년 동안 4조6000억 달러의 세수가 줄어들게 될 거라 전망합니다. 게다가 이게 다가 아니죠. 트럼프는 추가로 세금을 더 깎아주겠다고 공약했는데요. 미국에서 생산하는 제조기업엔 법인세를 15%로 낮추고, 각종 항목(팁, 초과근무 수당, 노년층 사회보장 혜택 등)에 대한 소득세를 면제하겠다고 했습니다. 가뜩이나 미국 경제는 재정적자(1조8330억 달러, 2550조원)에 시달리는데요. 만약 적자 상황에서 세수가 크게 줄어든다면 결국 빚을 더 내는 수(국채 발행)밖에 없겠죠. 벌써부터 미 국채 금리가 치솟는(가격은 하락) 이유입니다.그런데 세법을 바꾸려면 의회 동의를 받아야 하죠. 상·하원을 모두 공화당이 잡으면 국회 통과도 문제 없을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생각만큼 그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공화당 안에서도 이념 스펙트럼이 다양하기 때문인데요.딜로이트 보고서에 따르면 의외로 공화당 안에 2017년 법인세율 인하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는 의원들이 꽤 있다고 하죠. 공개적으로 법인세율 인상에 찬성한다고 밝히는 공화당 의원들도 나오고요. 전통적으로는 ‘공화당=친기업’이었고, 법인세를 깎아주는 데 적극적이었던 건 맞는데요. 그게 점점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공화당 자체가 예전과 달라지고 있는데요. 일단 대기업 경영자 중엔 민주당 지지자가 더 많아졌고요. 공화당 주 지지층은 소규모 사업가나 노동자 계층이어서 법인세 감면이 그렇게까지 큰 관심사가 아닌 거죠. 오히려 재정 적자에 대한 걱정이 점점 커진다고 합니다.하원은 양당 의석수가 비슷해서, 공화당 의원 중 일부라도 돌아서면 법안 통과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실제 2017년 트럼프의 오바마케어 폐지 시도가 초강경 보수파 공화당 의원들에 가로막혀 좌절된 사례가 있죠(대체 법안 ‘트럼프케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 트럼프의 이번 파격적 감세 공약 역시 수정 없이 일사천리로 통과하기란 쉽지 않아 보이기도 하는데요. 미국 재정적자에 대한 경각심은 필요하지만, 미국 재무부가 감세 때문에 국채를 마구 찍어내고 금리가 치솟는 상황이 실제로 닥치기까진 시간이 꽤 걸릴 수 있습니다.너무 긍정의 희망회로를 돌렸나요? 대선 이후 트럼프가 돌아와서 경제가 큰일 났다는 분석이 쏟아지고 있죠. 그래서 일부러 좀 다른 얘기를 해봤습니다.트럼프 말만 들으면 집권하자마자 무지막지한 정책이 펼쳐질 것만 같죠. 그런데 따져보면 그 중엔 대통령 권한 밖의 일도 있고요(예-“취임 첫날 게리 겐슬러 증권거래위원장을 해고하겠다”, “불법 이민자를 즉각 추방하겠다”). 많은 경우엔 의회 동의를 꼭 거쳐야 한다(예-“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법을 폐기하겠다”)는 점, 알아두셨으면 합니다.트럼프는 보수주의자라기보다는 포퓰리스트이죠. 이념이 아니라 뭐가 이익이 되느냐를 따져서 얼마든지 입장을 180도 바꾸곤 합니다. 놀랍도록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것만 지금으로선 예측 가능한데요. 불확실성 속에 숨어있을 기회를 잡으려면 안테나를 더 바짝 세워야겠습니다. 다시 돌아온 트럼프 시대, 슬기롭게 잘 넘겨 보자고요. By.딥다이브트럼프 당선 직후 엇갈리는 국내 주식시장 주가흐름을 보면서 미국 대통령의 위상을 새삼 실감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트럼프가 돌아왔습니다. 그의 당선 소식에 미국 국채 금리와 환율이 모두 뛰었습니다. 관세 인상, 세금 감면을 중심으로 한 트럼프 경제공약이 고금리, 강달러로 이어질 거란 전망이 파다합니다.-다만 트럼프 1기 땐 예상과 달리 금리도, 달러가치도 좀 오르다 오히려 하락했습니다. 관세인상이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지 않고, 기업의 부담으로 작용했죠. -이번에 트럼프는 모든 수입품에 10~20% 보편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약했는데요. 한편으론 협상카드에 그칠 거란 분석도 있습니다.-법인세를 15%까지 낮추고, 각종 소득세를 깎아준다는 공약도 있습니다. 이미 막대한 재정적자를 더 키울 수 있는데요. 하지만 공화당 의원들이 호락호락하게 이를 통과시켜 주지 않을 거란 관측도 나옵니다. -확실한 건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겁니다. 앞으로 미국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더 관심 있게 지켜봐야겠습니다.*이 기사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전기자동차 시장이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에 빠졌다는 2024년, 오히려 역대급 기록을 달성하며 질주하는 전기차 제조사가 있습니다. 바로 중국 BYD(비야디)이죠. 3분기 매출에서 처음으로 미국 테슬라를 제친 데 이어, 10월엔 월간 판매량이 전 세계 전기차 기업 중 처음으로 50만대를 돌파했습니다. 놀라운 신기록 행진인데요.20여년 전 조롱 속에서 자동차 산업에 뛰어든 배터리 기업은 어떻게 전기차 산업의 리더로 떠오르게 됐을까요. BYD 창업자 왕촨푸(王傳福) 회장의 지독한 기술 중심주의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조롱받던 배터리 기업2003년 37세 중국 기업인 왕촨푸는 제법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이끄는 BYD는 세계적인 휴대폰 배터리 제조사로 성장했고, 2002년 7월 홍콩증권거래소에 상장까지 했으니까요. 성공한 ‘배터리 왕’으로 불리던 2003년 1월. 왕촨푸가 폭탄선언을 합니다. 친촨자동차를 인수해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한 거죠.휴대폰 배터리 지금 너무 좋은데, 웬 자동차? 투자자들은 뒤집어졌습니다. 하루 만에 주가가 21% 폭락했죠. ‘휴대폰 배터리 제조사가 감히 자동차를 만든다고?’라는 조롱이 쏟아졌고, 주변에서도 “위험한 게임”이라며 그를 뜯어말립니다.당시 왕촨푸는 자동차를 운전할 줄도 몰랐습니다. 그는 “자동차는 쇳덩이다. 자동차 제조는 장난감 만드는 것과 같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아마도 잘 몰랐기 때문에 과감히 뛰어들었을 겁니다.2004년 말 왕촨푸는 BYD가 처음 자체 개발한 내연기관 신차 316을 자랑스럽게 공개했죠. 돌아온 딜러 반응은 “차가 너무 못 생겨서 팔 수 없다”는 혹독한 비판. 평소 조용하고 침착한 왕촨푸는 이때 너무 화가 나서 망치로 차량을 때려 부숴버렸습니다. BYD 자동차 제조 초창기의 흑역사입니다.다행히 이후 BYD가 출시한 F3는 도요타 코롤라 디자인을 베꼈다는 평을 듣긴 했지만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끕니다. BYD 자동차 사업이 이제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나 싶었던 2007년, 왕촨푸는 또다시 대담한 선언을 합니다. “2015년까지 중국 1위, 2025년엔 세계 최대 자동차 제조사가 되겠습니다.”고작 연간 10만대 생산하는 기업이 세계 1위를 운운하다니. 이후 수년간 왕촨푸는 헛소리하는 기업인으로 조롱받습니다. 하지만 왕촨푸는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가 당시 생각한 자동차 산업을 재편할 신무기는 바로 전기차였죠. “BYD는 선도적인 배터리 기술을 사용하는 순수 전기차 E6를 출시할 겁니다. 리튬인산철 배터리 공장을 선전에 건설하면, 전기차가 비 온 뒤 버섯처럼 솟아 나올 겁니다. 이 파괴적 제품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BYD는 늘 ‘세계 최초’를 추구합니다.”(2007년 8월)고집스럽게 기술 개발BYD는 2008년 세계 최초의 대량 생산 플러그인하이브리드 차량인 F3DM, 2009년 순수 전기차 E6를 출시합니다. 차량용 반도체 제조사와 리튬 광산도 인수했죠. 이런 공격적인 행보에도 업계는 싸늘했습니다. 도무지 전기차 시대라는 게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거든요.2011년 중국 자동차산업 발전 포럼에서 전문가들은 BYD에 냉담했습니다. “정부가 전기차 개발에 과도하게 적극적이게 만든 책임이 BYD에 있다”고 대놓고 비판했죠. 주식시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기차 관련 막대한 투자로 인해 수익성이 악화하면서 주가는 1년 만에 반토막 납니다. 부사장급 고위 경영진들까지 일제히 주식을 팔아치울 정도로 분위기는 엉망이었죠.돈 안 되는 전기차에 올인하다가 BYD가 망하게 생겼단 비난이 쏟아졌지만, 왕촨푸는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지만 동시에 매우 고집스러운 경영자이죠. 그때 마음고생이 꽤 컸는지, 지난해 열린 500만대 신에너지 차량 출시 기념 행사에서 그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의심과 조롱 속에서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굳건히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연구개발에 수천억 위안(수십조원)을 투자했습니다. 지난 12년(2011~2022년) 중 11년은 연구개발 투자비가 그해 순이익을 초과했습니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BYD 이익이 3년 연속 크게 감소했습니다. 특히 2019년엔 순이익이 16억 위안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연구개발에 84억 위안을 투자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우리가 돈을 태운다며 비웃었습니다.”2020년, 질주가 시작되다그렇게 축적해 온 BYD의 전기차 기술 잠재력이 2020년 폭발적으로 발현됩니다. 그해 3월, BYD가 혁신적인 배터리 신제품을 선보였죠. 칼날처럼 얇은 셀을 촘촘히 박아서 만든 ‘블레이드 배터리’입니다.왕촨푸는 전기차 운명을 결정하는 건 결국 배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애초에 휴대폰 배터리 제조사였던 BYD가 자동차 사업에 뛰어든 이유이기도 하죠. 초기부터 리튬인산철 배터리에 승부를 걸어온 BYD의 야심작이 바로 블레이드 배터리였습니다. 같은 부피에 훨씬 더 많은 배터리셀을 넣어 성능(주행거리)은 대폭 향상시키면서도 안정성을 높인 거죠. 주행거리로 경쟁사를 압도하는 ‘가성비 갑’ 브랜드로 BYD가 떠오르는데요. 마침 팬데믹으로 자동차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 준비된 강자, BYD의 무서운 질주가 시작됩니다.배터리 못지않게 BYD가 역점을 둔 기술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입니다. 내연기관 엔진과 전기 모터를 함께 쓰면서, 외부 전원(플러그)으로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차량이죠. 사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는 순수 전기차로 넘어가는 중간단계라고 여겨져서, 그리 각광받진 못했던 기술인데요. 왕촨푸는 “다른 회사들이 연구개발을 포기했고, 내부 많은 사람도 포기하자고 했지만 나는 그 길을 계속 가기로 했다”고 회상합니다. 2020년 BYD는 효율을 대폭 높인 ‘DM-i 슈퍼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내놓았고요. 그 결과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는 빠르게 중국 자동차 시장의 주류로 떠오릅니다. 그의 베팅이 들어맞은 거죠.혹시 올 5월 BYD가 새로 선보인 5세대 DM-i 하이브리드 시스템 스펙을 보셨나요? 연비가 100㎞당 2.9L(한국식으로 바꾸면 L당 34.5㎞)이고, 최대 항속거리가 무려 2100㎞(소형차 기준)라고 BYD가 밝혔습니다. 스펙이 충격적으로 좋아서 중국에서도 ‘말도 안 돼. 이거 거짓말 아니야?’라는 의심이 제기됐는데요. 이후 주행 연비를 확인하는 관련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면서, 실제로 연비가 상당히 좋다는 게 확인되는 중입니다(단, 중국은 연비 측정 기준이 한국과는 다르다는 점 유의하세요). 중국에서 BYD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신형 모델이 현재 엄청난 인기를 끄는 이유이죠. 지난달 BYD가 판매한 승용차 50만대 중 32만대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전년보다 129% 성장)입니다. 순수 전기차 시장이 주춤한 ‘캐즘’의 2024년이지만 BYD는 되레 더 잘 나가는 중이죠.유별난 기술 중심주의와 약점정리하자면 한국에선 싸구려 전기차로 폄하되는 BYD이지만, 저렴한 가격 못지않게 기술력이 큰 강점입니다. 이는 사실 연구개발비만 봐도 알 수 있죠. BYD가 올 상반기에 지출한 연구개발비는 202억 위안(약 3조9000억원). 전년보다 42%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순이익(136억 위안)은 물론, 테슬라(22억3000만 달러, 약 3조원)보다 많습니다.BYD는 중국에서 직원 수(약 90만명)가 가장 많은 민간기업인데요. 이 중 약 11만명이 연구개발 인력입니다. 전 세계 자동차 기업 중 단연 최대이죠.BYD 연구 인력은 3년 전(약 4만명)의 세배 가까이로 불어났습니다. 중국 명문대학 석박사 출신을 대거 채용하고 있죠. 왕촨푸는 외부에서 경력자를 영입하는 것보다 백지상태에서 기술 인력을 새로 키우는 걸 선호하는데요. 그래서 대졸 신입사원들을 기숙사에 집어넣고 엔지니어로 양성합니다. 회사는 대학의 연속이고, 관리자는 곧 멘토가 되는 거죠. 왕촨푸는 기술자라는 자부심이 상당히 큰 CEO입니다. 평소에도 정장보단 작업복을 입고 공장과 연구실에서 일하는 걸 더 좋아한다는데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한 적 있죠. “나는 먼저 엔지니어이고, 그다음 기업가입니다.”또 오래전부터 BYD의 가장 큰 재산은 엔지니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해 왔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자산은 엔지니어이지만, 재무제표엔 이 데이터가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과 투자자 인식의 가장 큰 괴리입니다.” “토지·공장·특허·주식 등 모든 재산이 사라져도, 엔지니어들이 있는 한 (BYD는)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습니다.” “BYD에서는 기술이 왕이고, 혁신이 기초이며, 핵심은 R&D 인력입니다.”이런 기술자 중심의 독특한 문화가 지금의 BYD를 만든 건 분명한데요. 이건 자칫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BYD는 외부 수혈 없이 자체 인력을 키우다 보니 전체 조직이 ‘또 하나의 왕촨푸’처럼 되어버렸죠. BYD 왕국에서 왕촨푸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사실상 회장 한 사람의 생각과 판단이 이 거대 기업을 좌지우지하죠. 이는 곧 왕촨푸 개인의 한계가 BYD의 한계가 될 수도 있단 뜻이기도 합니다.자율주행 기술이 바로 그런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왕촨푸는 지난해 초만 해도 “기만이고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다”면서 경쟁사의 자율주행 기술을 평가절하했는데요. 올해 들어서는 갑자기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대대적인 투자에 나섭니다. 지난해부터 중국 프리미엄 전기차 시장에선 이미 경쟁의 초점이 자율주행 성능으로 옮겨갔는데요. BYD가 경쟁사보다 한발 뒤처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거죠. BYD는 JD파워가 꼽은 중국의 지능형 전기차 브랜드 순위에서 1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습니다(1위는 지커, 2위 샤오펑).전기차를 더 싸고 잘 달리게 만드는 기술의 강자인 BYD가 ‘더 스마트하게’도 만들 수 있을까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자율주행 기술에 1000억 위안(약 19조3000원)을 투자한다는 BYD의 발표는 업계를 긴장케 합니다. 지금까지 왕촨푸의 BYD는 일단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기어코 해내는 기업이었으니까요. By.딥다이브왕촨푸 회장은 흙수저 출신입니다. 안후이성 시골의 가난한 농부 집안인 데다, 일찍 부모님을 잃었죠. SNS 같은 건 일절 하지 않는 조용한 스타일인데요. 그래서 금수저이자 SNS 대스타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캐릭터입니다. 다만 기술에 대한 집착과 포기를 모르는 끈기, 워커홀릭 기질 등. 일하는 방식에 있어선 공통점도 상당히 많죠.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전기차 시장의 성장이 주춤한 2024년에도 BYD는 놀라운 질주를 이어갑니다. 3분기 매출에서 테슬라를 처음 제쳤고, 10월엔 월 50만대 판매 기록을 세웠죠.-BYD 왕촨푸 회장은 일찌감치 ‘전기차로 세계 1위’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세상은 그를 조롱했지만 고집스럽게도 기술개발에 매달립니다.-축적된 기술력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 건 2020년부터. 블레이드 배터리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우위로 BYD는 내달리기 시작합니다.-독특한 엔지니어 중심 문화는 BYD의 강점이지만, 왕촨푸 회장 1인 체제는 자칫 약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익성을 따지기보단 연구개발에 올인하는 BYD의 질주는 어디까지 이어질까요.*이 기사는 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반도체 산업의 태동기부터 지금까지, 무려 70년째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거대 산업의 작동방식을 바꿔놓은 혁명가이기도 하죠. 바로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 창업자 모리스 창입니다.기계공학을 전공한 가난한 이민자였던 모리스 창이 어떻게 세계 기술산업 흐름을 재편한 선구자가 됐을까요. 그가 남과 다른 선택과 도전을 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요. TSMC를 이해할 열쇠가 될 모리스 창의 과거 스토리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반도체를 독학으로 익힌 엔지니어1949년 중국 출신 18살 학생이 미국 하버드대 영문학과에 입학합니다. 이름은 장중머우(張忠謀), 훗날의 모리스 창입니다. 전쟁과 빈곤에 시달리던 조국을 떠나 발 디딘 미국은 “천국이었다”고 그는 회상하죠. 그때 그는 잘 몰랐겠지만, 유리 진공관을 대체할 트랜지스터가 미국 벨연구소에서 발명된 지 1년쯤 지난 시점이었습니다.이듬해 그는 좋은 직장을 얻으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단 생각에 MIT(매사추세츠 공과대학)로 편입합니다. 전공은 당시 인기 있던 기계공학. 1955년 석사를 마치자 4개 회사가 취업을 제안합니다. 가장 유명하고 끌린 곳은 포드 자동차. 하지만 덜 유명한 전자기업 실바니아가 포드보다 단 1달러 많은 월급 480달러를 제시합니다. 모리스 창은 호기롭게 포드에 전화해서 월급을 480달러로 맞춰줄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단박에 거절당했죠. 그는 그렇게 운명처럼 실바니아에 입사해 이제 갓 태어난 반도체 산업을 만납니다. 그의 첫 임무는 트랜지스터 수율(정상 제품의 비율)을 끌어올리는 것. 그는 납땜의 열이 트랜지스터를 손상시키는 걸 알아내고, 간접 열로 와이어를 연결하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기계공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건데요.그는 일을 위해 반도체 이론을 공부하기로 합니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노벨상 수상자 윌리엄 쇼클리 책을 교과서 삼았죠. 독학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장의 나이 많은 선임엔지니어가 매일 밤 호텔 바에서 몇시간씩 술을 마신다는 걸 알게 됐죠. 그래서 매일 퇴근 뒤 책으로 공부한 다음,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호텔 바로 찾아가 엔지니어에게 술을 사주며 질문합니다. 모리스 창은 “그(선임엔지니어)는 전자공학에 대한 나의 스승이었다”고 회고하죠.반도체 전문지식을 쌓은 모리스 창은 트랜지스터를 설계하는 업무로 옮깁니다. 기술 컨퍼런스에 참석하며 트렌드를 파악한 그는 깨닫게 되죠. 실바니아는 반도체에서 비전이 보이지 않는단 걸요. 그래서 1958년 TI(텍사스 인스트루먼츠)가 영입을 제안하자 주저 없이 떠납니다. 그는 첫 직장의 몰락에 대해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처음부터 반도체 산업은 빠르게 움직이고 용서 없는 산업이었습니다. 뒤처지면 따라잡기가 상당히 어려워집니다.”공격적 가격 정책으로 시장을 뒤흔들다당시 TI는 떠오르는 기술기업이었습니다. 1958년 TI 연구원 잭 킬비(2000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는 세상을 바꿀 신기술을 발명했죠. 바로 집적회로(IC)입니다.모리스 창이 막 입사했을 때, TI는 IBM이 주문한 트랜지스터 생산라인 수율 때문에 골치였습니다. 당시 수율은 거의 0. 가끔 높아 봤자 2~3%였죠. 한마디로 죄다 불량품만 생산 중이었었습니다. 이 재앙적인 트랜지스터 생산 라인을 그가 맡았습니다.그리고 석 달 뒤, 수율이 25~30%로 뛰어오릅니다. 그는 그 비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레시피를 여러 번 합리적으로 바꾸며 시도했습니다. 적절한 온도·압력·도펀트(불순물)를 추측하기 위해선 장치 물리학에 대한 기초 지식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제가 실바니아에서 독학과 경험으로 능숙해진 거였죠. 오늘날 기준으론 ‘고대의 것’이지만, 그 당시엔 트랜지스터에서 좋은 수율 달성하는 기술은 매우 귀중했습니다.”이 트랜지스터는 TI에 대박을 안겨줬고, TI 사장까지 그의 이름을 알 정도가 됩니다. 회사는 그에게 박사학위 후원을 제안했죠. 그는 급여와 학비를 지원받고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를 2년 반 만에 마칩니다. 이후 그는 TI에서 가장 빠르게 승진을 거듭해 1967년 집적회로 총괄 관리자가 됐죠.이 시절 그는 반도체의 가격 책정 방식을 완전히 바꿔버립니다. 그가 일으킨 반도체 업계의 혁명적 변화 중 하나인데요.당시 반도체 판매 가격은 어떻게 정했을까요. 반도체 제조는 자본집약적 사업이죠. 워낙 초기 자본이 많이 들기 때문에 제조사는 가급적 비싼 가격을 매겨서 비용을 빨리 회수하려고만 했습니다.하지만 생산라인 경험이 많은 모리스 창은 그게 틀렸다고 봤죠. 왜냐하면 새로운 생산라인은 아주 형편없는 수율로 시작하니까요. 수율을 끌어올리는 방법은 많이 생산해 보면서 계속 수정하고 훈련해 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품 가격이 너무 비싸다면? 찾는 고객이 없으니→생산량을 늘리지 못하고→수율은 제자리일 수밖에요.그는 당시만 해도 작은 회사였던 보스턴컨설팅과 함께 ‘학습곡선 가격 책정’ 모델을 만듭니다. 칩 가격을 초기비용이나 시장가격보다 훨씬 낮게 책정해서 생산라인을 최대용량으로 가동하게 만드는 전략입니다. 초기 수익성은 희생하지만 대신 수율을 끌어올리는 시간을 크게 단축하고, 경쟁사를 압박할 수 있죠.처음엔 어리석다고 손가락질받았던 이 전략은 적중합니다. TI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높아졌고, 세계에서 가장 큰 집적회로 기업으로 부상하죠. 이제 학습곡선 가격 책정 모델은 반도체 업계의 표준입니다.실패와 좌절…25년 직장을 떠나다그는 언젠가 TI CEO가 되길 열망하는 잘나가는 임원이었습니다. 그래서 회사는 1978년 그에게 새로운 중요한 일을 맡깁니다. 소비자 제품 총괄 부사장으로 임명했죠. 반도체 사업부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으니, 실적이 내리막인 계산기·손목시계 사업도 부활시킬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건데요. 그래서 어땠을까요.네, 틀렸습니다. B2B와 B2C는 완전히 다른 분야였습니다. 저렴한 일본 제품에 밀리면서 창고엔 재고만 쌓여만 갔고, 시계 사업부는 1981년 폐쇄됐죠. 처절한 실패였습니다. 모리스 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객 집단과 시장, 앞서가는 데 필요한 게 완전히 달랐습니다. 반도체 사업은 기술과 비용만 있으면 됩니다. 소비자 사업에선 기술이 도움은 되지만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게 중요하죠.”1981년, 모리스 창은 ‘품질 및 인력 효율성 책임자’라는 직책으로 사실상 강등됩니다. 그는 “여전히 수석 부사장이었지만 사실상 방목지로 내쫓긴 것 같았다”고 회고하죠. 게다가 1980년 IBM이 신제품인 개인용 컴퓨터(PC)에 TI가 아닌 인텔의 프로세서를 채택합니다. TI 반도체 사업의 내리막이 시작된 거죠. ‘여기선 더 이상 흥미로운 일을 할 수 없다. CEO도 될 수 없겠다’고 생각한 그는 1983년 TI를 떠납니다.그의 사임은 신문 기사로 알려졌고 그를 영입하겠다는 전화가 쇄도합니다. 그는 그중 규모가 제법 큰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의 사장 겸 COO(최고운영책임자) 자리를 맡는데요. 1년여 만에 이곳도 떠납니다. 제너럴 인스트루먼트는 반도체 사업을 이것저것 인수한 뒤 몸값을 높여 팔아치우는, 일종의 사모펀드 방식의 기업이었는데요. 기업의 유기적 성장을 추구하는 자신의 방향과는 맞지 않다고 본 겁니다.나흘 만에 탄생한 사업 계획1985년, 부유한 54세 실업자 모리스 창에게 대만 정부가 비영리 연구기관인 산업기술연구소(ITRI) 회장 자리를 제안합니다. 사실 그는 중국 본토 출신이라 대만과는 별 관련이 없었죠. 이미 1962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해 정체성은 미국인이었고요. 그에게 대만은 낯설고 가진 게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의 동료와 당시 부인(첫번째 부인)은 대만에 왜 가냐고 펄쩍 뛰었죠.하지만 그는 이 제안을 덥석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저에겐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직업이었고 환경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모든 것이 저에겐 너무나 다르게 보였죠. 그때쯤 저는 재정적으로 꽤 안정적이었습니다. 급여를 받지 않고도 평생 살 수 있었죠. 그래서 보상은 훨씬 낮았지만 대만이 너무나 새롭고 도전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왔습니다. 저는 큰돈이 있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를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대만에 온 지 몇 주 뒤, 지금은 ‘대만 경제 기적의 아버지’로 불리는 리궈딩 경제부 장관이 그를 불러 말합니다. “당신은 대형 반도체 기업을 경영한 경험이 많으니, 대만에서 새로운 반도체 기업을 시작하기에 적합할 거 같습니다. 일주일 정도 안에 총리에게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지 알려주세요.”다음날, 리궈딩 장관은 일주일이 아니라 3일 뒤 총리에게 프리젠테이션을 해달라고 다시 요청합니다. 사실 모리스 창은 일주일이나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이디어가 금세 떠올랐기 때문이죠. 그렇게 나흘 만에 세계 최초의 순수 파운드리 기업이란 구상이 탄생합니다.반도체 산업을 바꾸고 세상을 바꿨다당시 세상의 모든 선도적인 반도체 기업은 자체적으로 제품을 생산했습니다. IDM이라 부르는 종합반도체 회사가 거의 전부였죠. 설계만 하고 생산은 다른 기업에 맡기는 팹리스 기업? 사실상 1980년대 중반엔 없다시피 했고요. 1990년대 초까지도 그 수가 100개가 채 되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습니다. AMD 공동창업자였던 제리 샌더스는 1992년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죠. “진짜 남자는 팹을 갖고 있다”(자체 공장이 없는 가난한 팹리스 경쟁사를 비하한 말인데 정작 AMD도 2008년 공장을 매각하고 팹리스가 됨).그런데 1985년에 모리스 창은 고객사 주문을 받아 칩을 생산하기만 하는 순수 파운드리 사업을 기획합니다. 주문할 고객(팹리스 기업)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즉, 아예 없는 시장을 새로 만들겠다고 한 겁니다.도대체 뭘 믿고 그는 이런 무모한 도전을 벌였을까요. 그의 통찰력은 두가지였습니다.1. 대만이 잘할 만한 게 제조뿐이었습니다.모리스 창은 아주 냉정하게 말합니다. “우리(대만)는 어떤 강점을 갖고 있을까요? 결론은 매우 적다는 겁니다. 우리는 연구개발, 회로설계, IC 제품 설계, 영업과 마케팅, 지식재산권에 강점이 거의 없습니다. 대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잠재적 강점은 제조였습니다. 그 강점에 맞고, 다른 약점을 피하기 위한 답은 순수 파운드리였습니다.”2. 새로운 시장이 열릴 가능성을 봤습니다.그는 TI와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에서의 경험을 회고합니다. “많은 통합 회로 설계자들이 회사를 떠나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걸 봤습니다. 그들이 떠나지 못한 건 회사를 설립할 만큼 충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웨이퍼 팹을 건설할 자금이 부족했습니다.” 만약 자체 생산라인을 구축하지 않고, 제조를 남에게 맡길 수 있다면? 창업자금은 100분의 1로 줄어들 겁니다. 순수 파운드리 기업이 필요한 이유였습니다.그렇게 모리스 창은 프리젠테이션을 했습니다. 세계 최초 파운드리 기업을 대만에 세우기 위해 필요한 자본은 2억2000만 달러. 대만 정부가 절반을 대지만, 상당한 외부 투자가 필요했습니다. 모리스 창은 미국으로 건너가 인텔, TI를 만났죠. 돌아온 대답은 모두 ‘노’. 다행히 마지막으로 접촉한 네덜란드 기업 필립스에서 5800만 달러(28% 지분율) 투자를 얻어냅니다. 이는 필립스에서 분사한 또 다른 네덜란드 기업, ASML과의 관계의 시작이기도 했죠. 나머지 지분은 대만 정부가 기업들을 찔러서 채웁니다.1987년 여름, 직원 수 50명의 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TSMC)가 설립됐습니다. TSMC 회장을 맡은 모리스 창이 당시 받은 지분은? 0이었습니다. 설립 대가로 받는 주식이 한 주도 없었죠. 몇 년 뒤 그는 자신이 저축한 돈을 털어 TSMC 지분 0.5%를 사들였고, 현재 그 가치는 50억 달러로 불어났습니다.모리스 창의 선견지명은 들어맞았습니다. 1987년 당시 전 세계에 20개 남짓이던 팹리스 기업은 이제 수천 개로 늘어났죠. 엔비디아, 퀄컴, 브로드컴은 초기부터 TSMC와 손잡은 고객사입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모리스와 TSMC에 대해 알게 됐을 때 설렜다”면서 “TSMC 없이는 엔비디아가 불가능했다”고 여러 차례 밝혔을 정도이죠.TSMC는 다른 어떤 기업도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반도체 사업을 지배 중입니다. 올해 2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 점유율은 62%. 갈수록 지배력이 커지는데요.이 독주 체제가 얼마나 이어질지와 별개로, 순수 파운드리 TSMC의 등장은 반도체 산업의 혁명이었습니다. 이 산업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놨죠. 2018년 은퇴했지만, 며칠 전에도 93세 나이로 TSMC 연례 체육대회에 참석해 “반도체 자유무역은 죽었다”며 경고를 날린 모리스 창 전 회장. ‘칩 워(Chip War)’의 저자 크리스 밀러 말대로 그는 “지난 100년 동안 가장 과소평가된 기업인”일지 모릅니다. By.딥다이브흔히 모리스 창을 두고 한국 언론에선 ‘조국을 위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한’ 애국적 인물처럼 묘사하곤 하는데요. 정작 본인은 지난해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미국인임을 분명히 했죠. 그의 과거 인터뷰 기록을 다시 살펴보면서, 어쩌면 미국 대기업에서 유리천장에 부딪혔던 좌절이 그를 다시 불타오르게 만들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애국심 같은 게 아니라 자존심이 진짜 원동력이랄까요. 참고로 이달 말 대만에서 그의 자서전 2탄(TSMC 설립 이후 스토리를 담은)이 출간될 거라고 하죠. 번역되면 읽어 보고, 재미있는 내용은 또 레터로 전하겠습니다.*이 기사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온스당 2758.42달러. 23일 금 현물 가격이 또다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죠. 언제 이렇게 올랐나 싶을 정도로 요즘 금값 정말 무섭게 뜁니다. 올해 들어 35%나 올랐다는데요. 주변에 “진작 금을 살 걸 그랬다”고 얘기하는 투자자도 부쩍 늘었죠.금값은 원래 주가 하락하고 달러 약세일 때 오르는 거 아니었나요? 기존 공식을 깨는 황금 랠리가 좀 어리둥절합니다. 달라진 금값 상승의 공식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금값 상승의 고전적 공식혹시 금 사보셨어요? 사람들은 왜 금을 살까요. 금은 다른 자산과 뭐가 다를까요. 단순히 반짝거리고 예뻐서는 아닐 텐데요. 금의 특징 몇 가지를 따져보면.①발행자가 없습니다 (=안전한 자산)주식이나 채권은 발행한 기관이 있고, 만약 그 발행자가 망하면 가치가 사라져 버릴 수 있잖아요. 금은 발행자가 없기 때문에 무가치해질 리스크가 없습니다. 기업이 망하고 전쟁이 나고 국가가 부도나도 말이죠. 매우 안전한 자산입니다.②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인플레이션 헤지)금은 보석과 전자제품 소재입니다. 실물이 가치를 저장하고 있죠. 세월이 흐르고 오래 된다고 해서 쓸모가 사라지지도 않고요. 매년 새로 채굴되는 금의 양도 대체로 일정합니다(연 2500~3000t).③생산성은 없는 자산입니다 (=배당금·이자 없음)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금을 혐오하는 걸로 유명하죠. 배당금도, 이자도 주지 않는 금속 덩어리는 살 이유가 없다는 게 그의 투자철학인데요. 버핏이 2012년에 쓴 유명한 주주 서한이 있습니다. ‘A=전 세계 모든 금(당시 17만 미터톤)’, ‘B=미국의 모든 농경지와 16개의 엑손모빌’이라는 두 개의 자산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면? 투자자라면 당연히 훨씬 생산적인 B를 선택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금은 더 커지지도, 배당금을 주지도 않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할” 자산이니까요.바로 이런 특징 때문에 금 가격의 오르내림엔 공식이 생겼죠. 금값은 보통 어떤 때 올랐냐면.1) 전쟁과 재난이 닥치고 주가가 급락하는 위기 상황 →안전하니까 금을 사자!2) 물가가 급등하는 인플레이션 시기 → 실물자산인 금을 사자!3) 이자율이 낮고 달러가 약세라 미국 국채 투자 매력이 떨어질 때 → 이자 없으면 어때. 차라리 금을 사자!금값 랠리의 미스터리이런 공식이 2020년엔 잘 들어맞았습니다. 당시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각국 정부가 돈을 엄청나게 풀었잖아요. 위기(1번)+인플레이션(2번) 상황이 동시에 닥치면서 금값이 8개월 만에 온스당 1500달러에서 2000달러로 급등했죠. 자고로 ‘위험할 땐 금’이었습니다.2022년 2월 말, 이번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죠. 게다가 그해 6월 미국 소비자물가상승률이 9%대까지 급등하면서 인플레이션이 절정에 달했고요. 그래서 ‘전쟁 나고 인플레니까 다시 금?’인 줄 알았는데요. 이땐 아니었습니다. 그 후 2년 동안 금값은 온스당 1800~2000달러 사이에 갇혀 있었죠. 금값의 이런 “당혹스러운 움직임” 때문에 이코노미스트지가 ‘금 가격의 미스터리’라는 기사를 냈을 정도인데요. 고금리+강달러(금값 하락 요인)가 전쟁+인플레이션(금값 상승 요인)과 팽팽히 맞섰던 시기입니다.그리고 올해 3월. 잠잠하던 금값이 갑자기 뛰기 시작합니다. 전쟁이 (진행 중이긴 하지만) 새로 난 것도 아니고, 물가 상승률은 가라앉고, 미국 주식시장은 연일 사상 최고치이고, 달러는 계속 강세였습니다. 미국 경제의 하드랜딩(경착륙) 우려는 잠잠해지고 ‘골디락스’ 기대감이 커지던 중이었고요.즉, 금값이 뛸 이유가 딱히 없어 보였습니다. 아니, 그 타이밍엔 오히려 금값이 떨어지는 게 상식엔 부합했죠. 그런데 놀랍게도 금값은 순식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준(온스당 2100달러 이상)으로 날아오릅니다. 도대체 이 중력을 거스르는 랠리의 동력은 무엇인가. 진짜 미스터리 분석에 들어갑니다.지정학이 부추긴 중앙은행의 금 사랑결론부터 말하자면 지난 2년여 사이 글로벌 금 시장이 달라졌습니다. 금, 특히 실물 금을 사 모으려는 수요가 한층 탄탄해졌죠.부동산 위기로 불안한 중국인, 경제 성장으로 부유해진 인도인, 자산 지키기에 열중하는 패밀리 오피스. 이런 수요가 갈수록 커지고 있고요.무엇보다 핵심은 중앙은행입니다. 중앙은행은 원래 외화보유액을 여러 자산으로 나눠 분산 투자하죠. 역사상 채굴된 모든 금의 5분의 1을 각국 중앙은행이 보유할 정도로 전통적인 큰손이고요. 그런데 유독 최근 2년 사이엔 금에 대한 쏠림이 확연합니다. 올 상반기에 각국 중앙은행이 매입한 금은 483t. 역대 상반기 중 최고입니다.단, 모든 중앙은행이 그런 건 아닙니다. 금 매입에 적극적인 나라는 대부분 신흥국이죠. 튀르키예(상반기 순매수 45t), 인도(37t), 중국(29t), 폴란드(19t)처럼요. 그럼, 신흥국 중앙은행이 왜 금을 살까요. 금값이 오를 것 같아서? 아닙니다. 중앙은행 입장에선 수익률보다는 안전성이 훨씬 더 중요한 법인데요.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 중앙은행의 해외 자산이 동결됩니다. 미국과 유럽, 일본 은행에 예치해 둔 막대한 자금을 빼낼 수 없게 된 거죠. 제재를 받으면, 다른 나라 통화로 표시된 자산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구나. 신흥국 중앙은행엔 깨달음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럼 그런 걱정이 없는 자산은? 바로 금입니다. 금은 가까이에 잘 보관만 해두면 유사시에도 빼서 쓸 수 있으니까요. 실제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 이후 금 수출이 막혔지만, 아랍에미리트처럼 제재가 없는 나라로 금을 팔았죠. 금은 수입한 뒤 녹여서 새로 금괴로 만들면 원산지가 바뀝니다. 제재를 얼마든지 우회할 수 있는 거죠.중앙은행의 금에 대한 사랑은 당분간 식지 않을 겁니다. 인베스코 애셋매니지먼트 설문조사에서 51개 중앙은행 중 향후 3년 동안 금 보유량을 줄일 거라고 답한 곳은 없었죠. 37%는 금을 더 늘릴 거라 답했고요. 금이 ‘외화보유액 무기화’에 대한 보호막이 될 거라 믿기 때문인데요. 폴란드 중앙은행 총재 아담 글라핀스키는 “이제 폴란드 금 보유량(420t)이 영국을 넘어섰다”면서 “외환보유고의 20%를 금으로 채울 것”이라고 약속했죠(현재는 14.9%). 인도와 나이지리아 중앙은행은 올해 각각 영국과 미국에 보관해 왔던 금을 자기 나라로 회수해 왔습니다. 만약의 경우, 다른 나라에 둔 금을 빼 오기 어렵게 되면 곤란하니까 미리 가져온 거죠.금리인하기엔 뭐가 오른다?올봄까진 신흥국 중앙은행이 열심히 금괴를 사 모으는 걸 보면서도 미국과 유럽 기관투자자는 금을 외면했습니다. 오히려 가격이 오를 때마다 금 ETF를 팔아치우기 바빴죠. 버핏의 가르침대로 금보다는 수익성 높은 채권이나 주식에 더 끌렸기 때문입니다. 하긴, 지난해 10월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가 5%를 찍었으니까요.그런데 몇 달 전부터 달라졌습니다.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 인하 기조로 돌아서면서 바람의 방향이 바뀐 거죠. 금리가 낮아지면 채권의 매력이 줄어들고, 상대적으로 금은 더 빛나기 마련입니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이후 미 연준이 기준금리를 끌어내렸던 시기-2001년, 2007년, 2019년-엔 금값은 어김없이 상승세를 탔죠.5월이 되자, 글로벌 금 ETF 시장이 12개월 만에 순매수세로 돌아섭니다. 그리고 9월 18일 미 연준이 기준금리를 0.50%포인트 인하하면서 금값은 단숨에 2600달러 선을 뚫습니다. 미국 투자관리회사 밴에크의 금 펀드 포트폴리오 매니저인 이마루 카사노바는 “금 ETF 투자자의 재등장을 매우 강력한 (금값 상승의) 단기 촉매로 본다”고 말합니다.그리고 미국 대선을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최근엔 금 매수를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이 생겨났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이 집권하면 정부 부채를 더 늘리고(이미 GDP의 120% 이상임), 관세를 올리고, 연준의 독립성까지 흔들겠다고 공약하죠. 만약 그대로 된다면 달러 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급등하는, 금값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미국 경제엔 우울한) 시나리오가 펼쳐질 겁니다. 단기 차익을 노리는 헤지펀드가 금 시장에 몰려든 이유입니다.금값의 올해 상승률은 35%. S&P500(22%) 상승률을 크게 웃돕니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이기도 하죠(1979년 금값 상승률은 무려 126%라 ‘넘사벽’).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이유들 때문에 아직은 많은 투자은행이 ‘조금 더’를 외칩니다. 씨티은행과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온스당 3000달러로 내년 전망치를 올렸고요. 스탠다드차타드와 골드만삭스는 내년 초 2900달러를 제시합니다.그럼 얼른 금괴 또는 금 ETF를 사야 하느냐고요? 그런데 알아두실 점이 있습니다. 최근 몇 년과 달리, 더 긴 시계열로 보면 주식의 수익률이 금을 훨씬 앞섭니다. 예컨대 다우지수는 지난 30년 동안 988%, 금은 603% 올랐으니까요. 많은 전문가는 금은 단지 ‘보험용’으로 소액 보유하는 자산이라고 조언합니다.앞에서 워런 버핏이 얘기했던 그 금덩이와 엑손모빌 주식 사례를 다시 볼까요. 만약 2012년 2월 당시 금에 투자했다면 12년간 70%가 넘는 수익률을 올렸을 텐데요. 엑손모빌 주식은? 언뜻 보면 12년 동안 주가 40%밖에 오르지 않아 수익률이 별로인 것 같지만, 그동안 받은 배당금을 모두 주식에 재투자했다면 총투자수익률은 130%에 달합니다. 이게 바로 갖고만 있어도 돈을 버는 수동적 소득의 힘이죠. By.딥다이브어릴 때 본 동화책 영향일까요. 반짝이는 황금은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물질이죠. 뜨겁게 펼쳐지는 황금의 랠리 이야기 결말이 궁금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금값이 올해 3월부터 무섭게 뛰고 있습니다. 급기야 온스당 2700달러 선을 넘어 고공행진하고 있죠. 사상 최고 기록이 계속 깨집니다.-금값은 위험이 커지고 물가가 치솟을 때 뛴다는 게 전통적인 공식입니다. 하지만 2022년 이후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지금 금값을 떠받치는 건 중앙은행의 금 매입 수요입니다.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외화보유액을 더 단단히 지키기 위해 금을 사 모으고 있습니다.-여기에 올해 5월부터는 미국과 유럽 투자자의 금 ETF 매수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금리가 내려가고 채권 매력이 떨어질 거라고 보기 때문이죠. 게다가 미국 대선 변수가 겹치면서 헤지펀드의 베팅이 이어집니다.-투자은행들은 금값 전망치를 온스당 3000달러까지 높여 잡았습니다. 다만 금은 어디까지나 ‘보험용’으로 투자하는 자산이라는 점을 알아두세요. 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한때 위대했지만 쇠퇴에 빠진 기술기업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돈은 아주 잘 벌었지만, 느리고 관료적이고 안주했습니다. 혁신은 사라지고 인재는 떠나고 직원 사기는 바닥이고 주가는 추락했죠. 당장 망할 리는 없었지만 가라앉는 게 뻔히 보였습니다.어디일까요. 2014년의 마이크로소프트(MS) 이야기입니다. 그 이후 스토리는 다들 아시죠? 2014년 2월 사티아 나델라 CEO가 새로 부임했고, MS는 다시 혁신의 기업으로 재탄생했고, 지난 10년 동안 주가는 1050% 뛰었습니다. MS의 화려한 부활과 사티아 나델라의 리더십은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서 식상할 수 있는데요. 기업 조직문화의 중요성을 설명하기에 이만한 사례가 없어 꺼내왔습니다. MS의 조직문화 대전환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위기에 등판한 조용한 내부자‘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대기업을 재편하는 건 호수에서 전함을 돌리려는 것과 같다.’2014년 1월 블룸버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CEO가 되고 싶지 않은 이유’ 기사에서 이런 시니컬한 분석을 전했습니다. 당시 MS는 스티브 발머 CEO가 사임을 공식 발표한 지 5개월이 넘도록 후임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죠. 내로라하는 외부 후보군은 모두 손사래를 쳤고요.MS는 수년째 위기론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모바일 전환을 놓치면서 회사를 떠받쳐온 윈도우의 위상은 급격히 쪼그라들었죠(소비자 컴퓨팅 기기 운영체제 중 윈도우 점유율 2000년 93%→2012년 19%). 투자자들은 클라우드 컴퓨팅에 집중하는 게 살길이라고 봤지만, 거대 조직의 급격한 방향 전환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주요 인재는 서둘러 탈출했고, 남은 자들은 ‘각자도생’을 위해 발버둥치기 바빴죠.그래서 사티아 나델라가 MS의 세 번째 CEO로 지명됐을 때 여론은 싸늘했습니다. 1992년 25세에 MS에 입사한 엔지니어 출신인 나델라는 당시 클라우드 사업을 이끌고 있었는데요. 뼛속까지 MS맨인 그가 획기적인 개혁을 해낼 수 있겠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나델라를 ‘22년 일한 조용한(low-key) 직원’으로 칭하며, 이렇게 분위기를 전했죠. ‘비평가들에게 나델라 씨의 임명은 외부인을 데려와 상황을 뒤흔드는 것만큼 대담하진 않은 안전한 선택으로 여겨집니다.’그리고 이 조용한 새 CEO가 모든 걸 뒤집어엎기 시작합니다.윈도우 성 깨고 공격 앞으로2014년 11월, MS가 아이폰·아이패드용 MS오피스(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앱을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출시합니다. 와이어드 표현대로 ‘MS의 가장 상징적인 제품군을 가장 상징적인 경쟁사의 모바일 기기에 출시한 것’이죠. 이어 2016년엔 오픈소스인 리눅스 재단에 플래티넘 멤버로 가입해 또 업계를 놀라게 합니다. 직원 아이폰을 빼앗아 밟는 척하고, “리눅스는 암과 같다”고 독설을 퍼부었던 스티브 발머 전 CEO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었죠.과거 MS는 이미 구축된 ‘윈도우 생태계’를 공고히 하는 데 집착했습니다. 수비에 집중하느라 시대 흐름을 놓치고 정체되고 말았는데요. 나델라 취임 뒤엔 달라진 겁니다. ‘윈도우 우선주의’는 버리고, 공격으로 전환해 새로운 기회에 뛰어들기 시작하죠. 과거라면 생각도 못 했을 파격적인 파트너십 구축이 가능해진 이유입니다. 윈도우라는 틀을 스스로 깨고 나와 클라우드라는 더 큰 시장으로 성큼 나아간 겁니다.이런 공격적인 행보는 과감한 M&A와 투자로 이어집니다. 2016년 링크드인(260억 달러), 2018년 깃허브(75억 달러), 2023년 액티비전 블리자드(687억 달러) 인수를 성사시켰죠. 최고의 기술과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과감하게 나선 건데요. 그 가장 큰 성공 사례로는 오픈AI 지분 투자를 빼놓을 수 없겠죠. 챗GPT 출시 뒤 MS 주가는 70% 가까이 뛰었으니까요.‘성장 마인드셋’을 외친 이유여기까지만 보면 대단한 선견지명과 결단력을 가진 CEO 한 사람이 기업을 구한 것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대기업이 리더 한명 바뀐다고 그렇게 쉽게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죠. 나델라 취임 당시 직원이 10만명이던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시절 MS 조직문화는 악명 높았습니다. 프로그래머이자 만화가인 마누 코넷이 2011년 MS 조직도를 패러디해서 그린 아래 그림이 유명하죠. 내부 운영그룹들이 서로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입니다.남을 누르고 자기네 팀 또는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와 내부경쟁이 만연했습니다. 일을 잘하는 것보다 사내정치에 능한 사람이 조직에선 잘 나갔죠. 6개월마다 돌아오는 성과평가에서 좋은 고과를 받기 위해 단기 성과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고요. 이에 질려서 인재는 떠났습니다.그래서 나델라는 CEO 취임 첫해를 대부분 직원 의견 듣는 데 썼습니다. 익명으로, 개별로, 포커스 그룹을 통해 직원들 얘기를 듣고 무엇이 조직의 문제인지를 파악했죠.2015년 7월 나델라는 새로운 회사의 사명(‘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조직이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과 함께 ‘성장형 사고방식(growth mindset)’에 기반한 조직문화를 실천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미국 스탠퍼드대 캐롤 드웨크 심리학 교수가 저서 ‘마인드셋’에서 소개한 심리학 개념이 기업 경영에 접목된 순간인데요.성장형 사고방식은 한마디로 사람의 능력이 고정된 게 아니고,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개발될 수 있단 믿음입니다. 나델라 CEO가 2015년 전체 직원에 보낸 이메일을 인용하자면 이런 거죠.“그것은 모든 사람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잠재력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키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배우고 끝없는 호기심을 가져야 합니다. 불확실성에 기대고, 위험을 감수하고, 실수할 때 빠르게 움직여야 하며, 미스터리로 가는 길에 실패가 발생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열려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성공이 우리의 성공을 깎아내리지 않아야 합니다.”기술의 세계는 변화와 발전이 끊이지 않죠. 계속 배우고 쫓아가지 않으면 한순간에 도태될지 모릅니다. 지금 아는 게 많은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앞으로 배울 수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죠. “뭐든 다 아는 체(know-it-alls)”하는 문화에서 “모든 걸을 다 배우는(learn-it-alls)” 문화로의 전환. 이것이 나델라가 생각한 성장형 사고방식에 기반한 조직문화입니다. 이를 위해 MS는 일단 직원을 점수대로 줄 세워 등급을 매기는 스택 랭킹(Stack Ranking) 방식의 인사평가부터 없앱니다.직원을 5개 단계로 나눠 평가하는 상대평가 시스템. 다들 익숙하시죠.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상하려면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많을 텐데요. 이런 스택 랭킹은 거대해진 MS 성장엔 독이 됐습니다. 내부 경쟁과 사내정치를 부추기고 협력을 방해했기 때문이죠. 또 최고의 인재로 보이기 위해 직원들이 자신의 약점은 감추고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을 피하게 만들었습니다. 괜히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곤란하니까요. 새로운 걸 배우기보다는 다들 이미 잘하던 일만 계속하니 혁신이 싹틀 수 없습니다. 나델라는 나중에 자신의 저서 히트 리프레시(Hit Refresh)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혁신은 관료주의로 대체됐습니다. 팀워크는 내부정치로 대체됐습니다. 우리는 뒤처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델라는 스택 랭킹과 연례 평가 시스템은 물론이고 성과 목표 자체를 폐지합니다. 지속적인 동료 피드백과 관리자의 코칭이 이를 대체했죠. 보너스를 얼마나 줄지 정하는 건 이제 평가시스템이 아닌 관리자 임무가 됐습니다. 결과보단 과정, 성취보단 도전에 높은 가치가 부여됩니다.MS가 분기마다 실시하는 ‘맥박 체크’라 불리는 간략한 직원 설문조사엔 이런 문항이 포함됩니다. ‘당신은 다른 직원의 프로젝트나 성공을 어떤 식으로 활용했습니까?’ ‘당신은 성장형 사고방식을 어떻게 실천했습니까?’나델라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퍼뜨리는 데 열정적으로 매달립니다. 직원 대상 강연과 이메일로 거듭 이를 강조했고요. 협업능력이 뛰어난 임원을 주요 보직에 발탁해 메시지를 한층 강화합니다. 일주일짜리 ‘하계 해커톤’ 같은 활동을 통해 부서 간 협업을 촉진하고요. 직원을 위한 학습 프로그램은 넘쳐날 정도로 대폭 늘립니다. 이런 교육에 참여하라고 적극 독려하는 안내 문구는 사옥 곳곳에서-커피컵부터 식당 냅킨홀더까지- 마주칠 수 있게 됐죠.항상 자신을 1점으로 평가하라여전히 성장형 사고방식이 뭔지 와닿지 않는다면 나델라의 이 답변을 참고하세요. 2018년 차이신 글로벌과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이것이 중간고사이고 1~10점 척도라면, MS는 변화의 여정에서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는데요.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항상 1점입니다. 그 질문에 9나 10점이라고 대답해선 안 돼요. 그러면 할 일이 더이상 없거든요. 그리고 중간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뜻이죠. 항상 새로운 것의 시작에 있다고 말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항상 출발선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란 뜻이죠. 물론 조직원이 모두 이런 사고방식을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닙니다. 나델라는 저서에서 자신에게 ‘다른 임원들이 성장형 사고방식 관련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는다’며 불평한 임원에 대해 썼죠. 그런 불평이야말로 성장형 사고방식하고는 가장 거리가 먼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150명 고위 임원을 모아 이렇게 쓴소리를 날립니다. “임원이 되면 징징거리는 일은 끝입니다. 이 회사의 리더가 되기 위한 당신의 일은 똥더미에서 장미 꽃잎을 찾는 겁니다.” 제약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그걸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목표에 집중시키는 사람. 그게 바로 리더의 임무라고 나델라는 설명합니다.그렇게 10년. MS는 성장형 사고방식으로 똘똘 뭉친 혁신의 기업으로 재탄생했을까요. 딱 떨어지는 수치로 말할 순 없지만, MS가 다시 최고의 기술 인재를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기업이 되었다는 게 아마 그 증거일 겁니다. 매년 ‘미국 최고 직장’ 리스트를 발표하는 글래스도어 순위에서 올해 MS는 18위에 올랐습니다. 빅테크 중엔 엔비디아(2위)보단 낮지만, 구글(26위)과 애플(39위)보단 높죠(참고로 메타, 아마존, 테슬라는 100위권 밖). 둔중한 거인이던 MS는 이제 스타트업처럼 움직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사티아 나델라 CEO의 성공적인 지난 10년에 대한 찬탄은 워낙 많이 나온 얘기라 더 보태진 않아도 되겠고요. 성장형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마무리로 직장인을 위한 작은 테스트(?)를 준비했습니다. 조직행동학 전문가인 수잔 애쉬포드 미시간대 로스경영대학원 교수의 저서 ‘유연함의 힘’에서 인용했는데요. ‘내가 속한 조직은 학습 지향적인(=성장형 사고방식) 조직일까’를 알아보는 문항입니다. 총 여섯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에 ‘그렇다’가 많을수록 그 조직은 성장형 사고방식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답 중 그렇다는 몇 개일까요? By.딥다이브1. 회사가 동료보다 특출한 재능이 있다고 여기는 소수의 스타 직원이 이룬 성취를 추켜세우고 칭송하는가?2. 직원 채용의 주된 기준이 성장 잠재력이 아니라 지원자의 측정 가능한 인지적 능력인가? 또는 IT기술, 마케팅, 영업, 인적 자원관리, 리더십 등 다른 활동 영역에 재능이 있는지가 채용의 결정적인 기준인가?3. 회사가 표창장, 특별상여금 등 형태로 개인이나 부서를 포상할 때 노력과 헌신이 아닌 정량적 성과를 주된 선발 기준으로 삼는가?4. 회사는 직원이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 그 일로 교훈을 얻을 기회를 주는 대신 잘잘못을 따져 처벌하는 데 집중하는가?5. 직원들은 자신의 실수를 감추고 자신의 프로젝트가 더 성공적으로 보이게 결과를 조작하고, 직무 성과가 돋보이도록 포장하느라 기를 쓰는가?6. 직원이 한번 실패한 뒤 큰 성과를 달성해도 앞선 실패가 반영된 업무 평가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는가? 마치 한번의 실패가 지울 수 없는 낙인이라도 되는 듯 취급하는가?*이 기사는 22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삼성전자 위기론’이 잦아들 줄 모르죠. 주가가 5만원대에 머물면서 주변에서 부쩍 ‘삼성전자 주식 살까?’라고 묻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요.왜 삼성전자가 위기인가에 대한 전문가 분석은 많습니다. 그 중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게 조직문화인데요. 삼성전자 조직문화, 내부 직원은 어떻게 볼까요. 극도로 신원 노출을 꺼리는 터라, 완전 익명을 보장하고 한 직원을 인터뷰했습니다.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에서 20년 정도 일한 엔지니어입니다. 그는 “칸막이가 많은 회사라 다 아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개인 의견”이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는데요. 그 내용을 일문일답으로 소개합니다.*이 기사는 1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실패를 없애기 위해 도전도 없앴다-조직문화를 고치겠다면서 전영현 DS부문장이 강조하는 게 ‘현장의 치열한 토론 문화’ 재건이다. 토론 문화라는 게 뭔가? 원래는 삼성전자 반도체에 치열한 토론 문화라는 게 있었는데 사라진 건가?“초반, 2010년 즈음엔 있었다. 예컨대 문제점이 있을 땐 그걸 놓고 같이 가설을 세워서 ‘이런 테스트 결과들이 그 가설과 어긋나지 않냐’면서 다른 가설로 얘기하고, 이렇게 서로서로 의견을 나눴다. 또 새로운 걸 해야 할 땐 이 방식이 좋을지 저 방식이 좋을지, 장단점을 토론했다.”-그런 기술적 토론은 당연히 지금도 해야 하지 않나?“잘 안된다. 효율성, 즉 변화를 주지 않고 더 쉽게 할 수 있는 것만 하려고 한다. 예전엔 실무자가 의견을 내면 그래도 검토해 보고 위로 올라가는 게 있었는데, 지금은 답이 정해져 있다. 실패를 절대 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기술적으로 어려운 새로운 건 아예 안 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선택과 집중 없이 세상이 얘기하는 기술 트렌드는 일단 다 하기도 한다. 괜히 어느 걸 빼놨는데, 경쟁사가 그걸로 뜨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계기가 있나?“권오현 전 DS부문장(2011~2017년)은 선택과 집중을 하는 편이었다. 건강에 신경 써야 한다면서 ‘스마트 워크(Smart Work)’를 강조했고. 그런데 후임 김기남 전 부문장(2017~2022년)은 마이크로 매니지먼트 스타일이었다. 이재용 회장이 참석하는 ‘토요 주간회의’가 생기더니 일주일 내내 보고용 회의를 하는 문화가 생겼다. 요즘 얘기되는 HBM(고대역폭메모리) 철수 결정도 그때 이뤄졌다.”-HBM이 당시엔 별로 돈 되는 게 아니라서 그랬을까?“HBM은 D램을 차곡차곡 쌓는 거다. 당시엔 D램 쪽 입김이 셌으니까 ‘우리는 D램 기술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고 본 거다. ‘집중을 잘해서 D램을 잘 만들면 되지, 뭐 하러 쌓고 있냐. 쌓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라는 식이었다.”-쌓는 기술이 어렵다고 하더라. 또 파운드리의 패키징 기술도 TSMC와 차이가 많이 난다던데.“입사 초기만 해도 삼성전자가 패키징을 잘한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웃소싱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최신 패키징 기술에서 뒤떨어지게 됐다. 요즘은 기본 패키지뿐 아니라, PI(Power Integrity, 전원 무결성), SI(System Integrity, 신호 무결성)가 중요한데 그런 전문가도 아마 많지 않을 거다.”-원래 잘하던 걸 계속 더 잘하려고만 하다 보니, 다른 걸 놓친 듯하다.“실패를 하더라도 미래를 준비했어야 했다.”기술보다 재무 라인이 우위-직전 경계현 전 부문장(2022년~2024년 5월)은 뭔가 의욕적으로 바꿔보려 하지 않았나?“그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벤치마킹하려고 했다. 교육을 더 많이 하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그런 노력을 했는데. 그 당시 성과는 고꾸라지던 때였고, HBM으로 SK하이닉스는 날아가면서 이미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결정적으로 노조와의 교섭에서 경계현 사장이 휴가 하나를 더 주기로 협상했는데, 서초에서 ‘노’하면서 노조는 파업하고 경계현 사장은 잘렸다.”-서초가 뭔가?“사업지원TF. 흔히 ‘HH’라고 부른다. 우리가 ‘서초에 보고 올린다’고 얘기할 때, 그 서초는 HH이다.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부문장이 결정할 수 없는 것도 상당히 많다.”-그래서 ‘삼성전자는 기술보다 재무나 법무 쪽이 더 힘이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건가?“애플이 2019년 아이폰에 삼성전자 모뎀을 넣고 싶어 했다. 당시 시스템LSI 사장은 하고 싶어 했지만 서초에서 ‘노’했다. 아이폰은 갤럭시의 경쟁자인데, 거기에 팔면 아이폰 경쟁력이 좋아질 거라고 본 것. 그때 공급했으면 우리가 (퀄컴을) 잡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그런 결정을 HH가 한다고 직원들은 보고 있나.“그렇다. 보고서 쓸 때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게 쓰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고등학생도 아니고, 초등학생 수준의 기술 지식을 가진 경영진이 결정하는 게 말이 되나.”-반도체 엔지니어가 초등학생 수준으로 내부 보고서를 쓴다고?“기술용어를 최대한 쓰지 않아야 한다. 그게 도저히 안 돼서 기술용어를 써야 하면, 그걸 쉽게 풀어서 밑에다 써준다.”-그거 쉽지 않겠다.“그리고 결정을 위에서 내리기 때문에 보고 라인이 매우 길어졌다. 파트→그룹→팀→개발실→총괄→서초, 이렇게 보고가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결정도 느리고 중간에 변형이 된다. 만약 실무진이 ‘이 일은 10가지 리스크 중 8~9개가 빨간색(위험하단 뜻)’이라고 보고를 올리면 ‘빨간색을 좀 노란색으로 바꿔’라고 한다. 그래서 노랑으로 바꿔서 한 번 더 보고가 올라갔다 오면 ‘굳이 노란색으로 해야 해. 좀 파랗게 바꿀 수 있는 거 없어’라고 한다. 그리고 한 번 더 올라가면 ‘저거 하나를 꼭 노랗게 해야 해. 너무 거슬린다. 조건을 좀 달아서 파랗게 한번 해봐’라고 한다.”-전영현 부문장이 사내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겠다. ‘문제를 숨기거나 회피하고 희망치만 반영된 비현실적인 계획을 세운다’는 게 그런 건가.“임원들은 당장 내년에 (공급에) 들어가야 자기 실적이 되니까 빨리 가려고만 한다. 어차피 망가지는 건 후임자 때니까. 부서 간 장벽 문제도 마찬가지다. 여러 부서가 함께 일할 때, 가능한 한 자기네 부서 문제는 계속 숨긴다. 그러다 다른 부서에서 문제가 생기면 ‘저것 때문에 안 된다’면서 묻어가려고.”‘5만 전자’에도 물 안 타는 이유-삼성전자 반도체 엔지니어들 이직이 요즘 더 많아졌나?“중국으로 가면 돈을 3~5배, 많게는 9배까지도 준다는 얘기가 있다. 주로 공정 쪽 엔지니어를 많이 빼가는데, 지난해엔 설계 쪽도 제안이 오더라. 특히 AI 관련된 인력은 많이 빠져나갔다. 회사에서 대접을 잘해주면 왜 나가겠나. 일을 잘해도 보직자한테만 상위고과를 깔아주니, 실무자는 고과를 잘 받을 수가 없는 구조다.”-많은 사람이 주 52시간제가 문제라고 지적하는데?“52시간제가 문제라면, 52시간을 꽉 채우고도 일을 더 하려는 사람이 90%는 돼야 하는 것 아닌가? 일을 하고 싶은데 시간이 차서 못 하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우리는 포괄임금제라 월 16시간까지는 초과근무 해도 시간외수당이 없다. 그러니까 젊은 직원은 ‘내가 왜 공짜로 일을 하지?’라며 40시간만 채우면 가버린다. 52시간제가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그 16시간에 대해 풀어주면(시간외수당을 지급하란 뜻), 10시간이라도 더 일하려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워낙 이런 분위기를 알아서 나도 8층이지만(과거 삼성전자 주식을 8만원대에 샀다는 뜻) 추가매수를 안 한다.”-삼성전자 반도체맨이 5만원대에도 물을 안 탄다?“자칫 회사가 인텔 꼴 날 것 같다.”-문제는 다들 어느 정도 아는 것 같다. 해법은 뭘까.“바꾸기 쉽지 않다. 경계현 전 사장이 시스템을 바꾸려고 했지만, 그 아래 임원과 부서장은 지난 10년 동안 보신주의 문화에서 발굴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뭘 알지도 못하면서 바꾸려고 하냐. 힘들다’고 하고, 아래 직원들은 ‘바꾸겠다고 얘기했는데 실망했다’고 하고. 층층이 나뉘어 딴소리했다.정말 바뀌려면 중간관리자를 대거 바꿔야 한다. 지금은 아예 결정을 안 하고 보고만 올린 뒤 저 꼭대기만 쳐다보고 있다. 원래 팀장이 ‘내가 책임질 테니 이거 해보자’ 해야 하는데, 팀장 본인이 ‘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한다. 그럼 팀원들이 어떻게 힘이 나겠나.지금 경영진이 보기엔 ‘난 잘하는데 왜 밑에 애들은 치열한 토론을 안 하지?’라고 할 거다. 알고 보면 그동안 자기들이 보고 받고 리젝트시키길 반복하면서 나타난 결과다. 직원들은 ‘토론해봤자 어차피 안 들어준다’고 하는 것.”-엔비디아에 HBM3 납품이 불발되면서 삼성전자가 HBM4로 승부한다는 기사가 나왔다.“1, 2, 3단계가 다 늦었으니까 이제 4단계로 퀀텀점프를 해보겠다는 건데. 기초가 없는데 그게 가능할까. 이제 설계 스크립트를 봐도 아무도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 이게 왜 필요한지, 또는 뭐가 필요 없는 건지 히스토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어쩌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수도 있지만, 그러려면 1년으론 안 된다. 그런데 SK하이닉스는 1년 뒤에 HBM4를 내놓지 않겠냐. 또 완전히 기초부터 다시 시작할 만큼 트레이닝이 돼 있는 사람도 지금은 없는 것 같다.” By.딥다이브치열함, 토론, 자율성, 도전, 모험, 자부심. 미국 보잉과 인텔은 이런 가치를 잃어가면서 추락한 기술 기업의 사례로 꼽히곤 합니다. 과연 삼성전자는 그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부디 그러하길 바라며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삼성전자가 위기입니다. 반도체 현장의 조직문화를 바꿔야 한다고들 얘기하죠. 내부 직원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엔지니어의 토론을 없애고 잘하는 것만 계속 하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기술보단 재무 라인이 의사결정권을 가지면서 보고라인은 길어졌습니다. 의사결정은 느려지고, 보고 내용은 중간에 변형됩니다. -보신주의에 물든 조직문화를 한번에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위에선 젊은 직원들과 52시간제를 탓하지만,사실 진짜 책임은 실무진의 얘기를 귀기울여 듣지 않아온 경영진일지 모릅니다.*이 기사는 1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혹시 사업으로 큰돈을 벌고 싶은 기업가적 야망을 가지고 있나요. 그렇다면 미국·유럽 사모펀드가 주목하는 최신 인기 산업을 한번 눈여겨 보는 건 어떨까요. 바로 배관공입니다.팬데믹 이후 지난 몇 년 사이 내로라하는 사모펀드들이 북미와 유럽에서 주택 배관·공조·전기 기술 관련 소규모 기업을 쓸어 담고 있습니다. 사모펀드에 수백억 원을 받고 기업을 팔아 단번에 벼락부자가 된 배관공 스토리가 언론의 주목을 받죠. 도대체 배관기술자와 관련 기업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뭘까요. 오늘은 사모펀드가 배관기업을 좋아하는 이유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사모펀드의 최고 인기 투자 분야혹시 영국인 기업가 찰리 멀린스(Charlie Mullins)를 아시나요. 팝스타를 연상케 하는 뾰족한 탈색 금발 머리와 보수적이면서 과격한 정치적 발언으로 유명한 인물인데요. 그의 별명은 이겁니다.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배관공’.런던 1위 배관기업(엔지니어 약 250명) ‘핌리코 플러머(Pimlico Plumbers)’의 오너였던 멀린스는 2021년 미국 홈 서비스 플랫폼 네이버리(Neighborly)에 기업을 팔았죠. 매각 금액은 무려 1억4000만 파운드(2479억원). 15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배관 견습생이 됐던 흙수저 출신 기업가의 화려한 엑시트 소식이 큰 관심을 끌었는데요.멀린스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겠고요.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부분은 ‘세계 최대 규모의 홈 서비스 기업’으로 통하는 네이버리 주인이 세계적 사모펀드 KKR(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이란 점입니다. 2021년 인수했죠. 즉, KKR은 네이버리를 통해 미국·영국·독일·오스트리아·포르투갈·아일랜드 등에서 운영 중인 5500개 주택 관리 서비스 프랜차이즈를 거느립니다. 지난해 매출은 41억 달러(약 5조5800억원). 막힌 변기를 뚫고, 보일러를 고치고, 에어컨을 설치하거나 집안 해충을 없애는 사업과 세계 3대 사모펀드의 조합이라. 왠지 좀 어색하기도 한데요.KKR만이 아니죠. 모건스탠리 사모펀드 부문, 제너럴 아틀란틱, 카터튼 파트너스, TSG컨슈머파트너스, 워터랜드 등. 사모펀드들 사이에 주택관리 소기업을 인수하는 투자 붐이 일어난 지는 이미 3~4년 됐습니다. 이 분야 M&A는 지금도 엄청나게 활발하죠. KPMG의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글로벌 홈 서비스 부문의 M&A는 102건, 113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지난해 상반기(73건, 29억 달러)보다 크게 늘었는데요. (단, 이는 언론과 전문기관에 포착된 굵직한 거래만 취합한 수치이긴 합니다. 미국엔 이런 소기업이 수십만 곳이나 있죠.)EY파르테논의 수석 파트너 신 레비 말대로 “이 사업은 사모펀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미국 사모펀드 알파인인베스터 설립자 그레이엄 위버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이렇게 말하죠. “당신은 1000만~3000만 달러 가치가 있는 사업을 구축할 수 있고, 그걸 인수할 구매자 리스트도 준비돼 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사줄 사람이 없었는데 말이죠.”새로운 백만장자 계층의 탄생잘 나가는 미국과 유럽 사모펀드들이 왜 집 고치는 소기업을 사들일까, 궁금하시죠. 그 전에 KKR 같은 경영참여형 사모펀드가 어떤 기업에 투자하는지를 생각해 볼까요. 당연히 인수 뒤 그 가치를 크게 높여서 더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만한 곳에 투자하겠죠. ①잠재 가치보다 더 싼 값에 살 수 있으면서도 ②구조조정 또는 추가 투자를 통해 더 크고 효율적인 기업으로 키울 수 있는 가능성이 보여야 할 텐데요. 지금 동네마다 운영 중인 작은 배관(또는 공조, 전기기술, 해충구제 등등) 기업이 딱 그에 해당하는 겁니다.일단 작은 개인 소유 기업은 수익 대비 좀 저렴한 경향이 있어요(①번). 그리고 극도로 분산돼 있다 보니 이를 통합해서 시너지를 낼 여지가 충분히 있죠(②번). 예컨대 ‘변기 막힘’이나 ‘싱크대 막힘’으로 네이버에서 한번 검색해 보세요. 정말 많은 배관 기업 광고가 뜨는데, 보통 홈페이지도 좀 엉성하고 썩 믿음이 안 가죠. 대부분 전화 예약만 가능하고요. 그런데 수십 개 기업을 사들여 하나로 통합해 운영하면 더 멋진 홈페이지, 더 효과적인 광고는 물론 온라인 예약 시스템과 세련된 앱까지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 기업을 모아 더 큰 플레이어로 만들어서 경쟁력을 키우는 거죠.노스캐롤라이나의 배관 기업 모리스-젠킨은 2021년 사모펀드가 주인인 홈 서비스 플랫폼 렌치 그룹(Wrench Group)에 매각됐는데요. 이 회사 관계자는 M&A 이후 고객서비스가 “우버화”했다고 설명합니다. “고객은 우리 홈페이지에 접속해 기술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고객이 오후 3시 7분에 오길 원한다면 우린 3시 7분에 도착할 거예요.”바로 이런 이유로 과거 미국에선 치과나 동물병원, 유럽에선 요양원 같은 소규모로 분산된 기업 여러 곳을 사모펀드가 인수하곤 했는데요. 팬데믹 이후엔 주택 관리 쪽이 가장 각광받고 있습니다. 왜? 코로나가 닥치면서 확인된 거죠. 이 분야가 경기침체에도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매우 안정적인 산업이란 결요. 사람들은 소득이 줄면 새 차를 사지 않고 외식을 줄이지만, 그래도 고장 난 보일러는 고치거든요.금리가 높아서 사람들이 새집을 사지 않고 이사를 안 가면? 오래된 집을 고치면서 살아야 하니까 집수리 수요는 계속 커집니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의 영향? 아무리 걸어 다니는 AI 청소 로봇이 발명된다 해도, 내 집 싱크대 배관 뚫는 일을 맡기긴 어렵지 않을까요.여기에 더해 배관과 공조(냉방·난방·환기) 산업에 ‘탈탄소화’ 바람이 불면서 새로운 기회도 커져 갑니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이나 유럽도 주택 난방엔 가스 또는 석유 같은 화석연료를 대부분 이용하는데요. 이를 전기를 이용한 히트펌프(heat pump)로 바꾸는 작업이 본격화하고 있죠. 미국이나 유럽 각국에선 기존 주택이 가스 보일러를 히트펌프로 바꾸도록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해 주는데요. 사모펀드들이 새로 열릴 이 시장을 잡기 위해 앞다퉈 뛰어드는 겁니다.덕분에 운영하던 배관기업을 사모펀드에 팔아 부자가 된 배관공 스토리가 늘어만 갑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미국의 새로운 백만장자 계층: 배관공과 공조기업’이란 기사를 통해 이들의 이야기를 전했죠. 마약 범죄로 감옥생활을 한 뒤 나와서 차린 직원 18명짜리 기업을 10년 만에 사모펀드에 매각한 배관기업 설립자, 100건 넘게 쏟아져 들어온 인수 제안을 두고 고민하다 16년 만에 직원 100명짜리 회사를 사모펀드에 넘기고 휴가를 즐기는 공조회사 대표 사례를 소개하는데요. 사모펀드 휴론캐피탈 파트너 브라이언 라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공적인 커리어와 창업의 기회를 얻기 위해 실리콘밸리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이와 함께 배관공이나 에어컨 설치 기사 같은 블루칼라 직업의 인기도 점점 커지는 추세입니다. 미국에선 상위 10%의 배관기술자는 연봉이 10만3140달러(약 1억4000만원)에 달한다는 정부 통계가 있는데요(중간 연봉은 6만1550달러, 약 8373만원). 대학 학위가 필요 없으면서도 안정적이고 벌이가 괜찮은 직업인 데다, 나중에 창업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단 인식 덕분에 배관공이 되려는 Z세대 지원자가 늘어납니다. 미국 배관공 평균 연령(41세)은 7년 전보다 2살 이상 낮아졌죠.그래서 승리자는 누구?여기까지만 보면 모두 행복한 윈윈의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고생해서 사업을 일궈온 배관공은 부자가 되고, 사모펀드는 돈이 되는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과연 소비자도 더 행복해질까요?사실 사모펀드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답은 달라질 텐데요. 한쪽에선 서비스 품질이 전반적으로 높아지니 고객 입장에서 결과적으로 이익이라고 보고요. 반대편에선 소규모 업체가 통합되면서 경쟁이 줄어서 결국 소비자가 부담하는 가격이 올라갈 거라고 지적하죠. 보통 사모펀드는 이런 기업을 인수 뒤 엔지니어 임금을 올려주고 기술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데요. 혹시 그 비용이 결국 소비자 부담으로 전가되는 건 아닐까요? 아직은 평가가 엇갈리지만, 이런 의구심도 있는 건 사실입니다.한편 앞에서 소개한 영국 배관공 신화의 주인공 찰리 멀린스는 자신의 회사를 팔고 나서 불과 몇 주 만에 후회했다고 블룸버그에 말합니다. 애초에 회사 경영진으로 남아 있기로 했던 그의 아들과 손자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죠. 비용 절감 압박과 너무 많은 내부 회의 등, 기존과는 전혀 다른 경영 스타일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미국식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것은 영국 회사를 운영하는 방식이 아닙니다.”그리고 이 멀린스 3대의 스토리엔 반전이 있습니다. 기업을 매각한 지 3년이 된 지난달, 비경쟁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새로운 배관회사 ‘위픽스(WeFix)’를 차린 거죠. 파란색 밴과 ‘WEF 7X’ 처럼 회사 특징을 살린 차량 번호판이 그들의 이전 기업 컨셉과 너무 똑같은데요. 떠났던 억만장자마저 다시 돌아올 정도로 이 시장의 미래가 여전히 밝다는 뜻 아닐까요. By.딥다이브배관공이란 직업이 뜨는 건 AI 시대에 대학 학위가 주는 효용이 예전 같지 않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죠. 한국에도 이런 블루칼라 대성공 스토리가 많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미국과 유럽 사모펀드 업계에 배관, 공조, 전기기술 같은 주택관리 소기업 인수 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모펀드에 기업을 팔아 백만장자가 된 배관공들이 늘어만 갑니다. -주택관리 관련 소기업은 극도로 분산돼있기 때문에, 이를 통합하면 IT기술과 마케팅 수준을 끌어올릴 여지가 큽니다. 경기침체나 AI 시대에도 강하죠. 마침 ‘히트펌프’ 보급 정책까지 맞물리면서 사모펀드들이 이 산업에 눈독을 들입니다.-하지만 소비자에도 좋은 일일까요. 서비스 수준은 높아지겠지만 비용 부담도 따라서 커질지도 모르겠습니다.*이 기사는 15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유니클로 하면 어떤 이미지인가요. 가성비의 상징? 불매운동 대상? 아니면 히트텍 내복?소비자에겐 친숙하다 못해 만만한 브랜드이지만, 기업으로 보면 그 규모가 엄청나죠. 유니클로 모회사 패스트리테일링은 전 세계 의류 회사 중 매출 기준으론 3위, 시가총액으론 2위 기업입니다. 창업자인 야나이 타다시 패스트리테일링 회장은 일본 최고 부자이기도 하고요(2위는 손정의 소프트뱅크 그룹 회장). 올해 50% 가까이 오른 주가에서 알 수 있듯이 최근의 성장세도 놀라운데요. 마침 10일 따끈따끈한 연간 실적 발표를 내놨습니다. 탄광마을 남성복 가게에서 탄생한 유니클로가 어떻게 세계적 의류기업으로 도약했는지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유니클로 매출 3분의 2가 해외3조1038억엔(약 27조1500억원). 10일 패스트리테일링이 발표한 2024 회계연도(2023년 9월~2024년 8월)의 연간 매출액입니다. 전년보다 12% 증가하며 또 사상 최고 기록을 썼는데요. 창립 40년인 올해 처음 3조엔 선을 돌파한 거죠. 2013년 매출 1조엔을 기록한 뒤 11년 만에 3배로 불어났습니다.세계 의류업계 1위인 스페인 인디텍스(자라) 매출액(359억 유로, 약 53조원)과 비교하면 아직 절반 수준이지만, 2위인 스웨덴 H&M(2360억 크로나, 약 30조6400억원)은 이제 상당히 따라잡았죠. 그래서일까요. 패스트리테일링 주가는 올해 49% 급등한 데 비해, H&M은 -3.4%의 저조한 성과를 보입니다. 인디텍스 주가 상승률은 +35%.이번 실적 발표에선 무엇보다 이익 증가세가 놀랍습니다. 영업이익이 5009억엔(약 4.5조원)으로 1년 전보다 31%나 급증했는데요. 중화권을 뺀 나머지 해외 시장에서 유니클로 영업이익이 큰 폭으로 증가한 덕분이죠. 특히 북미와 유럽 시장이 돋보이는데요. 2년 전에야 간신히 적자 탈출에 성공했던 두 시장에서 올해는 매출과 이익 모두 수직 상승했습니다(영업이익 전년 대비 70% 안팎 상승). ‘유니클로는 아시아에서나 통한다’던 선입견을 확 깨는 실적인데요.이제 유니클로는 해외 매출이 국내 매출의 2배 가까이 되는 진짜 글로벌 브랜드입니다. 물론 엔저 영향이 작용하긴 했는데요(같은 해외 매출도 엔화로 더 크게 잡힘). 20년 넘는 기간 동안 끈질기게 해외 시장을 공략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생각만큼 평탄하진 않았습니다.가성비라는 무기의 탄생유니클로의 경쟁력은 역시나 압도적인 가성비이죠. 1990년대 일본의 버블 붕괴,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꼭 필요한 것에만 지갑을 여는 최근의 ‘요노(YO-NO)’ 현상에도 오히려 성장을 가속화하는 이유인데요. 유니클로 제품은 중국·베트남·방글라데시 등 아시아 협력공장이 위탁생산합니다. 대량 발주를 하고 이를 전량 매입하기 때문에 단가를 대폭 낮출 수 있죠. 신상품의 첫 주문 수량만 100만개 단위일 정도로 많다는데요.품질 관리도 철저합니다. 예컨대 니트 제품의 경우 도쿄에 있는 ‘이노베이션 팩토리’에서 미리 테스트 생산을 하면서, 제조공정 관련 수백 가지 변수-뜨개질 후 세탁 시간, 온도까지-를 세세히 정해주죠. 협력업체는 똑같은 기계와 소재를 가지고 정해진 제조 공정대로 옷을 만들기 때문에 정확하게 제품을 복제해 냅니다. 아울러 일본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매주 현지 공장을 직접 찾아가 품질 관리를 하죠. 철저하고 깐깐한 공급망 관리. 그게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좋은 옷’의 배경입니다.그런데 40년 전인 1984년 유니클로가 히로시마 시내에 1호점을 냈을 때만 해도 이런 사업모델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시절 유니클로는 도매시장에서 옷을 떼다 선반에 빼곡히 진열해 놓고 파는 매장이었죠. 컨셉은 ‘캐주얼웨어 창고’였습니다.탄광마을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서 부친의 남성복 매장을 물려받았던 야나이 당시 사장이 젊은 도시 고객을 잡겠다며 던진 승부수였는데요. 직원이 고객을 일일이 응대하지 않고 자유롭게 옷을 고를 수 있게 두는 방식이 당시엔 신선해서 대박을 쳤죠. 오픈 당일부터 손님이 밀려들었고 그는 “금맥을 찾았다”고 외쳤습니다.성공적인 사업이었지만, 2년 뒤 홍콩에서 발견한 폴로셔츠 한 장이 모든 걸 바꿔놨습니다. 79홍콩달러(당시 약 1500엔)라는 저렴한 가격에 야나이는 충격을 받았죠. 그는 그 의류회사 경영자를 찾아갑니다. 바로 ‘지오다노’ 창업자 지미 라이였는데요.지미 라이는 동남아시아 화교들이 운영하는 공장을 통해 옷을 저렴하게 생산한다고 알려줬죠. 1986년은 국제적 분업을 이용한 SPA, 즉 기획·생산·판매를 일괄로 하는 의류 소매업이란 개념을 미국 브랜드 갭(GAP)이 막 창시했던 시점인데요. ‘이 사람이 하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야나이 사장은 기존 성공 모델을 2년 만에 완전히 버리고 아시아 공장을 돌며 섭외에 나섭니다. 진짜 유니클로의 시작이었습니다.플리스로 만든 신화1990년대 초 거품이 터지고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지자, 유니클로는 오히려 날개를 답니다. 1994년 7월 패스트리테일링이 히로시마 증권거래소에 상장하자마자 주가는 공모가(7200엔)의 두배로 뛰었죠. 당시만 해도 유니클로가 전국적인 인지도는 없던 브랜드였는데도 말이죠. 참고로 지난 30년 동안의 주식 분할을 반영해 계산하면 당시 공모가는 현재의 주당 165엔 수준. 만약 공모주를 받았던 투자자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 가치는 311배로 불어났을 겁니다. 투자금액의 7배에 달하는 배당금까지 챙겼을 거고요. 1998년 11월, 마침내 유니클로가 도쿄에 입성합니다. 숙원사업이었던 도쿄 진출에 맞춰 야나이 사장은 야심작을 선보였죠. 바로 1900엔짜리 플리스재킷입니다. 하라주쿠점 1층이 알록달록한 플리스로 빼곡히 채워집니다. 당시 플리스 아우터는 백화점의 고급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1만엔 넘게 팔리던 제품. 1900엔은 충격적인 가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결과는 대히트. 일본 경제가 불황의 바닥을 치던 시기, 플리스는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어느 집이나 한 벌쯤 갖고 있는 제품이 됐습니다. 1998년 200만장이던 플리스 판매량은 2000년엔 2600만장으로 급증했죠. 플리스를 사러 매장에 온 고객들이 다른 제품까지 사면서 매출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그저 싼 옷’이란 유니클로에 대한 인식이 ‘싸면서 품질 좋은 옷’으로 바뀌기 시작했죠.10년 전 고작 20여개 매장을 운영할 때 선언했던 ‘일본 제일’이라는 목표가 현실로 다가오던 2001년, 야나이는 다시 무모한 도전에 나섭니다. ‘다음은 세계 제일’이라며 영국에 진출하죠.유럽과 미국에서의 도전과 시련2001년 9월 유니클로는 영국 런던에 4개 점포를 동시 오픈합니다. 시작은 화려했죠. 개점 첫날 입장하려는 손님들이 줄을 늘어섰으니까요. 하지만 기세 좋게 21개 점포로 확장한 지 2년 만에 16곳을 문 닫았습니다. 유니클로 역사상 최악의 실패로 기록됐는데요.실패 이유는 한마디로 유니클로가 더 이상 유니클로답지 않게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야나이 회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분석했죠. “영국의 실패는 경영자 선택에 원인이 있었다. 현지 백화점 출신을 사장에 채용하자 보수적인 조직이 됐다. 벽을 만들지 않고 모두 함께 토론하고 실행하는 우리의 기업풍토와 거리가 멀었다. 가게는 더러웠고, 점포 사원 훈련도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과한 현지화가 오히려 독이 됐던 셈입니다.영국에 이어 진출한 미국 역시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2005년 뉴저지 교외에 3개 매장을 냈지만 저조한 판매로 이듬해 모두 문을 닫았죠. 이후 전략을 바꿔 2006년 뉴욕 소호지구 한복판에 1000평짜리 거대한 플래그십을 엽니다. 격전지로 돌진해 단번에 지명도를 끌어올리기로 한 겁니다.이후 미국 매장을 빠르게 확장해 갔지만, 실적은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유명 디자이너와의 콜라보 제품이 패션에 민감한 뉴요커들에겐 제법 인기를 끌었지만, 일반 소비자의 반응은 미지근했죠. 재고를 털어내기 위해 가격 할인을 남발하면서 적자 폭은 커져만 갑니다. ‘유니클로 옷은 서양인 체형과 피부색에 맞지 않는다, 브랜드 인지도가 너무 낮다, 미국 시장은 역시 경쟁이 치열하다, 소품종 대량생산 전략으론 승부가 어렵다….’ 유니클로가 미국에선 실패할 수밖에 없을 거란 시장의 비관론이 커져만 갔죠.코로나 팬데믹으로 뉴욕 거리에 인적마저 뜸했던 2020년 6월. 유니클로 북미 지역 책임자로 새로 부임한 츠카고시 다이스케는 미국 판매 재건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짭니다. 일단 남발하던 가격 할인은 중단합니다. 다시 고객이 정상가에 익숙해지도록 만들기로 했죠. 점포마다 적정 재고 수준을 파악해 재고를 타이트하게 관리합니다. 미국 고객들이 유독 선호하는 크롭티셔츠와 데미지 청바지 같은 상품을 개발하고, 인기 끄는 상품은 항공편으로 긴급히 공수했죠. ‘라이프웨어(LifeWear)’, 즉 단순하지만 고품질의 일상복이라는 컨셉을 알리는 광고와 마케팅을 강화해 인지도를 끌어올립니다.마침 재택근무를 하던 소비자들이 집에서 입을 만한 편안한 기본 아이템을 찾던 시기입니다. 미국 캐주얼의류의 강자인 갭(GAP)은 가라앉던 중이었고요. “GAP이 해마다 진부화해 온 결과, 유니클로가 파고들 틈새가 생겨나고 있었습니다.”(머천다이징 메트릭스의 제프 스워드)2022년 10월, 유니클로가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 연간 흑자로 전환했다고 발표합니다. 미국은 진출 17년만, 유럽은 21년 만에 거둔 기록이었죠.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유럽은 가장 높은 이익 성장률과 16% 안팎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하는 효자 시장으로 떠올랐습니다.지난해 야나이 회장은 “10년 뒤 매출 10조엔 돌파”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10년에 매출이 3배씩 불어난 그동안의 성장세를 이어가, 자라를 잡고 글로벌 1위 의류기업이 되겠다는 야망인데요. 그는 원래 남들이 깜짝 놀랄 만한 목표를 잡는 걸로 유명하죠. “어차피 갈 거면 세계 최고”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입니다.그래서 후계자는 누구?미국 흑자 전환의 주역인 츠카고시 다이스케는 지난해 패스트리테일링 사장에 올랐습니다. 사장을 겸임해 왔던 야나이 회장이 1978년생 임원에게 자리를 넘겨준 거죠. 이제 시장의 가장 큰 관심은 이겁니다. 과연 75세 야나이 회장의 후계자는 누구인가.야나이 회장은 강력한 카리스마의 워커홀릭으로 유명합니다. 사실상 회사의 중장기 전략부터 매장 운영까지, 그가 다 주도하다시피 하는데요. 위험을 감수하고 1등을 향해 돌진하는 일본인답지 않은 그의 경영 스타일이 유니클로를 키운 비결로 평가받죠.그리고 그는 좀처럼 운전대를 내려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스스로 후계자로 지명한 인물을 3년 만에 해임하고 다시 그 자리에 앉은 사례가 있죠. 2002년 만 39세의 타마츠카 겐이치(현 일본 롯데홀딩스 CEO)를 사장으로 임명했지만, 2005년 그를 아웃시키고 본인이 다시 사장직을 맡는다고 발표해 업계를 놀라게 했는데요. 그가 밝힌 컴백 이유는 이거였습니다. “타마츠카는 꾸준한 성장을 원했지만, 저는 더 많은 변화와 성장을 원합니다.”일단 그는 자신의 두 아들에겐 경영권을 넘기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10일 실적 발표회에서도 “아들에겐 경영은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면서 “일반 사원이 사장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밝혔는데요. 하지만 츠카고시 사장에 대해선 “당연히 유자격자”라면서도 후계자로 지목하진 않고 있습니다. 아직은 더 자신이 끌고 나갈 자신이 있단 뜻이겠죠. By.딥다이브최근 한국 패션 브랜드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유니클로 같은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얼마든지 탄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유니클로를 운영하는 일본 패스트리테일링이 또다시 사상 최고의 실적을 발표했습니다.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한 해외 시장 매출과 이익이 급증하면서 매출액 3조엔 선을 넘어섰죠. 이제 다음 목표는 10년 뒤 10조엔입니다. -탄광마을 남성복점에서 출발했던 유니클로가 국제 분업을 활용한 SPA로 거듭난 게 1986년. 1998년 도쿄 입성과 함께 출시한 플리스의 대박으로 일본 제일로 도약합니다.-하지만 2001년 시작된 글로벌 진출에선 고전했습니다. 유럽과 북미 패션 격전지를 두드렸지만 문턱은 높았고 적자와 점포폐쇄의 늪이 이어졌죠. 하지만 과한 현지화 대신 ‘유니클로다움’을 유지하는 전략, 꾸준한 투자, 팬데믹으로 인한 평상복 시장의 부흥이 맞물리면서 이젠 유럽과 미국 시장이 성장을 주도합니다.-카리스마 경영인 야나이 회장이 물러난 뒤에도 패스트리테일링은 이런 성장세를 이어갈 수 있을까요. 시장에선 누가 다음 후계자냐를 계속 묻지만 75세 야나이는 아직 이를 정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이 기사는 1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역대급 호황기를 맞은 인도의 기업공개(IPO) 시장이 더욱 뜨겁게 달아오른다. 다음 주 현대자동차 인도법인이 청약에 나서는 가운데 대어급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유례없는 IPO 열풍의 중심엔 1억 명을 돌파한 인도의 개인투자자가 있다.● 현대차·LG전자도 인도 증시로전반적으로 글로벌 IPO 시장이 침체한 올해, 인도의 성장은 눈부시다. 9월까지 IPO 건수(267건)는 지난해 연간 실적(234건)을 훌쩍 웃돈다. 건수로는 단연 세계 1위이고, 공모 금액 기준으로도 중국을 제치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로 올라섰다. 5년 전만 해도 10위권 밖(11위)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부상이다. 인도 IPO 붐의 절정은 이달 15∼17일 예정인 현대차 인도법인 청약이다. 로이터에 따르면 공모가는 주당 1865∼1960루피(약 3만∼3만1500원)로 책정됐다. 공모 금액은 최대 4조4800억 원. 2022년 인도 생명보험공사(약 3조4000억원) 기록을 깨고 인도 증시 역사상 최대 규모 IPO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어 소프트뱅크가 투자한 인도 최대 음식배달업체 스위기(Swiggy)가 11월 중 약 12억5000만 달러(약 1조7000억원) 규모의 IPO를 준비 중이다. 일본 소프트뱅크는 올해 인도 IPO 성장의 가장 큰 수혜자다. 지분을 보유한 인도 기업 3곳(소프트웨어기업 유니코머스, 유아용품 기업 브레인비, 전기스쿠터 제조사 올라일렉트릭)이 각각 8월 증시에 성공적으로 데뷔해 이미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내년엔 판이 더 커질 수 있다. 인도 대기업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 산하에 있는 인도 최대 이동통신사 릴라이언스 지오, 인도 최대 유통회사 릴라이언스 리테일이 IPO에 나설 거란 관측이 나온다. LG전자 인도법인 역시 내년 초 IPO를 위해 모건스탠리 등을 주관사로 선정했다. 제퍼리스의 인도 투자은행 부문 책임자인 아시시 자베리는 “인도 자본시장의 진정한 전환점은 2025년이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20대의 주식 투자 열풍 IPO 시장이 호황인 건 그만큼 유동성이 넘친단 뜻이다. 인도 증시가 9년째 상승세를 이어 가면서 과거엔 금이나 예금을 선호했던 인도인들이 주식에 눈을 떴다. 제퍼리스에 따르면 올해 증시에 유입된 인도 개인투자자 자금은 월평균 76억 달러(약 10조2000억 원). JP모건 인도 책임자인 카우스트브 쿨카르니는 “시장에 자금이 너무 많이 유입되고 있어 새로운 주식 증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도국립증권거래소(NSE) 통계에 따르면 인도의 개인 주식투자자는 8월에 1억 명을 돌파했다. 다섯 달 만에 1000만 명이 늘 정도로 증가세가 가파르다. 특히 전체 투자자 중 30세 미만이 40%를 차지하는데, 5년 전의 두 배다.“신흥국중 가장 고평가” 거품 경고도뜨거운 인도 IPO 시장인도는 25세 미만 대학 졸업자 실업률이 42%에 달할 정도로 고학력 청년의 실업 문제가 심각하다. 이는 역설적으로 20대가 부를 쌓기 위해 주식에 열광하는 이유가 됐다. 인도 증시가 2016년부터 9년째 상승 중이다 보니, 뒤처질까 두려워하는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 심리도 작용했다.대박을 노리는 단기 투자자의 쏠림은 IPO 시장 과열을 부추긴다. 8월엔 델리에서 작은 오토바이 판매점 두 곳을 운영하는 직원 8명짜리 중소기업 IPO에 7500억 원어치 청약이 몰리면서 투자업계를 놀라게 했다.● 신흥국 중 가장 고평가인도 증시는 이제 신흥국 중 가장 고평가된 시장이다. 니프티200 지수의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이 24배. 한국(7.9배)은 물론이고 미국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20.9배)보다도 높다. 인도 증권사 코탁인스티튜셔널은 “주식이 천문학적으로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며 “정당한 낙관주의와 근거 없는 행복감의 혼합”이라고 거품을 경고한다.하지만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자금 유입은 계속 이어진다. 9월 인도 증시는 올해 들어 가장 큰 외국인 순매수(약 9조 원)를 기록했다. 올해도 6%대 중후반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인도 경제에 대한 시장의 관심은 식을 줄 모른다. JP모건은 지난달 보고서에서 “인도의 장기적 성장 이론은 변함이 없다”면서 인구학적 배당과 제조업 성장, 산업 친화적 정책을 강점으로 꼽았다.개인 주식 투자 시장의 성장에 대한 기대감도 크다. 이미 1억 명이 주식 계좌를 열었지만 아직 중국(2억2000만 명)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못 미친다. 2050년대까지 생산가능인구가 계속 늘어날 인도에선 주식 투자 붐은 아직 시작 단계에 있다.문제는 장밋빛 성장 전망에 균열이 조금씩 보이고 있단 점이다. 상장사 이익 성장 속도가 느려졌고, 주가가 너무 뛴 탓에 ‘매수’ 등급을 받은 주식이 3분의 1 이하로 줄어들었다.무엇보다 중국이란 큰 변수가 달라지고 있다. 그동안 인도 주식시장은 침체에 빠진 중국 증시의 빈자리를 채우며 성장해 왔다. 하지만 최근 대규모 경기부양책 발표로 중국 증시가 되살아나면서 인도 증시는 일주일 동안 3%대 하락을 기록했다.한애란 기자 haru@do nga.com}

올해 주가지수가 80% 넘게 치솟은 나라가 있습니다. 지수 상승률로는 단연 세계 최고이죠. 바로 남미 대표 국가 아르헨티나입니다.아르헨티나 경제가 그렇게 좋아졌냐고요? 아니, 그 반대입니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이고, 연간 물가 상승률은 200%가 넘으며, 빈곤율은 치솟았죠.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는 국민들 한탄이 터져 나오는데요. 그런데 주식시장엔 왜 투자자가 몰릴까요.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벌이고 있는 유례없는 ‘자유주의 경제 실험’이 어쩌면 성공할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죠. 오늘은 아르헨티나의 경제 대전환 실험과 그 혼란을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0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밀레이의 거침없는 톱질지난해 대선 유세 중 전기톱 퍼포먼스로 돌풍을 일으켰던 아르헨티나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를 기억하시나요. 살인적인 물가에 지친 유권자들은 “썩은 병폐를 도려내겠다”는 아웃사이더 경제학자에 열광했죠. 56% 득표율로 당선된 그가 지난해 12월 취임한 뒤 10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무정부 자본주의자’ 밀레이의 전기톱은 쉼 없이 돌아갔죠. 그가 한 일이 너무 많지만 몇 가지만 꼽자면.-공무원을 대거 자르고 있습니다.이미 3만1000명의 공공행정기관·국영기업 직원이 해고됐고, 더 자르고 있습니다. 올해 총 7만명 해고를 예고한 상황입니다.-에너지, 교통 보조금을 대폭 삭감합니다.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하철 요금은 5월 125페소(약 172원)에서 574페소로, 8월엔 다시 757페소(약 1044원)로 올랐습니다. 버스·수도·가스·전기요금이 모두 뛰었습니다. 휘발유 가격은 지난해 12월 이후 150% 올랐죠.-공공 건설사업을 대부분 중단했습니다.가장 톱질을 크게 당한 건 공공 공사입니다. 기존 진행되던 공공 인프라 건설 사업의 87%(예산 기준)를 중단했죠. 이 나라 고용을 떠받쳐온 건설산업은 휘청거립니다.-은퇴자 연금을 동결했습니다.다락같이 물가가 뛰는데도 700만 은퇴자가 받는 연금은 제자리입니다. 지난달 국회가 8% 인상안을 통과시켰지만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죠. 동결은 실질적으론 대규모 삭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연금 구매력은 아르헨티나식 표현으론 ‘액화’, 즉 녹아내리고 있습니다.-공립대학 재정 지원도 동결합니다.아르헨티나 공립대학은 학비가 무료인 거 아셨나요. 야당은 물가 상승을 이유로 공립대학 재정지원을 늘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요. 얼마 전 밀레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포퓰리즘적이고 선동적”이라면서요.-통화가치를 50% 평가절하했습니다.밀레이 취임 전 아르헨티나 외환시장은 심하게 왜곡돼 있었습니다. 암시장에선 1달러에 1000페소가 넘는데, 공식 환율을 400페소로 묶어놨던 거죠. 밀레이는 취임 직후 이를 1달러=800페소로 조정합니다. 단번엔 페소 가치가 반토막 났습니다.재정적자가 사라졌다아르헨티나 언론은 밀레이 정책을 ‘전기톱과 믹서기’ 라고 부릅니다. 방만한 조직과 인원은 팍팍 잘라 없애버리고(전기톱), 급여와 재정지원은 동결해서 인플레이션이 그 가치를 분쇄하게 만들죠(믹서기). 정책의 목표는 뚜렷합니다. ‘적자 제로’입니다.“지난 123년 동안 아르헨티나는 112년의 재정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밀레이 대통령의 말대로 아르헨티나는 오랫동안 재정 적자에 중독됐습니다. 이전 정권은 징수한 세금보다 더 많은 예산을 퍼주기 위해 말 그대로 화폐를 찍어내기 바빴죠. 후안 페론 대통령(1946~1955년 집권) 후예인 페론주의 정치인들의 무모한 공공지출 확대는 폭발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통화가치를 급락시켰고, 외환보유고를 동나게 했고, 급기야 2020년 ‘독립 이래 9번째 국가채무 불이행’을 불러왔죠.밀레이 대통령은 “이 모든 악의 근원이 재정적자”라고 규정합니다. 집권하자마자 ‘적자 제로’를 선언한 이유이죠. 그는 “점진주의가 아닌 충격 요법을 선택했다”고도 밝혔는데요. 자, 그럼 무지막지한 충격 요법은 통했을까요. 숫자로는 그렇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올해 1월 12년 만에 처음으로 월별 ‘재정 흑자’를 달성했는데요. 재정 흑자는 지난달까지 9개월 연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단기간에 급격한 변화를 이룰지는 예상치 못했는데요.그만큼 어마어마하게 자르고 갈아버렸단 뜻이죠. 1~9월 정부의 누적 지출액은 지난해보다 27.7%나 줄었습니다(물가상승률 반영한 실질 지출 기준). 같은 기간 경기침체로 세수가 6%나 줄었는데도, 재정 흑자가 쌓이고 있는 이유이죠.물론 써야 할 돈 안 쓴 게 제대로 된 흑자냐는 지적도 나옵니다. “마치 전기, 가스, 수도 요금, 월세를 내지 않고 흑자라고 주장하는 가계나 마찬가지”라는 비판(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전 대통령)인데요.아르헨티나에 구제금융을 여러 차례 제공해 온 국제통화기금(IMF)은 그래도 밀레이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IMF는 지난 3일 기자회견에서 재정적자의 대폭 감소에 주목하며 아르헨티나가 “경제 회복의 초기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죠.금융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달 밀레이 대통령이 2025년에도 ‘적자 제로’를 이루겠다는 야심 찬 예산안을 발표하자, 달러 표시 채권가격이 뛰며 시장이 환호했습니다. 2년 연속 재정 흑자는 아르헨티나에선 2008년 이후 없었던 일. 밀레이는 2025년 예산안이 “나라의 역사를 바꿀 것”이라고 큰소리칩니다.쇠고기도 못 사 먹게 된 중산층아르헨티나의 ‘공공의 적 1호’였던 물가도 조금씩 잡혀갑니다. 8월 이 나라 물가상승률은 월 4.2%(연 4.2%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 같으면 경악할 수치이지만, 지난해 12월 물가상승률이 25.5%까지 치솟았던 아르헨티나로선 엄청나게 낮아진 겁니다. 이제 연간 인플레이션은 236.7%를 기록 중이죠. 경제학자들은 올해 말이면 연간 물가상승률이 122.9%까지 떨어질 걸로 내다봅니다.자, 그래서 국민은 이제 한숨 돌리게 됐을까요. 슬프게도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문제는 재정에 좋은 정책이 경기엔 매우 치명적이란 거죠. 잔혹한 긴축정책이 이 나라 중산층을 덮치고 있습니다.올해 상반기 아르헨티나 빈곤율(중위 소득의 50% 이하 비율)은 무려 53%. 지난해 말보다 11%포인트나 높아졌고, 20년 만에 최고입니다. 너무 급격히 높아져서 이게 맞는지 눈을 의심할 정도인데요.아르헨티나는 예전엔 ‘중산층 국가’라는 자부심이 꽤 컸던 나라죠. 라틴아메리카에선 드물게 소득분배가 균등한 편이었기 때문인데요. 한때 중산층이었지만 이젠 일자리를 잃거나 실질 급여가 삭감된 이들은 당장 먹고살 게 걱정입니다. 손에 쥐는 돈은 줄었는데, 버스요금부터 연료비까지 물가가 죄다 뛰었으니까요. 71세 은퇴자 알리시아 라미레스는 언론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 우린 아파트를 살 수 있었고 딸들에게 좋은 교육을 시켰지만, 지금은 연금으로 관리비와 약값을 대기에도 부족해요.”오죽하면 쇠고기 천국이던 이 나라에서 쇠고기 소비량(1인당 연 44.8㎏)이 지난 100년 중 최저로 떨어졌다고 합니다(역사적 평균은 72.9㎏). 천하의 아르헨티나인이 쇠고기가 비싸서 사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겁니다(대신 닭고기 소비가 증가).의류·연료는 물론 식품·의약품 같은 필수품까지, 거의 모든 소비가 급감했습니다. 특히 주류와 화장품 판매는 1년 새 20%, 가전제품은 30% 넘게 쪼그라들었죠. 컨설팅 회사 센티아는 올해 전체 소비가 10% 넘게 감소할 것으로 내다보는데요. “과거 최악이었던 2001년 위기 수준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센티아의 오스발도 델 리오 이사)입니다.건설업과 제조업 등 산업생산 역시 침체에서 벗어날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학자들이 내다본 올해 아르헨티나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3.7%. 10년 만에 여섯 번째 경기침체를 맞이합니다.행복한 증시와 가라앉는 지지율아이러니는 경기가 극심한 침체의 늪에 빠진 지금, 아르헨티나에서 증시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에 젖어있단 점입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거래소의 주요 21개 종목을 담은 메르발(MERVAL) 지수는 올해에만 84.28% 올랐고요. 아르헨티나 관련 지수를 추종하는 상품인 글로벌X MSCI 아르헨티나 ETF(티커 ARGT)의 올해 수익률은 31%에 달하죠.특히 은행주는 훨훨 날고 있습니다. 뉴욕증시에 상장된 방코 갈리시아(Banco Galicia), 방코 매크로(Banco Macro) 같은 주요 금융주 ADR의 올해 수익률은 각각 156%, 184%나 되는데요.왜 은행주일까요. 자고로 경제가 살아나서 기업 활동이 활발해지면 그 나라 은행은 자연히 대출이 늘고 실적이 좋아지는 법이잖아요. 특히 그동안 아르헨티나는 너무 금리가 높아서 은행 대출 받으려는 수요가 없었는데요. 이제 물가상승률이 구조적으로 낮아지면서 기준금리가 내려가는 추세죠(2023년 12월 100%→2024년 5월 40%). 아직은 너무 초입이긴 하지만 ‘거시경제의 시나리오가 달라지고 있다’고 보는 국내외 투자자들이 은행주에 베팅하는 겁니다.무엇보다 페소화 가치가 크게 떨어지게 생겼다면 외국인 투자자가 이 나라 증시에 얼씬도 안 할 텐데요. ‘적자 제로’ 정책이 그런 리스크를 줄였다고 보는 겁니다. 즉, 지금 당장은 아르헨티나가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지만, 그 뒤엔 V자형 경제회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보는 낙관론이 금융시장에 퍼져있죠.이는 곧 밀레이 대통령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는 지금 236%인 연간 물가상승률이 내년 말엔 18.3%까지 둔화할 거라고 예측합니다. 내년 경제성장률은 5%로 전망하고요. 그의 말대로 된다면 정말 전 세계가 찬탄할 만한 기적적인 턴어라운드라 할 수 있겠습니다.하지만 그 경로가 썩 순탄해 보이진 않습니다. 국민의 참을성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지난달 밀레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46.4%. 한 달 만에 4.2%포인트나 빠졌습니다. 갈수록 밀레이에 대한 긍정 평가는 줄고, 부정적인 점점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공무원과 국영기업 노조, 은퇴자, 대학생, 조종사 등등. 긴축재정 직격탄을 맞은 이들의 총파업과 항의 시위로 나라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힘들어도 이 기회에 포퓰리즘은 끝내야지’라며 가혹한 정책을 수용했던 국민들도 갈수록 먹고 살기 퍽퍽해지니 ‘이거 진짜 좋아지긴 하는 건가?’ 의문을 갖습니다. 밀레이 지지자라는 건설사 대표 후안 파블로 루도니는 블룸버그에 이렇게 말합니다. “터널 끝에 빛이 보여야 합니다. 문제는 그 빛이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거 같다는 거죠.”하원 의석이라곤 15%밖에 없는 제3 정당 소속의 밀레이 대통령. 정치적 기반이 약한 그가 그동안 전기톱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실 국민의 지지였죠. 그게 무너진다면 그의 톱날은 지금 같은 날카로움을 유지하긴 어려울 텐데요. ‘인플레이션을 무너뜨리겠다’고 공언해 온 밀레이의 지지율이 설마 물가보다 더 빨리 무너지는 건 아니겠죠. 경기가 바닥 쳤다는 신호가 얼른 나와주지 않으면 자칫 위험할지 모릅니다. 역시 개혁이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구나 싶습니다. By.딥다이브아르헨티나 관련 외신 사진을 찾아보니 절반은 축구, 나머지 절반은 시위 사진입니다. 이 혼란의 끝엔 과연 해피엔딩이 있을까요. 그러길 바라지만 아직은 많은 것이 불확실해 보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밀레이 대통령 취임 10달. 공무원을 자르고, 보조금을 삭감하고, 공공사업을 멈추고, 연금과 대학 재정을 동결하는 ‘전기톱과 믹서기’ 정책이 대대적으로 시행 중입니다. 이를 통해 아르헨티나는 드디어 ‘재정 흑자’를 달성했습니다. 인플레이션도 조금씩 잡혀갑니다.-적자 제로가 가능한 건 국민의 희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주머니는 비었고 삶은 전보다 훨씬 나빠졌습니다. 빈곤율은 53%까지 치솟았죠.-밀레이 개혁의 승리를 기대하는 투자자들이 몰리면서 증시는 활황입니다. 당장은 고통스럽고 경기침체에 빠져도 조만간 V자 반등이 찾아올 거란 기대인데요. 관건은 국민들이 얼마나 더 참을성을 발휘해 주느냐입니다.*이 기사는 10월 8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반도체도 아닌데 2년에 두 배로 커진다는 ‘무어의 법칙’이 통하는 분야가 있다. 성장세가 워낙 기하급수적이라 전문기관 예측이 번번이 빗나갈 정도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확장하는 전력원, 바로 태양광 발전이다.리서치기관 블룸버그NEF가 전망한 올해 전 세계 태양광 발전 신규 용량은 592GW. 누적 기준으로 글로벌 설치 용량이 1TW(1000GW)를 넘어선 게 2022년인데, 2년 만에 지구는 2TW를 훌쩍 넘는 태양광 발전 용량을 보유하게 됐다. 이 시장을 오랜만에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믿지 못할 수치일지 모른다. 2009년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0년에 전 세계의 태양광 누적 설치 용량이 244GW일 거란 지극히 소박한 전망을 내놨었다.전 세계 휩쓴 태양광 붐태양광 발전에 각국 정부가 보조금을 쏟아부으며 억지로 키워가던 건 이제 옛말이 됐다. 패널값 폭락으로 이젠 가장 저렴한 발전원이 됐기 때문이다. 태양광 패널 가격은 W당 0.1달러 수준. 지난해 초의 절반, 12년 전의 10분의 1, 36년 전과 비교하면 100분의 1이다.비싼 전기요금에 지친 기업과 개인이 자체 태양광 발전 시스템 구축에 나선다. 독일에선 주택 발코니 난간에 빨래 널 듯이 걸면 되는 셀프 설치 태양광 패널이 유행이다. 파키스탄은 공장과 가정집의 옥상 태양광 설치가 급증하면서, 전력소비량이 줄어든 국영 전력회사가 비상이다. 정전이 일상이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선 지붕 태양광이 비상용 발전기와 손전등을 대체했다. 케냐 난민촌, 말라위 시골 오두막도 태양전지로 휴대전화를 충전한다. 이제 전기는 전력회사가 발전소를 짓고 송전선을 깔아 줘야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값싼 태양광 덕분에 일반 시민도 전력 생산의 주도권을 갖게 됐다.태양광 발전이 전 세계 전력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 수준. 석탄·가스·수력·풍력·원자력보다 아직 뒤지지만, 조만간 하나씩 제쳐 나갈 예정이다. IEA는 모든 시나리오에서 2030년대 중반이면 태양광이 전 세계 최대 전력원으로 부상할 것으로 내다본다. 본격적인 태양광 시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거꾸로 가는 한국 태양광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글로벌 시장 이야기일 뿐. 한국은 딴 세상이다. 국내 태양광 신규 설치량은 2020년 4.6GW로 정점을 찍고 내리막이다. 올해는 2.5GW 수준에 머물 전망이다. 성장은커녕 암흑기다. 전 정부 시절엔 너무 서둘러서 태양광 발전 보급에 나서느라 보조금을 쏟아붓더니, 정작 경제성 확보로 전 세계에 태양광 붐이 일어난 지금은 정부가 외면한다. 도통 박자가 맞지 않는다.문제는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줄면서 기존 태양광 산업 기반뿐 아니라, 미래 기술력까지 흔들린다는 점이다. 신소재 페로브스카이트를 이용한 차세대 태양전지 기술은 지난 10년간 한국이 세계 최고였던 분야. 하지만 관련 과제는 연구비 삭감의 직격탄을 맞았고,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며 대학원생들은 박사과정 지원을 꺼린다. 그사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중국은 이 분야에서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 신기술 상용화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자칫 한국이 잘하던 분야를 다른 나라에 내줄 판이다.세계적 추세와 따로 가는 정부 정책, 세계적으로 인정받고도 국내에선 찬밥 신세가 된 기술력. 지금의 한국 태양광은 전 정부 시절 원자력을 떠올리게 한다. 탈원전 정책의 결말을 봤기에 더 걱정스럽다. “에너지는 우리의 생존이 달린 분야인데, 이상하게 에너지가 정치화됐다”는 태양전지 석학 석상일 울산과학기술원 특훈교수의 한탄을 전한다. 한애란 경제부 기자 haru@donga.com}

무려 9년 연속 상승세를 이어가는 주식시장이 있습니다. 신흥국 증시 중 가장 고평가된 시장이죠. 어디인지 짐작하시나요. 바로 인도입니다. 지칠 줄 모르는 인도 증시는 올해도 20% 가까이 뛰었습니다. 니프티50지수는 코로나 팬데믹 당시(2020년 3월)의 3배로 불어났죠. 미국 나스닥보다도 5년 상승률에서 앞섭니다.인도 경제의 탄탄한 성장세와 해외 투자자의 물결 덕분일 텐데요. 그 못지않게 큰 원동력이 또 있죠. 바로 대박 꿈을 안고 투자의 세계로 뛰어드는 거대한 인도의 젊은 개인 투자자들입니다. 인도 증시 호황을 이끄는 인도 불개미 투자자를 들여다보겠습니다.*이 기사는 10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인도 IPO 시장은 초호황최근 인도의 주식투자 열기를 상징하는 건 이륜차 딜러입니다. 델리에서 오토바이 쇼룸 두 개를 운영 중인 리소스풀 오토모빌이란 판매점이 지난 8월 말 ‘중소기업 IPO(기업공개)’에 나섰는데요. 1억2000만 루피(약 18억원)를 조달하려는 이 소박한 IPO에 몰린 투자자 청약금액이 무려 480억 루피(7512억원)이었답니다. 직원 8명짜리 중소기업 IPO에 480억 루피?! 투자업계와 언론 모두 충격받았고, 단숨에 이 무명의 이륜차 판매점은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죠. 소셜미디어에선 ‘이게 바로 버블의 증거’라는 반응이 이어졌고요.인도 IPO 시장은 그야말로 초호황입니다. 달아오른 증시에 올라타기 위해 기업들이 앞다퉈 IPO에 나서면서 양대 증권거래소(BSE와 NSE)의 IPO 실적은 9월까지 240건, 86억 달러를 기록했죠(중소기업 IPO 아닌 일반 IPO 실적임). 이미 2023년 한 해 동안의 실적(234건, 79억 달러)을 넘어섰고요. 올해 들어 전 세계에서 진행된 IPO(870건) 중 28%를 인도가 차지합니다. 침체에 빠진 글로벌 IPO 시장 전반적 분위기와는 딴판인데요. 연내에 현대자동차 인도법인이 상장하면, 기록적인 금액(최대 35억 달러)을 추가로 모으게 될 전망이죠.이런 IPO 붐 중심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인도 개인투자자가 있습니다. 인도의 등록된 개인 투자자 수는 지난 8월 1억명을 돌파했죠. 인도 인구가 14억 명인 걸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많진 않아 보인다고요? 중요한 건 증가 추세이죠. 9000만명에서 1억명 되는 데 5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으니까요. FT는 이를 두고 ‘이전엔 침대 아래에 돈을 숨겨놓거나 금을 샀던 이들이 주식과 뮤추얼 펀드에 몰려들었다’고 설명합니다.인도국립증권거래소(NSE)에 따르면 신규 주식 투자자의 40%는 20대입니다. 모바일 주식거래 앱과 소셜미디어가 활성화되면서 젊은층이 주식투자에 뛰어드는 현상. 코로나 팬데믹 당시 한국이나 미국과 비슷한데요. 투자 열기 면에선 어쩌면 인도가 한 수 위일지 모릅니다. 이것은 투자인가 도박인가지난해 8.2% 성장한 인도 경제는 올해도 6%대 중반의 높은 성장률을 이어갈 전망입니다. 주요국 중 경제 성장이 가장 빠른 나라이죠.하지만 에서 설명했듯이 잘나가는 인도 경제에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25세 미만 대졸자 실업률이 42%에 달할 정도로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하단 거죠. 젊은 인구는 많은데 마땅한 일자리는 없고, 근로자 소득 수준이 너무 낮다 보니 빈부 격차는 점점 벌어집니다. 나라가 부유해지는 데 비해 젊은이들은 여전히 너무 가난하죠.그래서 언뜻 생각하기엔 변변한 일자리도 없고 가난한데 어떻게 주식 투자를 하나 싶은데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도 청년들은 주식에 더 매달립니다. 투자 성공만이 인생 역전의 기회라고 보는 거죠.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인도 투자자들의 강한 욕망을 보여주는 지표가 인도의 엄청난 주식 옵션 거래량입니다. 선물산업협회(FIA)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거래된 주식 옵션 계약의 무려 78%를 인도가 차지했습니다. 이 나라의 지수 옵션 거래량은 지난 4년 동안 13배로 급증(2020년 10.8조 루피→2024년 138조 루피)했다고 합니다. 이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놀라운 증가세입니다.주식 옵션이란 만기(미래의 특정 시점)에 정해진 가격으로 주식을 사거나(콜옵션) 팔 수 있는(풋옵션) 권리를 말하죠. 즉, 주가 방향을 잘만 베팅하면 투자금 대비 엄청난 수익률을 올릴 수 있지만, 삐끗하면 투자금 100%를 날리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에선 아무나 못 하도록 높은 진입장벽(교육 의무, 기본 예탁금 등)을 세워뒀는데요.인도에선 이런 파생상품 시장에 뛰어든 개인 투자자 수가 2022년 510만명에서 올해 960만명으로 급증했습니다. 이 신규 투자자 중 절반 가까운 43%가 30세 미만. 다시 말해, 젊고 순진하고 가진 게 없는 젊은층이 주식 옵션 거래에 뛰어들고 있습니다.여기엔 ‘나만 뒤처질 순 없다’는 FOMO(Fear of missing out) 심리가 작용하죠. 8년 넘게 증시 활황이 이어지자, 뒤늦게 투자에 뛰어든 이들이 ‘한 방에 인생 역전’을 노리는 겁니다.동시에 대박 비법을 알려준다며 현혹하는 ‘핀플루언서(Finfluencers, 금융+인플루언서)’영향도 있습니다. 한국과 비슷하게 인도에도 투자 관련 유튜버들이 판치는데요. 인도의 유명한 핀플루언서로는 구독자 119만명의 유튜버 PR 순다르가 있습니다. 60세의 수학교사 출신 투자자인 그는 옵션거래로 갑부가 됐다는 컨셉(롤스로이스 팬텀 등을 과시)으로 추종자들이 상당한데요. 유튜브 홍보를 통해 옵션 전략에 대한 유료 강의와 워크숍을 판매하죠. 지난해 금융당국이 미등록 투자자문(불법 리딩방)을 이유로 그를 1년간 주식시장에서 추방했지만, 다시 돌아와 열심히 영상을 올리고 있군요.물론 옵션거래가 불법은 아닙니다. 또 기관투자자, 외국인 투자자들은 옵션으로 실제 큰돈을 벌기도 하죠. 얼마 전 미국 트레이딩 기업 제인스트리트가 지난해 인도 옵션 거래를 통해 10억 달러를 벌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정도인데요. 문제는 이 제로섬 게임에서 지고 있는 게 인도의 젊은 개인투자자들이란 점입니다.인도 증권거래위원회가 지난주 보고서를 냈는데요. 지난 3년 동안 주식 선물·옵션 시장에서 개인투자자의 93%가 손실을 기록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기간 평균 손실액은 20만 루피(약 313만원). 1인당 국민소득(약 2600달러)에 맞먹는 금액인데요. 그럼, 나머지 7%는 돈을 꽤 벌었을까요? 거래비용을 빼고 3년 동안 10만 루피(156만원) 이상 이익을 올린 투자자는 고작 1%에 불과했습니다. ‘옵션 거래로 매일 1% 수익률을 올린다’는 핀플루언서들의 얘기는 역시나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죠.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수익률이 처참한데요. 인도 증권거래위원회(SEBI) 의장 마다비 푸리 부흐는 이렇게 한탄합니다. “파생상품에 투자하려고 빚을 내고, 부모님 집까지 담보로 잡고 있어요. 이것은 투기적 활동입니다. 가계저축이 생산적이지 않은 경제활동에 들어가고 있어요.”SEBI는 이제 파생상품 투자 문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를 준비 중입니다. 최소 투자금액을 높이고, 파생상품의 증권거래세를 인상할 예정이죠. 좀 늦은 감은 있지만요.비싸도 괜찮아? 고평가 인도증시어찌 됐든 개인투자자의 열광적인 참여는 인도 증시의 성장동력입니다. 덕분에 시가총액 증가 속도는 점점 빨라집니다. 인도 증시 시총이 3조 달러에서 4조 달러로 늘어나는 데 30개월이 걸렸지만, 이후 9개월 만에 5조5000억 달러를 기록했으니까요. 인도 주식시장은 미국-중국-일본에 이어 세계 4위 시장입니다.그 결과 인도 주식시장은 너무 비싸졌습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니프티200 지수의 선행 PER(주가수익비율)은 24배. 주가가 앞으로 12개월 동안 예상되는 상장사 주당순이익의 24배로 거래되고 있단 뜻인데요. 신흥시장 중엔 단연 톱이고요(대만 16.2배, 중국 8.6배, 한국 7.9배). 다우지수(20.9배)나 S&P500(23.65배)보다도 고평가된 겁니다.그래서 이런 질문이 당연히 따라옵니다. ‘이건 거품일까? 거품이라면 곧 터질까?’일단 지금 주가가 너무 높아서 언제 조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는 경고의 목소리는 지난해부터 줄곧 나왔습니다. 이런 식이죠.“시장 참여자의 자비 또는 안주로 인해 많은 주식이 천문학적으로 높은 수준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정당한 낙관주의와 근거 없는 행복감의 혼합입니다.”(인도 증권사 코탁 인스티투셔널 에쿼티)“모두가 호랑이를 타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주가 움직임을 예측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미친 시장입니다.”(인도 투자회사 캐피탈마인드 설립자 디팍 셰노이)하지만 이런 경고음이 워낙 오랫동안 울려왔기 때문인지, 경계심이 커 보이진 않습니다. 사실 지금의 인도 증시 열풍을 이끄는 젊은 투자자들은 ‘조정이라는 걸 보지 못한 세대’라서 더 용감하죠.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 투자자가 지금 투자를 주저하느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8월 초만 해도 인도증시에서 외국인이 순매도를 기록하면서 ‘이제 외국인 떠나나’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는데요. 웬걸. 9월이 되자 올해 들어 가장 큰 외국인 순매수(5736억 루피, 약 9조원)를 기록했습니다. 인도의 장기 성장 스토리에 대한 해외 투자자 관심은 여전한 겁니다.JP모건은 9월에 낸 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단기적 수요 변동이 영향 미칠 수 있지만, 인도의 장기적 성장 이론은 변함이 없습니다. 인구학적 배당, 강력한 인프라 추진, 제조업의 성장, 산업 친화적 정책, 재생 에너지 용량 증가 등이 그 예입니다.”결국 고평가인 건 알지만 이 호랑이 등에서 먼저 내릴 생각은 아무도 없어 보입니다. “인도 (주식시장) 밸류가 높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자금은 계속 들어오고 있죠. 외부 충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단기적으로 흐름이 역전되진 않을 겁니다.”(소시에테 제네랄 주식 전략가 라자트 아가르왈)인도 증시 낙관론자들은 특히 인도 개인투자 시장의 성장에 기대를 겁니다. 인도인 1억명이 주식 계좌를 열었다곤 하지만 아직 중국(2억2000만명)의 절반도 안 되죠. 또 인도 가계금융 자산의 7%만 주식이나 펀드여서요(한국은 21.8%). 2050년대까지 생산가능인구가 계속 늘어날 이 젊은 나라에서 주식 투자 열풍은 이제 막 시작일지도 모릅니다.물론 인도 증시의 장밋빛 성장 스토리에 균열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일단 기업의 이익 성장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죠.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그동안 두 자릿수를 기록해 왔던 상장사 이익 성장률(MSCI 인도 지수 기준)은 최근 분기에 9%에 그쳤습니다.인도 증시에서 ‘매수’ 등급 주식이 점점 줄어든다는 블룸버그 분석도 있습니다. 애널리스트들의 평가 등급 하향이 이어지면서 니프티200 지수 종목 중 61개만이 매수 등급을 받았다는데요. “많은 주식이 이제 터무니없이 비싸졌다”(DSP뮤추얼펀드 전략가 사힐 카푸르)는 뜻입니다.또 최근 달라진 변수는 중국입니다. 사실 지난 몇 년간 인도 주식의 호황은 중국 증시 침체와 맞물려 있죠. 중국 주식을 팔아치워야 했던 신흥시장 펀드매니저들에게 인도 주식이 훌륭한 대체제가 되었던 건데요. 그런데 중국 증시의 바람이 달라질 조짐이 보입니다. 만약 중국 증시가 정말 되살아난다면, 그때도 인도가 지금처럼 뜨거울까요. 아니면 역전이 불가피할까요. 인도를 둘러싼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By.딥다이브한때 한국이 세계 파생상품 시장에서 거래량 1위를 기록했던 적이 있죠(2001~2011년). 그래서 인도 불개미들의 투자행태가 낯설지 않은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9년 연속 성장을 이어가는 인도 증시. 특히 개인투자자가 빠르게 늘면서 IPO 시장이 대호황입니다. 자그마한 중소기업 IPO에도 수천억 자금이 몰릴 정도로 투자열기가 뜨겁습니다.-파생상품 시장은 활활 타오릅니다. 대박의 꿈을 가진 인도 젊은이들이 고위험 옵션거래에 뛰어들면서, 전 세계 옵션 거래량의 78%를 인도가 차지합니다. 하지만 개인투자자의 93%는 손실을 기록했다고 하죠.-인도 증시는 선행PER 24배로 고평가됐습니다. 너무 비싼 시장이긴 한데요. 인도 경제의 강력한 ‘장기 성장 스토리’에 힘입어 자금은 계속 유입됩니다. 언제까지 이 행복감이 이어질지 궁금합니다. *이 기사는 10월 1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중국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바꿔놨다.”24일 중국 인민은행이 발표한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두고 이런 평가가 나옵니다. 부양책 규모나 발표 형식 모두 예상보다 강력하고, 획기적이며, 이례적이었기 때문인데요. 실제 중국 증시가 사흘 만에 10% 반등할 정도로 파급효과가 상당하죠.그럼 수렁에 빠졌던 중국 경제는 다시 되살아날 희망이 보이는 걸까요. 중국 경제를 부양하는 방법에 대해 들여다 보겠습니다.*이 기사는 2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인민은행이 돈 푼다일단 24일 판궁성 인민은행 총재가 무슨 보따리를 내놨는지부터 살펴볼까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세가지는 이겁니다.1)정책금리(7일물 역환매조건부채권 금리)를 0.2%포인트 내렸습니다. → 대출·예금금리도 줄줄이 인하될 겁니다.2)지급준비율도 조만간 0.5% 포인트 내립니다. → 지급준비율은 상업은행이 예금 중 일정 비율을 인민은행에 맡겨놓는 걸 뜻하죠. 이게 낮아지면 그만큼 은행이 대출로 시중에 풀 수 있는 돈의 양이 늘어납니다. 지준율은 연내 더 내릴 수도 있습니다.3)기존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0.5%포인트 인하됩니다.중국이 이런 통화정책 패키지를 한꺼번에 왕창 내놓은 게 처음 있는 일이라는데요. 그만큼 지금 경제상황에 대한 위기감이 크단 뜻이겠죠. 특히 판궁성 인민은행 총재 포함 3대 금융 수장이 생방송 기자회견을 열고 기자들 질문에 일일이 답까지 해줬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보통은 홈페이지에 공지문을 올리면 끝이었거든요.정책의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금리 내리고 돈 왕창 풀 테니, 제발 돈 좀 쓰라는 뜻이죠. 중국은 생산자물가가 23개월 연속 하락했을 정도로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징후가 뚜렷한데요. 어떻게든 돈 쓸 만한 분위기를 만들어서 물가와 경기를 다시 끌어올리려는 겁니다. 올해 경제성장률 5% 목표치는 사수하려는 거죠. 이번 발표를 두고 “중국 최고 지도자들 사이에서 디플레이션과 싸우려는 긴박감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맥쿼리캐피털 래리 후 이코노미스트)라는 평가가 나옵니다.특히 눈에 띄는 건 ‘기존 주택담보대출 금리 인하’입니다. 중국 가계의 소비를 가로막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주택담보대출 부담이었기 때문이죠.2021년까지 중국에선 부동산 열풍이 대단했죠. 그 결과 가계의 주택담보대출 잔액이 지난해말 기준 38조1700억 위안(약 7200조원)이나 쌓였죠. 그런데 이 잔액이 갈수록 줄고 있습니다. 올해 2분기에만 4000억 위안(76조원)이나 줄었다는데요.가계부채가 줄어들면 좋은 것 아니냐고요? 국가 경제엔 오히려 그 반대이죠. 사람들이 번 돈으로 소비하는 대신, 그걸 빚 갚는 데 쓰고 있단 뜻이니까요. 실제 중국에선 ‘조기 상환 열풍’이라 할 정도로 대출을 일부라도 일찍 당겨서 상환하는 이들이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왜 미리 갚느냐. 기존 대출금리가 너무 높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미 대출을 받은 사람들은 이자율이 평균 4.27%(지난해 말 기준)인데요. 그동안 시장금리가 내려서 요즘 신규 주택담보대출 이자율은 평균 3.4%, 일부 도시는 2%대까지 내려왔죠. 저금리 시대에 높은 이자를 계속 내려니 너무 부담인 겁니다. 집값이 상승해서 투자 수익률이 높기라도 하면 그나마 버틸 텐데, 그 반대라서요(신규주택 가격이 9년 만에 최대 폭락). 가계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부담스러운 빚부터 갚는 긴축에 나선 거죠.그래서 이번에 인민은행이 ‘기존 대출도 금리 내려줄게. 그럼 빚이 있어도 좀 살만 해질 거야. 그러니까 조기 상환 그만하고 허리띠 좀 풀어’라는 신호를 준 건데요. 이거 효과가 있을까요?일단 인민은행은 5000만 가구, 약 1억5000만명이 연간 1500억 위안(28.5조원)의 대출이자를 절감하게 될 거라며 생색내는데요. 그런데 계산해보면 1가구가 연간 평균 3000위안(57만원)을 절약한다는 뜻이어서요. 대출자들이 반가워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달라질 건 없다는 평가도 나옵니다.결국 중국 소비를 되살리려면 더 강력한 정책이 필요하죠. 지금 시장에선 중국이 이렇게 급박하게 움직이는 걸 보면 조만간 더 큰 게 나올 거란 기대감이 팽배합니다. 요 며칠 주가가 뛴 이유도 사실 이런 분위기 변화 때문이죠. 모두가 기대하는 강력한 한방은 뭘까요. 바로 직접적으로 정부가 곳간을 열어 돈을 푸는 재정정책입니다.소비를 깨워라. 어떻게?중국 경제는 주요국 중에서도 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GDP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37%)이 유독 낮죠. 미국(68%)은 물론이고 일본(56%)이나 한국(49%)과 비교해도 차이가 큰데요. 그만큼 투자(부동산·인프라·공장)와 수출이 경제를 떠받치는 구조인 겁니다. 앤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 말대로 “중국은 세계 생산의 3분의 1을 담당하지만 세계 수요의 10분의 1만 담당하는 불일치가 있습니다.”경제성장 초기엔 이런 모델이 필요하겠지만, 지속가능하진 않죠. 거대한 수출 붐을 다른 나라가 계속 받아줄 순 없으니까요. 게다가 미국과의 패권 경쟁까지 겹치면서 중국 수출엔 먹구름이 꼈고요. 팽창만 해왔던 부동산 시장도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남은 방법은 방대한 인구를 가진 내수 시장을 깨우는 겁니다. FT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이를 두고 “지금이 중국 현대 경제사의 결정적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저소비, 고투자’ 경제 모델에서 벗어날 타이밍이란 뜻이죠.이와 관련한 논의는 사실 수년 째 이어지고 있고요. 수많은 보고서와 전문가 칼럼이 그 해법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이런 겁니다.①건강·사회보험 같은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을 더 튼튼히 해야 합니다.중국은 저축률이 높기로 유명하죠. GDP 대비 저축률이 46.6%로 일본의 두배(22.8%)이고 한국(33.2%)보다도 한참 높은데요. 저축 많이 하면 좋은 거 아니냐고요? 투자할 곳이 아주 많던 시절엔 그 많은 저축을 소화할 수 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높은 저축률이 소비를 가로막기 때문이죠.그럼 왜 중국인이 저축을 많이 할까요. 한마디로 불안하기 때문이죠. 아프면 치료비는 어쩌나, 은퇴하면 뭘 먹고 사나. 이런 걱정 때문에 은퇴 직전까지 현금을 쌓아둡니다. 게다가 코로나 팬데믹과 부동산 침체까지 겹치면서 더욱 ‘믿을 건 예금뿐’이란 생각이 커졌죠.그래서 나오는 해법이 정부가 경제 수준에 맞게 복지 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중국이 GDP 중 건강에 쓰는 지출은 5.4%뿐. 한국이나 일본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죠. 중국 사회과학원 세계경제정치연구소의 쉬 치위안 부소장 역시 정부가 교육·의료·사회 보장에 필요한 재정 지출을 “상당히 늘려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그냥 찔끔 늘리는 수준이 아니라 ‘이제 사는 게 좀 편안해지겠구나’라고 소비자가 마음 놓을 수 있는 수준이 돼야 하죠.②소득재분배를 위해 세금과 호구제도를 개혁해야 합니다.소비를 효과적으로 늘리기 위한 또다른 방법은 가난한 이들 소득을 늘려주는 겁니다. 부자에겐 100만원을 줘도 지출이 크게 늘지 않겠지만, 가난한 가계에 100만원을 주면 다 소비로 쓰게 될 테니까요. 소득 재분배가 중요한 이유입니다.그러려면 사회적 약자를 위한 현금·현물성 복지를 늘려야 하고요. 동시에 세금개혁도 필요합니다. 중국은 전체 세수에서 부가가치세 비중(38%)은 너무 높고, 개인 소득세(8%)는 상당히 낮죠. 상속세와 재산세는 아예 없고요.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거둔다면 이를 소득 재분배를 위한 재원으로 쓸 수 있을 겁니다.또 중국 특유의 호구제도를 개혁해야 하죠. 농촌 출신이냐 도시 출신이냐로 나눠서, 다르게 대우하는 제도인데요. 이런 차별을 없애는 것 역시 소득재분배를 위한 길입니다.‘복지주의 함정’이란 함정사실 중국 정부가 다 아는 얘기입니다. 중국 지도부는 2004년 중앙경제공작회의에서 ‘투자와 소비 관계를 조정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이제 투자보다는 소비 비중을 키워야 하는 전환기가 왔다는 걸 그때부터 알고는 있었죠. 그래서 궁금합니다. 왜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 경제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줄었을까요. 왜 다른 나라들이 일회성 현금(재난지원금)을 뿌리며 소비 촉진에 나섰던 코로나 팬데믹 때도 중국 정부는 나서지 않았을까요. 왜 시진핑 주석은 심각한 제조업 과잉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집권 3기 공식 경제정책 지도이념으로 ‘신품질 생산력’을 외치는 걸까요.해석은 다양합니다. 국가 주도 투자에 중독된 경제 체질을 바꾸는 게 쉽지 않다,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기술 투자를 강조하게 된다, 성장보다 안보를 우선시해서다, 아직은 중국 경제가 시스템적 위험에 처하진 않아 버틸만 하다 등등. 그 중에서도 제가 주목하는 건 시진핑 주석의 ‘복지주의’ 반대입니다.“게으른 자를 먹여 살리는 복지주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2021년 시 주석이 이 얘기를 했을 땐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요. 그의 사상을 연구·해석하는 중국 학자들의 해설을 종합해보자면 이런 겁니다. ‘포퓰리즘 정책으로 재정이 파탄났던 일부 남미 국가 사례 보지 않았냐.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아예 처음부터 국민들이 복지를 기대할 수 없어야 한다. 괜히 경제 성장했다고 사회보장을 늘리기 시작하면 점점 국민은 게을러지고 요구사항만 커지고 나중엔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워진다.’달리 말하자면 인민의 ‘정신력’이 해이해지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낮은 복지 수준에 머무르겠다는 고집입니다. 고생 좀 해봐야 강해진다는 이런 발상, 어딘가 익숙하지 않나요? 월스트리트저널은 ‘시진핑이 문화혁명 기간 토굴에서 살고 도랑을 파면서 겪었던 어려움이 그의 견해를 형성했다’는 설명을 전합니다.그런데 견고했던 시 주석의 ‘복지주의’ 경계론마저 이제 꺾이나 봅니다. 26일 시진핑 주석이 주재한 회의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은 올해 5% 경제성장률 목표 달성을 위해 필요한 재정지출을 보장할 거라고 강조했는데요. 로이터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올해 2조 위안(약 378조원)의 특별 국채를 발행할 계획이라고 하죠. 또 중국 CCTV가 다음주 국경절 연휴(10월 1~7일)를 앞두고 정부가 빈곤층에 생계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보도했습니다. 코로나 때도 없었던 현금지원 정책이 나온 거죠. 아울러 상하이시 당국은 소비진작을 위해 5억 위안(947억원) 어치의 소비쿠폰을 뿌린다고 발표했는데요. 이전엔 찾아볼 수 없던 정책 릴레이에서 긴박감이 느껴집니다. 중국 정부가 참 급하긴 급하구나 싶으면서도, 드디어 방향을 트는 건가 기대하게 되는데요. HSBC 징 리우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정책 출시의 빈도와 규모가 우리 기대를 넘어섰습니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이니셔티브에 대비하세요.” By.딥다이브한동안 우울한 소식만 가득했던 중국 경제에 드디어 햇살이 비추려나요. 지난 2년 동안 화끈한 부양책을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해온 터라, 조금 조심스럽기도 하네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중국 인민은행이 대대적인 돈풀기 정책을 내놨습니다. 소비여력을 갉아먹던 주택담보대출 상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금리를 인하해주기로 한 거죠. 디플레이션 위험에서 탈출하기 위한 과감한 움직임입니다.-하지만 소비를 깨우려면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합니다. 투자와 수출 위주였던 경제성장 모델 자체가 바뀌어야 하죠. 사회안전망을 강화해 ‘예방적 저축률’을 낮추고, 저소득층 지원을 더 늘려야 합니다.-중국 지도부는 그동안 방향전환을 주저했죠. 성장보다는 안보와 패권경쟁을 우선시했을 뿐 아니라, 시진핑 주석의 ‘복지주의 반대론’도 작용했는데요. 이제 방향을 틀어 나아가기 시작할 거란 기대감이 커집니다.*이 기사는 27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한애란 기자 har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