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판타지 문학의 대가인 미국 작가 어설러 K 러귄(사진)이 22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89세. 고인이 쓴 ‘어스시 연대기’는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지 문학으로 꼽힌다. 고인의 작품은 4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으며 전 세계에서 수백만 권이 판매됐다.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에 수록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나오는 가상도시 ‘오멜라스’는 가수 방탄소년단의 ‘봄날’ 뮤직비디오에 등장해 국내 팬들의 눈길을 끌었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시작부터 독하다. 사내들은 술집에서 상스러운 욕설을 주고받고, 몸싸움을 벌이다가 벽돌로 머리를 가격해 피가 뿜어져 나온다. 한 사내는 소년을 두들겨 팬 후 아무렇지 않게 성폭행한다. 1859년 영국에서 출발해 북극으로 고래잡이를 나간 포경선에 탄 두 남자 섬너와 드랙스를 중심으로 생존을 둘러싼 몸부림이 펼쳐진다. 전직 군의관인 섬너는 선박의, 원초적 욕구를 해결하는 데 도덕이나 법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드랙스는 작살수다. 선장 브라운리는 3년 전 난파 사고로 선원들이 죽거나 불구가 된 배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이다. 초반 항해는 순조롭다. 북극의 얼음을 뚫고 바다표범과 고래를 사냥한 뒤 칼로 배를 갈라 순식간에 지방층을 떼어내는 광경은 영상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연이어 사건이 터진다. 성폭행을 당하고도 범인에 대해 입을 다무는 사환 소년이 시체로 발견되며 선원들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배의 항해 목적은 따로 있었다. 고래잡이 수익이 줄어들자 선주 백스터가 막대한 보험금을 타기 위해 선장, 일등항해사와 짜고 사고로 위장해 배를 가라앉히기로 한 것. 그러나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소년의 죽음을 시작으로 선원들 간에 충돌이 벌어지고, 이내 살인으로 치닫는다. 피부를 새카맣게 얼려버리는 극한의 추위 속에 목숨을 부지하려 사투를 벌이는 사내들의 행동은 짐승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아니, 짐승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하다. 작가는 한계 상황에서 제어 장치 없이 터져 나오는 인간의 폭력성과 생존 본능을 치밀하게 써내려갔다. 휘몰아치듯 내달리는 전개는 갈수록 가속도가 붙는다. 돌발 상황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결말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눈을 떼기 어렵다. 책을 덮고 나면 찐득한 소금기에 전 사내들의 체취와 비릿한 피비린내가 한동안 코끝을 맴도는 듯하다. 긴 하드코어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다고 할까. 인간이란 존재의 바닥 깊숙한 곳까지 현미경을 바짝 들이댄 소설이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박완서 소설가(1931∼2011·사진)의 7주기를 추모하는 낭독 공연이 열리고 산문집 2권도 재출간됐다. 문학동네는 박 작가의 7주기(22일)를 앞두고 산문집 ‘한 길 사람 속’과 ‘나를 닮은 목소리로’를 다시 펴냈다. 박완서 산문집 시리즈 8, 9권으로 작가가 1990년대에 쓴 글이다. 박 작가의 맏딸인 호원숙 작가가 원고를 감수했다. 표지는 박 작가의 유품 사진을 이미지로 만든 것으로, ‘한 길…’은 손녀 김지상 씨가, ‘나를…’은 호 작가가 촬영했다. ‘한 길…’에서는 1990년대 초중반 호황기에 대한 소회와 유럽, 아프리카, 중국 등을 여행하며 느낀 감상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나를…’은 1998년 출간한 ‘어른 노릇 사람 노릇’을 다시 편집한 책이다. 작품 세계의 뿌리가 된 고향을 비롯해 가족, 변해가는 세상을 한층 깊어진 시선으로 바라봤다. 외환위기가 닥친 후 출간돼 당시 많은 독자들에게 위로를 건넸다.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을 주제로 한 동명의 낭독 공연도 25일 오전 10시 반 경기 구리시 구리아트홀 코스모스대극장에서 열린다. 이 소설은 6·25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서울을 배경으로 첫사랑의 아스라한 감정을 그린 작품이다. 낭독 공연은 노래와 음악이 가미돼 뮤지컬처럼 진행된다. 무료이며 초대권이 있어야 입장할 수 있다. 초대권은 구리시 인창도서관 안내데스크에서 1인당 최대 4장까지 선착순으로 배포한다. 구리시는 2012년부터 매년 박 작가를 추모하는 낭독 공연을 열고 있다. 구리는 박 작가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구리시는 2020년 개관을 목표로 박완서문학관을 설립할 예정이다. 호 작가는 “많은 분들이 어머니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어머니의 글을 다시 읽을 때면 예전에는 몰랐던 의미를 발견하고 어머니가 글 속에서 살아 계신다는 걸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공연 문의 031-550-8456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아파도 슬퍼도 글을 썼던 순간의 감각이 지금도 제 몸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억하며 열심히 밥을 먹듯 시를 쓰겠습니다. 지쳐 쓰러지더라도 종이 위에 끈질기게 머무르겠습니다.”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새해를 시작한 변선우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이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16일 열렸다. 변 씨를 비롯해 최유안(중편소설) 강석희(단편소설) 신준희(시조) 유지영(동화) 이수진(희곡) 김경원(시나리오) 김예솔비(영화평론) 김정현 씨(문학평론) 등 9명이 상패와 상금을 받았다. 수상자들은 벅찬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수진 씨는 “동경했던 선생님들 앞에서 수상 소감을 말할 수 있게 돼 정말 감사하다. ‘성덕’(성공한 덕후)이 됐다”며 활짝 웃었다. 김정현 씨는 “텍스트는 나 자신을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고유함으로, 그들과 함께 울었다”고 말했다. 수상자들은 지금부터 시작임을 잘 알고 있었다. 김경원 씨는 “활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제 글이 멋진 영상으로 춤출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예솔비 씨는 “글쓰기는 늘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무한한 생성과 변화의 현장”이라며 “영화가 제게 줬던 위안의 감각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미완성을 위해 계속 써 나가겠다”고 말했다. 작가로서의 각오도 다졌다. 강석희 씨는 “등단을 소망했지만 오래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마지막 꿈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신준희 씨는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과 같은 시조를 잘 지을 수 있도록 쓰고 또 쓰겠다”고 밝혔다. 유지영 씨는 “빠르게 변하는 사회와 아이들에게 발맞춰, 살아있는 동화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심사위원인 구효서 소설가는 격려사에서 “등단할 때의 붕 뜬 이 기분을 평생 기억하며 버텨야 한다. 내가 대단한 작품을 쓰고, 내 글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끝까지 작품 활동을 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그는 웃으며 “어서 와, 문단은 처음이지?”라고 환영 인사를 건네 폭소를 자아냈다. 김순덕 동아일보 논설주간은 축사에서 “당선자들의 재능과 끈기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며 “과감한 도전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한국 문단에 싱그러운 활력을 불어넣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심사위원인 오정희 은희경 소설가, 김혜순 시인, 조강석 문학평론가, 이근배 이우걸 시조시인, 송재찬 동화작가, 이정향 영화감독, 주필호 주피터필름 대표, 조정준 영화사 불 대표 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터무니없는 죽음도 악다구니 같은 억센 슬픔의 순간이 지나가면 곧 일상이 돼.” 정미경 소설가(1960∼2017)의 유고 소설 ‘당신의 아주 먼 섬’(문학동네)에서 중년의 정모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해 1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작가가 남은 이들에게 건네는 말 같다. 고인의 1주기(18일)를 맞아 장편소설 ‘당신의…’와 소설집 ‘새벽까지 희미하게’(창비)가 나란히 출간됐다. ‘당신의…’는 습작 원고 더미에 묻혀 있다 고인의 작업실을 정리하던 남편 김병종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65)가 발견해 펴낸 것. 섬들이 포도알처럼 흩어져 있는 풍경이 펼쳐진 한 섬에서 상처 입은 이들이 치유되는 과정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오토바이 사고로 친구를 잃은 고교생 이우는 어머니 연수의 고향인 섬에서 연수의 친구 정모와 지낸다. 둘은 바다를 보며 느릿느릿 걷고, 버려진 소금창고를 도서관으로 만들며 차츰 힘을 얻는다. 간암 진단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눈을 감은 고인은 이 작품을 쓸 때 몸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삶과 죽음을 응시한 문장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문다. “죽는다는 건 영혼이 우주 저 멀리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 데칼코마니처럼 여전히 곁에 있는 것 같아”라고 읊조리는 이우의 말이 그렇다. ‘어떤 하루는, 떠올리면 언제라도 눈물이 날 것이라는 걸 미리 알게 한다’는 문장은 빛나는 순간을 돌아보는 고인의 모습을 그려 보게 만든다. 김 교수는 발문을 통해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냈다. 그는 15일 전화 인터뷰에서 ‘당신의…’ 원고를 발견하고도 출간을 망설였다고 했다. “정 작가는 문장을 숱하게 고쳐 쓴 뒤에야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는 완벽주의자예요. 글을 출력해 책 더미에 뒀다는 건 수정하려 했다는 걸 의미해요. 갑작스레 떠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지만요….” 고민 끝에 책을 내기로 한 건 인생 자체가 미완이기에 예술 역시 미완인 채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정 작가는 펄쩍 뛰며 고치려고 했겠지만 색다른 시도라고 여기고 출간했어요. 아마 곁에 있었다면 곱게 눈을 흘긴 채 따라 줬을 거라 생각해 봅니다.” ‘새벽까지…’는 ‘못’, ‘목 놓아 우네’, ‘장마’ 등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문예지에 발표한 단편 5개를 묶었다. 더 많이 소유하려다 좌절한 남성과 처음부터 욕망을 내려놓은 여성(‘못’), 잘못 보낸 문자메시지로 이어져 깊은 고민까지 털어놓는 남녀(‘목 놓아 우네’) 등 아등바등 살아가고, 때로 속물스럽기도 한 이들을 통해 인간과 삶의 복잡다단한 이면을 정교하게 짜내려갔다. 추모 산문과 해설에서 문인들은 ‘이데올로기를 현실의 삶으로 끌어들여 생생한 피와 살을 부여할 줄 아는 작가’(정지아 소설가), ‘삶의 세부를 치밀하고 견고하게 새겨 넣는 작가’(백지연 문학평론가)로 고인을 기억했다. 김 교수는 18일 서울 서초구의 작은 교회에서 가족들과 조용히 추모 예배를 올릴 예정이다. 당초 문학, 미술을 결합한 전시회를 열 계획이었지만 작업을 할수록 사무치는 그리움에 너무 힘겨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당신의…’에서 정모는 염전의 소금 꽃을 가리키며 말한다. “징허게 모인 기운이 터져 나오면 그게 꽃이다.” 고인은 온 힘을 다해 글을 자아냈다. 그의 작품들은 그렇게 터져 나왔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처럼.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전쟁은 인간의 본성을 슬플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만든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포로로 잡혔다 살아남은 후 영웅이 된 외과의사 도리고를 중심으로 전쟁 속에 던져진 인간 군상을 처연하게 비춘다. 저자의 아버지가 실제 일본군 전쟁포로로 철도 건설에 동원됐던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 이야기는 일본군 포로로 태국∼미얀마를 잇는 ‘죽음의 철도’ 라인에서 참상을 겪었던 청년 도리고와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후 명성을 얻어 존경을 받는 70대 도리고의 현재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전장으로 떠나기 전 도리고가 고모부의 새 아내 에이미와 은밀하게 나눈 사랑도 비중 있게 그렸다. 비가 쏟아지는 정글에서 벌거벗다시피한 채 나무를 베어내고 철도가 들어설 길을 닦는 포로들. 공사 기일을 맞추기 위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극한의 작업에 내몰린 이들은 온갖 질병에 걸려 수없이 죽어나간다. 도리고는 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파기보다는 살아 있는 포로들에게 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병든 이들을 돌보는 것도 의사인 도리고의 몫이다. 포로들은 이런 도리고를 ‘큰형님’이라 부르며 의지하고 따른다. 하지만 도리고는 성자가 아니다. 포로들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스스로도 잘 안다. 부하들에게 등 떠밀려 희망의 상징이 된 도리고는 어렵게 확보한 쇠고기 스테이크 앞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간신히 삼키며 이를 병사들에게 내준다. 그렇게 신화 하나를 추가하려 애쓴다. 도리고는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자신을 향한 칭송에 “미덕은 잘 차려입고서 갈채를 기다리는 허영이었다”고 건조하게 내뱉는다. 그는 공개석상에서는 위스키에, 비밀스러운 곳에서는 여자에 탐닉하는 남자일 뿐이기에. 에이미와 함께한 격정의 순간과 사회적으로 성공한 도리고의 현재 모습은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였던 철도 공사 현장의 비극을 또렷하게 부각시킨다. 군인에게 구타당하는 포로를 보며 다른 이들은 동료가 죽든 매질이 끝나든 어느 쪽으로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전에는 저녁 식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끔찍한 장면들을 묘사한 전쟁소설이지만 감정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도록 자극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세상과 삶은 모순덩어리임을 시종일관 담담하게 써내려갈 뿐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볼 때 목이 칼로 자르기 쉬운지 어려운지부터 파악하는 고타 대령은 나카무라 소령과 함께 밤이면 일본 시 하이쿠를 읊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살기 위해 일본군 밑에서 부역한 조선인 최상민은 전쟁이 끝나자 처형된다. 반면 고타와 나카무라는 처벌을 받지 않은 것은 물론, 선(禪) 명상가가 되고 노인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는 봉사활동을 하며 ‘착한 사람’으로 지낸다. 전쟁의 기억은 도리고를 끝없이 철도 공사 현장으로 데려다 놓는다. 작가는 전쟁으로 상징되는 상처가 인간에게 어떤 자국을 남기는지를 응시한다. 그리고 말한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2014년 맨부커상 수상작. 원제는 ‘The Narrow Road To The Deep North’. 그림을 통해 19세기 영국 식민지였던 호주의 잔인한 현실과 기억을 조명한 저자의 장편소설 ‘굴드의 물고기 책’도 함께 출간됐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중편소설을 쓸 기회가 별로 없었어요. 문예지에서 청탁하는 건 대부분 단편소설이니까요.” 처음 쓴 중편소설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로 제42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손홍규 소설가(43)의 말이다. 한국은 단편소설이 특히 발달한 나라로 꼽힌다. 권영민 문학평론가(단국대 석좌교수)는 “외국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단편을 잘 쓰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서사적인 구조를 갖춰 좀 더 긴 분량으로 단편을 많이 쓴다”고 설명했다. 외국의 단편은 반짝이는 순간을 포착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에서는 밀도 있는 이야기를 담으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 중편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짧은 분량의 책을 선호하는 독자가 갈수록 늘어나면서 중편이 각광받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반면 장편과 단편 사이에서 입지가 좁아질 수 있다고 예상하는 이도 있다. 손 씨는 “중편을 써보니 단편의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미학적 시도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심사위원들은 ‘꿈을…’에 대해 “장편이 추구하는 서사의 역사성과 단편에서 강조하는 상황성을 절묘하게 조합하며 중편다운 무게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여러 장르에서 다채로운 작품이 나올 때 독자들의 선택지도 넓어진다. 중편이 한국 소설의 토양을 풍요롭게 만들지 그 미래가 사뭇 궁금해진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이탈리아의 유명 소설가 엘레나 페란테가 쓴 ‘나폴리 4부작’의 마지막 책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한길사)가 최근 출간됐다. 두 여성인 엘레나, 릴라의 유년기와 사춘기(‘나의 눈부신 친구’), 청년기(‘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중년기(‘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를 그린 1∼3권에 이어 4권은 노년기를 담았다. ‘나폴리 4부작’(사진)은 엘레나와 릴라의 우정과 애증을 비롯해 여성들이 겪는 모순과 보편적 경험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강렬한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며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폴리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란 엘레나와 릴라는 절친한 친구인 동시에 라이벌이다. 엘레나는 똑똑하고 매혹적이지만 악한 면도 지닌 릴라와 마음을 나누다가도 갈등을 겪는다. 나폴리를 떠난 엘레나는 작가로 성공하고 명문가 출신인 대학교수와 결혼한다. 나폴리에 남은 릴라는 공장에서 일하며 아이를 키운다. 어린 시절을 공유했지만 각자 다른 길을 갔던 둘은 나폴리에서 다시 만난다. 이들은 우정을 회복하지만 동갑내기인 두 딸들을 비교하게 되면서 어린 시절 느꼈던 복잡한 감정 속으로 빠져든다. 격동의 이탈리아 근현대사도 엘레나와 릴라의 삶과 맞물리며 펼쳐진다. 개개인의 내면을 깊숙하게 파헤치는 가운데 폭력과 부패, 불평등에 짓눌려 가는 사회의 민낯도 가감 없이 그렸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을 기리는 공원이 다음 달 16일 선종 9주기에 맞춰 개장할 예정이다. 7일 경북 군위군에 따르면 김 추기경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군위읍 용대리에 조성하는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 공사가 최근 마무리됐다. 공원 규모는 3만여 m²다. 공원은 김 추기경이 어린 시절 살던 옛집과 추모 전시관, 추모 정원, 십자가의 길, 평화의 숲, 잔디광장 등으로 구성됐다. 옛집에 딸린 우물과 옹기를 굽던 옹기굴도 복원했다. 공원에서 약 500m 떨어진 옛 군위초등학교 용대분교 자리에는 청소년 수련원이 새로 들어섰다. 대구에서 태어난 김 추기경은 네 살 때 가족과 함께 군위로 이사해 보통학교를 다니며 약 8년간을 살았다. 추기경은 1993년 폐가가 된 옛집을 찾아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추기경이 어릴 적 살던 집을 직접 그린 뒤 ‘김수환 옛집’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저자의 5주기인 올해, 포근하고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동화 같은 작품을 만났다. 1981년 ‘문학사상’에 연재했던 연작소설 3개를 묶어 냈다. 오직 집 한 채를 가지길 소망하는 이(‘이 지상에서 가장 큰 집’), 높이 뛰어올라 사라져 버리려는 높이뛰기 선수(‘포플러나무’), 갑자기 말을 하지 않는 남성(‘침묵은 금이다’)은 생의 의미를 다각도로 비춘다. ‘이 지상에서…’의 아이는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꿈꾸던 집을 갖게 된다. 한데 일대가 공원이 되면서 집은 철거된다. 할아버지는 집이 있던 자리의 풀밭에 원을 그리고 그 안에서 살다 공원관리사무소 사람들에게 끌려간다. 할아버지가 머물던 곳에는 토끼풀이 살고 비, 바람이 지나가며 생명이 이어진다. 소년은 이를 보며 생각한다. 이 우주가 모두 할아버지의 집이라고. 평생 높이뛰기 연습을 하다 하늘로 솟구쳐 오른 뒤 나타나지 않는 할아버지를 보며 ‘나’는 깨닫는다. 이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던 저 먼 곳에서부터 높이뛰기해서 잠시 머물다 가는 허공이며, 우리가 돌아가서 착지하는 곳이야말로 지친 영혼을 영원히 받아주는 지상의 세계라고. 어떤 말에도 진실이 깃들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된 후 입을 닫은 남성은 말을 하지 않는 동안 행복했다. 그때야 비로소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말하려 애쓰지만 혀가 굳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직장을 잃고 가족으로부터도 버림받는다. 그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 남이 신다 해진 신발을 꿰매고 나서부터다. 가장 낮은 곳의 때 묻고 낡은 것을 고쳐줄 때 비로소 편안함을 느낀 것. 말은 입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그는 ‘나’에게 말해준다. 자신이 뱉은 말이 ‘말빚’임을, 자신이 쓴 글이 ‘글빚’임을 잊지 않는다면 삶은 그만큼 충만하고 진실해질 수 있음을 정제된 문장으로 써내려갔다. 그리고 비우고 낮춰야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넌지시 일러준다. 저자가 마음을 깊이 담아 남기고 간 선물을 조금 늦게 발견하고 풀어본 기분이다.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인간의 상식을 넘어서, 학문적인 판단도 넘어서, 전쟁은 벌어졌다. 일본은 세계를 적으로 돌렸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대한 기습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날, 정치학자 난바라 시게루는 이렇게 탄식했다. 당시 미국은 국민총생산(GNP)이 일본의 12배에 가까웠다. 이런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전쟁을 감행한 이유는 뭘까. 중일전쟁 후 미국이 중국에서 손을 떼지 않자 미국 세력을 몰아내기로 한 것이다. 중일전쟁을 위해 조성해 둔 군비로 군사력을 급격히 끌어올린 일본 정부는 단기전은 승산이 있다고 오판했다. 도쿄대 교수인 저자는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의 근대 침략전쟁의 원인과 특징을 세계 역사 속에서 짚었다. 중고생 대상 특강을 정리한 책으로, 쉽고 간결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성인 독자가 읽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일본 중국 한국 미국 등의 내부 상황은 물론이고 국제관계를 조명해 세부 상황을 파악하면서도 넓은 시야로 당시 정세를 이해할 수 있다. 근대 일본이 강대국과 벌인 첫 전쟁인 청일전쟁(1894∼1895년)은 중국 중심의 화이질서가 무너지자 조선을 두고 경쟁하며 벌어졌다. 청은 러시아를, 일본은 영국을 각각 대리해 나선 제국주의 전쟁의 대리전이기도 했다. 청일전쟁 결과 일본은 화이질서에서 벗어났다. 러일전쟁으로 일본은 서구 열강에 대등한 지위를 인정받음으로써 식민지 질서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일본은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산둥반도의 독일 영역을 공격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하지만 전후 일본은 산둥반도 이권, 조선 통치 등에 대해 미국 영국으로부터 비판을 받자 고립감을 느끼고 더 넓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일본이 벌인 전쟁의 속성을 현대 전쟁과도 연결시킨다. 9·11테러 후 미국은 범죄자를 처벌하는 시각으로 이라크전쟁에 나섰다. 중일전쟁(1937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 당시 베이징 교외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이 충돌해 전면전으로 확대되자 일본 정부는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중국의 불법 행위를 중지시키기 위해 실력을 행사한다는 의미로, 이라크전쟁을 벌인 미국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일본이 벌인 침략전쟁의 원인과 의미를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판적 입장도 적극 소개한다. 해군 미즈노 히로노리의 일갈(1929년)이 대표적이다. “주요 물자의 8할을 외국에 의존하는 섬나라 일본의 생명줄은 통상이다. 일본은 무력전에서는 이겨도 현대의 전쟁인 지구전, 경제전에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은 전쟁할 자격이 없다.” 이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은 다른 선택을 했다. 현재 일본은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있다. 저자는 천황을 포함해 당시의 내각, 군 지도자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답한 이가 절반을 넘었다는 설문 결과(요미우리신문·2005년)에서 희망을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전쟁을 둘러싼 판단 과정과 파장, 책임에 대해 여러 질문을 던지며 읽는 이를 사유의 세계로 초대하는 노련하고 힘찬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고래는/요동치는 섬이며 숲이다/창과 작살이 그 몸에 박혀/피와 녹물이 흘러도/그는 죽지 않는다/천하제일의/장엄한 고독이여/지축도 흔드는 무적의 힘이여//….’ 김남조 시인의 ‘고래’다. 김 시인을 비롯해 정호승 신달자 나태주 윤후명 오탁번 등 36명의 시인이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 영감을 얻어 육필로 쓴 시를 전시하는 ‘대곡천 암각화 육필 화시전’이 울산 울주군 반구대교육문화센터에서 16일까지 열린다. 이후 작품들은 울산문화예술회관, KTX울산역을 비롯해 서울 대구 부산 등 전국을 순회하며 전시된다. 반구대 포럼은 국보인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이번 화시전(畵詩展)을 기획했다. 암각화의 보존을 촉구하고 가치를 널리 알리는 의미도 있다. 윤후명 시인은 ‘바위 위의 얼굴’을 쓰고 직접 그림도 그렸다. ‘고래를 따라/나는 오랜 세월 바다를/떠돌았다// …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하여/얼굴을 비춰보는 이 바위에/그려진 모습이여/바위 깊이 새겨진 내 삶이여’ 허영자 시인은 ‘누구였을까’에서 시대를 초월한 모정을 노래했다. ‘새끼를 등에 업은/고래나/애기를 등에 업은/사람이나/엄마 마음은 매한가지// … 이 마음 이 사랑을/곱게 헤아려/돌에 새긴 그 이는/누구였을까’ 화시전에 참가한 시인 가운데 많은 이들은 과거에 이미 개인적으로 반구대 암각화를 찾아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행사의 공동추진위원장인 이건청 한양대 명예교수는 “이 땅의 선사인들이 창작한 암각화가 현대 시인들에 의해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됐다”며 “멸절 위기에 처한 암각화의 소중한 가치를 널리 알리고 근본적인 보존 대책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관람료는 무료.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성석제, 은희경, 무라카미 하루키, 유발 하라리, 스티븐 핑커…. 이름만으로도 반가운 그들이 온다. 향기로운 새 책을 손에 들고서. 오랜만에 기지개를 켜고 독자들을 만나는 작가도 많다. ○역사, 미스터리, 페미니즘 성석제 작가는 4년 만의 장편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를 상반기에 펴낸다. 조선 숙종 시대, 왕과 의형제를 맺게 된 주인공이 격랑 속에서 왕을 지키기 위해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모험담을 특유의 입담으로 풀어냈다. 등단 50주년을 맞은 윤흥길 작가는 20년 만에 대하소설 ‘문신’(전 5권)을 하반기에 출간한다. 일제강점기 열강의 이권 다툼에 휩싸인 한반도를 배경으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한 가족의 삶이 펼쳐진다. 은희경 작가는 학창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1970년대 여자대학 기숙사 이야기를 쓴 장편소설을 하반기에 낸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각기 다른 기억을 지닌 이들을 비춘다. 상반기에 나오는 이기호 작가의 소설집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는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의 조남주 작가는 페미니즘 장편소설을 10월경 선보인다. 정이현 작가도 장편소설 ‘아무도 죽지 않는 밤’을, 최은영 작가는 두 번째 소설집을 각각 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최신작 ‘버스데이 걸’은 2분기에 출간된다. 스무 살 생일을 맞은 소녀가 수수께끼의 노인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오르한 파무크의 장편소설 ‘빨간 머리 여인’(4월), 전쟁으로 황폐해진 파리에서 인간과 고양이가 생존을 위해 힘을 합치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고양이’(5월)도 나온다. 창간 준비를 하며 화제가 되는 스캔들을 찾으려는 신문사를 그린 움베르트 에코의 ‘제0호’는 상반기에 만날 수 있다.○ 세계 변화, 노화, 인간 본성 고찰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의 유발 하라리 이스라엘 히브리대 역사학과 교수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8월 내놓는다. 민주주의의 위기, 종교의 부흥, 세계대전의 위협, 서구 패권의 몰락에 이은 중국과 이슬람의 득세에 대해 기술했다. 3월 출간될 영국 고전학자 메리 비어드의 ‘여성과 힘’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여성들이 자신의 힘에 대한 부당한 시각에 어떻게 맞서왔는지에 대한 책이다. ‘카오스’의 미국 작가 제임스 글릭이 쓴 ‘시간여행의 역사’(7월)는 시간여행 가설의 과학적 원리와 아울러 문학, 영화, 철학 영역에서 연구된 이 전복적 관념의 변천사를 짚었다. 마사 너스바움 미국 시카고대 윤리학 석좌교수와 같은 대학 로스쿨 학장 사울 레브모어가 쓴 ‘Aging Thoughtfully(사려 깊게 나이 들기)’는 은퇴, 노년의 우정, 불평등과 빈곤, 건강 등 폭넓은 고민을 다뤘다. 11월경 나온다. 스벤 베커트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의 ‘면화의 제국’(3월)은 자본주의의 기원을 면화라는 물품을 통해 살폈다. 자본주의와 전쟁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평이다. 상반기에 나오는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의 ‘생각거리’는 언어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봤다. 이국종 아주대 교수의 비망록을 바탕으로 쓴 ‘이국종 에세이’(가제)도 상반기에 출간될 예정이다. 외상센터 수술실에서 매일 벌인 사투, 한국 의료시스템의 문제에 대한 고뇌, 의사로서의 소명에 대한 사색을 정리했다. 손효림 aryssong@donga.com·손택균 기자}

1. 인터뷰 장맛비가 오는 저녁, 나는 학위 논문에 쓸 인터뷰를 수정하기 위해 국제난민기구의 한국 대표부를 향했다.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와 에어컨 냉기가 사라지자 안경 렌즈가 삽시간에 부옇게 변했다. 나는 손을 뒤로 뻗어 가방 안쪽을 뒤적거렸다. 안경집이 깊숙이 처박혔는지 손에 걸리지 않았고 등에는 금방 땀이 솟았다. 그때 내 기억 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얼굴로 나타나기도 했고 한 장소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바람이나 냄새를 동반하기도 했다. 아주 흐릿해서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나는 기억의 늪 위로 떠오르려는 것들의 실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실체를 마주하기 전에 알아차려지기 마련이고, 그게 두려움이나 공포라면 반응 속도는 훨씬 빠르니까. 난민기구를 찾은 건 학위 논문에 쓸 인터뷰를 최신 것으로 수정하라는 지도교수의 조언 때문이었다. 제네바 국제개발대학의 저명한 노학자인 내 지도교수는 내후년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논문을 끌어오던 몇몇 학생들에게 직접 연락을 하는 것으로 그가 갖고 있던 부채감을 덜어내는 의식을 치렀다. 그는 내게 보낸 메일의 말미에 용기의 의미에 대해 썼다. 용기란 주어진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품고 가는 것이라네. 그 문장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나는 다시 인터뷰를 해볼 용기를 냈다. 5년 전 그리스에서 진행하던 사례 연구를 중도에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계약직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내게 이번 기회는 안정된 직장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인 셈이었다. 물론 내게는 난민에 대한 연민의 감정도 남아 있었다. 이 모든 이유들이 넝쿨처럼 단단하고 질퍽하게 뒤엉켜 나를 옭아맸다. 인터뷰이들과의 첫 만남에서 나는 무하마드의 비정상적인 관심에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운동화 끈을 묶으며 섬뜩하게 웃는 무하마드의 표정은 강렬한 데다 이상할 정도로 익숙했다. 그러나 나는 어리석게도 마지막까지 무하마드가 아술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도리어 무하마드의 사례가 내 논문을 돋보이게 해 줄 거라고 확신했다. 일주일 뒤, 나는 인터뷰이들과 다시 만났다. 아이들이 들려준 난민캠프는 전쟁터나 다름이 없었다. 일순간 일터와 학교가 폭파되고 집과 가족을 잃고 일상이 무너진 그들에게 삶은 이미 지옥이었다. 소요 사태와 총기 난사는 잠잠하다 싶으면 일어났고 늘 부족하던 구호품은 도난당하기 일쑤였으며 아이든 어른이든 여성은 늘 극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무하마드는 화재로 죽은 누나의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와 해변에 나갔다 돌아왔을 때 텐트는 화염에 휩싸인 채 타오르고 있었다고 했다. 누나와 남자는 텐트 안에 갇혀 죽은 채 발견되었다. 누나는 나체였고 남자는 하의를 탈의한 상태였다. 텐트에는 발화의 원인이 된 촛불만 덩그러니 바닥을 굴러다녔다. 남자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지만 무하마드는 그가 누군지 금방 알아보았다. 남자의 팔 한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그가 ‘아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 레스보스 5년 전 겨울, 나는 그리스 레스보스섬의 난민캠프에서 봉사단원으로 일했다. 내가 맡은 임무는 구호 물품을 정리하는 것이었지만 비상 상황으로 나 역시 구조 작업에 합류했다. 라일라와 아술은 그날 내가 구조선에서 처음 목격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난민 보트 위에 비참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라일라는 아이들을 살리려다 죽어간 어머니의 손을 새벽 내내 붙들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연민과 애정의 마음으로 라일라에게 각별히 정성을 쏟았다. 라일라는 피난길에 안경을 잃어버려 생활하는 데 불편을 겪고 있었고 그것을 눈여겨봐 온 나는 어느 저녁 산책길에 내 안경을 라일라에게 선물했다. 빛이 충만한 보름달을 바라보며 라일라가 말했다. “어떤 책에서 봤는데요. 달의 빛은 태양에 반사되어 나온대요. 그래서 육안으로 태양의 빛은 볼 수 없어도 달의 빛은 볼 수 있대요.” 라일라가 나를 슬쩍 보더니 말을 이었다. “언니에게는 따뜻한 빛이 흘러요.” 그때 저편에서 사람들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어둠 속 희미한 실루엣은 물류 팀 팀장과 선배 린이었다. 나는 라일라와 나를 향한 그들의 불편한 기운을 감지했다. 마침 캠프의 문제아 하싼이 일을 터뜨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와 팀장, 린은 그 길로 현장을 찾았다. 하싼의 패거리는 새로 온 난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하싼은 결국 그리스 경찰에 호송됐다. 나는 경찰차에 억지로 호송되는 하싼을 바라봤다. 하싼이 입은 티셔츠 오른쪽 팔이 나풀거렸다. 내전 중에 거리에 떨어진 수류탄이 터져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하싼은 난민캠프에 들어와서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병원에서 깨어난 하싼은 울부짖으며 소리쳤다고 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싼의 가족들은 그때까지도 시리아에 남아 있었고 어린 여동생은 폭파된 집에서 잿더미로 변한 채 꺼내졌다고 했다. 나는 경찰차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얼마 안 가 그가 다시 난민캠프로 들어올 거라는 건 하싼도 우리도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리스 정부에 난민캠프는 골칫덩어리였다. 일이 터져도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 경찰은 캠프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 사이 난민캠프는 유서 깊은 고대 유적지 그리스의 한쪽 땅에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었다. 새로운 폭력이 탄생하고 사람들은 거기에 익숙해져 갔다. 세상이 그곳에서 종말을 고했고 다시 해가 뜨면 종말 속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고개를 돌린 나는 어둠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이 모든 상황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라일라의 뒷모습이 현장으로부터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팀장의 질책을 들으며 나는 린이 나를 모함한 거라고 확신했다. 팀장과 서먹하게 인사를 나눈 후 나는 린을 찾아가 항변했다. 린은 오히려 냉정하고 차분한 태도로 라일라와의 관계에서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했다. 나는 그녀의 오해에 엉겁결에 큰 소리를 치고 창고를 나왔다. 정작 밖으로 나와 나는 한참 머뭇거렸다. 정황상 무슨 행동이라도 취하지 않을 수 없어진 나는 사무실에 가서 난민 입양 절차를 물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내가 깨달은 사실은 봉사단원들이 그동안 나를 사례 관찰이나 하러 온 뜨내기로 치부해 왔다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며 이를 악물고 밖으로 나왔다. 더는 레스보스에 남고 싶지 않았다. 3. 한국행 결국 나는 이주 후 퇴소 처리를 했다. 학교가 있는 제네바가 아니라 한국행을 택했다. 마지막까지 라일라가 마음에 걸려 한국에 가더라도 라일라를 돕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나 역시 월세 난민 같은 생활을 이어갔다. 그 사이 시리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반정부 시위대와 정부 간 내전이 주변 국가와 국제 사회의 무력 전쟁으로 변질되었고 난민들은 매년 수천 명씩 불어났다. 내 앞에 산적한 일상의 문제들도 규칙적이고 끈질기게 나를 흔들어댔다. 그토록 절박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기억의 세계에서마저 익사당하는 현실, 나로서도 대책이 있을 수 없었다. 가끔 라일라가 생각날 때면 나는 라일라를 입양하겠다고 소리를 질러대던 나의 한때의 충동을 아프게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일라가 그 사실을 알기라도 했다면 나의 그 돌이킬 수 없는 치기와 감상이 라일라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캠프의 봉사단원들과 지금의 나는 무엇이 다른가, 그들은 적어도 여전히 그곳에 있지 않은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숨이 턱 막혔다. 답이 없는 시간 속에 파묻혀 나는 깊이 침잠했다. 아이들이 죽었을지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도 끈덕지게 꼬리를 물었다. 그곳은 죽음이 무력한 곳, 죽음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타인의 죽음을 가벼이 여겨도 된다고 생각하는 곳이었다. 지극히 평범했던 사람들이 새로운 평범으로서의 악에 익숙해져 버리는 곳이었다. 나는 내가 아이들을 버려두고 도피했다는 자책감으로부터 끝끝내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느 날 우연히 연락이 닿은 린을 통해 라일라의 소식을 접했다. 린은 라일라가 하싼에게 성폭행을 당하다 자의일지 모를 화재로 텐트 안에서 처참하게 죽어갔다고 전했다. 4. 내가 만든 사례 아술을 잘 이용하라는 지도교수의 조언에 따라 나는 힘들게 아술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아술의 인터뷰 내용은 다행히 논문의 얼개에 맞춘 방향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라일라에 대한 질문을 의식적으로 기피했다. 다섯 번째 인터뷰에서 아술은 하싼에 얽힌 자신과 라일라의 이야기를 꺼냈다. 막 캠프에 들어온 남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던, 왼팔 한가득 담요와 간식거리를 챙겨다 주던, 저녁마다 찾아와 자신을 보호해준 나쁜 새끼, 하싼에 대해. 그 이야기를 곱씹으며 집에 돌아온 나는 아술에 대한 나의 마음을 굳혔다. 나는 아술이 내 삶에 들어와 버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아술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끌어안아 줄 사람은 이곳에서 내가 유일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아술이 한국에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려던 마지막 인터뷰에서 아술은 다시 시리아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인터뷰가 끝나고 아술의 숙소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아술이 인터뷰 첫날 내게 보낸 일종의 신호였던 운동화를 발견했다. 캠프를 나오던 마지막 날 아침 내가 아술을 위해 따로 준비해 뒀던, 아술이 그토록 원했던 하얀 운동화였다. 아술은 내게 라일라의 유품인 안경을 건넸다. 안경이 라일라를 마지막까지 지킨 희망이었다고 말하며. 아술은 달빛이 태양의 빛에서 반사되어 나온다는 사실을 내게 상기시켰다. “모든 행성이 태양처럼 빛날 필요는 없어요. 태양은 달을 통해 달빛으로 보이기도 하고, 수성이나 목성을 통해 그것들의 빛으로 보이기도 하고,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게 하는 빛이 되기도 하죠. 사람은 모두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봐요. 상황은 시선에 따라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저렇게 보이기도 해요. 힘든 상황이 주어지면 곧 죽을 것같이 힘들지만 그 상황을 견디게 하는 게 때로는 하나의 물건, 한 사람, 하나의 희망일 수 있어요.” 아술은 보름달을 바라보며 천천히 낮게 읊조렸다. “그 희망이 라일라에게는 안경이었어요. 당신에게는 논문이었겠지만…….” 5. 그래도 남는 것 일 년 후, 나는 학생 대표의 영광을 안으며 졸업장을 받았고 졸업식 후에는 유엔난민기구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할 기회를 얻으며 성공적으로 학위 후 과정에 진입했다. 그 후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한국개발학회 20주년 포럼의 발표자로 초청되었다. 이번 포럼 참석은 학계와 각국 정부에 내 이름을 알릴 좋은 기회였다. 포럼 전날 저녁에 나는 리허설 중인 회의장을 찾았다. 회의장을 둘러보다 우연히 다시 만난 난민기구의 직원에게서 아술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직원은 몇 달 전 아술이 난민캠프의 봉사단원 숙소에서 총격으로 사망했다고 말했다. 아술은 마지막까지 숙소를 지킨 봉사단원이었고 피격당한 그의 품에는 갓 태어난 예멘 출신의 남자아이가 아술의 손을 잡은 채 밭은 숨을 쉬고 있었다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발표 예행연습을 하다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의식이 아뜩해지곤 했다. 다음 날, 포럼에서의 주제 발표는 순조롭게 끝났다. 폐회 후 만찬장에서 지도교수는 내게 중요한 인사들을 소개시켰다. 그들은 내 발표가 인상적이었다며 아술의 뒷이야기를 물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아술은 난민캠프의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고 내년 봄 다시 한국에 들어올 예정’이라고 거짓말했다. 사람들은 내 사례가 시종일관 감동적이라며 흥분했다. 나는 만찬 내내 태연을 가장한 채 나 자신과 치열하게 싸웠다. 현실에서 아술은 죽었지만 사례 안에서 그는 불멸의 지위를 얻었다고, 내가 만든 사례는 그렇게 굳혀져야 한다고 나는 내 자신에게 항변하고 읍소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레스보스가, 라일라가, 아술이 점점 더 생생하게 되살아나 나는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술을 몇 잔이나 거푸 마셨지만 허물어진 마음의 중심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뛰듯이 호텔 밖으로 달려 나가 먹은 것을 모조리 게워 냈다. 그러곤 주저앉아 쉴 새 없이 눈물을 쏟았다. 멀리 호텔 경사면 사이에 둥근 달이 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술은 그날 밤 달을 보며 희망에 대해 말했다. 그가 말하던 희망이 지금 나에게는 참담한 절망의 사례가 되어 한껏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내가 만든 사례 안에서, 이제는 아술이 아닌, 나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사례가 되어 있었다. 벽을 손으로 짚었지만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주저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호텔 경사면 사이에 떠 있던 달이 사라졌다. 태양의 빛에서 반사되어 나온다는 빛마저 스러진 시간, 누군가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 당선소감 - 최유안 씨글과 세상에 조용히 스며들어 가겠습니다 세 살 때 오른쪽 발목이 자전거 바퀴에 말려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의사는 조금만 늦었으면 평생 발을 쓰지 못했을 거라고 했습니다. 기억에도 없는 그 순간이 제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소설 쓰는 삶을 더는 늦출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오른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후 언제 어디서든 어느 형태로든 소설을 쓰고 또 썼습니다. 그동안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소설을 짓는 동안 소설이 저를 짓는다는 사실, 글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글을 동반자로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 부족한 저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정과 애정으로 채워나가겠습니다. 아버지, 엄마, 동생들, 투병 중인 고모, 친척들, 친구들 사랑합니다. 장정희 선생님, 고등학교 문예부를 기억하는 건 꿈을 잃지 말자는 스스로의 다짐이었어요. 소행성B612 문우님들,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고맙습니다. 박상우 선생님, 소설을 쓰는 기술보다 인간과 인생을 중시하시던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우연히 발목의 상처가 없어진 걸 발견했습니다. 새살이 돋아 상처를 이겨내도록 몰랐다니 놀라웠습니다. 글 쓰며 살겠다 다짐한 순간의 기억이 무뎌지고 쓰는 순간이 오롯해질 때까지 조용히 글과 세상에 스며들어 가겠습니다. 고통과 근심이 따르겠지만 배우는 과정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며 쓰겠습니다. 인간과 인생을 탐구하며, 늘 질문하며 작가로 행복한 삶을 살겠습니다. △1984년 광주 출생 △전남대 독어독문학과 △한국개발연구원(KDI) 전문연구원 ● 심사평 찬찬한 화법으로 곡진한 문제제기 훌륭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7편이었다. 4편은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였고 3편이 ‘밑도 끝도 있는 이야기’였다.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라는 표현이 소설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기존의 서사 질서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소설답지 않다는 평을 받을 수 없다. 소설을 포함해 예술은 생물처럼 변하는 개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질서를 따르지 않는 이유는 질서 자체에 혐의를 두기 때문이다. 질서 사회에서는 질서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예술의 세계에서는 억압일 수 있다. 그래서 질서의 세 축인 시간, 공간, 인간을 왜곡하고 이탈한다. 이는 얼핏 혼돈처럼 보이지만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질서를 지킨 작품과 거부한 작품별로 그것을 이루어 낸 솜씨에 점수를 매길 수밖에 없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연자 씨’는 세계와 현상을 독특한 감성으로 바라보는데, 그 시선이 낱낱하고 집요해서 읽는 내내 무서울 정도였다. 다 읽고 났을 때 그려지는 인상이 문장의 섬세함과 날카로움에 버금간다면 분명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실러캔스 또는 속도에 관한 농담’에서는 통 큰 패기가 느껴졌다. 3억5000만 년이라는 시간과 더불어 아무리 먼 장소와 관계의 거리까지도 한 번에 건너뛰려는 시도가 그것이었다. 성공적인 사태와 문장으로 조직되었더라면 정말 통쾌한 소설이 될 뻔했다. ‘내가 만든 사례에 대하여’는 잘 읽히고 작가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거니챌 수 있을 만큼 짜임새가 눈에 익었다. 찬찬한 화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와 양심 선언하듯 난민의 현실과 그 문제를 다루는 국제기구, 난민의 사례를 연구하는 학자의 소회를 밝힌다. 세계인이 함께 생각하고 고민할 문제를 곡진한 방식을 빌려 제기하는 소설이, 오랜만인 듯 반가웠던 것은 물론 작가의 훌륭한 이야기 솜씨 덕분이었다. 구효서·은희경 소설가}

전화를 끊고 나자 손이 덜덜 떨렸다. 더 이상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동기에게 운전대를 넘겼다. 강석희 씨(32·단편소설 부문)는 대학원 동기들과 경기 양평군으로 졸업 여행을 가던 중 당선 전화를 받았다. 강 씨는 “다 같이 소리 지르며 기쁨을 나눈 후에는 사흘 동안 진짜인지 의심했다. 동아일보에 가면 ‘당선자가 아니니 돌아가라’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제야 실감이 난다”며 웃었다.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응모자는 전년보다 25%나 껑충 뛴 2260명. 이 가운데 9명이 당선됐다. 12월 26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 모인 이들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수줍게 웃었다. 이들은 당선 연락을 받은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했다. 5년간 글을 써 온 최유안 씨(34·중편소설 부문)는 “소설이 너에게 뭐니”라고 묻는 어머니에게 “난 소설가로 죽고 싶어”라고 말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당선 전화가 왔고 참았던 울음을 꺽꺽 토해냈다. 변선우 씨(25·시 부문)는 서점 화장실에서 연락을 받은 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변 씨는 “믿기지 않아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었다. 입덧하는 것처럼 헛구역질이 계속 나왔다”고 말했다. 오랜 시간 쓰라림을 맛봤기에 등단 소식은 ‘벅차다’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이가 많다. 10년간 신춘문예에 응모한 신준희 씨(63·시조 부문)는 “매년 원고를 부치러 우체국에 가면 직원들이 알아보고는 ‘부럽습니다’라고 격려해줘 고마우면서도 민망했다”고 말했다. 신 씨는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오래된 나무도 새 잎을 항상 틔운다’는 말을 부여잡고 버텼다. 신춘문예는 ‘연말의 숙제’ 같았는데, 이제 그 숙제를 해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4년 가까이 평론을 준비한 김정현 씨(39·문학평론 부문)는 최종 심사에서 연거푸 탈락하자 좌절감이 커져만 갔다. 김 씨는 “내 능력은 딱 거기까지인가 하는 생각에 넘지 못할 벽을 마주한 것 같았다. 아득하게만 여겨졌던 문단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했다. 연출을 전공한 이수진 씨(40·희곡 부문)는 글쓰기에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다고 털어놓았다. 희곡 공모전에 숱하게 도전했지만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 씨는 “내가 쓴 희곡으로 졸업 공연을 올리고 연출도 했는데 글이 엉성하다 보니 배우들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새롭게 써서 다시 공연을 잘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강석희 씨는 5년간 소설을 쓰면서 참 외로웠다고 했다. 강 씨는 “내가 소설 쓰는 걸 어머니가 싫어하셨다. 다큐멘터리에서 이외수 소설가가 철창 안에 들어가 글 쓰는 모습을 보신 후 ‘저렇게 힘든 일을 꼭 해야겠느냐’며 걱정하셨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선 소식을 듣고 “내가 더 고맙다”고 한 어머니의 말에 코끝이 찡해졌단다. 이들에게 글을 쓴다는 건 살아가는 것과 같은 의미다. ‘작가’라는 말은 이들이 숨을 쉴 수 있는 힘을 줬다. 김정현 씨는 환한 표정으로 “글쓰기는 나 자신을 증명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아홉 살 때부터 소설가를 꿈꾼 최유안 씨는 1년간 혹독한 슬럼프를 겪고 난 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최 씨는 “회사 업무상 해외 출장을 자주 가는데 모스크바, 카자흐스탄, 아부다비로 가는 비행기에서도, 호텔방에서도 소설을 쓰는 나를 발견하고는 ‘너 미쳤구나’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끝까지 하고 싶은 게 소설 쓰기라는 것만은 또렷하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대학생, 중학생인 두 자녀를 둔 유지영 씨(48·동화 부문)는 새벽 5시부터 한두 시간씩 글을 썼다. 집안일을 마치고 가족들이 잠든 늦은 밤에 다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유 씨는 “내 안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이야기를 쓸 때는 피곤한 줄 모르겠다. 그저 즐겁고 행복하다”며 웃었다. 당선 후 남편과 아이들은 설거지를 하겠다고 자청하며 유 씨에게 글을 쓰라고 격려해 준다. 진짜 시작은 지금부터라는 걸 이들은 잘 안다. 김경원 씨(43·시나리오 부문)는 “시나리오는 영상화되어야 완성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관문이 많다. 꾸준히 쓰고 또 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예솔비 씨(23·영화평론 부문)는 “문학평론 수업을 듣다 평론의 매력을 발견했다. 더 집중해서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작업을 해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당선작들은 새해 첫 지면과 동아닷컴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어떤 모습의 작가를 그리고 있을까. “누구나 와서 쉬어가는 동네 어귀의 늙은 느티나무 같은 작품을 쓰고 싶어요.”(신준희 씨)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아이들이 신나게 읽을 수 있고, 마음의 상처도 어루만져 주는 동화를 자아내면 좋겠어요.”(유지영 씨) “김수영 시인은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고 했죠. 그 말 그대로 우직하게 쓸 겁니다. 진심을 다해서요.”(변선우 씨)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 당선소감 - 김예솔비 씨직시하고 관조하며 넋 놓고 바라봅니다마감일에 원고를 부치고 극장에 갔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봉한다는 대만 감독의 영화를 보았다. 어떤 일이 막막하게 끝나 버릴 수도 있다는 게 무서워서 결말을 유예하는 쪽을 택했다. 내 세계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해프닝들과는 무관하게, 나는 습관처럼 수첩과 펜을 들고 극장에 갈 거라고. 많은 영화들에 빚을 지고 있다. 비밀처럼 꺼내어 보던 영화들. 스무 살에는 무의식적인 척력으로 사람들을 많이 밀어냈고 필연적으로, 자주 낮아졌다. 바닥을 가늠하기 위해 영화를 틀었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는 혼잣말의 연장선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용기 내어 던지는 대화에의 암시가 아니었을까. 응답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평론 강의를 해 주셨던 정한아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탈속만이 본질이라고 믿으며 글을 멀리했던 내게, 글과 나 사이의 소중한 접점 같은 것도 있다고 평론과 들뢰즈라는 세계를 통해 알려 주셨다. 꿈결 같았던 수업 이후 일 년 동안 잔상 속에서 읽고 보고 쓰면서 지냈다. 당선 소식을 들은 날에는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의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함께 기뻐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이제 다시 모호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밀이 일상처럼 흐르는 암실 안으로.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 섬광처럼 스치는 진실을 믿는다. 찰나를 기다리는 사진가의 근력으로 써 나가겠다. 직시하면서 관조하면서 때로는 방관에 가까운 방식으로 넋 놓고 바라보면서.△1995년 서울 출생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 심사평 남한산성속 ‘삶과 죽음’ 치밀한 논리로 풀어 영화평론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영화이론 및 미학에 대한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문학적 지식도 겸비해야 한다. 객관적이고 합리적 판단력도 있어야 한다. 평론가는 글로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문장력은 기본이다. 올해 응모작은 38편이었다. 문제적 사극 ‘남한산성’과 실화에 바탕을 둔 ‘택시운전사’를 다룬 글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에 대한 평문도 있었다. 눈에 띄는 응모작은 5편이었다. ‘택시운전사’를 다룬 ‘역사는 어떻게 집단기억이 되는가’는 적절한 인용을 통해 설득력 있게 논지를 전개했다. ‘혹성탈출: 종의 전쟁’을 초창기 영화의 이미지에 빗대어 다룬 ‘0과 1이 된 링컨과 릴리안 기쉬’는 응모자의 전문성이 엿보이는 글이다. 서사가 거의 없는 독립영화 ‘더 테이블’을 짐작의 사유로 분석한 ‘언어보다 강한 침묵’은 그만큼 분석력이 돋보였다.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중심으로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예술을 사유하는 법’은 문제의식은 좋았지만 다소 산만한 게 흠이었다. 그리고 남한산성을 시간의 관점에서 분석한 ‘불가능의 미메시스: 무수한 지금들의 투사-황동혁의 ‘남한산성’이 시간을 은유하는 방식’까지 이들 5편은 일정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최종적으로 ‘불가능의 미메시스: 무수한 지금들의 투사’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남한산성’을 오늘날 정치적 상황 및 현실에 빗대어 분석하는 글들은 많이 있었지만, 시간을 화두로 삼아 극한 상황 속 삶과 죽음의 문제를 치밀한 논리로 풀어가고 있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게다가 매우 안정적인 문장으로 글을 전개하고 있어 평론가로 손색이 없다고 본다. 김시무 영화평론가}

복도 - 변선우 나는 기나긴 몸짓이다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고 그렇담 액체인걸까 어딘가로 흐르고 있고 흐른다는 건 결국인 걸까 힘을 다해 펼쳐져 있다 그렇담 일기인 걸까 저 두 발은 두 눈을 써내려가는 걸까 드러낼 자신이 없고 드러낼 문장이 없다 나는 손이 있었다면 총을 쏘아보았을 것이다 꽝! 하는 소리와 살아나는 사람들, 나는 기뻐할 수 있을까 그렇담 사람인 걸까 질투는 씹어 삼키는 걸까 살아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까 고래가 나를 건너간다 고래의 두 발은 내 아래에서 자유롭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래의 이야기는 시작도 안했으며 채식을 시작한 고래가 있다 저 끝에 과수원이 있다 고래는 풀밭에 매달려 나를 읽어내린다 나의 미래는 거기에 적혀있을까 나의 몸이 다시 시작되고 잘려지고 이어지는데 과일들은 입을 지우지 않는다 고래의 고향이 싱싱해지는 신호인 걸까 멀어지는 장면에서 검정이 튀어 오른다 내가 저걸 건너간다면… 복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무수한 과일이 열리고 있다 그 안에 무수한 손잡이 ● 당선소감 시 - 변선우 씨잠들기 전 다시, 시를 쓰러 떠나겠습니다나를 잡아먹는, 한없이 살아있는 밤 속으로어둡고 축축한 시간을 지나오다 당선 소식을 들은 건, 서점 화장실이었습니다. 그만, 맨바닥에 널브러졌습니다. 오래 달린 사람처럼 다리가 무거웠습니다. 영혼을 거울 속에 박제해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거기에 두고 왔을까’ 질문을 업고 방에 들어왔는데, 책상에 엎질러진 진통제 상자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 모서리들이 나를 지나다니는 것 같은 기분. 자꾸만 아팠습니다. ‘더 쓸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진통제를 깨물어 먹으며 빈 몸으로 책상에 앉았습니다. 이게 내 전부인 것처럼. 내 몸을 횡단하는 무수한 알약과 슬픔을 사랑할 각오를 했습니다. 아, 책 몇 권과 영혼을 데리러 어느 날 서점에 가볼 작정입니다. 부족한 시를 선택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제 시의 전부인 김완하 선생님, 제 앎의 전부인 조해옥 선생님 고맙습니다. 수없이 깨지고 무너져도 시 속에서 버틸 수 있던 건 손미 선생님 덕분이었어요. 제 롤모델인 박송이 선생님, 감사합니다. 우리 소고기 공동체, 응원해 준 연구실 식구들, 고마워요. 나의 친구들, 덕분에 웃을 수 있었어. 대학원 원우님들, 끝까지 함께 가요. 나의 전부인 김종중 집사님, 변진순 집사님. 첫 독자, 선미 누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며 잠들기 전 다시, 시를 쓰러 떠나겠습니다. 알약이 내리는 책상 앞으로. 나를 잡아먹는, 한없이 살아있는 밤 속으로.△1993년 대전 출생 △한남대 문예창작학과, 동대학원 석사 재학 ● 심사평 시다층적 은유에 의한 소재의 확장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 보여줘 본심에 올라온 23명의 작품들은 대체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도를 보였다. ‘저격수’ 외 5편은 시적 발상에 있어 독특함과 힘을 보여줬지만 상식적 진술과 지나치게 평이한 문장들이 종종 눈에 띄어 아쉬웠다. ‘저격수’ 이외 작품들이 수준의 편차를 지닌 것도 최종 결정을 유보하게 만들었다. 이는 시적 묘사의 힘을 보여주는 ‘골목의 흉터’와 같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에서 문장의 탄성이 떨어지고 이 작품 이외의 작품들에서 이를 만회할 만한 신뢰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오렌지 저장소’ 외 5편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유가 참신하고 소재를 시적으로 묘사하는 역량 역시 돋보였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더불어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더러 지나치게 설명적인 문장들이 눈에 띄었기에 조금만 덜 친절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런 점들을 세세히 검토하며 변선우 씨의 ‘복도’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우선 응모한 작품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적 역량에 대한 신뢰감을 주었다. ‘복도’는 소재를 다층적 은유에 의해 능란하게 확장함으로써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를 보여줬다. 시가 감상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과장으로 치닫거나 지적 퍼즐로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현상이 빈번하게 목도되는 이즈음에 소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힘과 다층적 사유를 전개하는 역량을 지닌 신인에게 출발의 즐거움과 불쾌하지 않은 부담감을 함께 안겨주는 것이 제법 그럴듯한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변선우 씨에게 축하의 악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조강석 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지갑을 탈탈 털어보니 3600원. 새로 나온 다섯 가지 맛 아이스크림을 다 사기엔 부족한 돈이다. 하지만 뭐라도 시도해 봐야 하니까 일단 편의점으로 향했다. 우리 동네엔 편의점이 세 군데다. 아직 나를 후원해주는 곳은 없지만 곧 연락이 올 것이다. 그러면 제일 멋진 조건을 거는 가게와 친구 맺기를 할 거다. 매일 공짜 아이스크림 두 개. 친구를 데리고 갈 거니까. 거기다 신제품이 나오면 몽땅 시식하고, 화이트데이나 빼빼로데이같이 특별한 날에는 기프티콘을 팡팡 날려줘야 하고……. 이런 생각을 하니 몸이 붕붕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어느새 드림 25시 편의점 앞.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를 와락 반겨 주었다. 예닐곱 명의 손님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와! 쟤 유튜브에서 봤어. 사인이라도 받을까.’ 이런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아 머리랑 옷을 한 번 더 매만지고 당당하게 아이스크림 코너로 걸어갔다. 신제품은 역시 비쌌다. 내 돈으로는 두 개도 살 수가 없었다.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에 있는 식빵이랑 블루베리 잼을 이용해 새로운 맛을 만들 궁리를 해보았다. 그때 누가 어깨를 툭 쳤다. ‘드디어’라고 생각하며 모델 같은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야, 박준. 오랜만이다. 나 해리.” 꽃무늬 원피스에 밀짚모자를 쓴 까무잡잡한 아이, 3년간 나랑 짝꿍을 했던 해리였다. “아, 안녕. 너 하와이 갔었잖아.” “여기서 중학교 다니려고 다시 왔어.” “그래? 난 네가 참 부러웠는데.” “아이스크림 골랐니? 내가 사줄게. 짝꿍의 귀국 선물이라 생각해줘.” 안 그래도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사 가서 맛이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해리가 사준다니 속으로 콧노래가 나왔다. “야, 너 그동안 한국에서 어떻게 지냈니? 얘기 좀 해줘.” “난 하와이 얘기가 더 궁금한데.” 우린 편의점 앞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야금야금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너 뭐 재미있는 일 없니? 학원 레벨이나 수학 진도 얘기는 하도 들어 이젠 질려. 어쩜 한국 아이들은 다 똑같아? 내가 이러려고 한국 온 건 아닌데. 넌 원래 좀 특이했잖아?” “그렇지. 내가 좀 반짝하지? 난 요즘 키즈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느라 정신없다.” “우아. 멋지다. 역시 너다워. 그런데 그게 뭐야? 아직 이곳에 적응이 덜 돼서. 스마트폰도 담달에 아빠가 사주기로 하셨거든.” “유튜브는 알지? 세계 최대 동영상 공유 사이트 말이야. 거기다 내가 만든 영상을 올리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구독할 수도 있고, 댓글도 달 수 있어. 1인 방송이지.” “그럼 혼자 PD와 앵커, 카메라맨 같은 걸 다 한다고? 힘들지 않아?”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아. 아이디어만 있으면 영상 만드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아. 또 댓글 달리는 걸 보면 힘이 나. 나중에 어른이 되면 전 세계 사람들을 위해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 “해외 다녀온 건 난데, 네가 더 글로벌하다. 그럼 여기도 촬영 때문에 온 거야?” 촬영?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기분이 폭신한 구름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응, 사실 요즘 구독자 수가 늘지 않아 걱정이야. 먹방이나 초딩 일상을 찍는 건 누구나 하는 거고, 주머니 사정도 팍팍해서 뭔가를 하려 해도 힘들어.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해.”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음, 그럼 이런 건 어때? 핼러윈 때처럼 귀신 코스프레를 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거야. 하와이에서 정말 재미있었거든.” 해리는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지만 난 너무 반가워 눈물이 솟아날 것만 같았다. “그래. 그거야. 무더위를 날려버릴 무섭고도 재미있는 것. 여긴 한국이니까 한국 귀신으로 해 봐야지. 정말 고마워.” 그렇게 나와 해리의 작전은 시작되었다. 드디어 D-데이. 저녁밥을 든든히 먹고, 의상과 스마트폰을 챙겨 나갔다. 캠코더와 화장품은 해리가 가져오기로 했다. 촬영을 할 때마다 두근거렸지만 오늘은 정말 심장이 팔딱대서 가슴에 손을 얹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치솟는 구독자 수와 감탄사 가득한 댓글들…….’ 생각만 해도 너무너무 행복했다. 아파트 벤치에서 해리가 내 얼굴에 화장을 해 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릴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꼭 연예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거울로 내 얼굴을 보니 정말 그럴싸했다. 짙고 검은 눈썹과 입술, 창백한 하얀 얼굴……. 내 등골이 다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해리가 장거리 촬영을 위해 캠코더를 맞추고 있는 동안 나는 재빨리 검은 도포를 입고 갓을 썼다. 나만큼 어린 저승사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바람처럼 스르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고등학생 누나 둘과 눈이 마주쳤다. “꺄!” 두 누나는 공포 영화 한 장면을 본 듯 기겁해서 바깥으로 도망쳐 버렸다. 대화 좀 하려고 했는데 저 누나들은 담력이 너무 약했다. 갓을 슬쩍 올리며 가게 안을 둘러봤다.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카운터 형이 눈에 들어왔다. 난 목에 힘을 주고 묵직한 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같이 가시지요.” “무슨 때? 난 매일 샤워해서 때는 없는데요.” 뭔가 계획과는 다르게 일이 진행되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 번 더 배에 힘을 주었다. “지금 당장 나와 함께 가야 하는데 혹 마지막 소원이 있나요? 내가 급이 좀 높은 사자라 청을 들어 줄 수도 있는데…….” “지금 소원은 사자 나으리와 함께 노는 것입니다.” 이런! 별 이상한 형을 다 보았나? ‘주니랑 TV’ 구독자 수가 곤두박질치는 게 훤히 보였다. 땀이 난 손으로 검은 도포 자락을 꽉 쥐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좀 더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서 대사를 준비해야 했는데, 이제 후회한들 어쩌란 말인가! 그때 누군가 거칠게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아니 누가 내 가게 손님을 내쫓았어? 너니? 참 요즘 초딩은 못 말린다니까. 공부만 해도 모자랄 시간에 이런 장난 할 정신이 어디 있어!” 편의점 주인 대머리 아저씨였다. 아까 누나 둘이 물건도 못 사고 도망간 걸 아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전 저승사자예요. 이 점원 대신 아저씰 데려갈 수도 있어요. 절 방해하지 마세요!”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나도 세게 나가야 했다. 물러서면 지는 거니까. “그래. 너 말 잘했다. 누가 누굴 방해했다는 거야. 너 영업방해죄로 고소당해 볼래? 아직 미성년자라고 봐줄 것 같아? 대신 너희 부모님이 배상을 하든지, 철창신세를 질 수도 있어.” 부모님! 배상! 철창! 그만 내 심장은 쪼그라들어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아저씨. 손님들을 놀라게 한 건 맞지만 쫓아낸 건 아니에요. 창밖을 보세요.” 점원 형의 말에 모두 창밖을 보았다. 아까 도망 나갔던 누나 둘이 핸드폰으로 열심히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아직 초등학생이니까 너그럽게 봐주세요. 물건 서리한 것도 아니고 힘겹게 의상까지 입고 와서 재밌는 퍼포먼스를 보여 주고 있잖아요.” 구세주 같은 형의 말에 나는 겨우 숨을 들이켤 수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카메라를 의식했는지 머리를 긁적거리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래. 하기야 요즘 아이들 놀 만한 게 없지. 아저씨가 생각이 짧았다.” “저승사자님, 이렇게 먼 길 왕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마지막 소원은 알바 시급이 올라 여친에게 멋진 선물을 사 주는 것입니다.” 훤칠한 키의 점원 형이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저승사자님, 제 마지막 소원은 가족 여행을 가보는 것입니다.” 아저씨도 제대로 해 볼 마음인지 소매를 둥둥 걷으며 말했다. “어디 보자. 흠. 좋은 방법이 있긴 한데.” 나는 턱 밑 수염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굴렸다. “저승사자 나으리, 그럼 얼른 알려 주셔야죠.” 아저씨는 잔뜩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천진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았다. “아저씨가 알바 형에게 가게를 맡기고 여행을 가는 거예요. 그럼 형은 시급이 오른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죠. 뭐 기분 좋으면 아저씨가 보너스를 줄 수도 있지요. 그럼 여친 누나에게 멋진 선물을 사줄 수 있을 거예요. 아저씨도 가족 여행 맘 편하게 다녀올 수 있잖아요.” 갑자기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라 주저 없이 말해 버렸다. 두 사람 다 표정이 환해졌다. “저승사자님! 고맙습니다. 그럼 제 목숨 한 달 더 연장해 주는 거지요?” “물론이지요. 제가 염라대왕 오른팔인걸요.” 내 말에 점원 형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이때다 싶어 나도 한 발짝 앞으로 나가며 해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자, 여기까지 ‘주니랑 TV’였습니다.” 촬영 종료 버튼을 누른 해리도, 밖에서 영상을 찍고 있던 누나 둘도 키득거리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야, 너희들 뭐니? 완전 대박인걸. 아깐 진짜 놀라서 뛰쳐나갔는데 뭔가 재미있는 일 같아서 다시 와서 동영상을 찍었지.” 긴 머리 누나가 가까이서 내 얼굴을 한 번 더 찍었다. “사실 제가 유튜브 키즈 크리에이터예요. ‘주니랑 TV’라고 검색하면 제 채널이 나와요. 오늘 영상도 올릴 거고요. 구독 부탁드립니다.” 불편한 갓을 벗고 한껏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내 애교가 통한다면 이 자리에서 구독자 넷은 확보한 거다. “그럼 우리 가게도 유명해지겠구나. 종종 우리 가게에서 깜짝쇼를 하렴. 물론 손님들을 내쫓거나 물건 부수지는 말고.” 아저씨가 캔 음료를 쟁반에 가득 담아 오셨다. “마지막 소원이라는 아이디어 아주 좋았어. 더 열심히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하잖아. 해결책도 아주 멋졌어. 그런데 아저씨, 정말 가족 여행 가실 건가요?” 점원 형이 음료수 캔을 시원스레 따며 물었다. “그래. 이번에는 꼭 가야겠다. 스크루지가 꿈에서 죽어 보고야 깨달았지만 난 오늘 네 덕에 진짜 중요한 걸 발견했다.” “어머, 참 재미있어요. 우리도 마지막 소원 생각해 봐야겠어요.” 안경 쓴 누나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너무 띄워주니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다. “사실 ‘주니랑 TV’ 구독자 수가 줄고 있어서 좀 무리를 했는데, 의외로 잘되었어요. 하지만 앞으로 어떡해야 할지 걱정이 돼요.” “왜 그렇게 구독자 수에 신경을 쓰니? 그냥 네가 좋아서 하는 거 아니었니? 너의 톡톡 튀는 모습만 보여 줘도 충분할 것 같아. 즐기다 보면 구독자 수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지.” 형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맞아요. 처음 키즈 크리에이터를 시작하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서 재미있게 해볼게요. 오늘 저승사자도 큰 선물을 받아 가네요. 고맙습니다.” 난 도포 자락을 모아서 넙죽 큰절을 올렸다. 그때 점원 형이 선반 뒤에 가려져 있던 캠코더 버튼에 손을 얹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네. 여기까지 BJ 김아담이었습니다.” ● 당선소감 - 유지영 씨작은 희망의 씨앗 선물하고파어느 날 문득 눈을 떠보니 제가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이야기를 만들고 있더군요. 마치 쓰기 중독인 것처럼…. 어렸을 적부터 네모난 것들을 참 좋아했지요. 동화책, 위인전, 백과사전, 신문…. 읽기 중독이었던 제가 두 아이를 키우며 소원대로 방 하나를 책으로 가득 채웠어요. 도서관에 책 빌리러 갈 때는 장바구니 카트기를 끌고 다녔고요. 아이들과 함께 그렇게 책을 읽어대며 저도 모르게 동화작가가 되고 싶었나 봅니다. 1년 전 대구 혜암아동문학회에서 처음으로 동화와 동시를 공부했습니다. 그때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무엇을 운명처럼 만났습니다. 가슴속에 눌려 있던 이야기들이 ‘펑’ 하고 터져 나오자 너무나 신이 났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이야깃거리가 되어 반짝였습니다. 도서관에서, 학교에서 봉사를 하며 만나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그 발랄함을 잃지 않도록 동화라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이 순간 너무 설레고 행복합니다. 아동문학의 길을 열어주신 최춘해 선생님, 정곡을 콕콕 짚어주시는 김영란 선생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합평해 준 혜암아동문학회원 모두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감사드리며 앞으로 좋은 동화로 보답하겠습니다.△1970년 대구 출생 △영남대 가정관리학과 ● 심사평 허를 찌르는 반전 돋보여전반적으로 전통적인 동화 형식인 생활동화나 의인동화가 응모작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그런 가운데 어느 때보다도 많은 작품이 휴머노이드 로봇(인간의 형태를 한 로봇), 스마트폰, 유튜브 등 변화된 테크놀로지 상황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완성도, 참신성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논의한 작품은 4편이었다. 부모의 불화를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을 그린 ‘도돌이표 심부름’은 따뜻한 시선으로 무거운 주제를 재치 있게 풀어나갔다. 다만, 느닷없는 해피엔딩 식의 마무리가 공감을 얻기에는 약했다. TV 출연을 미끼로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어른들에 대한 저항을 썰매타기로 그려낸 ‘완벽한 하루’는 언론의 기획성으로 의미를 확대해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유튜브를 통해 요즘 아이들의 열망을 그린 ‘편의점에 온 저승사자’는 잘 읽히는 문장과 구성, 허를 찌르는 반전이 돋보였다. ‘완벽한 하루’와 ‘편의점에 온 저승사자’를 놓고 거듭 논의한 끝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대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더 흥미롭게 이끌어낸 ‘편의점에 온 저승사자’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나머지 응모자들에게는 격려를 전한다. 송재찬 동화작가·김경연 아동문학평론가}

● 당선소감 - 김정현 씨늘 패배하지만 ‘언어’는 언제나 지속될 것 지금까지 나는 어두웠다. 한 인간으로서 혹은 일상을 견디던 나와는 또 다른 나에게, 세상은 무채색이었다. 그 균열은 타인에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나에게 텍스트는 스스로를 확인시켜 준 유일한 고유함이었다. 눈 오던 날 들려온 믿기 어려운 소식에 과거의 기억들이 꿈결처럼 밀려왔다. 한동안 접어둔 일기를 펴보니 ‘나에겐 생을 살아가기 위한 분노와 힘이 필요해’라는 구절이 손에 잡혔다. 나는 나약함을 견딜 수 없었고, 무릎 꿇고 싶지 않았다. 공부와 음악은 스스로를 지탱할 이유가 되었다. “우리의 말이 참이라면, 불행히도 결코 끝내 이해되지 못하리라는 것도 참이다”라던 니체처럼, 늘 패배하지만 ‘언어’는 언제나 지속될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아둔한 제자를 격려해주시는 신범순 조영복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같이 음악하는 팀원들과 오랜 친구인 성우가 기뻐해주었다. 문학을 공부한답시고 아등바등하는 자식을 걱정하시는 부모님, 특히 어머니께 조금이나마 면피한 느낌이다. 헤매던 글을 붙잡아주신 김영찬 신수정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여전히 내 글은 머물 곳 없이 떠돌고 있었을 것이다. 끝나지 않던 기나긴 터널에서 조금은 벗어난 느낌이다. 약간 운이 좋았을 뿐이란 마음으로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 단지 읽고 또한 쓰며, 오롯이 불행하여 사랑하기에. 나에게는 오직 ‘그것’뿐이니까.△1979년 대전 출생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 심사평활달한 문체-비평적 자의식 기억할 만해 전반적인 풍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경향의 작품이 등장하고 한국문학의 지형도를 새롭게 그리고자 하는 의욕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판단도 든다. ‘‘희재’가 이룬 것과 ‘김지영’이 묻는 것-‘외딴방’과 ‘82년생 김지영’이 그리고 있는 파국의 지도’와 ‘비규정적 장소 위에서 울리는 언어-배음(倍音)-김행숙, 안태운, 한인준의 경우’가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이전과 구분되는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징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를 통해 우리 문학이 나아갈 바를 모색하고자 하는 의욕이 돋보였다. 반면 다소 거친 범주화나 이론에 대한 기계적인 적용이 아쉬웠다. 최정화의 소설에 나타나는 ‘주인’과 ‘손님’의 관계를 통해 우리 시대의 신경증을 분석하고 있는 ‘집 없는 시대의 파라노이아, 손님의 건축술’은 독창적이고 미시적인 텍스트 분석력이 눈에 띄었으나 하나의 키워드를 일관되게 밀고나가는 응집된 논리력이 약했다. 결국 당선은 ‘너는 이제 ‘미지’의 즐거움일 것이다’에 돌아갔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황인찬의 시에 대한 매혹과 활달한 문체, 비평적 자의식은 기억할 만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때로 드러나는 공허한 수사와 감당할 수 없는 과장에 유의한다면 한국 비평계의 큰 자산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깝게 고배를 마신 응모자들에게는 아쉬움을,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신수정 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김영찬 계명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당선소감 - 김경원 씨제 글로 만든 영상이 따뜻한 감동 안겨줄 날 기대 짝사랑도 이런 짝사랑이 없습니다. 반하고 설레고 두들겨보다 낙심하고 그런데도 다시 보게 되는…. 그것은 저에게 늘 인색하기만 합니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나 봅니다. 세상 무엇보다 예뻐 보이고 너무 소중합니다. 보기 싫게 튀어나온 부분도 다듬고 다듬다 그것마저도 품게 됩니다. 그런데도 살가운 말 한 번 건네지 않습니다. 무심함에 지쳐 뻥 차버리려고 하니, 그 안에 지난날 나의 시간들이 빼곡히 담겨 그게 제가 돼버렸습니다. 글이라는 것이 말입니다. 마감에 쫓겨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순간에 당선 연락을 받았습니다. 캐릭터는 울고 있는데 ‘배시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 결국, 잠깐 글쓰기를 중단했네요. 정말 오랜만에 마음껏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영상으로 옮겨져야 하는 글이기에, 가야 할 길이 멀고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 안에 들어갈 많은 사람의 노력을 감안하면 책임감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그래도 제가 쓰는 글이 언젠가는 많은 이들을 웃게 하고, 따뜻한 감동을 안겨 줄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는 않겠습니다. 때로는 지지자로, 때로는 냉정한 관객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남편과 가족, 친구들,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께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계속해서 달려갈 힘을 주신 심사위원분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1975년 서울 출생 △성신여대 일어일문학과 ● 심사평소재-전개 신선하고 재치 만점… 완성도 높아 커플 매니저에서 이혼 플래너가 된 여성을 그린 ‘행복설계사무소’, 미제 사건을 15년 전 연쇄살인범의 소행으로 몰아가는 형사 앞에 진범이라 주장하는 남자가 나타나는 ‘철수삼촌’, 출산은 인생의 늪이라고 여기는 정치부 여기자가 쌍둥이를 낳고 베이비시터계의 신과 같은 이모님을 만나는 ‘육아의 신’을 놓고 고민했다. 졸혼, 휴혼 등 이혼 관련 단어들이 만들어지는 요즘, 아이러니한 설정의 인물을 내세워 행복과 사랑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행복설계사무소’를 망설임 없이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소재가 신선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다 재치 있고 완성도도 높았기 때문이다. ‘철수삼촌’은 초반 설정이 강렬했지만 진범의 비밀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다소 힘이 빠졌다. ‘육아의 신’은 정치권에 대한 묘사가 이야기를 진부하게 만들었다. 주인공이 쌍둥이를 낳고 육아의 신을 만나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코미디로 접근하면 좋을 듯하다. ‘프롬, 안드로메다’도 따뜻한 여운이 남지만 갈등이 약하고 작은 이야기였다.주필호 주피터필름 대표·이정향 영화감독}